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제10대 왕 정종: 천리장성·거란 대응·선위로 완성한 황금기의 밑그림 (King Jeongjong of Goryeo)


고려의 황금기를 설계한 청년 군주, 정종(靖宗): 천리장성에 담긴 어진 통치 12년


I. 연경궁의 총명한 아들, 왕형(王亨)의 탄생과 즉위

고려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우리는 흔히 '해동공자' 최충이 활약하고 고려 문화를 꽃피웠던 문종 시대를 황금기로 꼽습니다. 

그러나 그 찬란한 태평성대의 기틀을 닦고, 북방의 거친 바람을 몸소 막아내며 안보의 방벽을 완성한 숨은 주역이 있습니다. 

바로 고려 제10대 국왕 정종(靖宗)입니다. 

17세에 왕관을 쓰고 29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난 이 청년 군주의 삶은, 고려라는 나라를 지탱한 단단한 주춧돌과 같았습니다.


1. 운명적인 만남과 연경궁의 축복

정종의 가계 배경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의 부친인 현종(顯宗)의 고난 가득했던 시절로 거슬러 올라가야 합니다. 

1011년(현종 2년), 거란의 대규모 침공으로 개경이 함락될 위기에 처하자 현종은 멀리 나주로 피란길을 떠나야 했습니다. 

추위와 굶주림, 그리고 언제 들이닥칠지 모르는 적군의 위협 속에서 고단한 행렬이 이어졌습니다.

행렬이 공주에 이르렀을 때, 당시 공주절도사였던 김은부(金殷傅)가 왕을 정성껏 영접했습니다. 

김은부는 자신의 첫째 딸(훗날의 원성왕후)에게 명하여 현종의 해진 의복을 짓게 했습니다. 

전쟁의 포화 속에서 피어난 이 소박한 인연은 고려 왕실의 지형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현종은 그녀의 어진 성품에 감동하여 왕비로 맞이했고, 이들 사이에서 고려의 두 명군인 덕종과 정종이 태어나게 됩니다.


1018년(현종 9년) 7월 17일, 개경 연경궁(延慶宮)에서 차남 왕형(王亨)이 탄생했습니다. 

그가 태어난 해는 고려의 불교적 염원이 담긴 대사찰 현화사(玄化寺)가 완공된 상서로운 해이기도 했습니다. 

본래 어머니 김씨가 머물던 곳은 '연경원(院)'이라 불렸으나, 왕형의 탄생과 함께 그 위상이 격상되어 '궁(宮)'으로 불리게 되었습니다. 

이는 그가 태어날 때부터 왕실의 큰 기대를 한 몸에 받았음을 의미합니다.


2. 총명한 왕자의 성장과 위상

어린 왕형은 자를 신조(申照)라 하였으며, 어릴 때부터 식견과 도량이 넓고 영특하다는 찬사를 받았습니다. 

고려사는 그를 "성품이 너그럽고 어질며 효성과 우애가 깊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그는 만 4세인 1022년에 이미 평양군(平壤君)으로 책봉되었습니다. 

이는 서경(평양)이라는 제2의 수도를 분봉받은 것으로, 당시 왕족 중에서도 최고의 서열에 있었음을 보여줍니다.

그는 즉위 전까지 화려한 품계와 실무적 상징성을 띤 관직들을 두루 거쳤습니다. 

당시 고려 왕실이 왕족들에게 부여했던 관직 체계는 단순한 명예를 넘어 '천자국'으로서의 위엄을 드러내는 수단이었습니다.


즉위 전 정종(왕형)의 주요 품계와 관직 상세

구분
명칭
역사적 의미 및 위상 설명
봉호
평양군(平壤君)
고려 제2수도 서경 지역을 식읍으로 받은 왕자의 칭호. 왕위 계승권자의 위상 상징
문산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
종1품의 최고 품계. 독자적인 관부(府)를 열 수 있는 특권과 위계
검교직
검교태사(檢校太師)
국왕의 스승이라는 명예를 지닌 최고위직. 실제 정무보다는 권위를 상징
실직
내사령(內史令)
중앙 최고 기구인 내사성(훗날의 중서문하성)의 장관. 고위 왕족에게만 수여된 명예 실직


3. 중광전의 유조: "고려의 사직을 아우에게 맡기노라"

1034년 9월, 정종의 친형인 덕종(德宗)이 19세의 꽃다운 나이에 붕어하게 됩니다. 

덕종은 거란에 대해 매우 강경한 입장을 견지하며 천리장성의 초석을 놓았던 군주였습니다. 

자신의 마지막을 예감한 덕종은 동생 왕형을 침전으로 불렀습니다.


