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거인 박술희, 충의로 지켜낸 왕건의 후계와 삼한일통의 완성 (Bak Sul-hui of Goryeo)


 고려의 거인 박술희: 충의로 엮어낸 삼한일통의 대서사


1. 시대의 격랑과 한 무인의 등장

10세기 초, 한반도는 고대 질서가 해체되고 새로운 패권이 태동하는 거대한 용오름의 한복판에 있었다. 

천년 사직 신라는 기우는 석양처럼 그 휘광을 잃었으며, 팔도에서 발호한 호족들은 저마다의 야욕을 칼끝에 담아 비린내 나는 각축을 벌였다. 

사료(史料)의 행간을 살피건대, 이 시기는 단순한 무력의 충돌을 넘어 새로운 시대정신인 '삼한일통(三韓一統)'을 누가 선점하느냐를 두고 벌인 거대한 서사적 투쟁이었다. 

이 혼돈의 한복판에서 혜성군(槥城郡, 지금의 충남 당진)의 척박한 해안가 대지를 딛고 일어나 역사의 전면에 부상한 인물이 있었으니, 그가 바로 면천 박씨의 시조, 대광(大匡) 박술희(朴述熙)다.

박술희의 등장은 단순한 일개 용장의 부상이 아니었다. 

그는 무너진 도덕적 기틀을 바로잡고, 고려 왕조의 근간이 될 '충(忠)'이라는 가치를 자신의 육신으로 제도화한 상징적 존재였다. 

역사적 개연성을 비추어 볼 때, 그는 궁예의 위사(衛士)로 시작하여 태조 왕건의 가장 내밀한 심복이 되기까지, 끊임없이 변모하는 권력의 지형도 속에서도 결코 흔들리지 않는 북극성과 같은 충절을 보였다. 

박술희라는 무인이 짊어진 시대적 소명은 파편화된 호족의 힘을 하나의 국호 아래로 규속시키는 것이었으며, 태조 왕건은 그의 거친 야성 속에서 제국의 주춧돌을 발견했다. 

거친 들판에서 자라난 이 용맹한 무인은 이제 한반도의 운명을 바꿀 운명적 만남을 향해 나아간다.


2. 혜성군의 야성과 운명적 만남

박술희의 고향인 혜성군은 아산만의 남쪽 연안에 자리 잡은 해상 교통의 요지이자, 당나라 사신과 상인들이 드나들던 국제적 관문이었다. 

이곳은 거친 파도를 헤치며 부를 축적한 해상 세력들의 근거지였으며, 박술희의 부친 박득의(朴得宜) 역시 대승(大丞)의 작위를 지녔던 유력한 인물이었다. 

하지만 학계 일각에서는 그가 유력 호족의 자제라기보다 밑바닥에서부터 실력으로 올라온 군인 출신이었다는 점에 주목한다. 

그는 가문의 후광보다는 자신만의 독특한 야성으로 정체성을 구축했다.

『고려사(高麗史)』와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는 박술희의 기질을 매우 이례적인 필치로 기록하고 있다. 

그는 성격이 용감하고 대담했을 뿐만 아니라, 식성이 남달라 두꺼비, 청개구리, 거미 같은 미물들까지 서슴지 않고 먹었다고 전해진다. 

이는 단순히 괴이한 식습관의 기록이 아니라, 전쟁터라는 극한의 환경에서 살아남을 수 있는 강인한 생존력과 어떤 적 앞에서도 위축되지 않는 기개를 상징한다. 

18세의 나이로 궁예의 위사가 되었을 당시, 그의 투박한 기개는 세련된 도성의 관리들을 경악케 했다.

"전쟁터에선 거미 한 마리도 귀한 고기다. 이 기운이 곧 고려의 창끝이 될 것이다. 배를 채우는 것은 고상한 격식이 아니라, 살아서 적의 목을 베겠다는 일념뿐이다!"

그의 이러한 정제되지 않은 힘을 알아본 이는 수군 장군으로서 서남해안을 석권하던 왕건이었다. 

왕건은 박술희의 거친 면모 속에서 장차 보위를 이을 자손을 지켜줄 가장 견고한 방패의 재목을 보았다. 

