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늑대, 양규: 잊혀진 영웅의 불꽃
무너지는 하늘, 떠오르는 혜성
서기 1009년, 고려의 하늘은 먹구름으로 뒤덮여 있었다.
제7대 왕 목종의 어머니인 천추태후와 그녀의 총애를 받던 김치양이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들은 목종을 허수아비로 만들고 자신들의 아들을 다음 보위에 올리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냈고, 왕의 권위는 바람 앞의 등불처럼 위태로웠다.
국정은 문란해지고 민심은 흉흉했다.
이 혼돈의 심연을 꿰뚫어 본 이가 있었으니, 바로 서북면의 무신 강조(康兆)였다.
그는 끓어오르는 분노를 참지 못하고 마침내 칼을 빼 들었다.
"역신 김치양을 처단하고 사직을 바로 세운다!"
그의 군대가 개경으로 향하는 길, 목종은 폐위되고 대량원군 왕순이 새로운 용상에 오르니, 그가 바로 고려 제8대 왕 현종(顯宗)이다.
이 피비린내 나는 정변은 고려 내부의 혼란을 잠재웠지만, 압록강 너머의 거란(요나라)에게는 더할 나위 없이 좋은 침략의 명분을 던져주었다.
"왕을 시해하고 권력을 찬탈한 역적 강조를 토벌한다!"
거란은 이 구실을 내세워 거대한 전쟁의 서막을 열었다.
이 격동의 시대, 역사의 무대 뒤편에 한 사내가 있었다.
그의 이름은 양규(楊規).
전쟁 이전 그의 행적에 대한 기록은 정5품 형부낭중(刑部郎中)을 지냈다는 것뿐, 너무나도 미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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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고려거란전쟁'의 양규 |
법률을 다루던 문신이었을 가능성이 컸고, 안악 양씨(安岳 楊氏)로서 고구려, 발해 귀족의 후예였을 것이라는 설 (논쟁)만이 그의 혈통을 어렴풋이 짐작게 할 뿐이었다.
그런 그가 정변 직후, 강조의 후임으로 서북면의 최고 군사 지휘관인 도순검사(都巡檢使)라는 중책을 맡게 된다.
이는 강조의 절대적인 신임 없이는 불가능한 인사였다.
출정을 앞둔 어느 날 밤, 강조는 양규의 손을 잡고 이렇게 말했을지도 모른다.
"양 동지, 나는 개경에서 조정을 바로 세울 것이니, 동지는 고려의 심장인 서북면을 맡아주시오. 그곳은 단순한 국경이 아니라 우리 고려의 정신이 살아 숨 쉬는 곳이오. 동지의 강직함과 지략이라면 능히 그 책무를 감당할 수 있을 것이라 믿소."
양규는 그저 묵묵히 고개를 끄덕였을 것이다.
그의 눈빛에는 흔들림 없는 충심과 비장한 각오가 서려 있었다.
그는 몰랐다.
자신이 곧 고려의 운명을 어깨에 짊어지고 역사의 가장 어두운 밤을 홀로 밝히는 혜성이 되리라는 것을.
40만 대군의 파도 앞에 서다
1장: 흥화진(興化鎭)의 결사항전
1010년 11월, 겨울의 찬 서리가 대지를 뒤덮을 무렵, 거란의 황제 성종(聖宗)은 친히 40만 대군을 이끌고 압록강을 건넜다.
하늘을 뒤덮은 깃발과 땅을 울리는 말발굽 소리는 마치 거대한 해일이 고려를 집어삼키려는 듯 장엄하고도 위협적이었다.
거란 대군의 첫 번째 목표는 고려 최전방의 요새, 흥화진(興化鎭)이었다.
성을 지키는 고려군은 고작 3천. 40만 대 3천.
누구도 승리를 장담할 수 없는, 아니, 애초에 싸움 자체가 성립되지 않는 압도적인 전력 차이였다.
거란 성종은 힘으로 성을 부수기보다 심리전으로 문을 열고자 했다.
그는 사로잡은 고려 백성들에게 비단옷을 입혀 보내 항복을 권유하고, "역적 강조를 잡아 보내면 즉시 군사를 물리겠다"는 회유책을 썼다.
