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현종, 사생아 왕에서 ‘귀주대첩’의 설계자가 되기까지 (Hyeonjong of Goryeo)


고려의 새벽을 연 군주, 현종 대왕의 대서사시


운명의 그림자

고려, 아니 한국사 전체를 통틀어 전무후무한 '사생아' 출신 군주. 

고려 제8대 왕 현종의 삶은 이 한 문장만으로도 얼마나 파란만장했을지 짐작하게 합니다. 

그의 혈통은 분명 고려를 건국한 태조 왕건에게 직접 이어지는 더할 나위 없이 고귀한 것이었습니다.

부계와 모계 모두 왕실의 피를 이어받아, 유전적으로는 태조의 피가 가장 진하게 농축된 적통 중의 적통이나 다름없었죠. 

하지만 이처럼 빛나는 혈통을 가졌음에도, 왜 그의 시작은 축복이 아닌 죽음의 위협 속에서 위태롭게 피어나야만 했을까요? 

한 남자의 기구한 운명은 곧 고려라는 나라의 거대한 역경과 영광의 서막이었습니다.


제1부: 원치 않은 왕자, 대량원군 순(詢)

1. 비극적 탄생: 불륜과 죽음의 그림자

현종의 탄생은 고려 왕실 최대의 스캔들이었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태조 왕건의 아들인 안종(安宗) 왕욱, 어머니는 태조의 손녀이자 선왕 경종(景宗)의 왕비였던 헌정왕후(獻貞王后)였습니다. 

숙부와 조카의 만남이었죠.

고려 왕실은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근친혼을 장려했기에 숙부와 조카의 결합 자체는 큰 문제가 아니었을지도 모릅니다. 

진짜 문제는, 헌정왕후가 선왕의 미망인이라는 점이었습니다. 

정식 혼례도 거치지 않은 채, 현직 국왕(성종)의 누이동생이자 선왕의 왕비가 삼촌과 사통하여 아이를 가졌다는 사실은 왕실의 명예에 씻을 수 없는 흠집을 냈습니다.

특히 유교를 국가 통치의 근본으로 삼으려 했던 오빠 성종에게 이 사건은 정치적으로 매우 곤란한 일이었습니다. 

성종은 분노와 상심 속에서 숙부 왕욱에게 이렇게 말하며 그를 머나먼 사수현(지금의 사천)으로 유배 보냈습니다.

"숙부께서 대의(大義)를 범했기 때문에 유배 보내는 것이니 애태우지 마십시오."

사랑하는 이를 떠나보낸 헌정왕후의 최후에 대한 기록은 두 가지로 나뉩니다. 

후대의 기록인 『고려사』는 그녀가 유배를 떠나는 왕욱을 배웅하고 돌아오던 길, 궁문 앞 버드나무 가지를 붙잡고 아이를 낳은 뒤 산고로 숨을 거두었다고 극적으로 묘사합니다. (논쟁)

그러나 현종이 직접 세운 1차 사료 '현화사비'에는 이듬해 별궁인 보화궁에서 세상을 떠났다고 적혀있어, 이쪽이 사실에 가까울 가능성이 높습니다. 

어느 쪽이든, 그렇게 태어난 아이 대량원군 순(詢)은 세상에 나오자마자 어머니를 잃고 아버지와는 생이별한 고아가 되었습니다.


2. 살아남아야 한다: 천추태후의 칼날

어린 대량원군은 숙부이자 외삼촌인 성종의 보호 아래 자랐습니다. 

하지만 성종이 세상을 떠나고 목종이 즉위하면서 그의 운명은 다시 한번 풍전등화의 위기에 놓입니다.

목종의 어머니이자 현종의 이모인 천추태후가 그녀의 연인 김치양과 함께 막강한 권력을 휘두르기 시작했기 때문입니다.

천추태후와 김치양 사이에서 아들이 태어나자, 그들은 자신들의 아들을 다음 왕위에 올리려는 야심을 품었습니다. 

목종에게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태조의 직계 혈통을 이은 대량원군은 그들의 계획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습니다. 

권력의 칼날 앞에서 이모와 조카라는 혈연은 아무런 방패가 되지 못했습니다.

천추태후는 대량원군을 개경 밖 신혈사(神穴寺)로 보내 강제로 머리를 깎아 승려로 만들었습니다. 

