존 타일러: 우연으로 시작된 미국 제10대 대통령, 헌법 선례를 세우고 배신자로 남다. (John Tyler)


'우연한 대통령' 존 타일러: 전례를 세운 개척자이자 비운의 배반자


1. 미국 역사를 바꾼 '우연(Accident)'의 시작

1841년 3월 4일, 워싱턴 D.C.의 날씨는 몹시 춥고 비가 내렸습니다. 

제9대 대통령으로 취임한 68세의 노장 윌리엄 헨리 해리슨은 강인함을 과시하려 코트도 입지 않은 채 무려 2시간 동안이나 취임사를 낭독했습니다. 

그러나 이 무리한 일정은 폐렴과 늑막염으로 이어졌고, 그는 취임 단 31일 만에 숨을 거두었습니다. 

미국 헌법 제정 이후 현직 대통령이 임기 중 사망한 최초의 사건이었습니다.


당시 부통령이었던 존 타일러는 워싱턴에서 멀리 떨어진 버지니아주 윌리엄스버그의 자택에서 휴식을 취하고 있었습니다. 

국무장관 대니얼 웹스터가 보낸 수석 서기 플레처 웹스터가 4월 5일 새벽, 청천벽력 같은 소식을 전했을 때 타일러는 이 미증유의 사태가 미국 헌법의 거대한 구멍을 드러냈음을 직감했습니다. 

헌법 제2조 1절 6항은 "대통령 유고 시 그 권한과 의무가 부통령에게 귀속된다"고 규정했으나, 그것이 부통령이 '대통령'이라는 직함까지 승계하는 것인지, 아니면 단순히 '권한 대행'으로 남는 것인지 명시하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그의 우연성(His Accidency)"

정적들과 언론은 그를 '선거로 뽑히지 않은 가짜 대통령'이라 폄하하며 이 굴욕적인 별명을 붙였습니다. 

하지만 타일러에게 이 '우연'은 단순한 운이 아니라, 제도적 스트레스 테스트(Institutional Stress Test)를 통과하여 행정부의 연속성을 확립해야 하는 헌법적 투쟁의 과업이었습니다.

이 우연한 시작이 어떻게 미국 헌법의 모호함을 해소하고, 동시에 한 인물을 역사상 가장 독보적인 '정당 없는 대통령'으로 만들었는지 그 입체적인 생애를 분석해 보겠습니다.


존 타일러 초상화, 1842년


2. 버지니아의 귀족에서 정계의 거물로 (1790~1830년대)

존 타일러의 정치적 자산은 그의 뿌리인 버지니아 가문에서 시작됩니다. 

1790년 찰스 시티 카운티의 '그린웨이' 사유지에서 태어난 그는 철저한 '남부 신사(Gentry)' 교육을 받았습니다. 

그의 아버지 존 타일러 1세는 토머스 제퍼슨과 절친한 사이이자 버지니아 주지사를 역임한 권력자로, 아들에게 엄격한 헌법 해석과 주의 권리(States' Rights)에 대한 신념을 물려주었습니다.

타일러는 12세에 윌리엄 앤 메리 대학에 입학하여 17세에 졸업할 정도로 수재였으며, 19세에 변호사가 된 후 곧바로 정계에 입문했습니다. 

그는 버지니아 하원의원, 주지사, 연방 상·하원의원을 거치며 '제퍼슨식 민주주의'의 수호자로 명성을 쌓았습니다. 

특히 그는 노예 소유주로서 노예제가 연방 전역에서 합법이어야 한다고 믿었으며, 연방 정부의 권력 확대를 극도로 경계했습니다.


정치적 핵심 쟁점
존 타일러의 입장 (엄격한 주권론)
휘그당 주류의 입장 (느슨한 연합)
미합중국 은행
위헌적 독점 기구이며 주의 권리 침해로 간주
1837년 공황 해결을 위한 필수 금융 기관
헌법 해석
헌법에 명시되지 않은 권한은 행사 불가 (Strict)
국가 발전을 위한 유연한 해석 및 연방 권력 강화
관세 및 경제 정책
남부 농업을 압박하는 고관세 정책에 강력 반대
국내 제조업 보호를 위해 헨리 클레이의 '미국 시스템' 지지
정당의 정체성
민주당 탈당 후 오직 '반(反) 잭슨'을 위해 일시 결합
앤드루 잭슨의 '왕정적 독재'를 견제하려는 다양한 세력의 '빅 텐트'


타일러는 앤드루 잭슨의 독선적인 통치 스타일에 반발하여 민주당을 떠났지만, 그와 손을 잡은 휘그당 역시 그에게는 '불편한 동거' 대상이었습니다. 

