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주전쟁: 세상이 멈춘 90분 (The Panic of 1938)
뉴저지의 평범한 일요일 밤
서기 1938년 10월 30일, 일요일 저녁.
뉴저지주 뉴어크(Newark)의 작은 아파트에서 밀러(Miller) 가족은 저녁 식사를
마치고 거실에 모여 앉았다.
밖은 스산한 가을밤이었지만, 실내는 따뜻한 램프 불빛과 함께 편안함이
감돌았다.
대공황(Great Depression, 1930년대 전 세계를 강타한 경제 대공황)의 그림자가
여전히 짙었지만, 라디오만은 그들의 유일한 위안이었다.
남편 조셉 밀러(Joseph Miller, 40대 가장, 신문 인쇄소 직원)는 신문을 덮고 아내
엘리자베스(Elizabeth, 30대 중반 주부)에게 말했다.
"오늘 밤은 찰리 맥카시(Charlie McCarthy, 당대 최고 인기 복화술 인형극)를 꼭
봐야 해.
요즘 유일하게 웃을 수 있는 시간이지."
그들이 라디오 다이얼을 CBS(Columbia Broadcasting System, 미국의 주요 방송국)로
돌리자, 유명 복화술사 에드거 버겐(Edgar Bergen)의 인기 코미디 쇼가
흘러나왔다.
미국 전역의 수많은 가정이 밀러 가족과 똑같이 라디오 앞에 모여 앉아
있었다.
당시 라디오는 단순한 오락 기구를 넘어, 대중이 정보를 얻는 가장 신뢰할 수 있는
매체였다.
그들에게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목소리는 곧 진실이었다.
오후 8시 정각, 프로그램이 시작되었다.
하지만 몇 분 후, 첼리스트의 서정적인 연주가 갑자기 끊겼다.
"숙녀 신사 여러분, 잠시 방송을 중단하고 들어온 긴급 속보를 전해드립니다."
차분하지만 단호한 앵커의 목소리였다.
밀러 가족은 얼굴을 마주 보았다.
속보는 캔자스주 마운트 제닝스(Mount Jennings) 천문대에서 화성에서 발생한 수소
폭발을 관측했다는 내용이었다.
조셉은 어깨를 으쓱했다.
"천문학 뉴스군. 별다른 일은 아니겠지."
엘리자베스는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왠지 모르게 불길해요, 조셉. 꼭 뭔가 큰일이 터진 것처럼 말하네요."
이것이 바로 오슨 웰스(Orson Welles, 당시 23세의 천재 연출가이자 배우)가 이끄는
머큐리 극단(Mercury Theatre on the Air)의 라디오 드라마 '우주전쟁(The War of
the Worlds)'의 서막이었다.
이날 공연은 실제로 약 60분짜리 라디오 드라마였으나, 방송 직후까지 이어진
혼란이 겹치며 그 밤은 대중의 기억 속에 ‘세상이 멈춘 90분’으로 남았다.
방송국은 이 프로그램이 '드라마'임을 명확히 알리는 고지(告知)를 했지만,
대부분의 청취자는 인기 프로그램인 버겐 쇼가 잠시 광고를 하는 틈을 타 다이얼을
돌렸고, 긴급 속보가 시작되는 순간에야 채널을 맞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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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슨 웰스, CBS 스튜디오에서 연출(1938) 위키미디어 공용 |
그로버스 밀(Grovers Mill)의 충격
긴급 상황의 연쇄 발생
8시 10분경, 다시 음악이 중단되었다.
이번에는 목소리가 더욱 급박했다.
"속보입니다! 뉴저지주 그로버스 밀(Grovers Mill, 뉴저지의 작은 마을) 근처에
거대한 운석(Meteorite)이 추락했습니다!
현재 수많은 인파가 현장으로 몰려들고 있습니다!"
조셉은 벌떡 일어섰다.
뉴저지! 뉴어크에서 그리 멀지 않은 곳이었다.
뉴스가 끊임없이 이어졌다.
생중계 리포터의 목소리가 현장의 혼란을 전달했다.
그의 목소리에는 두려움과 흥분, 그리고 진실성이 묻어 있었다.
