청야(淸野)의 상처
냉전의 그림자, 신원(神院)에 드리우다
1. 1951년, 피의 예고
[현대, 서울의 기록실]
정예림 (가상인물. 정신예과 레지던트 출신, 30세, 다큐멘터리 감독)은 어두운 자료실에서 오래된 군사재판 기록과 국회 속기록을 넘기고 있다.
그녀의 할아버지 문호진 (가상인물. 80세, 거창 사건 생존자)이 이끄는 유족회 활동을 다큐멘터리로 만드는 중이다.
예림: (나지막이 혼잣말) “견벽청야. 벽은 견고히 하고 들은 깨끗이 비운다.” 수천 년 전 병법이 어떻게 수백 명의 양민 학살 명령이 되었을까.
그녀의 눈앞에 오래된 흑백 사진들이 펼쳐진다.
눈 덮인 산골짜기, 쓰러진 시신들, 그리고 경찰에게 위협받는 유족들의 모습.
[과거: 1951년 2월, 거창군 신원면]
1951년 2월, 지리산 자락의 경상남도 거창군 신원면 (지리산 공비 토벌 작전 지역).
6.25 전쟁 (한국전쟁)이 한창이던 시기, 전선은 이미 남북을 오가며 후방은 공비 (빨치산) 토벌의 광풍에 휩싸여 있었다.
문호진 (당시10세, 신원면 내동 마을 소년)은 어머니 김정심 (가상인물. 40대, 호진의 어머니)과 함께 집 마당에서 떡국 재료를 다듬고 있다.
곧 설날이다.
정심: “호진아, 이 놈의 전쟁은 언제 끝날꼬. 읍내 나갔던 만복 아재 (가상 인물, 호진의 이웃) 말로는 국군 11사단 (당시 빨치산 토벌 전담 부대)이 이 동네로 온다고 하더라. 이제는 공비 (인민군 잔당 및 게릴라) 걱정은 덜었지 싶다.”
호진: “어머니, 국군 아저씨들은 우리를 지켜주는 거지요?”
정심: “당연하지. 나라 지키는 군인들인데. 다만… 요즘 토벌 작전이 너무 거세서, 산에 숨은 공비들 (빨치산) 말고도, 이데올로기 (좌우익 대립)의 바람이 너무 거세서 무서운 일도 많다고 한다.”
당시 사회적 배경은 극심한 냉전 이데올로기의 대립 속에 있었다.
한국전쟁 (6.25 전쟁) 발발 후 유엔군의 반격과 함께 퇴로가 막힌 인민군 잔당들이 지리산 일대에 숨어들었고, 이들이 빨치산 활동을 전개하자, 정부는 이들을 토벌하기 위해 11사단 (사단장 최덕신 준장)을 투입했다.
문제는 이 과정에서 ‘빨치산 협력자’로 몰린 양민 (무고한 민간인) 학살이 전국적으로 광범위하고 체계적으로 진행되었다는 점이다.
며칠 후, 덕산리 마을에 국군이 들이닥친다.
흙투성이 군복에 굳은 표정의 병사들.
국군 장교 (가상 인물): “이 부락 주민들은 전원 공비 협력자로 간주한다! 마을 사람들은 모두 신원국민학교 (학살 전 집합 장소)로 모인다! 당장!”
정심: (호진의 손을 꽉 잡으며) “호진아, 무서워하지 마라. 우리는 아무 죄도 없데이.”
2. 작전명령 제5호와 견벽청야 (堅壁淸野)
[과거: 1951년 2월 7일~8일, 산청과 함양]
신원면에 국군이 들이닥치기 이틀 전, 이미 이웃 마을에서는 비극이 시작되고 있었다.
11사단 9연대 3대대 (한동석 소령이 지휘하는 부대)는 산청군 금서면 가현, 방곡마을 (산청·함양 학살사건 발생지)과 함양군 유림면 점촌, 서주마을 (산청·함양 학살사건 발생지) 일대에서 대규모 학살을 감행했다.