이 야성적인 무인에게서 제왕의 재목을 알아본 이는 다름 아닌 수군장군 왕건이었다.


3. 정윤(正胤)의 수호자: 자황포에 담긴 밀약

고려 건국 이후, 태조 왕건은 강력한 호족들의 발호 속에서 후계 구도를 안정시켜야 하는 절체절명의 과제에 직면했다. 

왕건은 나주 출신 장화왕후 오씨 소생인 맏아들 '무(武, 훗날 혜종)'를 깊이 신뢰했으나, 무의 외가는 다른 유력 호족들에 비해 세력이 미천했다. 

특히 무는 탄생부터 기묘한 일화를 안고 있었다. 

왕건이 오씨와의 동침 후 그녀를 미천하게 여겨 피임하려 했으나, 오씨가 그 정액을 돗자리째 흡수하여 잉태했으니, 무는 태어날 때부터 얼굴에 돗자리 무늬가 새겨져 '주름살 임금(襵主)'이라 불렸다. 

그러나 그는 '진룡자(眞龍子)', 즉 참된 용의 아들로서 물을 좋아하고 기개가 남다른 황태자였다.

박술희는 이 지점에서 왕권 계승의 '보증인'이라는 막중한 정치적 역할을 수행한다. 

921년, 왕건은 무를 정윤(正胤)으로 세우려 했으나 충주 유씨와 광주 왕씨 등 강력한 호족들의 반발을 우려해 직접 나서지 못했다. 

이때 왕건은 산뽕나무 즙으로 물들인 황제의 옷, '자황포(柘黃袍)'를 담은 옷상자를 박술희에게 보여주며 그의 의중을 떠보았다. 

이는 박술희에게 무의 정치적 방패가 되어달라는 밀약이었다.


왕건: "내 아들 무는 일곱 살 때부터 제왕의 덕을 보였으나, 그 외가는 세력이 미천하여 호족들의 이빨 앞에 놓인 어린 양과 같구나. 경이 그의 자황포를 지키는 방패가 되어주겠는가?"

박술희: "주군, 제 목숨은 이미 정윤의 것이옵니다. 제 가슴이 뚫리기 전에는 그 누구도 정윤의 자황포에 손을 대지 못할 것입니다."


박술희는 즉각 무를 정윤으로 세울 것을 주청하며 호족들의 반발을 정면으로 돌파했다. 

그가 자황포의 수호자를 자처한 것은 스스로를 모든 호족의 공적으로 만드는 위험한 선택이었으나, 이는 고려 초기 후계 구도의 불안정성을 해소하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다. 

이제 이들은 피로 맺어진 맹세를 지키기 위해 삼국 통일의 마지막 결전지로 향한다.


4. 일리천의 함성과 삼한일통의 완성

936년 9월, 한반도의 운명을 가를 최후의 결전인 일리천 전투가 벌어졌다. 

태조 왕건은 이 역사적인 전투의 선봉이자 준비 작업을 정윤 무와 박술희에게 맡겼다. 

이는 무에게 군사적 업적을 쌓게 함으로써 '준비된 왕'으로서의 정통성을 부여하려는 왕건의 치밀한 전략적 포석이었다.

당시 정윤 무는 천안부(天安府)에 머물며 후백제군의 배후를 위협하는 군사적 위력을 과시했다. 

이는 무를 직접적인 전장의 위험에 노출시키지 않으면서도, 승리의 주역으로 각인시키려는 왕건의 배려이자 '정치적 연출'이기도 했다. 

반면 박술희는 일리천의 본진에서 왕건을 직접 보좌하며 기만술과 맹렬한 돌격으로 신검의 군대를 붕괴시켰다. 

전장의 공기는 팽팽했고, 일리천의 물줄기는 고려군 10만 대군이 내지르는 함성에 요동쳤다.

이 전투의 승리는 단순히 영토의 통합을 넘어, 정윤 무의 군사적 입지를 공고히 하고 박술희를 제국 제일의 공신으로 격상시켰다. 