이어 천문학 교수 리처드 피어슨(Richard Pierson, 극 중 가상 인물)이 등장하여
운석이 사실은 화성인이 보낸 인공적인 물체일 가능성을 제기했다.
이때부터 밀러 가족의 평화는 깨지기 시작했다.
엘리자베스는 떨리는 손으로 창밖을 내다봤다.
"조셉, 저 운석이 정말 화성인이 보낸 거라면…?"
뉴저지주 웨스트 윈저 타운십에 있는 밴 네스트 공원(Van Nest Park)에 있는 상륙 지점 위키미디어 공용 |
화성인의 공격과 '열선(Heat Ray)'
8시 20분. 방송은 완전히 전쟁 보도로 돌변했다.
현장 리포터의 목소리는 공포에 질려 떨렸다.
"이건... 이건 제가 본 것 중 가장 끔찍한 일입니다! 운석이 열리고 있어요! 안에서
거대한 삼각대 형태의 기계가…! 엄청난 열선(Heat Ray)이 사람들을 향해 발사되고
있습니다! 맙소사, 그들은 녹고 있어요! 불타고 있습니다! 이젠... 더 이상...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그리고 치지직거리는 잡음과 함께 방송이 끊겼다.)
조셉은 라디오 볼륨을 최대로 키웠다.
이어 국방부 장관으로 추정되는 인물의 엄숙한 목소리가 들렸다.
뉴저지에 계엄령(戒嚴令)이 선포되었으며, 주 방위군이 현장으로 긴급 출동했다는
내용이었다.
이 순간, 뉴어크는 물론 뉴욕, 필라델피아 등 인근 대도시에서는 수많은 사람들이
"이것은 실제 상황이다"라고 확신했다.
아무도 이 상황이 오슨 웰스의 머큐리 극단에서 만든 단순한 '라디오 드라마'일
것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
누가 이토록 실감 나는 긴급 속보를, 이토록 무서운 재앙을 농담으로 꾸며낸단
말인가?
지옥으로 변한 뉴저지
공포의 대이동과 신뢰의 붕괴
밀러 가족에게 공포는 현실이 되었다.
조셉은 아내에게 외쳤다.
"빨리 짐을 싸요! 뉴저지가 공격받고 있어요! 우리가 다음에 당할지도 몰라!"
그들의 16세 딸, 캐롤라인은 이미 비명을 지르며 옷장에 숨었다.
이웃집에서는 라디오 소리가 찢어질 듯 크게 들려왔고, 곧 격렬한 다툼 소리가
들리더니 현관문이 쾅 닫히는 소리가 났다.
조셉이 창문 밖을 내다봤을 때, 거리는 이미 아비규환(阿鼻叫喚)이었다.
사람들은 뉴저지를 탈출하기 위해 뉴욕 방향으로 향하는 고속도로로 미친 듯이
몰려들었다.
수많은 차량이 헤드라이트도 켜지 않은 채 뒤엉켜 움직이지 못했다.
일부 사람들은 거리로 뛰쳐나와 "지구의 종말이다!"를 외치며 눈물을 흘렸다.
뉴어크의 한 교회 앞에는 수십 명이 모여 마지막 기도를 올리고 있었다.
실제로 뉴저지 경찰서와 뉴욕 경찰서에는 수천 통의 전화가 폭주했다.
'화성인의 열선으로부터 안전한 곳은 어디인가?', '우리 가족은 어떻게 대피해야
하는가?', '운석이 정말 떨어진 것이 맞는가?' 등의 질문이었다.
사설에서는 화성인이 내뿜는 독가스를 피해 마스크를 쓰거나, 아예 물탱크 속으로
들어가 숨으려던 사람들의 이야기가 전설처럼 떠돌았다.
방송은 절망적인 군사 보고서를 계속 내보냈다.
뉴욕까지 화성인의 삼각대가 진격했고, 미군의 모든 저항은 열선 앞에 무력하다는
내용이었다.
특히 맨해튼(Manhattan) 지역에 독가스가 퍼져 사람들이 쓰러지고 있다는 보도는
뉴욕 시민들의 패닉을 최고조로 끌어올렸다.
