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고려의 중흥을 꿈꾼 과단성 있는 군주: 숙종(肅宗) 왕옹 평전
1. 서론: 시대의 변곡점에 선 군주
고려의 역사를 돌이켜볼 때, 11세기 말에서 12세기 초는 문벌귀족 사회가 그 화려한 성숙의 정점에서 내부적 부패와 모순이라는 치명적인 그림자를 드리우기 시작한 시기였다.
대외적으로는 동북방의 여진족이 단순한 부족 연맹을 넘어 강력한 세력으로 급부상하며 고려의 국경을 위협하고 있었고, 대내적으로는 인주 이씨(仁州 李氏)로 대표되는 가문들이 왕실과의 중첩된 통혼을 통해 권력을 독점하며 국정의 기틀을 잠식하고 있었다.
이 거대한 시대적 변곡점에서 고려의 제15대 국왕 숙종(肅宗)은 단순한 왕위의 계승자가 아닌, 쇠락해가는 제국의 기틀을 다시 세우려 했던 '전략가적 군주'로서 역사의 전면에 등장했다.
숙종의 비범함은 일찍이 그의 부왕인 문종(文宗)에 의해 간파되었다.
문종은 셋째 아들 왕옹(王顒)의 총명함과 과단성 있는 기질을 보며, "뒷날 우리 왕실을 다시 부흥시킬 자는 바로 너다(後日 復興王室者 必汝也)"라는 예언적 함의가 담긴 평가를 내렸다.
이는 숙종의 평생을 관통하는 통치 철학의 뿌리가 되었으며, 훗날 그가 조카로부터 왕위를 물려받는 '찬탈'이라는 정치적 부담을 안으면서도 그 명분을 '고려의 중흥'이라는 대의에서 찾게 된 사상적 근거가 되었다.
본 글은 숙종이 걸어간 치열한 권력 투쟁의 길과 그가 꿈꾼 부강한 고려의 실체를 분석하고자 한다.
2. 왕위 계승의 드라마: 계림공에서 국왕으로
숙종의 즉위 과정은 고려사에서 가장 정교하고도 긴박한 정치적 드라마였다.
선종이 서거한 후 어린 조카 헌종(獻宗)이 즉위하자, 조정은 외척 세력인 이자의(李資儀)의 수중에 떨어졌다.
당시 계림공(鷄林公)이었던 숙종은 이 상황을 단순한 권력 구조의 변화가 아닌, 고려 사직의 존립을 위협하는 비상사태로 규정했다.
이자의의 난과 '국가 안위'라는 명분
이자의는 인주 이씨 가문의 비대해진 세력을 배경으로 헌종을 폐하고 자신의 혈족을 옹립하려 획책했다.
숙종은 이를 좌시하지 않았다.
그는 소태보(邵台輔), 왕국모(王國髦)와 같은 중신 및 무장들과 결탁하여 이자의 일파를 전격적으로 제압했다.
1095년, 숙종은 헌종으로부터 양위를 받는 형식적 절차를 거쳐 보좌에 올랐으나, 그 이면에는 강력한 왕권을 회복해야 한다는 절박한 시대적 요구가 있었다.
계림공(숙종): "보시오, 소태보 장군. 지금 외척 이자의가 금위병을 장악하고 궁궐 안팎을 제 집처럼 드나들고 있소. 어린 주상께서는 병약하시고, 종묘사직은 풍전등화와 같소. 내가 문종 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이 혼란을 바로잡지 않는다면 장차 선왕들을 뵐 낯이 있겠소?"
소태보: "대군, 군사를 움직이는 것은 명분이 생명입니다. 이자의가 역모의 싹을 보일 때 기습하여야 합니다. 저희가 목숨을 걸고 대군을 호위하겠습니다."
계림공(숙종): "이것은 나의 개인적 욕망이 아니오. 문종께서 예언하신 '왕실의 부흥'을 위한 불가피한 결단이오. 왕국모에게 전령을 보내시오. 오늘 밤, 개경의 밤공기를 가르는 것은 역적의 머리를 베는 칼날이 될 것이오."
숙종의 결단이 갖는 함의
숙종의 즉위는 단순한 찬탈이 아니라, 문벌귀족에 의해 거세되었던 '국왕의 통치력'을 회복하기 위한 구조적 반격이었다.
그는 즉위 초기부터 6촌 이내의 혼인을 금지(1096년)하는 등 귀족들의 결속을 약화시키고, 이를 통해 확보한 정치적 동력을 바탕으로 향후 경제, 군사, 지리라는 세 개의 축을 중심으로 하는 거대한 국가 개혁에 착수할 수 있었다.
