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의 숨은 외교가: 제12대 국왕 대건황(大虔晃)
안녕하세요! 오늘은 사료의 부족함 속에 가려져 있던 발해의 거물, 제12대 국왕 대건황에 대해 깊이 있게 다뤄보려 합니다.
흔히 ‘해동성국’의 영광은 선왕(제10대) 시절에만 머물렀다고 생각하기 쉽지만, 대건황은 그 번영의 불꽃을 외교와 내실로 이어간 ‘준비된 군주’였습니다.
1. 대건황, 그는 누구인가?
대건황(大虔晃)은 발해의 제12대 국왕으로, 발해식 칭호인 가독부로서 857년(또는 858년)부터 871년까지 약 14년간 나라를 다스렸습니다.
그는 선왕이 다져놓은 중흥기를 안정적으로 계승하며, 당나라와 일본 사이에서 정교한 균형 외교를 펼친 인물입니다.
특히 사료가 희귀한 발해사에서 그의 기록은 일본 측 문헌을 통해 생생하게 살아나는데, 이를 통해 우리는 그가 얼마나 강력한 실권자였는지 확인할 수 있습니다.
2. 베일에 싸인 가계와 왕위 계승의 미스터리
대건황의 가계도는 발해 왕실의 권력 구조를 이해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하지만 그의 즉위 과정에는 오늘날의 역사가들도 주목하는 의문점이 하나 있습니다.
대건황의 가계 구조
• 조부: 제10대 선왕(대인수) - 발해의 영토를 최대로 넓힌 중흥 군주
• 부친: 대신덕(태자) - 왕위에 오르기 전 요절함
• 형: 제11대 대이진 - 대건황의 전임 국왕
• 계승자: 대현석 - 대건황의 아들(또는 손자)로 추정
형제 계승의 미스터리: 조카들은 어디로 갔나?
일반적으로 왕위는 부자 세습이 원칙입니다.
하지만 형인 대이진에게는 일본 사신으로 파견될 만큼 장성한 아들들이 최소 4명 이상 있었습니다.
대표적으로 대지악(大智鄂)과 같은 조카들이 있었음에도 불구하고, 왕위는 아들이 아닌 동생 대건황에게 돌아갔습니다.
이를 두고 학계에서는 당시 대건황이 가졌던 압도적인 정치적 실권이 조카들을 제치고 즉위하게 된 결정적 배경이었을 것으로 분석합니다.
3. 즉위 전의 활약: 준비된 국왕, 대건황
대건황은 왕위에 오르기 훨씬 전부터 발해의 심장부를 장악하고 있었습니다.
우리가 이 사실을 명확히 알 수 있는 이유는 1950년 일본에서 발견된 임생가문서(壬生家文書) 중 함화 11년 중대성 첩사본(咸和十一年中臺省牒寫本)이라는 귀중한 사료 덕분입니다.
이 문서에 따르면 그는 이미 841년 당시에 다음과 같은 강력한 직책들을 겸임하고 있었습니다.
• 중대친공(中臺親公): 발해 3성 중 정책 심의를 담당하는 중대성의 종친 실권자입니다.
• 대내상(大內相): 행정 집행의 중심인 정당성의 수장으로, 오늘날의 국무총리에 해당합니다.
• 전중령(殿中令): 국왕의 측근에서 궁궐 사무를 총괄하는 직책입니다.
• 안풍현 개국공(安豊縣 開國公): 그가 보유했던 작위입니다.
그는 즉위 전부터 정책 결정(중대성)과 실제 행정 집행(정당성)이라는 국가 운영의 양대 축을 모두 손에 쥐고 있었습니다.
여기에 궁궐 내부 관리권까지 확보했으니, 그는 이미 841년부터 약 16년 이상 실질적인 권력을 행사한 '준비된 국왕'이었던 셈입니다.
4. 대건황의 빛나는 외교 성과: 일본으로 건너간 발해의 달력
대건황은 즉위 후에도 활발한 외교를 통해 발해의 문화적 우위를 과시했습니다.
