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득공 발해고: 남북국론과 규장각의 기록학 (Yu Deuk-gong)


 겨울 바람이 창살 틈을 스쳤다.

정조(朝鮮 왕·재위 1776–1800)가 세운 규장각(왕립 도서관·연구기관)의 서고는 서늘했고, 

책장은 종이 냄새로 가득했다.

유득공(柳得恭·1748?–1807·실학자·호 영재)은 촛불을 조금 옮겼다.

『신당서(新唐書)』와 『구당서(舊唐書)』, 『요사(遼史)』와 왜관에서 온 국서 모사본이 그의 탁자 위에 겹겹이 쌓였다.

“발해가 비어 있다.”

그가 메모지에 첫 문장을 적었다.


“규장각  / Kyujanggak”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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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장면까지 오기 전, 그의 집엔 늘 돈이 모자랐다.

1748년 11월(음력)에 태어난 뒤 아버지 유춘(士人)이 일찍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남양 홍씨가 바느질로 살림을 이었다.

1758년, 어머니는 아들을 데리고 한양(서울) 경행방으로 이사했다.

방은 좁았지만 학문은 넓어졌다.

집안의 기대는 하나였다.

“글로 집안을 일으켜라.”


유득공
나무위키

그는 시를 먼저 배웠다.

열여덟 무렵, 홍대용(洪大容·1731–1783)·박지원(朴趾源·1737–1805)·이덕무(李德懋·1741–1793)·박제가(朴齊家·1750–1805)와 서신을 주고받으며 북학파(北學派·청의 신문물 연구)의 모임에 드나들었다.

1774년 사마시(초시)에 합격해 생원(生員)이 되었고, 

1779년 규장각 검서관(檢書官·고전 정리·교감·편찬 담당)으로 뽑혔다.

초대 ‘사검서(四檢書)’의 한 사람, 이름 앞에 처음으로 “나라의 책을 만지는 손”이 붙었다.


검서관 유득공의 일상은 간단했다.

낮엔 서고에서 서지와 판본을 맞췄다.

밤엔 연행록과 지리지, 금석문 탁본을 분류하고 논거를 붙였다.

술은 조금, 시는 자주, 메모는 빽빽했다.

그의 친구들은 그를 “시인 같은 역사가, 역사학 하는 시인”이라 불렀다.


그가 먼저 묶은 것은 시와 역사였다.

1778년에 초고를 만든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1792 개정)』는 한반도와 주변 21개 옛 나라를 시로 회고하고, 각 편 뒤에 장문의 사료 인용을 덧붙였다.

시가 전장을 열면, 주석이 병참을 채웠다.

감정으로 불을 붙이고, 근거로 연기를 걷었다.

이 방식은 훗날 『발해고(渤海考·1784)』의 문장 구조와 습관이 된다.


“8세기 통일신라와 발해 동시대 지도 / Unified Silla and Balhae (8th century)”
Korea.net(Flickr) 경유, CC BY-SA 2.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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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선의 정사(正史)는 신라 중심이었다.

『삼국사기』의 서술선에서 발해는 흔적만 남았다.

유득공은 “고려가 발해사를 편찬하지 않았으니 국력이 미치지 못했다”는 단정에 가까운 문장을 적었다.

다음 문장은 냉정했다.

“그 공백을 메우겠다.”

그는 자료 목록을 정리했다.

군고(君考)·신고(臣考)·지리고(地理考)·직관고(職官考)·의장고(儀章考)·물산고(物産考)·국어고(國語考)·국서고(國書考)·속국고(屬國考).

발해의 임금과 신하, 땅과 관직, 의장과 물산, 언어와 외교문서, 그리고 속국까지—정사의 체제(體裁)를 빌려 빈 칸을 채우겠다는 뜻이었다.


『발해고』의 핵심은 두 줄로 요약된다.

“발해는 고구려의 후계이며(정통 인식), 신라와 발해는 남북국(南北國)으로 병립했다.”

단순하지만 혁명적인 재배치였다.

조선의 시간 지도에서 ‘빈 북쪽’에 이름을 써넣는 일이었기 때문이다.

그는 동전 앞뒤를 동시에 본 셈이었다.

신라의 기록과 당나라 사서를 맞대고, 일본에 보낸 발해 국서의 문구를 옮겨 적었다.

문왕의 예제(禮制)와 관직명, ‘가독부(王·어원)’ 같은 칭호, 물산 항목의 단어까지 모았다.


“발해고 표제 이미지” / “Balhaego title image”
Encykorea(공공누리 표기 확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여기서 칭찬과 비판이 함께 시작된다.

칭찬할 점은 분명했다.

사료 비판과 분류, 판본 대조, 어휘 검토를 통해 발해를 “조선사의 일부”로 끌어들였다.

이 작업은 “남북국”이라는 프레임을 낳아, 한 시대를 보는 눈을 바꿨다.

그러나 비판도 있었다.

그는 때때로 중화 질서의 상징인 기자(箕子)를 계보의 윗자리에 두었고(논쟁), 청대 중국 지리지(예: 『성경통지』 계열)의 정보를 비판 없이 수용한 흔적도 남는다(논쟁).

그런 대목은 오늘의 눈으로 보면 과감했고, 때로는 과감함이 지나쳤다.


사람들 이야기로 돌아가자.

유득공은 박지원에게서 산문과 비판을, 홍대용에게서 천문과 세계관을, 박제가에게서 통상과 실무 감각을 배웠다.

박제가는 『발해고 서(序)』를 써 주며 친구의 책에 첫 독자의 눈금을 새겼다.

이덕무는 서고에서 판본을 찾을 때마다 “이건 영재가 좋아할 물건”이라며 쪽지를 끼워줬다.