그것으로도 모자라 여러 차례 사람을 보내 독살을 시도하는 등 집요하게 그의 목숨을 노렸습니다. 

신혈사의 밤은 길었습니다. 

스산한 바람 소리에도, 멀리서 들리는 나뭇가지 꺾이는 소리에도 어린 왕자는 심장이 멎는 듯했습니다.

독이 든 음식이 올까, 잠든 사이 자객의 칼이 목을 겨눌까. 

매일 밤은 죽음과의 숨바꼭질이었습니다.


천추태후가 보낸 궁녀들이 독이 든 음식을 들고 신혈사(神穴寺)의 문을 두드린 날이었습니다. 

어린 순(詢, 현종)은 차마 음식을 입에 대지 못하고 떨고 있었죠. 

그때 늙은 승려 진관(津寬)이 소년의 손목을 낚아챘습니다.


"왕자님, 시간이 없습니다."


진관은 법당 안 거대한 불상 아래를 가리켰습니다. 

그곳엔 성인 한 명이 겨우 들어갈 법한 비좁고 축축한 구덩이가 있었습니다. 

순이 그 속에 몸을 구겨 넣자, 진관은 서둘러 판자를 덮고 그 위에 자신의 가사(袈裟, 승려의 법복)를 넓게 펼쳤습니다. 

그리고는 아무 일 없다는 듯 가사 위에서 가부좌를 틀고 앉아 염불을 외우기 시작했습니다.


잠시 후, 자객들이 법당 문을 박차고 들어왔습니다. 

시퍼런 칼날이 허공을 갈랐지만, 노승의 낮은 염불 소리는 끊이지 않았습니다.


"이곳엔 개미 한 마리 보이지 않소. 돌아가시오."


판자 하나를 사이에 두고, 소년은 자객들의 발소리와 자신의 심장 소리를 동시에 들었습니다. 

먼지 냄새와 곰팡이 냄새가 진동하는 그 어둠 속에서, 그는 훗날 거란의 40만 대군 앞에서도 무너지지 않을 '생존의 근육'을 키워내고 있었습니다.


이처럼 끊임없는 생명의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버티던 어린 왕자에게, 그의 의지와는 상관없이 역사의 거대한 소용돌이가 휘몰아치기 시작했다.


[비하인드 스토리] 천 년의 자비가 머무는 곳, 북한산 진관사(津寬寺)

현종의 암투는 기록 속에만 존재하는 신화가 아닙니다. 

그가 겪었던 공포와 생존, 그리고 보은의 흔적은 오늘날 서울 북한산 자락에 '진관사'라는 이름으로 오롯이 남아 있습니다.


1. 소년을 품은 구덩이, '신혈(神穴)'의 기적 

어린 대량원군 순이 천추태후의 자객들을 피해 숨어들었던 작은 암자, 그곳의 이름은 신혈사(神穴寺)였습니다. 

'신령스러운 구멍이 있는 절'이라는 그 이름처럼, 불상 아래 비좁고 축축한 구덩이는 장차 고려를 구원할 어린 생명을 품어주었습니다. 

훗날 현종은 즉위하자마자 이 은신처를 잊지 않고 찾아와 웅장한 가람을 새로 세웠습니다.


2. 한 승려를 향한 최고의 예우, '진관(津寬)' 

보통 사찰의 이름은 지명이나 불교적 의미를 따서 짓기 마련입니다. 

하지만 현종은 파격적인 결정을 내립니다. 

자신의 목숨을 구하고 가사(袈裟)를 펼쳐 자객의 눈을 가려주었던 노승, 진관 대사의 법명을 그대로 절의 이름으로 삼은 것입니다. 

이는 신하가 아닌 한 스승에게 왕이 바칠 수 있는 가장 지극한 경의였습니다.


3. 천 년을 이어온 '구국(救國)'의 인연 

묘하게도 현종이 목숨을 건졌던 이 자리는 천 년 뒤 또다시 역사의 전면에 등장합니다. 

2009년, 진관사 칠성각을 보수하던 중 벽 속에서 낡은 보따리 하나가 발견되었습니다. 

그 안에는 일제강점기 독립운동가 백초월 스님이 숨겨두었던 태극기와 독립신문들이 들어있었습니다.

소년 왕자를 구했던 '자비의 품'이, 천 년 뒤 나라를 되찾으려던 '독립의 품'으로 이어진 것입니다.