특히 859년 사신 오효신을 통해 일본에 전달한 장경선명력경(長慶宣明暦經), 즉 선명력(宣明暦)은 당시 동아시아에서 가장 앞선 달력이었습니다.
당시 독자적인 '달력'을 제작하여 전달한다는 것은 고도의 천문학 지식과 과학 기술을 보유했음을 의미합니다.
이는 발해가 단순한 주변국이 아니라, 스스로를 문명화된 '제국'으로 인식하고 일본에 대해 문화적·과학적 우위를 지닌 국가였음을 입증하는 세련된 문화 외교의 정점이었습니다.
대건황기 대일(對日) 사절단 현황
대건황은 재위 기간 내내 대규모 사절단을 파견하며 우호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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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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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요 사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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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원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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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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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8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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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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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4인 파견, 당으로부터 발해국왕 책봉을 받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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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59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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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효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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장경선명력경(달력) 전달을 통한 과학 기술 과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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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60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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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거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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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인 파견, 활발한 경제·문화 교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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871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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양성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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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5인 파견, 대건황 재위기의 마지막 사절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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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 대건황의 사후와 역사적 평가
대건황은 871년 6월에 서거하였으며, 그의 뒤를 이어 아들(또는 손자)인 대현석이 왕위를 계승했습니다.
비록 발해 내부의 직접적인 기록은 부족하지만, 우리는 일본의 사료를 통해 한 시대의 안정을 책임졌던 이 외교가의 발자취를 읽어낼 수 있습니다.
학술적 쟁점과 포인트
1. 계승에 대한 논쟁: 대건황과 차기 국왕 대현석의 관계에 대해 실학의 거두 유득공은 아들이라고 보았으나, 정약용은 세계(世系)가 명확히 전하지 않는다며 신중한 입장을 보였습니다.
2. 시호 논란: 《환단고기》에는 그를 안왕(安王)이라 칭하고 연호를 대정(大定)이라 기록하고 있으나, 학계에서는 해당 서적의 신빙성 문제로 인해 이를 정사(正史)로 인정하지 않고 객관적인 시각을 유지하고 있습니다.
3. 역사적 가치: 사료의 공백기라 불리는 발해 후기사에서 임생가문서와 같은 기록을 통해 대건황이라는 인물을 재발견하는 것은, 발해가 멸망 직전까지 얼마나 탄탄한 시스템과 문화적 자부심을 지닌 국가였는지 확인시켜 주는 중요한 작업입니다.
대건황은 비록 우리에게 널리 알려지지는 않았으나, 탄탄한 실무 능력을 바탕으로 발해의 황금기를 수호하고 동아시아의 문화적 리더로서 위상을 드높인 위대한 가독부였습니다.
이 글은 발해 제12대 국왕 대건황의 통치와 외교 활동을 중심으로, 사료가 부족한 발해 후기를 일본 측 기록과 현대 연구를 바탕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발해사의 특성상 일부 계보와 연대, 인물 관계는 추정과 학설에 의존한 부분이 있으며, 이에 대해서는 학계에서도 다양한 견해가 존재합니다.
사실 오류나 보완이 필요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세요.
대건황과 발해 후기의 성격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토론 역시 환영합니다.
이 글이 ‘쇠퇴기’로만 인식되던 발해 후기를 다시 바라보는 계기가 되기를 바랍니다.
Dae Geonhwang, the 12th king of Balhae, ruled from 857 or 858 to 871 during a period often seen as obscure in Balhae history.
Long before his accession, he exercised real power by holding key central offices, effectively managing state policy and administration.
As king, he pursued balanced diplomacy between Tang China and Japan, repeatedly dispatching large embassies and presenting advanced calendrical knowledge to Japan.
Although Balhae records are scarce, Japanese sources reveal Dae as a capable ruler who preserved political stability, strengthened foreign relations, and sustained Balhae’s prestige until the late ninth centu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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