이들은 이른바 작전명령 제5호에 따라 움직이고 있었다.
한동석 (韓東錫, 3대대장, 소령): (진주 연대본부 작전회의에서) “연대장님 (오익경 대령), ‘작전지역 안의 인원은 전원 총살하라’는 명령은 대체 무슨 의미입니까? 이것은 전시 국제인도법 (당시 1949년 제네바 협약 준수 약속이 있었음)을 정면으로 위반하는 불법 명령입니다!” (한 소령이 명령에 항의했다는 주장이 있음)
오익경 (吳益慶, 9연대장, 대령): “닥쳐! 사단장님 (최덕신 준장)께서 하달하신 견벽청야 (堅壁淸野 - 적이 이용할 수 있는 자원과 거주민을 말살하여 초토화하는 전략) 작전의 핵심이다. 공비 토벌에는 필요악이다. ‘빨치산에게 협조하는 모든 사람’을 없애야 한다. 토벌 지역 주민은 전원 총살이 원칙이다.”
(논쟁) 당시 9연대 지휘선에서 하달된 명령의 원문 표현은 문서로 완전하게 남아 있지 않으며, 일부는 유족·당시 장교 증언을 기반으로 재구성했다.
견벽청야 전술: 이 전술은 최덕신 사단장이 중국 국민당 군에서 체득했다고 알려진 개념이었으나, 현대 게릴라전에서 지역 주민을 강제 이주시키지 않고 학살하는 것은 군인으로서 국민을 보호할 의무를 내팽개친 심각한 과실이었다.
게릴라 (빨치산)는 주민의 지지를 기반으로 활동하는데, 국군이 양민을 학살하면 오히려 주민들을 게릴라 지지자로 만들 수 있었다.
한동석의 3대대는 이 불법적인 명령을 따랐으며, 이로 인해 산청·함양에서만 705명의 민간인이 희생되었다.
[과거: 산청의 참극]
산청군 금서면의 산제당 골짜기. 총성이 난무한다.
최금자 (산청군 금서면 생존자): (울부짖는 목소리) “엄마가 숨 막힐 듯이 나를 껴안는 순간 천지를 뒤엎을 듯한 총 소리가 들리고 나는 바로 정신을 잃었다. 한참 후 깨어나 보니 엄마 머리는 온데간데 없고 몸뚱이만 나를 안고 엎어진 채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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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산청 외공리 집단학살 현장 | 
군인들은 학살 후 마을의 소와 돼지를 몰고 다음 부락으로 향했다.
이 광경을 목격한 청년방위대원 최남철 (민간인 신분, 3대대 짐꾼)은 충격에 휩싸인다.
최남철: “세 살배기 아이가 시체 더미 속에서 울며 기어 다니자 중대장이 정조준하여 쏘아버렸다. 나는 죽음이 두려워 ‘좋습니다’라고 대답할 수밖에 없었다. 그들은 우리를 사람이 아닌, 적의 소모품으로 보았다.”
최남철은 중대장에게 묻는다.
최남철: “중대장님, 왜 저들을… 아이들까지…”
중대장 (가상 인물): “나는 제주도 출신이다. 내 가족이 빨갱이들한테 죽었다. 나는 보복하러 왔다.” (제주 4.3 사건 등 과거 경험이 보복 심리를 낳았다는 증언을 기반으로 함)
신원국민학교, 생사의 심판대
3. 거창, 공포의 사흘
[과거: 1951년 2월 9일~11일, 신원면]
학살은 2월 9일 거창군 신원면 (문호진의 고향)으로 이어졌다.
9일 청연골에서 84명이 희생되었고, 10일에는 탄량골에서 100명이 학살당했다.
호진의 어머니 정심은 동생과 호진을 데리고 신원국민학교 (신원초등학교)에 집결해야 했다.
학교는 이미 천여 명의 주민들로 가득 차 있었다.
정심: (호진을 품에 안고 속삭인다) “호진아, 무슨 일이 있어도 엄마 손 놓지 마라.”