그는 중앙은행을 혐오하고 주의 권리를 최우선시하는 원칙주의자였기 때문입니다.


버지니아주 찰스 시티 카운티 의 그린웨이 플랜테이션


3. "티페카노, 그리고 타일러도": 1840년의 전략적 선택

1840년 대선 당시 휘그당은 집권 민주당의 마틴 밴 뷰런을 꺾기 위해 이념보다 승리를 우선하는 '빅 텐트'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1837년 공황(Panic of 1837)으로 인해 경제가 파탄 나자, 유권자들은 현직 대통령에게 등을 돌렸습니다. 

휘그당은 이 기회를 포착하여 북서부의 전쟁 영웅 윌리엄 헨리 해리슨을 내세우고, 남부의 표심을 얻기 위해 타일러를 부통령 후보로 낙점했습니다.

• 정치적 계산: 휘그당 지도자 헨리 클레이는 타일러의 신념에는 관심이 없었습니다. 

오로지 타일러가 가진 '남부 귀족의 상징성'과 '탈당한 민주당원'이라는 배경만을 선거 도구로 활용하고자 했습니다.

• 선거 캠페인: 해리슨의 승전지 이름과 타일러를 결합한 "Tippecanoe and Tyler too"라는 슬로건은 미국 역사상 가장 성공적인 선거 홍보 문구가 되었습니다.

• 아이러니한 승리: 휘그당은 통나무집과 독한 사과주(Hard Cider)를 앞세워 서민적인 이미지를 구축했고, 결국 압승을 거두었습니다.

하지만 이 승리는 재앙의 전조였습니다. 

휘그당은 타일러가 언젠가 대통령이 될 수 있다는 사실을 망각한 채, 자신들의 핵심 공약(국립은행 설립 등)과 정면 배치되는 인물을 권력의 2인자로 앉힌 셈이었습니다.


휘그당 의 통나무집 선거 운동 당시 불렀던 노래, 티페카노와 타일러도!


4. 헌법의 수호자 혹은 찬탈자: '타일러 선례'의 확립

해리슨 사망 직후, 워싱턴의 내각은 타일러를 '대통령 직무대행 부통령(Vice President Acting President)'으로 대우하기로 결의했습니다. 

그러나 4월 6일 워싱턴에 도착한 타일러는 이를 단호히 거부했습니다. 

그는 윌리엄 크랜치 수석 판사 앞에서 대통령 취임 선서를 강행하며, 자신이 '대행'이 아닌 온전한 '대통령'임을 대내외에 선포했습니다.

타일러의 고집은 대단했습니다. 

그는 자신을 '대통령 직무대행'이나 '부통령'으로 지칭하여 보낸 모든 공식 문서를 단 한 통도 개봉하지 않고 반송시켰습니다. 

이는 단순히 명예욕 때문이 아니라, 행정부 수반의 지위가 흔들릴 경우 발생할 국가적 혼란을 막기 위한 통치권적 결단이었습니다.


대통령의 사망 소식을 듣는 모습을 묘사한 삽화.


존 타일러의 내각 통제 선언

"실례합니다, 여러분. 여러분의 조언과 충고는 기꺼이 듣겠습니다. 그러나 제가 무엇을 할지 말지에 대해 지시받는 것에는 결코 동의할 수 없습니다. 나는 대통령으로서 내 행정부에 대한 책임이 있습니다. 이에 동의하지 않는다면, 여러분의 사직서를 기꺼이 수리하겠습니다."


국무장관 대니얼 웹스터가 "해리슨 전 대통령은 다수결로 정책을 결정했다"고 은밀히 압박했을 때, 타일러는 위와 같이 일갈하며 행정부의 최종 결정권은 오직 대통령에게 있음을 명확히 했습니다. 

이 '타일러 선례(Tyler Precedent)'는 이후 미국 역사에서 7명의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승계하는 모델이 되었으며, 1967년 수정헌법 제25조로 명문화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5. 고립된 대통령: 휘그당과의 전쟁과 탄핵 시도

대통령으로서의 권위를 확립한 타일러는 곧 휘그당의 지도자 헨리 클레이와 전면전에 돌입했습니다.

클레이는 국립은행 설립을 통해 경제를 재건하려 했으나, 타일러는 이를 위헌이라 규정했습니다.


[타일러의 거부권(Veto) 행사 및 파장]

1. 제2미합중국 은행 재설립 법안(1841): 헌법적 근거 부족과 주의 권리 침해를 이유로 거부권을 행사했습니다.

