동백꽃으로 남은 기억: 제주 4·3 희생자, 북촌리 주민, 문형순 서장 이야기로 본 화해와 용서 (Jeju April 3rd Incident)


 동백꽃 지다, 피의 바람 불다.


극심한 혼란

1947년, 제주 (濟州). 

해방 정국, 남한은 미군정(美軍政)의 통치 아래 있었다. 

제주도는 한반도 본토(本土)와는 달리 해방 직후부터 조선인민공화국(朝鮮人民共和國)과 연계된 인민위원회(人民委員會)를 중심으로 비교적 온건하고 자율적인 공동체 질서를 구축하고 있었다. 

이는 제주도민들이 일제하 민족해방운동가들을 중심으로 한 인민위원회의 정통성을 강력하게 인정했기 때문이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은 극심한 혼란과 빈곤이었다. 

일제강점기 동안 이미 제주 인구의 25%에 달하는 주민들이 경제적인 이유로 일본 오사카(大阪) 등으로 도항(渡航)했었고, 해방 후 귀국자들이 대량으로 유입되면서 식량 문제가 심각했다. 

미군정(美軍政)은 여기에 더해 쌀을 강제 공출(供出)하는 정책을 폈고, 이는 주민들의 불만을 고조시켰다. 

또한 제주도를 전라도에 귀속시키려는 행정 개편안은 제주도의 독자적인 정체성을 중시하는 도민들에게는 거대한 외압으로 느껴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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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노의 횃불

1947년 3월 1일. 

제주읍 관덕정 광장 (觀德亭 廣場).

3.1절 기념 집회는 평화로운 분위기 속에서 시작되었으나, 미군정(美軍政)과 경찰의 행태에 대한 분노가 들끓었다. 

이날, 기마경찰(騎馬警察)이 어린아이를 치는 사건이 발생했고, 이에 격앙된 군중들이 경찰에게 야유를 퍼붓자 경찰은 시위대를 향해 무차별 발포했다. 

6명의 도민이 사망했다.


미군정 기마 경관

고태호(가상인물)는 군중 속에 서 있다가 경찰의 총격에 쓰러지는 이들을 보며 몸을 떨었다.

고태호: "이것이 해방된 조국이란 말인가! 일제 경찰이 했던 짓을 그대로 하고 있어! 피는 끓고, 머리는 차가워야 하는데, 눈앞의 시신들을 보니... 이성을 잃을 것 같소!"


이 사건으로 격앙된 민심은 남로당(南勞黨, 남조선로동당: 좌익 사회주의 정당)에게는 절호의 기회로 작용했다. 

남로당은 친일 경찰의 만행을 규탄하는 운동을 주도했고, 대다수 도민이 여기에 호응했다.


3월 10일, 민관합동총파업 (民官合同總罷業)이 시작되다.

파업은 제주도 전체 직장의 95%가 동참할 정도로 대대적이었다. 

관공서, 학교, 은행, 심지어 미군정청 통역단까지 41,211명에 달하는 사람들이 동참했다. 

그들은 3.1 발포 사건에 대한 사과, 책임자 처벌, 희생자 유가족 지원을 요구했다.


(가상인물)강영옥: "우리 동생들의 선생님도, 면사무소 공무원도 다 나왔수다. 이건 이념 문제가 아녀. 사람이 사람답게 살자는 외침이우다."


하지만 미군정(美軍政)과 중앙정부의 대응은 강경했다. 

그들은 제주도민 대부분을 좌파 동조자(인구의 70%가 좌파 관련)로 몰아갔다. 

이들은 사태를 수습하기보다 좌파 탄압이라는 이념 아래 폭력의 소용돌이를 키웠다. 

파업에 참여한 제주 출신 경찰 66명이 해임되었고, 그 자리는 육지에서 파견된 응원 경찰과 서북청년회(서청) 소속 인물들로 채워졌다.


국회 의사당 앞에서 소련군 철수 집회를 벌이는 서북청년회원들

서북청년회는 북한 지역에서 월남한 지주 계층 출신 등으로 조직되어, 공산주의에 대한 극심한 증오와 복수심을 가진 단체였다. 

