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외교가 서희, 압록강 담판의 전말과 강동 6주의 실상 (Seo Hee)




 이 글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동국통감』 등 주요 기록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역사적 사실과 차이가 있을 수 있으며,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용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개경의 새벽 공기는 늘 차가웠다.

서까래 사이로 스며드는 바람 소리와 함께, 궁궐의 종각이 낮게 울렸다.

그 소리를 들으며 붓을 들던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서희(942~998, 고려의 외교가·문신)였다.




서희의 출신은 정교한 문장과 예법을 중시하던 문벌 귀족이었다.

가문은 개경 일대에 뿌리를 두고 중앙정계와 혼맥으로 엮여 있었고, 

유교 경전 교육과 실무 문서 작성에 강했다.

『고려사』는 그가 어려서부터 글씨가 단정하고 경서 암송이 능했다 전하나, 

정확한 부친의 관직이나 가계 세목은 단편적이다.

후대 족보는 명문 서씨의 한 지파로 그를 올려 기록하지만, 원사료는 조심스레만 그려 놓는다.

확실한 건, 그가 “문서와 의례를 다루는 집안 분위기”에서 자라, 

재상으로 성장할 토대를 일찍 갖췄다는 사실이다.


소년 서희는 먼저 법과 예를 익혔다.

과거의 책문에 답하는 법을 배우고, 국서(국가 외교문서)의 격식을 외웠다.

궁정 의례의 절차, 사신을 맞을 때의 대화법, 서계(외교문)에서 

한 글자를 어디에 배치해야 상대가 체면을 잃지 않는가까지, 그는 하나하나 몸에 새겼다.

그의 스승은 이름보다 태도를 가르쳤다.

“말은 칼보다 깊이 들어간다.”

그 말은 훗날 압록강 천막에서 증명된다.




젊은 관원 시절, 서희는 사관(史官)과 한림(한림원 학사, 문한·외교 문서 담당)을 왕복하며 경력을 쌓았다.

사관은 단지 기록만 하던 자리가 아니었다.

왕의 곁에서 정책 논의를 모두 받아 적다가도, 필요하면 논박해야 했다.

거짓을 적을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그의 붓끝은 사실을 향했고, 그 사실은 곧 왕의 신임이 되었다.


그가 점차 이름을 알린 것은 국경상의 분규를 정리하던 실무에서였다.

당(후당·후진 등 북중국 변란을 지나 남하한 잔민, 당 유민) 출신 상단이 

서해 교역로에서 고려 상인들과 충돌했다.

세금 부과와 화물 압류를 놓고 서로 “우리 법이 먼저다”를 외치던 자리였다.

서희는 조용히 장부를 펼쳤다.

그는 해상세(조운·상세) 조항과 표류·구휼 규정을 차례로 읽어주고, 

당 유민들이 이미 자국 법을 잃고 고려의 호적에 편입되지 않은 상태임을 조목조목 짚었다.

“여기는 고려의 바다요. 고려의 상정(常程)이 먼저 서야 합니다.”

외국 상단 대표가 “우리는 대국의 상인”이라 뻗대자, 그는 한 줄 더 얹었다.

“대국은 스스로 법을 어기지 않습니다.”

분쟁은 조용히 정리되었다.

상인은 퇴로를 얻었고, 조정은 체면을 지켰다.

그날 이후 대신들 사이에 소문이 돌았다.

“칼을 들지 않는 장수 하나가 생겼다.”


송나라 사신과의 의례 시비도 유명하다.

송(중국 왕조, 대외적으로 책봉·조공 질서를 중시)은 고려를 형식상 ‘왕’으로 불러 서열을 정하려 했다.

사신은 조정에서 예를 높이라 요구하며, 조회 위치와 악장 순서를 문제 삼았다.

그 순간 서희는 앞으로 걸어나가 낮고 또렷한 목소리로 말했다.

“고려는 고구려의 계승국입니다.

우리의 조상은 북방을 달리고 산천을 호령했지요.

대국이 진정 대국이라면, 스스로의 체면을 지키되 우리 체면도 깎지 않을 것입니다.”

사신의 눈썹이 꿈틀했다.

서희는 마무리를 잊지 않았다.

“안으로는 황제의 예로 나라를 다스리고, 밖으로는 이웃의 예로 서로 공경하는 것, 그것이 예의 길입니다.”

의례는 조정의 뜻대로 정리되었다.

송은 명분을 얻고, 고려는 체면을 지켰다.

협상은 종종 “한쪽이 다 얻는 법”은 없다는 걸 그는 알고 있었다.




그리고 운명의 993년이 왔다.

거란(요나라)의 장수 소손녕(거란 장군)이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고려사』는 “팔십만”이라 적지만, 『요사』와 중국 측 기록은 6만10만으로 본다.

숫자는 과장과 경계의 심리를 드러낸다.

중요한 건, 고려가 정면 결전을 선택할 형세가 아니었다는 사실이다.

개경의 뜰에는 두 부류의 목소리가 섞였다.

“싸워야 한다.”

“항복해야 한다.”

서희는 침묵했다.

그리고 왕(성종, 재위 981~997) 곁으로 갔다.

“폐하, 저들의 진짜 목적은 우리를 멸하는 것이 아니라 송을 견제하는 교두보를 얻는 것입니다.

명분을 흔들면 칼이 무뎌질 것입니다.”

성종(고려 국왕)은 잠시 눈을 감았다가 고개를 끄덕였다.

“그대가 가라.”



압록강 언덕, 흙바람 속에 천막이 세워졌다.

거란의 군복은 쇳빛이었고, 장창 끝에서 해가 반사되었다.

