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자존심을 세운 청년 군주, 덕종(德宗)의 불꽃 같은 생애
자, 여러분.
오늘은 우리 역사에서 유독 짧지만, 그 어떤 횃불보다 뜨겁게 타올랐던 한 청년 군주의 이야기를 들려드리고자 합니다.
바로 고려의 제9대 국왕, 덕종(德宗)입니다.
여러분은 '덕(德)'이라는 글자를 들으면 무엇이 떠오르시나요?
대개는 온화하고 인자한 성품을 떠올리곤 합니다.
하지만 고려 사람들이 이 어린 임금에게 바친 '덕'이라는 이름에는 훨씬 더 묵직하고 강렬한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것은 거대 제국 거란의 오만함에 맞서 고려의 자존심을 꼿꼿이 세웠던 '강단 있는 덕'이자, 짧은 생을 불살라 백성들의 삶을 지켜낸 '헌신적인 덕'이었습니다.
재위 기간은 단 3년 4개월.
하지만 그가 남긴 발자취는 천 년의 세월을 뛰어넘어 오늘날 우리에게 큰 울림을 줍니다.
자, 이제 시간을 거슬러 11세기 고려의 궁궐, 연경궁의 문을 열어보겠습니다.
고려 제9대 국왕 덕종(德宗) 프로필
• 휘(이름): 왕흠(王欽) / 자(字): 원량(元良)
• 생몰년: 1016년(현종 7년) ~ 1034년(덕종 3년)
• 재위 기간: 1031년 5월 ~ 1034년 9월
• 가족 관계: 부왕 현종(顯宗), 모후 원성태후 김씨 / 동생 정종(靖宗)
• 비(妃): 경성왕후(현종의 딸), 경목현비(왕가도의 딸), 효사왕후(현종의 딸) 등
• 핵심 업적: 거란 강경 외교 및 연호 사용 중지, 천리장성(북경관성) 축조, 국자감시 시행, 7대 실록 완성, 전시과 개정
1. 어린 시절: 기왓장을 깨뜨린 무거운 덕의 주인공
1016년, 고려의 하늘에는 희망의 기운이 감돌고 있었습니다.
거란과의 참혹한 전쟁 속에서도 나라를 굳건히 지켜내던 성군 현종의 품에 첫째 아들 '흠(欽)'이 태어난 것이지요.
어린 왕자 흠은 태어날 때부터 눈빛이 형형하고 총명함이 남달랐습니다.
사서에서는 그를 두고 "어려서부터 성숙했으며 성격이 강인하고 결단력이 있었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 비범한 소년 왕자를 상징하는 아주 흥미로운 설화가 하나 전해집니다.
이른바 '기왓장 설화'입니다.
어느 날, 연경궁 뜰을 거닐던 신하들이 경악을 금치 못하며 현종에게 달려갔습니다.
"폐하! 기이한 일이 벌어지고 있사옵니다! 세자 저하께서 밟으시는 길마다 기왓장과 벽돌이 쩍쩍 갈라져 깨지고 있사옵니다!"
현종이 놀라 뜰로 나갔을 때, 어린 흠은 천연덕스럽게 벽돌 위를 걷고 있었습니다.
정말로 소년이 발을 내디딜 때마다 단단한 벽돌이 마치 마른 나뭇가지처럼 부서져 나갔지요.
신하들은 무릎을 꿇으며 외쳤습니다.
"이는 저하의 몸이 무거워서가 아니옵니다. 저하께서 품으신 덕(德)이 워낙 두텁고 기개가 중압감이 있어, 땅조차 그 무게를 견디지 못하는 것이옵니다!"
현종이 아들을 대견하게 바라보며 물었습니다.
"흠아, 네 덕이 그리도 무거우니 장차 이 나라를 어찌 이끌겠느냐?"
어린 흠은 부서진 벽돌 조각을 가만히 내려다보며 대답했습니다.
