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전쟁, 운명의 날의 기록
침묵 속의 폭풍 - 1950년 6월, 선전포고 없는 새벽
1950년 6월, 한반도는 냉전(冷戰)이라는 거대한 얼음 아래 갇혀 있었다.
제2차 세계대전이 종식된 지 불과 5년, 승전국인 미국과 소련은 한반도를 38도선(남북 분단의 경계선)으로 나누어 점령한 후, 각기 자유민주주의(대한민국)와 공산주의(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체제를 이식했다.
이 대립은 단순한 정치적 경쟁을 넘어, 한민족 내부의 이념과 계층 갈등(사회, 경제적 모순)을 극단적인 형태로 폭발시키기 직전이었다.
오판과 야욕의 합작
북한의 최고 지도자인 김일성(金日成)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무력(武力)을 통한 한반도 전체의 공산 통일이라는 야심을 품고 있었다.
그는 1949년 중국 공산당이 국민당(國府黨)을 몰아내고 대륙을 장악한 사건(중화인민공화국 성립)에 고무되었으며, 남침을 승인받기 위해 소련 공산당 서기장인 스탈린(이오시프 스탈린)에게 무려 48번이나 재가를 요청했다는 기록이 있다.(논쟁)
스탈린은 미국과의 직접적인 충돌을 극도로 두려워했으나, 결국 미국의 관심을 유럽(마셜 플랜 진행 중)에서 아시아로 돌리고, 중국(중공)을 끌어들여 두 나라의 힘을 소모시키려는 이이제이(以夷制夷) (오랑캐를 이용하여 오랑캐를 제압한다는 전략) 전략의 일환으로 1950년 4월,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한다.
스탈린은 김일성에게 전쟁 준비를 치밀하게 할 것과, 최종 결정은 마오쩌둥(毛澤東) (중화인민공화국 주석)과의 협의를 거칠 것을 조건으로 내걸었다.
1950년 5월, 김일성은 마오쩌둥을 만나 "미국은 조선 같은 작은 나라 때문에 3차 대전을 시작하지 않을 것"이라며 남침을 지지해 줄 것을 요청했고, 마오쩌둥은 미군 개입 시 병력 지원(중국인민지원군 파견)을 약속했다.
이로써 6.25 전쟁은 김일성, 스탈린, 마오쩌둥 3자 합의에 의한 명백하고 계획적인 남침이었다는 것이 구 소련 문서 공개 이후 정통 학설로 확고해졌다.
그러나 이 계획에는 치명적인 오판(誤判)이 깔려 있었다.
김일성과 박헌영(朴憲永) (남조선노동당 책임자)은 남침 개시 후 남한 내 공산주의자(남로당원) 20만 명의 대규모 무장 봉기(인민 봉기)가 일어나 대한민국 정부가 조기에 붕괴되리라 확신했지만, 이는 남한의 정세에 대한 잘못된 정보였거나, 자신의 정치적 입지를 강화하려던 박헌영의 허위 보고였을 가능성이 높다. (논쟁)
이 오판은 북한군이 서울 점령 후 3일간 한강 도하를 지체하고 봉기를 기다리는 우를 범하는 결정적인 이유가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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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일성과 박헌영 |
대한민국의 비극적인 과실: 준비되지 않은 방패
한편, 대한민국(ROK)은 압도적인 군사적 열세에 놓여 있었다.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평소 "북진통일론"을 공공연히 주장했고, 채병덕(蔡秉德) (육군총참모장)은 "아침은 개성에서 점심은 평양에서 저녁은 신의주에서 먹겠다"며 호전적인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미국은 이승만 정부가 북침할 경우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될 것을 우려하여, 한국군에 전차, 전투기, 곡사포 등 공격용 무기 지원을 극도로 꺼렸다.
심지어 미군은 폭격기 B-26 머로더 30대를 한국에 넘겨주는 대신 도끼로 파괴하는 선택을 할 정도였다.
결과적으로 1950년 6월 기준, 북한군이 T-34/85 전차 242대와 최신 소련제 무기로 무장한 13만 5천여 명의 지상군(준군사조직 포함 시 20만 명 이상)을 확보한 데 비해, 한국군은 전차와 전투기가 단 한 대도 없었고, 순수 정규군 병력은 6만 5천여 명에 불과했다. (명부상 9~10만)
게다가 당시 국군 수뇌부에는 총체적인 난국이 있었다.
신성모(申性謨) (국방부 장관)와 채병덕 총참모장은 북한의 남침 정보를 수없이 받았음에도 이를 무시했으며, 6월 24일 밤, 북한이 침공을 계획한 바로 그 주말(일요일)에 전군 비상경계령을 해제하고, 대규모 휴가와 외출을 허용했다.
이는 농번기(農繁期)의 일손 부족 및 군량미(軍糧米) 고갈 직전이라는 보급 문제 때문이기도 했다.
비록 군량미 부족과 농번기 동원이라는 사회적 배경이 있었으나, 전쟁 직전 최고조의 긴장 상태에서 경계령을 해제하고 병력 절반을 출타시킨 군 수뇌부의 판단은 명백한 대형 과실이었다.
당시 군 수뇌부는 전선(前線) 정보 파악은커녕, 육군본부 장교클럽에서 연회를 열고 있었다.
이는 전쟁 준비 부족과 더불어 초기 전선 붕괴를 초래한 가장 큰 이유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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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대통령 |
운명의 1950년 6월 25일 새벽
1950년 6월 25일, 일요일 새벽 4시.
북한군은 "폭풍 작전" (작전명) 하에 38도선 전역 11개소에서 선전포고도 없이 대한민국을 향해 전면적인 남침을 개시했다.
포성이 처음 터져 나왔을 때, 육군본부(陸軍本部)에서는 김종필(金鍾泌) 중위 (당시 육본 정보국 연락장교, 후일 국무총리)가 당직 근무 중이었다.
그는 다발적인 교전 보고를 접하고 최초로 전면 침공을 인지한 인물이었다.
김종필은 즉시 상부에 비상 소집과 비상령 발동을 건의했으나, 당직사령은 권한이 없다며 거절했고, 채병덕 총참모장은 급보를 받고도 "통상적인 국지전일 것"이라며 잠에서 깨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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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국 전쟁 무렵 김종필 |
(6월 25일 새벽 4시, 육본 상황실) 김종필(중위): "보고합니다! 옹진, 개성, 동두천, 춘천! 전선 전역에서 동시다발적인 포격과 전차 진격이 확인되었습니다! 전면전입니다!"
당직사령(소령): (하품하며) "김 중위. 몇 달째 이러고 있는데, 너무 흥분하지 마. 늘 있는 국지전이겠지. 총참모장님께는 이미 보고 올렸다네."
김종필(중위): "하지만 전차! T-34(소련제 중형 전차)가 보고됩니다! 이건 이전과는 다릅니다! 당장 전군에 비상령을 걸어야 합니다!"
당직사령(소령): "나에게 그럴 권한은 없다. 자네는 규정대로 하게."
오전 7시가 되어서야 전군 비상령이 발동되었고, 신성모 국방장관은 "신사는 주말에 근무하지 않는다"며 전화 코드를 뽑아 놓은 채 잠들어 있었다. (전승)
이승만 대통령은 오전 10시 30분이 넘어서야 경복궁 경회루(경복궁 내 누각)에서 낚시를 하다가 이 소식을 보고받았다.(전승)
북한군의 주력 공격 축선은 T-34/85 전차를 앞세운 포천(抱川)-동두천(東豆川)-의정부(議政府) 방면이었다.
이 축선은 서울로 향하는 3번 국도(경원선 철도와 함께 서울로 진입하는 통로)가 잘 발달되어 있어 침공 회랑으로 완벽했고, 이곳을 방어하던 유재흥(劉載興) 사단장 휘하의 국군 제7보병사단은 예비 연대(제3연대와 제25연대)가 이탈하거나 미도착하는 등 전력 자체가 약화된 상태였다.
전차 한 대도 없는 국군은 북한군의 기계화 부대에 속수무책으로 밀려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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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Т-34-85 프로토타입 |
다만, 전선 전체가 무너진 것은 아니었다.
