고불(古佛) 맹사성(孟思誠): 시대의 조율자
용의 꿈과 파주의 자만
1. 개경의 핏줄, 온양의 은행나무
1360년 (고려 공민왕 9년), 고려 말기 전의시승(典儀寺丞, 고려의 관직)을 지냈던 맹사성(孟思誠, 1360~1438)은 개경(開京) 인근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대대로 문신 가문이었으며, 할아버지 맹유(孟裕)는 고려 말 고위 관리였고, 아버지 맹희도(孟希道) 역시 수문전제학(修文殿提學)을 역임한 학자였다.
맹사성의 인생에 가장 큰 그림자를 드리운 것은 그의 장인이 될 인물, 고려의 명장 최영(崔瑩) 장군이었다.
(전승) 어느 날, 최영 장군이 낮잠을 자던 중 용 한 마리가 집 앞 배나무를 타고 승천하는 꿈을 꾸었다.
놀라서 깨어 보니, 어린 맹사성이 그 배나무에 올라 배를 따고 있었다고 한다.
최영은 이 아이의 범상치 않음을 보고 꾸짖는 대신, 예의를 갖춰 잘못을 고하는 모습에 감탄하여 그를 자신의 손녀사위(孫婿)로 삼았다.
훗날 최영이 맹사성에게 물려준 집이 바로 충남 아산(牙山)에 있는 맹씨행단(孟氏杏壇) 이었다.
이 고택은 원래 최영 장군의 부친이 건축한 집이었다고 전해진다.
맹사성은 1386년 (우왕 12년) 문과(文科)에 장원급제하며, 춘추관검열(春秋館檢閱, 역사 기록 담당)로서 화려하게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논쟁)
스물아홉 젊은 나이에 파주 군수(坡州 郡守, 파주 지방관)로 부임했을 때, 그는 자신의 뛰어난 학식과 재능에 대한 자만심(自滿心)이 하늘을 찔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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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문정공 맹사성 표준영정 |
2. 넘쳐흐르는 찻잔
파주(坡州) 고을을 다스리던 맹 군수(맹사성)는 어느 날 고승(高僧)이 있다는 산사(山寺)를 찾아갔다.
그는 거만한 태도로 스님에게 물었다.
"스님이 생각하시기에, 고을을 잘 다스릴 수 있는 최고 덕목은 무엇이오?"
스님은 빙긋 웃으며 답했다.
"나쁜 일하지 않고, 좋은 일만 하면 됩니다."
맹사성은 코웃음을 쳤다.
"그건 삼척동자(三尺童子, 어린아이)도 아는 이치요. 고작 그것뿐이오?"
자리에서 박차고 일어나려는 맹사성에게 스님은 차나 한 잔 마시고 가라며 붙잡았다.
스님은 찻잔에 차를 따르기 시작했는데, 찻물이 가득 차 넘치고 방바닥을 적시는데도 계속 따르는 것이었다.
맹사성은 소리쳤다.
"스님! 찻물이 넘쳐흐릅니다!"
그제야 스님은 주전자를 내려놓고 맹사성을 응시하며 말했다.
“찻잔이 넘쳐 방바닥을 적시는 것은 알고, 어찌 지식이 넘쳐 인격을 망치는 것은 모르십니까?”
이 말에 부끄러움이 극에 달한 맹사성은 황급히 일어나 방을 나가려다가 그만 문설주에 머리를 세게 부딪쳤다.
스님이 다시 말했다.
“몸을 낮추면 머리를 부딪칠 일이 없지요.”
이 일화는 맹사성이 평생 자만심을 버리고 겸손한 청백리(淸白吏, 청렴한 관리) 의 길을 걷게 된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고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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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맹사성, 스님과의 일화 |
칼날 위에서 겸손을 배우다
3. 태종의 노여움과 죽음의 문턱
조선이 건국된 후, 맹사성은 이성계(李成桂, 조선 태조)의 정적이었던 최영(崔瑩) 장군의 손녀사위였음에도 불구하고, 그의 재능과 인품을 높이 산 태조(太祖)에 의해 중용된다.
이후 그는 태종(太宗) 시기에 사헌부대사헌(司憲府大司憲, 감찰 기관 수장) 등 요직을 역임했다.
그러나 1408년 (태종 8년), 그는 조대림 사건(趙大臨 事件) 이라는 최대의 정치적 위기를 맞는다.
맹사성은 태종의 사위인 평양군 조대림(趙大臨)이 역모에 연루되었다고 의심되는 사건을 취조하는 과정에서, 태종에게 보고도 없이 조대림을 고문했다.
이는 왕과 왕족을 능멸했다는 죄목으로 이어졌고, 태종의 노여움을 산 맹사성은 처형 직전까지 몰렸다.
죽음을 눈앞에 둔 그를 구명하기 위해 영의정 성석린(成石璘)과 황희(黃喜)를 비롯한 많은 신하들이 간청했다.
