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영실의 일대기: 노비에서 세종의 과학자가 되기까지 (Jang Yeong-sil)


장영실의 일대기: 조선의 시간을 훔친 사내


제1장. 동래현, 천민의 별이 뜨다

1.1. 불길한 출생과 사회적 배경

1390년경, 조선이 개국한 지 얼마 되지 않은 경상도 동래현 (부산 동래 지역)의 작은 마을은 엄격한 신분 질서의 그림자 아래 놓여 있었다. 

장영실 (蔣英實)은 그 그림자 속에서 태어났다. 

그의 혈통은 당시 사회에서 가장 낮은 곳에 뿌리를 두고 있었다. 

아비는 본래 원나라 (大元, 중국)의 소주(蘇州) 혹은 항주(杭州) 출신 귀화인 (원나라 사람)이었고, 어미는 동래현의 관노 (官奴)이자 기생이었다. 

당시 조선 사회의 엄격한 규율, 즉 부모 중 한쪽이라도 천민이면 자식 또한 천민이 되는 천자수모(賤者隨母)의 제도에 따라, 장영실은 태어남과 동시에 동래현의 관노 (관청 소속 노비)가 되는 운명을 받아들였다.

(논쟁)장영실의 아버지가 정말 원나라 출신 귀화인이었는지, 혹은 아산 장씨 (牙山蔣氏)의 8세손인 장성휘(蔣成暉) (고려 말 전서 역임)의 아들이었으나 고려 말 조선 건국 혼란기에 집안이 몰락하여 노비 신세가 되었다는 주장이 (아산 장씨 종친회의 주장)으로 전해져 (논쟁)이 있다. 

다만 역사적 정사(正史)인 《세종실록》에는 세종 (조선의 4대 국왕)이 직접 그의 아비가 원나라 소주·항주 사람이며 어미는 기생이었다고 언급하고 있어, 학계에서는 이 기록을 가장 신빙성 있게 본다.


어린 장영실은 관노의 신분이었으나, 손끝은 달랐다. 

그의 공교(工巧)한 솜씨와 똑똑한 성질은 이미 동래현 관아에서도 정평이 나 있었다. 

농기구는 물론, 관청의 사소한 기계장치까지 척척 고쳐내는 그의 재주는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렸다.


장영실 표준영정


1.2. 가뭄을 이겨낸 재주와 태종의 눈

1400년 (정종 2년) 무렵, 영남 (경상도 지역) 지방에 극심한 가뭄이 들었다. 

농업이 국가의 근본이던 조선에서, 가뭄은 곧 백성의 생존 문제이자 국가 재정의 붕괴를 의미했다.

장영실은 이 위기 속에서 그의 천재성을 발휘했다. 

그는 강물을 끌어들이기 위한 수로를 파고, 먼 곳의 물을 끌어올릴 수 있는 수차 (오늘날의 양수기 펌프와 유사한 기구)를 개발해냈다 (전승). 

이 기술 덕분에 동래현은 가뭄을 극복할 수 있었고, 백성들은 흉년을 면했다.


동래현감은 장영실의 공로를 높이 사 조정에 추천했다. 

당시 태종 (조선의 3대 국왕, 세종의 아버지)은 도촌법 (도 단위로 인재를 추천받는 제도)을 시행하며 전국 인재를 모으고 있었고, 장영실은 이 도촌법을 통해 한양으로 불려 올라갔다.

장영실의 삶은 태종의 눈에 들면서 처음으로 빛을 보기 시작했다. 

태종은 그의 실력을 인정하여 ‘보호’했고, 이후 세종 (당시 충녕대군) 역시 아버지의 뜻을 이어 장영실을 아끼게 된다.


제2장. 세종의 시대, 파격적인 등용

2.1. 신분 상승의 첫 걸음: 논란의 상의원 별좌

궁궐에 입궐한 장영실은 처음에는 활자를 주조하는 주자소 (鑄字所)에서 일했다. 