백선엽(白善燁) (당시 대령, 국군 제1보병사단장)이 지휘하는 제1보병사단은 개성-문산 지구에서, 김종오(金鍾吾) 대령이 이끄는 제6보병사단은 춘천-홍천 전투에서, 이성가(李成佳) 대령의 제8보병사단은 강릉-주문진에서 각자 격렬하게 분전하며 북한군의 진격을 저지했다.
특히 제6사단은 북한군 제2군단의 진격을 3일이나 지연시켜 막대한 피해를 입혔고, 이는 북한군의 초기 작전 계획(국군 포위 섬멸)을 수포로 돌리는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수도 서울의 함락과 한강 인도교 폭파
북한군은 압도적인 군사력(기갑 전력, 물자 지원 측면에서 유엔군 대비 우위)을 바탕으로 3일 만에 수도 서울에 도달했다.
6월 27일 밤, 북한군 전차 부대 일부가 이미 서울 시내에 침입했다는 급보가 전해지자, 대한민국 정부는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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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울로 진입하는 조선인민군 보병부대와 전차부대 |
이승만 대통령은 이미 6월 27일 새벽 4시경, 특별 열차편으로 서울을 떠나 대전(대전광역시)으로 피난을 떠난 상태였다.
이 피난은 입법부(국회)와 사법부(대법원), 심지어 부통령과 국무회의 각료들마저 몰랐던 일방적인 몽진(蒙塵) (임금이 난리를 피해 도망가던 일)이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6월 27일 오전까지는 피난을 거부했지만, 북한군이 청량리까지 왔다는 소식에 결국 부랴부랴 서울역으로 향했다.
대통령은 KBS 대전방송국 방송과장을 충남지사 관사로 불러 "대전에서 방송한다는 말을 해서는 안 된다"고 지시하며, 마치 서울에 있는 것처럼 위장 방송을 하도록 했다.
국가 지도자의 이러한 무책임하고 기만적인 행동은 당시 국민들의 불신을 극대화했으며, 초기 정부의 사기를 땅에 떨어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같은 날 새벽, 국회에서는 신익희 (당시 국회의장) 등이 수도 사수 결의안을 채택하려 했으나, 이미 대통령은 떠난 후였다.
상황이 걷잡을 수 없이 악화되자, 6월 28일 새벽 2시 15분, 국군 공병대는 북한군의 한강 도하를 막기 위해 한강 인도교 (현재의 한강대교와 철교 일부)를 예정 시간보다 앞서 폭파시키는 비극적인 결정을 내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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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강철교(좌측)과 이미 파괴된 인도교(우측) |
한강 인도교 폭파의 원인
공병대는 북한군 전차부대의 진입을 막고, 후퇴하던 아군 병력이 재정비할 시간을 벌기 위해 다리를 폭파해야 한다는 전술적 압박을 받았다.
그러나 폭파 시점이 너무 일렀다.
이 폭파로 인해 강을 건너던 약 1,000명의 민간인과 국군 병력이 희생되었고, 강 북쪽에 있던 국군 병력 4만 4천 명 (서부전선 주력)은 조직적인 철수 기회를 놓치고 고립되었다. (논쟁/추정)
이들은 중화기와 장비를 모두 버리고 개인별로 한강을 도하해야 했으며, 제1사단(백선엽 사단) 등은 병력이 8,000명에서 1,000~2,000명 수준으로 급감하는 막대한 손실을 입었다.
한강 인도교 폭파는 참혹한 전쟁범죄이자 군 수뇌부의 무능과 무책임이 빚어낸 최악의 과실이었다.
적의 도하를 막는다는 전술적 목적은 있었으나, 통제 없이 민간인의 대피로가 차단되고 아군 주력이 고립되는 결과를 낳았다.
이후 군 당국은 책임을 최창식 대령 (당시 공병감)에게 전가하여 그를 적전비행죄로 몰아 총살했다. (후일 1964년 무죄 판결로 복권되었지만, 죽은 자는 말이 없다는 비극을 남겼다.)
(6월 28일 새벽, 한강 이북에서 고립된 병사) 김 중사: "빌어먹을! 다리가 끊겼다고? 우리도, 피난민들도, 아직 한강 북쪽에 이렇게 많은데!"
이 병장: "저 폭음이... 수도를 사수한다던 정부가, 우리를 버렸다는 뜻 아닙니까. 개별 철수 명령이 내려왔답니다, 중사님."
6월 28일, 대한민국은 전쟁 발발 3일 만에 수도 서울을 적에게 완전히 함락당했다.
북한의 평양 방송에서는 "6월 28일, 서울은 해방됐습니다! 영웅적 인민군대는 공격을 개시한 지 단 3일 만에 미제 침략자들의 식민지 통치로부터 서울을 완전히 해방시켰다"고 보도했다.
북한군은 중앙청에 인공기(북한의 국기)를 게양하고 전선 사령부로 사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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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앙청에 걸린 인공기 |
한강 방어선과 국제전의 시작
서울 함락 직후, 북한군은 박헌영의 호언장담대로 남한 내 인민봉기를 기다리며 한강 도하를 3일간 지체하는 우를 범했다.
이 짧은 시간은 대한민국에겐 생명줄과 같았다.
한강 이남으로 급히 철수한 국군 잔여 병력은 김홍일(金弘壹) 장군 (한국광복군 출신, 당시 유일하게 사단급 부대 운용 경험이 있는 지휘관)을 중심으로 시흥지구전투사령부 (임시 지휘부)를 급조하여 한강 남안에 필사적인 방어선(한강 방어선)을 구축했다.
김홍일 장군은 와해된 부대들을 수습하고 부족한 장비(중화기 손실이 막심했음)를 가지고 6월 28일부터 7월 4일까지 북한군의 진격을 약 1주일간 지연시키는 데 성공했다.
이는 미군 지상군이 한반도에 투입될 수 있는 귀중한 시간을 벌어주었다.
백선엽 장군(훗날 대장)은 "이분(김홍일)이 없었으면 조국은 적화통일되었을 것"이라고 회고했을 정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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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홍일 장군 |
(시흥지구전투사령부, 김홍일 장군과 장교들) 김홍일(소장): "군단(軍團)이고 사단(師團)이고 모두 흩어졌네. 하지만 패잔병이라 할지라도, 이곳은 우리가 지켜야 할 마지막 강(江)일세! 북한군이 한강을 건너는 것을 막아, 미군과 유엔군이 도착할 때까지 한 발자국도 물러설 수 없다! 우리는 지금 시간을 벌어야 한다!"
국군은 국지전과 무장공비 토벌 작전(빨치산 소탕) 등을 통해 이미 국지전술에는 숙련된 군대였고, 중장비를 잃었지만 분산된 병력들이 게릴라전을 벌이거나 복귀하면서 북한군의 남진 속도를 늦추는 지연 작전 (적과의 직접적인 전면전을 피하고 후퇴하면서 적에게 출혈을 강요하여 시간을 버는 전술)을 전개했다.
이러한 국군의 필사적인 항전과 더불어, 유엔(UN)의 개입이 확정되었다.
개전 당일(6월 25일), 유엔 안전보장이사회(안보리)는 북한의 침략을 규탄하는 결의안을 통과시켰고, 6월 27일에는 회원국들이 대한민국에 군사 지원을 제공할 것을 권고하는 결의안 제83호가 가결되었다.
이 결의가 소련 대표의 불참 속에 이뤄졌는데, 이는 스탈린이 의도적으로 안보리 회의를 보이콧한 것을 미국이 거부권(비토) 행사가 아닌 기권으로 해석하고 결의안을 통과시켰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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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년 6월 27일 열린 유엔 안보리 회의 |
트루먼(해리 S. 트루먼) (미국 대통령)은 맥아더(더글러스 맥아더)에게 해군과 공군의 지원을 즉각 개시할 것을 명령했으며, 7월 7일, 맥아더 장군을 총사령관으로 하는 유엔군(UN軍)이 조직되었다.
