방촌 황희 (厖村 黃喜)
제1부. 혼돈 속의 싹 (고려 말 ~ 태종 중기)
[시대의 격랑]
1363년 (공민왕 12년, 고려).
수도 개경 (송경, 현재의 개성)의 가조리에서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초명은 수로(壽老, 오래오래 살라는 뜻)였고, 훗날 희(喜)로 개명하였는데, 그 이름처럼 그는 당대 사람으로서는 보기 드물게 90세(만 89세)까지 장수하게 될 운명이었다.
아이의 아버지는 자헌대부 판강릉부사(고려의 종2품 문관) 황군서.
어머니는 감문위 호군 김우의 딸 용궁 김씨.
소년 황희는 명문가의 아들로 태어났으나, 그의 출신에는 평생의 꼬리표가 따라붙었다.
어머니 용궁 김씨가 정실 부인(적처)이 아닌 첩이었기 때문이다.
《세종실록》에는 그가 아버지의 얼자(孼子, 천첩의 소생)였다고 기록되어 있다. (논쟁: 다만, 그가 과거 시험에 응시하고 관직에 진출하는 데 신분적 문제가 없었던 점으로 미루어 얼자 신분이 사실이 아니거나, 당시 조선 초기에는 적서차별이 심하지 않았을 수 있다는 반론도 있다).
고려 말은 이미 기울고 있었다.
홍건적과 왜구의 침략으로 국토는 피폐해졌고, 권문세족의 부패는 극에 달했다.
이러한 혼란한 사회적 배경 속에서 태어난 황희는 14세가 되던 해인 1376년 (우왕 2년), 음서(조상의 공덕으로 과거를 거치지 않고 관직에 나서는 제도)로 복안궁 녹사 (궁궐의 행정 실무직)가 되면서 관직 생활을 시작했다.
타고난 총명함과 민첩함은 그를 평범하게 두지 않았다.
그는 글을 한 번 보면 곧바로 기억했으며, 경사(經史)와 제자백가(諸子百家)의 글에 통달했다.
그는 단지 명문가의 배경에 안주하지 않았다.
20대 초반, 그는 두 번의 소과(사마시와 진사시)에 합격하며, 이미 정통 관료의 길을 예고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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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 국립중앙박물관본 |
[깨달음과 강직함]
스무 살 무렵, 젊은 진사(進士, 소과 합격자) 황희에게 평생의 처신을 결정지을 만한 작은 사건이 일어났다.
어느 날, 황희는 길을 가다 들판에서 농부(백성)가 검은 소와 누런 소 두 마리를 몰아 논을 가는 모습을 보았다.
황희는 농부에게 가까이 다가가 물었다.
"농부 어르신, 저 두 마리의 소 중에서 어느 소가 일을 더 잘합니까?"
그러자 농부는 묵묵히 소를 멈추더니, 황희의 옷소매를 잡고 그를 소들이 보이지 않는 곳으로 이끌었다.
농부가 귓속말로 속삭였다.
"누런 소가 사실 검은 소보다는 일을 더 잘합니다."
황희는 영문을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었다.
"아니, 어르신. 그것이 무슨 큰 비밀이라고 굳이 여기까지 와서 귓속말로 하십니까? 그저 소가 듣지 못할 곳에서 말씀하시면 될 것을."
농부가 인자하지만 단호한 표정으로 답했다.
"모르는 말씀 마시오. 말 못하는 짐승이라도 자기를 욕하고 흉을 보면 기분을 상하게 되는 것이오. 열심히 일하는 앞에서 어느 소가 잘한다 못한다 흉보면, 이 짐승들이 어찌 마음 편하게 일을 할 수 있겠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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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황희와 농부 일화 |
농부의 말을 들은 황희는 큰 깨달음을 얻었다.
그는 자신이 평소 얼마나 경솔하게 남을 평가했는지 반성했다.
이 일화는 후대에 황희의 너그럽고(寬) 온화한 성품을 상징하는 대표적인 이야기(전승)로 전해진다.
이는 또한 그가 '백성을 위한 정치를 해서 좀 더 나은 세상을 만들자'는 마음을 갖게 된 계기가 되었을 것이다.
이후 황희는 학문에 더욱 힘써 1389년 (창왕 원년), 마침내 문과(대과)에 급제하며 본격적인 관료의 길을 걷게 되었다.
그러나 1392년 (공양왕 3년), 고려 왕조가 무너지고 이성계 (태조, 조선 건국자)에 의해 새 왕조 조선이 개창되면서, 황희의 인생은 또다시 격변기를 맞는다.
고려의 신하로 관직을 시작했던 황희는 새 나라의 부름을 쉽게 받아들이지 않았다.
그는 고려의 유신(옛 신하) 70여 명과 함께 개성 인근 두문동 (두문불출하던 마을)에 들어가 외부와의 연락을 끊고 은거(두문불출)하였다.
('두문불출(杜門不出)'은 '문을 닫고 나가지 않는다'는 뜻으로, 이처럼 고려 말 충신들이 두문동에 은거하며 새 왕조에 나가지 않은 것에서 비롯된 것이 아니라, 오히려 '두문'이라는 표현 자체가 예전부터 '문을 닫는다'는 의미로 사용되었으며, 영조 대에 이르러 두문동 72현(공자의 제자 수에 맞춘 숫자) 전설이 부각되면서 널리 알려지게 된 것이다.)