또한 맹사성에게 교육을 받은 적이 있던 양녕대군(讓寧大君)이 태종에게 사면을 청하기도 했다.
이들의 도움으로 맹사성은 겨우 목숨을 건졌고, 유배되었다가 얼마 지나지 않아 관직에 복귀하게 된다.
이 사건은 맹사성에게 권력의 냉혹함을 뼈저리게 깨닫게 해주었다.
그는 젊은 시절의 자만심을 완전히 꺾고, 이후 정국을 운영함에 있어 겸손과 신중함을 최우선 덕목으로 삼게 되었다.
황금기를 조율하는 재상
4. 세종의 오른팔, 황희와의 조화
세종(世宗) 즉위 후, 맹사성은 조선 왕조 최고의 명재상 중 한 명인 황희(黃喜) 와 함께 재상 정치의 '투톱 체제'를 구축하게 된다.
황희는 강직하고 단호한 성품으로 인사, 행정, 군사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를 주도한 반면, 맹사성은 온화하고 부드러우며 섬세한 성품으로, 예악(禮樂) 정비나 제도 정비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와 강직한 대신들 사이의 중재자 역할을 맡았다.
그의 역할은 세종대(世宗代)의 문화적 황금기(文化적 黃金期)를 여는 데 결정적이었다.
조선이 유교 국가의 기틀을 다지는 과정에서, 맹사성은 유교적 예의와 음악을 뜻하는 예악 정비에 큰 공헌을 했다.
특히 그는 음률(音律, 음악) 에 조예가 깊었는데, 평소 집에서 퉁소(피리)를 즐겨 불어 사람들이 그의 집에 있다는 것을 퉁소 소리를 듣고 알았다고 하는 야사가 전해질 정도였다.
세종은 박연(朴堧, 조선 초기 음악가)에게 중국 전통 음악인 아악(雅樂)을 대성하게 하는 한편, 맹사성에게는 우리 고유의 음악인 향악(鄕樂) 을 정리하도록 했다.
맹사성은 궁중 예악(禮樂)에서 아악만을 사용하는 것에 반대하는 세종의 뜻을 받들어, 아악을 먼저 사용하고 향악을 겸하여 연주하는 '아악·향악 겸용론' 을 제시하여 이를 제도화했다.
(전승) 맹사성의 집안 유물 중에는 그가 직접 제작하고 즐겨 불렀다는 옥적(玉笛, 옥으로 만든 피리) 이 포함되어 있는데, 이는 그의 음악적 공헌을 실증적으로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로 평가받는다.
5. 균형의 재상, 북방의 기획자
맹사성은 정치적 균형자(均衡者)였을 뿐만 아니라, 국방 정책에서도 중요한 역할을 했다.
1433년 (세종 15년), 세종이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女眞族)에 대한 파저강 정벌(婆猪江 征伐) 을 추진했을 때, 좌의정(左議政)이었던 맹사성은 영의정 황희와 우의정 권진(權軫)과는 달리, 세종의 정벌 계획을 적극적으로 지지했다.
정벌 시기, 군사 규모, 정벌군 조직 등 구체적인 작전은 대부분 맹사성의 의견에 따른 것이었다.
이 작전은 대승(大勝)으로 끝났으며, 이후 맹사성은 모든 공을 최윤덕(崔潤德, 정벌군 지휘관)에게 돌리며 그를 좌의정으로 승진시킬 것을 건의할 정도로 겸양의 미덕을 보였다.
세종은 이 청을 받아들여 최윤덕을 우의정(右議政)으로 승진시켰다.
맹사성은 또한 『태종실록(太宗實錄)』 편찬 작업에 황희와 함께 참여하여 감수했으며, 세종이 실록을 직접 보려 하자, 후대 왕들이 이를 본받아 역사를 왜곡할 수 있다며 단호하게 반대하여 세종이 뜻을 철회하게 만들었다.
이처럼 그는 유연함과 강직함을 때에 따라 적절히 발휘하여 세종 치세의 기틀을 공고히 다졌다.
소 등에 실린 청렴의 유산
6. 황소를 타는 좌의정
1435년 (세종 17년), 76세의 노재상(老宰相) 맹사성은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났다(致仕, 치사).
하지만 세종은 나라에 중요한 일이 생길 때마다 그를 불러 자문을 구했다.
맹사성은 높은 지위에 있었음에도 평생 소탈하고 검소한 삶을 살았으며, 식량은 늘 나라에서 봉급으로 주는 녹미(祿米, 쌀) 로만 해결했다.
그는 관료들이 타는 가마(駕轎) 대신, 바깥출입 시 소를 타는 것을 즐겨 다녔는데, 그 옷차림이 워낙 수수했기 때문에 사람들이 그를 정승인 줄 알아보지 못하는 일이 잦았다.