하지만 이 모든 개혁의 동력은 그의 내면에 자리 잡은 지독한 자기 절제와 완벽에 대한 강박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군주의 내면: 절제된 삶과 뜨거운 부정(父情)
숙종은 밖으로는 서슬 퍼런 개혁가였으나, 안으로는 지독할 만큼 자신을 채찍질하는 절제주의자였다.
그는 즉위 후에도 화려한 궁중 생활보다는 실무 중심의 일상을 고집했다.
기록에 따르면 숙종은 평소 소박한 음식을 즐겼으며, 왕실의 사치를 극도로 경계했다.
이는 단순히 성품이 검소해서가 아니라, 찬탈자로 기억될지 모른다는 불안감을 '도덕적 결점 없는 군주'라는 완벽주의로 덮으려 했던 심리적 기제의 발로였다.
그런 그의 곁에는 평생의 정치적 동반자이자 안식처였던 명의태후 유씨가 있었다.
숙종은 고려 국왕 중 보기 드물게 후궁을 거의 두지 않고 왕비 한 사람과 평생을 함께하며 7남 4녀라는 많은 자녀를 두었다.
숙종: "부인, 내가 조카의 자리를 대신한 것을 세상이 어찌 보겠소? 짐은 잠시도 허투루 쉴 수가 없구려. 아이들에게는 이 아비가 남긴 업적만이 그들의 방패가 될 것이오."
명의태후: "전하, 과도한 근심은 용안을 해칩니다. 전하의 결단이 사직을 구했음을 역사가 증명할 것입니다. 세자(예종)는 이미 전하의 강건함을 닮아 있으니 너무 염려 마소서."
숙종의 이러한 '가정적인 면모'는 후계자인 예종에 대한 지독한 교육열로 이어졌다.
그는 세자에게 직접 경전을 가르치며 "임금은 백성의 어버이인 동시에 가장 엄격한 스승이어야 한다"고 강조했다.
훗날 예종이 보여준 탁월한 문치(文治) 능력은 숙종이 개인적인 삶을 희생하며 쏟아부은 훈육의 결과물이었다.
3. 화폐 혁명과 경제 중흥: 대각국사 의천과의 공조
숙종은 강력한 국가를 건설하기 위해선 왕실이 직접 통제할 수 있는 독자적인 경제 수단이 필수적임을 간파했다.
당시 고려의 경제는 쌀과 베를 사용하는 물품 화폐 체제였으며, 이는 지방 호족과 문벌귀족이 부를 축적하고 은닉하기에 유리한 구조였다.
숙종은 이를 타파하기 위해 '주화 유통'이라는 파격적인 실험을 감행했다.
주전도감 설치와 화폐 주조의 실제
1101년(숙종 6), 숙종은 동생인 대각국사 의천(義天)의 건의를 받아 주전도감(鑄錢都監 화폐주조 관청)을 설치했다.
송나라에서 화폐 경제의 위력을 목격한 의천은 "돈이 유통되면 나라의 보물이 늘어나고 백성은 편리해지며, 국가의 권위는 동전에 새겨진 이름처럼 널리 퍼질 것"이라며 숙종을 독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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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종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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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징 및 학술적 분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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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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해동통보(海東通寶)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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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102년 1만 5천 관 주조. 관리와 군인에게 우선 배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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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최초의 대규모 유통 엽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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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동국통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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삼한중보, 동국중보 등 다양한 명칭으로 주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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국가적 정체성과 자부심 고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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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병(활구, 闊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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은 1근으로 한반도 지형을 본떠 제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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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액 거래용 (쌀 16~50석 가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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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 숙종때 화폐들 |
경제 개혁의 한계와 비판적 고찰
그러나 숙종의 화폐 혁명은 민초들의 저항에 부딪혔다.
기록에 따르면, 당시 백성들은 화폐의 효용성을 인식하지 못했으며, 관에서 강제로 설치한 공설주점(公設酒店) 등에서만 제한적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은병(활구)은 그 단위가 너무 커서 일반 백성보다는 권세가들의 재산 축적 수단으로 변질되는 부작용을 낳았다.
위조품의 출현 또한 화폐 신뢰도를 떨어뜨렸다.
숙종은 이를 극복하기 위해 관리들의 녹봉을 화폐로 지급하는 등 강수를 두었으나, 물품 화폐에 익숙한 백성들에게 화폐는 여전히 차가운 쇳덩이에 불과했다.