조셉은 아파트 복도에서 이웃들을 만났다.
"시카고로 가야 해요! 뉴저지는 끝났어요!" 한 이웃이 소리쳤다.
조셉은 가족의 생존을 위해 어떤 방향으로 도망쳐야 할지 혼란스러웠다.
이 혼란은 정보의 부재와 라디오에 대한 맹목적인 신뢰가 빚어낸 거대한 사회
실험이었다.
90분 후의 침묵과 유산
드라마의 엔딩, 공황의 끝
오후 9시 30분경, 격렬했던 '뉴스 보도'는 갑작스러운 침묵에 빠졌다.
그리고 다시 차분한 아나운서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숙녀 신사 여러분, 여러분이 방금 들으신 것은 H. G. 웰스의 소설을 바탕으로
머큐리 극단이 공연한 라디오 드라마입니다.
이 세상에는 화성인이 없으며, 전쟁도 일어나지 않았습니다."
이 한 마디에 뉴저지를 뒤덮었던 거대한 공포의 파도는 급격히 사그라졌다.
밀러 가족은 털썩 소파에 주저앉았다.
90분간의 악몽이 거짓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면서도, 스스로의 어리석음에 대한
수치심과 분노가 몰려왔다.
다음날 아침, 신문 1면은 온통 '라디오 괴담 소동'으로 뒤덮였다.
당시 젊은 천재였던 오슨 웰스는 이 사건으로 순식간에 스타가 되었으나, 동시에
대중에게 공포를 주입한 주범으로 낙인찍혔다.
웰스는 기자회견에서 사과의 뜻을 표하면서도, "우리는 단지 극장의 문을 닫기 전
마지막 드라마를 공연했을 뿐"이라고 담담하게 말했다.
이 소동은 단순한 해프닝으로 끝나지 않았다.
미국 사회는 '왜 수많은 지식인과 시민이 라디오 방송 하나에 속았는가?'에 대해
깊이 성찰하게 되었다.
당시의 대공황, 유럽의 전쟁 위협(제2차 세계 대전 발발 직전) 등 불안한 시대적
배경이 대중의 불안 심리를 극도로 자극했음이 드러났다.
이 사건은 미디어가 대중의 심리에 미치는 영향이 얼마나 파괴적일 수 있는지 전
세계에 증명했다.
미국 방송국들은 이후 '뉴스 형식'을 드라마에 사용하는 것을 철저히 금지하는 등,
방송의 윤리와 책임에 대한 새로운 기준을 마련하게 되었다.
밀러 가족은 다시 평범한 일상으로 돌아왔지만, 그날 밤의 공포는 잊을 수
없었다.
그들의 라디오는 여전히 거실에 놓여 있었으나, 조셉은 더 이상 라디오에서
흘러나오는 모든 목소리를 맹목적으로 신뢰하지 않게 되었다.
1938년의 '우주전쟁' 소동은 미디어가 만들어낸 가짜 현실이 어떻게 수십만 명의
'진짜 공황'을 초래할 수 있는지 보여준, 역사상 가장 기묘하고 중요한 문화적
유산으로 남게 되었다.
본 글은 1938년 CBS 라디오 드라마 〈War of the Worlds〉와 동시대 신문·잡지
보도, 후속 연구를 바탕으로 필요한 범위에서만 장면을 각색했습니다.
사실성 논란 지점은 (논쟁), 전승은 (전승), 확인 곤란한 설은 (음모론)으로
표기합니다.
실제 방송 러닝타임은 약 60분이며, ‘세상이 멈춘 90분’은 방송 직후까지 이어진
혼란을 포함한 관용적 별칭입니다.
On Oct 30, 1938, Orson Welles’s Mercury Theatre aired a one-hour radio “news” adaptation of H. G. Wells’s War of the Worlds.
Many tuned in late, missed the disclaimer, and mistook simulated bulletins—Martian landings at Grovers Mill, heat rays, troops, martial law—for reality.
Traffic jams, frantic calls, and prayers spread until the sign-off revealed the drama.
The “90 minutes” label reflects panic beyond the broadcast and ignited debates on media power, fear, and rumo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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