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13대 국왕 선종, 교장으로 완성한 성세: 11세기 동아시아 질서를 설계한 현군 (King Seonjong of Goryeo)



고려의 성세(盛世)를 이끈 현군, 선종: 개인의 서사와 역사의 교차


1. 11세기 동아시아의 균형추, 고려

11세기 후반,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는 송(宋)과 요(遼)라는 두 거강 사이에서 힘의 균형이 팽팽하게 유지되던 거대한 장기판과 같았습니다. 

이 정교한 균형의 중심에서 독자적인 국력을 과시하며 황금기를 구가하던 주역이 바로 고려였습니다.

예성강 벽란도에는 송나라의 향료와 서책, 요나라의 모피, 멀리 일본의 수은까지 몰려들며 국제적인 공기가 넘실거렸고, 개경 회경전(會慶殿) 앞에 우뚝 솟은 13층 황금 탑은 고려의 찬란한 위용을 상징하고 있었습니다.


문종 대왕이 다져놓은 전성기의 기틀 위에서, 제13대 국왕 선종(宣宗)은 그 번영을 문화적·외교적 만개로 승화시킨 전략가였습니다. 

집무실인 선정전(宣政殿)에 앉아 송나라에서 갓 들어온 진한 먹향을 맡으며 서책을 넘기던 선종의 평온한 모습은, 당시 고려가 누렸던 태평성대의 모습이었습니다. 

그러나 이 평온한 황금기 뒤에는 뜻하지 않게 왕위를 이어받아야 했던 한 남자의 깊은 고뇌와, 준비된 군주로서의 단단한 결단이 서려 있었습니다.


왼쪽 하단부터 창합문, 회경문, 정전 회경전 상상 복원 모형


2. 국원후(國原侯)에서 성군(聖君)으로: 준비된 리더십의 발현

선종(휘 왕운)은 문종의 차남으로 태어나 본래 왕위 계승과는 거리가 있었습니다. 

그는 '국원후'로서 충주(국원) 지역을 봉지로 받아 20년 가까운 세월을 개경 밖에서 보냈습니다. 

이 시기는 그에게 단순한 유배나 은거가 아닌, 민초들의 삶을 직접 확인하고 경사(經史)를 탐독하며 통치 철학을 가다듬는 귀중한 수련의 시간이었습니다. 

'국원후' 시절 쌓은 식견은 훗날 그가 백성을 보듬는 '겸소(검소함)'와 인재를 아끼는 '공손'의 정치를 펼치는 밑거름이 되었습니다.


1083년, 형 순종이 즉위 3개월 만에 요절하자 그는 운명처럼 보위에 올랐습니다. 

갑작스러운 즉위였으나 그는 흔들리지 않았습니다. 

즉위 직후 근심 어린 표정으로 곁을 지키던 신료들에게 그는 이렇게 말했습니다.


선종: "형님의 뒤를 이어 갑성스레 대통을 이으니, 내 부덕함이 백성에게 누를 끼칠까 두렵소. 군주란 모름지기 검소함으로써 모범을 보이고, 공손함으로써 인재를 얻어야 하는 법. 나는 화려한 궁궐보다 백성의 고달픔을 먼저 살피는 왕이 되고자 하오."

대신: "전하께서는 국원후 시절부터 총명함과 효성이 지극하셨으니, 문종 대왕의 성세를 이어가기에 부족함이 없으십니다. 부디 그 초심을 잃지 마소서."


선종은 즉위 이듬해인 1084년, 승과(僧科)를 식년제로 격상시켜 제도화하고 변경 사졸들에게 의복을 하사하는 등 세심한 내치를 펼쳤습니다. 

내실을 다진 선종은 이제 고려의 정신적 기둥을 세우는 거대한 지식 프로젝트로 눈을 돌리게 됩니다.


3. 불심(佛心)과 지식의 조우: 대각국사 의천과 '교장(敎藏)'의 탄생

선종 치세의 정수는 아우 대각국사 의천과의 협력으로 일궈낸 '교장(敎藏)' 사업입니다. 

