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조 왕건 대서사: 용의 비늘
혼돈의 바다, 호족의 아들
멸망의 황혼: 아홉 산 아래의 아비규환
시대는 서기 9세기 후반.
신라(新羅)의 수도 금성(金城, 지금의 경주)은 여전히 허울뿐인 황금빛을 자랑했지만, 그 이면은 붕괴 직전의 모래성이었다.
중앙 귀족들의 사치와 권력 투쟁은 극에 달했고, 지방은 이미 왕실의 통제력을 완전히 벗어난 무법지대였다.
이것이 바로 피로 물든 후삼국시대(後三國時代)의 서막이었다.
경주에서 수백 킬로미터 떨어진 서해안,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 근처.
황폐해진 들판에는 굶주린 농민들이 헐벗고 쓰러져 있었고, 그들 위로는 도적 떼와 반란군의 깃발이 검은 그림자를 드리웠다.
중앙 정부의 마지막 발악인 조세 징수는 명목상만 남았을 뿐, 지방민들에게는 이미 생지옥이었다.
신라 하대의 혼란은 극에 달해, 백성들은 왕실 대신 자신들을 먹여 살려 줄 새로운 리더를 갈망하고 있었다.
이러한 격변의 시대 속에서, 지방 호족(地方豪族, 지방의 군사력과 경제력을 갖춘 실력자)들이 마치 어둠 속의 별처럼 떠오르기 시작했다.
이들은 중앙의 허약한 권위를 비웃으며, 자신들의 성곽(城郭)과 군대, 그리고 경제력을 바탕으로 '작은 왕국'을 건설했다.
후삼국 통일의 씨앗은 바로 이 호족들의 경쟁과 협력 속에서 뿌려졌다.
왕건의 탄생: 용의 뱃길을 걷다
송악 일대의 가장 강력하고 부유한 호족 중 하나는 바로 왕건(王建)의 아버지, 왕륭(王隆)이었다.
왕륭은 단순히 땅을 가진 토호(土豪)가 아니었다.
그는 해상 무역(海上貿易)을 통해 엄청난 부를 축적한 당대 최고의 해상왕(海上王) 중 한 명이었다.
송악(개성)은 예부터 예성강(禮成江)을 통해 멀리 당나라(唐, 중국)와 교역이 활발했던 국제적인 무역항이었다.
왕륭은 이 지리적 이점을 십분 활용하여, 비단, 도자기, 철기 등을 수입하고 고려인삼(高麗人蔘) 등을 수출하며 군자금을 마련했다.
왕륭의 부는 단순한 재산을 넘어, 무역로를 지키는 사병(私兵)의 힘과 각지의 호족들과 맺은 네트워크를 의미했다.
왕건은 이러한 풍요롭고 개방적인 환경에서 태어났다.
그의 이름 '왕건'은 '나라를 세운다'는 의미를 내포하고 있어, 이미 태어날 때부터 범상치 않은 운명을 예고한 듯했다.
(전승) 왕건의 어머니인 한씨(韓氏)는 개성(開城) 근처의 부잣집 딸이었는데, 왕륭은 그에게 '용이 구름을 타고 내려오는 꿈'을 꾼 뒤 낳았다고 한다.
이러한 신화적 탄생 배경은 훗날 그가 왕위에 오르는 정당성을 뒷받침하는 강력한 도구가 되었다.
왕건은 어린 시절부터 유학(儒學)과 경서를 익혔으나, 그의 주된 교육은 바다와 전쟁이었다.
그는 아버지의 배를 타고 예성강을 오르내리며 서해의 지형과 항해술에 통달했다.
이 경험은 훗날 그가 견훤(甄萱)의 후백제와 맞설 때 수군(水軍) 전략가로서의 능력을 발휘하는 결정적인 밑거름이 되었다.
무역상으로서 그는 이질적인 문화와 상인들을 상대하며 유연한 협상술과 뛰어난 친화력을 자연스럽게 익혔다.
왕건의 관용과 포용력은 단순히 타고난 성품이 아니라, 국제 무역상이라는 현실적인 환경에서 배운 생존 기술이었다.
왕륭은 아들에게 주변 호족들과의 관계를 가르쳤다. '피 한 방울 섞지 않고도 신뢰로 맺어진 관계가 무력보다 강하다'는 아버지의 가르침은 왕건의 결혼 정책(政略結婚)의 근간이 되었다.
![]() |
문화체육부에서 제작한 태조 왕건의 초상화 |
젊은 야심가: 혼인의 서막과 첫 번째 스캔들
왕건이 20대에 접어들었을 무렵, 그는 이미 송악 일대에서 가장 유망하고 능력 있는 청년 호족으로 이름이 높았다.
그의 뛰어난 외모와 호방한 성격은 주변 호족 가문의 딸들에게 큰 인기를 얻었다.
왕건의 첫 번째 부인은 유씨(柳氏)였다.
기록에 의하면 그녀는 개국 공신인 류금필(柳金弼)과 연관된 가문 출신이거나 혹은 왕륭의 가신 가문 출신으로 알려져 있다.
이 결혼은 왕건이 송악 주변의 군사적 동맹을 강화하고, 자신의 기반을 단단하게 다지는 첫걸음이었다.
(이야기 썰: 유부녀 스캔들 논란)왕건의 사생활에 대한 후대의 기록과 야사(野史)는 흥미로운 논란을 남긴다.
