틀을 깨고 '나'를 그린 화가, 수잔 발라동
미술관에 걸린 조금 특별한 여인
줄무늬 파자마를 입은 한 여인이 흐트러진 침대에 비스듬히 누워있습니다.
입에는 담배를 물었고, 발치에는 읽던 책 두 권이 놓여 있습니다.
그림 속 여인은 누군가의 시선을 의식하지 않은 채, 자신만의 생각에 깊이 잠긴 듯 보입니다.
이 그림은 수잔 발라동의 대표작, <푸른 방(The Blue Room, 1923)>입니다.
이 모습은 신화 속 비너스나 이국적인 오달리스크처럼 남성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해 존재했던 기존 미술 작품 속 여성상과는 완전히 다릅니다.
그림 속의 수동적인 대상이 아닌, 자기 삶의 주체로 살아간 이 여성은 과연 누구였을까요?
이 대담하고 솔직한 그림을 그린 화가, 수잔 발라동의 특별한 이야기를 지금부터 시작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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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잔 발라동 |
1. 서커스 소녀, 화가의 모델이 되다
수잔 발라동은 1865년, 세탁부의 사생아로 태어나 척박한 환경에서 유년 시절을 보냈습니다.
생계를 위해 그녀는 아주 어린 나이부터 청소부, 직공, 양재사, 서커스단 무희 등 온갖 궂은일을 전전해야 했습니다.
이는 부유한 명문가 출신이었던 다른 여성 화가들과는 근본적으로 다른 출발점이었습니다.
특히 그녀가 가장 좋아했던 일은 서커스 곡예사였지만, 공중그네에서 추락하는 사고로 부상을 입으면서 그 꿈을 접어야 했습니다.
이 사건은 그녀의 삶에 큰 좌절을 안겨주었지만, 동시에 예술가들의 세계로 들어서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습니다.
서커스단을 나온 발라동은 르누아르, 툴루즈 로트레크 등 당대 유명 화가들의 모델이 되었습니다.
그녀는 단순히 캔버스 앞의 대상에 머무르지 않았습니다.
화가들의 어깨너머로 붓질과 색채, 구도를 익히며 자신만의 예술 세계를 남몰래 키워나갔습니다.
이 시기, 남성 화가의 시선으로 그려진 그녀와 스스로를 그린 그녀의 모습은 극명한 차이를 보입니다.
르누아르가 그린 발라동과 그녀가 18세에 그린 첫 자화상을 비교하면 그 차이를 명확히 알 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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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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작품 속 발라동의 모습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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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긴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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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귀스트 르누아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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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각에 잠긴 듯 아래를 향한 시선, 발그레한 볼과 붉은 입술로
표현된, 남성 화가의 시선 속 이상적인 아름다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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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성 화가의 시선에 담긴 이상적인 여성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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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잔 발라동 (자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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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면을 꿰뚫는 날카로운 눈빛, 입을 꽉 다물어 턱에 주름이 질 정도의
표정. 미화되거나 순종적이지 않은, 자신의 고단한 현실을 직시하는
강인한 자의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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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화되지 않은, 자신의 삶을 직시하는 강인한 자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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캔버스 앞에서 남성들의 시선을 받던 그녀는, 이제 그 시선을 뒤집어 세상을 바라볼 준비를 마쳤습니다.
남은 것은 그녀의 숨겨진 재능을 알아볼 운명적인 만남뿐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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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르누아루의 수잔 발라동 초상화 |
2. 드가의 한마디, 예술가 수잔 발라동의 탄생
발라동은 틈틈이 그린 자신의 그림을 퓌비 드 샤반에게 보여주었지만, 그는 "쓰레기 같은 그림"이라며 냉정하게 혹평했습니다.
하지만 모두가 그녀를 외면한 것은 아니었습니다.
툴루즈 로트레크는 그녀의 재능을 가장 먼저 간파하고 당대 최고의 화가였던 에드가 드가에게 소개했습니다.
사람, 특히 여성을 싫어하기로 유명했던 까칠한 성격의 드가는 발라동의 드로잉을 보고 깊은 인상을 받았습니다.
그리고 이렇게 말했습니다.