소손녕이 낮게 말했다.

“고려는 신라의 후예라 들었다.

고구려의 땅은 이미 요의 땅이다.

속히 남으로 물러가라.”

서희는 미소를 감추었다.

“우리는 고구려의 정통입니다.

당신들이 점거한 땅엔 우리의 무덤과 사당이 있습니다.

그대들이야말로 우리의 땅을 밟고 있소.”

장수의 눈이 번뜩였다.

서희는 숨을 고르고 마지막 칼끝을 돌렸다.

“그리고, 당신들의 적은 남쪽의 송이오.

우리를 꺾으면 당신들은 강을 건너는 동안 남북 양면에서 적을 상대해야 하오.

그 위험을, 지혜로운 대국이 정말 택하겠소?”

잠시, 바람 소리만 흘렀다.

소손녕은 말끝을 씹었다.

그의 뒤에서 장교들이 서로 눈치를 보았다.

천막의 공기가 바뀌었다.




그날 담판의 결론은 널리 알려져 있다.

거란은 철군하고 고려는 송과의 표면 관계를 정리하는 대신, 압록강 동안(강동) 방어선 확립을 용인받았다.

강동 6주(압록강 동쪽 6개 주·성)는 곧바로 즉시 귀속되었다고 기록하는 전승이 있으나, 

다른 전승은 “요의 철군 뒤 여진(말갈)을 설득·이주시키고 

성책을 정비하며 확보한 장기 성과”였다고 덧붙인다.

논쟁은 오늘도 계속되지만, 변치 않는 사실이 있다.

피의 강이 흐르지 않았고, 국경선은 북으로 올라갔다는 것.




담판 이후 서희의 정치적 입지는 단단해졌다.

그는 문하시중(재상) 격으로 왕을 보좌하며, 대외문서와 방어선 구축 계획을 함께 다루었다.

그러나 그의 길이 늘 순탄했던 것은 아니다.

온건 외교의 성과를 질시하는 강경파는 그를 ‘유화’라 했고, 

전공을 욕망한 무장은 “칼을 써야 영광”이라 중얼거렸다.

서희는 화답하지 않았다.

필요한 회의에 참석하고, 필요한 문서를 작성하고, 필요한 때 침묵했다.

그가 아는 승리는 늘 오래 걸려왔고, 조용했다.


가정사는 적막하다.

원사료는 배우자와 자식들의 이름을 거의 남기지 않았다.

후대 족보는 서씨 가계가 관직을 이었다고 기록하되, 

어느 아들이 어느 관서로 나아갔는지에 대해서는 상충한다.

한 기록은 그가 “검소하고 사치가 없었고, 가문을 법으로 다스렸다”고만 전한다.

문 앞에서는 손님이 끊이지 않았고, 사랑채에서는 서류 꾸러미가 날마다 쌓였다.

밤, 그는 등잔 앞에서 자녀들의 글을 살펴주고도 다시 자리로 돌아와 서계의 한 글자를 고쳤다.

“상대의 체면을 살리고 우리의 의지를 숨기지 않는 문장.”

그것이 그의 가훈이었다.


그의 이름을 감싸는 논란도 함께 전해진다.

첫째, 군세 숫자 문제다.

『고려사』의 80만, 『요사』의 6~10만, 현대 연구의 재추산이 엇갈린다.

둘째, 강동 6주의 성격이다.

즉시 귀속인가, 사후 확보인가의 해석 차.

셋째, 송과의 단교 문제다.

표면적 단교 선언은 있었으나, 실제 교역과 정보 교류는 계속되었을 가능성.

이 모든 논쟁은 하나의 사실로 수렴한다.

서희의 협상은 “명분을 준 채 실리를 가져오는” 선택이었다는 점이다.


서희는 담판 이후에도 국경 성책 정비, 여진 부락 회유, 송·요 사이 정보전 관리 같은 “안 보이는 일”을 맡았다.

그의 말은 줄었고, 그의 문장은 더 조밀해졌다.

왕과의 경연(정책 토론)에서는 지방의 조세 수취와 진휼, 과거 운영의 공평을 강조했다.

“강한 국경선은 배부른 고을에서 나옵니다.”

그의 관료 철학은 실무적이었고, 요란하지 않았다.


998년, 병이 깊어졌다.

그는 침상에서 마지막으로 서랍을 열고 오래된 서계를 꺼냈다.

송 사신에게 보냈던 첫 답장, 거란 장수에게 내보였던 논리의 초고, 국경 성책도.

종이 가장자리에는 겨울밤 등불에 그을린 자국이 있었다.

그는 조용히 미소 지었다.

“말은 칼보다 깊이 들어간다.”

그가 처음 배운 문장, 마지막으로 되뇌인 문장이었다.

그해, 그는 세상을 떠났다.

장례는 크지 않았으나, 백성들의 입에서 그의 이름은 오래 남았다.


천 년이 흘러도, 압록강 바람 소리를 듣는 이들은 가끔 상상한다.

쇳빛 갑옷의 장수들 틈으로 홀로 걸어 들어가던 문신 하나를.

두려움을 삼키고, 상대의 체면을 세워주며, 자기 나라의 이익을 꺼내던 목소리를.

칼은 칼집으로 돌아갔고, 땅은 북으로 움직였다.

그 모든 순간의 중심에, 서희가 서 있었다.




그의 공을 두고 오늘도 교실에서 질문이 오간다.

“그는 과연 유화였는가, 현명했는가.”

아이들이 답한다.

“그의 말 한마디가 백만의 칼을 눕혔다.”

그리고 한 줄이 더 적힌다.

“그 말은 밤새 준비된 문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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