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동성국(海東盛國) 발해의 황금기를 이끈 왕, 대이진 이야기
우리 역사 속에서 '해동성국', 즉 '바다 동쪽의 융성한 나라'라 불리며 드넓은 영토를 자랑했던 나라, 발해의 최전성기를 이끈 왕은 누구였을까요?
그 주인공은 바로 발해의 제11대 왕, 대이진(大彝震)입니다.
그는 할아버지인 10대 선왕(宣王)이 닦아놓은 튼튼한 기반 위에서 발해 역사상 가장 눈부신 황금기를 꽃피운 인물입니다.
선왕이 영토 확장과 국가 통합으로 발해를 최강국으로 만들었다면, 대이진은 그 힘을 바탕으로 문화와 경제, 제도를 완성하여 '해동성국'의 명성을 온 세상에 떨쳤습니다.
이 글을 통해 대이진이 왕이 되기까지의 특별한 과정, 그의 시대에 발해가 얼마나 발전했는지, 그리고 그의 통치 이면에 숨겨진 흥미로운 이야기들을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1. 특별한 계승: 할아버지의 왕위를 이은 손자
대이진이 왕위에 오르기 전, 발해는 그의 할아버지인 선왕(宣王, 대인수)의 통치 아래 최고의 국력을 자랑하고 있었습니다.
선왕은 북쪽의 여러 말갈 부족을 통합했을 뿐만 아니라, 요동 지역에 자리 잡고 있던 고구려의 후계 국가 '소고구려(小高句麗)'까지 흡수하며 발해의 영토를 크게 넓힌 위대한 정복 군주였습니다.
이로써 발해는 고구려의 진정한 계승자로서의 위상을 확고히 다졌습니다.
이처럼 강력한 나라를 물려받은 대이진의 왕위 계승 과정은 조금 특별했습니다.
본래 왕위는 선왕의 아들이자 대이진의 아버지인 대신덕(大新德)에게 돌아가야 했지만, 그가 일찍 세상을 떠나고 말았습니다.
이로 인해 할아버지가 세상을 떠나자, 손자인 대이진이 그 뒤를 잇게 된 것입니다.
그의 등장이 평범하지 않았음은 즉위 전 칭호를 통해서도 짐작할 수 있습니다.
그는 공식적인 왕위 계승자인 '태자(太子)'가 아닌 '권지국무(權知國務)'라는 칭호를 가졌습니다.
이는 '임시로 나라의 업무를 맡는다'는 의미로, 조선시대로 비유하자면 세자로 책봉되지 않은 대군(大君) 신분으로 왕위에 오른 것과 같은 이례적인 상황이었습니다.
이렇게 왕위에 오른 대이진은 할아버지의 유산을 어떻게 더욱 발전시켰을까요?
그는 나라의 힘을 '문화'와 '외교'에서 찾았습니다.
2. 문화를 꽃피우다: 당나라와의 활발한 교류
할아버지의 검이 넓힌 영토 위에서, 대이진은 붓과 외교라는 새로운 무기를 꺼내 들었습니다.
그의 목표는 단 하나, 당나라의 선진 문화를 통째로 발해의 것으로 만드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단순히 사신을 보내 조공을 바치는 수준을 넘어, 국가 차원에서 당의 발전된 문화를 흡수하고 경제적 이익을 극대화하고자 했습니다.
왕자들을 외교관으로 삼다
대이진은 자신의 아들들을 직접 외교 무대에 내세웠습니다.
아들인 대명준, 대선성, 대연광, 대지악 등을 수십 명의 신하들과 함께 여러 차례(832년, 833년, 837년, 839년, 846년 등)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한 것입니다.
이는 당나라의 발전된 문물을 직접 보고 배우게 하려는 강력한 의지의 표현이었습니다.
이러한 노력은 큰 성과를 거두었습니다.
발해의 유학생들(해초경, 고수해 등)이 당나라의 과거 시험에 급제할 정도로 학문 수준이 높아졌고, 당나라 사신 장건장(張建章)이 책을 가지고 발해를 방문하는 등 쌍방향의 활발한 문화 교류가 이루어졌습니다.
교역으로 나라를 부강하게 만들다
대이진 시대에 발해와 당나라의 무역은 크게 융성했습니다.
당시 당나라의 등주(登州)에는 신라의 숙소인 신라관(新羅館)과 나란히 '발해관(渤海館)'이라는 공식 숙소 겸 무역 사무소가 있었습니다.
이는 발해가 당나라에게 신라와 대등한 주요 교역 파트너로 인정받았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증거입니다.
당시 양국의 주요 교역품은 다음과 같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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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의 수출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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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나라의 수출품 (발해의 수입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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담비, 호랑이, 표범 등 동물의 가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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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단(帛, 錦, 絹)과 면직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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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삼, 꿀 등 약재와 특산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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금과 은으로 만든 그릇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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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마(名馬), 구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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발해는 광활한 영토에서 나오는 담비, 호랑이는 물론 곰과 같은 맹수의 모피와 인삼, 사향 같은 희귀 약재를 독점적으로 공급하는 자원의 보고였습니다.