황희는 이곳에 함께 은거했던 유신들 중 나이가 가장 어렸던 축에 속했으며 (추정), 결국 조정의 거듭된 요청과 동료들의 권유로 은거를 포기하고 조선 조정에 다시 출사(出仕)하게 된다. (논쟁: 다만, 황희가 조선 건국에 적극적으로 참여하지도 않았지만, 그렇다고 옛 왕조에 집착한 인물도 아니었다는 평가가 있으며, 두문동 은거 자체의 신빙성은 떨어진다는 시각도 있다.)
새 나라에서의 관직 생활은 순탄치 않았다.
태조 (이성계, 조선의 초대 왕)와 정종 (이방과, 조선의 2대 왕) 치세 동안, 황희는 자신이 보기에 옳지 않다고 판단되는 일에는 임금의 명령이라도 거부하는 강직하고 완고한 성품을 보였다.
그 결과, 그는 수차례 파직과 복직을 반복하며 경원교수(지방 관리직)로 좌천되기도 했다.
[태종의 사람, 권력의 맛]
황희의 진정한 정치적 재능이 빛을 발한 것은 1400년 (정종 2년), 즉 태종 (이방원, 조선의 3대 왕)이 집권한 이후였다.
1405년 (태종 5년), 당시 승정원 지신사 (知申事, 왕명의 출납을 담당하는 국왕 비서실장 격) 박석명 (태종의 측근 신하)이 황희를 강력하게 태종에게 천거했다.
태종은 사람을 쓰는 데 신중했지만, 박석명의 추천을 받아들여 황희를 지신사 자리에 앉혔다.
이 지신사 자리는 국왕 직속으로 권력과 업무 강도가 상상을 초월하는 요직이었다.
황희는 이 자리에 약 4년간 머물면서 태종의 절대적인 신임을 받으며 승승장구했다.
황희는 개국공신이 아니었음에도, 공신들과 같은 대우를 받았고, 태종은 하루라도 황희를 보지 못하면 반드시 불러 접견할 정도로 그를 신뢰했다.
태종은 황희에게 극비 사안을 공유하며 그에 대한 신임을 다음과 같이 표현했다고 한다.
"이 일은 나와 경(卿, 신하를 높여 부르는 말)만이 홀로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此事予與卿獨知之, 若泄非卿卽予)."
황희의 권한은 막강해졌다.
지신사는 지이조사(인사권을 겸임하는 직책)를 겸임했으므로, 황희는 인재를 기용할 때 정승이 천거한 사람이라도 마음에 들지 않으면 기용하지 않을 정도였다.
태종은 즉위 초, 재상들의 권한을 약화시키고 왕권(군주권)을 강화하기 위해 육조직계제(六曹直啓制, 왕이 6조에서 직접 보고받는 제도)를 시행했으며, 이 과정에서 왕의 비서 역할을 하던 지신사(도승지)의 권한이 재상의 권한을 침범할 정도로 강해졌다.
황희는 이러한 '코드 인사'의 중심에 있었고, 이 때문에 일부 관료들의 불만(인망을 잃은 것)을 사기도 했다.
황희는 이후 형조 (사법), 병조 (군사), 예조 (외교/의례), 이조 (인사), 호조 (재정), 공조 (건설) 판서직(정2품, 각 부처의 장관)을 모두 역임하며 국정 전반에 걸친 노하우를 쌓았다.
이는 그가 걸어 다니는 조선 정부라고 불릴 만큼 국정에 대한 깊은 이해를 갖게 된 기반이 되었다.
[왕의 역린을 건드리다]
태종의 치세가 끝나가던 1416년 (태종 16년) 무렵, 황희의 정치 인생에 가장 큰 위기가 찾아왔다.
바로 세자 폐위 문제였다.
태종의 장남 양녕대군 (讓寧大君)은 이미 여러 차례 비행(궁성을 넘어 기생집 출입, 무분별한 여성 편력 등)을 저질러 왕실의 근심거리가 되고 있었다.
1418년 (태종 18년), 양녕대군이 다른 사람의 첩과 간음(불륜)하여 임신까지 시킨 사건이 발생하자, 태종은 세자 교체를 결심하고 신하들의 의견을 물었다.
대부분의 신하가 왕의 뜻에 따랐지만, 황희는 홀로 반대했다. 그의 주장은 단호했다.
"전하 (태종). 아무리 세자가 실수를 하였기로서니, 적장자(嫡長子, 정실 부인이 낳은 맏아들) 계승 원칙은 나라의 근본입니다. 국본(國本, 국가의 근본)을 경솔하게 흔들어서는 아니 되옵니다. 세자는 아직 어리니, 폐위는 불가하옵니다!"
황희가 이처럼 강하게 반대한 배경에는 인간적인 동정과 정치적인 이해관계가 복합적으로 작용했다.
당시 황희는 태종의 처가인 민씨 일가 (민무구, 민무질 등) 숙청에 앞장섰던 인물로, 양녕대군 폐위에 찬성할 경우 정치적 약점으로 작용할 수 있었기에, 적장자 원칙을 고수하며 세자 편을 들었다는 해석이 있다.
하지만 태종은 이미 마음을 굳힌 상태였다.
태종에게 황희의 반대는 배신처럼 느껴졌다.
태종은 과거 민씨 일가를 척살(제거)할 때 황희를 신뢰했으나, 이제 황희가 자신의 신뢰를 저버리고 세자 편을 들었다고 여겼다.