(가상인물)이철수 역시 서청 단원으로서 제주에 발을 디뎠다.


이철수: "이 섬은 빨갱이(공산주의자)들의 소굴이다. 전부 다 싹을 잘라내야지. 내 고향에서 공산당 놈들에게 당한 수모, 여기서 갚아주겠다!"


1947년 3월 말부터 총파업은 가라앉았으나, 육지 경찰과 서청을 중심으로 한 탄압과 검거 선풍은 계속되었다. 

1948년 4월 3일까지 2,500여 명이 감옥에 갇혔고, 그들은 좁은 감옥에서 모진 고문을 당했다.


봉기와 평화의 덧없는 꿈

1948년 4월 3일, 무장봉기 발발.

탄압에 위기감을 느낀 남로당 제주도당(南勞黨 濟州島黨)은 남한만의 단독 선거(5.10 총선거)를 반대하고 통일 정부 수립을 주장하며 무장 봉기를 일으켰다. 

제주도당 무장 세력은 약 350~500명 선을 넘지 않는 소수였으나, 경찰 지서(경찰서의 하부 조직) 12곳을 습격했다.


무장대가 뿌린 호소문에는 "매국 단선단정(單選單政)을 결사적으로 반대하고 조국의 통일독립과 완전한 민족해방을 위하여" 무기를 들었다고 주장했다. 

제주도민들은 단독 선거 반대(통일 정부 수립 운동 관점)라는 명분 때문에 무장대에 일정 부분 동정적이기도 했으나, 점차 무장대의 폭력과 약탈 행위로 인해 거리를 두기 시작했다.


4월 28일, 평화 협상의 시도.

무장대와 군경 간의 충돌이 격화되자, 미군정(美軍政)의 요청으로 국방경비대 제9연대장(第9聯隊長) 김익렬 중령 (당시 중령: 강경 진압에 회의적이었던 군 지휘관)이 무장대 총책 김달삼 (南勞黨 무장봉기 주도자)과 회담을 추진했다.


김익렬은 동족상잔을 확대시키지 않기 위해 형제와 굳은 악수를 하고자 한다며 무장대에게 협상을 제안하는 전단지를 뿌렸다.


김익렬

제주 구억리 (九億里) 회담 현장.

김익렬: "총책! 우리는 동족입니다. 서로에게 총부리를 겨누는 이 비극을 멈춰야 합니다. 72시간 안에 전투를 중단하고, 점진적으로 무장 해제하고 귀순하면, 신변을 보장하겠습니다."

김달삼: "우리가 원하는 것은 남한만의 단독 정부 수립 반대, 그리고 우리 인민들에 대한 더 이상의 탄압 중단이오. 이 약속을 미군정(美軍政)과 조선(朝鮮) 정부가 지킨다면, 우리는 내려갈 것이오."


협상은 72시간 내 전투 중단, 점진적 무장 해제 및 귀순자 신변 보장이라는 내용으로 합의에 이르렀다.

이 협상이 지켜졌더라면 더 이상의 대규모 유혈 사태는 막을 수 있었을 것이다.


5월 1일, 오라리 방화 사건 (吾羅里放火事件) 발생: 평화의 파국.

협상 시한이 끝나기 직전, 제주읍 오라리(吾羅里) 전략촌에 정체불명의 무장 세력이 습격하여 민가 10여 채에 방화하는 사건이 발생했다. 

경찰은 이를 '공비들의 보복'이라 주장했으나, 진상을 조사한 김익렬(金益烈) 연대장은 경찰 측의 훼방 놓기(협상 주도권을 경비대에 빼앗긴 경찰의 반발)로 보고 미군정(美軍政)에 보고했다. 

체포된 포로는 자신이 경찰서장 명령으로 행동했다고 자백하기도 했다.

오라리 방화 사건은 당시에도 ‘무장대 소행’과 ‘경찰 측 자작극’이 맞부딪힌 사건으로, 지금까지도 가해 주체에 대해서는 논쟁이 남아 있다.


김익렬의 수기 (手記)에서 발췌한 장면

김익렬(金益烈)은 오라리(吾羅里)의 참상을 보고 미군정장관 딘(Dean)에게 보고했다.