학교 운동장에는 한동석 (3대대장, 소령)과 박영보 (朴榮輔, 신원면 면장)가 서 있었다.
박 면장은 군인들에게 협조하여 주민들의 생사 여탈권 (살릴지 죽일지 결정하는 권한)을 쥐고 있었다.
보도연맹 사건 때와 마찬가지로 군경 (군인/경찰) 가족이나 유력 인사의 가족은 면죄부를 받았다.
박영보 (면장): (목소리를 높여 외친다) “군인 가족, 경찰 가족은 앞으로 나선다! 군경 협력자도 나선다!”
정심은 호진을 더 세게 안았지만, 그들은 나설 수 없었다.
그들은 군경 가족이 아니었다.
군인 A (가상 인물): “빨치산과 내통한 놈들! 너희는 밤에는 인민공화국, 낮에는 대한민국이라 하는 자들이다! 당장 저 박산골 (박산계곡, 거창 학살의 최대 희생지)로 간다!”
11일 아침, 주민 517명 (대부분 노약자와 어린이)이 눈 덮인 박산골짜기로 끌려갔다.
호진과 정심도 그 속에 있었다.
4. 박산골의 아비규환
[과거: 박산골]
박산골. 주민들은 언덕 위 기관총 앞에 무릎을 꿇었다.
호진: (어머니에게) “엄마, 왜 우리가 죽어야 해? 나는 빨갱이가 뭔지도 몰라요.”
정심: “호진아, 빨갱이가 무슨 색깔인 줄 알아서 빨갱이라 하는 거겠니. 그냥… 억울하게 죽는 걸 막지 못해서 미안하다.”
한동석 (3대대장, 소령): (고개를 돌린 채 명령한다) “사격 개시!”
천지를 뒤엎을 듯한 기관총 소리가 울려 퍼졌다.
호진은 어머니의 품에 안겨 정신을 잃었다.
“깨어나 보니 온 사방이 피로 물든 눈밭이었다. 어머니의 몸뚱이가 나를 안고 엎어져 있었다. 어머니 머리는 온데간데없었다. 내 옆에는 머리에 총을 맞은 또래 아이가 쓰러져 있었다. 총알이 아까웠던지 군인들은 구둣발로 시체 더미를 걷어찼다.”
군인 B (가상 인물): “총알 아깝다. 시체 위에 솔가지와 기름을 뿌려라! 깨끗하게 처리한다!”
생존자 신현덕 (박산골 생존자)은 군인들의 명령에 따라 시신 위에 솔가지를 덮고 불을 질러야 했다.
신현덕: (호진에게) “야, 너 살아있었냐? 명이 질긴 놈들이구만. 이리와, 포탄이나 날라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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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디오라마로 재연한 학살 현장 | 
호진은 공포와 충격 속에서 어머니의 시신을 불태우는 일을 도왔고, 짐꾼 노릇을 하다가 도망쳤다.
이 잔혹한 집단 학살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로 15세 이하 어린이 359명 (총 희생자의 절반 이상)과 노약자 등 무고한 주민 719명이 희생되었다.
현장별 희생자 수는 수습 시점·조사 주체에 따라 약간의 편차가 있으며, 여기서는 유족회 및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이후 확정 수치(719명)를 기준으로 서술한다.
감춰진 진실과 폭로
5. 국회 조사단의 습격 사건
[과거: 1951년 3월 29일, 부산 국회]
사건 발생 한 달 후, 임시 수도 부산의 국회.
신중목 (愼重穆, 거창 출신 국회의원)은 청년단 한차산 (거창 청년단 부단장) 등의 제보와 유봉순 (거창 경찰서 사찰 주임)으로부터 현장 상황을 듣고 이 진실을 외면하지 않았다.
