세종대왕, 문자와 국가를 설계하다: 집현전·장영실·훈민정음 (King Sejong the Great)


한성부(漢城府, 조선의 수도, 현 서울)의 궁궐은 언제나 피비린내와 냉기로 가득했다.

1397년(태조 6년), 이곳 준수방(俊秀坊, 현 서울 종로구 통인동 일대)에 위치한 태종 이방원(李芳遠, 조선의 3대 왕, 강력한 철혈 군주)의 사저에서 셋째 아들 이도(李祹)가 태어났다.

그는 어려서부터 병약했으나, 

책을 손에서 놓지 않는 지독한 독서광이었다. (안질·종기·소갈 등 병환 기사 다수)


부왕 태종은 이미 두 번의 ‘왕자의 난’을 거치며 수많은 피를 보았고, 

왕권 강화를 위해서는 그 무엇도 용납하지 않았다.


"태종 이방원 어진 | Portrait of King Taejong of Joseon"
CC0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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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장 큰 희생양은 이도의 외가인 여흥 민씨 가문이었다.

어머니 원경왕후 민씨(元敬王后, 태종의 정비)의 오라버니들(민무구, 민무질 등)이 역모로 몰려 처형당하는 비극이 벌어졌다. (1416~1417, 민무구·민무질·민무회·민무휼 숙청 정설)

어린 이도는 어머니가 밤마다 소리 죽여 우는 모습을 보며 권력의 잔인함과 허무함을 동시에 깨달았다.

이 사건으로 부모 사이의 금슬은 완전히 깨졌고, 

궁궐은 냉랭한 기운만 감돌았다. (부부갈등 관련 실록 기사 산견)

이도는 살아남기 위해, 그리고 이 참혹한 현실을 잊기 위해 더욱 책 속으로 파고들었다. 


원래의 세자는 이도의 형인 양녕대군 이제(李禔, 태종의 장남)였다.

그러나 양녕은 왕세자의 엄격한 규율을 견디지 못했다.

학문보다는 사냥과 주색을 즐겼고, 곽선(郭旋)의 첩 '어리'를 탐하는 등 기행을 일삼았다. (실록·야사 혼재, 민심 이반 기록 존재)

태종은 장남에게 한없이 물렀으나, 왕조의 안정을 위해서는 결단을 내려야 했다.

이도는 형의 행동을 보며 불안에 떨었다.

그는 세자 자리를 원치 않았으나, 부왕의 시선이 자신에게 고정되고 있음을 직감했다.

이도는 더욱 병을 핑계로 몸을 사렸지만, 태종의 눈에 비친 충녕대군(이도)은 형과는 달리 학문이 깊고 사려 깊은 대안이었다. (학행·효행 기사 다수)

결국 1418년(태종 18년), 양녕대군은 폐세자 되었고, 그해 6월 충녕대군 이도가 왕세자로 책봉되었다.

불과 몇 달 후, 태종은 전격적으로 양위(讓位, 왕위를 물려줌)를 선언했다.

스물두 살의 이도는 준비되지 않은 채 조선의 4대 왕(세종)이 되었다.

그는 기쁨보다는 두려움과 막중한 책임감을 느꼈다. (즉위 교서·경연 기록으로 확인)


세종대왕 표준영정
한국학중앙연구원

세종으로 즉위했으나, 실권은 여전히 상왕(上王)으로 물러앉은 태종에게 있었다.

태종은 군권을 장악하고 주요 인사와 정책에 깊이 관여하며 신왕(新王)을 시험했다.

세종은 즉위 초 3년여간 상왕의 그늘에 가려 허수아비나 다름없었다. 

(1418~1422 전후, 병조·병마 통제권 상왕 유지)

모든 상소문은 상왕에게 먼저 올라갔고, 세종은 결재된 문서를 받아볼 뿐이었다.

가장 고통스러웠던 사건은 즉위 직후 벌어졌다.

세종의 장인이자 소헌왕후(昭憲王后, 세종의 왕비)의 아버지인 심온(沈溫)이 역모로 몰려 사사당한 것이다. 