결국 태종은 양녕대군을 폐위시키고 충녕대군 (훗날 세종대왕)을 새 세자(왕세자)로 책봉하였다.
그리고 황희에게는 죄를 물어 관직을 삭탈하고 폐서인(관직과 벼슬이 없는 일반 백성)을 만든 뒤 유배형을 내렸다.
황희는 처음에는 늙은 어머니를 모셔야 한다는 이유로 한양과 가까운 교하 (交河, 현재 경기도 파주)에 유배를 갔으나, 태종은 이곳이 너무 가깝다며 노여움을 풀지 않았다.
결국 황희의 유배지는 전라도 남원으로 옮겨졌다.
남원은 황희 부계(父系)의 고향이자 연고지였기에 (논쟁), 이는 태종이 황희의 능력을 높이 평가하여 '가장 미워하지만 완전히 버리지는 않은' 정치적 배려로 해석된다.
황희는 이때부터 5년간의 유배 생활을 시작하며, 훗날 《춘향전》의 배경이 되는 누각인 광한루 (당시에는 광통루)를 지었다.
이 사건은 황희에게 일생일대의 시련이었지만, 동시에 그의 강직한 소신과 불복종 정신을 확인시켜 준 계기가 되었다. (또한 이는 태종의 극단적인 왕권 강화 속에서, 황희가 자신과 가문을 지키기 위해 정치적 약점을 보완하려 했던 처절한 몸부림으로 볼 수도 있다)
황희의 나이 이미 55세.
은퇴할 나이에 그는 인생의 암흑기에 접어들었지만, 이 긴 유배 생활은 그에게 훗날 조선 최고의 명재상으로 우뚝 설 수 있는 깊은 통찰과 성찰의 시간을 선사했다.
제2부. 복귀와 흠결 (세종 초, 명재상의 그림자)
[남원의 다섯 해]
황희(黃喜)가 유배된 남원의 5년은 고통스러웠으나, 동시에 쉼의 시간이었다.
1418년, 50대 중반의 나이에 중앙 권력에서 멀어져 홀로 남도(南道)의 적막한 풍경을 마주해야 했다.
그가 남원에서 머무르던 시절, 그는 도교(道敎)의 천원지방(天圓地方, 하늘은 둥글고 땅은 네모지다는 사상) 이치에 따라 누각 하나를 세웠다.
바로 광통루 (廣通樓)였다.
이 누각은 훗날 광한루 (廣寒樓)로 개명되며, 먼 훗날의 전설 《춘향전》 (숙종 시대의 이야기)의 무대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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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춘향전의 무대 광한루 |
그의 유배는 단순한 처벌이 아니었다.
태종 (太宗, 상왕)은 황희가 자신의 역린을 건드렸음에도, 그의 출중한 능력을 알고 있었다.
태종이 황희를 완전히 버리지 않고 그의 향관(鄕貫, 본관이나 연고지)인 남원으로 보낸 것은 정치적 배려(유배지 배려)였다.
태종은 황희의 능력을 "이 일은 나와 경만이 홀로 알고 있으니, 만약 누설된다면 경이 아니면 곧 내가 한 짓이다 (此事予與卿獨知之, 若泄非卿卽予)"라고 할 정도로 신뢰했던 인물이었다.
남원에서 백발이 성성해진 황희는 생각했다.
"왕실의 적장자(嫡長子) 원칙은 나라의 근본이다. 이를 고수하는 것이 충(忠)이라 여겼으나, 전하(태종)의 성정은 이미 꺾을 수 없을 만큼 굳어져 있었다. 내가 세자 (양녕대군)를 옹호했던 것이, 결국 내게는 화(禍)로 돌아왔구나."
[돌아온 능력자]
1422년 (세종 4년). 드디어 태종이 움직였다.
그는 황희를 아껴서, 황희에게 "내가 죽으면 따라 죽을 사람은 그대라고 생각했거늘..." 이라며 맹비난했으나, 결국 그의 능력은 조선의 미래에 필수적임을 인정했다.
상왕 태종은 새로 즉위한 왕 세종 (世宗, 충녕대군)에게 황희를 다시 불러들여 중히 쓸 것을 강력하게 권유했다.
세종 역시 황희가 과거 자신의 세자 책봉을 반대하고 외척 (민무구, 민무질 등) 숙청에 앞장섰던 인물임을 알았지만, 그의 사람됨이 바르고 능력 있다는 사실을 간파하고 있었다.
마침내 황희는 유배에서 풀려나 직첩(職牒)과 과전(科田, 관직에 따라 받는 토지)을 돌려받고 의정부 좌참찬 (從1품, 의정부의 중요 보좌 직책)으로 복직했다.
그의 나이 60세.
이는 이미 당대에는 은퇴할 나이였으나, 황희는 다시 국정에 몸을 던졌다.
복직 후 얼마 되지 않아, 황희의 진가가 발휘되었다.
1423년 (세종 5년), 황희는 강원도 관찰사 (강원도 행정 책임자)로 파견되었다.
당시 강원도는 기록적인 대흉년에 시달리고 있었다.
백성들은 굶주려 유민(流民)이 속출했고, 기존 관찰사들은 구휼(救恤, 구제)에 실패하여 파면된 상태였다.
황희는 즉시 현장으로 달려갔다.
