격동의 시대, 비운의 군주: 고려 3대왕 정종 이야기
프롤로그: 폭풍 전야의 고려
피의 숙청을 통해 왕위에 올랐으나, 평생을 두려움과 불안 속에서 살다 간 한 군주가 있었다.
그는 거대한 꿈을 꾸었지만 백성의 원성을 샀고, 하늘의 작은 경고에 스러져간 비운의 왕, 고려 제3대 국왕 정종(定宗)이다.
고려 건국의 위대한 군주 태조 왕건이 세상을 떠나자, 고려는 거대한 폭풍의 눈으로 빨려 들어갔다.
왕건이 남긴 수많은 왕자들과 그들을 뒷배로 둔 강력한 호족 세력들은 왕좌를 둘러싸고 숨 막히는 암투를 벌이기 시작했다.
왕권은 위태롭게 흔들렸고, 왕실은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 같았다.
정종 왕요(王堯)는 바로 이 격동의 시대 한복판에서 자신의 운명을 개척해야만 했다.
1. 피로 물든 용상으로 가는 길
왕자 왕요가 고려 3대 국왕 정종으로 즉위하기까지의 과정은 한 편의 잔혹한 정치 드라마였다.
그의 용상으로 가는 길은 동지와 정적의 피로 흥건히 물들어 있었다.
1.1. 흔들리는 고려와 왕자 왕요
2대 국왕 혜종(惠宗)의 시대, 고려의 왕권은 갓 태어난 아기처럼 위태로웠다.
혜종은 나주 오씨라는 비교적 약한 외가를 배경으로 두었기에, 개경의 호족들을 통제할 힘이 부족했다.
이때 왕위 계승 경쟁의 중심에 떠오른 인물이 바로 왕요였다.
그의 어머니는 충주의 막강한 호족 유긍달(劉兢達)의 딸인 신명순성왕태후로, 이는 그에게 든든한 정치적 자산이 되어주었다.
하지만 충주라는 지역적 기반만으로는 수도 개경의 복잡한 정치 구도를 장악하기 어려웠기에, 개경 내 그의 독자적인 기반은 미약했다.
자신의 힘만으로는 왕위에 오르기 힘들다고 판단한 왕요는 새로운 동맹을 찾아 나섰다.
1.2. 왕규의 난과 정적 제거
혜종 말년, 정국은 외척 왕규(王規)로 인해 극도의 혼란에 빠졌다.
왕규는 자신의 외손자를 왕위에 앉히려는 야심을 드러내며 혜종과 다른 왕자들을 위협했다.
바로 이때 왕요는 정치적 생명을 건 승부수를 던졌다.
개경에 기반이 약했던 그는 혜종의 남부 세력에 맞서기 위해, 북방의 막강한 두 세력, 즉 태조의 사촌 동생으로 서경(西京)에서 막강한 군사력을 장악한 왕식렴(王式廉)과 태조 시절부터 혁혁한 공을 세운 평산(平山)의 호족 박수경(朴守卿)과 손을 잡았다.
이는 고려 건국을 주도했던 북방 세력과의 전략적 연대였다.
945년, 혜종이 병석에 눕자 왕요는 왕식렴을 개경으로 불러들였다.
서경의 강력한 군대가 개경에 입성하자, 정국의 주도권은 순식간에 왕요에게 넘어왔다.
그는 왕식렴의 군사력을 이용해 혜종의 최측근이던 박술희(朴述熙)를 강화도로 유배 보낸 뒤 살해하고, 혜종이 사망하자마자 왕규와 그 일파 300여 명을 숙청했다.
이 피의 숙청에 대해 훗날 신하 최승로(崔承老)는 이렇게 기록했다.
혜종·정종·광종 세 임금이 왕위를 계승하던 초년에는 모든 일이 안정되지 못하여, 양경(兩京, 개경과 서경)의 문무 관리가 반이나 살상되었다.
정종의 즉위는 이처럼 수많은 이들의 희생 위에서 이루어진 것이었다.
이처럼 피비린내 나는 숙청 끝에 용상에 올랐지만, 그의 앞에는 왕권에 대한 끊임없는 도전과 스스로 저지른 살육에 대한 깊은 죄책감이라는 어두운 그림자가 드리워져 있었다.