김익렬: "이것은 무장대(武裝隊)의 소행이 아닙니다. 경찰 측의 모략이며, 평화 협정을 깨려는 의도입니다. 제발 이 진상을 보십시오!"


하지만 조병옥(趙炳玉, 당시 경무부장)은 이철수(李哲洙)를 비롯한 강경파의 주장을 등에 업고 김익렬을 향해 "이 증거들은 조작된 것이고, 김익렬 연대장은 공산당과 관련이 있는 자"라고 모함했다.


조병옥: "소위 연대장이라는 자가 적(賊)의 편을 들고 있으니, 이 섬의 치안이 무너지는 것이오! 강경 진압만이 답입니다!" (당시 경찰 지휘부는 제주도민 90%가 좌파 색채를 가졌다는 매카시즘적 인식을 가짐)


대한민국 제5대 내무부장관 조병옥

분노한 김익렬이 조병옥에게 달려들며 회의는 파국으로 치달았고, 결국 김익렬은 연대장 자리에서 해임되었다. 

그의 후임으로는 강경 진압을 천명한 박진경(朴珍景) 대령이 부임했다. 

평화 협상은 완전히 깨졌고, 제주도는 다시 폭력의 한가운데로 들어갔다.


5.10 단독 선거 거부의 상징성.

무장대(武裝隊)의 선거 방해 공작과 도민들의 자발적인 참여로 제주도는 남한 지역 내 유일한 5.10 단독 선거 거부 지역이 되었다. 

북제주군 갑(甲)구와 을(乙)구 두 선거구가 무효 처리되었는데, 이는 미군정에게 미국의 동북아 정책을 거부한 '눈엣가시' 같은 지역이 되었음을 의미했다.


피의 섬, 초토화 작전

박진경(朴珍景) 연대장의 암살과 강경 진압의 시작.

강경 진압을 주도하던 박진경 연대장은 1948년 6월 18일, 부하 문상길 중위(文相吉: 강경 진압에 불만을 품었던 군인) 등에 의해 피살되었다. 

그러나 이는 강경책을 멈추게 하지 못했다. 

새로운 미군사령관 브라운(Brown) 대령은 "원인에는 흥미가 없다. 나의 사명은 진압뿐이다"라며 강경 진압을 천명했다.


하지, 제주도 최고 지휘관으로 브라운 대령 임명

1948년 11월 17일, 계엄령 선포와 초토화 작전 (焦土化作戰) 시작.

군경 토벌대(토벌대: 군인, 경찰, 서청, 민보단 등으로 구성된 진압 부대)는 중산간 마을(中山間 마을: 한라산 중턱에 위치한 마을)을 중심으로 초토화 작전을 전개했다. 

이 작전은 6개월에 걸쳐 진행되었으며, 이 시기에 전체 희생자의 80% 이상이 발생했다.


작전의 배경과 이유

• 정치적 이해관계: 미군정(美軍政)과 이승만 정부는 반공(反共) 체제를 구축하고, 남한 단독 정부 수립을 위한 정통성을 확보하고자 했다. 제주도를 공산화 거점으로 간주하고, 극단적인 폭력으로 저항의 싹을 완전히 잘라내려는 의도였다.

• 군사적 교리 및 인간적 갈등: 당시 군경 토벌대에는 일제 시대 일본군 부사관 및 장교 출신들이 많았는데, 이들은 일본군이 중일전쟁 등에서 사용했던 잔혹한 초토화 전술(민간인을 죽이고 마을을 불태우는 전술)을 그대로 제주도에 적용했다. 여기에 서북청년회(서청) 등의 복수심에 찬 극우 단체들이 합세하며 잔혹성이 극대화되었다. 이들은 반공(反共)을 매개로 어떠한 만행도 '애국자'의 행위로 정당화하는 '테러의 습성화'라는 풍토를 만들어냈다.


무력 충돌 과정에서의 과실 및 비판

첫째, 국가 권력의 과실은 명백했다. 