이로써 한국전쟁은 단순한 남북 내전의 수준을 넘어, 자유민주주의 대 공산주의의 이념 대결이 격돌하는 국제전(國際戰)으로 비화하기 시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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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탱크앞 피난민의 모습 |
절망의 7월, 그리고 운명을 건 반격의 칼날
미군 참전, 스미스 부대의 피 흘리는 신고식 (오산 전투)
미국은 이미 한반도를 '전략적으로 포기할' 계획을 세웠던 오판(誤判)을 저지른 바 있으며, 유럽 방면(마셜 플랜)에 지원 우선순위를 두고 있었기 때문에 한국군은 미국의 원조 우선순위에서 하위권이었다.
주한 미군은 약 500명의 군사고문단만 남기고 1949년 6월에 철수한 상태였다.
전황이 급박해지자, 맥아더는 일본 주둔 미 제24사단 예하의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Task Force Smith)를 한반도에 급파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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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미스 특수 임무부대 |
1950년 7월 5일, 스미스 특수임무부대는 오산(烏山) 남방에서 최초로 북한 공산군과 맞서 싸웠다.
미 군부는 한국의 지형이 산악지대와 논바닥으로 이루어져 2차 세계대전 유럽 전선과 같은 대규모 전차전은 절대로 일어날 수 없다고 단정하는 오판을 내렸다.
그러나 북한군은 소련이 제공한 T-34/85 전차를 앞세우고 있었다.
미군은 이 T-34에 대적할 만한 중화기(대전차포, 바주카포 등)를 제대로 갖추지 못한 상태였다.
스미스 부대는 북한군의 33대의 전차를 앞세운 대규모 부대에게 완전히 포위되었고, 막대한 전사자를 내며 무참히 패배하고 후퇴했다.
(1950년 7월 5일, 오산 남방, 미군 스미스 부대 진지) 스미스 대대장 (중령): (T-34 전차가 눈앞의 대전차포 방어선을 뚫고 진격하는 것을 보며) "젠장! 저 괴물들! 우리 37밀리 포로는 흠집도 안 나! 워싱턴의 바보들은 전차가 한국에서 쓸모없다고 했지! 이게 그 결과인가!"
이후 미군은 윌리엄 F. 딘(William F. Dean) 소장 (미 육군 제24사단장)이 이끄는 주력 24사단을 대전(大田)에 투입하며 금강 남안에 새로운 방어선을 구축했다.
딘 소장은 대전에서 북한군을 꺾고 한강까지 북상하겠다고 장담했지만, 미 24사단 역시 T-34에 맞설 화력이 부족했다.
대전 전투 (7월 17일~20일)
북한군 3개 사단의 집중 공격과 T-34 전차를 앞세운 공세에 미 24사단은 상당한 손실을 입고 7월 20일 패주했다.
딘 소장은 직접 수류탄을 들고 적 전차에 맞서 싸우는 용맹을 보였으나, 결국 후퇴 중 부상병에게 줄 물을 구하러 갔다가 낭떠러지에서 실족하여 길을 잃고 인민군에게 포로로 붙잡히는 비극을 겪었다.
대한민국 정부는 대전을 빼앗긴 후 임시 수도를 대구를 거쳐 부산(釜山)으로 다시 옮겨야 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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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50. 8. 6. 부산항 제1부두의 미군 병사들 |
전장의 어둠, 전쟁범죄와 이념의 학살
국군과 유엔군이 연이은 패배를 거듭하고 낙동강 방어선으로 밀리는 동안, 전선 후방에서는 이념의 이름으로 자행된 끔찍한 학살이 벌어졌다.
6.25 전쟁은 남북한 상호간의 적대감을 극대화시켜 분단을 고착화시키는 역할을 했고, 우익과 좌익 세력 모두 전쟁범죄를 저질렀다.
1. 보도연맹 학살 사건
북한군의 급속한 남진에 직면하여, 대한민국 국군, 경찰 및 서북청년단(극우 폭력단체)과 같은 우익 단체들은 보도연맹원 (좌익 전향자 또는 잠재적 공산 동조자로 분류된 민간인) 약 10만 명에서 30만 명에 이르는 대한민국 국민을 학살했다.
이 학살은 주로 경산 코발트광산 학살 사건, 대전형무소 학살 사건 등 형무소 재소자 학살, 부역 혐의 학살 등의 범주로 나뉜다.
일부 미국 문서에 의하면 미군정 장교의 참관과 최종 지시로 밝혀지기도 했다.
이 보도연맹 학살은 초기 정부와 군 당국이 공포와 이념적 광기 속에서 무고한 자국 민간인들을 대규모로 희생시킨 참혹한 전쟁범죄로, 민주화 이전까지는 철저히 금기시되었다.
유엔군(영국군 등)이 한국군 및 한국 경찰의 추가적인 학살을 저지하여 목숨을 건진 사례도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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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보도연맹 사건 |
2. 인민군의 학살
북한 인민군 역시 점령지에서 소위 인민재판이라는 이름으로 조직적인 전시 민간인 학살을 자행했다.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사건이나 함흥 학살 사건 등이 대표적이다.
이들은 공무원, 경찰, 우익 청년단체 지도자 등 반대파에 대한 숙청을 감행했다.
김대중 (후일 대통령)은 6.25 전쟁을 겪으며 공산당의 잔혹함(인민재판, 숙청, 농촌에서의 극심한 세금 징수)을 깨달았다고 주장하며, 북한의 숙청 정도가 남한보다 훨씬 심했다고 언급했다.
북한군은 북쪽으로 쫓겨 올라갈 때 대량 학살까지 저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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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민재판 |
3. 후방 기지 제주도의 변동
전쟁 기간 동안 제주도는 북한군이 진입하지 않은 도서 지역으로, 육군 훈련소, 공군 포로수용소 등 많은 군사시설이 설치되었고, 국군 및 유엔군의 후방 역할을 담당했다.
전황이 불리해지자 미국은 한때 한국 정부를 서사모아(사바이섬)로 이전하는 계획을 고려하기도 했으며, 제주도도 잠재적인 망명 정부 수립 후보지로 논의되었으나 면적이 좁고 식수 환경이 척박하다는 문제로 제외되었다.
이승만 대통령은 심지어 일본 야마구치현(山口県)에 망명 정부를 설치하는 방안을 문의하기도 했으며, 일본 정부는 이를 위해 소학교를 망명정부 시설로 확보하는 방안을 검토했다는 기록도 있다.
대규모 피난민이 제주도(원래 인구의 절반 이상)에 유입되자, 제주도민과 외지 피난민 사이에 사회적 갈등이 격화되었다.
특히 피난민 중 일부는 제주도민을 빨갱이로 보는 인식을 가지고 있었고, 이는 지방 정치를 장악하려는 시도로 나타나면서, 중앙 정부(이승만 정권)는 도지사, 법원장 등 핵심 관직에 육지 출신 외지인들을 임명하여 제주 출신 엘리트들이 몰락하는 결과를 초래했다.
이는 4.3 사건(제주 4.3 항쟁) 시기 외지인 군경 토벌대의 억압을 경험했던 제주도민들에게 피난민이 이질적이고 불안한 존재로 여겨지는 계기가 되었다.
낙동강 방어선의 피와 땀 (다부동 전투)
7월 말, 국군과 유엔군은 마산-왜관-영덕을 잇는 낙동강 방어선(Nakdong River Perimeter)을 구축하고 더 이상 물러설 곳이 없는 최후의 방어에 돌입했다.
북한군 제6사단과 제4사단은 당초 계획에 따라 목포(木浦)나 여수(麗水)를 점령하여 해상 보급로를 확보하려 했으나, 이미 미 해군과 유엔군이 제공권과 제해권을 완전히 장악하고 있었기 때문에 이는 불필요한 전략적 지연만 초래했다.
미 해군의 전투함정(아이오와급 전함 포함)은 북한 해안포 사정거리 밖에서 400만 발 이상의 포격을 퍼부어 북한군에 엄청난 피해를 입혔다.
가장 결정적인 요소는 미 공군의 활약이었다.
미 공군은 개전 3일 차부터 평양을 폭격했으며, 무엇보다 북한군의 주간 기동을 봉쇄하여 T-34 전차의 효용성을 크게 떨어뜨렸다.