심온은 명나라 사신으로 갔다가 돌아오는 길에 체포되어 모진 고문 끝에 죽임을 당했다.

이는 태종이 자신의 사돈(민씨 가문)을 숙청했던 것처럼, 

새로운 외척의 등장을 사전에 차단하려는 냉혹한 정치적 계산이었다. 

세종은 장인의 억울함을 알았지만, 부왕의 뜻을 거스를 힘이 없었다.

그는 아내 소헌왕후의 통곡을 들으며 무력감에 치를 떨었다.

소헌왕후는 폐비(廢妃)될 위기에 처했으나, 세종은 그녀를 굳건히 지켰다.

이 사건은 세종에게 씻을 수 없는 상처를 남겼고, 

그는 훗날 그 누구에게도 정권을 위임하지 않고 스스로 모든 국정을 책임지는 

고독한 군주가 되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다. (친정 강화의 심리·정치적 배경으로 해석)


드라마속 소헌왕후
세종신문

상왕 태종이 승하한 1422년(세종 4년), 세종은 비로소 자신만의 조선을 만들기 시작했다. (승하 1422.05)

그의 첫 번째 과업은 인재 양성과 학문 진흥이었다.

세종은 경복궁(景福宮, 조선의 정궁) 안에 집현전(集賢殿, 학술 연구 및 정책 자문 기관)을 확대 설치했다. 

그는 신분이나 가문보다는 능력을 중시하여 젊고 총명한 학자들을 대거 등용했다.

이곳에는 정인지(鄭麟趾, 『훈민정음 해례』 서문), 최항(崔恒), 신숙주(申叔舟, 언어·외교), 성삼문(成三問, 강직한 문신) 등 훗날 조선의 기틀을 다질 인재들이 모여들었다.

세종은 이들에게 특별 휴가(사가독서, 賜暇讀書)를 주어 오직 학문에만 전념하게 했다.

세종은 매일 밤 늦게까지 경연(經筵, 왕과 신하가 유교 경전을 토론하고 국정을 논하는 자리)을 열었다.

그는 질문하고 토론하며 정책의 허점을 파고들었다.

학자들은 때로 왕의 뜻에 반대하며 격렬하게 논쟁했고, 세종은 이를 즐겼다.

그는 완벽한 성리학적 이상 정치를 꿈꿨으며, 

집현전은 그 꿈을 실현하기 위한 두뇌 집단이었다. (경연 실록 기사 빈번)


"경복궁 수정전(집현전 기능) | Sujeongjeon Hall, used as Hall of Worthies"
CC BY-S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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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의 치세는 철저히 실용주의에 입각해 있었다.

"백성이 먹고사는 것이 가장 중요하다"는 신념 아래, 그는 천문, 지리, 농업 기술 발전에 매진했다.

이때 세종의 눈에 띈 인물이 바로 동래현(東萊縣, 현 부산) 출신의 관노(官奴, 국가 소유 노비) 

장영실(蔣英實)이었다.


"장영실 조각상 | Statue of Jang Yeong-sil"
CC BY-SA (Wikimedia Commons/Himasara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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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장영실의 뛰어난 기술력을 알아보고 그를 면천(免賤, 노비 신분에서 풀어줌)시켜 정5품 상의원 별좌(尙衣院別坐)에 임명했다. (면천·승진 기록 존재)

이는 보수적인 대신들의 거센 반발을 샀지만, 세종은 "재주는 신분의 귀천에 관계없다"며 그를 감쌌다.

장영실과 함께 세종은 위대한 발명품들을 만들어냈다.

자동으로 시간을 알려주는 자격루(自擊漏), 해 그림자로 시간을 측정하는 앙부일구(仰釜日晷)를 제작하여 한성부 종루(鐘樓)에 설치했다. (1434년경 설치 통설)

또한, 농업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세계 최초의 우량계인 

측우기(測雨器)를 발명하고 전국에 보급했다. (1441 시행·보급 통설)


"측우기 원통형 우량계 | Cheugugi rain gauge"
CC BY-SA (Wikimedia Commons/Gyeongmin Ko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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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은 각 지방의 농사 경험을 집대성한 농서인 《농사직설》(農事直說)을 편찬하여 백성들에게 배포했다. (1429 반포 통설)


"농사직설 초상(표지) | Nongsa Jikseol cover"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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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모든 업적은 세종의 애민 정신과 실용주의가 낳은 결실이었다.

