펜으로 삼한을 통일한 신라의 외교관, 강수 이야기
1. 소머리 아이, 강렬한 머리를 얻다: 특별한 출생과 유학자의 길
강수는 오늘날 충청북도 충주인 중원경 사량부 출신입니다.
그의 아버지 석체(昔諦)는 신라의 17관등 중 하나인 나마 벼슬을 지낸 인물이었는데, 강수의 탄생에는 기이한 이야기가 전해집니다.
강수의 어머니가 뿔 달린 사람을 꿈에서 보고 임신한 후 그를 낳았는데, 아이의 머리 뒷부분에 뿔처럼 툭 튀어나온 혹이 있었다고 합니다.
아버지는 이 기이한 생김새에 놀라 현자(賢者)를 찾아가 물었습니다.
현자는 "원래 옛 성인들은 생김새가 비범한 사람들이 많았으며, 관상에서 머리의 사마귀는 나쁜 징조가 아니니, 이 아이는 반드시 큰 인물이 될 것입니다"라고 평가했습니다.
이에 아버지는 아이를 나라의 인재로 만들겠다고 다짐하며, 그 뿔 달린 머리를 가리켜 아이의 이름을 우두(牛頭), 즉 '쇠머리'라고 지었습니다. (후에 자두(字頭)라고도 알려졌습니다)
흥미롭게도, 훗날 강수는 태종무열왕에게 자신을 ‘임나가량(任那加良)’ 사람이라고 밝혔습니다.
이는 그가 우륵이나 김유신 가문처럼 신라에 편입된 가야 출신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논쟁)
비록 그의 최종 관등인 사찬(沙飡, 8위)은 6두품의 최고 관직인 아찬(6위)보다 낮았으며, 엄격한 신라 골품제 사회에서 6두품으로서의 신분적 한계가 존재했습니다. (논쟁)
강수는 어릴 때부터 불교가 아닌 유학(儒學)에 깊이 정진했습니다.
그는 불교를 "세상 밖의 가르침(世外敎)이므로 세간의 인간에게 쓸모가 없다"고 거부하고, 현실 사회에 밀접한 유교의 도를 배우겠다고 결심했습니다.
이는 유교적인 실력을 바탕으로 자신의 낮은 신분적 한계를 극복하려는 의지가 반영된 선택으로 보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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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수 표준영정 |
2. 신분을 초월한 사랑: 조강지처를 지킨 문장가의 도덕
강수의 생애에서 유교적 윤리와 도덕의 실천을 보여주는 가장 매력적인 일화는 그의 사랑 이야기와 결혼입니다.
강수는 젊은 시절, 신분이 매우 낮은 부곡(釜谷)의 대장장이 딸과 깊은 사랑에 빠져 야합(혼전 관계)했습니다.
강수가 스무 살이 되어 정식으로 결혼할 나이가 되자, 그의 부모는 그의 학식과 명성이 높다며, 천한 신분의 대장장이 딸과의 결혼을 반대하고 읍내의 다른 처녀를 중매하려고 했습니다.
이때 강수는 유교적 윤리를 내세워 부모를 설득했습니다.
그는 옛사람의 조강지처(糟糠之妻) 고사를 예로 들며, 이렇게 말했습니다.
"가난하고 천한 것은 부끄러운 일이 아닙니다. 도를 배우고도 그것을 실행하지 않는 것이 진실로 부끄러운 일입니다."
"가난할 때 함께했던 아내는 내쫓을 수 없고, 빈천할 때 사귄 친구는 잊을 수 없다고 들었습니다. 그런 이유로 천한 신분일지라도 차마 버릴 수 없습니다."
결국 강수는 부모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이 낮은 신분의 여인을 아내로 맞이하여 해로(偕老)했습니다.
이는 골품제 사회의 신분 차별적인 윤리에 대한 비판적인 의식을 드러내며, 유교에서 중시하는 인의(仁義)의 실천을 몸소 보여준 행동이었습니다.