이후 그는 왕의 의복과 궁중 일용품, 금은보화를 관리하는 상의원 (尙衣院)으로 옮겨졌다.

1423년 (세종 5년), 세종은 장영실을 노비 신분에서 벗어나 상의원 별좌 (別坐, 정5품 관직)에 임명하려 했다. 

이는 신분제를 근간으로 하던 조선 사회에서 매우 파격적인 결정이었다. 

세종은 "사람을 쓰는 데 신분이 아니라 능력을 본다"는 인재 등용의 확고한 원칙을 실천한 것이다.


세종은 대신들에게 장영실의 등용에 대해 의견을 물었다.

세종: "영실의 공교한 솜씨를 내가 아끼거늘, 상의원 별좌를 시키려 하네." 

이조 판서 허조 (조선 초기의 문신): "기생의 소생을 상의원에 임용할 수 없습니다. 이는 신분 질서를 해치는 일입니다." 

(엄격한 반상 (班常)의 구분이 뚜렷했던 당시, 천민의 승진은 유교적 사대부들에게 큰 충격이었다.) 

병조 판서 조말생 (세종 시대의 무신): "이런 무리는 오히려 상의원에 더욱 적합합니다. 재주를 쓰는 것이 마땅합니다."


의견이 엇갈리자 세종은 잠시 결정을 미루었다. 

그러나 이내 유정현 (태종과 세종 대의 공신) 등의 지지를 얻어 결국 장영실에게 상의원 별좌의 관직을 내렸다.

(논란)일부 학자들은 실록 기록상 양반 관료들이 장영실의 등용에 강력하게 반대했다는 증거는 없으며, 국가에 공이 있다면 노비 출신도 고위 관직에 오르는 사례가 매우 많았다고 지적한다. 

하지만 장영실의 발탁은 세종의 파격적인 인재 등용 (임현사능) 정책의 상징으로 남아 조선 사회 전체에 깊은 울림을 주었다.


2.2. 명나라 유학과 지식의 탐험

세종은 조선만의 독자적인 역법 (曆法, 달력 계산법)과 과학 기술을 확립하고자 했다. 

당시 조선은 중국에서 만들어진 역법을 사용하고 있었는데, 이는 조선 땅의 환경과 맞지 않아 백성들이 농사 시기를 정하는 데 큰 곤란함을 겪고 있었다.


1421년 (세종 3년), 세종은 천문 기구 연구를 위해 장영실을 포함한 사신단을 명나라에 파견했다. 

이는 천민 출신 기술자가 국가 대표 자격으로 선진 문물을 배우러 떠나는 전례 없는 일이었다.


명나라에서의 유학은 순탄치 않았다. 

천문 관측 기술은 국방과 왕권의 상징이었기에, 명 황제의 허락 없이는 천문대 (관상대)나 궁궐 깊은 곳의 물시계를 구경조차 할 수 없었다.

하지만 장영실은 좌절하지 않았다. 

그는 북경 (베이징)의 유리창 거리 (세계 여러 나라의 서적과 물품이 모이는 곳)를 찾아다녔다. 

그곳에서 그는 유럽과 아라비아의 발달된 과학 기술에 대한 서적들을 눈에 익혔고, 물시계와 천문 관측 기구에 대한 자료들을 수집했다.


1년여의 유학을 마치고 조선으로 돌아온 장영실은 곧바로 이천 (李蕆, 조선 전기의 공조판서 겸 기술 총책임자)의 지휘 아래, 세종의 천문 프로젝트의 핵심 인물로 자리 잡았다.


2.3. 조선의 시간을 창조하다: 자격루와 앙부일구

장영실은 이천, 정초 (세종 시대의 문신, 과학자), 김돈 (집현전 학자) 등의 이론적 도움을 받아 수많은 발명품들을 쏟아냈다.


1) 혼천의 (渾天儀)와 간의 (簡儀) 

1432년 (세종 14년)부터 천문관측 기구인 간의를 제작하며, 한양 (조선 수도)의 위도 (북위 38도 부근)를 정확히 측정했다. 