박술희는 승전 후 무가 일등공신(一等功臣)으로 인정받도록 힘을 실어주었으며, 이는 훗날 그가 '고명대신'으로서 지녀야 할 권위의 원천이 되었다. 

승전의 환호 뒤에는 늙어가는 태조의 그림자와 다가올 권력 투쟁의 암운이 드리우고 있었다.


5. 훈요십조와 고명(顧命): 제국을 떠받친 마지막 약속

943년 4월, 고려의 창업 군주 태조 왕건은 임종을 앞두고 내전으로 대광 박술희를 불렀다. 

그리고 자신이 직접 지은 고려의 통치 헌장, '훈요십조(訓要十條)'를 친히 하사했다. 

이는 박술희를 차기 국왕 혜종의 정통성을 보위할 '성역의 파수꾼'이자 고명대신(顧命大臣)으로 공인하는 행위였다.

훈요십조를 수탁한 박술희의 지위는 곧 고려 왕실의 안녕과 직결되었다. 

그러나 역설적으로 이 '고명'은 박술희를 호족 사회의 가장 위험한 표적으로 만들었다. 

왕건이 박술희를 선택한 이유는 그가 특정 지역의 이해관계에 얽매이지 않은 '충직한 무인'이었기 때문이지만, 이는 곧 그를 지원해줄 세력 기반이 미약했음을 의미하기도 한다.


왕건: "술희야, 이 열 가지 가르침과 내 아들을 네게 맡긴다. 고려의 천 년을 지켜다오. 이 글자 하나하나가 내 피요, 내 넋이니 절대 잊지 마라."

박술희: "대왕 전하, 신 박술희의 심장이 뛰는 한, 고려의 기틀은 흔들리지 않을 것입니다. 부디 편히 눈을 감으소서."


태조의 서거와 함께 평화의 시대는 가고, 혜종을 둘러싼 처절한 생존 게임이 시작되었다. 

박술희는 유언을 받들어 혜종을 보좌하는 데 온 힘을 쏟았으나, 그것은 파도 앞에 홀로 선 거대한 바위와 같은 고독한 투쟁이었다.


6. 병든 사자와 외로운 충신: 혜종의 시련

혜종은 즉위했으나 그를 기다리는 것은 찬란한 치세가 아닌 고통스러운 질병과 배신이었다. 

혜종은 본래 쇠갈고리를 손으로 펴고 굽힐 정도로 강건한 무인이었으나, 즉위 직후 원인 모를 불치병에 걸려 쓰러지고 만다. 

현대 의학적 관점에서 이는 극심한 스트레스로 인한 심신 쇠약으로 추정되나, 당시에는 왕권의 몰락을 예고하는 불길한 징조였다.

왕이 병석에 눕자 광주의 호족 왕규(王規)는 자신의 외손자인 광주원군을 옹립하기 위해 자객을 보내는 등 노골적인 반역을 꾀했다. 

또한 이복동생들인 요(정종)와 소(광종)는 서경의 왕식렴과 연계하여 세력을 확장했다. 

혜종은 자객이 침입했을 때 병중임에도 단 한 주먹에 그를 때려죽일 정도로 무술 실력이 뛰어났으나, 정치적 위협 앞에서는 한없이 무너져 내렸다. 

박술희는 이 고립무원의 처지에서 눈물로 밤을 지새우며 왕의 곁을 지켰다.


박술희: "전하, 신이 무능하여 전하를 이토록 고통스럽게 하나이다. 저 늑대 무리들이 전하의 병세를 틈타 보위를 넘보니, 이 술희의 죄가 하늘에 닿나이다."

혜종: "장군, 그대의 탓이 아니오. 내가 죽거든... 고려가 피로 물들지 않게 해주오."


왕의 숨이 잦아들 무렵, 박술희는 자신의 운명 또한 끝을 향하고 있음을 직감했다. 

무력은 강하였으나 정치적 지지기반이 없었던 혜종과 박술희, 이들은 권력의 허망함 속에서 서로를 의지하는 마지막 동지였다.


7. 비극적 최후: 갑곶의 피와 굴절된 역사

945년 9월 15일, 혜종이 서거하자마자 정종(요)이 즉위했다. 