서울특별시 은평구 진관동에 위치한 북한산 진관사다.


제2부: 격랑 속의 즉위

1. 강조의 정변: 꼭두각시 왕이 되다

목종의 실정과 천추태후-김치양 일파의 전횡이 극에 달하자, 고려의 운명은 새로운 국면을 맞이합니다.

서북면 도순검사 강조(康兆)가 "왕을 바로 세운다"는 명분 아래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진격한 것입니다. 

1009년, 피비린내 나는 '강조의 정변'이 일어나 목종은 폐위되고 천추태후와 김치양 일파는 모두 숙청되었습니다.

이제 새로운 왕이 필요했습니다. 

강조와 그의 군사들은 곧장 신혈사로 달려가 잿빛 승복을 입고 있던 대량원군을 찾아냈습니다. 

그들은 대량원군을 강제로 환속시켜 용상에 앉혔습니다. 

하루아침에 죽음의 위협을 받던 승려에서 한 나라의 군주가 된 현종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습니다. 

그의 즉위는 결코 영광스럽지 않았습니다. 

자신의 의지와는 무관하게, 거대한 정치적 폭풍에 휩쓸려 피 묻은 용상에 내몰린 꼭두각시 군주의 슬픈 등극이었습니다.


2. 즉위 교서: 혼란 속에서 길을 찾다

비록 자신의 의지는 아니었지만, 왕위에 오른 현종은 혼란한 정국을 수습하고 국가의 기강을 바로 세우기 위해 즉위 교서를 반포합니다. 

이 교서에는 어린 군주의 고뇌와 나라를 바로 세우려는 굳은 의지가 담겨 있었습니다.

"중앙과 지방의 관료들은 청렴을 장려하고 멸사봉공의 자세로 직무에 임하라. 지방의 목민관들은 애민 정신을 간직하라. 변방의 지휘관들은 군사를 잘 조련하여 불의의 사태에 대비하라.... 그대들과 함께 나라를 다스려 미래를 보장받기를 원하노라."

교서의 내용은 명확했습니다. 

관료들에게는 청렴과 멸사봉공을, 지방관에게는 애민 정신을, 군 지휘관에게는 철저한 국방 대비를 주문했습니다. 

이는 정변으로 어수선해진 민심을 다독이고, 흔들리는 국가 시스템을 재정비하려는 신임 군주의 강력한 의지 표명이었습니다.

그러나 갓 즉위한 어린 군주가 내정을 정비할 시간도 없이, 그의 즉위를 빌미로 삼은 북방의 거란 제국이 거대한 칼날이 되어 고려를 덮쳐왔습니다.


제3부: 불타는 강토, 유랑하는 군주

1. 거란의 2차 침공과 절망의 몽진(蒙塵)

1010년, 거란 성종은 '역적 강조가 멋대로 왕을 폐했으니 그 죄를 묻겠다'는 구실로 40만 대군을 이끌고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고려의 총사령관으로 나선 강조가 통주 전투에서 패하고 사로잡히자, 고려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다급해진 현종은 불과 수십 명의 신하를 이끌고 개경을 떠나 머나먼 남쪽 나주를 향한 피난길, 즉 몽진(蒙塵)에 올랐습니다. 

'임금의 얼굴이 먼지를 뒤집어쓴다'는 뜻처럼, 그의 여정은 처절하고 굴욕적이었습니다.


배신과 위협의 여정

현종의 몽진길은 단순한 피난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고려의 왕권이 얼마나 허약한지를 보여주는 생생한 증거였습니다.

• 신하들의 배신: 처음에는 몇몇 신하들이 왕을 따랐으나, 충신 하공진이 거란군에 억류되었다는 소식이 들려오자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다"는 기록처럼 대부분의 신하와 병사, 심지어 노비들까지 뿔뿔이 흩어져 왕을 버리고 달아났습니다. 

충성의 붕괴는 점진적이었습니다. 

나주로 향하는 피난길, 쏟아지는 진눈깨비 속에 현종은 잠시 말을 멈췄습니다. 

뒤를 돌아보니 호위하던 신하들이 또 줄어 있었습니다. 

그때 한 소리가 들렸습니다.


"전하, 말 안장이 낡아 보이니 제가 손봐드리겠습니다."