"아버님, 기왓장이 깨지는 것은 물건이 약하기 때문이지 제 덕이 무겁기 때문이겠습니까. 다만, 제가 딛는 이 발걸음 하나가 훗날 백성들의 삶을 짓누르는 무게가 되지 않도록, 제 스스로를 늘 경계하고 또 경계하겠나이다."
이 대답에 현종은 전율했습니다.
단순히 힘이 센 것이 아니라, 자신의 권력이 백성에게 고통이 될까 먼저 걱정하는 그 마음.
이것이 바로 우리가 덕종의 생애를 통해 보게 될 '무거운 덕'의 실체였습니다.
그는 1022년, 고작 7세의 나이로 태자에 책봉되며 고려의 미래를 짊어지게 됩니다.
2. 즉위와 슬픔: 아버지의 눈물을 닦고 제국을 선포하다
운명의 시간은 생각보다 빨리 찾아왔습니다.
1031년 5월, 고려의 기틀을 닦았던 위대한 부왕 현종이 서거했습니다.
16세의 소년 왕자 흠에게 아버지는 단순한 군주 이상이었습니다.
전쟁의 화마로부터 백성을 구하고, 불타버린 개경을 다시 세운 영웅이자 스승이었지요.
덕종은 즉위 직후, 정무를 돌보는 대신 익실(翼室)에 머물며 아침저녁으로 통곡했습니다.
궁궐 복도에는 어린 임금의 흐느낌이 끊이지 않았고, 이를 지켜보는 신하들의 마음도 미어지는 듯했습니다.
"전하, 이제 그만 옥체를 보존하소서. 부왕께서도 전하가 이렇게 슬퍼만 하시는 것을 원치 않으실 것입니다."
중신 왕가도가 곁에서 조심스레 간언하자, 덕종은 눈물 젖은 얼굴을 들며 말했습니다.
"공, 내 어찌 아버님의 빈자리를 슬퍼하지 않겠소. 하지만 내 눈물은 아버님을 향한 그리움인 동시에, 아버님이 남기신 이 무거운 나라를 잘 이끌 수 있을까 하는 두려움이기도 하오. 이제 눈물을 닦고 아버님이 꿈꾸셨던 '당당한 고려'를 증명해 보이겠소."
덕종의 침전, 그 깊은 어둠 속에서 소년 왕의 어깨를 감싸준 이는 이복 누이이자 아내인 경성왕후(현종의 딸)였습니다.
당시 고려 왕실은 혈통의 순수성을 지키기 위해 왕씨 가문끼리 혼인하는 '족내혼'이 관습이었습니다.
하지만 아무리 관습이라 해도, 피를 나눈 남매가 부부의 연을 맺는다는 것은 청년 왕흠에게는 늘 무겁고 기묘한 짐이었습니다.
"전하, 부왕께서는 전하가 강해지길 바라셨으나, 동시에 전하의 마음이 다치는 것을 가장 경계하셨나이다."
경성왕후는 덕종에게 아내이자, 유일하게 속마음을 터놓을 수 있는 누이였습니다.
두 사람은 부왕 현종을 함께 잃은 상실감을 공유하며 그 어느 부부보다 애틋하게 서로를 의지했습니다.
하지만 하늘은 냉혹했습니다.
두 사람 사이에는 끝내 아이가 생기지 않았습니다.
후사를 이어야 한다는 신하들의 압박이 거세질 때마다, 덕종은 오히려 그녀의 손을 더욱 꽉 잡았습니다.
거란과 맞서며 밖으로는 '호랑이'처럼 포효하던 청년이었지만, 궁궐 안에서는 아이가 없는 아내의 슬픔을 묵묵히 받아내던 '고독한 정인'이었습니다.