그러나 1442년(세종 24년), 

장영실이 제작한 왕의 어가(御駕, 임금이 타는 수레)가 부서지는 사건이 발생했다. 

세종은 이를 빌미로 장영실을 곤장 100대에 처하고 파직시켰다.

많은 역사학자는 이 사건이 보수파 대신들의 압력에 의한 것이거나,

 훈민정음 창제를 앞두고 걸림돌이 될 만한 천민 출신 인재를 일부러 내친 

세종의 정치적 판단이었을 것으로 추측한다. (동기 해석 논쟁)

이는 성군 세종의 냉정한 면모를 보여주는 일화이다.


세종은 치세에서는 성군이었지만, 가정사에서는 불행했다.

특히 세자(훗날 문종)의 연이은 폐빈(廢妃, 왕세자빈이 폐위됨) 사건은 

완벽함을 추구했던 세종에게 큰 상처를 주었다.

세자의 첫 부인인 휘빈 김씨는 세자의 사랑을 받지 못하자 

궁중의 저주와 미신에 손을 댔다가 발각되어 폐출되었다. (야사·설화 성격, 실록 대조 필요)

두 번째 부인 순빈 봉씨는 술을 즐기고 궁중 법도를 무시했으며, 

심지어 궁녀 소쌍(小雙)과의 동성애 스캔들까지 일으켜 세종을 경악하게 했다. 

(야사·논쟁, 공식기록 신중 해석)

세종은 이 사건들을 접하고 "종묘사직(宗廟社稷)의 근본이 흔들린다"며 격노했다.

이 일화들은 세종이 매우 엄격하고 가부장적인 군주였음을 보여준다.

그는 사적인 영역에서도 유교적 법도에 어긋남이 없기를 바랐으며, 자녀들에게도 완벽함을 요구했다.

세종은 소헌왕후와의 사이에서 8남 2녀를 두었고, 후궁들에게서도 많은 자녀를 얻었다.

이는 그의 정력적인 면모를 보여주지만, 동시에 왕실 내의 복잡한 인간관계와 갈등의 씨앗이 되었다.

세종은 말년까지 자식들의 일탈과 병약한 세자로 인해 깊은 시름에 잠겼다.

 (문종의 건강 문제, 단종 어린 군주로 이어짐)


세종은 유교적 소양을 갖춘 문약한 군주라는 선입견을 깨고 강력한 국방 정책을 펼쳤다.

그의 치세는 대외적으로 안정기였으나, 북쪽 국경의 여진족(女眞族, 만주 일대의 유목 민족)과 

남쪽 해안의 왜구(倭寇, 일본 해적)는 끊임없이 조선의 안보를 위협했다.

세종은 즉위 직후인 1419년(세종 1년), 부왕 태종의 뜻을 이어받아 

이종무(李從茂, 무신) 장군에게 명하여 왜구의 근거지인 대마도(對馬島, 일본 쓰시마섬)를 정벌했다.

 (기해동정, 강화로 귀결)

이는 조선의 강력한 국방 의지를 대내외에 과시하는 사건이었다.

진정한 전략적 승부는 북방에서 이루어졌다.

세종은 압록강(鴨綠江)과 두만강(豆滿江) 유역을 조선의 실질적인 영토로 편입시키고자 했다.

그는 최윤덕(崔潤德)을 보내 압록강 중류 일대에 4군(四郡, 여연·자성·무창·우예)을 설치했고, 

김종서(金宗瑞, 문무를 겸비한 재상)에게 명하여 두만강 하류 지역에 6진(六鎭, 온성·종성·경원·경흥·회령·부령)을 개척하게 했다.

 (4군 1433 전후, 6진 1434~1449 단계적 정비)


이 과정은 순탄치 않았다.

험준한 산악 지대와 혹독한 추위로 인해 새로 개척한 지역은 버려지기 일쑤였다.