신중목 의원은 국회에서 비밀 회의 (해외 보도 방지 목적)를 요청하고 사건을 폭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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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신중목 의원 | 
신중목: (국회 본회의장, 격앙된 목소리로) “국민 여러분, 국군에 의한 거창 양민 학살 사건 (居昌良民虐殺事件)이 발생했습니다! 무고한 양민 719명이 공비 토벌이라는 명목 하에 무참히 살해당했습니다! 국방부는 이 참극을 은폐하려 했습니다!”
이승만 대통령 (당시 대한민국 대통령): (국회 출석 거부 후 서한에서) “국내 제반 사항에 대해 거창사건이 해외에 보도되지 않도록 비밀리에 조사해 시정케 해달라.”
이승만 정부와 국방부는 인권 유린 사실이 국제 여론에 노출되어 유엔군으로부터 지원을 받는 데 문제가 생길까 봐 진실을 은폐하려 했다.
신성모 국방장관 (申性模) 등은 사건을 축소하고 조작하려 했다.
국회는 거창사건특별조사위원회 (국회 조사단)를 파견하기로 결의했다.
[과거: 위장 공비 습격, 은폐 공작]
1951년 4월 7일, 국회 조사단이 신원면으로 향하는 길목인 수영더미재 (험준한 계곡의 길목).
김종원 (金宗元, 경남 계엄민사부장, 대령): (9연대 정보 참모 최영두 소령에게 지시하며) “국회 조사단이 오면 공비로 위장하고 총격을 가해라. 단, 사람이 맞지 않도록 위협 사격만 가해 조사를 못하고 돌아가게 해라. 신성모 국방장관 (당시 국방부 장관)의 지시다.”(논쟁)
실제로 국회 조사단은 위장 공비 (가짜 빨치산으로 변장한 군인들)의 총격을 받고 조사를 진행하지 못한 채 되돌아왔다.
김종원의 만행: 김종원 대령은 국방의 의무를 진 군인으로서 도저히 용납될 수 없는 만행을 저질렀다.
이는 국회 조사 활동 방해라는 중대한 범죄이자, 군부가 조직적으로 진실을 은폐하려 한 정황을 명확히 보여준다.
6. 형식적인 재판과 정치적 사면
국회와 언론의 압력 (해외 언론 뉴욕 타임스 등도 보도하며 파장이 커짐)으로 이승만 정부는 결국 신성모, 조병옥 (내무장관), 김준연 (법무장관) 3부 장관을 사임시켰다.
군법회의가 열렸다.
1951년 12월 16일, 대구중앙고등군법회의 (학살 책임자 재판).
재판장 강영훈 준장 (당시 재판장): “오익경 대령 (9연대장)에게 살인죄 및 군무불신임초래죄를 인정하여 무기징역을 선고한다! 한동석 소령 (3대대장)에게 징역 10년을 선고한다! 김종원 대령 (은폐 주모자)에게 공무집행방해죄로 징역 3년을 선고한다!”
호진의 삼촌 (가상 인물, 생존 유족): “겨우 3년, 10년이냐! 살인자들! 아이들이 700명이 넘게 죽었는데!”
재판은 거창 사건만을 대상으로 했고, 희생자 수를 150여 명으로 축소하는 등 은폐와 축소된 채 진행되었다.
실질적인 책임자인 최덕신 사단장은 처벌받지 않았고, 재판 자체는 진실 규명을 도외시한 형식적 절차에 불과했다.
이승만 (대통령): (1년도 안 되어) “모두 특별 사면 (특사)으로 석방한다.”
(구체적 석방 시점은 인물별로 다소 차이가 있다.)
김종원 (은폐 주모자)은 경찰 간부로 다시 등용되었다.
한동석 (3대대장)은 강릉시장 (제5대)을 지내는 등 승승장구했다.
호진의 삼촌: “하늘이 무너져도 정의는 세워라!는 말이 무슨 소용인가. 정의는 서지 않았고 하늘만 무너졌다.”
50년의 침묵과 현대의 투쟁
7. 4.19 혁명, 폭발한 울분
[1960년, 4.19 직후]
호진은 성인이 되었지만, 사건의 상처 (트라우마)는 깊게 남았다.