그녀를 향한 예우를 끝까지 저버리지 않았던 것은, 그 거친 난세 속에서 그녀만이 유일하게 자신을 '왕'이 아닌 '사람'으로 봐주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덕종은 즉시 중광전에서 즉위식을 올리고, 고려가 거란의 눈치를 보는 변방의 나라가 아닌 '천하의 중심'임을 대내외에 선포했습니다.
그는 즉위하자마자 다음과 같은 파격적인 명칭 개정을 단행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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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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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 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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변경 후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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목적 및 배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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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의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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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지(王旨) 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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제(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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황제만이 사용할 수 있는 용어로 고려의 자주성 확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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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왕의 생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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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수절(仁壽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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응천절(應天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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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늘의 뜻에 부응한다'는 뜻으로 황제국 위상 강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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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 기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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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대 및 저자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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강경 및 대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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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의 무리한 영토 점유와 간섭을 원천 차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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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것은 시작에 불과했습니다.
소년 임금은 이제 거란이라는 거대한 괴물을 향해 고려의 칼날을 겨누기 시작했습니다.
거란 사신의 오만을 꺾은 "어린 호랑이의 눈빛"
현종의 장례가 채 끝나기도 전, 거란(요나라)의 사신들이 개경에 들이닥쳤습니다.
그들은 상주(喪主)인 덕종의 어린 나이를 만만히 보고, 보란 듯이 거만한 태도를 보였습니다.
사신단의 우두머리는 고개를 꼿꼿이 든 채, 위로 대신 압박의 말을 내뱉었습니다.
"고려의 새 임금이 이리 어린 줄 몰랐구려. 부왕의 뜻을 이어 우리 대국에 고개를 숙인다면 평화는 유지될 것이오."
순간, 조정의 공기가 얼어붙었습니다.
하지만 용상에 앉은 16세의 덕종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차갑게 가라앉은 목소리로 사신의 말을 잘랐습니다.
"평화라 했는가? 그대들이 압록강에 무단으로 성을 쌓고 우리 백성을 잡아두는 것이 그대들이 말하는 평화인가?"
덕종이 자리에서 일어나 사신을 정면으로 쏘아보자, 소년의 눈에는 슬픔 대신 서릿발 같은 기개가 서렸습니다.
"짐은 아버님처럼 인자하기만 한 임금이 아니오. 내 눈에는 그대들의 오만함이 곧 무너질 모래성처럼 보이는구려. 돌아가서 전하라. 고려의 새 임금은 굴욕으로 산 목숨을 구걸하지 않는다고."
사신은 어린 왕의 서슬 퍼런 눈빛에 압도되어 뒷걸음질을 쳤습니다.
이것이 거란 황제를 경악게 한 '어린 호랑이'의 첫 포효였습니다.
3. 대외 정책: 거란의 오만함에 맞선 청년 군주의 승부수
당시 국제 정세는 팽팽한 긴장감이 흐르고 있었습니다.
거란(요나라)은 압록강 유역에 무단으로 성을 쌓고 부교를 설치하며 고려의 국경을 야금야금 침범하고 있었습니다.
또한 전쟁 중 끌어간 고려 백성들을 여전히 억류하고 있었지요.
1031년 10월, 거란의 명군 성종이 죽고 흥종이 즉위했습니다.
이때 덕종은 전 세계 외교사에 유례가 없는 대담한 결단을 내립니다.
거란 황제의 장례식에 사신 김행공을 보내며 '상갓집'에서 영토 반환을 요구한 것입니다.
"거란은 압록강에 무단으로 쌓은 성과 다리를 즉시 헐어버리고, 억류된 우리 백성들을 한 명도 빠짐없이 돌려보내라! 이것이 지켜지지 않는다면 고려와 거란의 신의는 오늘로 끝이다!"
상갓집에서 이런 요구를 받은 거란 조정은 발칵 뒤집혔습니다.
"어린 고려 임금이 미쳤구나!"라며 길길이 날뛰었지요.
거란이 이를 단칼에 거절하자, 고려 조정 내에서도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습니다.