세종은 남쪽 지방의 백성들을 북방으로 강제로 이주시키는 사민정책(徙民政策)을 실시했다.

이는 백성들에게 엄청난 고통을 주었으며, 

이로 인한 원성과 반발이 끊이지 않았다. (사민·개척민 지원 병행—세제감면·병력배치)

성리학적 애민을 추구하던 세종이었지만, 영토 확장이자 국가 생존을 위한 냉정한 결단이었다.

그는 이주민들의 정착을 돕기 위해 《농사직설》 보급과 세금 감면 등 지원을 아끼지 않았으며, 

4군 6진의 개척으로 조선은 비로소 현재의 한반도 영역을 확보하게 되었다. (현 경계의 기초 형성)


세종 치세의 가장 위대한 업적인 훈민정음(訓民正音, 한글) 창제는 

철저히 비밀리에 진행된 '군주의 프로젝트'였다.

세종은 백성들이 복잡한 한자(漢字)를 몰라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고 

무지몽매하게 살아가는 현실을 개탄했다.

1443년(세종 25년), 세종은 몇몇 신뢰하는 집현전 학자들(정인지, 최항, 성삼문 등)과 함께 

은밀히 새 문자 연구에 착수했다. (창제 1443·반포 1446 통설)


"사육신 묘역 | Tombs of the Six Martyred Minister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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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는 자신의 지병인 안질(眼疾, 눈병)과 당뇨병(소갈병, 消渴病)으로 고통받으면서도 밤샘 연구를 거듭했다. 

잦은 병치레로 인해 고기가 아니면 수라(임금의 식사)를 들지 못할 정도로 병약했지만, 

백성을 위한 문자 창제라는 집념이 그를 지탱했다. (육류 위주 식이 언급 산견)

이 과정에서 세종이 불교에 심취하여 

승려 신미대사(信眉大師, 당대 고승)의 도움을 받았다는 야사가 전해지기도 했다. (논쟁: 사료 근거 약함)

유교를 국시로 삼던 조선에서 이는 엄청난 논란거리였으나, 

세종은 목적을 위해 수단과 방법을 가리지 않는 면모를 보였다. 


훈민정음 창제 소식이 알려지자, 조선의 유학자들은 들끓었다.

집현전 부제학(副提學) 최만리(崔萬理) 등은 상소문을 올려 "이는 오랑캐의 글(언문, 諺文)이며, 중국의 문명(중화)을 버리고 스스로 오랑캐가 되는 행위"라며 맹렬히 비난했다. (반대 상소 실록 기록)

세종은 이들의 반발에 정면으로 맞섰다.

그는 최만리 등을 의금부(義禁府, 국사범을 다루는 관청)에 가두는 강수를 두었다.

 (단기 구금·파직 등 문책 기록)


성군으로 알려진 세종의 생애에서 이처럼 강력하고 독단적인 모습은 흔치 않았다.

이는 그가 훈민정음 창제에 얼마나 절박하고 확고한 신념을 가지고 있었는지를 보여준다.


1446년(세종 28년), 마침내 스물여덟 자의 새로운 문자, 《훈민정음》이 세상에 반포되었다.

서문에 쓰인 "나랏말싸미 듕귁에 달아..."는 백성을 향한 세종의 마음을 대변했다.

세종은 문자의 제자 원리(만든 원리)와 사용법을 설명한 

《훈민정음 해례본》(解例本)을 비밀리에 제작하여 후세에 남겼다.

이는 훗날 한글의 과학성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자료가 되었다.

훈민정음의 반포는 단순한 문자 창제를 넘어, 

조선의 자주성과 문화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역사적 대사건이었다. 


"훈민정음 해례본 복제본 | Replica of Hunminjeongeum Haerye"
CC BY-S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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위대한 업적을 뒤로하고 세종의 말년은 병마와의 처절한 싸움이었다.

과로와 스트레스, 잘못된 식습관으로 그의 몸은 만신창이가 되었다.

시력을 거의 잃었고, 온몸에 종기가 났으며, 만성적인 당뇨 합병증에 시달렸다.

세종은 국정 운영이 어려워지자 1442년부터 세자(훗날 문종)에게 

대리청정(代理聽政, 왕을 대신하여 정치)을 맡겼다. 