그는 단순히 쌀을 나눠주는 데 그치지 않았다.
먼저, 각 고을 수령(지방 행정관)들이 불법적으로 환자곡(還上穀, 봄에 빌려주고 가을에 갚게 하는 곡식)을 거두어들이는 정황을 적발하고 죄를 주도록 청했다.
또한, 백성 수에 근거하여 진휼할 곡식을 정확히 추산하고, 호수와 인구수를 파악한 뒤, 기근으로 피폐해진 토지 면적(결수)까지 정확히 보고하며 강원도에 배정된 공물의 종류와 수를 감해줄 것을 국왕에게 요청했다.
이러한 실무적 능력과 백성을 향한 진정성 덕분에 강원도 민심은 크게 안정되었다.
황희가 관찰사 임기를 마치고 돌아갈 때, 관동지방(강원도) 주민들은 그의 은공을 기리며 삼척 (강원도 삼척)에 대(臺)를 쌓고 소공대 (召公臺)라 이름 지었다. (전승: 소공은 중국 주나라 문왕의 서자로, 선정을 베풀어 백성들의 칭송을 받았던 인물이다)
세종은 이 놀라운 성과를 보고 황희를 더욱 신뢰하게 되었다.
[재상 투톱 시대와 스캔들]
황희의 복직은 세종(世宗)의 강력한 지지 아래 승승장구로 이어졌다.
1426년 (세종 8년), 황희는 우의정 (右議政, 정1품)에 올랐고, 다음 해인 1427년 (세종 9년)에는 좌의정 (左議政, 정1품)에 제수되었다.
이때 황희는 이미 64세, 65세였다.
이때부터 황희 (강직하고 정확한 스타일)와 맹사성 (孟思誠, 1360~1438, 너그럽고 부드러운 스타일)은 조선 초기의 국정을 이끄는 '투톱 체제'를 구축했다.
황희는 주로 인사(이조), 군사(병조) 등 과단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고, 맹사성은 예법, 교육 등 유연성이 필요한 업무에 능했다.
이처럼 권력의 정점에 섰을 때, 황희의 정치 인생에서 가장 치명적인 스캔들이 터져 나왔다.
바로 사위 서달 살인 사건이었다.
황희의 사위 서달 (徐達, 이천 서씨)은 지방을 지나던 중, 고을의 아전 (衙前, 지방 행정 실무자이자 당시 지역 유지)이 자신을 보고 불손하게 대했다는 이유로 분노했다.
서달은 자신의 종들을 시켜 그 아전을 잡아 무자비하게 매질하게 했다.
이 과정에서 다른 아전 표운평이 이를 말리려다 서달의 종들에게 구타당해 다음 날 사망하는 끔찍한 일이 발생했다.
(조선 초기의 아전은 고려 시대 호족(지방 유력자)에 가까운 신분이었다. 단순한 하급 관리가 아니라 지역 재벌 수준의 힘을 가진 인물을, 정승의 사위가 개인적인 오만(인사 불이행)을 이유로 때려죽였다는 것은 중대한 사회적 갈등을 의미했다.)
현감(지방 수령)은 이 사건이 좌의정의 사위와 연루되었음을 알고 감히 상부에 보고하지 못한 채 황희에게만 정황을 알렸다.
이때부터 황희는 고위 공직자로서의 치명적인 인격적 결함 (친인척의 비행에 대한 지나친 관대함)을 드러내기 시작했다.
황희는 동료 정승 맹사성과 함께 이 사건의 은폐와 조작에 착수했다.
그들은 피해자 가족을 협박하고 뇌물로 회유했으며, 심지어 사건을 맡은 지역 수령들에게 압력을 가했다.
최종적으로, 그들은 살인죄를 서달이 아닌 서달의 노비인 잉질종에게 뒤집어씌우고, 조작된 상주문(사건 보고서)을 국왕에게 올렸다.
이러한 은폐 행각은 수십 명의 고관대작이 연루될 정도로 심각한 기군망상죄 (欺君罔上罪, 임금을 속이고 능멸하는 죄)에 해당했다.
하지만 그들의 상대는 세종 (천재 군주)이었다.
세종은 조작된 상주문을 읽고 이상한 점을 발견하여 의금부 (법률, 감찰 기관)에 재조사를 명했다.
결국 진상이 백일하에 드러났고, 조정은 발칵 뒤집혔다.
황희와 맹사성은 즉시 파직되었으며, 사건 관련자 수십 명이 줄줄이 처벌을 받았다.
살인자인 서달 역시 사형에 해당했으나, 세종은 그가 독자(獨子, 외아들)임을 감안하여 곤장 100대, 3천 리 유배, 3년 노역의 처벌을 내리는 것으로 사건을 마무리 지었다.
[브레이크와 종신 노역]
사건이 터진 지 불과 며칠 만에, 세종은 다시 황희와 맹사성을 불러들였다.
세종 : "경(卿)들이 범한 죄는 가볍지 않으나, 과인(寡人)이 이토록 경들을 다시 부르는 이유를 아시오? 나라를 다스리는 데 있어 경들만 한 재주를 가진 자가 없기 때문이오. 그대들의 능력은 국정에 절대적으로 필요하오."
세종은 황희의 사적인 흠결에도 불구하고 국정을 안정시키고 태평성대를 이끌 능력 (대체(大體)를 보존하는 능력)을 높이 평가했기에, 그를 재상직에 복직시켰다.
