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예종은 어떻게 문무 겸전의 황금기를 만들었는가: 여진 정벌과 문화 르네상스로 본 자주적 왕권의 완성 (King Yejong of Goryeo)



고려의 문무 겸전 군주, 예종(睿宗): 자주적 왕권과 찬란한 문화의 황금기를 열다


1. 서론: 고려 중기의 전략적 변곡점과 예종의 즉위

1105년, 고려의 제16대 국왕으로 즉위한 예종(睿宗) 왕해(王楷)는 한반도 역사가 마주한 가장 거대한 ‘전략적 변곡점’ 위에 서 있었다. 

당시 동북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11세기 평화를 지탱하던 요(遼, 거란)나라의 급격한 쇠퇴와, 그 틈을 타 무섭게 발흥하는 금(金, 여진)나라의 세력 전이(Power Shift)라는 폭풍 속으로 진입하고 있었다. 

내부적으로는 문종 이후 다져진 문벌 귀족 사회가 성숙기에 접어들며 왕권과 신권 사이의 정교한 힘의 균형이 요구되던 시점이었다.

예종은 부왕 숙종이 추진했던 강력한 국방 강화와 내치 개혁의 과업을 계승해야 하는 무거운 책임을 안고 즉위했다. 

그는 단순히 선대의 유산을 관리하는 수성(守成)의 군주에 머물지 않았다. 

예종의 비전은 확고했다. 

고려를 북방의 위협으로부터 스스로를 지켜낼 수 있는 ‘강력한 군사 강국’인 동시에, 송(宋)나라를 능가하는 고도의 정체성을 갖춘 ‘문화 천자국’으로 완성하는 것이었다.

그는 즉위 직후부터 조정 내부의 복잡한 권력 지형을 재편해야 했다. 

인천 이씨로 대표되는 문벌 귀족들의 비대해진 권력을 견제하면서도, 국가의 총력을 모아 여진 정벌이라는 거대한 프로젝트를 수행해야 했기 때문이다. 

이는 현대적 관점에서 볼 때, 기존의 비효율적 지배구조를 혁신하고 신규 시장(영토) 개척을 위해 조직 역량을 최대로 끌어올려야 하는 CEO의 고뇌와도 맞닿아 있다. 

예종은 그 첫 번째 행보로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던 북방의 검은 구름, 여진 정벌의 서막을 열며 자신의 치세를 시작했다.


2. 칼날 위의 자주국방: 윤관의 등용과 동북 9성 축조

예종은 즉위와 동시에 선왕 숙종의 미완성 과업이었던 여진 정벌에 박차를 가했다. 

당시 여진은 흩어져 있던 부족들을 통합하며 고려의 국경을 빈번히 침범하고 있었다. 

예종은 이 문제를 단순한 국경 분쟁이 아닌, 고려의 생존과 자존감이 걸린 ‘전략적 안보 과제’로 규정했다.


별무반(別武班) 조직의 혁신: 전략적 R&D와 피보팅(Pivoting)

고려군은 전통적으로 보병 중심의 체제였다. 

그러나 기마 전술에 능한 여진군에게 보병 위주의 전술은 연전연패의 원인이었다. 

예종은 이를 혁파하기 위해 별무반이라는 혁신적 특수부대를 조직했다. 

이는 현대 기업이 시장 환경의 변화에 대응하기 위해 기존의 비즈니스 모델을 완전히 전환(Pivoting)하는 것과 유사한 전략적 결단이었다.

신기군(神騎軍): 기병 위주의 여진에 대응하기 위해 편성된 강력한 기마부대.

신보군(神步軍): 기병을 보조하며 견고한 방어선을 구축하는 보병부대.

항마군(降魔軍): 승병들로 구성되어 군의 사기와 정신적 무장을 담당한 특수병종.

별무반은 신분과 직역을 가리지 않고 편성되었으며, 혹독한 훈련을 통해 고려의 최정예 타격대로 거듭났다. 

