펠로폰네소스 전쟁 완전 해설: 아테네 vs 스파르타, 역병·시칠리아 원정·아이고스포타모이까지 (Peloponnesian War)


헬라스 비극: 아테네와 스파르타, 스스로 무너진 거인들의 이야기


역사가 기록한 경고

역사는 때로 승리의 찬가가 아닌, 패자의 비명과 몰락한 제국의 잔해 위에서 쓰인다. 

여기, 찬란했던 헬라스(Hellas) 세계가 스스로를 불태우며 스러져간 이야기가 있다. 

인간의 오만과 야망이 빚어낸 거대한 비극, 그 이름은 펠로폰네소스 전쟁이다.


고대 아테네의 장군이자 역사가였던 투키디데스(Thucydides)는 이 전쟁이 그리스 세계를 송두리째 뒤흔들 거대한 재앙이 되리라 예견했다. 

그는 암피폴리스 전투의 패배 책임을 지고 머나먼 유배길에 올랐지만, 붓을 놓지 않았다. 

그는 조국 아테네의 몰락을 포함한 이 참혹한 동족상잔의 기록을 남겨, 후세의 사람들이 비슷한 상황에 직면했을 때 교훈으로 삼기를 바랐다. 


그의 『펠로폰네소스 전쟁사』는 단순한 연대기가 아니라, 권력의 본질, 제국의 흥망, 그리고 민주주의의 그림자를 파헤친 냉철한 분석서이자 한 편의 대서사시다.


이 글은 기원전 431년부터 404년까지, 무려 27년간 이어진 이 기나긴 전쟁의 막을 올리고자 한다. 

페르시아라는 거대한 적을 물리치고 황금기를 구가하던 아테네와, 전통의 육군 강국 스파르타가 어째서 서로에게 칼을 겨누게 되었는가. 

그들의 대립이 어떻게 전 헬라스 세계를 화염 속으로 몰아넣었으며, 마침내 승자 없는 파멸로 귀결되었는가. 

우리는 투키디데스의 눈을 빌려, 영화처럼 생생하게 그 비극의 현장을 재구성할 것이다. 

이것은 먼 옛날의 이야기가 아니다. 

힘의 논리가 지배하고, 집단의 광기가 이성을 마비시키며, 끝없는 분열이 공멸을 부르는 지금, 우리에게 던지는 역사의 준엄한 경고다.


고대 그리스 아테나이의 역사가 투키디데스 흉상


폭풍 전야, 갈라지는 그리스 세계

1. 두 개의 태양: 아테네와 스파르타

페르시아 전쟁의 포화가 걷힌 그리스 하늘 아래, 두 개의 태양이 떠올랐다. 

하나는 에게해의 푸른 물결 위에서 빛나는 아테네였고, 다른 하나는 펠로폰네소스의 굳건한 대지 위에 군림하는 스파르타였다. 

과거 페르시아라는 공동의 적 앞에서 어깨를 나란히 했던 두 거인은 이제 헬라스의 패권을 두고 서로를 경계하는 경쟁자가 되었다.


아테네, 그 이름은 부와 자유, 그리고 혁신의 상징이었다. 

델로스 동맹의 맹주로서 에게해의 해상 무역로를 장악한 아테네는 동맹국들로부터 거둬들인 막대한 공납금을 바탕으로 눈부신 번영을 누렸다. 

그들의 힘의 원천은 지중해 최강이라 불리는 삼단노선 함대였다. 

피레우스 항구는 온갖 상품과 사람이 들끓는 국제적 교역의 중심지였고, 그 부는 아테네의 독특한 정치 체제를 꽃피웠다. 

아테네 민주정은 토지를 소유하지 않은 무산계급의 하층민, 즉 함대의 노를 젓는 수병들에게까지 참정권을 확대했다. 

아고라 광장에서 펼쳐지는 격렬한 토론과 민회의 결정은 제국의 정책을 좌우했다. 

이 자유롭고 역동적인 민주주의의 이상은 그리스 전역의 피지배층에게 매력적인 등불로 비쳤다.


피레우스 항구

반면, 스파르타는 변화를 거부하는 견고한 성채와 같았다. 

펠로폰네소스 동맹의 수장인 스파르타는 소수의 완전 시민(스파르티아테스)이 압도적 다수의 국유 노예, 헤일로타이(Helots)를 억압하는 엄격한 군사 국가였다. 

모든 스파르타 남성은 태어나는 순간부터 국가의 소유물로 여겨져, 혹독한 훈련(아고게)을 거쳐 무적의 중장보병으로 길러졌다. 

1만 개의 창끝에 반사되는 태양빛처럼, 그들의 무력은 지상에서 당해낼 자가 없었다. 

그러나 이 막강한 군사력은 외부로의 팽창이 아닌, 내부의 공포를 억누르기 위한 족쇄이기도 했다. 

언제 터질지 모르는 헤일로타이의 반란에 대한 불안감은 스파르타 사회 전체를 짓누르는 악몽이었고, 이는 그들을 극도로 보수적이고 폐쇄적인 귀족정 체제에 안주하게 만들었다.