그중 하나는 그가 첫 번째 부인을 맞이하기 전 혹은 직후에 겪은 '유부녀 스캔들'에 대한 것이다.
이는 공식 기록에는 없으나, 민간 전승으로 떠돌던 이야기이다.
당시 사회적 배경상 정략결혼이 일반적이었으나, 왕건은 뛰어난 매력을 바탕으로 자유연애를 추구했다는 썰이 있다.
그가 어떤 호족의 부인(또는 이미 정혼한 여인)과 금단의 관계를 맺었다는 이야기가 퍼지면서, 왕륭이 이 문제 때문에 골치를 앓았다는 전승이 있다.
(논란) 이러한 썰들은 왕건의 인간적인 매력과 호방한 기질을 강조하며, 훗날 29명의 부인을 얻는 그의 여성 편력의 개연성을 부여하는 역할을 한다.
다만, 이러한 사적인 논란은 그가 공적인 업적을 세우기 전의 이야기로 치부되었다.
궁예의 등장: 카리스마의 그림자
서기 900년 무렵, 한 인물이 왕건의 운명을 결정적으로 바꿔놓았다.
바로 궁예(弓裔, 미륵을 자처한 새로운 왕)였다.
궁예는 신라 왕족의 후예로 태어났으나, '나라를 망하게 할 징조'를 타고났다는 이유로 버려졌다.
궁예는 태어날 때 '첫째 눈'이 아닌 '왼쪽 눈'을 잃은 채 태어났다는 잔혹한 비화가 전해진다.
그는 이후 승려가 되었으나, 혼란한 세상을 구원하겠다는 정치적 야심을 품고 반란군의 대열에 합류했다.
궁예는 파죽지세로 세력을 키워 양길(梁吉, 강원도 지역의 대 호족)의 휘하에서 독립한 후, 스스로 왕을 칭하기 시작했다.
그의 미륵불(彌勒佛) 신앙을 내세운 종교적 카리스마는 신라 왕조에 절망한 지방민과 하층민들에게 열광적인 지지를 받았다.
궁예의 혁명은 단순한 무력 봉기가 아니라, 정신적 구원을 약속하는 종교적 운동에 가까웠다.
왕륭(王隆)은 자신의 영역인 송악이 궁예의 세력권과 충돌하게 될 것임을 직감했다.
당시 궁예의 기세는 너무나 맹렬하여, 힘으로 저항하는 것은 자멸을 의미했다.
왕륭은 그의 정치적 지혜와 상인의 현실주의를 발휘하여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그는 천명을 받은 자이다. 저항해서는 안 된다. 우리는 그를 맞이해야 한다.”
896년, 왕륭은 아들 왕건과 함께 송악의 성문을 열고 궁예에게 항복했다.
이 항복은 단순한 굴복이 아니라, 송악이라는 전략적 요충지와 왕륭의 막대한 경제력을 궁예의 군대에 통째로 넘겨주는 전략적 투자였다.
왕건은 이때 궁예의 휘하에 들어가 철저히 자신을 낮추고 충성을 맹세했다.
그는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 훗날 고려 개국 공신이 될 젊은 인재들과 함께 궁예의 측근으로 발탁되었다.
![]() |
궁예 표준영정 |
왕건의 포부: 첫 번째 시험대
궁예는 왕륭의 경제력과 왕건의 군사적 재능을 높이 평가하여, 왕건에게 송악 인근의 군사 책임자인 철원 방면의 군사 책임(태수 격)의 직책을 맡겼다.
이는 왕건에게 독립적인 군사 행동을 할 수 있는 첫 번째 기회였다.
(논란)궁예는 자신의 운명을 믿는 카리스마의 소유자였으나, 동시에 극도의 편집증을 가지고 있었다.
그는 왕건의 재능을 인정하면서도, 해상 세력과 호족 네트워크를 가진 왕건의 배경을 경계했을 것이다.
(썰/논란) 당시 궁예는 자신의 왕조 창업에 필요한 금과 물자를 왕륭에게 강력하게 요구했다는 이야기가 많다.
왕건은 궁예의 끊임없는 요구를 충족시키면서도, 궁예의 심기를 거스르지 않기 위해 겸손과 철저한 복종으로 일관했다.
왕건이 궁예에게 보인 철저한 순응은 훗날 그가 쿠데타(정변)를 일으켰을 때 배신자라는 비난을 받지 않기 위한 치밀한 포석이었다는 정치적 해석도 존재한다.
왕건은 자신의 아버지에게 배웠던 '바다'를 무기로, 궁예의 통일 전쟁에 결정적인 기여를 시작했다.
그의 첫 번째 목표는 금강(錦江) 유역을 장악하고 있던 후백제(後百濟)의 견훤(甄萱) 세력을 해상에서부터 압박하는 것이었다.
피의 바다, 나주와 미륵의 그림자
전설의 시작: 나주(羅州) 점령과 해상왕의 재능
왕건(王建)이 궁예(弓裔)의 휘하에 들어간 후, 그의 군사적 재능은 감춰지지 않았다.
궁예는 그에게 서남해안(西南海岸)을 장악하고 있던 숙적, 견훤(甄萱)의 후백제(後百濟)를 치도록 명령했다.
이는 왕건에게 송악 호족이라는 한계를 넘어, 태봉(泰封, 궁예가 세운 나라)의 핵심 군사 리더로 도약할 수 있는 결정적인 시험대였다.
