망부석 설화의 주인공 박제상, 충절 뒤에 남겨진 가족의 비극 (Bak Jesang of Silla)


망부석에 새겨진 충절과 눈물: 박제상 가족 설화의 재발견


1. 시간을 넘어 전해지는 신라의 뜨거운 충절

한국 역사에서 '만고충신(萬古忠臣)'이라는 칭호가 가장 잘 어울리는 인물을 꼽으라면 단연 박제상(朴堤上)일 것입니다. 

그는 고구려와 왜국에 볼모로 잡혀간 왕제들을 구출하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아낌없이 던졌습니다. 

하지만 그의 이야기가 1,600년이 지난 오늘날까지 우리 가슴을 울리는 이유는 단순히 그가 보여준 국가적 '충성' 때문만은 아닙니다.

박제상의 희생은 국가적으로는 위대한 '성공'이었으나, 남겨진 가족들에게는 평생을 짊어져야 할 참혹한 '비극'이었습니다. 

민중들은 역사가 기록한 그의 공적 너머, 지아비를 기다리다 돌이 된 아내와 어머니를 잃은 아이들의 눈물에 주목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박제상의 이야기가 딱딱한 역사를 넘어 생동감 넘치는 '설화'로서 민중의 깊은 사랑을 받은 이유입니다.

이제 박제상의 발자취를 따라, 역사서가 기록한 그의 공식적인 행적부터 살펴보겠습니다.


2. 역사적 기록의 두 얼굴: 『삼국사기』와 『삼국유사』 비교

박제상 설화의 모태가 되는 두 문헌은 서로 다른 관점에서 그의 삶을 조명합니다. 

눌지왕이 두 아우를 그리워하며 지혜로운 자를 찾을 때, 수주촌의 벌보말(伐寶靺), 일리촌의 구리내(仇里迺), 이이촌의 파로(波老)라는 세 어르신이 공통으로 추천한 인물이 바로 박제상이었습니다.

비교 항목
삼국사기 (열전)
삼국유사 (기이)
인물 표기
박제상 (혁거세 후손, 파사왕 5세손)
김제상 (성씨의 차이 발생)
서술 관점
객관적, 합리적, 유교적 충(忠) 강조
설화적, 생동감 있는 묘사, 열(烈)의 수용
주요 특징
국가 간 외교 관계와 악곡(우식곡) 유래
민간 설화와 지명 전설(망부석 등) 적극 수용

『삼국사기』가 '충신 박제상'이라는 개인의 공적과 국가적 의리에 집중했다면, 『삼국유사』는 박제상의 아내를 '치술신모'로 숭배하는 민간 신앙과 결합하여 '인간 박제상과 그 가족'의 서사로 의미를 확장했습니다. 

기록된 역사를 넘어, 민중들은 박제상이 떠난 길목마다 그들만의 이름을 붙이며 슬픔을 공유하기 시작했습니다.


죽음을 향한 질주: 왜국에서의 사투와 "계림의 개"

박제상이 고구려에서 복호(눌지왕의 동생)를 구해 돌아왔을 때, 신라 왕실은 기쁨에 잠겼습니다. 

하지만 왕의 눈가는 여전히 젖어 있었습니다. 

왜국에 볼모로 간 또 다른 아우, 미사흔(미해)이 남아 있었기 때문입니다.

박제상은 집에도 들르지 않고 다시 길을 떠났습니다. 

뒤쫓아온 아내가 남편의 옷자락을 붙잡으며 통곡했지만, 그는 돌아보지 않았습니다.


왜국에서의 위장 전술

왜국에 도착한 박제상은 철저한 '연기'를 시작했습니다. 

그는 신라에서 죄를 짓고 도망쳐온 망명객을 자처했습니다. 

신라 왕이 자신의 가족을 죽이려 했다는 거짓 소문을 퍼뜨리며 왜왕의 신뢰를 샀습니다.


긴박한 탈출의 밤

기회는 안개가 짙게 낀 어느 날 밤 찾아왔습니다.

박제상은 미사흔을 깨워 미리 준비한 배에 태웠습니다.


"왕제께서는 어서 떠나소서. 제가 남아야 추격을 늦출 수 있습니다."


미사흔은 함께 갈 것을 권했으나, 박제상은 단호했습니다.

미사흔이 바다 너머 신라로 향하는 동안, 박제상은 그가 머물던 방에 불을 밝히고 문 밖에서 보란 듯이 잠을 잤습니다. 

추격자들이 미사흔의 탈출을 알아챘을 때는 이미 배가 지평선 너머로 사라진 뒤였습니다.