이렇듯 모든 면에서 대조적이었던 두 세력의 이념적 대립(민주정 대 귀족정)은 그리스 세계를 거대한 두 개의 진영으로 갈라놓았다. 

상업이 발달한 해양 폴리스들은 아테네의 민주정에 이끌렸고, 보수적인 농업 기반의 폴리스들은 스파르타의 귀족정을 지지했다. 


그리스 전역의 도시국가들 내부에서는 민중파와 귀족파 간의 내전이 끊이지 않았고, 아테네는 민중파를, 스파르타는 귀족파를 지원하며 자신들의 세력권 확장을 꾀했다. 

헬라스 세계는 마치 거대한 화약고처럼, 작은 불씨 하나에도 폭발할 위태로운 상황으로 치닫고 있었다.


2. 균열의 시작: 작은 불씨가 전쟁으로

기원전 446년, 아테네와 스파르타는 '30년 평화 조약'을 맺었다. 

그러나 이 조약은 갈등을 봉합한 것이 아니라, 단지 시간을 벌어준 것에 불과했다. 

투키디데스는 전쟁의 진정한 원인을 스파르타의 두려움에서 찾았다. 


페르시아 전쟁 이후 무섭게 팽창하는 아테네 제국의 힘이 기존의 패권국 스파르타에게는 자신들의 존립을 위협하는 실존적 위협으로 다가왔던 것이다. 

결국 이 위태로운 평화는 15년 만에 깨어지고, 두 개의 작은 분쟁이 헬라스 전체를 전화 속으로 몰아넣는 도화선이 되었다. 

이 분쟁들은 단순한 영토 다툼을 넘어, 민주정과 귀족정이라는 두 이념이 충돌하는 대리전의 성격을 띠었다.


첫 번째 불씨는 아드리아해 연안의 작은 식민 도시 에피담노스에서 점화되었다. 

기원전 436년, 에피담노스에서 민중파와 귀족파의 내전이 벌어졌다. 

민중파는 모도시인 케르키라(Corcyra)에 구원을 요청했으나 거절당하자, 도시의 창건자를 파견했던 코린토스(Corinth)에 도시를 통째로 바치겠다며 도움을 청했다. 

스파르타의 핵심 동맹국이자 강력한 해군력을 보유한 코린토스는 숙적인 케르키라를 견제할 기회로 보고 이를 수락했다.


이에 분노한 케르키라는 추방당한 귀족들을 지원하며 에피담노스에 함대를 파견했고, 기원전 435년 양측 함대는 악티온곶에서 격돌했다. 

이 해전에서 케르키라가 승리했지만, 패배에 격분한 코린토스가 대대적인 함대 재건에 나서자 위협을 느낀 케르키라는 아테네에 손을 내밀었다.


아테네 민회는 격론 끝에 '케르키라가 직접 침공당할 경우에만 돕는다'는 조건부 방위 동맹을 맺고, 10척의 함대를 파견했다. 

기원전 432년, 150척에 달하는 코린토스 함대와 110척의 케르키라 함대가 다시 맞붙었다. 

해전은 코린토스의 우세로 기울었으나, 결정적인 순간 아테네 함대가 전투에 개입했다. 

갑작스러운 제3자의 등장에 당황한 코린토스 함대는 후퇴했고, 전투는 어정쩡하게 끝났다. 

이 개입으로 아테네는 강력한 해군 동맹을 얻었지만, 코린토스의 뼈에 사무치는 원한을 사게 되었다.


"아테네인들이여! 그대들은 조약을 어기고 우리와 전쟁을 벌이고 있소. 우리와 싸우고 있는 케르키라인들을 돕기 위해 무기를 들고 우리에게 맞서고 있지 않소!" 

코린토스 사절은 분노에 차 외쳤지만, 아테네의 대답은 냉정했다. 

그들은 단지 동맹의 의무를 다했을 뿐이라고.


두 번째 불씨는 코린토스의 또 다른 식민 도시이자 델로스 동맹의 일원이었던 포테이다이아에서 터졌다. 

코린토스와의 충돌을 예견한 아테네는 포테이다이아에 해안 성벽 해체, 인질 제출, 코린토스 출신 감독관 추방 등 굴욕적인 요구를 했다. 

포테이다이아는 이를 거부하고 비밀리에 스파르타에 구원을 요청했고, '아테네가 공격해 올 경우 스파르타가 아티카를 침공하겠다'는 약속을 받아냈다. 

결국 포테이다이아는 아테네의 민주주의적 패권에 맞서 반란을 일으켰고, 코린토스는 즉시 귀족파를 지지하는 지원군을 파견했다.


코린토스를 필두로 한 동맹국들은 스파르타에 모여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횡포를 성토했다. 

메가라 대표는 아테네의 경제 봉쇄 조치로 고통받는 현실을 호소했고, 코린토스 대표는 스파르타가 동맹을 보호하는 데 미온적이라며 맹비난했다. 


스파르타 내부에서도 의견은 갈렸다. 

노련한 왕 아르키다모스 2세는 아테네의 강력한 해군력과 재정을 지적하며 전쟁 준비가 미흡함을 역설하고 신중론을 펼쳤다.