(1950년 8월, 낙동강 전선, 국군 지휘관) 백선엽 (장군): "전차는 낮에는 호랑이지만 밤에는 고양이에 불과하다. 미 공군이 낮의 전차를 막아주니, 이제 우리가 밤의 고양이를 잡을 차례다! 대구를 사수하라!"
북한군은 8월부터 9월까지 낙동강 방어선 전역에서 대공세(大攻勢)를 펼쳤다.
특히 다부동 전투 (대구 북방, 8월 3일 ~ 9월 22일)는 국군과 미군이 대구를 사수하기 위해 사활을 건 격전지였으며, 영천·신녕 전투 (대구와 포항 포위 위협을 막기 위한 전투) 역시 방어선이 무너지면 대한민국이 끝장날 뻔했던 아킬레스건이었다.
국군과 유엔군은 이 모든 공세를 막아내는 데 성공하며, 전열을 재정비할 시간을 벌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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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다부동 전투의 주요 지휘관이었던 육군소장 백선엽 |
도박, 맥아더의 인천 상륙 작전
맥아더는 낙동강 전선에서 북한군과 정면 대결하는 대신, 적의 배후를 찌르는 과감한 기습 상륙 작전을 구상했다.
이것이 바로 인천 상륙 작전(Incheon Landing Operation, 작전명 크로마이트)이었다.
당시 미 합참(합동참모본부)과 해군은 이 작전에 뼈아픈 반대를 표명했다.
그 이유는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 (극단적 간만의 차, 좁은 수로, 방어에 유리한 지형 등)에 불과했기 때문이었다.
맥아더는 이러한 반대 의견에 굴하지 않았다.
그는 "우리에게 성공 확률이 5000분의 1이라면, 적의 생각도 그럴 터. 적이 방심한 채 물타 허리를 찌르도록 하자"는 역설적인 논리로 작전을 밀어붙였다.
그의 판단은 절체절명의 위기에서 대한민국을 구한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업적으로 평가된다.
인천 상륙 작전은 성공 확률이 희박한 도박이었지만, 맥아더는 작전에 앞서 북한군을 교란하기 위해 거짓 무전과 거짓 상륙 작전을 펼쳤다.
특히 장사동 상륙 작전 (장사 상륙 작전)에는 애국심만으로 자진 입대한 학도병(學徒兵)들이 투입되어 인천 상륙을 위한 교란과 희생을 감수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유엔군과 국군 해병대는 인천에 상륙하는 데 성공했다.
북한군은 맥아더의 작전이 성공할 것이라고는 상상조차 하지 못했기에 허를 찔렸다.
유엔군 특수임무부대인 켈로 부대는 팔미도(八尾島) 섬에 상륙하여 등대를 밝히는 데 성공하며 길을 열었다.
(1950년 9월 15일 새벽, 인천 앞바다, 맥아더 장군) 맥아더 (장군): (함교에서 인천 앞바다를 응시하며) "이제야말로 우리의 기회다. 역설은, 확신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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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인천에 상륙하는 유엔군 |
수도 수복과 압록강으로의 맹진
인천 상륙 이후 전세는 급격히 역전되었다.
유엔군은 신속하게 서울로 진격했다.
김일성(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주석)은 최용건(崔鏞健) (민족보위상)을 서울 방위사령관으로 임명하고 약 2만 명의 병력으로 시가전을 시도했지만, 9월 28일 국군 제17연대와 미 제7사단, 그리고 국군 해병대가 맹렬한 협공 끝에 서울 탈환을 이뤄냈다.
전쟁 발발 97일 만이었다.
중앙청 첨탑에는 다시 태극기가 게양되었다.
서울 탈환은 남한 지역 전투의 최종적인 결판이 되었으며, 38선 이남의 공산군은 퇴로마저 끊긴 채 완전히 마비 상태에 빠졌다.
남한 정부와 국민들은 곧 북진통일이 이루어질 것이라 믿었으며, 유엔군 역시 성탄절 이전까지 전쟁을 끝낼 수 있을 것이라 낙관했다.
맥아더의 북진과 중공군의 그림자
맥아더 유엔군 총사령관은 9월 30일 북한 공산군 총사령관 김일성에게 항복 권고문을 보냈으나 김일성은 이를 거부했다.
이에 유엔군 사령부는 38선을 돌파하여 북진할 것을 명령했고, 10월 1일 국군 제3사단이 동해안을 따라 38선을 전격 돌파했다.
김일성은 전황이 불리해지자 주북한 소련 대사 스티코프를 통해 스탈린에게 소련군의 출동이 절대 필요하다며 원조를 요청했으며, 불가능할 경우 중국과 기타 공산주의 국가들이 국제의용군을 조직해 출동하도록 원조해 달라고 부탁했다.
스탈린은 10월 12일 한때 김일성에게 북한 땅을 버리고 중국 만주 지역에 망명 정부를 세우라고 명령하며 북한 철수를 결심했었으나, 마오쩌둥이 중국의 개입을 선택하자 다음 날(10월 13일) 망명 목적을 취소했다.
마오쩌둥은 이미 김일성의 남침 계획에 동의하며 미군 개입 시 병력 지원을 약속한 바 있다.
중국은 미국에 대항해 북한을 지원한다는 뜻의 '항미원조 전쟁(抗美援朝 戰爭)'이라고 6.25 전쟁을 부른다.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어 만주 국경까지 진격하는 것에 대해 강력한 위협을 느꼈고, 미국의 아시아 정책에 대한 대응을 목표로 했다.
10월 19일, 유엔군이 평양(平壤)을 점령하면서 김일성 정권은 임시 수도를 강계군(江界郡) 주변의 개마고원 일대로 옮겨갔다.
바로 이 날, 비밀리에 중국 인민지원군은 압록강을 도강하여 한반도에 대거 침투하기 시작했다.
4개 군 약 5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이었다.
유엔군과 국군은 전혀 새로운 전쟁 국면을 마주하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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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인민지원군 참전 |
얼어붙은 압록강, 새로운 전쟁의 시작
1950년 9월 15일, 인천 상륙 작전의 성공과 9월 28일 서울 수복 전투는 대한민국을 붕괴 직전에서 구원했으며, 전세는 완전히 뒤집혔다.
패퇴하는 북한군(조선인민군)을 따라 국군과 유엔군은 38선을 돌파하고 북진을 개시했다.
이 시기 남한 정부와 국민들은 북진 통일이 눈앞에 왔다고 믿었고, 유엔군 내부에서는 성탄절(크리스마스) 이전 귀국에 대한 낙관론이 팽배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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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로로 잡힌 북한군 3명을 보호하는 미 해병대원들 |
오만과 낙관론, 압록강을 향해
유엔군의 진격은 맹렬했다.
국군 일부 부대는 압록강 변의 혜산진에 도달하기도 했다.
북한 정권에게 남은 영토는 신의주 주변의 일부와 두만강 유역의 격오지뿐이었고, 병력 또한 거의 섬멸 상태였다.
이 때의 분위기는 남북 통일이 곧 이루어질 것이라는 믿음을 낳아, 조국 통일 기념 우표가 발행될 정도였다.
그러나 이러한 낙관론은 최악의 전략적 오판을 낳았다.
맥아더는 유엔군에게 "국경선 부근에서 한국군 단독으로 작전해야 한다"는 유엔의 기존 제한사항마저 없애고, 모든 부대로 하여금 압록강까지 진군하도록 명령했다.
이는 중국의 잠재적인 개입 가능성을 심각하게 과소평가한 것이었다.
중국은 미군이 38선을 넘어 만주 국경까지 진격하는 것을 강력한 위협으로 인식했다.
중국은 10월 3일, 유엔군이 38선을 넘을 시점에 중국 의용군(인민지원군)을 투입할 생각을 잠시 보류하기도 했으나, 결국 마오쩌둥은 미국의 아시아 정책 대응과 동맹과의 의리, 그리고 국경 방어의 논리로 개입을 결정했다.