그러나 병약한 세자와 어린 손자 단종(端宗)의 미래를 걱정하며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1450년(세종 32년) 2월, 세종은 53세의 나이로 영응대군(永膺大君, 세종의 8남)의 집에서 승하했다.

 (1450.2.17 음)

그의 유해는 경기도 여주(驪州)의 영릉(英陵)에 안장되었다.


"세종대왕 영릉 원경 | Yeongneung (Tomb of King Sejong), wide view"
CC BY-SA 4.0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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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종 승하 직후, 조선은 그가 그토록 걱정하던 대로 혼란에 빠졌다(계유정난). (1453, 수양대군 정변)

세조(世祖, 세종의 둘째 아들, 수양대군)가 어린 조카 단종을 폐위하고 왕위를 찬탈하는 과정에서, 

세종이 아꼈던 집현전 학자들(성삼문 등 사육신)이 대거 희생되었다.

훈민정음 역시 한때 '언문'이라 천대받고 연산군 시절에는 탄압의 대상이 되기도 했다.

그러나 세종이 남긴 유산은 불멸했다.

그의 치세에 완성된 《고려사》, 《농사직설》, 《향약집성방》 등의 서적과 과학 기구는 

조선 발전의 토대가 되었다. (『고려사』는 세종대 기획→1451 문종대 완성, 『향약집성방』 1433)

무엇보다 한글은 백성들의 삶 깊숙이 스며들어 한국 민족의 정체성을 형성하는 핵심 요소가 되었다.

현대에 이르러 세종은 '대왕'이라는 칭호가 아깝지 않은 역사상 최고의 성군으로 평가받는다.

그의 초상은 만원권 지폐에 새겨졌고, 그의 이름을 딴 연구소와 상(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이 제정되었다.

드라마와 영화는 그의 업적뿐만 아니라, 

가족사적 불행과 병고에 시달린 인간 이도의 고뇌까지 재조명하며 그를 더욱 입체적인 인물로 만들고 있다.


"대한민국 1만 원권(세종) | South Korean 10,000 won note (Sejong)"
CC BY-S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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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재조명은 스크린과 브라운관을 넘어, 기록과 현장으로 확장되었다. 

1997년 《훈민정음 해례본》이 유네스코 세계기록유산에 등재되면서, 

문자 자체가 하나의 ‘세계적 사건’으로 공인된 것이다. 

1989년 제정된 유네스코 ‘세종대왕 문해상’은 문맹 퇴치 현장에 그의 이름을 빌려주었다. 

문자 창제가 더 이상 과거의 미담이 아니라, 오늘도 작동하는 공공의 도구임을 증명하는 표식들이다.


서울 광화문 광장에 앉은 세종의 동상은 관광 사진의 배경이 아니라, 도시 리터러시의 상징이 되었다. 

동상 아래 한글 창제 원리를 체험하는 전시를 지나, 아이들이 ㄱ·ㄴ·ㄷ을 조립하며 문장을 만들 때, 

‘어려운 한자를 몰라 억울함을 호소하지 못하던 백성’이라는 서문은 현재형 문장으로 바뀐다. 

문자는 제도일 뿐 아니라, 작은 시민의 권리라는 사실.


광화문 세종대왕 동상 / Statue of King Sejong at Gwanghwamun Plaza
서울시


여주는 영릉(英陵)으로 조용히 그 기억을 품고, 국립한글박물관은 문자 생태계의 현재를 보여준다. 

활자에서 폰트로, 목활자에서 코드 포인트로. 서예가의 붓끝이 하드웨어 키보드로 바뀌었을 뿐, 

‘소리를 본뜨고, 발음을 닮게 하는’ 발상은 그대로다.

 폰트 디자이너들은 초성·중성·종성을 모듈로 설계하고, 

개발자들은 유니코드 표준에 맞춰 조합 규칙을 구현한다.

 어느 의미에서 현대의 집현전은 폰트 스튜디오와 오픈소스 저장소들이다.


드라마와 영화는 논쟁도 남겼다. 