예종은 이 조직에 막대한 예산과 자원을 투입하며 ‘전략적 R&D’에 성공했다.


동북 9성 축조와 17만 대군의 출정

1107년(예종 2년), 예종은 마침내 윤관을 원수로, 오연총을 부원수로 삼아 17만 대군을 북방으로 출격시켰다. 이는 고려 역사상 유례없는 대규모 원정군이었다.

개경을 떠나 북방으로 향하는 군대를 직접 사열하는 예종의 눈빛은 칼날처럼 날카로웠다. 

윤관이 국왕 앞에 무릎을 꿇고 금부(金符)를 받으며 맹세했다. 

“신 윤관, 폐하의 명을 받들어 저 간교한 오랑캐들의 소굴을 소탕하고, 북방의 흙 한 줌까지 고려의 깃발 아래 두겠나이다. 승전이 아니라면 돌아오지 않겠나이다!”

예종은 윤관의 손을 잡고 낮고도 엄중한 목소리로 격려했다. 

“짐은 북방의 먼지 하나도 고려의 땅을 더럽히게 두지 않겠노라. 그대들의 용맹은 곧 고려의 자존심이며, 그대들이 딛는 그곳이 바로 해동천자국의 강토가 될 것이다. 당당히 고려의 위엄을 만방에 떨치고 돌아오라!”

고려군은 파죽지세로 여진의 촌락을 소탕하고, 함경도 일대에 9개의 성(함주, 복주, 영주, 길주, 웅주, 통태진, 진양진, 숭녕진, 공험진)을 쌓았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고려가 동북아의 주권 국가로서 영유권을 선포한 역사적 사건이었다.


윤관 표준영정


전략적 퇴각의 재해석: 국익을 위한 냉철한 엑싯(Exit)

그러나 9성 축조 이후 여진의 끈질긴 반환 요청과 방어 비용의 급증이라는 현실적 문제가 대두되었다.

성과 성 사이의 거리가 너무 멀고 험준하여 보급이 어려웠으며, 여진은 생존을 걸고 고려를 압박했다.

조정 내에서는 반환을 주장하는 온건파와 사수를 주장하는 강경파 사이의 격렬한 논쟁이 벌어졌다.

예종은 여기서 냉철한 현실주의자의 면모를 보였다. 

그는 9성을 환부하기로 결정했다. 

이는 군사적 패배가 아니라, 전쟁의 장기화로 인한 국력 소모를 방지하고 국제 정세의 변화를 관리하기 위한 실리적 선택이었다. 

여진은 9성을 돌려받는 조건으로 고려에 조공을 바치고 영원히 배반하지 않겠다는 서약을 했다. 

예종은 무력 충돌의 끝에서 ‘평화적 공존’이라는 실익을 챙기며 군대를 철수시켰다. 

이는 현대 경영에서 부실 자산을 과감히 정리하고 핵심 역량에 집중하는 ‘전략적 탈출’과 일맥상통한다.


3. 학문의 부흥과 공교육의 혁신: 국자감 칠재(七齋)와 양현고(養賢庫)

여진 정벌로 무(武)의 위엄을 세운 예종은 곧바로 문(文)의 질서를 바로잡는 작업에 착수했다. 

당시 고려의 교육계는 최충의 ‘문헌공도’를 필두로 한 사학(私學) 12도가 장악하고 있었고,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은 제 기능을 잃어가고 있었다. 

예종은 국가 경영의 핵심 인재를 민간에만 맡길 수 없다는 판단하에 강력한 공교육 혁신안을 내놓았다.


국자감 칠재(七齋) 개설: 전문화된 교육 커리큘럼

예종은 국자감 내에 7개의 전문 강좌인 칠재를 설치했다. 

이는 현대 대학교의 전공 학과 제도와 유사한 혁신이었다.

여택재(麗澤齋), 대빙재(待聘재), 경덕재(經德齋) 등 6개의 유학 관련 강좌를 통해 깊이 있는 학문 탐구를 독려했다.