(1950년 10월, 유엔군 사령부) 맥아더(장군): "중국이라? 그들이 100만 군을 데리고 이 험준한 산맥을 넘어온다고? 하하! 허세에 불과하다! 이 전쟁은 추수감사절(Thanksgiving)을 넘기지 않을 것이며, 크리스마스(성탄절) 전에는 모든 장병들이 집으로 돌아갈 것이다! 북진! 전면적인 북진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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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UN군의 진격 |
용의 그림자, 중공군의 기습 침투
10월 19일, 유엔군이 평양을 점령하던 바로 그 날, 중국 인민지원군(CPV)은 4개 군 약 50만 명에 달하는 병력을 압록강을 비밀리에 도강시켜 한반도 고원지대로 대거 침투하기 시작했다.
중공군은 압도적인 인해 전술(人海戰術) (병력 숫자로 밀어붙이는 전술)이라는 전략을 가지고 있었지만, 초기 성공의 핵심은 완벽한 은폐에 있었다.
1. 미군 정보 실패: 맥아더는 중국의 참전 가능성을 무시했고, 미군 정보당국은 수십만 명의 병력이 국경을 넘는 사실을 제대로 파악하지 못했다 (정보 실패).
2. 은밀한 야간 기동: 중공군은 미 공군의 압도적인 제공권을 피하기 위해 낮에는 철저히 은폐하고, 오직 야간에만 행군하는 전술을 구사했다.
10월 25일부터 11월 5일까지 제1차 공세가 시작되면서, 북한 내륙 깊숙이 진격해 있던 국군과 유엔군은 순식간에 포위망에 갇혔다.
겨울의 참혹함, 장진호와 흥남 철수
11월 말, 맥아더가 계획한 "크리스마스 대공세"가 시작되었으나, 이는 중공군의 제2차 대공세의 덫이 되었다.
서부전선의 유엔군은 청천강 이남으로, 동부전선의 유엔군은 함흥(咸興) 방면으로 급히 후퇴해야 했다.
특히 장진호 전투 (Chosin Reservoir)는 한국전쟁 중 가장 참혹했던 전투 중 하나였다.
영하 30~40도를 오르내리는 혹한속에서, 미 해병대 1사단과 육군 페이스 특수임무부대 등 유엔군은 인해전술로 밀려오는 중공군 7개 사단에 포위되었다.
미군 부상병들은 들것으로 수송하는 것이 금지되었고, 걷지 못하면 길에 버려지거나 사살당하는 일이 있었다는 증언도 있다.
(1950년 12월, 장진호 부근) 미군 병사 (프랭크): "젠장, 발이 얼어붙었다! 중공군이 끝없이 몰려온다. 총알보다 이 얼음장 같은 추위가 우리를 먼저 죽일 것 같아! 보급품은? 탄약은? (전승) 맥아더 장군님, 저희가 크리스마스에 집에 간다면서요! 왜 여기에 두고 가십니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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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공군의 공세 |
흥남 철수 작전 (12월 14일~24일)
전세가 돌이킬 수 없이 악화되자, 유엔군과 국군은 해상으로 철수하는 흥남 철수 작전에 돌입했다.
이 작전은 군사적인 철수였을 뿐만 아니라, 북한 지역에서 공산 치하를 피해 도망쳐 온 약 10만 명의 피난민을 함께 철수시킨 인도주의적 기록으로 남아 있다.
현봉학(玄鳳學) (당시 미10군단 민사고문) 박사는 알몬드(에드워드 알몬드) 장군 (미 10군단장)을 끈질기게 설득하여, 군수 물자를 적재할 공간에 피난민들을 태우도록 했다.
철수 직전, 유엔군은 흥남 부두의 군수 물자, 유류 탱크 등을 북한군에게 넘겨주지 않기 위해 함포 사격으로 폭파시켰다.
(1950년 12월, 흥남 부두, 현봉학 박사가 알몬드 장군에게) 현봉학 (민사고문): "장군님! 이 사람들은 공산 정권을 피해서 자유를 찾아 온 우리 민족의 양심입니다. 군수 물자는 다시 가져올 수 있습니다. 하지만 이 사람들의 생명은 지금이 아니면 영영 구할 수 없습니다! 피난민을 태워주십시오!"
알몬드 장군: "닥터의 말은 알아들었다. 나는 피난민 문제와 관련한 닥터의 말에 전면적으로 찬성한다. 다만 적은 흥남 남쪽 원산으로 급진하고 있다. 지금 단계에서 무엇 하나 확약할 수는 없지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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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흥남 철수 당시 상륙함에 오르기 위해 늘어선 피난민들 |
1.4 후퇴와 리지웨이의 등장
유엔군의 대규모 후퇴 과정에서 월튼 워커 중장 (미 제8군 사령관)이 12월 23일 일선 시찰 중 자동차 사고로 사망하는 불운까지 겹쳤다.
후임으로는 매튜 B. 리지웨이 중장이 미 제8군 사령관에 취임했다.
중공군과 북한군은 12월 말까지 총 23만 명의 병력으로 38선에 집결한 후, 대규모 공세를 펼쳤고, 결국 1951년 1월 4일 서울이 다시 적의 수중에 넘어갔다.
이 때의 대규모 후퇴를 1.4 후퇴라고 부른다.
중공군의 대규모 개입으로 전선이 무너지자, 맥아더는 상황을 타개할 방법으로 극단적인 군사 작전을 구상했다.
그는 원자 폭탄(핵무기)을 투하하고, 장제스(蔣介石) (중화민국 지도자)와 함께 중국 해안에 상륙하는 작전을 구상했다.
그러나 트루먼(해리 S. 트루먼) 은 한국전쟁이 제3차 세계대전으로 확전되는 것을 극도로 우려했다.
맥아더는 트루먼 행정부의 '제한전(Limited War)' 정책 (전쟁 목표와 지역을 한반도로 국한하는 전략)에 정면으로 도전했다.
당시 스탈린 역시 2차 세계대전이 끝난 지 얼마 되지 않아 확전을 두려워했다는 사실이 공개된 서필을 통해 알려졌다.
즉, 양측 강대국 모두 확전의 두려움 속에 전쟁 억제력을 확보하고 있었다.
맥아더는 워싱턴의 정책에 반하는 발언을 계속했고, 결국 트루먼은 군부에 대한 문민 통제 (군사력을 정치권력이 통제하는 원칙)를 명분으로 맥아더를 해임했다.
맥아더는 전쟁 영웅으로 귀국했으나, 이후 미 의회 상원위원회 청문회 과정에서 그의 오판과 과도한 전쟁 확대 시도가 드러나면서 명예가 실추되었다.
(1951년 4월, 트루먼 대통령과 보좌관 회의) 트루먼 (대통령): "맥아더는 통제 불가능합니다! 우리는 소련과의 전면전을 원치 않습니다! 이 전쟁이 또 다른 세계 대전의 도화선이 되어서는 안 됩니다. 군부의 영웅이 국가의 외교 정책을 뒤흔드는 것을 더 이상 좌시할 수 없습니다. 당장 해임 명령을 내리시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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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더글라스 맥아더 |
전선의 재정비, 전선 교착의 시작
리지웨이 장군은 부임 직후 무너진 사단들을 재정비하며 "우리는 후퇴하지 않고 싸운다"는 강력한 의지를 표명했다.
중공군은 인해전술로 남하했으나, 보급선이 길어지고 동상(凍傷)에 시달렸으며, 유엔군의 집중적인 공격에 의해 10여 만 명의 전사자를 내고 진격이 부진했다.
유엔군은 1951년 1월 9일부터 오산(烏山)-장호원(長院)-제천(堤川)을 잇는 선에서 재반격을 개시했다.
이 재반격 작전은 선더볼트 작전 (Operation Thunderbolt)을 시작으로 킬러 작전 (Operation Killer), 리퍼 작전 (Operation Ripper) 등으로 이어졌다.
리지웨이의 지휘 아래 전열을 가다듬은 국군 제1사단은 1951년 3월 14일, 다시 서울에 진주하며 수도를 재탈환했다.
(1951년 3월, 서울 재진입 직후, 리지웨이 중장) 리지웨이 (장군): "우리는 후퇴하지 않는다. (전승) 북한군과 중공군은 보급과 추위에 지쳐있다. 이제부터 우리는 앞으로 나아가는 공격적인 방어를 펼친다. 우리는 낮과 밤을 가리지 않는 사냥개가 될 것이다!"