"동맹 시민 여러분, 나는 여러 전쟁을 겪어 보았소. 경험 없는 자들이 생각하듯 전쟁이 좋은 것이거나 안전한 것이라고 생각하지 마시오. 아테네는 멀리 떨어져 있고, 바다를 지배하며, 재물이 풍부하오. 성급한 결정은 재앙을 부를 뿐이오."

그러나 전쟁을 부르짖는 에포로스(민선장관) 스테넬라이다스의 강경론이 대세를 이끌었다.

"아테네인들의 긴 연설 따위는 이해할 수 없소! 그들은 자신들을 찬양할 뿐, 우리 동맹국들에게 저지른 잘못을 부인하지 않고 있소. 다른 이들은 돈도 있고 함선도 있고 말도 있지만, 우리는 훌륭한 동맹국들을 가지고 있소. 그들을 저버려서는 안 되오. 라케다이몬인답게, 즉시 진군합시다!"

결국 펠로폰네소스 동맹은 아테네가 '30년 평화 조약'을 위반했다고 선언하고, 기원전 432년 전쟁을 결의했다. 

헬라스 세계를 삼킬 거대한 폭풍이 마침내 그 서막을 올린 순간이었다.


 역병과 소모전, 끝나지 않는 비극

1. 페리클레스의 방패와 아테네의 역병

전쟁의 막이 오르자, 스파르타와 그 동맹국들은 압도적인 육군을 이끌고 아테네의 심장부 아티카로 진격했다. 

그들의 목표는 명확했다. 

아테네군을 들판으로 끌어내 전통적인 중장보병 회전으로 섬멸하고, 아테네 주변의 농지를 파괴하여 경제적 기반을 무너뜨리는 것이었다.


그러나 아테네의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는 다른 그림을 그리고 있었다. 

그는 스파르타의 강점인 육지에서 싸우는 것은 어리석은 짓이라고 판단했다. 

그의 전략은 철저한 수성이었다. 

아테네 시와 외항 피레우스를 잇는 거대한 '장벽(Long Walls)'을 방패 삼아 성안에서 굳게 버티는 것이었다. 

스파르타 육군이 아티카의 올리브나무와 포도나무를 베어 넘기는 동안, 아테네는 지중해 최강의 해군을 이용해 흑해에서 식량을 수입하고, 제국의 막대한 부를 이용해 전쟁을 치른다는 구상이었다. 

비록 그의 정확한 말은 시간에 씻겨 사라졌지만, 그가 성벽 안으로 피신하며 불안에 떠는 시민들에게 전한 논지의 정수는 다음과 같이 울려 퍼졌음에 틀림없다.


"아테네 시민 여러분! 저들이 우리의 땅과 집을 파괴하도록 내버려 두시오. 그것들은 다시 얻을 수 있는 것들이오. 하지만 우리가 지켜야 할 것은 바로 우리 자신, 즉 자유입니다. 우리의 힘은 땅이 아니라 바다에 있습니다. 제국은 강력한 함대를 가진 자의 것입니다. 저들이 아티카 전역을 유린한다 해도, 우리는 펠로폰네소스의 해안을 습격하여 그들보다 더 큰 피해를 줄 수 있습니다. 인내하십시오. 이 장벽 안에서 우리는 무적입니다!"


페리클레스의 전략은 초기에는 효과적인 듯 보였다. 

스파르타군은 견고한 성벽을 공략할 뾰족한 수가 없어 매년 농지를 유린하다 돌아갈 수밖에 없었다. 

그러나 페리클레스의 방패는 예상치 못한 내부의 적을 막아내지 못했다. 

기원전 430년 여름, 아티카 전역의 농민들이 가축과 재산을 이끌고 좁은 성벽 안으로 몰려들면서 아테네는 거대한 난민 수용소가 되었다. 

좁은 골목은 사람과 짐승으로 뒤엉켰고, 분뇨와 쓰레기 냄새가 뜨거운 여름 공기 속에 진동했다.

재앙은 예고 없이 찾아왔다. 

이집트 혹은 에티오피아에서 시작된 것으로 추정되는 끔찍한 역병이 피레우스 항구를 통해 아테네를 덮쳤다.


'아테네 역병'은 단순한 질병이 아니었다. 

그것은 도시의 영혼을 파괴하는 재앙이었다. 

역사가 투키디데스는 자신도 이 병을 앓고 살아남아 그 참상을 생생하게 기록했다.


병의 시작은 갑작스러웠다. 

사람들은 머리에 극심한 열과 함께 눈이 충혈되고 염증이 생겼다. 

목구멍과 혀에서는 피가 흘러나왔고, 숨결은 부자연스럽고 악취가 났다. 

재채기와 쉰 목소리가 뒤따랐고, 곧 가슴에 심한 기침이 닥쳤다. 

병이 위에 도달하면 구토가 시작되었고, 의사들이 이름 붙인 온갖 종류의 담즙이 쏟아져 나와 극심한 고통을 안겨주었다. 

견딜 수 없는 갈증에 시달린 환자들은 벌거벗은 채 우물로 뛰어들었다. 