현종이 말에서 내려 잠시 쉬는 사이, 믿었던 신하 유종과 김응인은 말 안장을 통째로 뜯어 숲으로 달아났습니다. 

말의 가죽과 안장에 붙은 작은 장식이라도 팔아 제 목숨을 부지하겠다는 속셈이었죠.

텅 빈 말 등 위로 차가운 빗방울이 떨어졌습니다. 

고려의 국왕이 신하에게 도둑맞은 것은 단순한 가죽 안장이 아니라, 왕실의 존엄 그 자체였습니다. 

현종은 젖은 소매를 걷어붙이며 나직이 읊조렸습니다.

"짐이 가진 것이라곤 이제 이 말 한 필뿐인데, 너희는 그 가죽마저 탐내는구나. 그래, 가져가거라. 대신 짐은 이 진흙길을 걸으며 너희가 버린 이 나라를 다시 세울 것이다."

그의 눈빛은 비굴한 원망 대신, 지방 호족 세력을 반드시 뿌리 뽑겠다는 서늘한 분노로 타오르기 시작했습니다.

• 지방 호족들의 위협: 왕의 행렬은 가는 곳마다 지방 세력의 위협에 직면했습니다.

    ◦ 창화현: 한 아전이 "왕께서는 저의 이름과 얼굴을 아십니까?"라며 왕을 능멸하고 변란을 일으키려 했습니다.

    ◦ 전주: 절도사 조용겸은 왕을 억류하여 자신의 위세를 과시하려 군사를 이끌고 행궁을 위협했습니다.

이는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였던 조선 시대, 임진왜란 당시 선조의 몽진과 크게 비교되는 모습입니다.

현종 당시 고려의 지방은 여전히 막강한 호족들이 지배하고 있었고, 그들에게 '왕'은 충성의 대상이 아닌 이용하거나 위협할 수 있는 존재에 불과했습니다.

칠흑 같은 어둠 속에서 누가 아군인지 적군인지조차 알 수 없는 혼란이 계속되었습니다. 

지채문은 결단을 내렸습니다. 

그는 끝까지 왕의 곁을 지키는 군사들의 관모(모자)에 특별한 표식을 달게 했습니다. 

적도들과 아군을 구별하기 위한 최후의 방책이었습니다. 

이 작은 표식 하나에 의지한 채, 현종의 호위대는 보이지 않는 적들의 칼날을 뚫고 사선을 넘었습니다.


현종의 피난길


충신과 배신자

절망적인 몽진길에서도 왕을 향한 충절을 지킨 영웅들과 자신의 이익을 위해 왕을 버린 배신자들의 모습은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특히 공주 절도사 김은부의 극진한 대접은 굶주리고 지친 현종에게 한 줄기 빛과 같았습니다. 

현종은 이곳에서 잠시 시름을 잊고 다음과 같은 시를 남겼습니다.


"일찍이 남쪽에 공주라는 곳이 있다고 들었는데, 선경의 영롱함이 길이길이 그치지 않도다. 이렇게 마음 즐거운 곳에서 신하들과 함께 모여 온갖 시름을 놓아본다."


가장 처절했던 굴욕의 몽진 길은 역설적이게도 그에게 평생의 반려를 선물했습니다. 

모두가 왕을 배신하고 비웃을 때, 공주 절도사 김은부는 정성껏 수라를 올리고 자신의 딸들을 통해 왕을 보필하게 했습니다. 

현종은 김은부의 세 딸을 차례로 왕비로 맞이하며 지극한 사랑을 쏟았습니다. 

전란의 진흙탕 속에서 만난 이 인연은 훗날 고려의 황금기를 이끄는 세 명의 왕(덕종, 정종, 문종)을 낳으며 고려 왕실의 가장 단단한 뿌리가 되었습니다.


구분
인물
주요 행적
충신 (忠臣)
지채문
거의 홀로 남아 왕과 왕후를 호위하며 반란 세력을 수차례 격퇴했습니다.

김은부
공주 절도사로서 유일하게 왕의 행렬을 극진히 대접하고 의복과 음식을 제공했습니다.

하공진
스스로 거란 진영으로 가 시간을 벌고 철군을 유도했으며, 결국 포로가 되어 순절했습니다.
배신자 (背信者)
유종, 김응인
처음엔 왕을 따랐으나, 도중에 왕을 속여 어마(御馬)의 안장을 뜯어 달아났습니다.