2. 불안한 군주의 두 가지 승부수
용상에 앉았지만 정종의 마음은 하루도 편할 날이 없었다.
그는 즉위 과정의 피비린내 나는 기억과 취약한 왕권이라는 현실 속에서 끊임없이 흔들렸다.
이 불안감을 극복하기 위해 그는 두 가지 거대한 승부수를 던진다.
이는 군사적으로, 그리고 지리적으로 피로 얼룩진 수도 개경을 벗어나 자신만의 새로운 권력 기반을 구축하려는 절박한 시도였다.
2.1. 죄책감과 불심: 두려움에 기댄 왕
왕위에 오르는 과정에서 벌어진 끔찍한 살상은 정종의 평생을 짓누르는 심리적 굴레가 되었다.
『고려사』가 그를 '불교를 좋아하고 두려움이 많았다'고 평가한 것은 바로 이 지점에서 출발한다.
그의 깊은 신앙심은 살육에 대한 죄책감을 씻고, 그로 인한 극심한 불안감과 망상에서 벗어나려는 필사적인 몸부림이었다.
어느 날 저녁, 태조의 능에서 제사를 지내던 그는 소나무 숲에서 자신의 이름을 부르는 환청을 듣고 이를 하늘의 소리로 여겼다.
또 마른하늘에 천둥(天鼓)이 치자, 자신의 잘못에 대한 하늘의 견책으로 여기고 즉시 죄수들을 사면하기도 했다.
그는 직접 의장대를 이끌고 부처의 사리(舍利)를 봉안하기 위해 10리 길을 걸어 개국사(開國寺)까지 갔으며, 곡식 7만 석이라는 막대한 재산을 여러 사찰에 시주하여 불명경보(佛名經寶)와 광학보(廣學寶)를 설치하게 하는 등 불심에 깊이 의지했다.
정종에게 불교는 단순한 종교가 아니라, 피 묻은 손을 씻고 불안한 마음을 달래줄 유일한 안식처였던 셈이다.
2.2. 국방 강화와 왕권 안정: 광군 30만 양성
정종은 밖으로는 거란의 위협에 대비하고, 안으로는 호족들을 통제하기 위해 '광군(光軍)'이라는 이름의 대규모 군대를 조직했다.
이 정책에는 두 가지 목적이 숨어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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표면적 목표 (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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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속내 (왕권 강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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후진(後晉)에 갔다가 거란에 포로로 잡혔던 최광윤(崔光胤)이 "거란이
장차 고려를 침략할 것"이라고 보고한 것에 대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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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국의 지방 호족들을 '광군사(光軍司)'라는 중앙 군사 기구 아래
편입시켜 그들의 군사력을 통제하고 왕권을 강화하려는 시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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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군 30만 양성은 북방의 위협에 대응하는 국방 강화책인 동시에, 각 지역에 흩어져 있던 호족들의 힘을 중앙으로 흡수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계산이 깔린 정책이었다.
2.3. 새로운 시작을 꿈꾸다: 서경 천도 계획
정종이 추진했던 가장 야심 찬 계획은 수도를 개경에서 서경(西京, 現 평양)으로 옮기는 것이었다.
이는 군사적 기반인 광군 조직과 더불어, 자신의 모든 정치적·심리적 불안을 해결하려는 거대 전략의 핵심이었다.
정종의 서경 천도 계획은 단순한 수도 이전이 아니었다.
그 이면에는 즉위 공신 왕식렴과 서경 세력에 보답하려는 정치적 계산과, '왕업만대(王業萬代)'의 길지라는 풍수 도참설에 대한 맹신, 그리고 무엇보다 피로 얼룩진 개경을 벗어나고자 하는 군주의 절박한 심리가 복합적으로 얽혀 있었다.
그는 자신의 정치적 고향과도 같은 서경에 독자적인 기반을 구축함으로써, 개경의 호족 세력으로부터 완벽히 벗어나고자 했다.
국방을 다지고 새로운 도읍을 꿈꿨던 정종의 야심 찬 계획들은 그러나, 개경 세력의 거대한 저항에 부딪히며 비극의 서막을 열고 있었다.
3. 무너지는 꿈과 갑작스러운 죽음
왕권 강화를 위한 정종의 야심 찬 계획들은 거대한 저항의 벽에 부딪혔다.