다만, 당시 신라의 규범상 낮은 신분의 어머니에게서 태어난 자녀는 평민 신분이 되었기 때문에, 강수가 후손에 관한 기록을 남기지 못했거나 자손이 평민 신분으로 존재감이 말소되었을 가능성이 있습니다. (추정)
3. 외교의 달인: 붓으로 나라를 구한 활약상 (태종무열왕 대)
강수의 빛나는 외교관 경력은 태종무열왕(김춘추, 재위 654~661년) 시절에 시작됩니다.
태종무열왕 즉위 원년인 654년, 당나라 사신이 전한 황제의 조서(國書)는 그 한문 문장이 난해하여 조정의 신료들이 아무도 명쾌하게 해석하지 못하고 끙끙대고 있었습니다.
이 때, 젊은 문장가 우두(강수)가 나서서 그 조서를 보고 명쾌하게 설명하고 해석했습니다.
무열왕은 크게 놀라고 기뻐하여 그의 출신을 물었고, 우두는 "신은 임나가량 사람이며 이름은 우두입니다"라고 대답했습니다.
무열왕은 그의 특이한 머리 모양을 보더니 "경의 두골을 보니 강수(強首, 센 머리) 선생이라고 부를 만하다"고 말하며, 이때부터 '강수'라는 이름을 얻게 되었습니다.
곧바로 강수는 당 황제에게 보내는 답서를 작성했는데, 그 문장이 교묘하면서도 뜻을 다 나타내는 훌륭한 문장이었습니다.
무열왕은 그를 더욱 높이 평가했으며, 존중의 의미로 그의 이름 대신 '임생(任生)', 즉 임나가량 출신의 선생이라고 불렀고, 그를 늦게 만난 것을 탄식했다고 합니다.
이후 강수는 삼국통일 전쟁기에 신라의 중요한 외교 문서 작성을 전담하게 되었습니다.
특히 중요한 활약으로는, 당나라에 인질로 잡혀 있던 무열왕의 아우 김인문(金仁問)을 석방해 줄 것을 청하는 「청방인문표(請放仁問表)」를 지은 것입니다.
이 글은 당 고종을 감동시켜 김인문을 풀어주고 돌려보내게 했다고 전해집니다.
강수는 본래 재물에 욕심이 없는 청백리여서 자기 생계를 돌보지 않아 집안이 가난했습니다.
무열왕은 이 사실을 알고 해마다 곡식 100섬을 그에게 주도록 조치했습니다.
4. 나당 전쟁의 최전선: 붓으로 맞선 외교 전략가 (문무왕 대)
강수는 무열왕에 이어 문무왕(재위 661~681년) 때에도 계속 활약하며, 신라 최고의 외교 전략가로서 삼국 통일 과정에 크게 기여했습니다.
백제와 고구려가 멸망한 후, 당나라는 한반도 전체를 지배하려는 야욕을 드러냈고, 신라와 당나라 사이에는 나당전쟁이 발발했습니다.
당나라의 장군 설인귀(薛仁貴)가 신라의 '불충'과 '배은'을 질책하며 침공을 위협하는 서신을 보내오자, 문무왕은 이에 반박하는 「답설인귀서(答薛仁貴書)」를 작성하게 했는데, 이 글을 강수가 지은 것으로 추정됩니다. (논쟁)
이 국서는 신라가 당나라와 연합하여 백제와 고구려를 정벌하는 과정에서 겪었던 어려움과 당나라 군사를 구원했던 사실들을 상세히 기술하며, 당나라가 백제의 참소(거짓말)만을 믿고 신라를 치는 것은 온당하지 않다고 간곡히 변명하고, 설인귀에게 황제에게 보고하여 신라 정벌을 중지해 줄 것을 요청하는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이 글은 신라의 자주적인 입장을 세련되게 표현한 외교 전략이 담긴 명문으로 평가받았습니다.
문무왕은 강수의 공로를 높이 평가하며, "고구려와 백제를 평정한 것은 비록 군사적 공로지만, 당나라와의 외교를 문장(국서 작성)으로 담당한 강수의 공도 크다"고 칭찬했습니다.