"너도 우리 중 하나가 되겠구나!"
정식 교육도, 사회적 배경도 없던 그녀에게 드가의 이 한마디는 단순한 칭찬이 아니었습니다.
그것은 남성들의 전유물이던 예술 세계의 빗장을 열어주는 열쇠이자, 평생 그녀의 영혼을 지탱해 준 '신의 격려'와도 같았습니다.
드가는 그녀의 그림을 처음으로 사준 후원자였을 뿐만 아니라, 영향력 있는 화상 앙브루아즈 볼라르에게 그녀를 소개하고 직접 동판화 기법을 가르쳐주는 등 든든한 스승이 되어주었습니다.
1894년, 수잔 발라동은 여성 화가 최초로 '프랑스 국립예술학회(Société Nationale des Beaux-Arts)' 전시에 드로잉 다섯 점을 출품하는 쾌거를 이룹니다.
노동자 계급 출신의 미혼모이자, 정식 미술 교육을 받지 않은 그녀에게 이것은 단순한 전시 참여 이상의 의미였습니다.
남성 중심의 화단에 자신의 실력만으로 당당히 입성하며, 스스로 예술가임을 증명해낸 역사적인 순간이었습니다.
화가로서 세상에 첫발을 내디딘 발라동은 예술뿐만 아니라 자신의 삶에서도 세상이 정해놓은 규칙을 따르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녀의 삶은 곧 그녀의 예술이었고, 그 대담함은 캔버스 위에 그대로 옮겨졌습니다.
3. 그림만큼이나 파격적이었던 삶
발라동의 삶은 언제나 스캔들의 중심에 있었습니다.
그중 가장 파격적인 사건은 44세의 나이에 아들 모리스 위트릴로의 친구이자 21살 연하였던 화가 지망생, 앙드레 우터와 사랑에 빠져 결혼한 일입니다.
이후 발라동, 아들 위트릴로, 그리고 젊은 남편 우터, 세 화가의 기묘한 동거가 시작되었습니다.
당시 파리 사교계는 이들을 '저주받은 삼위일체'라 부르며 손가락질했습니다. (전승)
이 복잡한 관계의 심리를 발라동은 캔버스 위에서 놀랍도록 정직하게 포착합니다.
<가족과 함께 있는 자화상(1912)> 속 인물들의 시선은 각기 다른 곳을 향하지만, 오직 발라동만이 정면을 똑바로 응시하고 있습니다.
이는 그녀가 모든 관계의 중심에서 자신의 삶을 스스로 주도하겠다는 강한 의지를 보여주는 듯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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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가족의 초상 - 수잔 발라동(1912) |
발라동은 작곡가 에릭 사티와의 열정적인 연애나 앙드레 우터와의 결혼에서 볼 수 있듯, 남성에게 선택받는 수동적인 존재가 되기를 거부했습니다.
그녀는 언제나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따라 스스로 사랑을 선택하고 관계를 주도하는 삶을 살았습니다.
이러한 주체적인 태도는 그녀의 예술 세계에도 그대로 반영되어, 그림 속 여성들을 더 이상 남성적 시선의 대상이 아닌 독립적인 존재로 그려내는 원동력이 되었습니다.
자신의 감정과 욕망에 솔직했던 발라동은 그림에서도 그 누구보다 솔직했습니다.
이제 그녀가 남긴 대표 작품들을 통해, 그녀가 세상에 던진 대담하고 솔직한 시선을 직접 확인해 보겠습니다.
4. 발라동의 시선: 시대를 앞서간 대표 작품들
1. 최초의 도발, <아담과 이브 (Adam and Eve, 1909)>
이 작품은 21살 연하의 연인 우터와 자신을 모델로 그린 그림으로, 여성 화가가 남성 누드를 전면에 내세운 최초의 작품 중 하나로 평가받습니다.
그림 속에서 선악과를 따려는 이는 주저하는 아담이 아닌 당당한 이브(발라동)입니다.
이브의 손목을 잡은 아담의 모습은, 그녀를 말리는 동시에 부추기는 듯한 이중적인 태도를 보입니다.