가장 파격적인 혁신은 무학(武學) 전문 강좌인 강예재(講藝齋)를 포함시킨 것이었다. 

문신들의 거센 반대에도 불구하고 예종은 "나라를 지키는 것은 학문만으로 되지 않는다"며 무학의 중요성을 강조했다. 

이는 문무를 겸비한 하이브리드 인재를 양성하려는 리더십의 발현이었다.


양현고(養賢庫) 설립: 인재 양성을 위한 펀딩(Funding)

교육 개혁은 자금 없이 지속될 수 없다. 

예종은 학비와 장학금을 지원하기 위해 국가적 장학 재단인 양현고를 설립했다. 

양현고는 국자감 학생들에게 안정적인 경제적 기반을 제공하여 오직 학문에만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을 조성했다. 

이는 현대 기업의 인재 육성 펀드나 국가 장학 제도와 비견되는 선구적인 시스템이었다.


청연각(淸讌閣)과 보문각(寶文閣): 지식 경영의 허브

예종은 궁궐 내에 청연각과 보문각이라는 도서관이자 학술 연구소를 설치했다. 

그는 이곳에서 명사들을 불러 모아 직접 토론하고 정책을 연구했다. 

특히 당대의 명필이자 문신인 홍관(洪灌)에게 청연각과 보문각의 편액을 쓰게 하여 그 격을 높였다.

“짐이 비각을 세운 것은 단순히 책을 보관하기 위함이 아니다. 고금의 지혜를 빌려 고려의 백년대계를 세우기 위함이다. 홍 학사, 그대의 글씨에 고려의 기상을 담으라.”

예종은 밤늦도록 학사들과 경전을 논하며, 단순한 군주를 넘어 학문을 선도하는 ‘철인 왕(Philosopher King)’의 모습을 보였다. 

이러한 관학 육성 정책은 사학에 밀렸던 공교육의 질을 획기적으로 높였으며, 왕권을 뒷받침하는 지적 토대를 공고히 했다.


백성의 눈물을 닦는 CEO: 구제도감(救濟都監)과 현장 경영

예종의 시선은 화려한 궁궐 담장 너머, 굶주린 백성들에게도 향해 있었다. 

그는 단순히 제도만 정비한 관료형 군주가 아니었다. 

1109년, 전염병과 기근이 창궐하자 예종은 즉각 구제도감을 설치하여 빈민 구휼에 총력을 기울였다.

이는 국가적 재난 상황에서 컨트롤 타워를 가동해 리스크를 최소화하는 ‘위기 관리 경영’의 전형이었다.


그는 가마를 멈추고 길가에 쓰러진 백성의 손을 잡으며 눈물을 흘리기도 했다.

“과인이 부덕하여 하늘이 벌을 내리니, 백성이 무슨 죄가 있는가. 단 한 사람의 백성이라도 굶주림에 쓰러진다면 그것은 짐의 치욕이다.”


이러한 예종의 애민 정신은 단순한 정치를 넘어, 고려라는 공동체를 하나로 묶는 강력한 ‘사회적 자본(Social Capital)’이 되었다. 

백성들은 자신들을 지켜주는 군주를 위해 기꺼이 별무반의 창검이 되었고, 국가는 내부로부터 단단해지기 시작했다.


4. 고려의 소리와 빛: 아악(雅樂) 정비와 고려청자의 전성기

예종의 치세는 고려 문화가 가장 세련되고 우아한 극치에 도달했던 시기로 평가받는다. 

그는 예술을 단순한 유희가 아닌, 국가의 위엄과 정체성을 드러내는 ‘소프트 파워’로 인식했다.


아악(雅樂)과 제례악의 완성: 국가 브랜드 이미지 통합(CI)

예종은 송나라로부터 대성악(大成樂)을 들여와 고려의 실정에 맞게 정비했다. 

이는 고려의 제례와 국가 의례의 격을 한 단계 높이는 결과를 가져왔다. 

중국과 대등한 문명 수준을 갖췄음을 소리와 의례를 통해 대내외에 선포한 것이다. 