또한 뛰어난 기술력으로 길러낸 명마와 구리 등을 수출하여 막대한 부를 쌓았고, 이를 통해 당나라의 최고급 사치품인 비단과 금은 그릇을 수입하여 왕실과 귀족 문화를 화려하게 꽃피웠습니다.
밖으로는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고 활발한 교역으로 국부를 쌓은 대이진은, 안으로는 나라의 기틀을 더욱 단단히 다졌습니다.
바다 건너 일본을 매료시킨 발해의 멋
대이진은 당나라뿐만 아니라 일본과도 매우 밀접한 관계를 유지했습니다.
당시 발해 사신단이 일본에 도착하면 일본 조정이 발칵 뒤집힐 정도였죠.
경제적 실리: 발해는 일본에 담비 가죽을 수출하고, 일본으로부터 섬유류나 금, 수은 등을 수입했습니다.
특히 발해의 담비 가죽은 일본 귀족들 사이에서 '최고급 명품'으로 통해 없어서 못 팔 정도였습니다.
문화적 자부심: 대이진 시대의 발해 사신들은 문학적 소양이 매우 높았습니다.
일본의 문인들과 시를 주고받으며 실력을 겨뤘는데, 일본 측 기록에는 발해 사신의 문장력에 감탄했다는 내용이 자주 등장합니다.
외교적 긴장: 하지만 자존심 싸움도 치열했습니다.
발해는 스스로를 '상국(上國, 윗나라)'으로 처신하려 했고, 일본은 이를 경계하며 국서(편지)의 형식을 두고 날 선 신경전을 벌이기도 했습니다.
이는 대이진 시대 발해의 국력이 일본을 압도할 만큼 강력했음을 보여주는 반증입니다.
3. '요동성국(遼東盛國)'의 위용: 발해의 최전성기
대이진의 재위 기간(830년~857년)에 사용된 연호는 '함화(咸和)'입니다.
'모두가 평화롭다'는 의미처럼, 그의 시대는 발해 역사상 가장 평화롭고 융성했던 시기로 평가받습니다.
견고한 국가 시스템을 완성하다
대이진의 가장 큰 업적 중 하나는 발해의 행정 시스템인 '5경 15부 62주'를 완성한 것입니다.
비록 이 제도의 기틀은 선왕 때 마련되었지만, 거란의 역사서인 《요사(遼史)》는 이 업적을 대이진의 것으로 기록하며 발해를 '요동의 융성한 나라(遼東盛國)'라고 칭했습니다.
이는 대이진이 국가 통치 체제를 최종적으로 완성했음을 의미합니다.
이 시기 발해의 인구는 약 300만 명에 달했을 것으로 추정될 만큼 거대한 규모를 자랑했습니다.(추정)
강력한 중앙군을 조직하다
강력한 국가를 유지하기 위해선 튼튼한 군사력이 필수적이었습니다.
비록 발해의 중앙군 제도는 강왕(康王) 때부터 그 뿌리를 두고 있었지만, 대이진 시대에 이르러 대대적인 개편과 강화를 통해 완성되었습니다.
832년 당나라 사신 왕종우(王宗禹)의 보고에 따르면, 당시 발해는 '좌·우신책군(左右神策軍)', '좌·우삼군(左右三軍)', '120사(司)'와 같은 체계적인 중앙 군사 조직을 갖추고 있었습니다.
이 군대는 단순한 병력이 아니었습니다.
모병제(募兵制)에 의해 선발된 정예 상비군으로, 왕권을 호위하는 친위군이자 수도를 방어하는 핵심 전력이었습니다.
특히 '신책군'이라는 이름은 주목할 만합니다.
이름에서 알 수 있듯, '신책군'은 당시 최강대국이었던 당나라의 황제 친위대 명칭을 본뜬 것으로, 발해의 군사적 자신감과 중앙군의 위상을 보여줍니다.
이는 강력한 군사력을 바탕으로 중앙 집권화가 완성되었음을 뜻합니다.
돌에 새긴 자부심, 함화 4년의 기록
함화 4년(834년)의 어느 날, 발해의 관리였던 조문휴(趙文休)와 그의 어머니 이씨는 간절한 마음을 담아 석불을 세웠습니다.
"전(前) 허왕부(許王府) 참군(參軍) 기도위(騎都尉) 조문휴의 어머니 이씨"
석불을 세운 조문휴는 허왕부(許王府)라는 관청의 관리였습니다.
'허왕부'란 발해의 왕족인 허왕을 보좌하던 전용 집무실이었죠.
왕실 가족을 위한 독립된 관청이 존재했다는 사실은, 당시 발해의 행정 시스템이 얼마나 정교했는지, 그리고 대이진의 왕실이 얼마나 막강한 위세를 떨쳤는지를 유감없이 보여줍니다.
‘함화 4년 5월 8일….’
이 짧은 문구는 1,200년이 흐른 오늘날 우리에게 거대한 진실을 말해줍니다.
