벽란도의 물결 위에 핀 국제 강국, 고려의 역동적 일상 탐구
안녕하세요.
1,000년 전 한반도의 찬란한 황금기를 설계하고 안내하는 역사 블로거입니다.
오늘 우리는 전 세계에 'K-트렌드'의 원형을 각인시켰던 역동적인 국가, 고려로 여행을 떠나보려 합니다.
예성강의 푸른 물결을 따라 세계와 소통했던 고려인들의 개방적인 의식주 문화와 풍속을 지금부터 함께 살펴보시죠.
1. 세계로 뻗어 나간 이름, '고려(KOREA)'의 탄생
고려는 단순히 한반도의 한 왕조를 넘어, 고구려를 계승하여 실질적인 민족 통일을 완성한 '계승'과 '융합'의 상징입니다.
태조 왕건은 고구려의 옛 영토를 되찾겠다는 의지를 담아 국호를 '고려'라 정했고, 발해 유민까지 포용하는 개방적인 국가관을 바탕으로 진정한 의미의 통합을 이루어냈습니다.
이러한 고려의 위상은 바닷길을 통해 전 세계로 퍼져나갔습니다.
• 언어적 변천: 아바스 칼리파국(아라비아) 상인들은 고려를 'غوريو(Goryeo)'라고 불렀습니다.
이 명칭이 서구로 전해지는 과정에서 로망스어권에서는 'C'로, 게르만 및 슬라브어권에서는 'K'로 시작하는 단어로 변천되었습니다.
• 현대적 의의: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Korea'라는 이름은 바로 이 시기, 세계와 당당히 마주했던 고려의 역동성에서 비롯된 불멸의 유산입니다.
이처럼 세계로 이름을 떨친 고려의 중심에는 국제적인 소통의 창구였던 '벽란도'가 있었습니다.
2. 국제 도시 벽란도: 1,000년 전 글로벌 네트워크의 심장
박성환의 '예성강도'를 가만히 들여다보십시오.
이국적인 복장을 한 상인들이 짐을 나르고 활발히 거래하는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지 않으십니까?
예성강 하구의 벽란도(碧瀾渡)는 개경에서 단 12km 거리에 위치한 글로벌 허브였습니다.
비록 강물의 흐름이 빠르고 조수가 밀려드는 지형적 한계가 있었으나, 고려인들은 이를 깊은 수심이라는 이점으로 승화시켜 거대한 외항선이 자유롭게 드나들게 한 지리적 영리함을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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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예성강도. 고려시대 예성강 하류에 있었던 하항 벽란도를 그린 기록화 |
[고려의 주요 국가별 교역 현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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교역 대상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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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수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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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수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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송나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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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 서적, 약재, 악기, 자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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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 은, 인삼, 나전칠기, 종이, 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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거란 / 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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털가죽, 말, 모피, 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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곡식, 문방구, 구리, 삼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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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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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유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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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서적, 자기(고려청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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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라비아(대식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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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은, 향료(점성향, 몰약), 용치(화석), 대소목, 상아, 산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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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금, 은, 공예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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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벽란도 교역품 |
벽란도는 단순한 항구를 넘어 외국인을 위한 세심한 인프라를 갖추고 있었습니다.
• 벽란정(碧瀾亭): 외국 사신과 상인들이 여독을 풀던 고급 객루로, 항구 이름의 유래가 되기도 했습니다.
• 예궁(禮宮): 이슬람 상인들이 코란을 낭송하며 기도할 수 있도록 마련된 모스크(이슬람 사원)입니다.
• 기록된 환대: 현종 15년에 100여 명의 이슬람 상인이 방문하고, 정종 6년 아라비아 상인들이 수은과 용치 등을 예물로 바치며 무역을 청했을 때, 고려 왕실은 이들을 국빈급으로 대접하며 개방적인 면모를 과시했습니다.
벽란도를 통해 흘러 들어온 것은 물자만이 아니었습니다.
고려인들은 이를 바탕으로 그들만의 세련된 생활 문화를 꽃피웠습니다.
3. 『고려도경』이 포착한 고려인의 '청결'과 '멋'
1123년 고려를 방문한 송나라 사신 서긍은 『고려도경(高麗圖經)』에서 고려인의 세련된 풍습에 경탄했습니다.