초토화 작전은 국가 공권력에 의한 인권 유린 행위였으며, 이는 곧 학살을 정당화하는 결과를 낳았다.

미군 정보보고서에 따르면 사망한 제주도민 중 최소한 80% 이상이 토벌대에 의해 살해되었다.(논쟁)

훗날, 진상조사에서 확인된 희생자의 다수가 군·경·서청 등 국가권력에 의한 학살로 파악되었다. 

정확 비율은 자료마다 다르므로 단일 수치화는 (논쟁)으로 남겨둔다.


둘째, 서북청년회(서청)를 진압에 끌어들인 것은 결정적인 비판점이다. 

이철수(李哲洙)와 같은 서청 대원들은 이념과 무관하게 자기 마음에 안 들면 마구잡이로 죽여버리는 '미쳐버린 세상'을 만들었다. 

토벌대는 심지어 제주 사람들로 구성된 민보단(民保團: 마을 경비 조직)을 동원하여 제주도민끼리 서로 죽창으로 찌르도록 강요하는 만행까지 저질렀다.


1948년 말 촬영된 사진. 사진 촬영 직후 이들은 모두 처형당했다.

강영옥의 비극

1949년 1월, 영옥의 고향인 북촌리(北村里)에서 참사가 발생했다. 

무장대의 기습으로 군인 2명이 사망하자, 군인들은 주민 수백여 명을 북촌초등학교(北村初等學校)에 집결시켰다.

군경 대원: "너희 북촌 주민들은 모두 빨갱이다! 민보단장부터 쏴 죽여라!"

군경들은 주민 수백 명을 북촌초등학교에 집결시켰고, 이 가운데 약 300명 안팎이 너븐숭이·당팟 일대에서 집단 희생되었다. (추정)


영옥은 어머니와 어린 조카 '순이'를 품에 안고 옴팡밭으로 끌려갔다.

이철수: (조총을 겨누며) "빨갱이 자식들은 죽어도 싸다! 너희가 공산당에게 협조하지 않았으면, 우리가 왜 이곳까지 와서 피를 묻혀야 했겠나! 모두 죽어라!"

강영옥: (눈물을 흘리며) "우리는 빨갱이가 아닙니다! 그저 살고 싶었을 뿐이어요! 제발, 우리 순이는 살려줍서!"

총성이 울리고, 영옥의 가족들은 쓰러졌다. 

그녀 역시 총탄을 맞았으나,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문형순, 인간의 도리를 지키다 (강영옥의 생존)

북촌리 학살 이후, 영옥은 피범벅이 된 채 정신없이 도망쳤다. 

가족의 시신을 뒤로하고, 그녀는 서청(서북청년회)과 토벌대의 주 활동 지역인 북제주를 벗어나 문형순(文炯淳) 서장(署長)의 관할 구역인 성산포(城山浦, 동부 제주) 방면으로 피신을 시도했다.


피난민들을 수용하고 있던 성산포 임시 구금소(拘禁所). 

수백 명의 주민들이 좁은 공간에 갇혀 있었다. 

군경(軍警)은 밤마다 좌익 관련자나 그 가족으로 지목된 사람들을 끌어내 즉결 처형했다.

1949년 2월의 매서운 바람이 부는 어느 날, 영옥은 토벌대에게 발각되어 이곳으로 끌려왔다. 

그녀는 '폭도 가족'으로 분류되어 있었다.


이철수: (성산포까지 이동해 온 이철수는 승승장구하며 기고만장해 있었다.) "문 서장님! 이 여자, 북촌리 출신으로 폭도(暴徒)의 첩자인 것이 분명합니다. 살려두어선 안 될 빨갱이 종자입니다! 명단에 올려 처단하십시오."

문형순 (성산포경찰서장): (묵직하고 낮은 목소리로) "이철수 대원. 폭도와 주민을 구별해야 할 것 아닌가. 이 여인이 무기를 들었는가? 무장대를 도왔다는 명확한 증좌가 있는가?"

이철수는 코웃음을 쳤다. 