왕은 강수에게 사찬(沙飡)의 관등을 내리고 녹봉을 높여 매년 곡식 200섬을 주도록 했습니다.
5. 유교의 기틀을 다지다: 국학에서의 교육과 죽음
강수는 문무왕을 거쳐 신문왕(재위 681~692년) 때까지도 나라에 봉사했습니다.
신문왕은 자신의 왕권을 강화하기 위해 유교 이념을 적극적으로 수용했는데, 이러한 정치적 목표의 일환으로 국학(國學, 국립 교육기관)이 설치되자, 강수는 설총과 함께 유교 경전을 강의하는 데 참여했습니다. (논쟁)
강수의 뛰어난 유학적 소양은 외교 문서 작성뿐만 아니라, 유교적 지배 이데올로기에 필요한 인재를 양성하는 데 활용된 것입니다.
강수는 신문왕 재위 기간(681년 ~ 692년) 중에 세상을 떠났습니다.
그의 사망 시점은 신문왕 재위 말년인 692년경으로 추정되지만, 정확한 연도는 불분명합니다.
강수가 죽자, 신문왕은 나라에서 장례비용을 부담하도록 하고 그의 집안에 많은 옷가지와 피륙을 내렸습니다.
그런데 재물에 욕심이 없었던 강수의 습관을 닮았는지, 그의 집안사람들은 이 하사품을 모두 불사에 바쳤습니다.
이후 강수의 아내는 생계가 어려워져 고향으로 내려가려 했습니다.
신료들이 이 소식을 듣고 왕에게 아뢰어 곡식 100섬을 내리도록 조치하려 했습니다.
그러나 강수의 아내는 이마저도 정중히 사양하며 높은 인품을 보여주었습니다.
"저는 미천한 몸으로 지아비에게 의지하여 입고 먹으며 나라의 은혜를 많이 입었습니다. 지금은 이미 홀몸이 되었는데 어찌 감히 다시 두터운 대우를 받겠습니까?"
이 말을 남기고 그녀는 끝내 고향으로 돌아갔다고 합니다.
강수는 가야계 6두품 출신임에도 불구하고, 뛰어난 문장력과 유교적 윤리 실천을 통해 태종무열왕, 문무왕, 신문왕 3대에 걸쳐 신라의 외교와 교육의 중추적인 역할을 담당했습니다.
그의 문장은 후대에까지 강시 문장이라 불리며 중국과 고려, 조선 시대까지 교육 자료로 활용될 만큼, 그는 펜으로 국가의 이익을 위해 싸운 진정한 외교 전략가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 강수 열전 등 신뢰 가능한 사료와 현대 연구를 바탕으로, 강수의 생애와 외교 활동을 서사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인물의 대사·심리·장면 묘사는 독자의 몰입을 돕기 위한 소설적 각색이며, 가야계 출신 가능성·6두품 추정·답설인귀서 저자 문제 등 학계에서 견해가 갈리는 부분은 (추정)/(논쟁)으로 처리하는 것을 전제로 구성했습니다.
날짜·왕대·직함·사건의 인과관계는 확인 가능한 범위 안에서 최대한 사실에 맞추었으며, 서사적 압축을 위해 일부 사건은 시간 순서나 표현이 정리·요약되어 있습니다.
이 글은 학술 논문이 아니라 교양용 역사 스토리텔링이라는 점을 염두에 두고 읽어주시길 바랍니다.
Kangsu, born in Jungwon with a horn-like bump on his head, chose Confucian learning over Buddhism and married a low-born blacksmith’s daughter, defending her as his true wife.
A brilliant stylist, he decoded Tang edicts for King Taejong Muyeol and wrote masterful memorials that won Kim Inmun’s release and argued Silla’s case against Tang in the Naktan war.
Later he taught Confucian classics at the royal academy, dying poor but honored as a loyal, incorruptible diplomat who helped “unify the Three Hans with a brus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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