조용겸
전주절도사로서 군사를 이끌고 왕을 위협하며 억류하려 시도했습니다.


2. 잿더미가 된 수도와 하공진의 희생

현종이 남쪽으로 피난하는 사이, 수도 개경은 거란군에 의해 무참히 함락되었습니다. 

궁궐과 민가는 모두 불길에 휩싸여 잿더미로 변했습니다. 

이때 태조부터 목종까지의 7대 실록을 포함한 수많은 귀중한 역사 기록이 모두 소실되는 비극이 발생했습니다.

이 절체절명의 순간, 한 명의 충신이 스스로를 희생하여 나라를 구했습니다. 

하공진은 자신이 거란군을 설득해 철군시키겠다며 자원하여 적진으로 향했습니다. 

그는 뛰어난 언변으로 "왕이 이미 남쪽으로 멀리 갔으니 항복을 받으려면 계속 추격해야 한다"고 거란 성종을 속여 시간을 벌었습니다. 

그의 희생 덕분에 현종은 무사히 남쪽으로 피할 수 있었고, 지친 거란군은 결국 철수를 결정했습니다.

하지만 하공진은 포로로 잡혀 거란 땅으로 끌려가 끝까지 고려 신하로서의 절개를 지키다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절체절명의 위기 속에서 신하의 배신과 백성의 외면, 그리고 충신의 희생까지 모두 겪은 현종은, 잿더미가 된 수도로 돌아와 이전과는 완전히 다른 군주로 거듭나기 시작했습니다.


제4부: 국가를 재건하다

1. 내부의 적을 제거하고 왕권을 세우다

몽진의 뼈아픈 경험은 현종에게 국가 시스템을 근본적으로 바꿔야 한다는 절실한 깨달음을 주었습니다. 

그는 전쟁이 끝나자마자 강력한 개혁에 착수했습니다.


• 지방 제도 정비: 왕을 능멸하던 창화현의 아전과 군사를 이끌고 행궁을 위협했던 전주절도사 조용겸의 얼굴은 현종의 뇌리에서 떠나지 않았습니다. 

그는 뼈저리게 깨달았습니다. 

호족이 지배하는 지방은 왕의 영토가 아니라는 것을. 

잿더미가 된 개경으로 돌아오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칼을 댄 곳이 바로 이 지방 제도였던 이유입니다.

그는 전국을 5도 양계로 나누고, 중앙에서 직접 지방관을 파견하는 군현제를 확립하여 호족 세력을 억누르고 강력한 중앙집권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 김훈·최질의 난 진압: 전쟁에서 큰 공을 세운 무신 김훈과 최질이 공에 대한 불만으로 반란을 일으켰습니다. 

현종은 이들을 연회에 초청하여 방심시킨 뒤 모두 제거하는 지혜를 발휘, 군부에 대한 통제력을 확보하고 왕권을 더욱 강화했습니다.


2. 백성의 상처를 보듬다

현종은 전란으로 피폐해진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것을 최우선 과제로 삼았습니다.

1. 초조대장경 간행: 1011년, 거란의 침략을 부처의 힘으로 막아내고자 하는 염원을 담아 우리나라 최초의 대장경인 '초조대장경' 간행이라는 거대한 불사를 시작했습니다. 

이는 흩어진 민심을 하나로 모으는 상징적인 사업이었습니다.

2. 구제법 마련: 70세 이상 부모를 모시는 장정의 군역을 면제해주는 '면군급고법'과 전사한 군인의 유가족에게 토지를 지급하는 '구분전' 제도를 시행하여 백성들의 부담을 덜어주고 국가에 헌신한 이들을 예우했습니다.

3. 농업 장려: "먹는 것이 부국강병의 근본"이라 선언하고, 사치품을 만드는 수공업 장인의 수를 줄여 농업에 종사하게 함으로써 국가의 경제적 기반을 튼튼히 하고자 했습니다.


전쟁이 끝난 뒤 현종은 길가에 널린 백성들의 시신을 떠올리며 그는 '을묘 교서'를 내렸습니다. 

'백성이 굶주리는데 어찌 나 홀로 편안하겠는가? 당장 내 수라상의 반찬 수를 줄여라.' 

그것은 백성의 눈물을 닦아주겠다는 군주의 처절한 약속이었고, 고려판 '노블레스 오블리주'의 실현이었습니다.