2. 수정된 은행 법안: 내각과 조율한 절충안이었음에도 독점적 요소가 남았다며 재차 거부했습니다. 

이로 인해 대니얼 웹스터를 제외한 내각 전원이 사퇴하는 초유의 사태가 발생했습니다.

3. 1842년 관세법: 관세 인상과 토지 판매 수익 분배를 연결하려는 휘그당의 시도에 세 차례나 거부권을 행사하며 맞섰습니다.

4. 역사적 기록: 임기 마지막 날인 1845년 3월 3일, 의회는 타일러가 거부한 '세입 감시선 건조 예산'을 미국 역사상 최초로 거부권 무효화(Override) 처리하며 그에게 마지막 모욕을 안겼습니다.


휘그당은 1841년 9월 13일, 타일러를 당에서 제명했습니다. 

존 보츠 하원의원은 미국 역사상 최초로 대통령 탄핵 결의안을 제출했고, 존 퀸시 애덤스가 이끄는 위원회는 타일러를 맹비난하는 보고서를 채택했습니다. 

정당도 지지 세력도 없는 '고립무원'의 상태였지만, 타일러는 굴하지 않고 대통령의 독자적 권한을 행사했습니다.


6. 확장하는 제국: 타일러 행정부의 주요 대외 정책

국내 정치의 고립 속에서 타일러는 외교를 통해 자신의 능력을 증명하려 했습니다. 

그는 미국의 영토와 상업적 지평을 넓히는 것이 지역 간 갈등을 완화하고 연방을 보존하는 길이라 믿었습니다.


외교 정책/조약
목표 및 주요 내용
성과 및 역사적 의의
웹스터-애슈버턴 조약
영국과의 메인주 국경 분쟁 해결
캐나다와의 국경을 확정하고 영미 관계를 개선함
왕샤 조약 (1844)
청나라 시장 개방 및 무역 확대
미국 최초의 대중 양자 조약으로 5개 항구를 개항함
타일러 독트린
하와이에 대한 유럽의 개입 차단
먼로주의를 태평양으로 확장하여 미국의 영향력을 확립함
프리몬트 탐험 지원
서부 영토 조사 및 확장 기반 마련
존 C. 프리몬트와 키트 카슨의 탐험으로 서부 이주가 가속화됨


특히 케일럽 쿠싱을 파견하여 체결한 왕샤 조약은 비록 영국과 프랑스에 비해 영향력은 작았으나, 아시아 시장에 대한 미국의 야심을 보여준 상징적 사건이었습니다.


프리몬트 탐험대의 서부 개척


7. 텍사스 합병: 퇴임 직전의 승부수

타일러의 최대 정치적 승부수는 텍사스 합병이었습니다. 

그는 텍사스를 연방에 편입시켜 영토를 확장하고 자신의 재선 동력을 확보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계획은 1844년 2월 28일, USS 프린스턴호 참사로 인해 비극적인 국면을 맞이합니다.


USS 프린스턴 호 참사

세계 최대의 해군포인 '피스메이커(The Peacemaker)' 시연 도중 대포가 폭발하면서, 에이블 업셔 국무장관, 토머스 길머 해군장관뿐만 아니라 버질 맥시, 데이비드 가디너, 베벌리 케넌 제독, 그리고 타일러의 충성스러운 흑인 노예이자 몸종이었던 아미스테드(Armistead)가 현장에서 사망했습니다. 

갑판 아래에 있던 타일러는 구사일생으로 목숨을 건졌습니다.

이 사고 이후 타일러는 강경 남부론자 존 캘훈을 국무장관에 임명했고, 텍사스 합병은 노예제 옹호 논쟁으로 변질되었습니다.

• 찬성(남부): 영토 확장, 노예제 보존, 영국의 영향력 차단.

• 반대(북부): 노예주의 추가로 인한 연방 불균형, 멕시코와의 전쟁 위험.

결국 타일러는 상원의 3분의 2 비준이 불가능해지자 '양원 공동 결의안'이라는 변칙적 수단을 동원했습니다. 

그는 퇴임 3일 전인 1845년 3월 1일 합병안에 서명했고, 후임 제임스 K. 포크에게 텍사스라는 거대한 영토를 안겨주고 퇴임했습니다.


8. 사생활과 가족: 15명의 자녀와 30살 연하의 아내

타일러의 사생활은 그의 정치만큼이나 파격적이었습니다. 

첫 부인 레티샤가 1842년 백악관에서 사망한 후, 그는 30살 연하의 사교계 명사 줄리아 가디너와 재혼했습니다. 