이 복직의 배경에는 황희가 개국공신이 아니었고 자기 세력이 없었기 때문에, 왕권(군주권)을 견제하려는 다른 관료 집단에게도 비교적 '선호할 수 있는' 인물이었다는 정치적 이유도 있었다.
세종은 황희를 통해 관료 집단의 과도한 권력 독점을 막으면서, 자신의 개혁을 추진할 수 있었다.
1427년, 황희는 어머니 용궁 김씨 (황군서의 첩)의 상을 당했다.
당시 유교 예법상 관리는 3년상 동안 관직에서 물러나야 했다.
황희는 3년상을 치르겠다며 사직을 청했다.
하지만 세종은 이를 거부하고 황희에게 기복 (起復, 상중에도 관직에 복귀하는 것)을 명했다.
세종의 황희에 대한 신임과 집념이 드러나는 대목이었다.
세종 : "경이 늙어 3년상 중 육식을 끊으면 건강을 해칠 것이오. 경은 환갑이 지났으니 상중이라도 고기를 먹고 건강을 지켜 국사에 임하시오."
(당시 유교 관례상 환갑이 지나면 상중 육식이 가능했으나, 황희에게는 이례적으로 고기를 먹으라고 명령한 것은 격무에 시달리던 그를 아끼는 세종의 배려이면서도, 동시에 자리를 비우지 말라는 강력한 압박이었다.)
황희는 눈물을 흘리며 고기 반찬을 먹었다고 기록된다.
황희의 유능함은 세종에게는 마치 브레이크 (왕의 과속과 독단을 막는 역할)와 방패 (외부의 공격과 비난으로부터 그를 보호하는 역할)와 같았다.
세종은 황희를 잃고 싶지 않았다.
황희는 이후에도 처남들의 위법 행위를 변명하거나, 자신의 장남 황치신 (黃致身, 훗날 판중추원사를 역임)의 몰수된 과전 (토지)을 돌려달라고 세종에게 개인적으로 청탁하는 등, 친족의 비위에는 무른 모습을 계속 보였다.
황희의 행적은 당대에도 논란이 되었고, 사관(史官)은 세종실록 졸기(卒記, 죽었을 때 남기는 평)에 다음과 같은 비판적인 평가를 남겼다.
"성품이 지나치게 관대하고 집안을 다스리는 데[제가(齊家)] 단점이 있었다. 청렴한 지조가 모자라 정권을 오랫동안 잡고 있으면서도 청렴하지 못하다는 비난이 있었다"
이러한 공과 사가 극명하게 갈리는 복합적인 모습이야말로 황희의 진정한 인간성이었다.
그는 강직하고 청렴한 관료의 롤모델이었지만, 동시에 가족을 위해서는 흠결을 감수했던 권력자였다.
제3부. 백발 홍안의 브레이크
[영의정, 권력의 정점]
1431년 (세종 13년).
황희는 69세의 나이로 마침내 영의정부사 (領議政事, 정1품, 조선의 최고 재상) 자리에 올랐다.
당시 이 나이는 일반 사람들이라면 천수를 다 했다고 볼 고령이었으나, 황희는 이때부터 무려 18년 동안 영의정으로 재임하며 조선 역사상 최장수 영의정 기록을 세우게 된다.
황희는 고려 말 공민왕(恭愍王) 대에 태어나 고려의 우왕(禑王), 창왕(昌王), 공양왕(恭讓王)을 거쳐 조선의 태조(太祖), 정종(定宗), 태종(太宗), 그리고 세종(世宗)까지, 이미 여덟 명의 왕을 경험한 여말선초(麗末鮮初)의 산증인 그 자체였다.
이제 그는 세종 (世宗)의 재상으로서 조선의 최전성기를 설계하는 막중한 임무를 맡았다.
이때 조선의 중앙 정치는 황희와 맹사성을 양대 축으로 하는 투톱 체제였다.
세종은 대신들의 권력 남용 가능성을 우려하여 한 사람에게 대권을 모두 넘겨주지는 않았지만, 이 투톱 체제는 세종의 통치 스타일을 이해하는 핵심이었다.
[성군과 노재상의 팽팽한 줄다리기]
세종은 끊임없이 새로운 제도를 만들고 추진하는 직진형, 과속형 군주였다.
새로운 기계와 제도, 과학기술을 만들며 일에 직접 관여했다.
이러한 세종에게 황희는 없어서는 안 될 존재였다.
그는 세종의 브레이크 역할을 수행하는 보수주의자였다.
세종이 새로운 정책을 구상할 때, 황희는 홀로 반박하는 의논을 올리기를 주저하지 않았다.
황희 : "전하(殿下), 조상의 옛 제도를 경솔하게 고쳐서(변경)는 아니 되옵니다. 제도를 그렇게 자꾸 바꾸는 것은 좋은 것이 아니옵니다."
세종은 황희의 이 말을 모두 따르지는 않았으나, 황희가 "중지시켜 막은 것"도 많았다고 실록(實錄)은 기록한다.
황희가 아니었다면 세종은 더 많은 일을 추진했을 것이지만, 황희는 신중하고 안정적인 운영을 추구하여 세종의 과속을 막아 국정을 안정화시켰다.
이러한 줄다리기가 가장 극명하게 드러난 사건이 바로 공법 제정이었다.