2011년 드라마 〈뿌리 깊은 나무〉는 창제 과정을 스릴러 문법으로 해석했고, 

2019년 영화 〈나랏말싸미〉는 신미대사의 기여설을 전면에 올려 학계·대중 논쟁을 불렀다. 

사료의 침묵과 상상력의 영역이 충돌할 때, 우리는 어디까지 허용할 수 있을까? 

세종의 의지와 집현전의 집단 지성, 그리고 불교계 네트워크의 가능성은 오늘도 비교·대조의 대상이다.


"휴대용 앙부일구 | Handy Angbuilgu (portable hemispherical sundial)"
CC BY-SA (National Museum of Korea v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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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자 밖의 세종도 있다. 

4군 6진으로 북변을 재정비한 북방 정책, 기해동정 이후 대마도 외교의 재구성, 

측우기와 자격루·앙부일구로 대표되는 표준화 행정은 ‘지식-기술-행정’의 삼각편대를 이뤘다. 

성리학의 원리 교정과 동시에, 측정과 규격의 도입으로 ‘딱 떨어지는 국가’를 만들려는 실용주의. 

이상과 실행을 접합하는 방식에서 세종은 드물게 기술친화적 군주였다.


"보루각 자격루 실물대 모형 | Life-size model of Borugak Jagyeongnu"
CC BY-SA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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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정사는 끝내 그를 괴롭혔다. 

병약한 세자(문종), 어린 손자(단종), 그리고 이후의 정변(계유정난)은 그가 염려한 대로 흘렀다. 

‘완벽한 질서’의 기획은 권력 승계 앞에서 흔들렸다. 

그렇기에 훈민정음은 더 크게 남는다. 

제도는 무너질 수 있어도, 문자는 사람 속에 남기 때문이다.


"단종 어진 | Portrait of King Danjong"
Public Domain (Wikimedia Common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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현대의 세종은 또 다른 지명으로 살아 있다. 

행정중심복합도시 ‘세종시’의 간판, 세계 곳곳의 ‘세종학당’ 간판은 언어를 통한 외교의 최전선이다. 

해외 학습자들이 첫 자모를 배우며 “왜 이렇게 논리적이냐”고 묻는 순간, 

15세기의 설계가 21세기의 교실에서 재현된다. 

문자와 도시, 상(賞)과 학교—여러 겹의 이름 속에서 ‘세종’은 기념비가 아니라 시스템이 된다.


그렇다고 신격화로 마무리할 수는 없다. 

장영실 문책의 동기, 최만리 일파 탄압의 강도, 사민정책의 고통은 오늘의 잣대로도 다시 읽혀야 한다. 

세종은 ‘항상 옳은 군주’가 아니라, ‘항상 결단하는 군주’였다. 

그 결단이 낳은 성과와 상처를 함께 적어두는 것이, 기록자들의 예의다.


마지막으로, 질문 하나.

 ‘백성이 말하는 소리를 본떠 글자를 만든다’는 원리는 오늘의 디지털 공론장에서도 유효한가? 

악플과 혐오가 아닌, 접근성과 명료성으로 시민 말문을 여는 설계를 우리는 하고 있는가? 

광장의 동상은 묻고 있다. 

문자를 만들었던 나라, 

이제는 ‘말이 통하는 사회’를 만들 차례가 아니냐고.


본 글은 『조선왕조실록』(태조·태종·세종·문종·단종), 국사편찬위원회 DB, 

한국학중앙연구원 자료, 관련 연구서를 참고했습니다. 

일부 사건·연대·인물관계는 사료·연구자에 따라 해석이 다를 수 있습니다. 


Sejong (1397–1450) rose amid Taejong’s brutal politics: his uncles’ purge, Yangnyeong’s fall, and his own 1418 enthronement under a powerful retired king. 
After Taejong died (1422), Sejong built Jiphyeonjeon, advanced science with Jang Yeong-sil (water clock 1434, rain gauge 1441) and agronomy (Nongsa Jikseol 1429), secured the north (Four Garrisons–Six Forts), and created Hangul (1443/46) despite Confucian backlash.
 Sick late, he delegated (1442), died 1450; despite 1453 turmoil, his legacy endur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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