그리고 바로 다음 날인 16일, 정종은 박술희를 모반의 위험이 있다는 구실로 강화도 갑곶(甲串)으로 유배 보냈다. 

이는 태조 왕건이 설계했던 후계 원칙이 호족들의 물리적 힘과 정치적 거래에 의해 무참히 굴절되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대목이다.

박술희가 유배지로 향하던 길, 왕규는 정종의 명령을 사칭하여 자객을 보냈다. 

정종은 왕규가 박술희를 죽일 것을 예견하면서도 이를 방관했으며, 왕규가 박술희를 처단하자 이를 빌미로 서경의 왕식렴을 불러들여 왕규 일파를 숙청했다. 

평생을 전쟁터에서 보낸 노구의 무인 박술희는 차가운 바닷바람이 부는 갑곶의 길목에서 생애 마지막 칼을 뽑았다.


박술희: "나는 죽어서도 혜종 대왕의 묘정에서 고려를 지켜볼 것이다! 너희가 비록 내 육신을 벨 수는 있으나, 내가 지킨 충의의 역사는 결코 베지 못하리라!"


945년 9월, 이 '피의 달'에 박술희는 그렇게 스러져갔다. 

그의 죽음은 고려 초기 건국 세력이 가졌던 순수한 충절의 시대가 저물고, 보다 냉혹하고 정략적인 권력 정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조종(弔鐘)이었다. 

육신은 차가운 바닷가에 버려졌으나, 그의 충절은 고려라는 국가의 기틀 아래 깊게 뿌리내렸다.


8. 역사가 기억하는 무인의 이름

사후 박술희는 엄의(嚴毅)라는 시호를 받고 태사 삼중대광(太師 三重大匡)으로 추증되었으며, 마침내 혜종의 묘정(廟庭)에 배향되어 죽어서도 주군을 모시는 영광을 안았다. 

면천 박씨의 시조로서 그가 남긴 혈통은 비록 작았으나, 그가 남긴 '충(忠)'의 유산은 고려 475년 역사를 지탱하는 정신적 지주가 되었다.

박술희라는 인물의 서사는 단순한 한 개인의 일생을 넘어, 고려 초기 건국사가 직면했던 모순과 그 극복 과정을 상징한다. 

그는 가장 낮은 곳에서 시작해 제국을 떠받치는 거인이 되었으며, 권력의 단맛보다 약속의 무게를 중시했던 참된 무인이었다. 

태조가 설계한 '정윤 계승'의 원칙은 비록 정변에 의해 일시적으로 굴절되었을지 모르나, 박술희가 목숨으로 지켜낸 그 가치만은 후대의 왕들에게 거울이 되었다.

박술희, 그는 고려의 시작과 끝을 함께한 가장 뜨거운 심장이었으며, 그가 지키려 했던 약속은 천 년의 역사 속에 여전히 흐르고 있다.


이 글은 『고려사』와 『고려사절요』를 비롯한 사료를 바탕으로 집필되었으며, 고려 초기의 정치 구조와 권력 관계를 보다 입체적으로 전달하기 위해 일부 장면은 역사적 맥락에 근거한 서사적 재구성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가능한 한 교차 검증을 거쳐 사실성을 유지하려 노력했으나, 고려 전기 특성상 사료의 공백이나 해석의 차이가 존재할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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Park Sul-hui was one of the most emblematic military figures of early Goryeo, embodying loyalty during a time of violent political fragmentation. 

Rising from the coastal region of Haeseong, he served first under Gung Ye and later became one of Wang Geon’s most trusted retainers. 

Park played a decisive role in securing the succession of Crown Prince Mu (later King Hyejong), publicly defending his legitimacy despite fierce opposition from powerful aristocratic clans. 

He fought in the final unification war at the Battle of Illicheon in 936, contributing to the fall of Later Baekje and the completion of the Three Han unification. 

Appointed as a posthumous guardian minister, Park safeguarded Wang Geon’s final injunctions but was ultimately isolated after Hyejong’s death. 

Exiled and assassinated amid factional struggles, Park Sul-hui’s death marked the end of an era defined by personal loyalty, giving way to colder dynastic politic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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