1427년 (세종 9년), 세종은 수확량에 따라 세금을 걷던 기존의 답험손실법(踏驗損實法) 대신, 수확량과 상관없이 일정한 세금을 걷는 공법 (貢法, 새로운 세금 제도)을 도입하려 했다.
백성들로부터 세금을 거두는 제도는 국가와 백성 모두에게 가장 중요한 문제였다.
세종은 전국 17만 2,806명의 농사짓는 백성들에게 직접 여론조사를 벌일 정도로 신중했으나, 황희는 이 정책에 강력히 반대했다.
황희 : "그 법을 실시하면 부자들에게는 도움이 되고, 가난한 사람들에게는 더 큰 불행이 올 것입니다. (새 제도는) 모두에게 좋은 제도가 아니고 누구에게 더 좋고 누구에게는 나쁜 제도가 될 것입니다."
황희는 책상머리 이론이 아닌, 자신이 강원도 관찰사 등을 지내며 쌓은 다년간의 행정 경험과 실무적 지식을 바탕으로 반대했다.
세종은 황희의 의견을 묵살하지 않았다.
결국 세종은 황희의 반대 의견을 받아들여 법안을 보완하고 또 보완했다.
이 과정이 무려 14년이 걸렸고, 최종적으로 공법은 수확량의 1/20을 걷는 형태로 대폭 수정되어 1444년 (세종 26년)에야 단계적으로 시행되었다.
황희는 세종의 아이디어가 완전한 법이 될 수 있도록 합리적인 제동을 건 것이다.
[친족 비호, 청백리의 그림자]
황희는 "믿을 건 피붙이뿐이다"라는 생각(전승)을 가졌던 것인지, 유독 친인척의 비리에 관대하고 이를 옹호하려 애썼다.
그의 부패 의혹 대부분은 황희 자신의 행적보다는 자식이나 사위 등 친인척 관련 비리를 덮다가 발각된 것들이다.
1. 사위 서달 사건 이후의 아들 비위: 사위 서달 사건 이후에도 황희의 아들들은 끊임없이 문제를 일으켰다.
그의 서자(庶子) 황중생은 문종(文宗, 당시 세자)이 기거하는 동궁전(東宮殿)에서 궁중 창고의 물건(금잔 등)을 훔치다가 적발되었다.
2. 비리 콤보와 아버지의 분노: 조사 과정에서 둘째 아들 황보신 (黃保身)이 황중생보다 더 많은 장물을 훔쳐 첩에게 주려 했음이 드러났다.
결국 황보신은 삭탈관직 당하고 과전(관직에 따라 받는 토지)이 압수되었다.
이뿐만이 아니었다.
장남 황치신 (黃致身)은 동생 황보신의 비옥한 몰수 과전을 자신의 척박한 땅과 바꿔치기하려다 발각되어 세종의 노여움까지 샀다.
3. 서자 파문: 아들들의 연이은 비리 콤보에 황희는 너무나 화가 난 나머지, 사건의 빌미를 제공한 서자 황중생에게 화풀이하듯 "내 아들이 아니다"라며 그의 성을 조씨로 바꾸어 족보에서 파버렸다.
이는 대인배적 면모와는 거리가 먼, 권력자의 지극히 인간적인 분노가 드러난 장면이었다.
4. 청탁 및 비호 논란: 황희는 처남들(양수, 양치)이 법에 어긋난 일을 했을 때도 구차한 글을 올려 변명하며 그들을 구제했고, 자신의 장남 황치신의 몰수된 과전(科田)을 돌려달라고 세종에게 개인적으로 청탁하는 일도 서슴지 않았다.
(이처럼 황희는 군국 대사에는 대쪽같이 강직했으나, 자신의 혈족과 관련된 일에는 물불을 가리지 않는 이중성을 보였다).
[브레이크와 종신노동]
황희의 이러한 사적인 흠결에도 불구하고 세종이 그를 90세 직전까지 붙잡아 둔 이유는 무엇이었을까?
첫째, 황희의 독보적인 능력과 실무 경험이었다.
세종은 황희를 "근래 대신들 가운데 황희만 한 사람이 없다"고 극찬하며, 황희를 식귀 (식별하는 귀신)와 권형 (權衡, 저울, 균형 감각)에 비유했다.
특히 황희는 이론에 밝은 학자가 아니라 실제 쓸 수 있는 학문을 가지고 있는 실무에 밝은 사람이었기에, 세종의 개혁 정책이 현실적으로 어떤 효과와 부작용을 낳을지 정확히 예측할 수 있었다.
둘째, 정치적 안정성의 측면이다.
황희는 개국공신이 아니었기 때문에 조정에 자기 세력이 없었다.
세종은 황희를 영의정 자리에 오랫동안 유지함으로써, 다른 관료 집단이 세력을 독점하거나 왕권(군주권)을 견제하는 것을 막을 수 있었다.
셋째, 세종의 정치적 보호 전략이었다.
황희는 친인척 비위로 인해 은퇴 후 정치적 보복을 당할 흠결이 많았다.
세종은 황희가 사직서를 낼 때마다 이를 반려하며 "황희는 벼슬에 욕심이 없는데 내가 막는 것이다"라는 이미지를 연출했고, 이는 황희를 외부의 공격과 비난으로부터 보호하는 장치였다.
황희가 모친상(어머니 용궁 김씨의 상)을 당해 3년상을 치르려 했을 때, 세종은 황희에게 기복 (起復, 상중에도 관직에 복귀하는 것)을 명했다.