903년, 왕건은 수군(水軍, 해군)을 이끌고 후백제의 심장부와도 같은 나주(羅州, 지금의 전남 나주)를 향해 진격했다.
당시 나주는 영산강(榮山江) 유역을 끼고 있어 후백제의 곡창지대이자 견훤 세력의 가장 중요한 경제적 거점이었다.
이곳을 점령한다는 것은 견훤의 숨통을 끊는 것과 마찬가지였다.
왕건은 아버지 왕륭(王隆)에게서 배운 해상 지식을 십분 활용했다.
그는 육지를 통한 정공법 대신, 서해를 돌아 나주만으로 진입하는 기습 작전을 감행했다.
후백제군은 육지 방어에만 집중하고 있었기에, 예상치 못한 바다공격에 속수무책이었다.
왕건은 나주를 점령하는 데 성공했으며, 이는 후삼국 통일 전쟁의 최초이자 가장 중요한 전략적 승리로 기록된다.
이 승리로 인해 태봉은 서남해안의 제해권(制海權)을 장악했고, 후백제는 내륙으로 고립되는 치명적인 타격을 입었다.
나주 전투는 왕건을 궁예 왕조의 '전쟁 영웅'이자, 견훤이 가장 두려워하는 '전략가'로 만들었다.
궁예는 승리에 도취되어 왕건에게 고위 관직(파진찬 등으로 기록됨)이라는 높은 관직과 대장군의 칭호를 내렸다.
왕건은 이제 궁예의 측근 중에서도 군사적으로는 의심할 여지 없는 1인자로 우뚝 섰다.
![]() |
889년 ~ 936년 후삼국시대 지도 |
정략결혼의 비극: 장화왕후와 오다련(吳多憐)
나주 점령은 왕건의 정치적 결혼 전략의 본격적인 서막을 열었다.
왕건은 29명의 부인을 두었는데, 이는 단순히 호색(好色) 때문이 아니라, 호족(豪族)들의 군사력과 토지를 '피'로 묶어 새로운 국가의 기반을 다지기 위한 극도의 정략적 행위였다.
나주 점령 직후, 왕건은 나주의 유력 호족인 오다련(吳多憐, 또는 오씨)의 딸을 아내로 맞았다.
이 여인이 바로 훗날 장화왕후(莊和王后)가 되는 인물이다.
이 결혼은 나주가 다시 후백제에게 넘어가는 것을 막기 위한 가장 강력한 정치적 보험이었다.
사돈 관계를 통해 나주 호족들의 충성심을 영원히 확보하려 한 것이다.
장화왕후는 훗날 고려 2대 왕인 혜종(惠宗)을 낳았음에도 불구하고, 그녀의 가문이 중앙 귀족이 아닌 지방 호족이었기 때문에 왕실 내부에서 심한 차별과 견제를 받았다. (고려 제2왕후) (첫째 부인으로는 정주(貞州) 출신 호족 류천궁의 딸, 신혜왕후 류씨)
혜종이 재위 기간 내내 왕위 계승 다툼에 시달린 이유도 바로 어머니의 낮은 외척 기반 때문이었다는 비극적인 해석이 지배적이다.
이후 왕건은 금성(경주의 별칭과 다른, 나주의 별칭 금성) 오씨(吳氏) 가문, 정주(貞州, 개풍)의 유씨(劉氏) 가문 등 전략적 요충지의 유력 호족들과 연달아 혼인했다.
이처럼 왕건의 29 부인은 29개의 군사 요새이자 29개의 정치적 동맹을 의미했다.
이러한 문어발식 결혼은 훗날 왕위 계승 다툼이라는 고려 왕실의 고질병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과실이 되었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미륵의 숭배: 태봉(泰封)의 절정
서기 904년, 궁예는 자신의 국가 이름을 마진(摩震)으로 바꾸고, 수도를 철원(鐵原, 지금의 철원/포천 일대)으로 옮겼다.
이후 911년에는 국호를 다시 태봉(泰封)으로 바꾸며 18년에 걸친 새로운 왕조를 구축했다.
궁예는 여전히 미륵불(彌勒佛)을 자처하며 백성들에게 구원과 평등을 약속했다.
그의 강력한 종교적 카리스마는 신라 하대의 억압받던 농민과 하층민들에게 절대적인 지지를 받았다.
그는 철원에 호화로운 궁궐을 짓고, 신라의 귀족 문화를 거부하는 새로운 정신을 주입하려 했다.
궁예는 자신을 세상을 구원할 미륵으로 포장하는 과정에서, 정치와 종교를 완벽하게 일치시켰다.
이는 새로운 시대의 정신적 지도자가 되려는 시도였으나, 권력과 종교적 신념의 결합은 폭정이라는 치명적인 결함을 낳았다.
궁예의 통치 후반부는 극도의 편집증과 폭력성으로 얼룩지기 시작했다.
그는 자신의 권위에 도전하는 어떤 세력도 용납하지 않았다.
특히 송악(왕건의 본거지)과 철원(태봉의 수도)을 오가며 최고의 명성을 쌓아가는 왕건을 향한 의심은 하루가 다르게 커져갔다.
궁예는 자신이 모든 사람의 속마음을 꿰뚫어 볼 수 있다는 '관심법(觀心法, 마음을 살피는 법)'을 주장했다.