덕종: "형(亨)아, 나의 명운이 여기서 다한 듯하구나. 짐은 비록 가나, 너의 영민함과 굳건한 성품을 믿는다. 거란의 무리들이 우리를 얕보지 못하게 하라. 내가 시작한 성벽을 반드시 완수하여 백성들을 편안케 하라."

왕형(정종): "형님, 어찌 그런 약한 말씀을 하십니까! 속히 쾌차하시어 소제(小弟)를 이끌어주셔야 합니다. 고려의 대업은 아직 형님의 손길이 필요합니다."

덕종: "아니다... 이것은 짐의 마지막 명령(遺命)이니라. 이제 네가 고려의 주인이다. 중광전으로 가서 사직을 받들어라."


1034년 9월 17일, 정종은 슬픔을 갈무리하고 본궐 편전인 중광전(重光殿)에서 제10대 국왕으로 즉위했습니다. 

17세의 청년 왕에게 주어진 과제는 형이 남긴 '강국 고려'의 꿈을 완성하는 것이었습니다.


II. 칼날 위의 외교: 거란의 위협과 천리장성의 완성

정종의 통치 전반기는 거대한 제국 거란(요나라)과의 치열한 외교 전쟁과 실제적인 군사적 대치로 점철되었습니다. 

형 덕종의 뒤를 이은 정종은 결코 거란의 압박에 굴하지 않는 강단 있는 지도자였습니다.


1. 거란의 무리한 요구와 정종의 사보희언(似涉戱言)

1035년(정종 1년) 5월, 거란은 고려의 왕위 교체기를 틈타 대규모 사신단을 파견하며 세 가지 무리한 요구를 들이밀었습니다.

첫째, 덕종 대에 단절된 국교를 즉시 회복하고 사절을 보낼 것. 

둘째, 고려가 북방에 쌓고 있는 석성(石城, 천리장성) 축조를 즉각 중단할 것. 

셋째, 만약 이를 따르지 않을 경우 무력 침공을 불사하겠다는 것이었습니다.


당시 조정의 대신이었던 서눌(徐訥)과 왕가도(王可道) 등은 거란의 기세를 경계하며 철저한 대비를 주장했습니다. 

특히 서희의 아들인 명신 서눌은 판도병마사로서 국방의 실무를 총괄하며 정종을 보좌했습니다. 

거란 사신이 황제의 서신을 내밀며 협박 섞인 말을 내뱉자, 17세의 젊은 왕 정종은 눈썹 하나 까딱하지 않고 답했습니다.


정종: "사신은 보낼 만큼 이미 보내고 있는데 무엇을 더 요구하는가? 성을 쌓는 것은 우리 땅 안에서 백성을 보호하기 위한 일이니, 그대들이 참견할 바가 아니다. 지금 나를 전쟁으로 겁박하려 드는 것인가? 그런 말도 안 되는 우스갯소리(사보희언, 似涉戱言)는 집어치우고, 너희가 억류하고 있는 우리 사신 6명이나 당장 돌려보내라!"


이 단호한 태도는 거란을 당황케 했습니다. 

정종은 말뿐만 아니라 실제 군사력을 강화하기 위해 제위군(諸衛軍)에게 토지를 지급하여 군사들의 사기를 높이고 북방의 전력을 극대화했습니다.


2. 국방의 금자탑, 천리장성(千里長城)의 여정

정종은 형 덕종의 유업을 잇기 위해 천리장성 축조에 국가의 명운을 걸었습니다. 

1033년(덕종 2년) 유소(柳韶)의 건의로 시작된 이 거대 공정은 정종의 재위 기간 내내 이어졌습니다.

장성은 서해의 압록강 하구에서 시작하여 평안북도와 자강도를 거쳐 동해의 도련포(광포호)에 이르는 장대한 규모였습니다. 

정종은 예성강의 병선 180척을 동원하여 막대한 군수 물자와 석재를 운반했고, 서북계 주진의 창고에 식량을 가득 채워 장기전에 대비했습니다.

이 성벽은 단순한 돌담이 아니었습니다. 

장성이 지나는 길목에는 위원, 흥화, 정주, 영해, 영덕, 영삭, 정융, 영원, 평로, 맹주, 삭주, 운주, 안수, 청새 등 13성(혹은 14성)이 유기적으로 연결되었습니다. 

현대 북한 학계의 조사에 따르면 이 성벽의 길이는 약 630km에 달하며, 높이는 4~7m에 이르는 견고한 관방 시설이었습니다. 