이는 국가 주도의 급진적 개혁이 민간의 경제적 성숙도와 괴리될 때 발생하는 전형적인 한계를 보여준다.
관학(官學)의 중흥: 국자감(國子監)과 7재(七齋)
숙종은 경제적 자립뿐만 아니라, 사학(私學 민간 학교)의 기세에 눌린 관학의 권위를 세우는 것이 왕권 강화의 핵심이라 믿었다.
당시 최충(崔冲)의 문헌공도를 비롯한 '사학 12도'가 인재를 독점하자, 숙종은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대대적으로 정비했다.
그는 국자감 내에 7재(七齋: 일곱 가지 전문 강좌)를 설치하여 유학뿐만 아니라 무학(武學)까지 가르치게 했다.
이는 문벌귀족의 전유물이었던 지식을 국가의 통제 아래 두려는 포석이었다.
지식의 흐름을 장악하지 못하면 인재의 충성심을 얻을 수 없다는 계산된 행보였다.
이러한 지적 인프라의 구축은 곧이어 단행된 대규모 국토 재편 프로젝트, 즉 남경 건설의 인적 동력이 되었다.
4. 남경(南京) 프로젝트: 서울의 탄생과 '현종 계승 의식'
숙종의 남경 건설은 단순한 도성 확장이 아닌, 자신의 불완전한 정통성을 강화하기 위한 고도의 '상징 정치'였다.
그는 양주(현재의 서울)에 주목하며 이를 남경으로 재승격시켰는데, 여기에는 할아버지 현종(顯宗)에 대한 깊은 계승 의식이 저매되어 있었다.
신혈사와 승가굴: 영적 정통성의 확보
숙종의 할아버지 현종은 잠저 시절, 외척의 핍박을 피해 양주 삼각산의 신혈사(新血寺)에 은거하며 생명을 보존했다.
숙종에게 양주는 가문을 구원한 길지(吉地)이자 왕통의 뿌리였다.
1099년 김위제(金謂磾)가 도선비기(道詵秘記 승려 도선의 예언서)를 근거로 남경 천도를 상소하자, 숙종은 이를 명분 삼아 남경개창도감(南京開創都監 도시정비 관서)을 설립했다.
숙종은 직접 삼각산에 행차하여 지세를 살피고, 특히 승가굴(僧伽窟 북한산 승가사 모태)에서 성대한 재를 올렸다.
흥미로운 점은 숙종이 직접 갈 수 없는 상황에서는 자신의 어의(御衣)를 대역으로 보내 비를 빌거나 제를 올리게 했다는 것이다.
이는 승가신앙(僧伽信仰)을 통해 현종과 자신을 영적으로 연결하려는 의도였다.
찬탈자라는 오명을 씻기 위해, '성군 현종이 머물던 신성한 땅'을 재건함으로써 자신을 현종의 진정한 후계자로 공인받으려 한 것이다.
조종의 반대와 숙종의 돌파
남경 건설은 막대한 민폐와 재정 부담을 초래했다.
조정 신료들은 "이미 개경이 건재한데 왜 백성들을 노역으로 내모느냐"며 거세게 반발했다.
숙종: "그대들은 어찌하여 눈앞의 노역만 보고 나라의 백년대계는 보지 못하는가? 삼각산 남쪽 명당에 도성을 세우는 것은 선왕(문종)의 미완성 과업을 완수하는 것이며, 지기(地氣)를 쇄신하여 고려를 사방의 조공을 받는 대국으로 만들기 위함이다. 짐의 결단은 이미 섰으니, 민폐를 줄일 방안을 찾되 공사를 늦추지 말라."
5. 별무반(別武班) 창설과 여진 정벌의 서막
숙종의 가장 위대한 군사적 유산은 기병 중심의 여진족에 대항하기 위한 혁신적 군대, 별무반(別武班)의 창설이다.
1104년, 임간과 윤관이 여진과의 전투에서 보병 위주의 전술로 참패하자 숙종은 군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바꾸기로 결심했다.
별무반의 혁신적 조직 구성
윤관의 건의에 따라 숙종은 신분과 직종을 초월한 범국가적 특수 부대를 조직했다.