“짐(朕)은 미륵이니, 너희들의 마음속에 무슨 생각이 있는지 모두 알고 있다! 나를 배신할 마음을 품은 자는 결코 숨을 수 없을 것이다!”
이 관심법은 신하들을 공포에 떨게 만들었다.
사소한 표정 변화나 말실수 하나만으로도 역모(逆謀)로 몰려 잔혹하게 처형되었기 때문이다.
궁예의 조정은 충성심이 아닌 공포로 유지되는 지옥으로 변해갔다.
![]() |
관심법 궁예 |
피의 숙청: 궁예의 폭정과 왕건의 위기
서기 915년 이후, 궁예의 폭정은 걷잡을 수 없이 심해졌다.
그는 자신의 아내(강씨 부인)와 두 아들마저 반역죄로 몰아 잔혹하게 살해하는 패륜적인 숙청을 저질렀다.
강씨 부인은 궁예의 사치와 무분별한 살생을 비판했는데, 궁예는 오히려 "네가 다른 사람과 간통하고 내 아들을 해치려 한다"는 거짓 역모를 씌워 쇠꼬챙이로 그녀를 지져 죽였다.
이 사건은 태봉의 모든 신하들에게 충격과 공포를 안겨주었다.
궁예는 인간적인 관계마저 권력의 도구로 파괴하는 폭군으로 완전히 변모했다.
이러한 피의 숙청 속에서 왕건은 최대 위기에 직면했다.
궁예는 왕건에게도 관심법을 들이대며 시험했다.
"경(卿, 신하를 높여 부르는 말)의 마음속에 '새로운 왕'이 되고 싶은 마음이 있지 않느냐? 솔직히 고하라!"
이 살얼음판 같은 질문에 왕건은 오직 겸손으로 맞섰다.
"신(臣)은 미륵이신 폐하를 영원히 섬길 뿐이옵니다. 만약 저에게 역심(逆心, 반역하려는 마음)이 있었다면, 이미 폐하의 관심법에 의해 죽었을 것입니다. 신의 충성심을 믿어주십시오."
왕건은 두려움 속에서도 겸손한 태도와 철저한 복종으로 궁예의 의심을 잠재웠다.
이 시기 왕건의 순응적인 태도는 비판의 대상이 되기도 한다.
궁예의 악행을 알면서도 자신의 목숨과 미래의 대의를 위해 침묵하고 방관했다는 것이다.
그러나 왕건에게는 아직 궁예를 넘어설 만한 군사적 정당성과 명분이 부족했고, 이는 '때를 기다리는' 정치인의 냉정함이었다는 평가가 우세하다.
최후의 결단: 역성혁명(易姓革命)의 명분
궁예의 폭정이 절정에 달했을 때, 태봉의 창업 공신들은 더 이상 현실을 외면할 수 없었다.
그들이 목숨을 걸고 따랐던 왕은 이제 백성을 수탈하고 신하를 학살하는 광인(狂人)이 되어 있었다.
배현경(裵玄慶), 홍유(洪儒), 신숭겸(申崇謙), 복지겸(卜智謙) 등 태봉의 네 명의 핵심 공신들은 은밀히 모여 궁예를 몰아내고 새로운 왕을 옹립하는 역성혁명(易姓革命, 왕조의 성씨를 바꾸는 혁명)을 계획했다.
이들은 궁예와 함께 죽을 고생을 했지만, 궁예의 폭정으로 인해 자신들의 목숨과 백성의 삶이 위태로움을 직감했다.
신숭겸: 용맹함의 상징.
배현경: 궁예 초기부터 함께한 맹우(盟友).
홍유: 왕건의 동향이자 든든한 군사적 지지자.
복지겸: 뛰어난 지략가.
이들은 궁예를 대신할 수 있는 유일한 인물로 왕건을 지목했다.
왕건은 이미 나주 전투를 통해 군사적 능력을 입증했고, 송악이라는 강력한 경제적 기반을 가지고 있었으며, 무엇보다 신하들에게 관대하고 백성에게 덕망이 높았다.
서기 918년, 장마가 쏟아지던 어느 밤.
네 공신은 왕건의 저택으로 찾아가 무릎을 꿇고 왕위에 오를 것을 간청했다.
그러나 왕건은 단호히 거절했다.
"아니 된다. 궁예 폐하는 나의 군주이시다. 나는 그분의 신하로서 최고의 명예를 누렸다. 설령 그분이 폭정을 휘두르신다 해도, 신하로서 군주를 배신하는 것은 천하의 대죄(大罪)이다. 나는 불의한 일을 할 수 없다!"
왕건의 거부는 진심이었다.
그는 배신이라는 오명을 극도로 피하고 싶어 했으며, 궁예에게 사적인 충성심도 남아 있었다.
하지만 공신들은 왕건의 도덕적 고뇌를 이해했지만, 시대의 요청과 궁예의 마지막 광기가 이미 임박했음을 알았다.
공신들은 "백성의 생명과 하늘의 뜻이 먼저"라며 왕건에게 칼과 갑옷을 바쳤다.
이때, 궁예의 마지막 명령이 왕건의 저택에 전달되었다.
궁예가 왕건이 역심을 품었다는 무고(誣告)를 믿고, 내일 아침 왕건을 소환하여 관심법으로 심판하겠다는 것이었다.
왕건은 이제 선택해야 했다.