이는 국가 브랜드 이미지를 통합하여 존엄성을 극대화한 고도의 통치 기술이었다.


도교의 수용과 복원궁(福源宮): 종교적 다원주의

예종은 불교 일변도에서 벗어나 고려 최초의 도교 사원인 복원궁을 건립했다. 

이는 민간의 신앙적 요구를 수용하는 동시에, 하늘의 복을 비는 국왕의 권위를 신성시하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유교로 정치를 하고, 불교로 마음을 닦으며, 도교로 하늘과 소통하는 고려 특유의 ‘문화적 다원주의’가 예종 시기에 완성된 것이다.


비색(翡色) 청자의 정점: 기술 혁신과 미학의 승리

예종 시기 고려청자는 기술적으로 도약하여 그 유명한 ‘비색(翡色)’의 정점을 찍었다. 

맑고 깊은 비취색은 당시 풍요롭고 안정된 고려의 국력을 상징했다. 

훗날 인종 시대의 걸작인 ‘청자 참외모양 병’ 등은 이미 예종 시기의 풍부한 기술적 토양 위에서 싹튼 열매였다. 

장인들은 국왕의 전폭적인 지지 속에서 예술혼을 불태웠고, 고려청자는 동아시아 최고의 명품으로 인정받으며 국가의 위상을 드높였다.


5. 거대 제국들 사이의 실리 외교: 송·요·금 사이의 중립 노선

예종은 12세기 전반의 냉혹한 국제 정세 속에서 철저하게 ‘고려 중심적 실리 외교’를 펼쳤다. 

그는 명분보다 국익을 우선시하며 제국들 사이에서 고려의 생존 공간을 확보했다.

다각적 외교 전략 분석

대상국
주요 전략
성격
현대적 시사점
송(宋)
아악, 선진 문물 도입 및 경제 교류 확대
문화적 동맹 및 실리 추구
소프트 파워 기반의 전략적 파트너십
요(遼)
전통적 사대 관계 유지 및 쇠퇴기 위기 관리
현상 유지 및 안보 확보
리스크 매니지먼트 및 레거시 관리
금(金)
사대 요구에 대한 신중한 대응, 무력 충돌 방지
현실론에 근거한 평화 유지
파괴적 혁신 세력과의 전략적 타협


금나라와의 담판: 자존심과 실리의 균형

금나라가 요나라를 멸망시키고 고려에 사대(事大)를 요구해왔을 때, 고려 조정은 벌집을 건드린 듯 요동쳤다. 

"옛날 우리의 종이었던 여진에게 어찌 무릎을 꿇느냐"는 명분론이 거셌다. 

하지만 예종은 냉정했다. 

그는 금의 군사력이 당대 최강임을 직시했다.


간관(諫官): "폐하, 여진은 오랑캐입니다. 그들에게 사대하는 것은 해동천자국의 자존심을 짓밟는 일입니다!" 

예종: "자존심이 백성의 목숨보다 귀한가? 명분은 글방 선비들에게나 중요한 것이나, 짐에게는 고려의 안위가 최우선이다. 금과 싸워 이길 수 있다면 싸우겠으나, 지금은 힘을 기를 때다. 굽히는 것은 꺾이는 것과 다르다."


예종은 금의 요구를 수용하며 전쟁을 피했다. 

하지만 내부적으로는 '해동천자(海東天子)'의 위상을 견지하며 자주성을 잃지 않았다. 

독자적인 연호를 고려하고 황제국의 의례를 유지하며, 대외적으로는 실리를 챙기고 대내적으로는 자존심을 세우는 양면 전략을 성공적으로 수행했다.


6. 군주이자 시인, 그리고 인간 예종: 도이장가(悼二將歌)와 서거

강력한 카리스마의 군주 예종 뒤에는 신하의 충절을 애틋하게 기리는 감성적인 시인의 영혼이 숨어 있었다. 