분노한 왜왕은 박제상을 불꽃 위에 세우고 회유했습니다. 

"내 신하가 되면 높은 벼슬을 주겠다." 

하지만 박제상의 대답은 역사에 남을 한 문장이었습니다.

"차라리 계림(신라의 옛 이름)의 개나 돼지가 될지언정, 왜국의 신하는 되지 않겠다."

결국 그는 발바닥 가죽이 벗겨진 채 뜨거운 불 위를 걷는 형벌을 받으면서도 끝까지 신라의 신하로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육신은 왜국에서 한 줌의 재가 되었지만, 그가 지켜낸 왕제는 무사히 신라의 품에 안겼습니다.


3. 그리움이 머문 자리: 설화 유적지에 담긴 의미 풀이

박제상의 아내인 국대부인과 세 딸인 아기(阿奇), 아경(阿慶), 아영(阿榮)이 겪은 참척의 고통은 오늘날까지 특정 지명으로 남아 당시의 절절한 심경을 전해줍니다.

• 장사(長沙): 박제상이 집에 들르지도 않고 왜국으로 떠났다는 소식에 아내가 망덕사 남쪽 모래벌에 쓰러져 통곡한 자리입니다. 

민중은 이 긴 모래사장을 통해 국가의 대의 앞에 남편을 허망하게 보내야만 했던 아내의 극심한 절망감을 자신들의 고통처럼 공유했습니다.

• 벌지지(伐知旨): 넘어진 아내를 친척들이 부축했으나, 아내가 다리를 뻗고 일어나지 않으려 버틴 곳입니다. 

공적 의무 앞에 무력할 수밖에 없었던 개인의 고통을 '벋디디다(다리를 뻗다)'라는 순우리말적 표현에 담아내어, 국가 이데올로기에 저항하는 인간적인 슬픔을 구체화했습니다.

• 망부석(望夫石): 치술령 정상에서 왜국을 바라보던 아내가 결국 돌이 된 바위입니다. 

이는 단순한 죽음을 넘어, 지치지 않는 기다림이 영원히 변치 않는 불멸의 존재로 승화되었음을 상징하는 강력한 민중적 기표입니다.


망부석


• 은을암(隱乙岩): 아내의 혼이 새가 되어 숨어든 바위입니다. 

설화에 따르면 아내와 딸들은 새(乙)가 되어 숨어버렸(隱)다고 전해집니다. 

이는 죽음 이후에도 영혼이 되어 나라를 지키는 수호신이 되고자 했던 민중들의 종교적 열망과 위로가 반영된 '신성화'의 정점입니다.

이 유적들은 단순한 돌과 바위가 아니라, 국가의 대의에 희생된 한 가족의 아픔을 위로하려는 민중들의 공감 능력이 만들어낸 성소(聖소)입니다.


4. 유교적 가치의 재해석: '충(忠)'에서 '인간적 슬픔'으로

국가가 강조한 '충절'이라는 이데올로기는 민중의 구비 문학 속에서 더욱 입체적인 모습으로 변모했습니다. 

지배층의 시각에서 박제상은 국왕의 기쁨을 위해 지어진 '우식곡(憂息曲)'의 주인공이었으나, 민중의 시각은 그 이면의 그늘에 머물렀습니다.

민중들은 박제상의 아내와 딸들이 겪은 고난에 더 깊이 감응했습니다. 

설화 속에서 박제상은 영웅인 동시에 '가족을 버리고 떠난 무정한 남편'으로 묘사되기도 합니다. 

이는 국가 권력이 개인에게 일방적인 희생을 강요하는 것에 대한 민중들의 은유적인 저항을 드러냅니다. 

국가의 닫힌 결말인 '성공적인 왕제 구출'보다, 가족의 열린 상처인 '망부석'에 더 큰 가치를 부여한 것입니다.

즉, 민중은 국가적 가치인 '충'을 숭상하면서도, 지배층이 애써 외면한 '개인의 희생'을 잊지 않으려 했습니다. 

이러한 인식은 시간이 흐르며 한 가문의 긍지가 되고, 지역 문화의 소중한 자산으로 정착하게 됩니다.


5. 가문과 지역의 기억법: 영해 박씨 세보와 『징심록』의 비밀

박제상의 이야기는 기록과 구비 전승을 넘어, 가문의 혈연과 비전(秘傳)된 기록을 통해 더욱 공고해졌습니다.

• 영해 박씨 세보와 제례: 박제상을 시조로 모시는 영해 박씨 문중은 그를 가문 결속의 구심점으로 삼았습니다. 