심지어 강조의 명의로 위조된 항복 권유 서신까지 보냈다.
그러나 양규의 대답은 강철처럼 단호했다.
"나는 왕명을 받고 왔지, 강조의 명을 받은 것이 아니다!"
그의 충심은 왕 개인을 넘어 '고려'라는 국가 그 자체를 향하고 있었다.
회유가 통하지 않자, 거란은 마침내 총공격을 개시했다.
일주일간 이어진 공방전은 처절함 그 자체였다.
고려군은 독이 발라진 마름쇠(마음새)를 길목에 뿌려 거란 기병의 발을 묶었고, 소 여덟 마리의 힘이 필요하다는 강력한 쇠뇌 '팔로어(八弩)'와 자동 석궁 '노(弩)'를 쏘아대며 적의 접근을 막았다.
고려의 성벽은 돌을 삼각형으로 깎아 교차하여 쌓는 독특한 구조로, 충격을 받을수록 서로 맞물려 더욱 견고해졌다.
거란의 공성 무기들은 이 견고한 성벽 앞에서 무력했다.
양규는 직접 성벽에 올라 활을 쏘았다.
쉴 새 없이 활시위를 당기는 그의 손가락은 피투성이가 되었고, 시위가 끊어지면 이를 갈며 다시 묶어 쏘기를 반복했다.
그의 불굴의 의지는 3천 고려군의 심장에 불을 지폈다.
결국 거란군은 흥화진을 '포기'하고 일부 병력만 남긴 채 남하할 수밖에 없었다.
2장: 통주(通州)의 비극과 곽주(郭州)의 기적
양규가 흥화진에서 시간을 버는 동안, 남쪽에서는 비보가 들려왔다.
강조가 이끄는 30만 고려 주력군이 통주(通州) 전투에서 거란군에게 참패하고, 강조 자신은 사로잡혀 처형당했다는 소식이었다.
고려의 방패가 산산조각 난 순간이었다.
국가는 패망 직전의 위기에 내몰렸다.
흥화진에 고립된 양규는 깊은 고뇌에 빠졌다.
이대로 성을 지키기만 해서는 서서히 말라 죽을 뿐이다.
그는 결단했다. "성을 나간다. 적의 심장부를 역으로 찌른다!"
이는 상식을 파괴하는, 늑대와 같은 대담한 결단이었다.
양규는 흥화진의 정병 700명과 통주에서 수습한 패잔병 1,000명을 이끌고 어둠을 틈타 움직였다.
그들의 목표는 거란군 6,000명이 주둔하며 보급기지로 삼고 있던 곽주성(郭州城)이었다.
1,700명의 결사대는 한밤중 곽주성을 기습했다.
방심하고 있던 거란군은 속수무책으로 무너졌다.
이 기적적인 승리는 세계 전쟁사에서도 유례를 찾기 힘든 일이었다.
당시 고려사에는 곽주에 큰 별똥별이 떨어졌다는 기록이 남아있는데, 이 운석이 성벽 일부를 무너뜨려 기습에 결정적인 도움을 주었을 것이라는 설 (전승)이 전해질 정도였다.
곽주성 탈환은 단순한 1승이 아니었다.
전략적 관점에서 이는 2차 고려-거란 전쟁의 판도를 뒤흔든 신의 한 수였다.
40만 대군은 설사 과장된 숫자라 하더라도 그 병참의 규모는 어마어마했다.
적진 깊숙이 진격할수록 보급선은 실처럼 가늘고 길어져 치명적인 약점이 된다.
곽주성은 바로 그 보급선을 압록강 너머 본국과 연결하는 핵심적인 병참 거점이었다.
양규의 곽주성 점령은 거란의 주력 부대를 적대적인 바다 한가운데 떠 있는 고립된 섬으로 만들어 버렸다.
굶주림과 포위의 위협 앞에 놓인 거란 성종에게 선택지는 단 하나, 점령한 수도 개경을 버리고 철군하는 것뿐이었다.
양규의 결단 하나가 패배 직전의 고려에 역전의 발판을 마련한 것이다.