어느 날, 맹사성이 고향인 온양(溫陽)에 내려간다는 소식에, 경기도 양성(陽城)과 진위(振威)의 현감(縣監, 지방 관리)들이 그가 지나갈 길을 정비하고 호화롭게 맞이할 준비를 하며 기다리고 있었다.
그때 허름한 옷을 입고 소를 탄 노인이 길을 지나갔다.
현감들은 이 노인을 정승이 올 길을 막는다고 꾸짖으려 하인들을 시켜 잡아오게 했다.
노인은 "온양 사는 맹꼬불이(고불(古佛)의 별명을 비틀어 등이 꼬부라졌다는 뜻으로 희화화 한 별칭)가 제 소 타고 제 갈 길 가는데 어찌 바쁜 사람을 붙잡는가?"라고 허허 웃으며 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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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소를 탄 맹꼬불이 |
노인이 맹사성 좌의정임을 뒤늦게 알아챈 현감들은 큰 실수에 당황하여 황급히 사죄하러 달려가다가, 그만 관직의 권위를 상징하는 공인(公印, 도장)을 연못에 빠뜨려 버렸다.
이 연못은 훗날 인침연(印沈淵, 도장 빠진 연못) 이라고 불리게 되었다.
이 일화는 맹사성의 도덕적 권위가 당시 권위적인 관료 사회에 강력한 겸손의 교훈을 남겼음을 보여준다.
7. 강호사시가와 영원한 안빈낙도
맹사성이 말년에 고향에 머물면서 지은 시조(時調) 「강호사시가(江湖四時歌)」 는 한국 문학사 최초의 연시조(連時調)로 평가된다.
이 작품은 봄, 여름, 가을, 겨울 사계절 동안 강호(江湖, 자연)에서 느끼는 흥취와 소박한 삶의 태도를 노래한다.
'강호에 봄이 드니 미친 흥이 절로 난다 / 탕뇨(濁酒, 막걸리) 시냇가에 금린어(錦鱗魚, 비단결 물고기)가 안주로다 / 이 몸이 한가해옴도 역군은이셨다(亦君恩이셨다, 또한 임금의 은혜로다)'
이 시조는 자연 속에서 만족하며 사는 안분지족(安分知足) 의 삶을 노래하지만, 매 계절의 마지막 구절에서는 항상 "역군은이셨다"로 끝을 맺으며 임금에 대한 충의(忠義) 사상을 잊지 않는 유학자(儒學者)로서의 이상적인 모습을 담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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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호사시가 |
맹사성의 삶 자체가 출사(出仕, 벼슬길) 와 은일(隱逸, 은거) 이라는 사대부의 근본적인 모순을 조화시킨, 완성된 경지였던 것이다.
1438년 (세종 20년) 10월, 맹사성(맹사성)은 79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났다.
세종대왕은 그의 죽음을 크게 슬퍼하여 문무백관(文武百官)을 거느리고 문상했으며, 그에게 문정(文貞) 이라는 시호(諡號)를 내렸다.
'문(文)'은 충신함과 예로써 사람을 대했다는 뜻이며, '정(貞)'은 청백하게 절조를 잘 지켰다는 뜻으로, 그의 청렴하고 조화로운 삶에 대한 국가의 공식적인 인정을 의미했다.
행단의 오늘
맹사성이 살았던 아산의 맹씨행단(孟氏杏壇) (사적 제109호) 마당에는 그가 직접 심었다고 전해지는 수령 600년이 넘는 거대한 은행나무 두 그루(쌍행수)가 현재까지도 서 있으며, 이 집은 우리나라에 남아있는 가장 오래된 민가(民家) 중 하나로서, 청백리 재상의 검소하고도 기품 있는 삶의 흔적을 고스란히 간직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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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적 아산 맹씨행단 |
이 글은 『태종실록』·『세종실록』 등 공식 기록과 후대 야담, 지방 설화를 바탕으로 맹사성의 생애를 이야기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연대·관직·사건의 큰 흐름은 사료에 따라 정리했지만, 꿈 이야기·소를 타는 일화 등 일부 장면은 (전승)에 가까운 내용을 적절히 각색했습니다.
따라서 학술 논문이 아니라, 사료를 기반으로 한 “이야기형 교양 글”로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This essay follows Maeng Sa-seong (1360–1438), a late-Goryeo scholar who becomes a key statesman in early Joseon.
Born into a literary family and married to General Choe Yeong’s granddaughter, he sheds youthful arrogance after a monk’s parable about an overflowing teacup.
Surviving a deadly political crisis under King Taejong, he later serves King Sejong as a moderating prime minister, helping shape ritual, court music and northern defense policy.
In old age he retires to Asan, riding an ox, writing the “Song of the Four Seasons” and leaving a lasting image of Confucian humility and balanced public servi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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