그 인간적인 면모를 가장 잘 보여주는 유산이 바로 <도이장가(悼二將歌)>이다.


도이장가: 충절을 향한 왕의 노래

927년 공산 전투에서 태조 왕건을 대신해 죽은 신숭겸과 김락 두 장수의 충절을 기리기 위해, 예종은 팔관회에서 가상희를 본 뒤 깊은 감명을 받아 직접 붓을 들었다. 

이렇게 탄생한 <도이장가>는 향찰로 표기된 향가 형식의 작품이다.


[도이장가 원문 및 해석]

主乙完乎白乎 (니믈 오ᄋᆞ로ᄉᆞᆯᄫᅳᆫ) - 님을 온전하게 하신 

心聞際天乙及昆 (ᄆᆞᅀᆞᄆᆞᆫ ᄀᆞᆺ하ᄂᆞᆯ 밋곤) - 마음은 하늘 끝까지 미치니 

魂是去賜矣中 (넉시 가샤ᄃᆡ) - 넋은 가셨으되 

三烏賜敎職麻又欲 (사ᄆᆞ샨 벼슬마 ᄯᅩ ᄒᆞ져) - 삼으신 벼슬은 높구나 

望彌阿里刺 (ᄇᆞ라며 아리라) - 바라보면 알리라 

及彼可二功臣良 (그ᄢᅴ 두 功臣여) - 그때의 두 공신이여 

久乃直隱 (오라나 고ᄃᆞᆫ) - 오래되었으나 곧은 

跡烏隱現乎賜丁 (자최ᄂᆞᆫ 나토신뎌) - 자취는 나타나는구나


이 시는 단순한 추모곡이 아니다. 

예종은 이를 통해 현재의 신하들에게 "그대들이 선대 공신들처럼 목숨 바쳐 충성한다면, 군주인 나 또한 그대들을 영원히 잊지 않겠다"는 강력한 정치적 메시지를 전달했다. 

감성을 활용한 고도의 통치적 소통술이었던 셈이다.

예종의 시심(詩心)은 충신들의 넋을 기리는 데 그치지 않고, 고려 왕실의 서슬 퍼런 위엄을 세우는 데까지 뻗어 나갔다. 

그는 제9대 국왕 덕종(德宗)의 영정 앞에 바치는 찬가인 <엄안(嚴顔)>을 직접 지어 올렸다. 

이는 단순한 조상 숭배를 넘어, 강력한 대외 자주성을 보였던 덕종의 이미지를 자신에게 투영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수사였다.


권력의 그림자와 이자겸의 부상

치세 후반기, 예종은 문벌 귀족 세력의 거두인 이자겸과의 관계 설정에서 어려움을 겪었다. 

여진 정벌에 반대하던 문벌 세력을 포섭하기 위해 이자겸의 둘째 딸인 순덕왕후를 비로 맞이했으나, 이는 훗날 이자겸이 무소불위의 권력을 휘두르는 발판이 되었다. 

예종은 한안인 등 신진 관료들을 등용하여 견제하려 했지만, 이자겸의 권력욕은 이미 조정을 장악하고 있었다. 

그러나 예종은 결코 호락호락하게 권력을 내어주지 않았다. 

그는 이자겸의 외척 세력을 견제하기 위해 한안인(韓安仁)이라는 신진 관료를 파격적으로 기용했다.

한안인은 가문보다 실력을 중시했던 예종의 ‘인재 경영’이 낳은 총아였다. 

이자겸이 거대한 성벽이었다면, 한안인은 그 벽을 허물기 위해 투입된 날카로운 송곳이었다.

비록 예종의 갑작스러운 서거로 이 개혁적 시도는 미완으로 끝났지만, 이는 거대 기득권 세력에 맞서 왕권을 수호하려 했던 고독한 군주의 마지막 승부수였다.

예종은 문화와 예술에 몰입하며 말년의 고독을 달랬고, 때로는 지나친 음주가무로 간관들의 비판을 받기도 했다. 

