발해 최전성기 해동성국의 비밀: 선왕(대인수)의 개혁, 행정체제, 당·일본 외교로 읽는 발해사 (King Seon of Balhae)


바다 동쪽의 위대한 나라, 해동성국을 이끈 발해 선왕 이야기


1. '해동성국'의 여명을 연 군주

발해 역사에서 가장 빛나는 시기를 이야기할 때 빼놓을 수 없는 인물이 있습니다. 

바로 제10대 왕인 선왕(宣王)입니다. 

그의 이름은 대인수(大仁秀)이며, 건흥(建興)이라는 연호를 사용하여 나라를 다시 일으키겠다는 굳건한 의지를 세상에 알렸습니다.

선왕은 짧은 재위 기간 동안의 극심한 왕권 다툼으로 혼란에 빠졌던 발해를 구하고,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개척한 위대한 중흥군주(中興君主)였습니다. 

이 칭호에는 붕괴 직전의 왕국을 구해내고, 발해 역사상 가장 눈부신 황금기를 연 위대한 군주라는 의미가 담겨 있습니다. 

그의 시대에 발해는 마침내 당나라로부터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는 의미의 '해동성국(海東盛國)'이라는 칭호를 얻으며, 명실상부한 동아시아의 강대국으로 우뚝 섰습니다.

그렇다면 선왕은 어떤 혼란을 극복하고 발해의 전성기를 열었을까요? 

그가 왕위에 오르기 전, 위태로웠던 발해의 상황을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2. 혼돈 속에서 싹튼 희망: 선왕의 즉위 배경

대인수가 즉위하기 전, 발해 왕실은 잔혹한 '피의 숙청'이 몰아치고 있었습니다. 

제4대 대흠무(문왕) 사후, 직계 혈통들은 왕좌를 차지하기 위해 서로의 목을 쳤습니다. 

대인수의 아버지와 할아버지 역시 이 권력 투쟁의 희생양이었습니다.

그는 왕궁에서 멀리 떨어진 책성(동북방 접경지)으로 유배 가듯 쫓겨났습니다. 

하지만 이것이 반전의 계기가 되었습니다. 

그는 화려한 궁궐 대신 거친 만주 벌판에서 말갈 전사들과 먹고 자며 그들의 생리를 몸으로 익혔습니다.

"왕관을 쓰지 못한 자가 들판의 법도를 배우니, 비로소 제국의 주인이 될 자격이 생겼다." 


제6대 강왕이 세상을 떠난 후 즉위한 정왕, 희왕, 간왕에 이르는 세 명의 왕들은 모두 재위 기간이 매우 짧았습니다. 

잦은 왕위 교체는 왕권의 약화를 불러왔고, 이는 곧 국력의 위축으로 이어졌습니다. 

나라는 안정을 잃고 흔들리고 있었습니다.

이러한 위기의 순간, 왕위에 오른 인물이 바로 대인수였습니다. 

그의 혈통은 매우 특별했습니다. 

그는 발해를 세운 시조 대조영의 직계 후손이 아니었습니다. 

그는 대조영의 동생인 대야발(大野勃)의 현손(玄孫)이었습니다.

직계 왕들이 연이어 실패하며 나라 전체가 위기에 빠지자, 결국 왕실의 중심에서 벗어난 방계 혈통에 기댈 수밖에 없었던 절박한 상황을 보여줍니다. 

이는 기존 질서의 한계를 인정하고 새로운 리더십을 통해 위기를 돌파하려 했던 발해 지배층의 필사적인 선택이었습니다. 

대인수는 이처럼 어지러운 시대를 끝내고 발해에 새로운 희망의 싹을 틔운 인물이었습니다.

이제 그가 왕위에 올라 어떻게 쇠퇴하던 발해를 동아시아의 강국으로 바꾸어 나갔는지, 그의 위대한 업적을 본격적으로 살펴보겠습니다.


3. 위대한 중흥의 시대: 선왕의 업적

선왕은 단지 혼란을 수습하는 데 그치지 않고, 강력한 리더십을 바탕으로 영토 확장, 내치 안정, 대외 교류라는 세 가지 분야에서 눈부신 업적을 남기며 발해의 최전성기를 이끌었습니다.


3.1. 북방을 평정하고 영토를 넓히다

선왕 시대에 발해는 역사상 가장 광활한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그는 강력한 군사 활동을 통해 발해의 영토를 사방으로 크게 넓혔습니다. 

주요 정복 활동의 결과는 다음과 같습니다.