1044년(정종 10년), 마침내 천리장성이 완공되자 북방 유목 민족의 침입은 사실상 차단되었습니다.


3. 실리적 강경책: 1037년의 승리와 관계 정상화

1037년(정종 3년), 거란은 수군을 동원하여 압록강 일대를 침범하며 고려의 기세를 꺾으려 했습니다.

그러나 이미 성벽을 쌓고 군비에 만전을 기했던 고려군은 이를 가볍게 격퇴했습니다. 

정종은 승리한 직후, 오히려 외교적 유연함을 발휘했습니다.

거란이 장성 축조를 묵인하는 태도를 보이자, 정종은 1037년 12월 거란과 국교를 정상화하고 그들의 연호를 사용하기 시작했습니다. 

이는 굴욕이 아닌 '실리'였습니다. 

대외적으로는 화친의 모양새를 갖추어 백성들이 전쟁의 공포에서 벗어나게 하면서도, 내부적으로는 성벽을 끝까지 완공하고 북방 경비를 늦추지 않는 '치밀한 양면 정책'이었습니다.


거란의 압박에 대한 정종의 대응 분석

거란의 요구 사항
고려의 대응 및 조치
정책적 성격
국교 재개 및 사절 파견
억류 사신 6명 반환 요구 후 1037년 실리적 복교
유연한 실리 외교
장성(석성) 축조 중지
"우리 땅 안의 일"이라 일축하며 축조 강행 (1044년 완공)
자주 국방 의지
전쟁 협박 및 무력 시위
"웃기는 소리"라 대응, 1037년 침입 격퇴
강경 대응 및 자신감

천리장성은 단순히 돌을 쌓은 벽이 아니라, 고려라는 천자국(天子國)의 자존심을 지키는 최후의 보루이자 안보의 심장이었습니다.


III. 황제의 위엄과 백성을 향한 온기: 내치와 복지

정종은 외교적 안정뿐만 아니라 고려 내부의 위상을 확립하고 백성들의 삶을 돌보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이 시기는 고려가 자국 내에서 스스로를 황제국으로 인식하는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가 가장 확고해진 시기였습니다.


1. 천자국의 자부심, 신봉루(神鳳樓)와 대사천하(大赦天下)

정종은 고려 황성 정문인 광화문과 궁성 정문인 승평문을 지나면 나타나는 가장 화려한 누각, 신봉루에서의 행사를 정례화했습니다. 

신봉루의 간판은 붉은 바탕에 황금색 글자로 새겨져 천자국만이 누릴 수 있는 장엄함을 뽐냈습니다. 

이곳에서 정종은 외국 상인들과 탐라, 여진의 부족장들에게 조공을 받고, 온 천하에 죄를 사하는 '대사천하(大赦天下)'를 선포했습니다.

특히 1044년에 세워진 보현사 석탑 비문에는 당시 정종을 향한 백성들의 인식이 그대로 담겨 있습니다.

"고려 황제폐하의 덕은 하늘과 땅과 같고, 밝기는 해와 달과 같아서 백성이 불길처럼 번성하고 있다."

이 기록은 정종이 대내적으로 '황제'로 불리며 통치의 정당성과 카리스마를 확보했음을 증명합니다. 

또한 연등회 때는 치황의(梔黃衣)라 불리는 황금색 의복을 입고 봉은사 효사관을 참배하며 제국의 기품을 드러냈습니다.


2. 가뭄과 지진, 그리고 군주의 눈물

정종의 재위 기간에는 유독 자연재해가 잦았습니다. 

1035년과 1036년, 개경과 동경(경주), 상주 등 19개 주를 뒤흔드는 대지진이 발생하여 수많은 가옥이 파손되었습니다. 

또한 극심한 가뭄이 들어 농사가 망치자 백성들은 굶주림에 허덕였습니다. 

정종은 이 모든 재난을 자신의 부덕함 탓으로 돌렸습니다.


정종: "하늘이 노하여 땅이 흔들리고 대지는 바짝 말랐으니, 이는 모두 이 짐이 백성을 온전히 사랑하지 못한 탓이로다. 백성들은 풀뿌리로 끼니를 잇는데, 내가 어찌 기름진 고기반찬을 대할 수 있겠는가. 오늘부터 내 수라상의 반찬 가짓수를 줄이고, 궁궐 동지의 진귀한 동물들을 모두 풀어주어 사치를 경계하리라."


정종은 실제로 황성 동쪽에 있던 큰 호수 동지(東池)에서 기르던 이국적인 동물들을 풀어주어 낭비를 막았습니다. 