꺼지지 않는 불꽃, 구국의 유격전
3장: 늑대의 사냥이 시작되다
1011년 1월, 거란군은 수도 개경을 불태우고 수만 명의 고려 백성을 포로로 끌고 북으로 돌아가기 시작했다.
그들의 퇴각로는 약탈과 절규로 얼룩졌다.
그러나 그들 뒤에는 죽음의 그림자가 맹렬히 뒤쫓고 있었다.
바로 양규의 늑대 부대였다.
양규의 늑대 사냥은 단순한 복수전이 아니었다.
그것은 거란이라는 거인의 아킬레스건(길고 취약한 보급선과 지친 후위 부대)을 집요하게 물어뜯는 정교한 비대칭 전략이었다.
그는 거란의 주력 기병대가 위력을 발휘하기 어려운 험준한 북방의 지형을 이용해, 속도와 기습, 지리에 대한 해박한 지식으로 적의 가장 약한 고리를 끊임없이 공격했다.
이는 거란군에게 물리적 피해를 넘어 극심한 심리적 위축을 안겨주었다.
어디서 나타날지 모르는 고려 결사대의 존재는 거란 황제부터 말단 병사에 이르기까지 어마어마한 공포감을 심어주었다.
양규의 사냥은 거침없었다.
그는 한 달 동안 무려 일곱 차례의 유격전을 벌이며 퇴각하는 거란군을 기습했다.
• 무로대(無老代) 전투: 거란군 2,000여 명을 사살하고, 포로로 끌려가던 백성 3,000여 명을 구출했다.
• 이수(梨樹)와 석령(石嶺) 전투: 맹렬한 추격전 끝에 거란군 2,500여 명을 베고, 백성 1,000여 명을 되찾았다.
• 여리참(余里站) 전투: 단 하루 동안 세 번의 전투를 벌여 모두 승리, 거란군 1,000여 명을 죽이고 또다시 백성 1,000여 명을 구출하는 신기를 보였다.
이 과정에서 귀주(龜州)의 별장(別將) 김숙흥(金叔興)이 이끄는 부대가 합류했다.
그들 역시 협곡에서 거란군 1만 명을 격파한 용장들이었다.
두 부대는 하나가 되어 거란군 본대를 끈질기게 추격했다.
그들의 싸움은 영토나 전리품을 위한 것이 아니었다.
"포로들을 버릴 수 없다!"는 절규처럼, 그들은 오직 끌려가는 백성을 구출하겠다는 일념 하나로 불가능한 싸움을 이어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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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군 반격 지도 (경향신문) |
4장: 애전(艾田)의 별이 지다
1011년 1월 28일, 애전(艾田).
양규와 김숙흥의 연합부대는 거란군 선봉대를 격파하며 또 한 번의 승리를 거두었다.
그러나 그 기쁨도 잠시, 지평선 너머에서 거대한 먼지 구름이 피어올랐다.
거란 황제 성종이 직접 이끄는 최정예 본대였다.
피할 수 없는,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수적으로 절대적인 열세.
후퇴하여 목숨을 보전할 수도 있었다.
그러나 그들은 물러서지 않았다.
후퇴는 곧 방금 목숨을 걸고 구출한 3만 백성을 다시 적의 손아귀에 넘겨주는 것을 의미했다.
양규와 김숙흥, 그리고 남은 고려 결사대에게 선택지는 없었다.
그들은 백성들이 안전하게 달아날 시간을 벌어주기 위한 인간 방패가 되기로 결심한 듯, 거란의 본대를 향해 맞서 싸웠다.
화살이 다 떨어지고, 손에 쥔 칼날이 무뎌질 때까지 그들은 싸웠다.
병사들이 하나둘 쓰러져가도, 그들은 멈추지 않았다.
훗날 고려 문종(文宗)은 제서(制書)에서 이들의 최후를 이렇게 기록했다.
"마치 고슴도치 털과 같이 화살을 맞아서 함께 전쟁 중에 전사하였다."
온몸에 화살이 박힌 채 끝까지 서서 적을 노려보았을 두 영웅의 모습이 눈앞에 그려지는 듯하다.