특히 그는 고려인의 높은 위생 관념을 강조하며 흥미로운 기록을 남겼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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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경이 고려에 관해 쓴 책. 고려도경 |
"고려인은 깨끗한 것을 좋아하여 중국인의 더러운 위생 상태를 비웃는다. 아침에 일어나면 반드시 목욕을 하고, 여름에는 시냇물에서 남녀가 혼욕을 즐길 정도로 정갈함을 문화적 자부심으로 삼는다." - 『고려도경』 中
이러한 고려의 미적 감각은 국경을 넘어 대륙의 유행까지 선도했습니다.
당시 원나라 상류층 사이에서는 고려의 의복과 신발, 장신구를 착용하는 '고려양(高麗樣: 고려 스타일)'이 대유행했습니다.
고려 여인들의 섬세한 화장법과 세련된 복식은 동아시아 여인들이 동경하는 '워너비 아이템'이었던 셈입니다.
1,000년 전의 고려는 이미 문화를 수입하는 단계를 넘어, 전 세계에 스타일을 제안하는 독보적인 패션 강국이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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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양에 관련된 자료이미지 |
[고려인의 주거 문화 특징]
1. 온돌(火坑)의 지혜: 겨울의 추위를 이기기 위해 땅을 파고 구들장을 놓아 온기를 유지하는 독창적인 난방 방식을 사용했습니다.
2. 돗자리의 정교함: 서긍은 고려의 돗자리가 매우 세밀하여 '오랑캐의 풍속 같지 않다'고 극찬하며 그 미적 가치를 높게 평가했습니다.
3. 역동적인 가옥 배치: 개경의 민거는 산등성이에 벌집과 개미구멍처럼 촘촘히 들어서 있어, 당시 도시의 활기찬 에너지를 짐작게 합니다.
신체를 정갈히 한 고려인들의 미적 감각은 그들이 사용하는 그릇과 공예품에서도 여실히 드러납니다.
4. 고려의 식탁: 바다와 육지가 만난 풍요로운 미식
고려의 식탁은 풍부한 해산물과 독특한 미식 문화로 가득했습니다.
서긍은 고려의 풍성한 식자재를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했습니다.
• 바다의 진미: 전복, 미꾸라지, 붉은게, 굴뿐만 아니라 거북이다리(龜脚), 다시마, 진주조개 등을 신분에 상관없이 즐겼습니다.
• 과실과 약재의 대조:
◦ 밤: 복숭아만큼 크고 달아 최고의 찬사를 받았습니다.
◦ 인삼: 당대 이미 세계 최고의 영약으로 대우받았습니다.
◦ 대조적 평가: 반면 당시의 사과나 배는 크기가 작고 맛이 없다는 냉정한 평가를 기록하기도 했습니다.
• 고려판 퓨전 외식, 고기 요리의 부활
미식의 향연은 여기서 끝이 아닙니다.
불교의 영향으로 육식을 멀리하던 고려인들은, 벽란도를 통해 들어온 북방 민족의 식문화를 흡수하며 파격적인 변화를 맞이합니다.
오늘날 불고기의 원형인 '맥적(고구려에서 유래된 양념 고기구이)'이 다시금 식탁의 주인공으로 떠올랐고, 몽골의 영향으로 고기를 삶아낸 진한 국물 요리가 유행하며 고려인들의 입맛을 사로잡았습니다.
이는 단순한 섭취를 넘어 외래 문화를 식탁 위에서 '고려식'으로 재해석한 문화 융합의 결정체였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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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맥족의 구이라는 뜻의 맥적(貊炙) |
• 경제 활동의 전문성: 일상에서는 물물교환이 흔했지만, 약을 살 때만큼은 반드시 '전보(錢寶)'라는 화폐를 사용하는 엄격함을 보였습니다.
이는 고려인들이 건강과 약재를 얼마나 귀하게 여겼는지를 보여주는 단면입니다.
풍요로운 식문화를 즐기던 고려인들의 손재주는 당대 최고의 기술인 '나전칠기'에서 정점을 찍었습니다.
5. 고려의 기술력: 세밀함의 극치와 기술 혁신
고려의 예술과 기술은 대외 교류를 통해 끊임없이 '혁신'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K-컬처'에 열광하듯, 당시 고려의 공예품은 동아시아 최고의 트렌드였습니다.