온건파(유화론): "전하, 아직 전쟁의 상처가 다 아물지 않았습니다. 거란은 강대국입니다. 지금은 그들의 비위를 맞춰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이 상책이옵니다."
강경파(왕가도, 서눌 등): "전하! 거란은 우리의 호의를 약점으로 이용하고 있습니다. 압록강 유역의 성들은 고려를 겨눈 칼날입니다. 지금 고개를 숙이면 평생 그들의 발밑에 살아야 합니다!"
덕종은 용상에서 일어나 신하들을 내려다보았습니다.
그의 목소리는 차분했지만, 서릿발 같은 기운이 서려 있었습니다.
"백성을 쉬게 하는 것은 굴욕으로 얻는 평화가 아니라, 누구도 넘볼 수 없는 강함을 가질 때 가능한 것이오. 거란이 우리 백성을 돌려주지 않고 우리 땅을 침범했으니, 나 또한 그들을 황제로 대접하지 않겠소. 지금 당장 거란의 사신을 끊고, 새로 즉위한 흥종의 연호를 쓰지 말라!"
고려는 새로 즉위한 거란 황제 흥종의 연호인 '경복'을 거부하고, 이미 죽은 전 황제의 연호인 '태평(太平)'을 고집했습니다.
이는 "우리는 너를 황제로 인정하지 않겠다"는 가장 강력한 외교적 모욕이자 선전포고였습니다.
놀라운 사실은, 당시 거란은 내부 권력 다툼으로 극심한 혼란에 빠져 있었다는 것입니다.
흥종의 생모가 성종의 황후를 살해하는 정변이 일어났고, 이에 환멸을 느낀 거란의 고위 관료들이 대거 고려로 망명해왔습니다.
해가(奚家), 내을고, 고진상, 왕광록 등 거란의 중앙 귀족들이 수십 명씩 무리를 지어 고려로 귀순했습니다.
심지어 거란은 고려의 기세에 겁을 집어먹고, 원수지간이었던 송나라에 사신을 보내 "제발 고려를 같이 정벌해달라"고 병사를 구걸하기까지 했습니다.(송명신언행록 기록)
당대 최강대국 거란이 고려를 얼마나 두려워했는지 알 수 있는 대목입니다.
덕종의 강경 외교는 허세가 아닌, 정확한 정세 판단에 근거한 '고려의 자존심'이었습니다.
4. 국방과 내치: 천리장성과 인재의 숲을 일구다
덕종은 말로만 강경한 군주가 아니었습니다.
그는 거란의 재침을 원천적으로 봉쇄할 거대한 물리적 장벽을 구상했습니다.
1. 고려의 방패, 천리장성(북경관성) 축조
1033년 8월, 덕종은 평장사 유소(柳韶)를 불러 엄중한 명을 내립니다.
"유소 공, 압록강 어귀에서 동해안 화주에 이르는 모든 국경에 장벽을 쌓으시오. 개미 한 마리 통과할 수 없는 견고한 성벽을 말이오."
이것이 바로 우리 역사에 길이 남을 천리장성의 시작입니다.
의주, 정주, 영해, 삭주, 맹주, 요덕, 화주를 잇는 이 장대한 성벽은 높이와 두께가 무려 25척(약 7.5m)에 달하는 거대한 석축 성벽이었습니다.
거란은 이 공사를 저지하기 위해 1033년 10월, 정주(靜州)를 침공해왔습니다.
하지만 덕종은 직접 장성 축조 현장을 독려하며 군사들을 격려했습니다.
"우리가 쌓는 것은 단순한 돌덩이가 아니다! 이것은 고려의 자존심이자, 우리 후손들이 대대손손 누릴 평화의 울타리다! 적들이 오면 단 한 놈도 살려 보내지 마라!"
고려군은 거란의 공격을 처절하게 분쇄하며 성벽을 쌓아 올렸습니다.
