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프리다 칼로의 일기(1953~54)], [헤이든 에레라, 『프리다 칼로 전기』],
[멕시코 시립미술관 전시 기록], [디에고 리베라 회고록],
[멕시코 혁명 이후 예술사 논문]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1907년 7월 6일, 멕시코 코요아칸의 파란 집.
한 아이가 태어났다.
프리다 칼로.
아버지 기예르모 칼로는 독일 출신 이민자였고, 어머니 마틸데는 스페인·인디언 혈통을 가진 여성.
그녀의 혈관에는 유럽과 원주민, 식민의 그림자와 혁명의 불꽃이 함께 흘렀다.
프리다는 어린 시절부터 병약했다.
6살 때 소아마비를 앓아 오른쪽 다리가 심하게 가늘어졌다.
아이들은 그녀를 “다리 절뚝이”라 놀렸고, 프리다는 치마로 다리를 가렸다.
그러나 아버지는 사진가였고, 딸에게 강인한 눈빛을 가르쳤다.
“아무리 몸이 약해도 눈빛은 꺾이지 말아라.”
그 눈빛은 평생 그녀의 자화상 속에 남았다.
1925년 9월 17일, 열여덟 살의 프리다는 인생을 뒤집는 사고를 겪었다.
버스와 전차가 충돌했고, 쇠파이프가 그녀의 골반을 관통했다.
척추, 골반, 갈비뼈, 다리, 발.
몸은 산산조각 났다.
의사들은 그녀가 살아남을 확률이 희박하다고 했다.
프리다는 수술대와 병상을 전전하며 생사를 오갔다.
침대에 누운 그녀의 위에는 거울이 달린 이젤이 놓였다.
움직일 수 없는 몸 대신, 눈앞의 얼굴이 그녀의 유일한 모델이 되었다.
“나는 내 자신을 그린다. 내가 가장 잘 아는 대상이니까.”
피부에는 쇠가, 뼈에는 못이, 가슴에는 불꽃이.
그녀는 자신을 그리면서, 고통을 색채로 바꾸었다.
붓질은 비명 같았고, 물감은 상처의 피 같았다.
그녀의 자화상에는 늘 멕시코가 있었다.
화려한 테우아나 복장, 전통 장식, 원시적 상징과 선명한 색.
죽음의 해골과 태양, 사슴과 원숭이.
그녀는 유럽식 초상화 기법을 쓰면서도 멕시코의 땅과 영혼을 불어넣었다.
고통은 그녀를 집어삼키지 못했고, 오히려 그녀를 독창적인 예술가로 길러냈다.
1928년, 프리다는 멕시코의 벽화운동을 이끌던 거장 디에고 리베라를 만났다.
그는 프리다보다 21살 많았고, 이미 유명한 화가이자 혁명가였다.
그녀는 자신의 그림을 들고 그에게 평을 구했다.
리베라는 그림을 보며 중얼거렸다.
“이 안에는 진실이 있다.”
둘은 곧 결혼했다.
“코끼리와 비둘기의 결혼.”
사람들은 그렇게 불렀다.
거대한 체구의 남자와 작은 체구의 여자의 불균형을 비유한 말이었다.
그들의 결혼은 사랑과 투쟁의 연속이었다.
디에고는 거침없는 연애로 프리다를 괴롭혔고, 심지어 프리다의 동생과도 관계를 맺었다.
프리다는 분노와 절망 속에서 머리를 짧게 자르고, 남성복을 입고, 상처 입은 자화상을 그렸다.
그러나 그 고통조차 그림의 연료가 되었다.
“내 고통이 내 예술의 가장 큰 영감이다.”
프리다는 그렇게 말했다.
그녀의 그림은 단순한 자화상이 아니었다.
그림 속 그녀는 멕시코의 정치와 사회, 여성과 민중의 목소리를 담았다.
멕시코 혁명 이후, 사회주의와 민족주의가 불타던 시대.
프리다는 노동자, 혁명가, 원주민의 삶을 화폭에 그렸다.
또한 여성의 몸과 출산, 유산, 성적 고통을 가감 없이 드러냈다.
그것은 당시 누구도 감히 다루지 못한 주제였다.
1939년, 파리에서 열린 초현실주의 전시회.
앙드레 브르통은 그녀를 “자연스러운 초현실주의자”라 불렀다.
하지만 프리다는 이렇게 말했다.
“나는 초현실주의자가 아니다. 나는 내 현실을 그린다.”
그녀에게 그림은 꿈이 아니라, 가장 날카로운 현실의 기록이었다.
그녀의 작품 중 「부러진 척추」(1944)는 몸 전체를 기브스 코르셋에 묶인 자신의 모습을 그렸다.
등에는 깨진 기둥이 척추를 대신했고, 피부에는 수십 개의 못이 박혀 있었다.
“내 몸은 부서졌지만, 나는 서 있다.”
그 메시지는 고통을 넘어선 저항의 외침이었다.
프리다는 병으로 수없이 수술을 받았고, 다리를 절단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녀는 휠체어를 타고서도 전시회에 참석했다.
1953년 멕시코에서 열린 개인전.
의사들이 침대에서 나오지 말라고 했을 때, 그녀는 침대를 통째로 갤러리에 옮겨 전시장 한가운데 누워 있었다.
관객들은 충격을 받았지만, 그녀는 웃으며 손을 흔들었다.
“나는 살아 있다. 나는 여전히 화가다.”
1954년 7월 13일, 프리다는 세상을 떠났다.
향년 47세.
죽기 전 그녀는 일기에 이렇게 썼다.
“나는 기쁘다. 다시 떠난다. 돌아오지 않기를.”
프리다 칼로의 삶은 짧았지만, 그 불꽃은 멕시코와 세계에 길게 타올랐다.
그녀는 여성과 소수자, 억압받는 사람들의 목소리를 대변했고, 자신의 고통을 모두의 예술로 바꾸었다.
붓끝에 맺힌 피와 눈물이 화려한 꽃으로 피어났고,
그 꽃은 지금도 사람들의 가슴에 남아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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