또한 유난히 추운 겨울이 오자, 고려의 제후국 경계에서 잡혀온 포로들인 몰번회토(沒蕃懷土 오랑캐(蕃) 땅에 잡혀가서(沒) 고향(土)을 그리워한다(懷)) 80여 명에게 두터운 의복을 하사하여 그들의 얼어붙은 마음까지 녹여주었습니다. 

동서대비원(東西大悲院 불교식 의료 복지기관)을 중수하여 빈민과 병자들에게 음식과 의복을 베푼 것은 그의 '애민 정신'이 제도적으로 발현된 핵심 사례입니다.


3. 고려 사회의 기틀을 잡은 3대 법안

정종은 고려가 성숙한 사회로 나아가기 위한 제도적 장치들을 마련했습니다.

• 노비종모법(奴婢從母法, 1039년): "노비는 어머니의 신분을 따른다"는 원칙을 세워 신분 질서의 혼란을 막고 사회적 안정을 꾀했습니다. 

이는 가계의 안정을 도모한 혁신적인 조치였습니다.

• 장자상속법(長子相續法, 1046년): 적장자 승계의 원칙을 확립하여 가문의 재산 분쟁을 줄이고 유교적 질서를 강화했습니다. 

이는 훗날 조선 시대까지 이어지는 가족 제도의 원형이 되었습니다.

• 도량형 규격 정비: 세금 수취 과정에서 관리들의 폐단을 방지하기 위해 도량형의 규격을 엄격히 마련하여 경제적 공정성을 확보했습니다.

이 외에도 그는 악공, 잡류, 5역(부모 살해자 등)의 자손들이 과거에 응시하는 것을 금지하여 공직 사회의 도덕적 기준을 높였으며, 비서성을 통해 『예기정의』, 『모시정의』 등을 간행하여 유교적 통치 이념을 보급했습니다. 

또한 승려들이 불경을 암송하며 복을 비는 경행(經行) 행사를 정례화하여 불교적 안정감도 놓치지 않았습니다.

정종은 강한 군대라는 칼날과 백성을 향한 복지라는 온기를 동시에 지녔던, 진정으로 균형 잡힌 군주였습니다.


IV. 미래를 위한 위대한 선택: 문종(文宗)에게 넘긴 왕관

정종은 재위 12년 만인 1046년, 29세라는 너무나 젊은 나이에 병석에 눕게 됩니다. 

그에게는 용신왕후와 용의왕후 사이에서 태어난 네 명의 아들(왕형, 왕방, 왕경, 왕개)이 있었습니다.

그러나 그는 사적인 욕심보다 국가의 안위를 먼저 생각했습니다.


1. 성군을 향한 결단: "아우야, 너의 유덕함이 필요하다"

정종은 이복동생인 낙랑군 휘(훗날의 문종)를 침전으로 불렀습니다. 

휘는 이미 효성과 어진 성품으로 인근 나라에까지 명성이 자자한 인물이었습니다. 

정종은 자신의 아들들이 아직 어리고, 거친 국제 정세를 이끌기엔 문종의 자질이 더 뛰어나다는 것을 간파했습니다.


정종: "아우야, 내 기력이 다하여 이제 대점(大漸)에 이르렀다. 내게 아들들이 있으나 아직 어리니, 고려의 사직을 온전히 보전하기엔 너의 지혜가 절실하다. 부디 이 왕위를 이어 고려를 진정한 황금기로 이끌어다오."

낙랑군 휘: "형님, 어찌 그런 말씀을 하십니까! 왕자님들을 잘 보필하여 형님의 뜻을 잇는 것이 소제의 도리이옵니다. 속히 기운을 차리소서."

정종: "아니다... 이것은 짐의 욕심이 아니라 고려의 백년대계를 위한 선택이다. 유덕(有德)한 자에게 왕위를 넘기는 것이 태조 대왕의 유훈이자 나의 마지막 소망이니라."


이 결단은 고려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찬란했던 '문종의 시대'를 여는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자신의 핏줄보다 국가의 역량을 우선시한 이 '희생적 선위'는 오늘날 리더들에게도 큰 울림을 줍니다.


2. 주릉(周陵)의 신비와 검소한 장례

1046년 5월 18일, 정종은 정궁 법운사에서 조용히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의 유언은 "장례를 검소하게 치르라"는 것이었습니다. 

개성에 위치한 그의 능인 주릉(周陵)은 2016년 발굴 당시 학계를 놀라게 했습니다. 

다른 왕릉들과 달리 천정에 화강암 들보 두 개를 얹고 이를 지탱하는 두 개의 기둥이 세워진 독특한 구조였기 때문입니다. 