유족들은 빨갱이 가족이라는 꼬리표 (낙인, 연좌제) 때문에 공무원 임용도 막히는 등 고통 속에 살았다.
1960년, 4.19 혁명 (자유당 정권 붕괴)이 일어나자 유족들의 울분이 터져 나왔다.
그해 5월 11일, 유족들은 학살 당시 군에 협력하여 무고한 주민들을 죽음으로 몰아넣은 박영보 (朴榮輔, 면장)를 붙잡았다.
유족 A (가상 인물): “네놈 때문에 우리 부모님이, 우리 아이들이 죽었다! 인정하고 사과하라! (박 면장은 거부하고 도주하려 했다)”
유족들은 박영보를 산 채로 불태워 죽이는 생화장 (生火葬)이라는 극단적인 보복을 감행했다.(전승)
이 사건은 국가가 피해자에 대한 적절한 구제 조치 (재판받을 권리, 손해배상)를 취하지 않았기 때문에 빚어진 또 다른 참극이었다.
유족들의 분노와 한 (恨)이 극도로 쌓여 정의 대신 응보 (보복)를 택한 비극적인 결과였다.
1960년 6월, 신원 유족회 (거창 사건 유족회 시초)가 결성되어 진상 규명과 위령비 건립을 요구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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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1960년, 진상 규명을 외치며 시위를 벌이는 주민들 | 
[과거: 5.16 쿠데타, 침묵의 시대]
1961년 5.16 군사정변 (군사 쿠데타)이 발생하며 상황은 다시 암흑기로 접어들었다.
박정희 정권 (당시 군부 세력)은 유족회 간부 17명을 반국가단체 조직 혐의로 구속하고, 위령비 (박산 합동묘역에 세워진 희생자 추모비)를 정 (끌과 망치)으로 쪼아 글자를 알아볼 수 없게 훼손한 뒤 땅속에 파묻었다.
유족들은 이 행위를 제2의 학살, 부관참시라고 불렀다.
호진: (매몰된 위령비 앞에서 절규하며) “이 땅에 숨은 아버지, 어머니, 그리고 아이들의 뼈가 다시 찢어지는구나. 국가는 끝내 우리를 용서하지 않겠다니.”
유족들은 이후 1987년 6월 항쟁 (민주화)이 일어나기까지 30년 가까이 침묵을 강요받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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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5.16 군사정변으로 인해 파괴된 위령비 | 
8. 20년 희망고문, 법적 투쟁
[현대: 1996년 ~ 2024년, 진실을 위한 노력]
1988년 유족회 활동이 재개된 이후 명예회복 운동이 시작되었다.
호진 (문호진)은 유족회에서 활동하며 진실을 알리는 데 평생을 바쳤다.
1996년, ‘거창사건 등 관련자의 명예회복에 관한 특별조치법’ (명예회복 특별법)이 제정되었다.
이 법에 따라 희생자 명단이 확정되고 거창사건추모공원 (경남 거창군 신원면)이 조성되었다.
호진: (유족회 회의에서) “우리는 명예를 회복했다. 하지만 피해보상 (금전 배상)은 빠져있다. 이것은 껍데기뿐인 법이다.”
정예림 (호진의 손녀, 다큐멘터리 감독)은 카메라를 들고 할아버지에게 묻는다.
예림: “할아버지, 2004년에 배상금이 포함된 특별법 개정안이 국회를 통과했는데, 왜 폐기되었나요?”
호진: “고건 대통령 권한대행 (당시 대통령 직무대행)이 거부권을 행사했단다. 정부는 거창 사건 배상에 2000억 원이 들고, 이를 선례로 삼으면 유사 사건에 최대 25조 원의 천문학적인 예산이 필요하다는 이유를 들었다.” (추정)
국군에 의한 불법 학살을 국가 범죄로 인정하면서도, 재정 부담을 이유로 피해자들에게 배상 (불법 행위로 인한 손해 배상)을 거부한 것은 국제인도법을 위반한 것이며, 유족들에게 ‘20년 희망고문’을 안긴 행위였다.