이철수: "이 섬의 주민들 대다수는 공산당에 동조했으니, 증좌가 필요 없지 않습니까! 미군정(美軍政)의 지시대로 '빨갱이(공산주의자)'를 싹을 잘라내야 합니다. 당신의 관할 구역이라 해도, 이는 국가의 명령입니다."


문형순은 한숨을 쉬었다. 

그는 신흥무관학교 출신으로, 일본 경찰과는 다른 양심을 갖고 있었다. 

그는 '반공'을 매개로 어떠한 행위를 하든 '애국자'가 될 수 있었던 당시의 '테러의 습성화'라는 광기 어린 풍토를 경멸했다.


1949년 11월 1일 촬영. 문형순 서장

문형순: "나에게는 '두 번 죽일 수는 없다'는 원칙이 있다. 이 여인은 이미 가족을 잃었고, 무고한 주민이다. 나는 이 마을 주민들을 모아놓고 눈을 감게 하여 매수한 사내(밀고)를 시켜 지목하게 하는 비인간적인 처형을 하지 않을 것이다. 이것이 내 관할이다. 명단에서 이 강영옥을 제외시켜라!"

문형순의 단호한 명령에 이철수는 분노했지만, 당시 경찰서장의 권한이 엄연했기에 함부로 반발할 수 없었다. 

문형순은 강영옥에게 차가운 눈빛으로 말했다.


문형순: "살고 싶다면, 이 섬에서 벌어지는 국가 폭력의 만행을 잊지 말라. 그리고 다시는 이념의 소용돌이에 휩쓸리지 말고, 숨어 살아라."

강영옥은 문 서장의 도움으로 처형 명단에서 제외되었고, 잠시 구금된 후 감시를 피해 성산포 지역의 피난처로 숨어들 수 있었다. 

문형순은 무자비한 토벌이 자행되던 시기에 "무고한 사람들을 죽이는 것을 즐기는 것처럼" 행세하던 다른 군경과 달리, 자신의 권한 내에서 최대한 양민을 보호하고자 노력했다. 

이것이 바로 강영옥이 수십 년 후에도 "그때 저를 살려주신 은혜를 잊지 않았수다" 라고 회상하는 구원의 순간이었다.


또 다른 비극, 다랑쉬굴

구좌읍(舊左邑) 세화리(細花里) 주민 수십 명이 피난해 숨어 있던 다랑쉬 오름 근처의 굴. 

토벌대에게 발각되자, 그들은 주민들을 굴에서 끌어내려 하지 않고 입구에 불을 질렀다.


토벌대장: "안 나와? 그럼 굴 속에서 숯이 되어 보거라! 연기에 질식해 죽는 게 낫지, 밖으로 나오면 총살이다!"

연기에 질식하여 11명이 목숨을 잃었고, 그중에는 아홉 살 아이도 포함되어 있었다.


제주43평화공원 다랑쉬굴 학살 현장

남로당 제주도당 역시 비판받아 마땅하다. 

그들은 도민들을 선동하고 사살하며 사태를 파국으로 몰아간 동족상잔의 주체였다. 

특히 무장대는 자신들에게 비협조적인 주민들을 상대로 약탈과 학살을 일삼았다. 

구좌면 세화리(細花里) 등지에서는 남로당 무장대가 민보단(民保團) 관련 주민들을 눈에 보이는 대로 죽였다는 증언도 있다. 

남로당 지도부는 도민들이 죽어가는 와중에 해주(海州) 인민대표자대회에 참여한다며 북한으로 떠나버렸고 아무도 돌아오지 않았다. 

그들의 행위는 이념적 색채가 옅었던 도민들의 평화적인 시위를 '미군정 전복을 꾀한 무장봉기'로 변질시켜 대규모 유혈사태의 빌미를 제공했다.


침묵과 기억의 투쟁

초토화 작전의 종료와 연좌제 (連坐制)의 시작.

7년 7개월간(1947년~1954년) 이어진 4.3 사건으로 희생자는 최소 1만4천여 명에서 최대 3만 명까지로 추정된다. (추정) 

당시 제주 인구를 감안하면 도민 10명 중 1명꼴로 피해를 입은 셈이라는 평가도 있다.

한라산 중산간 마을의 대부분이 초토화 작전 과정에서 불타거나 폐허가 되었다.