궁예에게 순응하여 죽음을 맞이할 것인가, 아니면 천하의 대죄인이 되어 혁명의 피를 뒤집어쓰고 새로운 왕조를 세울 것인가.
운명의 칼자루가 그의 손에 쥐어졌다.
솥 발의 균형, 호족 통합의 난제
피의 정변: 운명의 칼자루를 잡다
서기 918년 여름, 궁예(弓裔)의 마지막 광기가 왕건(王建)의 목을 겨냥했을 때, 역사는 숙명의 밤을 맞이했다.
배현경(裵玄慶), 신숭겸(申崇謙), 홍유(洪儒), 복지겸(卜智謙) 등 네 명의 창업 공신들은 철저히 거부하던 왕건을 설득했다.
그들은 '궁예에게 죽느니 혁명으로 살라'는 최후의 논리를 들이밀었다.
공신들은 왕건에게 황포(黃袍, 황제가 입는 옷)를 입히고 왕위에 오를 것을 강권했다.
왕건은 '도덕적 대죄'를 피하기 위해 마지막까지 거절하는 모습을 보였다.
이는 단순히 겸양(謙讓)이 아니라, 훗날 배신자라는 비난을 피하고 역성혁명(易姓革命)의 정당성을 확보하기 위한 정치적 연극이었다는 냉정한 해석이 지배적이다.
(논쟁)결국 공신들은 '하늘의 뜻(天命)'이 왕건에게 있음을 주장하며, 궁예의 폭정으로부터 백성을 구하는 것이야말로 대도(大道)임을 설파했다.
궁예의 측근 중 하나였던 염상(廉湘)마저 왕건에게 합류하면서 정변은 돌이킬 수 없는 흐름이 되었다.
공신들은 즉시 궁예의 폭정에 지친 군사들을 이끌고 철원(鐵原) 궁궐로 들이닥쳤다.
궁예는 자신이 미륵이기에 반란이 일어날 수 없다고 믿었으나, 왕건의 군대가 궁궐을 포위하자 공포에 질렸다.
그는 승려 복장으로 변장하여 궁궐을 탈출했으나, 철원 북쪽의 산골짜기에서 백성들의 손에 의해 비참하게 살해당했다.
궁예의 최후는 그가 평생 숭배를 요구했던 백성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역사의 아이러니였다.
그는 왕건에게 철원, 군사, 통치 기반 등 모든 것을 물려주었지만, 잔혹한 폭정이라는 결정적인 과실 때문에 스스로 멸망을 자초했다.
왕건의 정변은 궁예의 몰락이라는 시대적 요구와 완벽하게 맞아떨어진 성공적인 쿠데타였다.
고려(高麗) 건국: 새로운 비전의 선포
서기 918년 7월, 왕건은 새로운 왕조를 열고 국호를 고려(高麗)라 선포했다.
'고려'라는 이름은 고구려(高句麗)의 '고'를 딴 것으로, 고구려 계승 의식을 천명하며 민족적 통합과 옛 영토 회복이라는 웅장한 비전을 담고 있었다.
왕건은 궁예가 미륵 신앙의 중심지로 삼았던 철원을 버리고, 자신의 근거지이자 해상 무역의 중심지였던 송악(松嶽, 지금의 개성)으로 천도(遷都)했다.
이 천도는 궁예의 폭정과 옛 시대와의 단절을 상징하며, 해상 세력의 힘과 개방성을 바탕으로 새로운 국가를 건설하겠다는 왕건의 의지를 대내외에 천명한 것이었다.
왕건은 즉위 후, 궁예의 공포 정치와는 완전히 다른 통치 철학을 펼쳤다.
궁예에게 충성했던 신하들이나 태봉 시대의 잔존 세력에 대해 관대한 정책을 펼쳐 화합을 도모했다.
불교(佛敎)와 유교(儒敎)를 모두 포용하여 도덕적인 통치를 강조했다.
궁예가 개인적 신앙을 강요한 것과 달리, 왕건은 국가 차원의 종교로서 불교를 진흥했다.
후대 고려 시대에 불교 문화가 크게 융성하게 된 배경이다.
조세(租稅) 부담을 줄여 백성들의 삶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 |
고려 정궁 모형 |
호족 통합의 난제: 솥 발의 균형 (Scandal & Crisis)
고려 건국은 왕건의 승리였지만, 동시에 왕건의 가장 큰 과제를 안겼다.
고려는 왕건 개인의 힘이 아닌, 수많은 지방 호족들의 연합으로 세워진 국가였다.
이 호족들의 권력 투쟁과 견제는 태조 왕건의 재위 기간 내내 그림자처럼 따라다닌 고질적인 난제였다.
왕건은 29명의 부인을 두었다.
이 다수의 결혼은 각 지역 호족들의 딸을 왕비로 맞아들여, 그들의 군사력과 재력을 왕실의 울타리 안에 묶어두려는 고도의 정치 전략이었다.
왕건은 이들을 '부인' 대신 '삼한공신(三韓功臣)'으로 대우했다는 썰도 있다.
하지만 이 정책은 단기적인 안정을 가져왔을지언정, 장기적으로는 최악의 과실이 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29명의 부인이 낳은 수십 명의 왕자들은 서로 다른 외척 세력을 배경으로 삼아 왕위 계승 전쟁(王位繼承戰爭)을 벌였다.