• 독보적 청자 문화: 고려 청자는 송나라의 영향을 받았으나, 이내 송을 뛰어넘는 독창적인 '비색(翡色)'을 찾아내며 세계 최고의 공예품으로 인정받았습니다.
• 나전칠기의 위상: 『고려도경』에서 "세밀하여 귀하다"고 극찬받은 고려의 나전칠기는 당대 기술력의 정수였습니다.
• 벽란도의 밤을 달군 독한 유혹, 소주: 기술의 혁신은 고려인의 술잔 속에서도 뜨겁게 타올랐습니다.
당시 세계를 제패했던 몽골(원나라)은 이슬람을 정벌하며 아랍의 연금술 기술인 '아라키(Arrak, 증류주 제조법)'를 흡수했습니다.
이 독한 '불의 술'은 몽골군을 따라 고려의 개경과 안동 등지로 흘러 들어왔습니다.
고려인들은 이를 단순히 수입하는 데 그치지 않고, 자신들의 곡주 문화와 결합해 맑고 투명한 '소주(燒酒)'로 재탄생시켰습니다.
벽란도를 통해 들어온 이국적인 증류 기술이 오늘날 대한민국을 대표하는 술의 뿌리가 된 셈입니다.
• 역동적 기술 수용: 최무선은 벽란도를 드나들던 원나라 사람 이원을 극진히 대접하며 설득한 끝에, 화약 제조의 핵심 기술인 '염초 제조법'을 습득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모방을 넘어 국방 기술의 독립을 이룬 혁신적인 사례입니다.
이러한 기술과 문화의 번영은 고려가 가졌던 개방성과 다양성이라는 토대 위에서 가능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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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비색 고려청자 국보94호 참외모양 병(왼), 조롱박 주전자(오른) |
6. 우리가 체감하는 고려의 유산
고려가 남긴 개방적 국가 모델은 오늘날 우리에게 강렬한 메시지를 던집니다.
[고려가 남긴 핵심 유산]
1. 역동적 다문화 사회: 고려는 당시 전체 인구의 약 8.5%(약 17만 명)에 달하는 이민족을 포용했습니다.
이는 오늘날 대한민국의 외국인 비율인 3.9%를 두 배 이상 상회하는 수치로, 고려가 얼마나 열린 사회였는지를 증명합니다.
2. 해상 무역 강국: 벽란도를 심장 삼아 아라비아와 서역까지 연결되는 글로벌 네트워크를 구축했습니다.
3. 문화적 자부심: 청결을 중시하는 고결한 풍습과 세계 수준의 비색 청자, 나전칠기 기술을 완성했습니다.
비록 지금은 벽란도를 직접 밟아볼 수 없지만, 강화도 평화전망대에 서면 예성강 하구의 그 역동적인 현장을 맨눈으로 확인할 수 있습니다.
1,000년 전 그곳을 가득 메웠던 거대한 돛단배와 푸른 눈의 상인들을 상상해 보십시오.
고려가 열었던 개방의 문은 오늘날 대한민국이 세계와 소통하는 근원적인 힘이 되었습니다.
오늘날 우리가 'K-컬처'에 자부심을 느끼는 이유는, 이미 우리 DNA 속에 1,000년 전 벽란도에서 시작된 개방과 혁신의 정신이 흐르고 있기 때문일지도 모릅니다.
이 글은 『고려사』, 『고려도경』 등 1차 사료와 국내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독자의 이해와 몰입을 돕기 위해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역사 글입니다.
학계에서 해석이 갈리거나 추가 검토가 필요한 부분, 혹은 사실 오류가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알려주세요.
다양한 관점의 건설적인 토론과 보완 제안도 언제든 환영합니다.
Goryeo was not a closed medieval kingdom but a dynamic maritime power deeply connected to the global world.
Centered on the port of Byeongnando at the mouth of the Yesong River, Goryeo maintained active trade with Song China, Liao, Japan, and even the Islamic world.
Foreign merchants, cultures, and technologies flowed into the capital, shaping daily life, fashion, food, and craftsmanship.
Contemporary records such as Goryeo Dogyeong praise Goryeo people for their cleanliness, refined taste, and advanced housing like ondol heating.
Goryeo absorbed foreign influences creatively—producing celadon, mother-of-pearl lacquerware, distilled soju, and even gunpowder technology.
This openness formed a multicultural society and helped spread the name “Goryeo,” the origin of “Korea,” across Eurasi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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