이듬해인 1433년 (세종 15년)에는 간의를 발전시킨 혼천의를 완성했다.


2) 자격루 (自擊漏, 자동 물시계) – 시간의 민주화 

장영실의 대표작 중 하나인 자격루는 1434년 (세종 16년)에 완성되었다. 이전에 사용하던 물시계 (누기)는 사람이 옆에서 지켜보다가 시간에 맞춰 종을 쳐야 했기 때문에 (수동식 물시계) 실수 (차착)가 잦았고, 이로 인해 시간을 잘못 알린 관리는 중벌을 피할 수 없었다.

세종은 이 문제를 해결하고 시간을 백성에게 돌려주기 위해, 자동으로 시각을 알리는 장치를 장영실에게 명했다.


세종: "사람의 힘을 빌리지 아니하도록, 스스로 종을 울리는 장치를 만들라. 백성들이 시간에 맞춰 생활할 수 있어야 한다."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는 물의 흐름을 이용해 수수호 (受水壺, 물을 받는 항아리)의 잣대 (부전, 浮箭)가 떠오르면, 이 잣대 끝의 가로쇠 (젓가락 모양의 철제 막대)가 구슬 방출 장치인 방목 (方木, 네모난 나무상자 형태의 시각 측정 장치) 내부의 기계를 격발시키고, 낙하한 구슬이 인형들을 움직여 종, 북, 징을 자동으로 울리게 하는 혁신적인 디지털 시계였다.


(논쟁) 자격루의 핵심 부품인 방목 (方木) 내부의 구슬 방출 장치 (주전)는 기록이 소실되어 정확한 구조를 알 수 없었으나, 최근 인사동 유물 발굴과 (보루각기) 기록 재해석 연구를 통해, 구슬이 바깥으로 자유 낙하하여 바구니로 받는 (비과학적인) 방식이 아니라, 방목 내부에 형성된 일정한 통로 (隔)를 통해 제어된 방식으로 낙하함을 밝혀내는 (새로운 가설) 연구 결과가 제시되었다. 

이는 장영실의 설계가 불확실성을 허용하지 않는 극도로 정밀하고 과학적인 장치였음을 입증한다.


3) 앙부일구 (仰釜日晷, 해시계) – 백성의 공공 시계

같은 해 장영실은 앙부일구도 완성했다. 

이는 하늘을 우러러보는 솥 (仰釜) 모양이라 이름 붙여졌으며, 그림자를 이용해 시간을 측정했다. 

이 시계는 누구나 시간을 알 수 있도록 종묘 (宗廟) 앞 거리와 혜정교 (惠政橋, 다리) 등 사람이 많이 모이는 공공장소에 설치되었다. 

특히 글을 모르는 백성들을 위해 시각선에 열두 띠 동물 (12지신)을 새겨 넣었고, 24절기선이 새겨져 농사에 필수적인 계절의 변화까지 알 수 있도록 했다.

장영실: "밤이나 구름이 낀 날에도 시간을 알 수 있다면, 농부들이 얼마나 기뻐할까..." 


보물 앙부일구(仰釜日晷)


2.4. 최고의 기술자, 대호군에 오르다

자격루의 성공으로 세종은 장영실에게 호군 (護軍, 정4품 관직)의 관직을 내려주려 했다. 

이 때에도 황희등의 대신들이 노비 출신이었던 김인 (태종 때 발탁된 관노)의 예를 들어, 장영실의 등용을 적극적으로 옹호했다.


세종: "영실의 사람됨이 비단 공교한 솜씨만 있는 것이 아니라 성질이 똑똑하기가 보통보다 뛰어나서, 매일 (講武)할 때에는 나의 곁에 두고 내시를 대신하여 명령을 전하기도 하였다. 만약 이 사람이 아니었다면 자격궁루 (自擊宮漏)를 결코 만들어 내지 못했을 것이다." (세종이 장영실에 대한 깊은 신뢰를 드러낸 구절)


장영실은 이후 종3품의 대호군 (大護軍, 높은 무관직)에까지 승진하여, 조선 최고의 기술자이자 관료로서 세종의 시대를 이끌었다.