고려 초기의 피의 숙청과 정변의 근본적인 원인은 태조 왕건의 이 문어발식 혼인 정책에 있었다.
왕건은 포용을 우선했지만, 왕권에 도전하는 강력한 호족들에 대해서는 단호한 숙청도 불사했다.
박술희(朴述熙)의 견제: 박술희와 같은 개국 공신들은 왕건에게 신하들의 기강을 잡고 왕권을 강화할 것을 끊임없이 요구했다.
왕건은 초기에는 호족들의 자치권을 인정했으나, 시간이 갈수록 중앙 집권화를 위한 견제 장치를 마련해야 했다.
호족의 반란: 웅주(熊州, 공주 지역)의 호족인 공직(功直) 등은 왕건의 통치에 반발하여 독립적인 행동을 취했다.
왕건은 이들을 무력으로 진압하며, '덕치' 아래에 '무력'이 있음을 명확히 보여주었다.
왕건은 마치 '세 개의 솥 발(三足鼎立)' 위에 앉아있는 왕처럼, 왕권, 창업 공신들, 그리고 지방 호족들 사이의 위험한 균형을 평생 유지해야 했다.
라이벌의 절정: 견훤(甄萱)과의 명운
왕건에게 궁예의 몰락이 내부적 승리였다면, 견훤은 외부적 승리를 위한 영원한 라이벌이자 최대의 적이었다.
후삼국 통일 전쟁은 곧 왕건과 견훤 두 영웅의 숙명적인 대결이었다.
견훤(甄萱, 후백제 왕)은 왕건이 궁예를 몰아내고 왕이 되었다는 소식에 분노했다.
그는 왕건을 배신자로 규정하고 복수와 천하 통일의 야심을 불태웠다.
927년, 후백제는 신라의 수도 금성(경주)을 기습 공격했다.
신라 경애왕(景哀王)은 견훤에게 참혹하게 살해당했고, 신라의 명운은 끝났다.
이 소식을 들은 왕건은 구원병을 이끌고 신라로 급히 향했다.
이때 벌어진 것이 후삼국 전쟁사에서 가장 참혹한 전투 중 하나인 공산 전투(公山戰鬪, 지금의 대구 팔공산)였다.
그러나 왕건은 견훤의 매복에 걸려들어 완벽한 패배를 당했다.
고려군은 대패했고, 왕건은 전사 직전의 위기에 몰렸다.
이때 왕건의 가장 용감한 맹장, 신숭겸(申崇謙)이 왕건의 갑옷을 대신 입고 왕건 행세를 하며 적진으로 뛰어들었다.
견훤군은 신숭겸을 왕건으로 오인하고 그를 잔혹하게 살해했다.
신숭겸의 영웅적인 희생 덕분에 왕건은 목숨을 건지고 탈출할 수 있었다.
(야사,전승) 신숭겸의 시신은 머리가 없어 왕건이 금으로 만든 머리를 넣어 장례를 치렀다고 한다.
이 전투는 왕건에게 가장 뼈아픈 패배이자, 신하들의 충성을 깨닫게 해준 인생의 전환점이었다.
![]() |
공산 전투 신숭겸과 왕건 |
전쟁의 장기화: 고창 전투와 후삼국의 균형
공산 전투의 참패는 고려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지만, 왕건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신숭겸의 희생을 잊지 않고 철저한 복수를 준비했다.
930년, 왕건은 견훤과 고창(高敞, 지금의 안동)에서 다시 맞붙었다.
왕건은 공산 전투의 실패를 교훈 삼아, 호족들의 결속력과 해상 보급로를 활용한 치밀한 전략을 펼쳤다.
이 전투에서 왕건은 견훤에게 결정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고려군은 후백제군을 궤멸시켰고, 견훤은 간신히 목숨을 건져 도망쳤다.
고창 전투는 왕건에게 공산 전투의 굴욕을 씻어주는 통쾌한 복수였으며, 후삼국의 균형추를 고려 쪽으로 완전히 기울게 만든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신라의 많은 호족들이 이때부터 고려로 귀부(歸附)하기 시작했다.
견훤은 뛰어난 무력과 강력한 추진력을 가진 영웅이었으나, 왕건만큼 정치적 포용력과 전략적 유연성을 갖추지 못했다는 비판이 많다.
잔인성: 신라 왕을 잔혹하게 살해한 패륜적인 행위는 신라 백성들에게 공포와 반감을 안겨주어, 고려가 신라의 정통성을 계승하는 명분을 제공했다.
이것이 견훤의 가장 큰 과실이었다.
내부 갈등: 견훤은 후계자 문제를 깔끔하게 처리하지 못하고 내부 분란을 키웠다.
이는 훗날 그의 몰락을 초래하는 결정적인 약점이 된다.
왕건은 견훤과의 길고 긴 대결을 통해 무력뿐만 아니라 덕(德)과 정치적 명분이 천하 통일에 더 중요하다는 것을 체득했다.
삼한공신(三韓功臣)들과의 정략 결혼은 여전히 고려 왕실의 시한폭탄이었지만, 왕건은 이 시한폭탄을 안고 통일이라는 최종 목표를 향해 나아갔다.
![]() |
KBS드라마 "태조왕건"속 견훤 |
통일의 완성, 왕건의 과실과 유산
비극의 정점: 견훤(甄萱)의 마지막 선택
고창 전투(高敞戰鬪) 이후, 후백제(後百濟)의 운명은 이미 기울었다.