이는 화려한 장식보다는 견고하고 실용적인 구조를 택함으로써, 사후에도 백성들의 노고를 덜어주려 했던 그의 검소한 유지가 반영된 것으로 평가됩니다.

정종은 왕좌를 떠나는 마지막 순간까지도 자신의 가문이 아닌, 고려라는 나라의 미래를 설계한 진정한 애국자였습니다.


주릉 전경


V. 주릉에 잠든 고려의 숨은 설계자

고려 말의 대학자 이제현은 정종을 가리켜 "선대의 유업을 잘 계승함으로써 나라를 보전한 군주"라고 극찬했습니다. 

그는 부친 현종의 고난을 기억했고, 형 덕종의 강경함을 완성했으며, 동생 문종의 태평성대를 준비한 '가교(架橋)적 지도자'였습니다.

그의 찬가인 태묘 악장 <원화(元和)>는 이렇게 노래합니다.

"저 오성(천리장성)을 건축하시니 변경이 그로 인해 안정됐고, 강토를 봉하고 넓히시니 공덕이 만세토록 영원하리라."


정종의 삶이 남긴 3가지 현대적 통찰

1. 책임감 있는 완수의 리더십: 형이 시작한 천리장성이라는 거대 프로젝트를 중단하지 않고 1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묵묵히 지원하여 끝내 완공해냈습니다. 

리더는 시작하는 것만큼이나 '끝맺는 책임감'이 중요함을 보여줍니다.

2. 사심 없는 대승적 결단: 자신의 어린 아들들이 왕위에 오를 수 있었음에도, 더 유능한 동생에게 왕관을 넘김으로써 조직(국가)의 이익을 최우선으로 고려했습니다. 

이는 진정한 '공인(公人) 정신'의 본보기입니다.

3. 공감과 소통의 애민 철학: 지진과 가뭄이라는 재난 앞에서 자신을 먼저 채찍질하고, 빈민과 포로들에게 먼저 옷을 내어준 정종의 모습은, 오늘날 고통받는 이들을 보듬어야 하는 현대 리더십의 핵심인 '공감'을 일깨워줍니다.

비록 29세라는 짧은 생을 마감했으나, 그가 완성한 천리장성의 돌 하나하나와 그가 제정한 어진 법령들은 고려의 황금기를 지탱하는 단단한 주춧돌이 되었습니다. 

주릉에 잠든 청년 군주 정종은, 화려한 스포트라이트 뒤에서 고려의 위대한 미래를 묵묵히 설계한 '진정한 성군'이었습니다.


이 글은 『고려사』·『고려사절요』 등 기본 사료와 국내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고려 제10대 국왕 정종의 치세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집필 과정에서 가능한 한 여러 사료를 교차 검토하며 사실관계를 확인했으나, 고려 전기사는 기록의 한계와 해석의 차이로 인해 연도·제도·사건의 성격을 두고 학계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혹시 사실 오류로 보이는 부분, 다른 사료 해석이 가능한 지점, 또는 보완하면 좋을 인물·사건이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세요.

또한 특정 정책이나 결정(천리장성, 선위, 대거란 외교 등)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의견 교환도 환영합니다.

이 글이 하나의 결론이 아니라, 정종이라는 군주를 더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열린 토론의 출발점이 되기를 바랍니다.


King Jeongjong of Goryeo (r. 1034–1046) was a short-lived yet pivotal ruler who laid the foundations for Goryeo’s golden age. 

Ascending the throne at seventeen after the early death of his brother Deokjong, Jeongjong inherited an unstable international environment dominated by the Khitan Liao empire. 

Rather than yielding to external pressure, he pursued a firm but pragmatic strategy: continuing the construction of the Cheolli Jangseong (Thousand-li Wall) to secure the northern frontier while engaging in carefully calculated diplomacy to avoid full-scale war.

Internally, Jeongjong strengthened royal authority through legal and institutional reforms. 

He promoted social stability by clarifying inheritance and slave-status principles, standardized weights and measures to curb administrative abuse, and expanded welfare institutions to aid the poor, prisoners, and disaster victims. 

His reign was marked by frequent earthquakes and droughts, which he interpreted as a reflection of royal responsibility, responding with austerity and relief policies.

Most remarkably, despite having sons of his own, Jeongjong chose to pass the throne to his capable younger brother Munjong, prioritizing state stability over dynastic interest.

His selfless abdication enabled one of the most prosperous reigns in Goryeo history.

Though he died at only twenty-nine, Jeongjong stands as a rare example of a ruler who combined military resolve, compassionate governance, and long-term vision, quietly shaping the future of the dynasty from behind the scen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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