한 가족의 울음소리가 잦아들면, 옆집에서 새로운 비명이 터져 나왔다.


죽음의 공포 앞에서 아테네 사회는 급격히 붕괴했다. 

신에 대한 경외심도, 인간이 만든 법률도 힘을 잃었다. 

사람들은 내일이 없다는 듯 쾌락에 몸을 던졌고, 장례 절차도 무시된 채 시신들이 거리에 나뒹굴었다.

신전은 죽어가는 이들로 가득 찼다. 

이 역병으로 아테네 인구의 3분의 1에 달하는 7만 5천에서 10만 명이 목숨을 잃었다. 


그리고 기원전 429년, 이 비극은 아테네의 가장 위대한 지도자, 페리클레스마저 앗아갔다. 

그의 죽음은 아테네 민주주의의 황금기가 저물고, 선동가들이 득세하는 중우정치의 시대가 도래했음을 알리는 서글픈 조종(弔鐘)이었다.


펠로폰네소스 전쟁 당시 전몰자 추도 연설을 하는 페리클레스

2. 전쟁의 새로운 얼굴들: 클레온과 브라시다스

페리클레스의 죽음은 아테네 정치에 거대한 공백을 남겼고, 그 자리를 채운 것은 가죽 공장 주인이자 급진적인 주전파 선동가 클레온(Cleon)이었다. 

그는 타협을 모르는 강경한 연설로 민중의 인기를 얻어 정권을 장악했다. 

이제 아테네의 전쟁은 페리클레스 시대의 신중한 소모전이 아닌, 더욱 공격적이고 무자비한 양상으로 변모했다.


한편, 스파르타에서는 유능하고 비범한 장군 브라시다스(Brasidas)가 등장했다. 

양 떼 속의 늑대처럼, 그는 전통적인 스파르타 지휘관들과 달리 대담하고 창의적인 전술을 구사했으며, 때로는 외교적 수완으로 적을 굴복시키는 능력까지 갖추고 있었다. 

전쟁은 이제 두 명의 새로운 영웅, 클레온과 브라시다스의 대결 구도로 흘러갔다.


전쟁의 흐름을 바꾼 결정적 사건은 기원전 425년, 펠로폰네소스 서쪽 해안의 필로스(Pylos)에서 벌어졌다. 

시칠리아로 향하던 아테네 함대가 폭풍을 피해 잠시 정박한 이곳에서, 장군 데모스테네스는 병사들을 설득해 해안에 요새를 구축했다. 

스파르타의 심장부와 가까운 곳에 박힌 이 가시는 스파르타에게 즉각적인 위협이 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티카 원정군까지 철수시켜 필로스를 공격했지만, 데모스테네스의 완강한 저항에 막혔다.

이 과정에서 스파르타 정규 시민 120명을 포함한 440명의 정예 병력이 인근의 스팍테리아(Sphacteria) 섬에 고립되는 대참사가 발생했다.


스팍테리아에서의 항복

"스파르타인은 항복하지 않는다"는 신화가 깨지는 순간이었다. 

충격에 빠진 스파르타는 전례 없이 평화 협상을 제안했지만, 아테네의 클레온은 과도한 요구를 내세우며 이를 걷어찼다. 

그는 스팍테리아 섬의 포위가 지지부진하자, 군 경험이 전무함에도 불구하고 자신이 직접 가서 20일 안에 상황을 끝내겠다며 호언장담했다. 

정적들의 비웃음 속에 원정길에 오른 클레온은, 놀랍게도 데모스테네스가 이미 세워둔 공격 계획 덕분에 섬 상륙에 성공했고, 마침내 292명의 스파르타군을 포로로 잡는 대공을 세웠다. 

이 사건은 스파르타의 명성에 치명타를 입혔고, 아테네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아테네의 행운은 오래가지 않았다. 

기원전 424년, 스파르타의 브라시다스는 소수의 병력을 이끌고 북쪽의 트라케 지방으로 대담한 원정을 감행했다. 

그는 아테네의 중요한 은광이자 식량 공급로였던 암피폴리스(Amphipolis)를 함락시키며 전세를 뒤집었다.


이에 격분한 클레온은 기원전 422년, 직접 군대를 이끌고 암피폴리스 탈환에 나섰다. 

그러나 그는 브라시다스의 교묘한 기습 공격에 휘말려 대패했고, 전투 중 비참한 최후를 맞았다. 

하지만 이 전투에서 스파르타 역시 그들의 가장 위대한 영웅을 잃었다. 

브라시다스 또한 승리의 순간에 치명상을 입고 전사한 것이다.


이토록 극적으로 양측의 가장 강경한 지도자가 동시에 사라지자, 전쟁에 지친 아테네와 스파르타에는 마침내 평화의 기운이 감돌기 시작했다. 

기원전 421년, 아테네의 온건파 지도자 니키아스(Nicias)의 주도로 '니키아스 평화조약(Peace of Nicias)'이 체결되었다. 

조약은 50년간의 평화를 약속했지만, 전쟁의 상처와 서로에 대한 뿌리 깊은 불신은 그대로 남아 있었다. 