• 북쪽: ≪신당서(新唐書)≫는 선왕이 ‘해북(海北)의 여러 부족’을 쳐서 영토를 크게 넓혔다고 전합니다. 

여기서 우리가 꼭 붙잡아야 할 대목은 흑수말갈의 움직임입니다.

흑수말갈은 쑹화강 하류에서 헤이룽강 유역에 걸쳐 살며 발해와 오래 대립하던 세력이었고, 815년에 당나라에 다시 조공하는 등 독자 행동을 보였습니다. 

그런데 선왕 대 이후에는 이들이 당과 조공 관계를 이어갔다는 기록이 보이지 않습니다. 

즉, 선왕의 ‘북방 평정’은 단순한 정복담이 아니라, 당과 직접 연결되며 발해의 뒤통수를 칠 수 있던 변수를 꺾어 버린 일종의 전략적 봉합이었습니다.

• 역사적 영토 회복: 과거 고구려와 부여가 차지했던 옛 영토 대부분을 회복하여 발해의 강역으로 삼았습니다.

• 서쪽: 요동 지역을 차지하여 서쪽 국경을 크게 확장했습니다.

• 남쪽: 남쪽으로는 신라와 국경을 맞대게 되었습니다.

이러한 정복 활동을 통해 발해는 만주와 한반도 북부를 아우르는 거대한 제국으로 성장했습니다. 

다만, 발해의 정확한 강역에 대해서는 사료가 부족하여 학계의 논의가 계속되고 있습니다. 

특히 고구려의 중심지였던 요동 지역에 대한 지배 범위는 발해의 위상을 가늠하는 중요한 쟁점 중 하나입니다.


3.2. 나라의 기틀을 세우다: 행정 개편과 내치

선왕은 영토 확장과 더불어 나라의 내부 시스템을 정비하는 데에도 심혈을 기울였습니다. 

그의 가장 중요한 업적 중 하나는 바로 지방 행정 제도를 완성한 것입니다.

선왕은 발해의 행정구역을 5경(京) 15부(府) 62주(州)로 완성시켰습니다. 


5경 15부 62주


이는 중앙집권적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 광활한 영토를 효율적으로 다스리기 위한 기반이 되었습니다.

이와 더불어 선왕은 중앙 정치 체제인 3성 6부(三省六部) 제도 또한 확고히 정비했습니다. 

발해는 당의 제도를 받아들이되, 중서성을 중대성(中臺省), 문하성을 선조성(宣詔省), 상서성을 정당성(政堂省)으로 부르는 등 독자적인 명칭을 사용했습니다. 

특히 최고 행정기구인 정당성 아래에 좌사정과 우사정이 각각 3부씩 나누어 관할하는 이원적 통치 구조를 운영하여 효율성을 높였는데, 이는 외래 제도를 주체적으로 수용하고 발전시킨 발해의 정치적 독창성을 잘 보여주는 사례입니다. 

또한, 그는 학술을 진흥시키는 등 문화 발전에도 힘써 나라의 내실을 다졌습니다.


발해의 정치 체제


3.3. 바다 동쪽의 강국으로 서다: 활발한 대외 교류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선왕은 주변국들과 자신감 있는 외교를 펼쳤습니다. 

특히 당나라, 일본과의 교류가 매우 활발했으며, 이를 통해 선진 문물을 수용하고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습니다.

상대국
교류 내용 및 특징
당나라
819년에서 820년까지 단 2년간 무려 16회나 사신을 파견하는 등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하며 선진 문물을 적극적으로 수용했습니다. 이 시기 발해의 번영을 인정한 당나라는 발해에 '해동성국'이라는 칭호를 부여했습니다.
일본
매우 활발하게 사신을 교환했습니다. 발해 사신단의 방문이 너무 잦아, 이를 접대하는 데 막대한 비용을 부담하게 된 일본 측이 827년에 "12년에 한 번씩만 사신을 받겠다"고 제한할 정도였습니다. 이는 발해가 외교를 통해 적극적으로 경제적 이익을 추구했음을 보여주는 단적인 예입니다.

이러한 해상 교역뿐만 아니라, 발해는 신라와 통하는 육상 교역로인 신라도(新羅道)와 북방의 거란과 교류했던 거란도(契丹道) 등을 통해 폭넓은 네트워크를 구축하며 동북아시아의 교역 허브로 자리매김했습니다.

이처럼 선왕의 위대한 업적은 발해를 동북아시아의 중심 국가로 만들었습니다. 


남북국시대의 교류.


4. 해동성국, 그 빛과 의의: 선왕 시대의 평가

선왕 시대는 발해 역사에서 단순한 전성기를 넘어, 국가의 정체성을 한 단계 발전시킨 중요한 시기였습니다.