그의 꿈은 서서히 무너져 내렸고, 이는 그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이어졌다.
3.1. 민심을 잃은 천도 사업
서경 천도는 시작부터 삐걱거렸다.
개경의 귀족들은 기득권을 잃을까 두려워 격렬히 반발했다.
더 심각한 문제는 백성들의 원성이었다.
개경의 백성들을 강제로 서경으로 이주시키고, 쉴 새 없이 백성들을 징발하여 궁궐과 성을 쌓게 하니 노역이 그칠 날이 없었다.
백성들의 원망과 비방은 하늘을 찔렀다.
『고려사』는 정종이 죽었다는 소식이 전해지자 공사장에 끌려왔던 인부들이 "기뻐서 날뛰었다"고 기록할 정도로 당시 민심 이반은 극에 달해 있었다.
3.2. 하늘의 경고와 꺾인 의지
948년 9월, 정종은 동여진족이 바친 말 700필과 토산물을 받기 위해 천덕전(天德殿)에 나섰다.
그때, 갑자기 하늘에서 벼락이 내리쳐 궁궐의 서쪽 모퉁이를 내리쳤다.
평소 하늘의 견책을 두려워하던 정종은 이 광경에 크게 놀라 경기를 일으켰고, 그대로 병석에 눕고 말았다.
즉위 과정의 살육과 무리한 천도 사업으로 쌓인 죄책감과 불안감이 한순간의 벼락 소리에 폭발하며 그의 심신을 무너뜨린 것이다.
3.3. 마지막 버팀목의 상실과 죽음
병상에 누운 정종에게 결정타가 된 사건은 949년 정월에 찾아왔다.
그의 가장 강력한 정치적 후원자이자 버팀목이었던 왕식렴의 죽음이었다.
왕식렴의 죽음은 정종의 핵심 지지 기반이 완전히 무너졌음을 의미했다.
정치적으로 완벽히 고립된 정종은 병세가 급격히 위독해졌다.
죽음을 예감한 그는 자신의 동복동생인 왕소(王昭, 훗날 광종)를 불러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리고 불과 27세의 젊은 나이로 제석원(帝釋院)에서 쓸쓸히 생을 마감했다.
거대한 꿈은 좌절되고 심신이 쇠약해진 정종은 역사의 무대에서 쓸쓸히 퇴장했지만, 그가 남긴 마지막 선택은 고려 역사에 또 다른 거대한 파장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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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안릉 전경 |
4. 정종의 유산과 비극적 결말
정종의 짧았던 4년간의 치세는 고려 역사에 깊은 상처와 아이러니를 남겼다.
4.1. 역사가들의 평가
정종에 대한 평가는 긍정과 부정이 엇갈린다.
고려의 명신 최승로는 즉위 초 정종이 밤낮으로 부지런히 정사에 힘써 사람들이 모두 기뻐할 만큼 근면했다고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그러나 도참설을 그릇되게 믿어 무리하게 서경 천도를 추진하다 백성들의 원망을 사고 결국 뜻을 이루지 못한 채 세상을 떠난 것은 참으로 통탄할 만한 일이라고 비판하며 그의 양면적인 모습을 보여주었다.
한편, 유학자 이제현은 정종이 불교에 지나치게 빠져 막대한 재물을 시주한 것을 비판하면서도, 왕위를 친아우에게 물려주어 왕규와 같은 외척이 다시 발호할 틈을 주지 않고 종사를 안정시킨 것은 높이 평가할 만한 일이라고 썼다.
4.2. 아들의 비극과 역사의 아이러니
정종은 왕실의 안정을 위해, 그리고 자신의 유일한 아들인 경춘원군(慶春院君)의 목숨을 지키기 위해 동생 광종에게 왕위를 물려주었다.
그러나 역사는 그의 바람을 처참히 배신했다.
훗날 강력한 왕권을 구축하며 피의 숙청을 단행한 광종은, 자신의 조카이자 정종의 유일한 혈육이었던 경춘원군을 결국 처형하고 만다.
왕실의 안정을 위해 모든 것을 내려놓았던 정종의 마지막 선택은 결국 아들의 비참한 죽음으로 귀결되었다.
그는 격동의 시대 속에서 왕좌는 지켰을지언정, 자신의 혈육 하나 지켜내지 못한 비운의 군주로 역사에 남게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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