덕분에 고려는 북방 여진족들까지 복속시키며 '동북아시아의 강대국'으로 그 명성을 떨치게 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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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蠻狄侵略 柳韶築千 북방 오랑캐의 침략에 유소가 천리를 쌓았다. |
여진족 추장들의 자발적 복속 (동북방의 지배자)
덕종의 강경한 기세는 거란뿐 아니라 북방의 거친 여진족들까지 흔들어 놓았습니다.
장성이 한 척씩 높아질수록, 장성 너머 만주 벌판의 소문은 빠르게 퍼져나갔습니다.
"고려의 새 임금은 거란 황제에게도 호통을 치는 강단 있는 인물이다."
1033년(덕종 2년) 겨울, 놀라운 광경이 펼쳐졌습니다.
동북방 일대를 주름잡던 여진족 추장들이 무리 30여 명을 이끌고 개경의 궁궐 문을 두드린 것입니다.
그들은 약탈자가 아닌, 무릎을 꿇은 '복속자'의 모습이었습니다.
"고려 왕의 위엄이 하늘에 닿았으니, 저희도 고려의 백성이 되어 그 품 안에서 살기를 원하나이다!"
덕종은 이들을 문박대하지 않았습니다.
오히려 너그럽게 받아들여 관직과 토지를 내렸습니다.
이는 단순한 포용이 아니었습니다.
여진을 고려의 울타리로 삼아 거란을 견제하는 고도의 전략이었지요.
천리장성은 단순히 적을 막는 벽이 아니었습니다.
그 성벽은 북방 민족들이 우러러보는 '문명의 경계선'이자, 고려가 동북아의 진정한 강자로 우뚝 섰음을 상징하는 자부심의 이정표가 되었습니다.
2. 현명한 나라의 기반: 국자감시와 7대 실록
내치에서도 덕종의 업적은 눈부셨습니다.
그는 '인재가 곧 국력'임을 간파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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업적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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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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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 및 국가에 준 혜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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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자감시 최초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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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인재들에게 응시 자격을 준 과거 예비 시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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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경 귀족뿐 아니라 지방의 유능한 인재 등용 길 개척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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7대 실록 완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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태조부터 목종까지 7대 국왕의 역사 정리 (36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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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란으로 손실된 국가 정통성 회복 및 통치 거울 마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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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시과 개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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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인(閑人, 직역부담층)에게도 토지 지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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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급 계층의 경제적 자립과 국가 충성도 제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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덕종은 1031년 국자감시를 통해 정공지(鄭功志) 등 60명의 인재를 선발했습니다.
"문장을 아름답게 엮는 것만큼이나 백성의 마음을 읽는 것이 중요하다"는 것이 그의 인재 등용 원칙이었습니다.
5. 흥미로운 일화: 봉황이 춤추고 까마귀가 사라진 시대
덕종의 치세가 얼마나 평화롭고 상서로웠는지를 보여주는 민간 설화가 하나 있습니다.
바로 '의봉문 봉황 이야기'입니다.
어느 날, 개경 궁궐의 정문인 의봉문(儀鳳門) 하늘 위에 상서로운 새, 봉황이 나타났습니다.
봉황은 오색찬란한 날개를 펴고 임금의 덕을 칭송하듯 춤을 추었지요.
백성들은 거리에 나와 만세를 불렀습니다.
"우리 임금님의 덕이 하늘에 닿아 봉황이 내려오셨다!"
그런데 갑자기 어디선가 시커먼 까마귀 떼가 몰려와 봉황을 쪼며 소란을 피우기 시작했습니다.
결국 봉황은 귀찮은 듯 하늘 높이 날아가 버렸지요.
이 광경을 본 개경 사람들은 분노했습니다.
"감히 어느 시대라고 우리 임금님의 정치를 축하하러 온 봉황을 쫓아내느냐! 저 흉물스러운 까마귀들을 용서치 않겠다!"