이것은 진정한 평화가 아닌, 더 큰 비극을 향해 달려가는 위태로운 휴전에 불과했다.


니키아스 평화조약

오만의 절정, 시켈리아 원정

1. 힘의 논리: 멜로스의 대화

니키아스 평화조약이 가져온 불안한 평화의 시기, 아테네의 제국주의적 오만은 그 절정에 달했다. 

그들의 냉혹한 힘의 논리를 상징적으로 보여주는 사건이 바로 기원전 416년, 에게해의 작은 섬나라 멜로스(Melos) 침공이었다. 

스파르타 계 이주민들이 세운 멜로스는 전쟁 내내 중립을 지켜왔지만, 아테네는 자국의 제국 내에 독립적인 세력이 존재하는 것을 용납할 수 없었다. 


아테네는 대규모 함대를 보내 멜로스에 항복을 강요했다. 

이때 아테네 사절단과 멜로스 대표단 사이에 벌어진 대화는 투키디데스에 의해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정치현실주의의 가장 고전적인 사례로 회자된다.


아테네 사절: "우리는 페르시아를 무찔렀기에 제국을 가질 자격이 있다는 식의 미사여구는 늘어놓지 않겠다. 그대들 역시 우리에게 해를 끼치지 않았으니 공격받을 이유가 없다는 순진한 주장은 하지 말라. 그대들도 우리만큼이나 잘 알지 않는가. 인간 세상의 일에서 정의란 힘이 동등할 때나 논할 수 있는 것이다. 현실적으로 강자는 할 수 있는 것을 하고, 약자는 견뎌야만 하는 것을 견딜 뿐이다."

멜로스 대표: "그대들이 정의를 무시하고 오직 이익만을 논하니 우리도 이익의 관점에서 말하겠다. 우리를 굴복시키는 것은 다른 중립국들에게 경고가 되어 결국 그들 모두를 당신들의 적으로 만들 것이다. 당신들이 언젠가 몰락했을 때, 가장 혹독한 보복의 본보기가 될 수 있다는 것을 기억하는 것이 그대들에게도 이로울 것이다."

아테네 사절: "당신들의 호의는 우리의 나약함의 증표로 비칠 것이고, 당신들의 증오는 우리의 강력함의 증거로 받아들여질 것이기에, 당신들의 중립을 용납할 수는 없다."

멜로스 대표: "우리는 정의로운 편에 서 있기에 신들께서 우리를 도우실 것이다. 또한 우리의 부족한 힘은 우리의 동족인 스파르타인들이 명예를 위해 반드시 구원하러 올 것이기에 채워질 것이다."

아테네 사절: "신들에 관해서라면 우리도 부족함이 없다. 자연의 법칙에 따라 강자가 약자를 지배하는 것은 필연이다. 스파르타인들에 관해서라면, 그들은 자신들의 이익에 부합하지 않는 일에 명예를 걸고 위험을 무릅쓰는 자들이 아니다. 당신들의 순진함이 놀라울 따름이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중 아테네(파란색 사각형)와 멜로스 섬(빨간색)

협상은 결렬되었다. 

멜로스인들은 700년간 지켜온 자유를 위해 싸우기로 결심했다. 

그러나 그들의 기대와 달리 신의 가호는 없었고, 스파르타의 구원군도 오지 않았다. 

수개월간의 포위 끝에 멜로스는 함락되었다. 

아테네는 도시의 성인 남자들을 모두 학살하고, 여자와 아이들은 노예로 팔아버리는 잔혹한 만행을 저질렀다.


이 사건은 단순한 오만의 발현이 아니라, 치명적인 전략적, 외교적 실책이었다. 

아테네가 보여준 야만적인 ‘현실주의’는 당대 그리스인들의 상식을 뛰어넘는 행위로, 그들의 도덕적 권위를 완전히 파괴했다. 


반면, 스파르타는 비록 위선적일지언정 범그리스적 경건함을 연기하며 명분을 쌓아가고 있었다. 

아테네의 잔혹함은 다른 동맹국들의 가슴속에 지울 수 없는 증오와 경멸을 심었고, 멜로스 대표단의 예언처럼, 훗날 시칠리아에서 아테네가 약해지자마자 동맹국들이 등을 돌리는 결정적인 원인이 되었다.

아테네는 스스로 파멸의 씨앗을 뿌리고 있었다.


2. 파멸을 향한 원정: 시켈리아 참사

멜로스를 짓밟은 아테네의 오만과 야망은 마침내 그들 자신을 파멸로 이끌 거대한 도박으로 이어졌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의 결정적 전환점이 된 '시켈리아 원정(Sicilian Expedition)'의 서막이었다.


기원전 415년, 시칠리아(시켈리아) 섬의 작은 도시 세게스타(Segesta)가 이웃 도시 셀리누스와의 분쟁에서 패배했다며 아테네에 구원을 요청해왔다. 

그들은 원정 비용을 모두 부담하겠다고 약속하며, 사절단에게 도시의 모든 재물을 반복해서 보여주는 사기극으로 아테네를 현혹했다.