이러한 세종의 행동은 단순히 훈훈한 일화가 아니라, 황희에게 "너는 나에게 약점 잡힌 노예이니 은퇴 같은 건 생각하지 말고 일이나 하라"는 강력한 메시지였다.
세종은 건강 문제로 사직을 청하는 황희에게 "누워서라도 집에서 업무를 보라"고 재택근무까지 지시했다.
황희는 무려 9명의 왕을 모신 여말선초의 산증인으로서, 은퇴도, 안식년도 없는 종신 노역형에 시달렸다.
황희는 영의정으로 재임하는 동안 4군 6진 개척을 건의하고, 외교를 도맡아 외국 사신들이 깍듯이 대하게 만들었으며, 법령집인 《경제육전》의 편찬을 감독하는 등 조선 초기의 제도적 기틀을 완성했다.
그의 호(號)인 방촌 (厖村)은 '삽살개가 짖는 마을'이라는 뜻인데, 평생 격무에 시달리면서도 마음만은 고향 마을의 평화로움을 꿈꾼 것이 아니었을까 짐작된다.(전승)
제4부. 백발 홍안의 치사(致仕)와 신화 (세종 말 ~ 문종 시대)
[마침내 은퇴를 윤허받다]
황희의 나이 87세 (만 86세).
그는 20년 가까이 영의정 자리에 머물며, 늙고 병든 몸을 이끌고 벼슬살이를 하고 있었다.
세종은 황희에게 이미 종신 노역형과 다름없는 가혹한 업무를 부여하고 있었다.
황희 : "전하. 신(臣)은 귀는 멀고 눈은 어두워 듣고 살피는 일이 어렵사옵니다. 허리는 아프고 다리는 부자유하여 걸음을 걸으면 곧 쓰러질 지경입니다. 엎드려 바라오니 신의 쇠하고 늙음을 불쌍히 여기시어 몸을 수양하게 하옵소서."
이러한 사직 상소는 매년 있는 연례 행사였다.
하지만 세종의 대답은 늘 같았다.
"윤허하지 않는다."
세종은 심지어 황희에게 "집에서 누워서라도 업무를 보라"는 명을 내려 재택근무를 지시할 정도였다.
황희는 1449년(세종 31년) 10월에 이르러서야 영의정 직에서 치사 (致仕, 늙어서 벼슬을 사양하고 물러남)를 윤허받았다.
은퇴 후 황희는 경기도 파주 (坡州)의 임진강변에 머물렀다.
그곳에 반구정 (伴鷗亭, 갈매기와 벗 삼는 정자)이라는 정자를 짓고 여생을 보냈다.
황희 (반구정 마루에 앉아 임진강을 내려다보며) : "이제야 비로소 갈매기와 벗을 삼는구나. 허허. 9명의 임금을 모신 이 몸도, 이제는 강가의 한 점 그림자일 뿐이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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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진강에 날아온 갈매기와 벗삼아 나누는 정자 |
[성군의 부재와 명재상의 최후]
그러나 은퇴는 오래가지 못했다.
황희가 영의정에서 물러난 지 불과 6개월 후, 그의 평생의 파트너였던 세종대왕이 1450년(문종 즉위년) 승하했다.
황희는 세종이 떠나고 2년 뒤인 1452년(문종 2년), 90세의 나이로 파주에서 노환으로 세상을 떠났다.
그의 시호는 익성 (翼成, 익: 사려가 심원함, 성: 재상이 되어 끝까지 잘 마침)으로 정해졌다.
황희가 죽은 직후, 그의 공과 사를 둘러싼 논란은 절정에 달했다.
《세종실록》 편찬 작업이 진행되던 중, 사관 이호문 (李好問)이 작성한 사초(史草)에 황희의 부패, 뇌물 수수, 소송 청탁, 그리고 박포의 처와 간통했다는 혐의 등 부정적인 기록이 다수 포함되어 있음이 문제가 되었다.
실록 편찬을 지휘하던 황보인 (皇甫仁, 당시 좌의정)과 김종서 (金宗瑞, 당시 우의정)는 이호문이 사사로운 원한 때문에 황희의 비리를 지나치게 과장하거나 왜곡했을 수 있다는 시각을 가졌다.
정인지(鄭麟趾)나 성삼문(成三問) 같은 학자들도 이 기록을 삭제해야 한다는 의견을 냈다.
정인지 (감수 책임자) : "황희는 명재상이셨다. 어찌 이호문(사관) 한 명의 사사로운 기록 때문에 그 분의 명예를 훼손한단 말인가?"
김종서 (재상) : "그것은 이호문이 개인적인 악의로 쓴 내용일 수 있소. 재상들이 (황희를) 너무 오래 비호하여 생긴 비난일 뿐이오."
하지만 결국 '실록을 고친 전례를 남길 수 없다'는 원칙을 따르기로 결정하면서, 이 비판적인 기록들은 삭제되지 않고 《조선왕조실록》에 그대로 남게 되었다.
이는 황희가 완벽한 청백리가 아니었다는 역사적 사실을 뒷받침하는 근거가 되었다.
[청백리 신화의 완성]
황희는 죽은 지 5일 만에 세종의 종묘 배향공신 (宗廟配享功臣, 종묘에 왕과 함께 모셔지는 공신)으로 정해졌고, 이후 그의 막내아들 황수신 (黃守身)이 계유정난 (세조가 어린 단종을 몰아내고 왕위를 찬탈한 사건) 후 공신(좌익공신)이 되면서, 황희는 남원부원군 (南原府院君)에 추봉(追封)되었다.