현종의 애민 정신은 단순한 수사에 그치지 않았습니다. 

전쟁의 화마가 휩쓸고 간 1019년의 봄, 그는 황해도 일대의 백성들이 거란군에게 털려 굶주리고 있다는 소식을 듣자마자 명을 내렸습니다. 

'관청의 창고를 열어 당장의 양식은 물론, 내년 농사를 지을 씨앗(종자)까지 모두 무상으로 지급하라.'

비어가는 국고보다 백성의 배고픔을 먼저 걱정했던 이 실천적인 자애로움이야말로 고려의 진정한 힘이었습니다.


자신이 부모 없는 고아로 자라며 죽음의 문턱을 넘나들었기 때문일까요? 

현종은 유독 사회적 약자, 특히 전란 중에 부모를 잃고 떠도는 아이들에게 각별한 시선을 두었습니다.

그는 갈 곳 없는 아이들을 관청에서 거두어 기르게 하고, 장성할 때까지 국가가 모든 비용을 대도록 하는 파격적인 복지책을 폈습니다. 

자신이 받지 못한 가족의 온기를 온 나라의 아이들에게 나누어 주려 했던, '결핍의 위대한 승화'였습니다.


3. 고려의 혼을 다시 세우다

현종은 무너진 국가의 자존심과 정체성을 바로 세우는 일에도 힘썼습니다.

• 7대 실록 편찬: 개경 함락 때 불타버린 태조부터 목종까지의 역사를 복원하기 위해 7대 실록 편찬을 명하여 고려 왕조의 정통성을 다시 세웠습니다.

• 팔관회와 연등회 부활: 유교를 중시했던 성종 대에 폐지되었던 태조의 유훈 팔관회를 부활시켰습니다. 

이는 단순한 불교 행사를 넘어, 성종의 통치 스타일에서 벗어나 건국 시조 태조 왕건의 전통으로 회귀하겠다는 강력한 정치적 선언이었습니다. 

이를 통해 고려 고유의 '해동천하관(海東天下觀)'을 공고히 하고, 대외적으로 고려가 송, 거란과 대등한 천자국임을 과시하며 왕의 권위를 다졌습니다.

내정을 다지고 민심을 통합한 현종은 이제 북방의 위협에 정면으로 맞설 준비를 마쳤고, 고려의 운명을 건 마지막 결전의 시간이 다가오고 있었습니다.


제5부: 귀주(龜州)의 영광

1. 강감찬, 역사의 무대에 오르다

"체격과 용모가 작고 초라했고, 입고 다니는 옷은 때가 끼고 해져 있어" 주위로부터 업신여김을 당하던 문신 강감찬

하지만 현종은 그의 남루한 행색 너머에 숨겨진 비범한 지혜와 강직함을 꿰뚫어 보았습니다. 

2차 침입 당시, 절망적인 몽진길 위에서 모든 신하가 항복을 외칠 때 유일하게 항전을 주장했던 강감찬의 혜안을 현종은 잊지 않고 있었습니다. 

그것은 위기 속에서도 빛나는 통찰력을 알아보는 군주의 안목이었습니다. 

그는 수년간 그 기억을 간직한 채 주위의 반대에도 불구하고 강감찬을 중용했습니다.

거란의 3차 침공이 임박하자, 현종은 강감찬을 고려군 최고사령관으로 임명했습니다. 

또한 전쟁을 기다리기만 한 것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이미 세 차례에 걸쳐 대규모 열병식을 거행하며 군대를 총점검하는 등 수년간 직접 군사를 조련하며 만반의 준비를 마친 상태였습니다.


2. 귀주대첩: 10만 거란군을 잠재우다

1018년, 거란의 명장 소배압이 이끄는 10만 정예 기병이 다시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그러나 이번의 고려는 이전과 달랐습니다.

• 강감찬의 지략: 최고사령관 강감찬은 흥화진에서 쇠가죽으로 막았던 강물을 터뜨려 거란군에게 첫 패배를 안겼고, 이후 끈질기게 적을 추격하며 괴롭혔습니다.

• 현종의 결단: 소배압이 고려 주력군을 무시하고 개경으로 직진해오자, 현종은 동요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수도 주변의 모든 것을 불태우고 식량을 치우는 청야(淸野) 전술을 결단하여 거란군의 보급로를 끊었습니다. 