그날 이후, 개경의 아이들은 물론 노인들까지 활을 들고 까마귀를 쏘아 잡기 시작했습니다.
백성들이 얼마나 철저하게 까마귀를 멀리했는지, 덕종이 재위하는 내내 수도 개경에서는 까마귀 울음소리가 단 한 번도 들리지 않았다고 합니다.
상서로운 정치와 백성의 지지
이 설화는 단순한 미신이 아닙니다.
백성들이 덕종의 통치를 '봉황이 찾아올 만큼 빛나는 시대'로 여겼으며, 그 평화를 깨뜨리려는 존재(까마귀)에 대해 자발적으로 맞설 만큼 왕을 깊이 신뢰하고 사랑했음을 상징합니다.
6. 마지막 작별: 19세 청년 군주의 고귀한 유언
하지만 하늘이 내린 기운도 육신의 한계를 넘지는 못했습니다.
재위 3년째, 천리장성 공사가 막바지에 다다를 무렵 덕종의 건강에 급격한 이상이 생겼습니다.
식은땀이 비 오듯 흐르고 숨이 가빠오는 날이 반복되었습니다.
어의들은 정사를 돌보는 것을 만류하며 절대 안정을 권했습니다.
하지만 덕종은 침상 머리에 늘 서북면에서 올라온 장계(보고서)를 두게 했습니다.
"유소가 쌓고 있는 성벽은 어디까지 올라왔느냐? 정주의 성문은 단단히 고정되었더냐?"
그는 자신의 맥박이 느려지는 순간에도 국경의 성벽이 높아지는 소리에 귀를 기울였습니다.
고열에 시달리면서도 지도 위에서 손을 떼지 못했습니다.
그에게 장성은 단순한 토목 공사가 아니라, 다시는 외적에게 짓밟히지 않겠다는 백성과의 약속이었기 때문입니다.
"내 비록 완공된 장성을 직접 보지는 못하나, 저 성벽이 백성들의 평화로운 잠자리를 지켜준다면 그것으로 짐의 소임은 다한 것이다."
19세 청년 군주의 생명력은 그렇게 고려의 국토를 지키는 거대한 석축 사이사이에 스며들고 있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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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압록강 하구에서 동해안 도련포까지 이어진 고려의 천리장성 |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한 그는 곁을 지키던 동생 평양군 왕형(훗날 정종)의 손을 잡았습니다.
"아우야... 짐의 병이 깊어 더는 보위를 지키지 못할 것 같구나. 마땅히 네가 나의 뒤를 이어 이 고려와 백성을 보살펴다오. 아버님이 지키신 이 땅을, 내가 쌓은 저 장벽이 헛되지 않게 굳건히 지켜다오. 백성을 아끼는 마음을 잠시도 잊어서는 안 된다..."
그는 1034년 9월 17일, 연영전에서 만 18세(향년 19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습니다.
고려의 모든 산천이 함께 울었고, 백성들은 부모를 잃은 듯 통곡했습니다.
훗날 이제현은 그를 향해 이렇게 절절한 평론을 남겼습니다.
"덕종께서는 부모님께 효성을 다했고, 명신들을 등용해 조정을 잘 이끌었으며, 백성들을 편안하게 하셨다. 그러니 그에게 '덕(德)'이라는 시호를 올리는 것은 지극히 당연하고도 마땅한 일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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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숙릉 최근 모습 |
천 년을 전해 내려온 청년 왕의 찬가, <엄안(嚴安)>
덕종이 세상을 떠난 지 80여 년이 흐른 뒤, 고려의 또 다른 성군 예종(睿宗)은 이 짧고 강렬했던 선왕의 생애를 기리며 노래를 짓게 합니다.
그것이 바로 고려사 악지에 기록된 <엄안(嚴安)>이라는 찬가입니다.
네 글자씩 절도 있게 끊어지는 이 운구 속에는, 우리가 미처 다 알지 못했던 덕종의 '진면목'이 고스란히 박혀 있습니다.