이후 수백 년이 흐르면서, 황희에 대한 후대의 평가는 실록의 복잡한 진실과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다.
문화적 영향 및 후대의 평가
1. 신격화와 청백리 신화: 후대 조선의 양반 관료집단은 황희를 미화, 신격화했다.
그의 청렴함은 청빈함으로 와전되어 확대되었고, 이 과정에서 그의 부패와 물의는 가려졌다.
양반 기득권 세력은 청백리 황희 정승의 신화를 인용하여 군주권을 견제하고 신권을 지키는 논리로 활용했다.
이는 조선 왕조 500년 동안 양반 세력의 기득권을 보호하는 데 일정한 역할을 했다.
2. 미담의 주인공: 황희는 야사(野史, 공식 역사서에 실리지 않은 이야기)에서 온화하고 너그러운 성품의 상징으로 자리 잡았다.
◦ 누런 소와 검은 소 일화: 남을 흉보는 것을 경계하여 말 못하는 짐승에게도 예의를 지켜야 한다는 교훈을 주었다.
◦ '네 말도 옳고, 네 말도 옳다' 일화: 두 여종의 다툼에 양쪽 모두에게 "네 말이 옳도다"라고 답하여, 편 가르기 없는 관대함과 불필요한 논쟁에 휘말리지 않는 처세술을 상징하게 되었다. (논쟁: 현대에는 이를 '양비론을 펼치는 쿨찐'으로 오해하기도 했으나, 실제 의미는 의미 없는 논쟁에 참여하지 않겠다는 것으로 재평가된다.)
3. 건축 유적: 황희가 유배 시절 지었던 광통루 (廣通樓)는 훗날 광한루 (廣寒樓)로 개명되며, 《춘향전》의 무대가 되었다.
또한 은퇴 후 머물렀던 파주의 반구정 (伴鷗亭)은 그의 말년의 평안함을 상징하는 유적지로 남아있다.
역사의 교훈 및 배울 점
황희의 일대기는 한 인간이 지닌 공(公)과 사(私)의 이중성과, 최고 권력이 인재를 활용하는 방식을 극명하게 보여줍니다.
황희는 조선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으로 존경받았고, 그의 능력과 강직함은 왕의 독주를 막는 브레이크 역할을 했습니다.
그러나 그는 친족의 비위와 사적인 스캔들에 연루되며 공직자로서 치명적인 과실을 저질렀고, 이는 강한 비판을 받아 마땅합니다.
그의 삶은 '대체(大體)를 보존하는 능력'이 사소한 흠결을 덮을 수 있었던 당시의 냉혹한 정치 현실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공직자에게 요구되는 도덕적 청렴성이 얼마나 중요한 가치인지 역설적으로 깨우쳐 줍니다.
세종(좋은 리더)이 황희(좋은 팔로워)를 중용한 것은, 황희가 자기 세력이 없어 왕권을 위협하지 않았고, 유능함은 유지했으나 약점(흠결)이 많아 왕이 이를 보호해주어야 했기 때문에 왕의 통제 아래 둘 수 있는 최적의 인재였기 때문입니다.
이 결합은 세종 시대 태평성대라는 긍정적인 결과를 낳았지만, 황희에게는 은퇴도 없는 종신 노역을 의미했습니다.
황희 정승의 삶은 마치 잘 벼려진 명검과 같습니다.
나라를 다스리는 데는 둘도 없는 강력한 무기였으나, 너무 날카로워 사적인 영역에서는 자주 상처를 내고 피를 묻히기도 했습니다.
후대의 사람들은 그 검의 빛나는 칼날만을 기억했지만, 역사적 기록은 그 칼날에 묻은 피와 흠결 또한 잊지 말라고 경고합니다.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과 정통 연구서에 전해지는 방촌 황희의 생애를 토대로, 중요한 사건·인물 관계를 정리한 뒤 일부 장면과 심리, 대사를 소설 형식으로 재구성한 역사 서사입니다.
연대·직책·사건의 큰 줄기는 사료에 맞추었고, 불확실하거나 논쟁이 있는 부분은 (전승)/(논쟁) 등의 표기로 최대한 구분하려고 했습니다.
황희에 대한 평가는 ‘완벽한 청백리’ 신화를 그대로 따르기보다, 공적인 능력과 사적인 흠결을 함께 드러내 오늘 우리가 무엇을 배워야 할지 고민해 보려는 시도입니다.
다른 연구와 해석도 존재하니, 한 가지 관점이 아니라 “이런 읽기도 가능하구나” 하는 열린 마음으로 봐 주시면 좋겠습니다.
This article traces the life of Hwang Hui (Bangchon), a brilliant yet flawed statesman who bridged late Goryeo and early Joseon.
Born with ambiguous status but great talent, he rose in office, opposed Taejong’s change of crown prince and suffered exile, then returned under Sejong as the longest-serving chief councillor.
The essay contrasts his public virtues—practical reforms, famine relief, and checking Sejong’s bold policies—with his private failings, especially indulgence and cover-ups for corrupt relatives.
It also shows how later ages polished him into a “clean official,” while records reveal a more human figure whose strengths and weaknesses shaped Joseon’s early golden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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