국군과 유엔군은 3월 24일 다시 38선을 월경하여 북진을 개시했다.
유엔군은 38선 부근에서 방어선을 구축하며 일진일퇴(一進一退)를 거듭했고, 이 전선이 현재의 휴전선(軍事分界線)의 기틀이 되었다.
이로써 전쟁은 격렬한 고지전(高地戰)이 특징인 전선 교착 국면으로 접어들게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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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강릉고지 탈환 후 태극기를 들고 환호하는 모습 |
당시 사회적 배경 및 논란
1. 숨겨진 참전국
일본인 군무원 논란: 6.25 전쟁 기간 동안 일본은 주일미군 기지로서 중요한 역할을 담당했다.
NHK의 다큐멘터리 및 최근 공개된 문서에 따르면, 70여 명의 일본 민간인 남성이 미군과 동행하여 통역, 취사, 수리, 의무, 운전 등의 군무원 신분으로 비밀리에 한국전에 참전했다.
이들 중 18명은 한반도 최전선에서 전투에 참여하기도 했으며, 대전 전투와 다부동 전투와 같은 주요 전투에서도 전사자가 발생했다.
이들의 존재와 활동은 미군 당국에 의해 일급 비밀(TOP SECRET)로 분류되어 엄중히 은폐되었다.
2. 공산군 전쟁범죄의 잔혹성
중공군은 포로가 된 유엔군 장병들(터키군, 미군 등)에게 열악한 배급을 제공하거나 아예 주지 않았으며, 위생 관리가 부재하여 많은 포로가 이질, 폐렴 등으로 사망했다.
부상당한 포로들은 들것 수송이 금지되어 걷지 못하면 길에 버려지거나 총살당했고, 심지어 채찍 등으로 구타하거나, 몸에 기름을 부어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등 각종 전쟁범죄를 저질렀다는 증언이 남아있다. (전승)
포로수용소들 중 한 곳은 '동굴'이라는 이름으로 불릴 만큼 환경이 열악했다.
3. 제주도의 후방 기지화
북한군이 진입하지 않은 제주도는 6.25 전쟁 기간 동안 육군 훈련소 (신병연대, 교도연대, 하사관 학교 등)와 공군 포로수용소 등 많은 군사 시설이 설치되어 국군과 유엔군의 후방 기지 역할을 수행했다.
제주도민들은 4.3 사건(제주 4.3 항쟁)의 '빨갱이 멍에'를 벗고 대한민국 국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군 입대와 학도병 지원 등의 노력을 해야만 했다.
교착의 늪, 피의 고지전과 포로들의 절규
1951년 3월, 유엔군과 국군이 서울을 재탈환(3월 14일)하고 38선(남북 분계선) 부근에 전선을 재구축하면서, 전쟁은 새로운 국면에 접어들었다.
리지웨이 장군 (미 제8군 사령관)의 지휘 아래 반격 작전(선더볼트 작전, 킬러 작전, 리퍼 작전 등)을 통해 중공군과 북한군의 공세는 저지되었고, 전선은 38선 근방에서 교착 상태(Stalemate)에 빠졌다.
군사적 승리로 통일 목표를 달성하기 어렵다고 판단한 강대국들, 특히 트루먼 행정부와 스탈린은 확전을 두려워했기에, 전쟁을 정치적 타협으로 마무리하기로 결정했다.
판문점의 밀실, 2년의 장기 교착
1951년 7월 10일, 판문점(板門店)에서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 사이에 휴전 회담이 시작되었다.
유엔군 측 수석대표는 윌리엄 해리슨(William K. Harrison) 중장, 공산군 측 대표는 남일(南日) (조선인민군 대장)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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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휴전회담을 위해 처음 만난 유엔군과 공산군 |
최소 6주 정도면 타결될 것으로 기대되었던 회담은 의제 선택, 군사분계선의 설정 문제, 정전감시 기구 구성 문제, 그리고 전쟁포로 처리에 관한 문제 등 매 의제마다 난항을 거듭하며 무려 2년 이상 장기 교착되었다.
특히 가장 큰 대립은 전쟁포로 처리 문제였다.
유엔군 측은 포로 개인의 의사를 존중하는 '자유 송환(Voluntary Repatriation)'을 주장했다.
반면 공산군 측은 제네바 협정 조항을 근거로 포로의 본국으로 '자동 송환(Automatic Repatriation)'되어야 한다고 대립했다.
포로 문제의 이유
이 문제가 심각했던 이유는 유엔군이 억류한 북한군 및 중국군 포로들 중 본국 송환을 원하지 않는 포로가 다수 있었기 때문이다.
1. 남한 출신 '의용군': 북한군 남하 시 강제 징집된 남한 출신 '의용군' 포로들이 강제 노역과 학살 등을 피해 한국으로 되돌아가기를 원했다.
2. 국민당군 출신 중국군: 중국군 포로들 중에는 국공내전에서 패배한 후 강제 편입된 국민당군 출신 포로들이 많았다.
3. 공산주의 회의: 이들 포로는 공산 지배하에서 살면서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느끼고 스스로 자유의 중요성을 인식했으며, 유엔군 측이 운영한 체계적인 포로 교육 프로그램을 통해 자유의 중요성을 자각했다.
공산군 측은 송환을 거부하는 포로들을 유엔군 측의 심리전의 결과라고 비난하며, 포로수용소 내에서 폭동을 일으키고 반공 포로를 살해하기도 했다.
(1952년, 판문점 회담장) 남일 (공산군 대표): "제네바 협정은 명백하다! 모든 포로는 자동적으로 송환되어야 한다! 너희 미제는 포로들에게 반동적 교육을 주어 세뇌(洗腦)하는 심리전을 중단하라!"
해리슨 (유엔군 대표): "우리는 인간의 존엄성을 존중한다! 그들이 돌아가기를 원치 않는다면, 그것은 자유세계의 가치에 따른 그들 스스로의 선택이다! 강제 송환은 있을 수 없다!"
피의 능선과 단장의 능선
휴전 회담이 장기화되는 2년여의 기간 동안, 38선 부근의 전선에서는 군사분계선 설정 문제와 무관하게 고지(高地)를 뺏고 빼앗기는 치열한 전투가 계속되었다.
이는 전선 조정이 휴전선 확정의 중요한 변수가 될 것이라는 정치적 판단 때문이었다.
피의 능선 전투 (The Bloody Ridge, 펀치볼 전투의 일부)와 단장의 능선 전투 (The Heartbreak Ridge)는 이 기간을 대표하는 격전이었다.
• 피의 능선 (1951년 8~9월): 강원도 양구군 펀치볼(Punchbowl) 동쪽의 고지대를 차지하기 위해 국군과 미군, 북한군 사이에 벌어진 전투였다.
북한군이 흙과 시체를 쌓아 방어선을 강화하여 '피의 능선'이라는 이름이 붙었으며, 미군의 폭격과 포격으로 인해 희생된 북한군 시신이 능선 전체를 붉게 물들였다는 참혹한 기록이 전해진다.
• 단장의 능선 (1951년 9~10월): 피의 능선 바로 북쪽에서 벌어졌으며, 양측은 불과 1,000미터 떨어진 고지를 두고 격전을 치르며 수천 명의 사상자를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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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8월의 피의 능선 |
이외에도 백마고지 전투 (White Horse Hill, 1952년 10월, 국군 제9사단과 중공군), 철원-김화 평강을 잇는 철의 삼각지대에서의 전투, 그리고 저격능선, 폭찹힐(Pork Chop Hill) 전투 등이 끊임없이 이어지며 수많은 양측 군인들이 목숨을 잃었다.
휴전 회담이 진행되는 동안, 이 고지전들은 전략적 가치는 미미했지만, 포로 협상이라는 정치적 의제의 협상력을 높이거나 혹은 상대의 마지막 항복 의지를 꺾기 위한 소모전(消耗戰)의 성격을 띠었다.
이는 정치적 타협을 위해 젊은 병사들의 생명을 대가로 지불했다는 점에서 가장 비극적인 전쟁의 모순을 보여준다.