또한 강감찬에게 군사에 대한 전권을 위임하며 절대적인 신뢰를 보냈습니다.

결국 굶주리고 지친 거란군이 퇴각하기 시작했고, 강감찬은 이들을 귀주 들판으로 몰아넣었습니다. 

이곳에서 벌어진 대규모 회전, 즉 귀주대첩에서 고려군은 거란군을 거의 전멸시키는 대승을 거두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10만 대군 중 살아서 돌아간 자는 수천 명에 불과했다고 합니다.

귀주에서의 압도적인 승리는 길고 길었던 전쟁의 종지부를 찍었으며, 현종은 이 군사적 승리를 바탕으로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재편하는 위대한 군주로 우뚝 섰습니다.


1019년 5월, 개경 인근의 영파역(迎波驛). 

귀주에서 10만 거란군을 궤멸시킨 강감찬이 돌아오는 날이었습니다. 

현종은 궁궐 안에서 보고를 받는 대신, 직접 영파역까지 마중을 나갔습니다. 

왕이 도성 밖까지 신하를 맞으러 나가는 것은 전례가 없는 파격이었습니다.


현종의 손에는 금으로 정교하게 세공된 여덟 송이의 꽃(金花)이 들려 있었습니다. 

72세의 노구로 말에서 내리는 강감찬의 손을 현종이 직접 맞잡았습니다. 

흙먼지와 피땀이 뒤섞인 노장의 갑옷 위로, 현종은 금화 여덟 송이를 하나하나 정성스럽게 꽂아주었습니다.


"공이 아니었다면, 이 해동(海東)의 산천은 이민족의 말발굽 아래 사라졌을 것이오."


강감찬에게 금꽃을 꽂아주는 현종


현종은 강감찬에게 금으로 된 잔을 건네며 좌중을 둘러보았습니다. 

그곳엔 항복을 주장했던 신하도, 도망갔던 병사도 없었습니다. 

오직 승리의 환희로 가득 찬 '해동의 백성'들뿐이었습니다.


이 순간, 현종은 깨달았습니다. 

중국의 황제에게 고개를 숙여야만 유지되던 가짜 평화의 시대는 끝났다는 것을요. 

고려는 이제 거란과 송나라 사이에서 당당히 한 축을 담당하는 '동쪽의 천하'가 되었습니다. 

현종의 가슴 속엔 몽진 길의 비참했던 먼지 대신, 제국의 주인이라는 찬란한 자부심이 금화처럼 피어오르고 있었습니다.


제6부: 고려의 황금시대를 열다

1. 평화의 설계자

귀주대첩에서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음에도 현종은 거란을 자극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거란과 형식적인 사대 관계를 복구하는 실리 외교를 펼쳤습니다. 

이를 통해 거란의 추가 침략 명분을 없애고 강동 6주에 대한 지배권을 확고히 했으며, 실질적인 평화를 얻어냈습니다. 

동시에 송나라와도 비공식적인 관계를 유지하며 거란을 견제하는 등, 고려를 동아시아의 '균형자'로 자리매김시켰습니다.


2.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우다

전쟁의 상처를 극복한 현종의 치세 후반기는 찬란한 문화의 꽃을 피웠습니다.

• 현화사 건립: 비극 속에 돌아가신 부모님의 명복을 빌기 위해 웅장한 현화사를 건립했습니다. 

그는 직접 붓을 들어 비문을 썼습니다. 

비문 한 자 한 자를 검토하며 눈물을 흘렸던 그는 부모님의 묘소를 개경 근처로 옮겨와 정성껏 모셨습니다. 

사생아라는 출신 성분이 부모의 이름에 누가 되지 않도록, 그는 더욱 치열하게 '성군'의 길을 걸었습니다.


개성 현화사비 현종의 어필


이곳에 세워진 현화사비에는 당시 고려인들이 현종의 업적을 중국의 전설적인 성군인 '요순'에 비견하며 "이 도를 본받으며 중간에 그침이 없었던 것은 우리 성군(聖君) 뿐이십니다"라고 기록하는 등, 그에 대한 존경이 신격화에 가까웠음을 보여줍니다. 

또한 이 비문은 고려를 '인방(仁邦, 어진 나라)', '일방(日邦, 해 뜨는 나라)'으로 칭하며 천자국으로서의 자부심을 드러냅니다.