이 우정은 혼맥으로도 이어져, 그의 아들 유본학·유본예가 각각 박제가 집안, 성대중(성리학자) 집안과 연결되었다.

서재 밖의 인간관계가 서재 안의 근거망을 튼튼하게 했다.


직업인으로서의 그는 성실했다.

검서관은 정규직이 아닌 잡직이었고, 품계는 낮았다.

그럼에도 그는 ‘국가 지식의 인프라’가 무엇인지 알았다.

서고를 정리하고, 책을 교감하고, 필요한 문서를 베껴두었다.

그는 『경도잡지(京都雜志·한양 생활문화 백과)』 같은 생활·지식 기록도 남겼다.

한 도시의 골목, 직능, 풍속, 가격과 제도가 그의 눈길에서 역사로 바뀌었다.


“경도잡지 합편 내지” / “Kyŏngdo Japji (appended) pages”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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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직으로 떠난 시절도 있었다.

제천·포천·양근 등지의 군수로 근무하며 지방 행정과 세수, 장시(場市)의 흐름을 보았다.

길과 강, 창고와 부역, 관아와 시장의 연결은 그의 역사 감각을 땅 위에 고정시켰다.

그 경험은 『사군지(四郡志·한사군 비정·지리 비판서·논쟁)』와 『이십일도회고시(二十一都懷古詩)』 같은 작업에 녹아들었다.

문장만으로 역사를 쓰지 않고, 공간과 제도의 언어로 역사를 만들려 했다.


“유득공 ‘이십일도회고시’ 서문/내지” / “Yu Deuk-gong’s ‘Ishipildo Hoegosi’ folio”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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집안으로 돌아오면 그는 아버지이자 스승이었다.

“메모는 짧게, 근거는 길게.”

아들들에게 그는 장부를 남겼다.

각주와 서지, 행정 문서의 형식, 문장의 길이.

그 장부는 다음 세대 검서관의 습관이 되었다.

가정의 식탁에는 늘 책이 올라왔다.

술자리는 짧았고, 독서와 답사가 길었다.

연애담은 전하지 않지만, 친구와의 서신은 남아 있다.

시의 제목보다 주석의 길이가 더 길 때도 있었다.


『발해고』는 조용히 퍼졌다.

정조는 규장각을 통해 학술 행정을 밀어붙였고, 유득공은 그 흐름에서 자신의 칸을 채웠다.

“남북국”은 관례가 되어 갔다.

남과 북을 나란히 놓자, 신라의 장점과 한계, 발해의 강점과 공백이 함께 보였다.

역사는 상대를 갖고 빛난다.

그는 상대를 마련했다.


“1795년 정조 화성 능행 행렬도 / Royal Procession to Hwaseong, 1795”
Wikimedia Commons, Public Domai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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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모든 것이 순탄하진 않았다.

정조 사후, 조정의 바람은 바뀌었다.

1801년(순조 즉위년), 그는 벼슬에서 물러나 집필에 전념했다.

서랍에는 미완의 원고가 많았다.

시문을 모은 『영재집』, 지리지와 풍속을 곁들인 글뭉치, 발해 이후 북방 공간을 보는 눈.

그의 일기는 일정하고 단정했다.

“오늘도 교감.”

“오늘도 비교.”

그리고 어느 날은, “오늘은 걷기.”


“유득공 문집 정보 컷” / “Yu Deuk-gong’s Yeongjaejip info”
Encykorea(공공누리 표기 확인).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그가 떠난 해는 1807년이었다.

장례가 지나고도 그의 문장 습관은 남았다.

사실 제시 → 출전 표기 → 해석 → 여백.

후대의 정약용·한치윤 같은 학자들이 더 두꺼운 책을 썼을 때, 그 책의 서가 한쪽에는 유득공의 얇지만 단단한 책이 있었다.

비어 있던 칸에 ‘발해’라는 인덱스를 걸어둔 사람.

그 인덱스가 다음 사람의 목차를 바꿨다.


지금의 눈으로 본 유득공을 정리하자.

그는 조선 후기 지식 인프라의 ‘현장형 편집자’였다.

서고와 관청, 시장과 현장, 시와 사료가 그의 작업대에 함께 올랐다.

그의 공은 “발해를 한국사에 편입”한 발상만이 아니다.

문학과 행정, 지리와 외교문서, 어휘학을 조립해 “역사 기술의 방법론”을 제시한 데 있었다.

반대로, 조선중화주의적 시선과 일부 중국 지리지의 무비판적 수용(논쟁)은 그의 한계로 남는다.

한 사람의 공과 과가 한 책 안에서 서로를 비춘다.


마지막 장면을 그린다.

검서관의 밤, 종이 위에 먹이 마르지 않았다.

유득공은 책을 덮고 창을 열었다.

한양의 등불이 멀리서 깜박였다.

그는 작은 종이에 남겼다.

“신라와 발해, 남과 북, 두 나라를 함께 보라.”

창밖의 바람이 그 문장을 접어 서가 사이로 밀어 넣었다.

그 순간, 조선의 역사 지도는 조금 달라졌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했습니다.

연대기 강의가 아닌 재구성 서사이며, 

불확실은 (전승), 해석 갈림은 (논쟁), 어원은 (어원)으로 표기했습니다.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첫 등장 시 괄호로 간단히 표기했습니다.


Yu Deuk-gong (1748–1807), a Joseon scholar and royal proofreader, set out to fill Korea’s northern blank. 
In Balhaego (1784) he argued Balhae, heir to Goguryeo, stood with Silla as paired “South–North States.” Blending poetry with strict source criticism, he collated Tang histories, Japanese letters, maps, and inscriptions to reconstruct Balhae’s rulers, offices, rites, goods, and language. 
Praised for method yet limited by Sinocentric leanings, his work reset Korea’s historical ma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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