양규와 김숙흥은 그렇게 애전의 별이 되어 졌지만, 그들의 희생은 헛되지 않았다.
그들이 시간을 버는 동안 3만 백성은 무사히 탈출했고, 전투가 끝난 직후, 양규의 뜻을 이어받은 흥화진사 정성(鄭成)이 이끄는 군사들이 압록강을 건너는 거란군의 후미를 쳐 막대한 피해를 입혔다.
전쟁의 마지막까지 고려의 칼날은 적의 심장을 겨누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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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규의 죽음 |
그의 유산은 영원하리라
전쟁이 끝나고, 양규의 전사 소식은 수도 개경에 전해졌다.
피난에서 돌아온 현종은 비통함을 감추지 못했다.
그는 친히 교서(敎書)를 써 양규의 아내에게 내렸다.
그 글에는 한 영웅에 대한 왕의 존경과 슬픔이 절절히 담겨 있었다.
"한 번 칼을 뽑으면 만 명의 적군들이 다투어 달아나고, 강궁을 당기면 모든 군대가 항복하였다. ... 뛰어난 공을 항상 기억하여..."
양규는 사후에 공부상서(工部尙書)라는 지금의 장관급 직책에 추증되었고, 그의 아내에게는 평생 벼 100석이 하사되었다.
아들 양대춘(楊帶春) 또한 관직을 받아 훗날 재상의 자리에까지 오르며 가문의 명예를 이었다.
그에 대한 기억은 시대를 넘어 계속되었다.
문종은 그의 초상을 공신들의 전각인 공신각(功臣閣)에 걸게 했고, 고려가 멸망한 후 조선 시대에 이르러서도 그의 이름은 잊히지 않았다.
세조(世祖)는 위대한 무장을 기리는 사당을 세울 때 을지문덕, 강감찬 등과 함께 양규를 거론했으며, 조선 후기에 편찬된 해동명장전(海東名將傳)에도 그의 전기가 당당히 실렸다.
하지만 그의 활약상이 벌어진 주 무대가 현재의 북한 지역에 집중되어 있어, 안타깝게도 현대에 들어 그의 이름은 대중에게 낯선 것이 되었다.
그러나 최근, 드라마 등을 통해 그의 위대한 업적이 다시금 빛을 발하고 있다.
잊혀졌던 영웅이 천 년의 시간을 넘어 우리 곁으로 돌아오고 있는 것이다.
'고려의 늑대, 양규'를 통해 배우는 교훈
양규의 이야기는 단순한 과거의 기록이 아니라, 오늘을 사는 우리에게 깊은 울림을 주는 교훈을 담고 있다.
진정한 리더십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포기하지 않고 희망을 만들어내며, 자신의 안위보다 공동체와 백성을 우선하는 희생정신에서 나온다.
국가의 주력군이 궤멸되고 수도가 함락된 패배 직전의 상황에서도, 한 사람의 불굴의 의지와 대담한 결단이 역사의 물줄기를 바꾸고 나라를 구할 수 있다.
비록 이름이 널리 알려지지 않았더라도, 나라와 공동체를 위해 모든 것을 바친 수많은 영웅들이 존재한다.
그들을 기억하고 그들의 숭고한 정신을 기리는 것은 이 시대를 살아가는 우리의 당연한 의무이다.
이 글은 사료·연대기(《고려사》 등)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서사를 재구성 했습니다.
사실과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전승)/(논쟁)으로 표기했으며, 수치·병력·지명 일부는 사료 간 차이가 있습니다.
본문은 독자 몰입을 위한 장면·대사 묘사를 포함하지만 핵심 사건의 연표와 맥락은 사료에 부합하도록 엄수했습니다.
Set in the 1010–1011 Khitan invasion of Goryeo, this narrative follows Yang Gyu, a little-recorded official turned frontier commander.
After resisting at Heunghwajin, he exploited Khitan logistics, striking Gwakju (contested) and raiding retreating columns to free thousands (disputed).
He fell at Aejeon while covering civilians’ escape.
Figures and episodes vary by source; later dynasties honored him as a model of loyal, risk-taking leader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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