당시 줄리아는 타일러의 일부 자녀보다 나이가 어려 큰 화제가 되었습니다.


[재밌는 사실] 21세기까지 생존했던 손자 이야기

존 타일러는 역대 대통령 중 최다인 15명의 자녀를 두었습니다. 

특히 63세와 75세에도 자녀를 낳는 놀라운 생식력을 보였습니다. 

그 결과, 그의 손자인 해리슨 러핀 타일러(Harrison Ruffin Tyler, 1928년생)는 2020년대까지 생존하여, 18세기에 태어난 대통령의 손자가 21세기에 살아있는 '시간적 경이로움'을 보여주었습니다.


2018년의 해리슨 러핀 타일러


9. 비운의 마지막: 연방의 대통령에서 남부의 반역자로

퇴임 후 버지니아의 농장 '셔우드 포레스트'로 은퇴한 타일러는 남북 전쟁의 전운이 감돌자 1861년 2월, 국가 분열을 막기 위한 '평화 회의'를 주재했습니다. 

그러나 타협은 실패했고, 그는 결국 자신의 뿌리인 남부를 선택했습니다.

그는 버지니아의 연방 탈퇴를 강력히 지지했고, 남부 연합(Confederacy)의 하원의원으로 선출되었습니다. 

하지만 임무를 시작하기도 전인 1862년 1월 12일, 리치먼드의 발라드 호텔에서 뇌졸중으로 사망했습니다.

• 링컨의 침묵: 에이브러햄 링컨 대통령은 전직 대통령의 죽음에 대해 어떠한 공식 조의도 표하지 않았습니다. 이는 미국 역사상 유일한 사례입니다.

• 냉혹한 부고: 뉴욕 타임스(NYT)는 그를 "폐허의 설계자"라 혹평하며, "타일러의 햄프턴 저택은 현재 연방군에 의해 점령되어 군수품 창고로 쓰이고 있다"는 굴욕적인 사실을 덧붙였습니다.


타일러의 말년 모습


10. 존 타일러의 양면적 유산

존 타일러는 미국 역사상 가장 낮은 평가를 받는 대통령 중 한 명입니다. 

해리 트루먼은 "없어도 좋았을 대통령"이라 불렀고, 시어도어 루스벨트는 "정치적 왜소함의 극치"라 비난했습니다. 

하지만 현대의 시각에서 그는 헌법적 위기를 돌파한 '개척자'로서 재조명받고 있습니다.


[존 타일러의 3대 유산]

1. 승계 원칙의 확립: 부통령이 대통령직을 온전히 계승한다는 전례를 세워 행정부의 안정성을 보장했습니다.

2. 영토 확장과 외교 성과: 텍사스 합병, 웹스터-애슈버턴 조약, 왕샤 조약을 통해 미국의 국력을 비약적으로 신장시켰습니다.

3. 대통령 권한의 수호: 정당의 지지가 없는 상태에서도 거부권 등 헌법적 권한을 끝까지 행사하며 입법부의 압제에 맞섰습니다.

그는 비록 연방을 배신한 '반역자'라는 꼬리표를 달고 생을 마감했지만, 그가 세운 헌법적 선례와 확장된 영토는 오늘날 거대한 미국을 지탱하는 기초가 되었습니다. 

존 타일러의 생애는 권력의 정당성이 '우연'에서 시작될지라도, 그 권한을 지켜내는 것은 오직 '의지'에 달려 있음을 역설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미국 대통령 존 타일러의 생애와 정치적 선택을 중심으로, 당시의 헌법 해석, 정당 정치, 외교 정책을 입체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사료와 기존 연구를 바탕으로 최대한 정확하게 서술했으나, 역사적 해석에는 관점 차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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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공간이 단순한 정보 전달을 넘어, 역사를 함께 읽고 토론하는 장이 되기를 바랍니다.


John Tyler, often called the “Accidental President,” assumed office in 1841 after the sudden death of William Henry Harrison, exposing a constitutional ambiguity over presidential succession. 

Rejecting the role of acting president, Tyler asserted full presidential authority, establishing the “Tyler Precedent,” which later shaped the 25th Amendment. 

Politically isolated after clashing with Whig leaders over a national bank and federal power, he governed without party support. 

Despite domestic turmoil, Tyler achieved notable foreign policy successes, including the Webster–Ashburton Treaty and the opening of trade with Qing China. 

His presidency culminated in the controversial annexation of Texas. In later life, Tyler supported the Confederacy, leaving behind a deeply divided legacy as both a constitutional pioneer and a symbol of national fractur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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