[현대: 끝나지 않은 논란]
거창 유족회는 산청·함양 유족회와 협력해야 했지만, 배상법안을 둘러싸고 갈등과 반목을 겪었다.
거창 사건만 처벌받았다는 점을 근거로 거창 단독 배상법 (거창사건 유족회 주장), 혹은 세 사건을 묶은 통합 배상법 (산청·함양 유족회 주장)을 주장하며 대립했던 것이다.
이로 인해 법안은 국회에서 부결되거나 폐기되는 일이 반복되었다.
2018년 헌법재판소 판결: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에는 민법상 장기 소멸시효 (국가배상청구권 행사 기간) 적용이 배제된다.”
2022년 대법원 판결: 거창 사건은 ‘민간인 집단 희생사건’에 해당하므로 소멸시효가 지나지 않았다.
다만 헌재·대법원 판단은 ‘시효가 막히지 않았다’는 법리적 길을 연 것이고, 자동 배상 결정이 아니다.
이후는 다시 입법 영역이다.
예림: “할아버지, 드디어 법적으로 희망이 생겼어요. 할아버지가 겪었던 고통은 시효로 소멸될 수 없다고 법이 인정했어요.”
호진: (창밖을 바라보며) “소멸시효… 전쟁의 기억이 시효로 소멸될 수 있다고 믿는다는 것 자체가 폭력이지. 나는 효과적인 구제 관행 (국가가 진실을 규명하고 배상하는 관행)이 확립될 때까지 시효는 진행되지 않는다고 믿었다.”
호진의 말 속에 등장하는 '견벽청야' (堅壁淸野)는 손자병법에서 유래된 군사 용어였으나, 이 사건 이후 한국 현대사에서는 잔혹한 초토화 작전이나 비인도적 탄압의 상징적인 용어로 재해석되었다.
9. 문화적 계승과 후대의 평가
[현대: 추모 공원과 다큐멘터리 완성]
정예림의 다큐멘터리는 거창사건추모공원 (희생자를 추모하고 역사를 교육하는 공간)에서 끝을 맺는다.
호진은 훼손된 채 보존된 박산 합동 위령비 (5.16 쿠데타 때 파괴되어 땅에 묻혔다가 다시 발굴된 비석) 앞에서 서 있다.
이 비석은 왜곡된 역사를 바로 알리기 위한 상징물이다.
예림: “거창 양민 학살 사건은 한국전쟁 (6.25 전쟁) 당시 국가 권력이 자국 민간인에게 자행한 대규모 인권 침해 행위의 대표적인 사례입니다. 이 사건은 다른 한국전쟁기 민간인 학살 사건 (산청·함양, 문경, 함평 등)의 진상 규명을 위한 도화선이 되었다는 중요한 의미를 갖습니다.”
호진: “나는 영화 <청야> (거창 사건을 다룬 2013년 영화)가 만들어지고, 이 추모 공원이 생겨서 그나마 다행이라고 생각한다. 진실이 세상에 제대로 알려져서, 우리 유족들의 상처가 치유되고 화해와 용서로 승화되기를 바란다.”
이 사건은 법적, 정치적 측면에서 다른 과거사 사건의 처리 기준 (선례)이 되었으며, 문화적 측면에서는 과거 국가 폭력의 기억을 어떻게 재현하고 전승해야 할지 시사점을 주었다.
이행기 정의 (Transitional Justice) 관점에서 볼 때, 한국 사회는 명예 회복 (도덕적 인정)은 확보했으나, 여전히 배상적 정의 (피해 구제)와 정치적 재구성 (제도 개혁)의 과제를 안고 있다.