4) 측우기 (測雨器)와 수표 (水標)

1441년 (세종 23년), 장영실은 세종의 아들 문종 (당시 왕세자 이향)의 아이디어를 발전시켜 세계 최초의 강우량 측정기인 측우기를 제작했다.

측우기는 땅에 스며든 물의 깊이를 측정하던 기존의 방식에서 벗어나, 비를 금속제 원통형 그릇에 받아 표준화된 눈금 자 (주척, 周尺)로 정량적으로 측정할 수 있도록 고안된 발명품이었다. 

1442년 (세종 24년)부터 전국적으로 보급되어, 농업 기상학의 획기적인 전기를 마련했다. 

그 정밀함은 오늘날 WMO (세계기상기구)의 표준 측정 오차에도 합격할 만큼 뛰어나다.

장영실은 또한 하천의 수위 (水位)를 측정하는 수표를 청계천 (서울 중심을 흐르는 하천) 등에 설치하여, 홍수와 가뭄에 대비하는 체계적인 시스템을 구축했다.


전국적으로 일관된 강우량 측량도구인 측우기와 측우대


제3장. 안여 사건과 석연치 않은 결별

3.1. 안여 파손, 불경죄의 덫

세종의 과학 프로젝트가 절정에 달하고 있던 1442년 (세종 24년), 장영실의 명예를 송두리째 무너뜨리는 사건이 발생한다.

당시 갖가지 질병 (비만, 당뇨병, 강직성 척추염 등)으로 고생하던 세종은 온천 (온양, 이천 등 온천 지역)에 자주 행차했는데, 장영실은 임금이 탈 안여 (安輿, 임금이 타는 전용 가마 또는 수레 형태의 어가)의 제작 감독을 맡았다.


그러나 그 어가는 세종이 타기도 전에 튼튼하지 못하여 부러지고 허물어지는 사고가 발생했다. 

이는 단순한 기계 결함 이상의 의미를 지녔다. 

'군주=나라'이던 왕조국가에서 임금의 안전과 직결된 문제였으므로, 이는 임금에 대한 불충, 즉 대불경죄 (大不敬罪)에 해당했다.


사헌부와 의금부는 장영실에게 곤장 100대를 때리고 관직을 삭탈하는 형률을 구형했다.


의금부 관리: "대호군 (大護軍) 장영실이 안여 (安輿) 제작을 감독하면서 견고하게 만들지 못하여 부서지게 하였으니, 형률에 의거하여 곤장 1백 대를 쳐야 마땅합니다!"


세종은 자신이 총애하던 장영실의 형벌을 2등급 감형하여 곤장 80대를 명했다. 

그러나 이는 파직을 피할 수 없는 중죄였다.


3.2. 인간적 갈등과 정치적 희생양 (논쟁)

이 사건은 당대 최고의 기술자가 겨우 가마 제작에서 실수했다는 점, 그리고 어진 임금으로 유명한 세종이 그토록 아끼던 신하에게 가혹한 형벌을 내렸다는 점에서 석연치 않은 구석을 남긴다. 

많은 후대 역사가들과 대중매체는 이 사건의 배후에 숨겨진 이유가 있을 것이라 추론한다.


1) 신분 갈등과 불공정한 처벌 

장영실과 함께 안여 제작에 관여했던 조순생 (趙順生, 대호군)은 장영실에게 '부서지지 않을 것이다'라며 제작을 강행시킨 인물이었다. 

조순생은 조선 개국 공신의 후손이자 태종 (세종의 아버지)의 후궁 (간택 후궁)의 오라비였다. 

소위 '금수저' 집안의 인물이었던 것이다. 

의금부는 조순생에게도 곤장 100대를 구형했으나, 세종은 조순생에게는 아예 처벌하지 않도록 명했다. 