8세기 중반, 발해와 신라는 비슷한 시기에 당나라의 제도를 받아들여 왕권을 중심으로 한 중앙집권화를 추진했지만, 그 결과는 극명하게 엇갈렸습니다. 

신라는 귀족 세력의 거센 반발에 부딪혀 개혁이 좌절되고 기나긴 내분과 쇠퇴의 길로 접어든 반면, 발해는 약 25년간의 내분을 선왕이라는 강력한 지도자의 등장으로 극복하고 최전성기를 열었습니다. 

이는 위기를 기회로 전환시킨 선왕의 탁월한 리더십이 역사의 흐름을 어떻게 바꾸었는지 명확히 보여줍니다.

또한, 선왕 시대에 이르러 발해의 국가 정체성에도 중요한 변화가 나타났습니다. 

건국 초기, 발해는 신생 국가의 미비한 지배 체제를 보완하기 위해 '고구려 계승 의식'을 강력하게 내세웠습니다. 

이는 고구려 유민을 결속시키고 주변국에 발해의 정통성을 알리기 위한 전략이었습니다.

선왕의 통치 아래 지배 체제가 완비되자, 발해는 더 이상 고구려의 권위에만 의존할 필요가 없게 되었습니다. 

따라서 초기의 '고구려 계승 의식'은 단순히 계승되는 것을 넘어, 북방의 여러 민족을 아우르는 '북방동이제족(北方東夷諸族) 통합 의식'으로 확장되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고구려의 후예라는 정체성을 뛰어넘어, 독자적인 제국으로서의 자신감을 확립했음을 의미하는 중요한 변화였습니다.

이제 선왕 대인수의 위대한 생애와 업적을 종합적으로 정리하며 그의 역사적 위상을 되새겨 보겠습니다.


5. 발해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를 열다

선왕 대인수는 흔들리던 발해를 구하고 역사상 가장 빛나는 시대를 연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그는 왕실의 방계 혈통이라는 한계를 딛고 일어나 극심한 정치적 혼란을 수습하고 왕권을 안정시켰습니다. 

북방의 말갈족을 완전히 복속시키고 고구려의 옛 땅을 대부분 회복하여 발해 역사상 가장 넓은 영토를 확보했습니다. 

또한, 5경 15부 62주라는 지방 행정 제도와 3성 6부의 중앙 관제를 완성하여 거대한 나라를 효율적으로 다스릴 기틀을 마련했습니다.

강력해진 국력을 바탕으로 당, 일본과 활발히 교류하며 발해의 위상을 드높였고, 마침내 '해동성국'이라는 영예로운 칭호를 얻었습니다. 

그는 발해를 단순한 부흥 국가가 아닌, 동아시아의 당당한 주역으로 올려놓은 진정한 중흥의 군주였습니다. 

선왕 대인수의 시대는 발해 역사에서 가장 역동적이고 찬란했던 시기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 『구당서(舊唐書)』·『신당서(新唐書)』, 일본 측 사료(예: 『속일본기(續日本紀)』) 등 공개된 기록과, 이를 바탕으로 한 국내외 연구 성과를 참고해 발해 선왕(宣王, 대인수 大仁秀) 시기의 흐름을 ‘설명 중심’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다만 발해의 강역(특히 요동·흑수말갈 방면 영향력의 범위), 행정구역 편제의 실제 운영 양상, 대외 교류 횟수·시점 같은 일부 항목은 사료 공백과 해석 차이로 인해 학계 견해가 갈릴 수 있습니다.

관심 있는 독자는 동일 사건을 중국·한국·일본 사료가 어떻게 다르게 기록하는지도 함께 비교해 보면, 발해사의 빈틈이 어디에서 생기고 어떤 지점에서 논쟁이 커지는지 더 선명하게 보일 것입니다.


King Seon of Balhae (Dae Insu, r. 818–830) rose after years of brief reigns, restoring a shaken court. 

With the era name Geonheung, he stabilized royal authority, expanded power across Manchuria, and subdued Malgal groups, reaching Balhae’s greatest extent (details debated). 

He completed a five-capital, fifteen-prefecture, sixty-two-district administration and strengthened a Three-Chanceries/Six-Ministries style government with Balhae’s own titles. 

Diplomacy and trade surged through missions to Tang China and Japan and routes like the Sillado. 

Tang’s epithet “Haedong Seongguk” marked this peak, as Balhae’s identity grew from Goguryeo inheritance into a multiethnic northern empire at zenith.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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