영옥은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으나, 온 가족을 잃었다. 

그녀는 '폭도의 가족'이라는 낙인이 찍히지 않기 위해 침묵하며 살아야 했다.


4.3 사건 이후 한국 사회를 짓눌렀던 대표적인 개념은 '연좌제(連坐制)'였다. 

연좌제는 과거 국가 폭력에 의해 가족이 연루된 경우, 그 친인척까지도 공직 진출이나 취업 등에서 불이익을 받는 제도적 폭력이었다. 

또한 이 사건으로 인해 '빨갱이'라는 용어는 단순히 공산주의자를 넘어, 당시 정권에 반대하거나 숙청 대상이 된 무고한 양민들을 비하하고 학살을 정당화하는 가장 잔혹한 이데올로기적 살인 키워드로 기능했다.

제주도민 중 많은 청년들이 가족의 '빨갱이' 이미지를 씻어내고 연좌제(連坐制)의 굴레에서 벗어나기 위해 해병대 3기, 4기 등으로 자원 입대했으며, 이들이 한국 전쟁에서 혁혁한 공을 세운 것은 한국 현대사의 매우 안타까운 단면이다.


강영옥의 삶과 용서의 희망.

영옥은 살아남았지만, 고통은 계속되었다. 

그녀는 제주 평화공원(濟州平和公園) 근처에서 과거의 기억을 끄집어내는 일에 힘을 쏟는 고태호와 재회했다.


고태호: "내가 가진 죄책감은... 그저 침묵하고 숨어 살았다는 것뿐이오. 그 시대를 산 우리 모두의 짐이겠지."

강영옥: "살아남은 자의 짐입니다. 하지만 묻어버린다고 없어지는 게 아니란 걸 알았수다. 우리 순이(어린 조카)처럼 무고하게 죽어간 이들의 이름은 돌에 새겨져야 할 것 아니우다."


시간이 흘러 4.3 진상규명 운동이 시작되었다. 

특히 1978년 소설가 현기영(玄基榮)의 『순이 삼촌』 발표와 1989년 『제민일보』의 <4.3은 말한다> 연재 등 문화 예술인과 언론의 노력이 4.3의 진실을 수면 위로 끌어올렸다.


2000년, 김대중 정부 때 제주 4.3 사건 진상규명 및 희생자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법(4.3 특별법)이 제정되었고, 2003년에는 노무현 대통령이 국가원수로서 최초로 사과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국가 권력에 의해 저질러진 잘못은 반드시 정리하고 넘어가야 하며, 억울한 분들의 상처를 치유하고 명예를 회복해 주는 것은 국가가 해야 할 최소한의 도리이자 의무라고 강조했다.


노무현 대통령 공식사과. 제주 라마다 호텔

2014년, 박근혜 정부에서는 '4.3 희생자 추념일'이 국가기념일로 지정되었다. 

2018년 문재인 대통령은 국가 폭력에 의한 고통에 대해 다시 한번 사과하며 4.3의 완전한 해결을 약속했고, 2019년에는 경찰청장과 국방부도 공식적으로 사죄했다. 

2021년에는 특별법 개정으로 희생자에 대한 국가 차원의 피해 보상 근거가 마련되었다.


4.3 사건의 성격에 대해서는 여전히 '폭동론' (남로당의 극좌 모험주의적 폭동), '반란론' (우파 정부에 대한 좌파의 반란), '민중항쟁론' (분단 전략에 대항한 민중의 방어적 자주 항쟁), '사태론' (민중 수난의 역사) 등 다양한 관점이 존재한다. 

하지만 공식적인 진상보고서는 '국가공권력에 의한 인권유린 행위'로 규정하고 있으며, 토벌군과 무장대 쌍방 모두 민간인 희생에 책임이 있음을 인정한다. 

일부 보수 진영에서는 여전히 '북한 지령설'이나 '좌파 폭동' 주장을 제기하며 논란을 만들기도 했다.


강영옥은 수십 년이 흘러, 하귀리(下貴里)에서 호국영령비(護國英靈碑)와 4.3 희생자 위령비(慰靈碑)를 한자리에 모아 만든 위령단을 찾아갔다. 