(1952년 가을, 고지 참호 속, 국군 병사) 최 상병: "이 능선을 열 번이나 뺏고 뺏겼다지 않습니까? 장전호(참호) 안이 온통 피와 흙으로 범벅인데, 이 전투가 대체 무슨 의미가 있습니까? 위에선 평화 회담을 한다면서, 왜 우린 여기서 계속 죽어나가야 합니까!"
박 병장: "몰라. 그냥 명령이니까. 저들이 포로 가지고 장난치는 동안, 우리는 여기서 피를 흘려서 '우리의 의지'를 보여줘야 한다지 않나. 우리가 밀리면, 회담이고 뭐고 다 끝장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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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전개도 (국방부 군사편찬연구소, 2013) |
이승만의 배수진, 반공 포로 석방
휴전 회담 막바지인 1953년, 협정 체결을 앞두고 이승만(李承晩) 대통령은 격렬하게 반대했다.
그는 전쟁을 통해 북진 통일을 이루고자 했으므로, 분단 상태를 고착화하는 정전(停戰)은 명분이 없다고 보았다.
이승만은 휴전회담에 참석하거나 서명하기를 거부했고, 대신 미국을 압박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을 체결하고 국군 육군 20여 개 사단 증편 및 그에 상응하는 해군과 공군의 증편에 대한 승인을 얻어내려 했다.
1953년 6월 18일, 이승만 대통령은 유엔군 측과의 상의 없이 일방적으로 약 2만 7천 명의 반공 포로(反共捕虜)를 전국 수용소에서 석방(釋放)시키는 극단적인 조치를 감행했다.
포로 석방의 이유
이승만은 송환 거부 포로들의 의사를 존중한다는 인도주의적 명분과 함께, 휴전 협정을 방해하여 전쟁을 지속시키고 미국과의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관철시키려는 정치적 목적을 동시에 달성하려 했다.
이 석방은 단순한 '석방'이 아니라 한국군 및 한국 경찰 당국과 반공 포로들이 사전에 계획하여 일시에 수용소에서 탈출하고, 이를 군과 경찰, 민간인들이 적극적으로 도와준 '대탈주(大脫走)'에 가까웠다.
이 일방적인 포로 석방은 국제법 위반이었으며, 유엔군 측과 공산군 측의 휴전 협정을 심각한 위기에 빠뜨리는 결과를 낳았다.
유엔군이 탈출을 진압하기 위해 사격을 가하면서 사망한 포로들도 발생했고, 유엔군과 한국군/경찰 사이에 충돌이 벌어지기도 했다.
결국 미국은 이승만의 요구를 수용하여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약속함으로써 이승만의 휴전 반대 입장을 무마시켰고, 송환을 거부했던 남한 출신 민간인 억류자 약 4만 명 외에 4만 7천 명의 포로들은 자유를 되찾아 한국과 대만(대만 정부)에 잔류하게 되었다. (논쟁)
(1953년 6월 18일, 경기도 모처, 이승만 대통령 담화) 이승만 (대통령): "우리는 통일 없이 전쟁을 멈출 수 없다! 자유를 찾아 월남한 포로들을 공산의 지옥으로 돌려보낼 수는 없다! 그들의 자유 의사는 곧 대한민국의 의지다! (전승) 오늘부터 그들은 대한민국의 국민으로서 자유를 누릴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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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석방된 반공포로들이 이승만 대통령 사진을 들고 나오고 있는 모습. |
종결의 문턱, 최후의 희생
휴전 협정이 최종 조인되기 직전인 1953년 7월, 공산군 측은 조금이라도 더 유리한 고지를 점령하기 위해 금성 전투 등 대규모 공세를 펼쳤다.
전쟁 기간이 길어지면서 유엔군은 터키(튀르키예), 영국, 캐나다, 프랑스, 그리스, 벨기에 등 16개 전투 부대 파병국과 인도, 스웨덴, 노르웨이, 덴마크, 이탈리아 등 의료 및 기타 지원국 등 총 21개국이 참전했으며, 이들은 마지막 순간까지 싸웠다.
특히 터키군은 1만 4,936명을 파병하여 724명이 전사하는 등 큰 희생을 감수했다.
전쟁범죄의 지속
휴전이 임박했음에도 민간인 학살은 멈추지 않았다.
대한민국 국군과 경찰에 의한 거창 양민 학살사건, 산청·함양 양민 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방위군 장병들을 굶겨 죽이거나 착복한 사건) 등 국가 권력에 의한 자국민 학살과 비리가 끊임없이 발생했다.
특히 전라도 지역에서는 1950년 10월 이후에도 퇴각하지 못한 인민군 유격대(빨치산)를 진압하기 위한 군경의 토벌 작전이 민간인을 대상으로 자행되어 많은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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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거창 양민학살 사건 |
(1953년 7월 27일, 최전선 참호) 미군 장교 (존): "멈춰! 모두 멈춰! 명령이다! 지금부터 정전 협정(Armistice Agreement)이 발효된다! 이제 끝났어! 10시 정각부터 모든 사격은 금지된다!"
밤 10시 정각이 되자, 3년간 끊임없이 울리던 총성과 포탄 소리가 일순간 멈추고 정적(靜寂)이 찾아왔다. 참전 용사들은 이 정적감을 잊을 수 없다고 회고했다.
1953년 7월 27일.
유엔군 총사령관 마크 클라크(Mark W. Clark) (미 육군대장), 조선인민군 최고사령관 김일성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원수), 중국인민지원군 사령관 펑더화이(彭德懷) (중국 원수)는 군사정전협정에 서명함으로써 전쟁은 정전(停戰)이라는 이름으로 봉합되었다.
이 협정은 38선 부근에 군사분계선(軍事分界線)과 비무장지대(非武裝地帶, DMZ)를 설정하고, 한국으로부터의 모든 외국 군대 철수 및 평화적 해결 문제를 3개월 이내 정치회의에서 협의할 것을 건의하는 조항을 담고 있었다.
(논쟁)한국전쟁은 남북한 당사국 모두 '승리'를 주장했지만, 현대의 일반적인 평가 (정전 시점에 근거)는 '승자도 패자도 없는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개념에 기초해 무승부(Draw)로 보는 것이 정설이었다.
그러나 전쟁을 도발한 북한의 목표(남한 공산 통일) 달성 여부와 전후 남한의 발전 및 자유민주주의 수호를 고려하면,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전쟁'으로 재평가되어야 한다는 주장도 존재한다.
불안한 정적과 분단의 유산
풀리지 않은 숙제, 포로 송환과 전쟁의 상처
정전협정의 가장 큰 쟁점이었던 포로 송환 문제는 자유 송환 원칙에 따라 처리되었다.
• 배경: 유엔군 포로들 중에는 북한군에게 강제 징집된 남한 출신 '의용군' 포로와 국공내전에서 패배 후 강제 편입된 국민당군 출신 중국군 포로들이 많았으며, 이들은 공산주의의 문제점을 인식하고 송환을 거부했다.
• 결과: 이승만 대통령의 반공 포로 일방 석방 조치와 협상 끝에, 약 4만 7천 명의 포로(남한 출신 민간인 억류자 약 4만 명 외)들이 한국과 대만(대만 정부)에 잔류하며 자유를 되찾았다.
이승만의 일방적 포로 석방은 국제법 위반이었으며, 유엔군과의 심각한 충돌(포로 석방 진압 중 사망자 발생, 유엔군과 한국군/경찰 간의 충돌)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이는 자유 의지를 존중한다는 인도주의적 명분과 더불어, 한미상호방위조약 체결을 관철하는 정치적 도박이었다.
전쟁범죄와 후대의 책임
전쟁 기간 동안 남북한 양측에서 자행된 민간인 학살은 전쟁의 가장 어두운 유산이었다.
• 한국군/경찰 측: 보도연맹 학살 사건 (10만~30만 명 학살 추정), 거창 양민 학살사건, 산청·함양 양민 학살 사건, 국민방위군 사건. 특히 제주도에서는 전쟁이 일어나자마자 경찰이 예비검속을 시행하여 4.3 사건 관련자들을 집단 총살하거나 수장했다.