이는 단순한 종교 사업이 아니라, 동아시아의 지식 체계를 고려의 시각으로 재편하려는 거대한 문화 전략이었습니다. 

1086년, 송나라 구법 여행을 마친 의천이 3,000여 권의 장소(章疏, 주석서)를 가지고 예성강으로 귀국했을 때, 선종은 친히 마중 나가 아우를 맞이했습니다.


의천: "전하, 부처의 가르침인 경(經)과 론(論)은 이미 갖추어졌으나, 이를 깊이 이해할 주석서가 없으면 참된 법을 펼 길이 없습니다. 송, 요, 일본의 지혜를 모두 집대성하여 '교장'을 세워야 합니다."

선종: "아우의 원력이 참으로 가상하구려. 흥왕사에 '교장사(敎藏司)'를 설치하여 나라의 역량을 아낌없이 지원할 것이니, 동양의 모든 지혜를 이곳 고려의 이름으로 기록하시오."


순천 선암사에 있는 의천 초상화


선종은 1091년 이를 '교장도감(敎藏都監)'으로 격상시키고 전폭적인 지원을 아끼지 않았습니다. 

그 결과 1,010부 4,857권이라는 방대한 규모의 《신편제종교장총록》이 편성되었습니다. 

이는 후대 일본 학자들이 명명한 '속장경(續藏經, 대장경의 부속물)'이라는 지엽적 명칭과는 차원이 다른 것이었습니다. 

선종과 의천은 단순한 '추가분'이 아니라, 전 종파의 연구 성과를 집대성한 독자적 지식 창고인 '교장(敎藏)'을 창조한 것입니다.


교장총록의 본문 일부


4. 동아시아의 자존심: 요와 송을 압도하는 자주 외교

선종 시대의 고려는 송과 요 사이에서 주도권을 행사하는 진정한 강국이었습니다. 

선종은 요나라가 압록강 국경에 '각장(榷場, 시장)'을 개설하여 경제적 침탈을 노리자 이를 단호히 무산시키는 실리적 태도를 보였습니다. 

1085년, 요나라 사신 이가급(李可及)이 선종의 생일 연회에 늦게 도착하자, 고려 관리들은 사신의 이름(可及, 이를 만함)을 빗대어 "이름은 가급인데 어찌 이르지 못했는가(不及)?"라며 대놓고 비웃었을 정도로 기세가 당당했습니다.


송나라와의 관계에서도 고려의 자존심은 꺾이지 않았습니다. 

송나라가 보낸 선물 상자 속에 가짜 금·은알이 섞여 있는 것을 발견하자, 고려 사신들은 송 사신이 보는 앞에서 그것들을 깨부수어 확인하며 송의 비겁함을 꾸짖었습니다. 

송의 문필가 소동파(소식)는 이러한 고려의 위세에 끙끙 앓으며 "고려가 우리 문물을 다 가져가 요나라에 넘겨줄까 두렵다"며 교역 제한을 주장했습니다. 

그러나 고려 사신은 송나라 조정에서 당당히 외쳤습니다.


고려 사신: "우리가 원하는 것은 귀국의 금은보화가 아니라 《책부원귀(冊府元龜)》와 같은 천하의 지혜요. 어찌 대국이 지식을 나누는 데 이토록 인색하단 말이오? 우리의 요구가 관철되지 않는다면 고려와 송의 신의는 여기까지일 것이오!"


결국 송은 고려의 기세에 눌려 금지했던 서적들까지 모두 내주어야 했습니다. 

심지어 소동파는 고려의 왕족 스님인 의천의 안내 역을 맡아야 했을 정도로 고려의 위상은 압도적이었습니다.


5. 덧없는 인생(浮生)의 끝에서: 선종의 마지막 소회와 유산

찬란했던 치세도 흐르는 세월 앞에서는 한 줄기 바람이었습니다. 

1092년, 깊은 병세로 누운 선종은 자신의 마지막을 직감했습니다. 

촛불이 일렁이는 침소에서 가느다란 손으로 붓을 든 왕은 고시(古風) 한 수를 남겼습니다.