이 요청은 아테네의 야심가 알키비아데스(Alcibiades)에게 절호의 기회였다. 

그는 시칠리아를 정복하고, 나아가 카르타고와 이탈리아까지 제국의 판도를 넓히려는 거대한 망상을 품고 민회를 선동했다.


알키비아데스: "시민 여러분! 우리는 제국을 유지하기 위해 가만히 앉아 있어서는 안 됩니다. 끊임없이 나아가야 합니다. 시칠리아의 풍부한 자원은 우리의 힘을 더욱 강하게 만들 것이며, 그곳의 그리스인들은 우리의 해방군을 환영할 것입니다. 두려워하지 마십시오! 아테네의 영광을 위해 나아갑시다!"


온건파의 노장 니키아스는 이 무모한 원정의 위험성을 경고하며 필사적으로 반대했다. 

그는 원정을 막기 위한 최후의 수단으로, 성공을 위해서는 상상을 초월하는 규모의 함대와 병력이 필요하다고 역설했다. 

시칠리아의 부와 군사력을 과장하여 시민들에게 겁을 주려는 의도였다. 


그러나 전쟁의 열기에 휩싸인 민회는 니키아스의 의도와는 정반대로, 그의 제안을 열광적으로 받아들여 삼단노선 100여 척, 중장보병 5,100명을 포함한 아테네 역사상 최대 규모의 원정대 파병을 가결했다. 

니키아스는 자신이 그토록 반대했던 원정의 총사령관 중 한 명으로 임명되는 비극적 희극의 주인공이 되었다.


출항 직전, 아테네 시내의 헤르마(헤르메스 신의 석상)가 다수 파괴되는 불길한 사건이 발생했다. 

알키비아데스의 정적들은 이를 빌미로 그에게 신성모독 혐의를 씌웠다. 


아테네의 시장에 세워져 있던 데모스테네스의 헤르마

재판을 연기한 채 원정길에 오른 알키비아데스는 시칠리아에 도착하자마자 본국으로 소환 명령을 받았다. 

정치적 숙청을 직감한 그는 아테네로 돌아가는 대신, 적국 스파르타로 망명해버렸다. 

이 충격적인 배신으로 원정군은 가장 유능하고 공격적인 지휘관을 잃었다.


이제 원정군의 지휘는 병약하고 소극적이며 우유부단한 니키아스의 손에 전적으로 달리게 되었다. 

그는 자신의 지병과 아테네 민회의 변덕에 대한 두려움, 그리고 불길한 징조에 대한 병적인 집착 속에서 결단을 내리지 못했다. 


지휘관의 무게가 그를 짓누르는 동안, 결정적인 공격 기회는 번번이 사라졌고 그 사이 아테네의 위협에 정신을 차린 시라쿠사이는 방어 태세를 갖추었다. 

스파르타는 알키비아데스의 조언에 따라 유능한 장군 길리포스(Gylippus)를 파견했고, 그의 등장은 전세를 완전히 뒤바꾸었다. 

길리포스는 시라쿠사 시민들을 규합하고 시칠리아의 다른 도시들로부터 지원군을 이끌어내 아테네군을 압박하기 시작했다.


아테네는 데모스테네스가 이끄는 대규모 증원군을 파견했지만, 상황은 이미 돌이킬 수 없었다. 

아테네군은 야습에 실패하고 역병에 시달리며 사기가 바닥까지 떨어졌다. 

마침내 철수가 결정되었지만, 바로 그날 밤 월식이 일어났다. 


이를 신들이 내리는 끔찍한 징조로 여긴 니키아스는 점괘에 따라 27일간의 대기를 명령했다. 

이 치명적인 지연은 아테네군에게 남은 마지막 탈출 기회를 앗아갔다. 

시라쿠사 함대는 그사이 항만의 입구를 완전히 봉쇄했다.


시라쿠사 항구에 갇힌 아테네 함대는 필사적인 돌파를 시도했지만, 좁은 공간에서 기동력을 잃고 처참하게 격파당했다. 

육로로의 탈출 또한 시라쿠사 추격군에 의해 저지되었다. 

굶주림과 갈증에 지쳐 아시나루스 강가에 다다른 아테네 병사들은 물을 마시기 위해 아비규환을 벌이다가 무참히 학살당했다.


4만에 달했던 대군은 완전히 괴멸되었다. 

총사령관 니키아스와 데모스테네스는 처형당했고, 살아남은 7,000명의 포로는 시라쿠사이의 채석장에 갇혀 굶주림과 질병 속에서 비참하게 죽어갔다.


아테네 본국에 이 패배 소식이 전해졌을 때, 시민들은 처음에는 믿지 않았다. 

플루타르코스의 기록에 따르면, 소식을 전한 여행자는 유언비어를 퍼뜨린다는 죄목으로 바퀴에 묶이는 형벌을 받아야 했다. 

그러나 진실이 알려지자 아테네 전역은 충격과 공포, 그리고 절망의 비명으로 가득 찼다. 제국의 기둥뿌리가 통째로 뽑혀나간 순간이었다.