이는 강력한 치세 뒤에 찾아온 공허함과, 다가올 권력 투쟁에 대한 인간적 고뇌의 방증이었다.


이른 서거와 유산

1122년, 예종은 44세라는 한창나이에 서거했다. 

사인은 등창(종기)이었다. 

그는 아들 인종에게 찬란한 문화와 강력한 국방의 유산을 물려주었으나, 동시에 이자겸이라는 거대한 권신을 함께 남겨주었다. 

그의 서거와 함께 고려의 황금기는 서서히 저물고 이자겸의 난이라는 격동의 시대로 접어들게 된다.


7. 고려의 자존심을 세운 위대한 건축가

예종의 17년 치세는 고려 역사상 가장 자존감 높고 풍요로웠던 ‘창조적 전성기’였다. 

그는 칼로 영토를 넓히고, 붓으로 정신을 세웠으며, 소리로 국가의 품격을 완성했다. 

예종은 단순히 왕위를 계승한 자가 아니라, 고려라는 국가의 브랜드 가치를 세계적인 수준으로 끌어 올린 ‘위대한 경영자’였다.

그의 리더십은 현대 우리에게 중요한 시사점을 던진다. 

급변하는 주변국들의 위협 속에서도 냉철한 실리를 챙기는 유연함, 인재 양성을 위해 아낌없이 투자하는 혜안, 그리고 예술과 문화를 통해 국민적 자부심을 고취하는 감성 소통까지. 예종은 이 모든 것을 조화롭게 구현한 ‘문무 겸전’의 이상적 군주였다.

비색 청자의 맑은 빛깔 속에 담긴 예종의 꿈은 오늘날에도 여전히 유효하다. 

강한 힘을 갖되 품격을 잃지 않고, 주변의 거대한 물결 속에서도 자신의 색깔을 잃지 않는 나라. 

예종, 그는 천 년 전 고려의 하늘 아래 가장 찬란한 비색의 시대를 열었던 위대한 건축가로 기억될 것이다.

고려의 자존심은 그의 비색 청자보다 맑았고, 그의 별무반 칼날보다 날카로웠다.


이 글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1차 사료와 국내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서술하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일부 장면 묘사와 인물의 심리, 대화는 서사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본문에 포함된 해석은 특정 인물을 이상화하거나 단죄하기 위한 목적이 아니라, 고려 중기 국가 운영과 왕권·귀족 사회의 구조를 입체적으로 조망하기 위한 하나의 분석 관점입니다.

사실 관계에 대한 오류나 중요한 누락이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시기 바라며, 근거가 제시된 의견은 성실히 검토하겠습니다.

또한 예종의 통치와 고려 중기 정치·문화에 대한 다양한 해석과 자유로운 토론을 환영합니다.


King Yejong of Goryeo (r. 1105–1122) ruled at a critical turning point in East Asian history, marked by the decline of the Liao dynasty and the rise of the Jurchen Jin.

Inheriting strong reformist foundations from his father Sukjong, Yejong pursued a dual vision: building a self-reliant military state while elevating Goryeo into a leading cultural power.

Militarily, he strengthened national defense by reorganizing the army into the elite Byeolmuban, enabling a successful northern campaign under General Yun Gwan. 

The construction of the Nine Fortresses symbolized Goryeo’s assertion of sovereignty, while their later return reflected Yejong’s pragmatic realism and focus on long-term stability over symbolic expansion.

Domestically, Yejong revitalized public education by reforming the National Academy, establishing specialized curricula, and founding the Yanghyeongo scholarship system. 

He personally promoted scholarship through royal libraries and debates, embodying the ideal of a philosopher-king.

Culturally, his reign marked the height of Goryeo’s refinement, with the formalization of court music, the flourishing of celadon ceramics, and the institutional acceptance of religious pluralism. 

Diplomatically, Yejong maintained a balanced foreign policy among Song, Liao, and Jin, prioritizing peace and national survival over rigid ideology. 

His reign stands as a model of cultural confidence, strategic flexibility, and enlightened kingshi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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