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 글은 [브리태니커 Kim Il-Sung], [소련군정 문서], [윌슨센터 한국전 발발 소련·중국 기록],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 자료], [1955년 주체 연설 원문], [1956년 8월 종파사건 관련 연구],
[1972년 헌법], [유엔 북한 인권조사위원회 보고서], [앰네스티·HRNK 증언집],
[오준 대사 UN 연설(2014년 12월, 안보리)] 등을 참고했으나,
독자의 몰입을 위해 문학적 상상과 서사적 각색이 일부 포함되어 있습니다.
사실 그대로의 연대기가 아닌, 드라마와 긴장감을 살린 소설체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인물과 사건에는 이해를 돕는 (설명)을 덧붙였습니다.
만경대의 흙길에 봄비가 스며들던 1912년, 한 아이가 태어났다.
그의 본명은 김성주. 훗날 김일성으로 불리게 될 아이였다.
아버지 김형직(기독교 민족운동가)은 학교를 세우고 민족의식을 설파했으나,
가난과 병으로 일찍 세상을 떠났다.
어머니 강반석은 독실한 기독교 신앙을 지닌 여성이었고, 교회에서 찬송을 부르며 아들을 품에 안았다.
그러나 유년기의 따뜻함은 오래가지 못했다.
가족은 일제의 감시와 가난 속에서 만주로 흩어졌다.
소년 김성주는 어린 나이에 고향을 떠나 길림과 만주를 떠돌며 배움과 생존을 동시에 겪었다.
그곳에서 그는 혁명 서클과 접촉했고, 일본 경찰의 탄압을 피해 숨어 다녔다.
그러나 후일 북한에서 선전한 ‘백두산 항일 전설’은
이 소년의 실제 행적을 과장하고 꾸며낸 이야기였다.
그는 소련군의 보호 아래 살아남았고, 바로 그 점이 이후의 운명을 결정했다.
1945년 8월, 해방의 날.
한반도의 남과 북에 서로 다른 군홧발이 들어섰다.
북쪽에는 소련 제25군이 진주했고, 남쪽에는 미군이 내려왔다.
평양 주민들은 낯선 러시아어 방송을 들으며 광장에 모였다.
무대 위에 처음 등장한 이름은 낯설었다.
김일성.
사람들은 속삭였다.
“그 장군이 살아 있었단 말이야?”
그러나 많은 이들은 그를 본 적이 없었다.
소련군정은 ‘신화’를 필요로 했다.
북한 내부에는 이미 공산주의 세력이 여럿 있었다.
중국에서 활동한 연안파, 국내파, 모스크바에서 성장한 소련파, 그리고 남쪽의 박헌영 계열.
이들 모두 조직과 사상을 갖추고 있었다.
하지만 그들 대부분은 자율성이 강했고, 모스크바의 지시와 충돌할 위험이 컸다.
소련이 원한 것은 통제 가능한 지도자였다.
젊고, 빚지고, 러시아어를 이해하며, 모스크바의 신호를 정확히 따를 인물.
김일성은 그 조건에 맞았다.
소련군정 최고책임자 쉬티코프는 그를 택했고, 소련군은 무대 위에 올려 세웠다.
1945년 10월 평양 극장에서 열린 ‘영웅 장군 환영대회’.
김일성은 그날부터 ‘항일의 신화’로 불리기 시작했다.
박수는 명령처럼 쏟아졌고, 주민들은 그제야 깨달았다.
해방의 무대 뒤에서 이미 차기 권력의 얼굴은 정해져 있었다는 것을.
1946년, 북조선임시인민위원회가 출범했다.
토지개혁은 무상 몰수·무상 분배라 선전되었지만, 실행 과정은 권력의 손에 의해 통제되었다.
땅을 받은 농민들은 감사의 노래를 불러야 했고, 그 노래 속에는 지도자의 이름이 빠지지 않았다.
산업은 국유화되었고, 공장에는 새로운 간판이 걸렸다.
공장은 돌아가지 않아도 보고서에는 생산량이 올라갔다.
당의 장부에 숫자를 채우는 것이 곧 충성이었다.
1948년 9월, 소련군정은 드디어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창립을 주도했다.
김일성은 수상으로 호명되었다.
다른 공산주의 지도자들은 주변으로 밀려났다.
광장에는 환호가 울려 퍼졌지만, 그 환호의 그림자는 소련의 승인 인장이었다.
북한 주민들은 새 국가의 이름을 불렀지만, 그 이름 속에 자신들의 목소리는 적히지 않았다.
김일성은 곧 통일을 원했다.
분단은 그에게 미완의 권력이었다.
1949년부터 국지 충돌이 계속되었고, 그는 모스크바로 가 스탈린을 설득했다.
처음 스탈린은 고개를 저었다.
미국이 개입하면 감당할 수 없다는 이유였다.
그러나 1949년, 소련은 원자폭탄을 보유했고, 중국은 공산정권을 수립했다.
1950년 1월, 미국 국무장관 애치슨이 한국을 ‘방위선’에서 언급하지 않은 것이 결정타였다.
스탈린은 김일성의 계획에 조건부 승인을 내렸다.
“중국이 개입할 준비가 되어 있을 것.”
김일성은 곧 마오쩌둥을 찾아가 설득했다.