"모두 희생자이기에 모두 용서한다"는 뜻으로 세워진 비석이었다.


강영옥: (위령비 앞에서 나지막이) "문형순(文炯淳) 서장님(署長), 그때 저를 살려주신 은혜를 잊지 않았수다. 그리고... 이철수(李哲洙) 씨, 당신에게 총 맞고 죽은 수많은 원혼(冤魂)들이 이곳에 함께 누웠수다. 이제 증오를 놓아버리고, 용서를 배우려 합니다."

그녀는 고향 북촌리(北村里)의 '너븐숭이 애기무덤'을 찾아갔다. 

아기들의 무덤 위에는 붉은 동백꽃이 만개해 있었다. 

동백꽃은 제주에서 희생을 상징하는 꽃이 되었다..


너븐숭이 4.3 기념관

강영옥: "이 땅에 봄은 왔수다. 비극은 길었지만, 이제 우리는 기억해야 합니다. 당신들의 억울한 죽음이 헛되지 않도록."


제주 4.3 사건은 국가 권력이 이념 갈등과 정치적 이해관계를 해소하는 과정에서 합법적인 절차를 벗어나 폭력을 행사할 때, 얼마나 참혹한 민간인 학살(量學殺, 대량학살)이라는 결과를 낳을 수 있는지를 보여준 비극적인 역사이다.


국가 권력은 어떠한 경우에도 합법적으로 행사되어야 하며, 일탈에 대한 책임은 특별히 무겁게 다뤄져야 한다. 

국가가 '빨갱이'라는 단 하나의 이념적 프레임을 씌워 무고한 민간인을 학살한 과오는 용서받을 수 없는 집단학살적 성격을 가진 범죄였다.

좌우 이념 대립이 낳은 비극 속에서 제주도민들이 보여준 화해와 상생, 용서의 정신은 분단과 적대의 시대를 넘어 인류의 보편적 가치인 평화(平和)와 인권(人權)을 확립하는 디딤돌이 되어야 한다.

자랑스러운 역사든 부끄러운 역사든, 역사는 있는 그대로 밝히고 정리해야 한다. 

4.3의 진실은 어떤 세력도 부정할 수 없는 분명한 역사의 사실로 자리 잡았으며, 이 아픔을 다음 세대에 전승(傳承)하여 다시는 이러한 비극이 반복되지 않도록 다짐하는 것이 살아남은 우리 모두의 역사적 책무이다.


제주의 붉은 동백꽃은 단지 아름다운 꽃이 아니라, 차가운 바람 속에서 무참히 꺾인 수많은 생명들의 뜨거운 피를 기억하는 피의 상징(象徵)이자, 결코 잊을 수 없는 역사의 증언(證言)이다.


이 글은 제주 4·3 사건에 대한 공식 진상조사보고서, 당시 미군정·군경의 기록, 생존자 구술을 바탕으로 한 소설적 재구성입니다. 

실제 있었던 인물·지명·날짜·사건을 최대한 사실에 가깝게 배치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일부 장면(대사, 감정선, 인물 간 관계)은 각색되었습니다. 

북촌리 집단희생 인원, 오라리 방화 사건의 주체, 무장대의 주민 처벌 문제 등은 지금도 (논쟁)이 존재하므로 단정적 인용은 피해주세요. 

이 글의 핵심은 “국가공권력과 무장세력 양측의 폭력이 민간인에게 집중되었고, 그에 대한 국가적 사과와 기억이 필요하다”는 역사적 메시지를 전달하는 데 있습니다.


This narrative novelizes the 1947–1954 Jeju 4·3 Uprising, when U.S. military rule and the South Korean security forces brutally suppressed an island that opposed the 5.10 separate election. 

What began with the March 1 shootings and mass strike escalated after the April 3 armed revolt, then turned into “scorched-earth” counterinsurgency in mid-mountain villages.

Most victims were unarmed civilians; armed leftists also killed noncooperative locals.

Later state apologies and the 4·3 Special Act recognized this as state violence and called for remembrance and reconcili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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