특히 가해자들이 사면되고 복직된 불처벌 (Impunity) 관행은 군인들에 대한 불처벌 문화를 심화시킨 중대한 문제점으로 비판받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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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3년작 청야 | 
예림: (호진에게) “할아버지, 유족회가 산청·함양 유족회와 합의서 (2018년 10월)를 작성했을 때, ‘작전명령 제5호에 의한 견벽청야 학살 작전에 희생된 유가족’임을 상호 인정하고 공동 대응하기로 한 것이 정말 감동적이었어요.”
호진: “그렇지. 우리 유족의 상 (喪)의 과정은 국가의 부인 (Denial, 진실 부정 및 은폐)에 맞서 시인 (Recognition, 진실 인정)을 쟁취하는 투쟁이었다. 고통과 분노, 반목을 넘어 서로의 존재를 인정하고 연대했을 때 비로소 희망이 보였지.”
10. 에필로그: 인류애의 기록
[현대: 마무리 촬영]
예림은 카메라를 끄고, 호진은 추모 공원의 비석군 (희생자들의 이름이 새겨진 비석들) 앞에 국화 (추모의 꽃)를 놓는다.
희생된 아이들의 묘 (소아합동지묘)에는 봉분이 없다.
호진: “이 비극은 단지 70년 전의 역사가 아니다. 이데올로기 (사상적 대립)라는 이름으로, 작전명령 (군사적 효율성)이라는 이름으로 인간이 인간의 존엄성을 말살한 기록이다. 군대가 국민을 적으로 규정하고 소모품으로 처리했던 시대의 참상이다.”
예림: “할아버지의 말씀처럼, 이 기록은 미래 세대에게 전달되어야 합니다. 그래야만 재발 방지 (Guarantee of Non-repetition)를 보증할 수 있고, 민주주의 구조를 재구성할 수 있습니다.”
인류가 역사 속에서 거듭 배운 것은, 국가 권력의 폭력성은 외부에 대한 공격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니라 내부의 적을 상정하는 순간 발현된다는 점이다.
거창 사건은 우리에게 진실에 대한 권리 (피해자가 알아야 할 권리)와 인간의 존엄성이 국가의 어떠한 정치적, 군사적 목표보다 우선한다는 인류애적 가치를 되새기게 한다.
과거의 부인을 극복하고, 고통받은 영혼들의 명예를 회복시키며, 다음 세대에게 평화를 교육하는 것, "이것이 미완의 사건으로 남은 거창 사건을 통해 우리가 반드시 완수해야 할 이행기 정의 (Transformative Justice)의 과제이다"라고 기억해야 역사가 되기 때문이다.
본 글은 1951년 산청·함양 학살과 이어진 거창 신원면 민간인 학살을 중심으로, 한국전쟁기 ‘견벽청야(堅壁淸野)’식 토벌 작전이 어떻게 국가에 의한 대규모 인권침해로 변질되었는지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주류 연구와 공개된 재판기록·국회 속기록·유족 증언을 1차 축으로 삼았으며, 확인이 불완전한 대목(작전명령의 원문, 위장 공비 사격의 지시선, 1960년 박영보 생화장 등)은 본문에서 [논쟁]/[전승]으로 구분해 서술하는 것을 원칙으로 했습니다.
현대 파트(정예림·문호진 손녀 설정)는 이해를 돕기 위한 가상 장치이며 실제 인물과는 무관합니다.
연대·지명·인원 수는 거창사건 특별법 이후 확정된 수치를 우선하되, 현장별 집계와 차이가 나는 부분은 대표 수치를 기준으로 했습니다.
오탈자·사료 보강·다른 유족회의 증언 제보는 언제든 환영합니다.
This article reconstructs the 1951 Sancheong–Hamyang and Geochang civilian massacres during the Korean War, showing how the army’s “scorched village” counter-guerrilla strategy turned into state violence against its own people.
Based on official records, National Assembly minutes and survivor testimonies, it traces the killings, the political cover-up, the token military trials, decades of enforced silence under authoritarian rule, and the later struggles for truth, memorialization and reparations.
It argues that recognition was achieved, but full reparative justice remains unfinish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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