장영실은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당했으나, 고위층 배경을 가진 조순생은 무사했다. 

이는 장영실이 아무리 능력이 출중했더라도 미천한 천민 출신이라는 신분적 한계 때문에, 결정적인 순간 정치적 희생양이 되었거나 왕의 보호를 충분히 받지 못했다는 추론에 힘을 싣는다.


2) 명나라의 압력과 자주성 논란 

가장 유력한 추론 중 하나는 장영실이 조선의 과학적 자주성 (천문 주권)을 확보하려던 세종의 대외적인 부담을 덜어주기 위한 정치적 희생양이었다는 것이다. 

당시 명나라는 천문과 역법 (달력)의 제작 및 배포 권한을 '천자 (황제)'만이 독점해야 한다고 여겼다.

세종이 장영실을 통해 간의, 혼천의를 만들고 조선만의 역법 (칠정산)을 편찬하여, 시간을 스스로 정하려 했던 행위는 명나라 입장에서 제후국 (속국)의 분수에 넘치는 위험한 일로 비화될 수 있었다.


세종의 밀사 : "명나라에서 조선의 천문 프로젝트를 주시하고 있네. 자네의 재주는 이미 명의 첩자들 귀에 들어갔다네. 이대로 두면 자네가 명나라로 압송되어 우리의 기술이 모두 넘어갈 수도 있네. (전승/논쟁)"


장영실에게 가혹한 처벌을 내림으로써 세종은 '기술자 개인의 실수'로 사건을 축소하고, 명나라에 대해 '조선은 감히 독자적인 천문 기술을 시도하지 않는다'는 외교적 명분을 제공했을 수 있다. 

이는 세종이 이후 훈민정음 (1443년 창제) 반포라는 더 큰 자주화 프로젝트를 준비하고 있던 시기와 맞물려 있어, 장영실의 희생이 조선의 독립적인 문화 창조를 위한 큰 그림의 일부였을 것이라는 해석도 존재한다.


장영실: "전하, 신의 몸이 부서진들, 조선의 시간과 조선의 글자는 영원히 백성들의 것이 될 것입니다. 소신, 기꺼이 이 짐을 지겠습니다." (각색)




3.3. 기록의 단절과 고독한 종말

장영실에 대한 기록은 1442년 안여 파손 사건으로 곤장 80대를 맞고 파직된 것을 마지막으로 역사 속에서 흔적도 없이 사라진다. 

그가 이후 어디서 어떻게 살았는지, 언제 세상을 떠났는지에 대한 공식적인 기록 (졸기 등)은 전혀 남아있지 않다.

조선왕조실록은 장영실처럼 미천한 출신이자 단순한 기술직 관료였던 인물의 퇴직 후 행적이나 사망 기사를 자세히 기록하지 않는 경향이 있었으므로, 그의 기록 단절이 특별한 음모의 증거가 아닐 수 있다는 지적도 있다. 

그러나 조선 최고 과학자로서 세종의 절대적 총애를 받았던 인물이 갑자기 사라진 것은,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을 부르짖던 시대에도 여전히 신분과 정치적 역학 관계가 개인의 운명을 좌우할 수 있음을 보여주는 비극적인 단면이다.


제4장. 후대의 평가와 영원한 유산

4.1. 기술자의 위상과 후대의 논란

장영실의 사라짐은 역사의 아이러니로 남아, 그의 업적에 대한 후대의 논란을 낳았다.


현대 과학사학자들 사이에서는 장영실이 '과학자'나 '발명가'라기보다는, 이천, 이순지, 김담 등 양반 관료들이 설계하고 이론을 정립한 기구들을 극도로 정밀하게 구현해낸 '기술자'에 가깝다는 평가도 존재한다. 

그는 기존의 중국 기술을 모방하고 조선의 실정에 맞게 개량하는 데 천재적이었지만, 기구에 담긴 원리를 탐구했다는 기록은 없기 때문이다.