중국은 미국과 직접 충돌을 원치 않았지만, 혁명 정권의 위상을 강화하기 위해 결국 개입을 약속했다.
국제정치의 계산 속에서 전쟁의 불씨가 피워졌다.
1950년 6월 25일 새벽, 포성이 울렸다.
38선을 넘어 남진이 시작되었고, 서울은 나흘 만에 함락되었다.
주민들은 아기를 업고 강을 건넜고, 노인은 지게에 짐을 싣고 남쪽으로 걸었다.
“오늘 밤만 넘기면 집으로 돌아갈 수 있겠지.”
그 믿음은 끝내 거짓이 되었다.
인천상륙작전, 압록강 전투, 중국군 개입, 서울의 두 차례 함락.
북한 주민들도 예외가 아니었다.
젊은이들은 강제로 군대에 끌려갔고, 마을의 식량은 전선으로 빨려 들어갔다.
전쟁은 남과 북을 동시에 초토화했고, 주민들의 일상은 부서졌다.
정전협정 후에도 북한 주민의 고통은 끝나지 않았다.
학교에서는 매일 김일성 찬양을 외웠고, 인민반 회의에서는 이웃의 잘못을 고발해야 했다.
“동무, 어제 라디오에서 남조선 방송을 듣지 않았소?”
그 질문 하나에 이웃은 사라졌다.
연좌제가 집안을 옭아맸고, 성분제는 가족의 미래를 갈라놓았다.
아버지가 반역자로 몰리면 아들은 군에 갈 수 없었고, 딸은 대학에 가지 못했다.
주민들은 서로의 말을 의심했고, 웃음조차 함부로 나눌 수 없었다.
배급은 충성의 보상이었다.
충성은 식량으로 환산되었다.
배급이 끊기면, 사람들은 몰래 장마당에서 거래를 했다.
그러나 적발되면 ‘사상문제’로 수용소에 끌려갔다.
정치범수용소.
지도에도, 교과서에도 없는 곳.
그러나 증언과 위성사진은 산기슭 철조망과 감시탑을 보여준다.
거기에는 이름이 지워진 사람들이 있었다.
그들의 삶은 국가의 비밀이 되었고, 그 비밀은 두려움의 기둥이 되었다.
나는 이 대목에서 멈춰 서지 않을 수 없었다.
김일성이 세운 국가는 주민들의 고통 위에 세워진 성이었다.
성은 웅장했지만, 안에서 울려 퍼진 소리는 신음이었다.
그 신음을 듣지 못하거나 외면하는 순간, 우리는 진실을 잃는다.
1994년, 김일성은 죽었다.
그러나 주민들의 삶에서 그는 영원히 살아남았다.
헌법은 그를 ‘영원한 주석’으로 남겼고, 매일의 의식은 그를 되살렸다.
죽은 자가 산 자의 일과를 지휘하는 체제.
그 체제가 오늘까지 이어지고 있다.
그리고 2014년 12월, 뉴욕 UN 본부에서 한국인 외교관 오준 대사가 안보리 연단에 섰다.
그는 무거운 목소리로 이렇게 말했다.
“저는 무거운 마음으로 이 이야기를 하고자 합니다.
왜냐하면 한국인들에게 북한 주민은 그저 아무나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많은 한국인의 가족들과 친척들이 아직도 북한에 살고 있습니다.
우리가 그들의 소식을 전혀 듣지 못한다 하더라도,
비록 분단의 고통이 차가운 현실이 되었다 하더라도
우리는 우리가 살고 있는 곳에서 그저 수백 km 정도 떨어진 곳에
그들이 살고 있다는 것을 알고 있습니다.
북한 인권보고서에 묘사된 북한의 참상은 우리의 가슴을 아프게 하고,
북한 관련 동영상은 매순간 몸서리치지 않고서는 볼 수가 없습니다.
탈북자의 증언은 눈물 없이 들을 수 없고,
우리가 마치 그들의 비극을 함께 경험한 것 같은 느낌이 들게 합니다.”
나는 이 연설을 들으며 가슴이 서늘해졌다.
김일성의 이름으로 시작된 체제가 어떤 고통을 남겼는지,
그것은 국제사회가 아니라 우리 민족 모두의 상처였다.
북한 주민은 그저 ‘북한 사람들’이 아니라, 우리의 가족이었다.
분단은 국경을 그었지만, 그 국경은 피와 눈물까지 가르지 못했다.
김일성의 시대를 비판하는 일은 단순히 과거의 독재자를 평가하는 일이 아니다.
그것은 오늘도 살아 있는 주민들의 현실을 외면하지 않기 위한 기억의 작업이다.
기억은 장엄한 동상보다, 저녁의 빈 그릇에 더 오래 남는다.
그 빈 그릇을 기억하는 문장이 많아질수록, 그가 만든 체제는 더 빨리 낡아진다.
낡아진 방법은 언젠가 부서지고, 그 뒤에야 사람들은 고개를 들어 하늘을 본다.
그 하늘에는 더 이상 누구의 초상화도 걸려 있지 않다.
제 블로그의 인물편은 ‘한국 인물’과 ‘세계 인물’로 나뉘지만,
북한을 별도의 국가로 인정하고 싶지 않기에 김일성은 ‘한국 인물’ 카테고리에 포함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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