당시 발해인들은 당나라의 연호가 아닌, 자신들의 왕 대이진이 선포한 '함화'라는 시간을 살고 있었다는 사실입니다.
그것은 단순한 날짜 기록이 아니었습니다.
서쪽의 거대한 당나라와 어깨를 나란히 하겠다는 자주국으로서의 당당한 선언이었습니다.
부드러운 미소를 띤 이 석불은 대이진 시대 발해가 누렸던 평화와 풍요를 상징합니다.
고구려의 기백을 계승하면서도 당나라의 세련미를 흡수한, 오직 발해만이 만들어낼 수 있는 독창적인 예술의 정점이었습니다.
칼과 방패가 영토를 지켰다면, 이 정교한 석불은 발해인의 정신적 자부심을 지탱하고 있었던 셈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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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함화 4년 석불 |
발해의 '황제'를 꿈꾸다?
왕을 넘어 황제를 칭하다. 과연 대이진은 당나라의 그림자에서 벗어나 천하의 또 다른 중심을 선포하려 했을까요?
《요사》에는 대이진이 '참호개원(僭號改元)'을 했다는 매우 흥미로운 기록이 남아있습니다.
'참호(僭號)'란 '참람되게 황제의 칭호를 사용했다'는 뜻입니다.
이는 단순한 칭호 변경을 넘어, 당나라 중심의 세계관에 정면으로 도전하는 행위였습니다.
당시 동아시아에서 '황제'는 오직 당나라 황제 한 사람뿐이었기에, 대이진이 스스로 황제를 칭했다면 이는 당나라 입장에서 '반역'으로 받아들여질 수 있는 매우 대담한 선언이었습니다.
만약 이 기록이 사실이라면, 이는 당시 발해가 당나라와 대등한 독립 국가라는 엄청난 자신감과 자부심을 대외적으로 표명한 것입니다.
이처럼 눈부신 업적을 남긴 대이진의 시대는 어떻게 막을 내렸을까요?
그의 마지막은 하나의 궁금증을 남깁니다.
4. 남겨진 수수께끼와 영원한 유산
'함화(咸和)' 시대를 이끈 대이진은 할아버지 선왕의 업적을 계승하고 발전시켜 문화, 경제, 군사, 행정 모든 면에서 발해의 황금기를 완성한 위대한 군주였습니다.
하지만 그의 마지막은 하나의 미스터리를 남겼습니다.
그에게는 당나라에 사신으로 파견될 만큼 유능한 아들들(대창휘, 대명준 등)이 여럿 있었습니다.
그러나 왕위는 아들들이 아닌, 그의 동생 대건황(大虔晃)에게 돌아갔습니다.
왜 유능한 아들들을 두고 동생이 왕위를 이었을까요?
당시 발해에 어떤 정치적 변화가 있었던 것일까요?
이는 역사 속에 풀리지 않는 수수께끼로 남아있습니다.
대이진의 시대는 비록 기록이 많이 남아있지 않아 아쉬움이 큽니다.
하지만 그가 이룩한 '해동성국'의 위용은 우리 역사 속에서 발해가 얼마나 찬란한 문화를 꽃피웠던 강대국이었는지를 보여주는 가장 빛나는 증거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이 글은 발해 제11대 왕 대이진(大彝震)을 중심으로, 남아 있는 사료 기록(예: 《요사(遼史)》 등 후대 편찬 사서의 서술)과 연구에서 널리 공유되는 맥락을 토대로 구성했습니다.
다만 발해사는 원자료가 제한적이고, 특히 궁중 내 권력 구도·개별 인물의 심리·현장 장면(예: 석불 조성 순간의 분위기, 사신단의 표정과 대화)은 동시대 기록으로 촘촘히 복원하기 어렵습니다.
그래서 독자의 몰입을 위해, 사실의 뼈대(연대·제도·대외 교류의 큰 흐름) 위에 장면·대사·감정선을 “소설적 재구성”으로 덧입혔습니다.
즉, ‘무엇이 있었는가’는 최대한 기록과 합리적 추정의 범위 안에 두되, ‘어떤 느낌이었는가’는 필자의 상상력이 들어간 각색이 포함됩니다.
특히 ‘참호개원(僭號改元)’처럼 해석이 갈리거나 단정이 어려운 대목, 그리고 즉위·계승의 속사정(아들들이 아닌 동생에게 왕위가 넘어간 이유)은 확정적 결론 대신 가능성과 질문을 남기는 방식으로 서술했습니다.
Dae Yijin (Dae Ijin), Balhae’s 11th king (r. 830–857), inherited Seonwang’s expansion and completed Balhae’s golden age.
Through an unusual succession—styled ‘acting state affairs’—he sought strength through culture, diplomacy, and trade with Tang and Japan, sending his sons as envoys and fostering scholars who even passed Tang exams.
Commerce flourished (furs, ginseng, horses, copper for silk and luxury goods).
His era name Hamhwa signaled autonomy; later records credit him with completing the 5-capitals/15-commands/62-prefectures system and strengthening elite central troops.
His end remains mysterious: despite capable sons, the throne went to his brothe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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