시라쿠사이 해전, 기원전 413년


몰락과 유산

1. 꺼져가는 불꽃: 아테네의 마지막 저항

시켈리아 원정의 참사는 아테네 제국의 사형 선고나 다름없었다. 

함대와 병력, 그리고 막대한 재정을 한꺼번에 잃어버린 아테네는 멸망 직전의 위기에 내몰렸다. 

이 기회를 놓치지 않고, 스파르타는 숙적 페르시아 제국과 손을 잡았다. 


페르시아의 막대한 자금 지원을 받은 스파르타는 강력한 해군을 재건하여 아테네의 숨통을 조여왔다.

데켈레이아에 구축된 스파르타의 전진 기지는 아티카의 농지를 영구적으로 위협했고, 아테네는 모든 물자를 해상에 의존해야 했다.


제국의 동맹국들은 썰물처럼 빠져나갔다. 

이오니아의 도시들이 연이어 반란을 일으켰고, 아테네의 생명줄인 흑해 곡물 수송로마저 위태로워졌다. 

도시 내부에서는 극심한 혼란이 벌어졌다. 

패전의 책임을 민주정에 돌린 귀족들이 쿠데타를 일으켜 '400인 과두정'을 수립했지만, 이마저도 내부 분열과 사모스 섬에 주둔한 해군의 반발로 오래가지 못하고 붕괴했다.


그러나 이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아테네는 꺼져가는 불꽃처럼 마지막 저항을 불태웠다. 

시민들은 신전의 금을 긁어모아 함대를 재건했고, 노예들에게 자유를 약속하며 노잡이로 충원했다. 

기적은 일어나는 듯했다. 

망명에서 돌아온 알키비아데스(불륜등의 문제로인해)의 지휘 아래 아테네 해군은 헬레스폰토스 해협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식량 수송로를 확보했다. 


특히 기원전 406년의 '아르기누사이 해전(Battle of Arginusae)'에서는 155척의 함대로 스파르타 함대 120척을 맞아 70여 척을 격파하는 압도적인 승리를 거두었다.


하지만 이 눈부신 승리는 아테네 민주정의 가장 어두운 광기를 드러내는 서막이 되었다. 

전투 직후 불어닥친 폭풍으로 인해, 승리한 함대는 물에 빠진 병사들을 구조하고 전사자들의 시신을 수습하지 못한 채 귀환해야 했다. 


고대 그리스인들에게 전사자의 시신을 수습하여 올바른 장례를 치러주는 것은 그들의 영혼을 저승으로 인도하는 신성한 의무였다. 

이 의무가 저버려졌다는 소식에 아테네 민회는 분노로 들끓었다. 

전사자 유족들의 비통한 절규가 군중의 이성을 마비시켰고, 합리적인 변론은 집단 히스테리에 휩싸인 고함 소리에 묻혔다.


이 광기 어린 재판에서 단 한 사람, 프리타네이스(500인 평의회의 당번 의원) 중 한 명이었던 소크라테스가 불법적인 집단 재판에 맞서 끝까지 반대표를 던졌다. 

그는 거대한 여론의 파도에 맞서 원칙을 지키려 했으나, 그의 목소리는 닿지 않았다. 


결국 민중은 투표를 통해 승리의 주역이었던 장군 8명 중 본국에 있던 6명을 사형에 처하는 미친 결정을 내렸다. 

페리클레스의 아들마저 이 어처구니없는 재판의 희생양이 되었다. 

아테네는 제 손으로 가장 유능한 지휘관들을 제거함으로써 스스로 패배를 자초했다.


이 자멸적인 행위의 대가는 혹독했다. 

스파르타는 페르시아의 무한한 지원을 등에 업은 불세출의 명장 리산드로스(Lysander)를 다시 해군 사령관으로 임명했다. 

기원전 405년, 리산드로스는 아테네의 식량 수송로를 다시 위협하며 아테네의 마지막 함대를 헬레스폰토스 해협의 '아이고스포타모이(Battle of Aegospotami)'로 유인했다. 


닷새째 되던 날, 아테네 함대가 경계를 풀고 흩어져 식량을 구하는 순간, 리산드로스는 전면적인 기습 공격을 감행했다. 

아테네 함대는 변변한 저항조차 하지 못하고 완전히 붕괴되었다. 

180척의 함선 중 고작 12척만이 탈출에 성공했다.

아테네의 바다는 이제 침묵했다. 

27년간의 기나긴 전쟁은 사실상 이 순간 끝이 났다.


아이고스포타미 전투

2. 승자 없는 전쟁, 그리고 남겨진 것들

아이고스포타모이에서의 참패 이후, 아테네는 육지와 바다 양쪽에서 완벽하게 포위되었다. 

식량 공급이 끊긴 도시에서는 굶주림이 시작되었지만, 시민들은 과거 자신들이 멜로스에 저질렀던 만행이 되풀이될 것을 두려워하며 6개월을 더 버텼다.


스파르타의 동맹국인 코린토스와 테베(Thebes)는 아테네를 완전히 파괴하고 시민들을 노예로 팔아야 한다고 강력하게 주장했다. 


그러나 스파르타는 의외의 결정을 내렸다. 