그러나 대중적 인식에서 장영실은 조선 과학의 황금기를 상징하는 압도적인 영웅이다. 

이는 그가 미천한 신분을 극복하고, 외부에 의존하지 않고 조선만의 기술 자립을 이룩하려 했다는 '실패한 천재 영웅의 서사'가 대중의 상상력을 자극했기 때문이다.


4.2. 장영실의 유산과 현대의 기념

장영실이 세종과 함께 이룩한 과학적 성취는 조선을 단순한 농업 국가가 아닌 '지식과 과학이 정치와 직결된 국가'로 만들었고, 이는 한국 과학기술 발전의 소중한 밑거름이 되었다.

후대 조선에서는 장영실이 만든 자격루가 망가졌을 때 100년이 지나서야 복원될 만큼, 그의 정밀 기술을 재현할 만한 사람이 없었다는 사실이 그의 천재성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현대에 이르러 장영실의 유산은 다양한 방식으로 계승되고 있다.

• IR52 장영실상: 한국 산업 기술 분야에서 최고의 권위를 인정받는 상으로, 매년 뛰어난 혁신 기술 제품을 선정하여 장영실의 이름을 기리고 있다.

• 지명 및 시설: 그의 출생지였던 동래현 (부산광역시)에는 장영실과학동산이 남아있으며, 충청남도 아산시에는 장영실 과학관이 건립되어 있다.

• 문화적 영향: 그의 삶은 드라마 <장영실>, 영화 <천문>, 소설 <장영실은 하늘을 보았다> 등의 다양한 팩션 (Faction) 작품으로 끊임없이 재해석되고 있다.


장영실 과학관


장영실의 일대기는 한 인간의 탁월한 능력이 시대와 신분의 제약을 극복할 수 있음을 보여주지만, 동시에 개인의 역량이 거대한 사회적·정치적 역학 관계 앞에서 얼마나 취약해질 수 있는가를 보여주는 비극적인 거울이다.


우리는 장영실의 삶에서 다음 두 가지를 배울 수 있다.

1. 혁신의 실용성과 민본 정신

장영실이 만든 모든 발명품 (측우기, 앙부일구, 자격루)은 백성의 삶을 풍요롭게 하고 농사를 안정시키기 위한 실용적인 목적에서 출발했다. 

과학 기술은 권력자의 과시물이 아니라, 민생을 안정시키는 가장 빠른 수단이어야 한다는 세종과 장영실의 철학을 계승해야 한다.


2. 능력주의의 한계와 시대적 책임

세종은 장영실을 통해 신분을 타파하고 능력주의를 실현하려 했으나, 결국 불경죄라는 명분과 대외적 정치 압력 앞에서 장영실을 완전히 보호하지 못했다. 

이는 진정한 능력주의와 사회 정의는 제도적 완비와 함께 신분적 편견을 뛰어넘는 시대적 공감대 없이는 언제든 무너질 수 있음을 경고한다. 

장영실의 사라짐은 기술 혁신에 대한 국가의 무거운 책임이 어디까지 미쳐야 하는지를 후대에 되묻는 침묵의 교훈이다.


이 글은 《조선왕조실록》과 주요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장영실의 생애와 업적을 서사 형식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인물의 심리·대사·장면 묘사에는 창작이 가미되어 있으며, 확실치 않은 부분은 (전승)/(논쟁) 등으로 구분했습니다. 

학술 논문이 아닌 교양·스토리텔링용 글로 읽어 주시되, 세부 연대나 해석은 보다 전문적인 연구성과와 함께 참고해 주세요.


Born enslaved in Dongnae to a low-status family, Jang Yeong-sil is noticed for his mechanical talent and brought to court, where Sejong promotes him beyond rigid class norms. 

Sent to Ming China, he studies astronomy and devices, then leads projects that create water clocks, armillary spheres, sundials and rain gauges that anchor Joseon’s own calendar, agriculture and flood control. 

His story shows science serving people yet bound by class and law.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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