현화사비


• 도성제 완성: 21년에 걸친 대공사 끝에 개경을 둘러싸는 거대한 나성(羅城)을 완공했습니다. (1029년 완공)

또한 수도 주변 지역을 '경기(京畿)' 로 설정하여 오늘날 경기도의 기원을 마련했습니다. (1018년)

이는 수도의 방어력을 극대화하고, 고려가 천자국임을 만천하에 보여주는 위엄의 상징이었습니다.


영원한 군주로 남다

1031년, 40세의 나이로 파란만장했던 생을 마감한 현종. 

그가 남긴 유산은 실로 위대했습니다. 

강력한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 거란과의 전쟁을 승리로 이끌고 얻어낸 안정적인 국제 관계는 그의 아들들인 덕종, 정종, 그리고 고려 최전성기를 이끈 문종에게 고스란히 이어졌습니다. 

현종이 뿌린 씨앗이 고려의 황금시대라는 찬란한 열매를 맺은 것입니다.

사생아로 태어나 이모에게 살해 위협을 당하고, 왕위에 올라서는 나라를 잃을 뻔한 몽진의 굴욕을 겪었던 군주. 

하지만 그는 좌절하지 않았습니다. 

모든 역경을 자신의 힘으로 극복하고, 나라를 위기에서 구해냈으며, 마침내 고려 역사상 가장 위대한 성군 중 한 명으로 기록되었습니다. 

고려의 가장 어두운 새벽을 온몸으로 버텨내고 찬란한 아침을 연 군주, 그가 바로 현종 대왕입니다.

우리는 흔히 영웅을 기다리지만, 역사는 때때로 가장 가혹한 시련을 견뎌낸 자를 영웅으로 선택합니다.

진흙탕 속에서 피어난 연꽃처럼, 가장 어두운 곳에서 가장 밝은 빛을 낸 현종. 

그가 열어젖힌 고려의 새벽은 천 년이 지난 지금 우리에게 묻고 있습니다. 

당신의 시련은 어떤 아침을 준비하고 있느냐고.


이 글은 고려 현종(顯宗, 재위 1009–1031)의 생애와 거란(요, 遼)과의 전쟁, 그리고 전후 국가 재건 과정을 독자가 한 번에 따라갈 수 있도록 “서사”의 형태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기본 골격은 『고려사』·『고려사절요』 등 편년 사료와, 현화사비(玄化寺碑)처럼 당대의 금석문(비문)·기록 전통을 참고해 큰 흐름을 잡았습니다. 

또한 거란 2·3차 침공, 몽진(蒙塵), 귀주대첩(龜州大捷), 내정 개혁과 의례·도성 정비 등 주요 사건은 널리 알려진 역사적 사실을 중심으로 서술했습니다.

다만 “블로그용 장편 서사”라는 형식상, 실제 사료에 남아 있는 문장 그대로를 옮기기보다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 구성과 감정선(두려움, 분노, 결단), 대화체, 세부 묘사(날씨·공간·행렬의 분위기 등)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부분이 있습니다. 

예를 들어 신혈사에서의 위협 장면, 몽진길에서의 배신 묘사, 강감찬을 맞이하는 장면의 감정과 제스처 등은 사실의 ‘가능한 범위’를 벗어나지 않도록 조심했지만, 문장 단위로는 창작적 재구성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연대기 강의”가 아니라, 사료를 바탕으로 한 “현장감 있는 재구성”으로 읽어주시면 좋겠습니다.


King Hyeonjong of Goryeo (r. 1009–1031) began life as Prince Sun, losing his mother at birth. 

Tonsured and sent to a temple by Cheonchu’s faction, he survived attacks until the 1009 coup of General Gangjo deposed King Mokjong and raised him to the throne. 

In 1010 the Khitan Liao invaded, citing the coup; Gangjo was captured, Gaegyeong burned, and Hyeonjong fled south as followers deserted and local lords threatened him.

The ordeal drove him to strengthen central rule, curb regional power, and aid war-torn people, while rallying morale through Buddhism, including Tripitaka printing. 

When Liao returned in 1018, he entrusted command to Gang Gam-chan, used scorched-earth defenses, and backed the campaign that ended with victory at Guiju (1019). 

With the frontier secured he pursued diplomacy, rebuilt chronicles and state rituals, fortified Gaegyeong, and set the stage for Goryeo’s golden a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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