"약효가 있고 없음이야 무엇을 염려하랴. 덧없는 인생(浮生)에 시작이 있으니 어찌 끝이 없겠느냐. 오직 원하는 것은 선행을 닦아 정토에 올라 부처님께 예를 드리는 것이로다."

병석을 지키던 내의원과 신하들이 통곡하자, 선종은 오히려 "인생에 시작이 있으니 어찌 끝이 없겠느냐"며 그들을 다독였습니다. 

1094년, 선종은 연영전에서 46세를 일기로 승하했습니다.


그의 죽음은 고려의 거대한 별이 지는 사건이었습니다. 

사후 아들 헌종이 즉위했으나, 동생 숙종의 정변과 이자의의 난이라는 피바람이 불며 선종이 일군 평화는 일순간 흔들렸습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교장'과 유·불 조화의 통치 이념은 사라지지 않았습니다. 

개성 동쪽 인릉(仁陵)에 잠든 선종은, 고려를 단순한 강국을 넘어 '지식과 문화의 제국'으로 만든 위대한 설계자였습니다.


6. 역사가 되찾아준 이름, '교장'의 주인공 선종

100년 넘게 선종의 가장 큰 업적은 일본 학자들의 시각에 갇혀 '속장경'이라 불려 왔습니다. 

하지만 2005년 국사 교과서에서 '교장(敎藏)'이라는 제 이름을 되찾은 것은, 고려의 주체적 지식 체계를 인정받은 역사적 승리였습니다. 

선종은 단순한 군주를 넘어 동아시아 지식 지도를 다시 그린 편집자였습니다.

진정한 국력이란 칼날의 날카로움이 아니라, 지식을 수집하고 문화를 창달하는 힘에서 나온다는 사실을 선종은 그의 생애를 통해 증명했습니다. 

그의 황금기는 우리 역사 속에서 가장 당당하고 품격 있었던 순간으로 영원히 기록될 것입니다.


💬 고려 선종 대왕 주요 업적 및 문화 유산

• 문화 사업: 흥왕사에 '교장도감' 설치, 동아시아 불교 지식의 정수 '교장' 간행 (1,010부 4,857권).

• 외교 성과: 송(宋)·요(遼) 사이의 삼각 균형 외교, 거란의 압록강 각장 설치 무산, 송으로부터 방대한 서적 확보.

• 유학 진흥: 국학(國학) 내 공자의 제자 72현 상(像) 벽화 제작 및 제사, 유·불 조화 도모.

• 건축 유산: 회경전 13층 금탑 건립, 천태종 중심 사찰 국청사(國淸寺) 창건 지원.

• 내치 안정: 문종의 전성기를 계승, 승과(僧科)의 식년제 격상 및 변경 사졸 복지 강화.



이 글은 『고려사』와 관련 사료, 현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하되, 선종의 정치·문화적 선택과 시대적 맥락을 독자가 입체적으로 이해할 수 있도록 일부 장면과 심리를 서사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교장(敎藏) 사업, 외교 일화, 인물 간 대화 등은 사료의 핵심 사실을 토대로 한 해석적 서술을 포함합니다.

사실 관계의 오류나 누락된 부분이 있다면 댓글로 알려주시기 바랍니다. 

검토 후 성실히 반영하겠습니다.

또한 본문에 대한 자유로운 토론과 다양한 관점의 의견 역시 댓글로 환영합니다.


King Seonjong of Goryeo ruled during the height of the dynasty’s prosperity in the late 11th century. 

Originally far from the line of succession, his years as Lord of Gukwon shaped a ruler grounded in restraint and learning. 

Ascending the throne unexpectedly, Seonjong pursued stable governance, welfare for soldiers, and cultural ambition. 

His greatest legacy was supporting his brother Uicheon in compiling the Gyojang, a vast Buddhist canon that redefined East Asian knowledge networks. 

Diplomatically, Seonjong asserted Goryeo’s autonomy between Song and Liao. 

Though his reign was brief, he transformed power into culture, leaving Goryeo a legacy of intellectual sovereignty.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