이는 단순한 군사 증강이 아니라 고려 사회의 인적 자원을 총동원한 시스템의 혁명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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부대 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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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부 병종 및 특징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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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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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기군(神騎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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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 기병 부대. 여진 기병에 대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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핵심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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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군(神步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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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력 보병 부대. 살수, 창병 등 포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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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규 보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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항마군(降魔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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승려들로 구성된 결사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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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신적/실전 전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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연호군(烟戶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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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비들로 구성된 지원 및 전투 부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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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범위한 동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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주부군현(州府郡縣)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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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인, 일반 시민 등 자원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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민간 협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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특기병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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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보(간첩/자객), 도탕(공병), 경궁(궁수), 발화(포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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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문 보병 분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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숙종은 별무반의 훈련을 직접 참관하며 무기를 점검했고, 병사들에게 하사품을 내리며 사기를 진작시켰다.
야사에 따르면 숙종은 직접 말을 타고 훈련장을 누비며 "여진의 발굽이 우리 강토를 짓밟게 둘 수 없다"고 일갈했다고 전해진다.
이러한 과단성 있는 준비는 비록 그의 생전에 결실을 보지는 못했으나, 아들 예종 대에 동북 9성을 축조하는 대업의 초석이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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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별무반 그림 (우리 역사넷) |
동북아 균형의 추: 송(宋)과 요(遼) 사이의 실리 외교
숙종의 과단성은 전장뿐만 아니라 외교 무대에서도 빛났다.
그는 급격히 쇠퇴하는 요나라와 화려하지만 나약한 송나라 사이에서 철저한 실리 노선을 걸었다.
송나라에는 적극적인 문화 교류를 제안하여 선진 문물을 받아들이는 통로로 삼았고, 요나라와는 형식적인 사대 관계를 유지하며 불필요한 마찰을 피했다.
숙종은 송나라 사신에게 "작은 나라가 큰 나라를 섬기는 것은 예(禮)이나, 나라의 안위를 지키는 것은 힘(力)이다"라는 취지의 발언을 남기며, 고려의 독자적인 세력권을 인정받으려 애썼다.
이러한 '부드러운 압박'은 훗날 여진 정벌이라는 거사를 앞두고 배후의 안정을 확보하는 결정적인 외교 자산이 되었다.
6. 사상적 기반: 거사불교(居士佛敎)와 흥왕사(興王寺)
숙종 시대의 사상계는 권력과 결탁한 보수적 교종(敎宗)에 대한 반성으로 거사불교(居士佛敎)라는 새로운 흐름이 태동했다.
문벌귀족 출신의 지식인들이 관직을 버리고 산중으로 들어가 참선과 은둔을 추구하기 시작한 것이다.
이자현과 의천: 통합과 은둔의 이중주
숙종의 동생 의천이 천태종(天台宗 불교 종파)을 통해 교종과 선종을 제도적으로 통합하려 했다면, 이자현(李資玄)과 같은 거사들은 개인적인 수행을 통해 불교의 본질을 찾고자 했다.
이자현은 인주 이씨라는 최고의 배경을 뒤로하고 청평산 문수원에 들어가 '청평거사'라 칭하며 참선에 몰두했다.
숙종은 이러한 거사들의 은둔을 존중하면서도, 한편으로는 흥왕사(興王寺 개경근처의 원찰)를 매년 방문하는 '항식(恒式)'을 확립했다.
흥왕사는 부왕 문종이 12년에 걸쳐 공들여 세운 사찰이다.
숙종이 매년 7월 문종의 기일에 맞춰 흥왕사에서 기신도량(忌晨道場)을 연 것은, 자신이 문종의 정통 후계자임을 만방에 과시하기 위한 고도의 정치적 장치였다.
즉, 숙종은 의천의 제도 불교를 통해 통치 시스템을 정비하고, 거사불교를 통해 지식인들의 불만을 흡수하며, 흥왕사 제례를 통해 자신의 정통성을 공고히 하는 입체적인 사상 정책을 펼쳤다.
7. 최후와 사후 평가: 고려를 다시 세운 거인
1105년 10월, 숙종은 병마가 깊어가는 몸을 이끌고 서경(평양) 순행길에 올랐다.
주위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그는 북방의 정세를 직접 살피고자 수레에 몸을 실었다.
하지만 돌아오는 길, 개경을 목전에 둔 수레 안에서 군주의 생명은 꺼져가고 있었다.
그는 자신의 시간이 다했음을 직감하고, 곁을 지키던 충신 윤관(尹瓘)을 조용히 불러 떨리는 손을 잡았다.
숙종: "장군, 내 평생 문종 대왕의 유지를 받들어 사직을 바로잡으려 애썼으나, 저 북방의 먼지를 다 걷어내지 못하고 떠나는구려. 이것이 나의 유일한 한(恨)이오."