그러나 왕건(王建)에게 최종적인 승리를 안겨준 것은 고려군의 무력(武力)이 아닌, 숙적 견훤(甄萱)의 내부 붕괴라는 비극적인 아이러니였다.
견훤은 왕건의 다중 결혼만큼이나 후계자 문제에 큰 과실(過失)을 남겼다.
그에게는 10명이 넘는 아들이 있었는데, 견훤은 넷째 아들 금강(金剛)을 총애하여 그에게 왕위를 물려주려 했다.
금강은 용맹하고 지략이 뛰어나 견훤의 기대를 한 몸에 받았다.
그러나 이것이 후백제의 파국을 불러왔다.
장남 신검(神劍, 큰 칼이라는 뜻)은 금강이 왕위에 오르는 것을 참을 수 없었다.
935년, 신검은 동생들인 양검(良劍), 용검(龍劍) 등과 함께 쿠데타를 일으켰다.
이들은 금강을 잔혹하게 살해하고, 견훤을 금산사(金山寺, 전북 김제에 위치한 거대한 사찰)에 유폐(幽閉, 가두어 놓음)했다.
견훤은 금산사에 갇혀 자신의 피와 땀으로 세운 나라가 아들들의 손에 의해 파멸하는 것을 보았다.
왕좌를 위해 아들을 죽인 신검의 행위는 아버지의 모든 것을 부정하는 것이었다.
견훤은 신검에게 복수하기 위해 탈출을 감행했다.
왕년에 한 시대를 호령했던 노(老) 영웅이 승려의 복장을 하고 금산사의 담을 넘어 도망친 것이다.
견훤의 마지막 선택은 전국을 경악시켰다.
그는 후백제 대신 고려로 향했다.
왕건은 견훤을 진심으로 환대했다.
왕건은 견훤에게 상보(尙父, 황제의 아버지와 동등한 존칭)라는 극진한 예우를 베풀고, 남궁(南宮)에 머물게 했으며, 후히 식읍(봉토)을 내려 예우해주었다.
견훤은 이제 왕건의 가장 강력한 무기이자, 후백제를 무너뜨릴 결정적 명분이 되었다.
왕건은 숙적을 포용함으로써 자신의 덕치(德治)를 천하에 과시했고, 후백제에게는 신검이 역도(逆徒)임을 선포할 수 있었다.
평화적 통합: 신라(新羅)의 귀부(歸附)
견훤이 고려로 망명했다는 소식은 후삼국 전체를 뒤흔들었다.
특히 천 년 역사의 신라(新羅) 왕실은 이 사건을 시대의 대세로 받아들였다.
신라의 마지막 왕, 경순왕(景順王)은 이미 왕건과 견훤의 전쟁으로 인해 나라가 회복 불능의 상태에 빠졌음을 알고 있었다.
특히 견훤이 경애왕을 잔혹하게 살해한 과거와, 이제는 자신의 아들에게 버림받았다는 사실은 신라가 견훤에게 통치 정당성을 부여할 수 없음을 명확히 했다.
935년, 경순왕은 왕건에게 신라를 평화적으로 넘기겠다는 항복(降伏) 의사를 전했다.
신라의 왕실과 귀족들은 왕건의 관용을 믿고 자발적인 귀부(歸附)를 선택했다.
신라의 관리들은 통일 전쟁을 통한 피의 희생 대신, 고려 왕실의 일원으로 자신들의 기득권을 유지하는 현실적인 선택을 한 것이다.
왕건은 경순왕의 평화적 항복을 기뻐하며 극진하게 대우했다.
경순왕에게 정승(政丞)의 최고 관직과 경주(慶州) 일대를 식읍으로 주어 옛 왕실의 위신을 유지하도록 했다.
이 평화적 통합은 왕건이 견훤과는 달리 역사적 정통성과 덕치(德治)를 모두 갖춘 진정한 지도자임을 만천하에 선포하는 결정적인 사건이었다.
935년, 신라가 고려에 귀부함으로써 신라 천 년의 역사는 종말을 고하고, 고려의 통일이 사실상 완성되었다.
후삼국 통일: 최종 승리와 왕건의 마지막 전쟁
서기 936년, 왕건은 견훤을 앞세워 신검(神劍)이 이끄는 후백제의 잔존 세력을 최종적으로 토벌하기 위한 마지막 전쟁을 시작했다.
왕건이 이끄는 10만 대군과 신검의 후백제군은 일리천(一利川, 경북 구미 선산 일대)에서 맞붙었다.
이 전투는 후삼국의 운명을 결정하는 마지막 승부였으며, 전쟁의 규모와 참혹함이 가장 컸다.
왕건의 군대에는 견훤이 함께 있었다.
견훤은 왕건의 선봉장으로서 자신이 세운 나라의 왕인 신검을 공격하는 아이러니하고 비극적인 역할을 수행했다.
신검은 아버지에게 버림받고 숙적에게 이용당하는 자신의 처지에 절망하며 싸웠다.
일리천 전투는 고려의 완벽한 승리로 끝났다.
신검은 항복했고, 왕건은 마침내 삼한(三韓)의 천하를 하나로 통일했다.
통일 전쟁이 끝난 직후, 견훤은 화병을 이기지 못하고 쓸쓸하게 사망했다.