특히 박제상의 아들 박문량(백결선생)과의 가계를 연결하여 가문의 위상을 높였으며, 이는 현재까지도 이어지는 대대적인 춘향대제와 대마도 제례를 통해 구체화되고 있습니다.

• 향토지(양산, 울산): 양산의 효충사와 울산의 치술령 유적을 연결하여 설화의 실재성을 증명했습니다.

이를 통해 박제상 설화는 지역의 정신문화적 가치를 부여하는 핵심 로컬리티 아이템으로 발전했습니다.


양산 효충사


• 징심록(澄心錄)의 전승: 박제상이 저술했다고 전해지는 이 역사서는 단순한 문헌 이상의 의미를 지닙니다. 

세종대왕은 영해 박씨 가문을 통해 입수한 이 책을 훈민정음 창제 등에 활용할 정도로 깊은 관심을 보였다고 전해집니다. 

이후 세조의 찬탈에 항거하며 금화로 은거한 박도, 박계손 등 '박씨 7현(七賢)'은 이 비전을 목숨처럼 지켰습니다. 

이들은 성리학 일변도의 시대에 용납되기 힘든 선도(仙道)의 기록인 『징심록』을 가문의 '삼신궤(三神匱)' 밑바닥에 숨겨 대대로 전수하며 가문의 학문적 자부심을 지켜왔습니다.


김종직(金宗直: 1431~1492)이 지은 치술령의 망부석 시

치술령 고갯마루 일본을 바라보니

하늘에 맞닿은 푸른 바다 가이없네

우리 님 떠나실 제 손을 흔드시더니

살았는가. 죽었는가. 소식도 끊겨

소식이 끊기고 길이 헤어졌으나

죽든 살든 언젠가는 서로 볼 날 있으리라.

하늘 향해 울부짖다 망부석이 되었으니

매운 기운 천년토록 허공 위에 푸르리라.


간절곶 삼모녀상


6. 망부석이 오늘날 우리에게 묻는 것

박제상 가족 설화는 우리에게 '희생의 무게'에 대해 질문을 던집니다. 

과거의 충절이 임금에 대한 복종이었다면, 현대적 의미의 충절은 우리가 속한 공동체를 향한 책임감과 사랑으로 치환될 수 있습니다.

중요한 것은 박제상의 영웅적 결단만큼이나, 그 뒤에 남겨진 가족들의 눈물과 기다림 또한 역사의 소중한 일부라는 점입니다. 

망부석 전설은 우리에게 다음과 같은 '총체적 역사의식'을 가르쳐줍니다.

"역사는 승리한 영웅의 기록만이 아닙니다. 그 영웅을 만들기 위해 묵묵히 고통을 감내했던 평범한 이들의 슬픔까지도 함께 기억될 때, 비로소 그 역사는 완전해집니다."

오늘날 우리가 마주하는 망부석은 단순한 바위가 아닙니다. 

그것은 국가와 개인, 대의와 가족애 사이에서 고민했던 수많은 이들의 마음을 대변하는 영원한 이정표입니다. 

우리는 박제상의 충절뿐만 아니라, 그를 위해 돌이 된 아내와 새가 된 딸들의 이름까지도 함께 기억해야 할 것입니다.


이 글은 『삼국사기』와 『삼국유사』를 비롯한 사료를 바탕으로 하되, 민간 설화·지역 전승·가문 기록을 함께 교차 검토하여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일부 내용은 사료 해석의 차이, 전승 설화, 후대 기록에 근거한 부분이 포함되어 있으며 학계에서 논쟁 중인 사안은 단정하지 않고 가능한 한 맥락 속에서 설명했습니다.

혹시 사실 오류, 다른 해석, 보완할 사료가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와 토론을 남겨주세요.

이 글이 일방적인 결론이 아니라 독자 여러분과 함께 완성해 가는 살아 있는 역사 대화가 되기를 바랍니다.



Bak Jesang is remembered in Korean history as an exemplary loyal official of Silla who sacrificed his life to rescue royal hostages held by Goguryeo and Wa (ancient Japan).

While official records emphasize his unwavering loyalty to the state, later folklore shifted focus toward the suffering of his family—especially his wife, who waited endlessly for his return and was transformed into the legendary “Waiting-for-Husband Stone” (Mangbuseok). 

By comparing Samguk Sagi and Samguk Yusa, this article explores how state-centered narratives of loyalty evolved into human-centered stories of grief and remembrance.

Geographic legends, local shrines, poetry, and clan traditions preserved emotional truths that official histories often overlooked. 

Bak Jesang’s story thus becomes more than a tale of heroic sacrifice—it is a reflection on the cost of loyalty, the pain borne by families, and the voices of ordinary people who refused to let that sorrow be forgotte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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