그들은 페르시아 전쟁 당시 헬라스를 구하는 데 큰 공을 세운 도시를 파괴할 수 없다는 명분을 내세웠다. 

실질적으로는 아테네가 사라질 경우 테베가 지나치게 강성해질 것을 견제하려는 정치적 계산이 깔려 있었다.


기원전 404년, 아테네는 마침내 항복했다. 

항복 조건은 가혹했다. 

제국의 상징이었던 장벽(Long Walls)은 해체되어야 했고, 모든 함대는 스파르타에 넘겨져야 했으며, 델로스 동맹, 즉 아테네 제국은 완전히 해체되었다. 

스파르타는 아테네에 친스파르타 과두정(30인 참주정)을 세웠다.


펠로폰네소스 전쟁은 스파르타의 승리로 끝났지만, 진정한 의미의 승자는 없었다.

• 아테네: 제국과 패권을 모두 잃었지만, 1년 만에 민주정을 복구하고 이후 코린토스 전쟁을 거치며 부분적으로 힘을 회복했다. 비록 과거의 영광을 되찾지는 못했지만, 철학과 예술의 중심지로서 문화적 명맥은 굳건히 유지했다.

• 스파르타: 승리의 과실은 독이 되었다. 그들은 제국을 경영할 능력도, 비전도 없었다. 동맹국들에게 아테네보다 더 가혹한 공물을 요구하며 ‘해방자’가 아닌 ‘압제자’로 군림했고, 제국에서 흘러들어온 부는 스파르타 내부의 엄격한 사회 체제를 무너뜨렸다. 결국 승전 후 얼마 지나지 않아 테베와의 레욱트라 전투(기원전 371년)에서 참패하며 허무하게 패권을 넘겨주었고, 다시는 일어서지 못했다.

• 그리스 세계 전체: 27년간의 소모전은 모든 폴리스의 국력을 고갈시켰다. 아테네와 스파르타라는 두 거인이 무너지면서 헬라스 세계에는 거대한 힘의 공백이 생겼다. 그리고 이 공백을 비집고 북방의 '야만인'으로 무시받던 마케도니아 왕국(Kingdom of Macedon)이 무섭게 성장했다. 결국 필리포스 2세와 그의 아들 알렉산드로스 대왕은 분열되고 쇠락한 그리스 세계 전체를 손쉽게 정복하며 새로운 시대의 주인이 되었다. 그리스인들은 자유를 위해 싸웠지만, 그들의 끝없는 분열은 결국 모든 헬라스의 자유를 앗아가는 결과를 낳았다.


에필로그: 역사는 무엇을 가르치는가

펠로폰네소스 전쟁. 

그것은 헬라스 세계가 스스로에게 가한 가장 깊은 상처였다. 

투키디데스가 남긴 이 비극의 기록은 2,400년이 지난 오늘, 우리에게 무엇을 말하고 있는가.

그것은 제국주의적 팽창의 끝이 얼마나 허무한지를 보여준다. 

끝없는 탐욕은 결국 자신을 집어삼키는 괴물이 된다.


그것은 민주주의가 얼마나 쉽게 중우정치로 타락할 수 있는지를 경고한다. 

이성적 토론이 사라지고 감정적 선동이 지배할 때, 민주주의는 스스로를 파괴하는 가장 효율적인 도구가 된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것은 끝없는 분열과 갈등이 결국 공멸을 초래한다는 역사의 가장 오래된 진리를 증명한다. 

아테네와 스파르타, 두 거인은 서로를 무너뜨리는 데 모든 것을 쏟아부었지만, 그 폐허 위에서 웃은 것은 전혀 예상치 못한 제3자였다.


역사는 반복된다. 

다만 다른 시대, 다른 이름으로. 헬라스의 비극은 과거에 갇힌 박제된 역사가 아니다. 

그것은 지금도 우리 곁에서 살아 숨 쉬며, 인간의 본성과 권력의 속성에 대해 준엄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그 질문에 답하는 것은, 오롯이 우리의 몫이다.


본 글은 투키디데스 등 고전 사료와 신뢰 가능한 2차 문헌을 바탕으로 한 서사적 재구성입니다.
연설·대사·심리 묘사는 역사적 맥락을 따른 각색이며, 불확실한 대목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으로 표기했습니다.
연도·지명·수치는 고대 사료 기준을 우선하되 최신 연구와 상충할 경우 본문 맥락상 타당한 견해를 병기했습니다.
전쟁·학살 등 잔혹 묘사는 사료 범위 내에서 최소화했습니다. 
오류 제보 시 신속히 정정합니다.


From 431–404 BCE, Athens and Sparta fought a spiraling war sparked by Corcyra and Potidaea. 
Pericles’ defensive strategy met plague; Pylos lifted Athens, Brasidas checked it, and the Peace of Nicias faltered. 
Melos exposed imperial ruthlessness; the Sicilian Expedition ruined Athens. 
With Decelea and Persian gold, Sparta won at Aegospotami; Athens fell in 404. 
The war left Greece exhausted, enabling Macedon—and warns how hubris, faction, and fear undo democrac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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