하늘이 내린 덕(天生)은 누구도 따를 자 없고, 그 위엄은 우레와 번개(雷霆) 같아 이웃 나라를 떨게 하네.
나라의 강토를 넓히고 또 넓히니, 지금도 저 오랑캐들은 땅을 뺏길까 전전긍긍하며 변방을 지키네.
진덕(震德: 왕위)이 잠저를 떠나 용이 하늘을 날으니, 그 위엄이 거란(遼邦)까지 흔들어 누구도 그 앞에 서지 못하네.
문화가 다른 이들이 소문을 듣고 찾아와 조공을 바치니, 넓혀놓은 이 강토에서 세세토록 복을 받으소서.
이 노래는 단순한 찬양을 넘어, 덕종이 당대 거란(요나라)에게 얼마나 공포스러운 존재였는지를 증명합니다.
'위엄이 요나라까지 흔들었다'거나, '오랑캐들이 땅을 뺏길까 봐 겁내고 있다'는 구절은 고려가 거란의 눈치를 보던 나라가 아니라, 오히려 거란을 압박하던 '강한 고려'였음을 보여주는 대목입니다.
후대의 왕과 백성들은 제사를 지낼 때마다 이 노래를 부르며, 19세에 지고 만 그 불꽃 같은 청년 군주를 그리워했습니다.
비록 생은 짧았으나 그가 남긴 '위엄'은 고려라는 나라의 뼈대가 되어 수백 년을 버티는 힘이 되었습니다.
덕종을 기억하는 3가지 키워드
1. 강인함(剛): 거란의 위협에도 굴하지 않고 외교 단절과 천리장성 축조를 밀어붙인 '무쇠 같은 기개'.
2. 효심(孝): 부왕 현종의 서거를 진심으로 애도하고, 아버지가 세운 고려의 기틀을 완벽하게 계승한 '충직한 아들'.
3. 애민정신(愛): 국자감시로 인재의 길을 넓히고 백성들이 '봉황의 시대'를 꿈꾸게 한 '따뜻한 지도자'.
덕종의 생애는 비록 19년이라는 짧은 시간이었습니다.
하지만 그가 세운 천리장성은 이후 수백 년간 고려의 방패가 되었고, 그가 보여준 자주 외교는 오늘날 우리에게 국가의 존엄이 무엇인지 가르쳐줍니다.
청년 군주 왕흠, 그는 진정으로 '무거운 덕'을 지닌 고려의 자부심이었습니다.
이 글은 『고려사』 등 공개된 기록과 개설 자료를 바탕으로 하되, 읽는 흐름을 살리기 위해 일부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전해지는 일화(예: 기왓장 이야기, 봉황·까마귀 이야기)는 사실 확정이라기보다 당시의 인식과 분위기를 보여주는 전승 성격이 섞여 있을 수 있습니다
연도·날짜는 기록 체계(음력/양력) 차이로 표기 방식이 달라질 수 있으니, 연구·인용 목적이라면 국사편찬위원회 등 1차 데이터베이스로 한 번 더 확인을 권합니다.
Deokjong of Goryeo (Wang Heum, r. 1031–1034) became king at sixteen after Hyeonjong’s death.
In a reign of only three years, he asserted Goryeo’s autonomy against the Khitan Liao: he elevated court terminology, refused the new Liao era name, and demanded removal of Khitan border works on the Amnok (Yalu) plus the return of detained Goryeo people.
When rebuffed, he hardened policy and prepared for conflict.
In 1033 he began the Cheolli Jangseong (Northern Long Wall), fortifying the frontier as Khitan forces tested defenses at Jeongju.
At home he widened recruitment through the first National Academy examination, advanced state record-keeping, and revised the land-allotment system.
Falling ill, he entrusted succession to his brother (later Jeongjong) and died in 1034, remembered for prideful diplomacy and care for the real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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