• 공산군 측: 인민재판 등의 조직적 학살, 서울대학교 부속병원 학살 사건, 함흥 학살 사건, 영광군 기독교인 학살 사건 (124명 살해). 특히 전라도에서는 인민군 퇴각기 이후에도 빨치산과 지방 좌익 세력에 의한 학살이 가장 많이 발생했다.
이러한 국가 권력에 의한 자국민 학살과 비리는 독재 정권의 기반 강화에 이용되었으며, 전쟁의 참혹함이 끝나지 않았던 당시 상황에서 영국군이 한국군 및 한국 경찰의 추가적인 학살을 저지하여 목숨을 건진 사례가 있을 정도로, 전쟁 기간 중 인권 유린은 극에 달했다.
전후 사회의 급격한 변동
한국전쟁은 남북한 모두에게 엄청난 인명 피해(수백만 사상자)와 산업 시설 파괴를 가져왔다.
이 전쟁은 한국 사회의 지형을 크게 바꾸어 놓았다.
1. 구 질서의 해체: 전쟁으로 인해 양반(兩班) 제도에 의한 뿌리 깊은 신분 질서가 붕괴되었고, 전쟁의 참화 속에서 기존에 살아왔던 삶의 터전을 버리고 새로운 지역에 정착하는 인구가 늘면서 도시화가 가속화되고, 향약(鄕約)과 같은 기존의 공동체 질서가 해체되는 계기가 되었다.
2. 원조와 '빨리빨리 문화'의 기원: 대다수 국민이 미국 등 자유 진영의 원조 물자에 의존해 생활해야 했으며, 이러한 전후 복구와 재건 과정에서 형성된 '빨리빨리 문화'는 이후 한국 사회의 특징적인 행동 양식으로 자리 잡기 시작했다.
3. 제주도의 정치적 변화: 북한군이 진입하지 않은 제주도는 육군 훈련소, 포로수용소 등 후방 기지 역할을 담당했으며, 4.3 사건 이후 '빨갱이 멍에'를 벗고 국민으로 인정받기 위해 군 입대와 학도병 지원에 나섰다. 그러나 전쟁 기간 중 중앙 권력(이승만 정권)이 육지 출신 외지인을 도지사, 법원장 등 핵심 관직에 임명하면서 제주 출신 지역 엘리트들이 몰락하는 결과를 낳았다. 이는 중앙 권력이라는 외부 규정력이 지방 사회의 변화를 주도했음을 보여준다.
4. 문화적 영향: 기독교는 전쟁 중 형성되었던 거부감을 극복하고 급속하게 성장할 수 있었는데, 이는 전쟁에 의한 문화 및 의식 구조가 격하게 바뀌었기 때문이었다.
끝나지 않은 전쟁, 정전 체제의 현재
군사정전협정은 전쟁을 완전히 끝낸 종전(終戰)이 아니라, 적대 행위를 일시적으로 멈춘 것에 불과했다.
이 불안한 정전 체제는 70년이 넘도록 평화협정으로 전환되지 못했다.
(현재의 논란) 대한민국 대법원 판례는 현재가 '전시'인지 '평시'인지 명확하게 입장을 내린 적이 없으며, 사안에 따라 다르게 해석하고 있다.
국회 또한 전쟁 수행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과 남북 관계의 협력을 목적으로 하는 법률이 동시에 존재하고 있다.
이는 한반도가 정전 체제가 제대로 작동하지 않는 불안한 상황에 놓여 있음을 보여준다.
휴전협정 이후에도 크고 작은 국지 도발 및 무력 충돌이 여러 번 발생했다.
• 1968년 1.21 사태 (김신조 청와대 침투 시도).
• 서해 북방한계선(NLL) 부근에서 제1, 2연평해전 (1999년, 2002년) 및 대청해전 (2009년) 등의 해상 무력 충돌.
• 2010년 천안함 피격 사건과 연평도 포격.
• 북한은 2013년에 한미 합동 군사 훈련에 반발하여 휴전협정의 백지화를 선언하기도 했다.
한반도의 평화는 1953년 정전협정 덕분만은 아니었으며, 그보다 10월에 조인된 한미상호방위조약과 그에 따라 구축된 한미 연합전력이 억지 효과를 발휘한 덕분이 더 컸다는 평가가 있다.
전쟁의 최종 평가
1. 무승부론: 한국전쟁은 전통적으로 '승자도 패자도 없는 참혹한 동족상잔의 전쟁'이라는 개념에 기초하여 '무승부(Draw)'로 평가하는 것이 학계의 정설로 교육되고 있다.
2. 승리론: 그러나 2010년 대한민국 국방백서 등에서는 6.25 전쟁을 '자유민주주의가 승리한 전쟁'으로 재규정했다.
(근거)전쟁 도발자인 북한의 목표(남한 공산 통일)가 달성되지 못했고, 전쟁 이후 남한은 세계 10위권의 경제 대국으로 성장한 반면, 북한은 세습 독재 체제를 구축하여 주민들의 식량 문제조차 해결하지 못하는 국가로 전락했기 때문이다.
한국전쟁의 명분, 즉 "미제의 식민지 상태에 있는 남조선의 해방"이라는 북한의 주장은 남한 주민은 물론 북한 주민에게조차 설득력을 갖지 못했다.
전쟁은 남한 지도부의 강렬한 항전 의지와 남한 주민 다수의 북한 체제 비동조로 인해 북한의 의도와 다르게 종결되었다.
역사적 교훈, 가르침
한국전쟁은 지도자의 오만과 오판이 초래한 비극이었다.
또한 이 전쟁은 정치적 이념의 광기가 국가 권력과 결합하여 수많은 자국 민간인 학살을 야기했으며, 이는 독재 정권의 기반을 강화하는 데 악용되었다는 뼈아픈 과실을 남겼다.
그러나 이 전쟁은 인간의 자유 의지와 존엄성이 어떠한 이념이나 강제력에 의해서도 훼손될 수 없다는 교훈을 남겼으며, 흥남 철수 작전처럼 극한 상황 속에서도 인도주의적 가치를 실현하려는 노력이 있었음을 보여주었다.
현재까지도 한반도는 정전 체제라는 불안정한 상황에 놓여 있으며, 언제라도 위기가 조성될 수 있는 상황임을 명심해야 한다.
역사는 우리에게 평화는 전쟁을 막는 가장 중요한 수단이며, 어떠한 경우에도 전쟁을 피해야 한다는, 그리고 국가 안보는 최악의 상황을 가정하고 준비해야 한다는 엄중한 가르침을 준다.
6.25 전쟁의 상처와 교훈은 후세에게 제대로 알려져야 한다.
정전 체제가 불안정하게 작동하는 상황은, 겉으로만 조용할 뿐 속으로는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아서, 지도자들의 현명한 대처와 상호 소통을 통해 항구적인 평화 체제를 구축하는 것이 우리 민족의 궁극적인 과제임을 보여준다.
이 글은 한국전쟁(1950–1953)의 실제 사료, 군사기록, 회고록, 외교문서 등을 바탕으로 하되, 전장 장면과 인물의 심리를 생생히 전달하기 위해 서사적 묘사를 덧입힌 재구성입니다.
서술된 대화와 장면은 사실적 맥락에 기초한 각색이며, 모든 인명·지명·연표는 검증 가능한 사료에 따라 복원했습니다.
일부 사건은 (논쟁) 또는 (전승) 표기를 통해 상이한 해석 가능성을 명시했습니다.
이 글은 정치적 선전이 아니라, ‘한반도의 전쟁이 남긴 인간적 상처와 교훈’을 되새기기 위한 역사적 서사입니다.
The Korean War begins in June 1950 when North Korea, backed by Stalin and Mao, invades across the 38th parallel and shatters an unprepared South.
Seoul falls, civilians die on the Han River Bridge, and UN forces are driven back to the Nakdong perimeter.
MacArthur’s bold Incheon landing reverses the tide, liberates Seoul, and pushes north toward the Yalu, but massive Chinese intervention turns victory into disaster.
After brutal winters, hill battles, massacres and refugee columns, Ridgway’s counterattacks restore a line near the 38th.
In July 1953 an armistice freezes the war without peace, leaving a divided peninsula, deep scars, and a wounded but rapidly changing South facing a closed, militarized North and an uneasy, unfinished peac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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