왕건에게 극진한 대우를 받았음에도, 자신의 손으로 세운 나라가 자신의 손에 의해 멸망하는 것을 본 노(老) 영웅의 비애는 치유될 수 없었다.
견훤의 죽음은 왕건이라는 새로운 별이 떠오르면서 후삼국시대의 모든 영웅들이 역사의 뒤편으로 사라졌음을 상징했다.
고려의 완성: 훈요십조(訓要十條)와 통치 철학
태조 왕건은 후삼국 통일(서기 936년) 후 7년을 더 재위하며 고려 왕조의 정신적, 정치적 기틀을 확립하는 데 전념했다.
그의 가장 중요한 통치 철학은 훈요십조(訓要十條)에 집약되어 있다.
훈요십조는 후대 왕들에게 남긴 열 가지의 간곡한 당부이자 국가의 설계도였다.
훈요십조의 핵심 내용
불교(佛敎) 숭상: 불력(佛力)에 의지하여 나라를 세웠으니, 사찰(寺刹)과 승려를 존중하고 연등회(燃燈會)와 팔관회(八關會)를 성대하게 열어라.
풍수지리(風水地理) 중시: 서경(西京, 지금의 평양)을 중시하고 매년 100일 이상 머물러 북진 정책(北進政策)의 기틀을 다져라.
지방 호족 포용과 견제: 호족(豪族)들의 권력을 존중하되, 그들의 권한이 왕권을 넘어설 경우 단호히 견제하라.
거란족(契丹族) 경계: 거란(契丹)은 금수(禽獸)와 같은 나라이니, 그들의 문물(文物)을 따르지 말고 옛 고구려의 영토 회복을 잊지 마라.
왕위 계승 원칙: 적자(嫡子, 본부인의 아들)에게 왕위를 계승하는 것을 원칙으로 하되, 만약 적자가 없다면 현명한 자(賢明한 자)에게 물려주어라.
왕건은 훈요십조 외에도 '사성 정책(賜姓政策, 성씨를 내려주는 정책)'을 통해 호족 통합을 완성했다.
그는 개국 공신들이나 협력한 호족들에게 '왕(王)'이라는 국성(國姓)을 하사하여 왕실의 일원으로 편입시켰다.
이는 피 한 방울 섞이지 않은 이들을 왕씨로 만듦으로써 강력한 충성심을 이끌어내는 정치적 지혜였다.
태조 왕건의 평가: 업적과 과실
943년, 태조 왕건은 67세의 나이로 승하(昇遐, 왕의 죽음)했다.
그는 혼란한 후삼국시대를 종식시키고 고려 왕조(高麗王朝)라는 500년 대국의 기틀을 마련한 역사상 가장 위대한 군주 중 한 명으로 평가된다.
신라의 멸망이라는 시대적 위기 속에서 평화적 귀부와 무력 통일을 병행하여 재통일을 이루었고, 고구려 계승 의식을 확립하여 민족적 정통성을 재확인했다.
관용과 덕치를 통해 호족들을 포용하고, 정략결혼과 사성 정책으로 군사적 기반을 흡수하여 국가 통합에 성공했다.
송악의 해상 무역 경험을 바탕으로 대외 개방 정책을 펼쳐 국가 경제를 안정화시켰다.
이로 인해 'Korea(코리아)'라는 국호가 서방 세계에 알려지게 되었다.
![]() |
태조와 신혜왕후의 합장된 왕릉인 현릉 |
29명의 부인을 둔 정략결혼 정책은 단기적으로는 성공했으나, 장기적으로는 최악의 과실을 남겼다.
왕건 사후, 혜종, 정종, 광종으로 이어지는 고려 초기는 외척 간의 처절한 왕위 계승 전쟁(王位繼承戰爭)으로 얼룩졌으며, 이는 태조의 관용이 낳은 가장 큰 정치적 딜레마였다는 비판을 피할 수 없다.
또한 호족들의 권한을 너무 많이 인정해 준 결과, 고려는 중앙 집권이 강력했던 조선과 달리 지방 호족(후대 문벌 귀족)의 권력이 왕권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구조적 문제를 안고 시작했다.
태조 왕건은 후대 고려 왕실의 정신적 지주였으며, 민간에서는 덕(德)과 관용의 상징으로 추앙받았다.
그의 생애는 궁예의 광기와 견훤의 맹목적인 무력이 아닌, 지혜로운 전략과 시대적 대의를 선택한 완벽한 영웅 서사로 남아있다.
태조 왕건은 한반도의 주체적 통일을 완성하고, 새로운 민족 국가의 시대를 연 위대한 설계자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본 글은 주류 한국사 연구와 정사·사료를 1차 근거로 삼았습니다.
사실 서술을 우선하며, 불확실하거나 학계 이견이 큰 대목은 본문에 즉시 표기합니다: [전승], [야사], [논쟁], [추정]
관직·지명·연호 등은 시대 용례와 현대 표기를 병기합니다.
인명·가계 혼선은 보수적으로 정리했습니다.
전쟁 연표는 통설을 따릅니다: 나주(903) → 공산(927) → 고창(930) → 일리천(936).
연대 이견은 범위·각주로 병기.
극적 장면(대사·심리)은 최소한의 창작으로, 사실 흐름을 해치지 않는 범위에서만 덧붙였습니다.
오류 제보·사료 추천은 언제든 환영합니다.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