이는 세상의 금기를 앞에 둔 남성의 망설임과 욕망을 동시에 포착한 것입니다.
이 작품은 다음과 같은 혁신적인 의미를 가집니다.
1. 성 역할의 전복: 남성이 여성을 바라보는 전통적인 시선에서 벗어나, 여성이 주체가 되어 남성을 바라보고 욕망하는 모습을 그렸습니다.
2. 금기에 대한 도전: 세상의 비난을 두려워하지 않고 자신의 사랑을 성서의 이야기에 빗대어 당당하게 표현했습니다.
3. 여성 화가의 새로운 지평: 남성 화가들의 전유물로 여겨졌던 누드화, 특히 남성 누드라는 영역에 도전한 선구적인 작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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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담과 이브, 수잔 발라동, 1909년 |
2. 새로운 여성의 탄생, <푸른 방 (The Blue Room, 1923)>
이 작품은 발라동 예술의 정수를 보여주는 대표작입니다.
편안한 파자마 차림으로 담배를 물고 책과 함께 누워있는 여성의 모습은, 미술사 속 전통적인 누드화(오달리스크, 비너스)의 여성상과 결정적인 차이를 보입니다.
• 주체적인 시선: 누군가를 의식하지 않고 자신의 생각에 잠긴 듯한 모습은, 더 이상 남성의 시각적 즐거움을 위한 대상이 아님을 선언합니다.
• 현실적인 모습: 예쁘거나 이상화되지 않은 평범한 여성의 몸과 편안한 옷차림은 여성의 삶을 현실적으로 보여줍니다.
• 지적인 존재: 발치에 놓인 책들은 그녀가 육체적인 아름다움뿐만 아니라 지성을 추구하는 존재임을 암시합니다.
이처럼 발라동은 평생에 걸쳐 자신의 삶과 예술로 세상의 편견에 맞서 싸웠습니다.
그녀가 남긴 마지막 말들은 오늘을 살아가는 우리에게도 깊은 울림을 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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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푸른 방 |
5. 결론: 영원한 아웃사이더, 시대를 앞서간 예술가
수잔 발라동은 부유한 명문가 출신이었던 동시대 여성 화가 베르트 모리조나 메리 카사트와는 달리, 철저한 '아웃사이더'였습니다.
세탁부의 사생아, 미혼모, 서커스단원, 모델이라는 꼬리표는 그녀를 평생 따라다녔습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바로 그 점이 그녀를 더욱 독창적이고 위대한 예술가로 만들었습니다.
그녀에게 그림은 우아한 취미가 아닌 치열한 '생존'이었습니다.
그렇기에 그녀는 어떤 제약에도 얽매이지 않고 여성의 몸과 삶을 그 누구보다 솔직하고 독립적인 시선으로 담아낼 수 있었습니다.
발라동은 자신의 고단했던 삶을 예술로 승화시키는 신념을 다음과 같은 한 문장으로 남겼습니다.
"예술은, 우리가 증오하는 삶을 영원하게 한다."
발라동이 평생에 걸쳐 깨뜨린 것은 캔버스 위의 낡은 관습만이 아니었습니다.
그녀의 삶은 우리에게 묻습니다.
당신의 세상에는 어떤 규칙이 깨어지기를 기다리고 있습니까?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전기 자료·전시 카탈로그·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수잔 발라동의 삶과 작품을 에세이·스토리텔링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사실 관계(연도, 인물, 작품명, 사건의 큰 흐름)는 최대한 사료에 근거했으며, 인물의 심리·대사·장면 묘사 등은 독자의 몰입을 돕기 위해 소설적으로 각색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불확실한 전승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으로 표기하는 것을 원칙으로 삼고 있으며, 인물·지명·작품명은 첫 등장 시 괄호를 활용해 최소한의 정보를 함께 제시하는 방식으로 정리했습니다.
Suzanne Valadon rose from an impoverished circus girl and artists’ model to a self-taught painter who overturned the male gaze.
Encouraged by Degas, she entered the Paris art world as an outsider, painting women as thinking, desiring subjects rather than decorative bodies.
Through bold works like “Adam and Eve” and “The Blue Room,” she turned her difficult life into fiercely honest, modern ar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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