윤관: "전하, 기운을 차리소서. 별무반의 창날이 이미 서슬 퍼렇게 갈려 있나이다."
숙종: "나의 육신은 여기까지이나, 장군의 칼날은 멈추지 마시오. 별무반의 깃발에 나의 염원을 담아 저 거친 여진의 기세를 남김없이 꺾고 오시오. 그것이 짐이 장군에게 내리는 마지막 칙명이자, 고려의 길을 여는 열쇠가 될 것이오."
51세를 일기로 수레 안에서 서거한 숙종의 마지막은, 평생을 국토 순행과 정벌 준비로 점철했던 과단성 있는 군주다운 최후였다.
비록 그는 승전의 비보를 듣지 못하고 눈을 감았으나, 그가 윤관의 손에 쥐여준 '별무반'이라는 비수는 2년 뒤 동북 9성 개척이라는 장엄한 결과로 되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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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릉 전경 |
고려의 왕안석인가, 찬탈자인가?
현대 학계는 숙종의 통치를 '송나라 왕안석의 신법(新法)'에 비견한다.
주전도감을 통한 화폐 정책과 남경개창도감을 통한 국토 재편은 왕안석이 추구했던 부국강병의 논리와 놀라울 정도로 흡사하다.
1. 전략적 통찰: 숙종은 문벌귀족의 그늘에 가려진 왕권을 경제(화폐), 지리(남경), 군사(별무반)라는 실질적 수단을 통해 회복했다.
2. 정통성의 한계: 그러나 그의 즉위 과정은 조카의 자리를 빼앗았다는 도덕적 결함을 안고 있었으며, 이는 그가 평생 남경 건설과 사원 행차에 집착하게 만든 심리적 기제가 되었다.
3. 백성의 고통: 급진적인 화폐 개혁과 거대한 토목 공사는 백성들에게 과도한 부역과 세금 부담을 안겼으며, 이는 민생의 고단함을 초래했다는 비판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숙종 왕옹은 고려라는 거대한 배가 문벌귀족의 탐욕과 여진의 위협이라는 암초에 걸려 좌초하기 직전, 키를 잡고 거친 파도를 정면으로 돌파한 선장이었다.
그가 닦아놓은 경제적 자원과 강력한 군사적 기반이 있었기에, 아들 예종은 고려사 최고의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다.
그는 비록 완벽한 성군은 아니었을지언정, 고려를 다시 세우기 위해 스스로 악역을 자처하고 시대를 개척한 '과단성 있는 거인'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그가 남경의 터를 닦으며 바라보았던 삼각산의 노을은, 오늘날 우리가 누리는 서울이라는 공간의 시원이기도 하다.
이 글은 『고려사』와 관련 사료,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고려 숙종의 통치와 개혁을 입체적으로 조명한 평전형 역사 글입니다.
사실에 근거한 서술을 원칙으로 하되, 인물의 선택과 시대적 맥락을 보다 생생하게 전달하기 위해 일부 장면은 서사적으로 풀어 서술했습니다.
본문 내용 중 사실 관계에 대한 오류, 보완이 필요한 부분, 또는 다른 해석이 가능한 지점이 있다면 댓글을 통해 자유롭게 제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비판과 반론, 다양한 시각에 따른 토론 또한 언제든 환영하며, 이러한 논의가 고려사에 대한 이해를 더욱 풍부하게 만들기를 기대합니다.
King Sukjong of Goryeo ruled at a critical turning point in the late 11th and early 12th centuries, when aristocratic domination and external threats endangered the stability of the state.
Ascending the throne through a politically charged transition, Sukjong sought not personal power but the restoration of royal authority weakened by powerful noble families.
His reign was marked by decisive and often controversial reforms aimed at rebuilding the foundations of the kingdom.
Sukjong pursued economic independence through the introduction of state-controlled coinage, attempting to break the aristocracy’s grip on wealth, while reforming state education to reclaim intellectual authority from private academies.
He also initiated the construction of Namgyeong, modern-day Seoul, as a symbolic and strategic project to reinforce royal legitimacy and national cohesion.
In military affairs, Sukjong laid the groundwork for resistance against the rising Jurchen threat by creating the Byeolmuban, a revolutionary, multi-class military force that later enabled the conquest of the northeastern territories.
Though his policies imposed heavy burdens on the population and his legitimacy remained contested, Sukjong’s reign reshaped Goryeo’s political, economic, and military systems.
Remembered as a ruler of bold decisions rather than flawless virtue, he stands as a transformative figure who chose decisive action to secure the survival and renewal of the stat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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