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목차
1002년의 비극, 성 브릭티우스 축일 학살
1. 역사의 전환점이 된 1002년 11월 13일
1002년 11월 13일 금요일, 성 브릭티우스(St. Brice)를 기리는 경건한 축일의 아침이 밝았습니다.
그러나 잉글랜드 전역의 마을과 요새에는 축복 대신 서늘한 국왕의 밀령이 전달되었습니다.
"이 섬에 솟아나 밀 사이의 가래(독초)처럼 번성한 모든 데인족을 가장 정의로운 근절로 파괴하라."
이 잔혹한 명령은 비명과 불길 속에서 실행되었고, 평화로워야 할 성소는 피로 물들었습니다.
이 사건은 단순한 우발적 살육이 아니었습니다.
당시 잉글랜드는 끊임없는 바이킹의 침공으로 국운이 위태로운 상태였으며, 국왕 애설레드 2세는 이 극단적인 '내부 정화'를 통해 왕권을 공고히 하고 배신자를 척결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이 '성 브릭티우스 축일 학살'은 오히려 덴마크 국왕 스벤 1세의 거대한 복수극을 불러왔고, 결과적으로 앵글로색슨 왕조의 몰락과 크누트 대왕의 '앵글로-스칸디나비아 제국' 형성을 앞당기는 거대한 역사적 변곡점이 되었습니다.
본 글에서는 이 비극적인 사건의 이면에 숨겨진 인과관계를 다음의 4가지 핵심 테마를 통해 심층적으로 학습합니다.
• 바이킹의 재침공과 데인겔드: 돈으로 평화를 사려 했던 잉글랜드의 실책과 한계
• 애설레드 2세의 통치와 행정망: '준비되지 않은 왕'의 결단과 이를 뒷받침한 정교한 지방 감시 체계
• 성 브릭티우스 축일의 알레고리: 날짜 선택에 담긴 종교적 정치 선전과 '전례적 시간'의 개념
• 보복의 물결과 새로운 질서: 크누트 대왕의 정복이 잉글랜드 법과 언어에 남긴 거대한 유산
이 비극적인 사건의 근본 원인을 이해하기 위해선, 당시 잉글랜드를 공포로 몰아넣었던 바이킹의 파상공세와 이에 대응한 잉글랜드의 재정적 고충을 먼저 살펴보아야 합니다.
2. 폭풍의 전조: 바이킹의 2차 침공과 '데인겔드(Danegeld)'
980년대부터 잉글랜드 해안에는 다시금 바이킹의 롱쉽(Viking ships)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9세기 알프레드 대왕이 이룩했던 견고한 방어 체계는 세월이 흐르며 약화되었고, 991년 말든 전투(Battle of Maldon)의 참패는 잉글랜드에 거대한 충격을 안겨주었습니다.
군사적 대응에 한계를 느낀 애설레드 2세는 막대한 금전을 지불해 침략을 멈추는 경제적 해결책을 선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데인겔드(Danegeld)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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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991년 말든 전투 |
데인겔드 지불의 명분 vs 실제 결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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구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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명분 (지불 이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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결과 (실제 현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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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보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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즉각적인 약탈과 인명 피해를 방지하고 시간을 벌기 위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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바이킹에게 잉글랜드의 재정적 부유함과 군사적 무능함을 동시에
노출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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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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왕권의 위엄을 유지하며 침략자들을 용병으로 포섭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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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섭된 용병들이 오히려 내부의 적이 되어 반란을 꾀하는 위협을
초래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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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적 측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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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쟁 비용보다 지불금이 저렴하다는 판단 하에 세금(Danegeld)
징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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백성들에게 가혹한 조세 부담을 지워 국왕에 대한 민심 이반을
가속화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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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돈으로 산 평화는 왜 지속될 수 없었는가?"
과거 애설스탠 대왕 시절의 잉글랜드는 강력한 군사적 우위를 바탕으로 바이킹을 복속시켰습니다.
그러나 애설레드 시대의 데인겔드는 대등한 계약이 아닌 '일방적인 갈취'에 가까웠습니다.
바이킹은 정규군이 아니라 이익을 쫓는 집단이었기에, 잉글랜드가 지불한 금은 오히려 더 많은 바이킹을 불러모으는 '유인책'이 되었습니다.
평화는 더 비싼 대가를 요구하는 악순환의 고리가 되었고, 이는 결국 국왕이 극단적인 무력을 사용하게 만드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금전적 대가가 더 이상 평화를 보장하지 못하고, 오히려 내부 정착 데인족들이 국왕을 위협한다는 소문이 퍼지자, 애설레드 2세는 피의 결단을 내리게 됩니다.
3. 국왕 애설레드 2세와 '준비되지 않은' 학살령
학살을 주도한 애설레드 2세는 역사적으로 '준비되지 않은 왕(The Unready)'이라 불립니다.
하지만 역사 교육학적 관점에서 이 별칭은 '준비성'의 부족이 아닌, 고대 영어 'Unræd(조언 없음, 나쁜 조언)'의 오역에 가깝습니다.
즉, 그는 현명한 현자회(Witan)의 조언을 듣지 못했거나, 그들로부터 잘못된 정치적 판단을 강요받았던 인물이었습니다.
그가 1002년 11월에 전격적인 학살령을 내린 결정적 계기는 데인족들의 반역 음모설이었습니다.
"잉글랜드 내의 데인족들이 국왕과 현자들의 목숨을 빼앗고 나라를 차지하려 한다"는 정보가 입수되자, 왕은 이를 '정의로운 근절'이라는 명분으로 대응하기로 했습니다.
학살령의 구체적 대상과 범위
국왕의 명령은 모든 데인족을 대상으로 한 것처럼 보이지만, 학술적 관점에서는 다음과 같은 계층이 주된 타겟이었을 것으로 분석합니다.
1. 배신한 용병: 데인겔드를 받고 잉글랜드에 고용되었으나, 적군과 내통한 혐의가 있는 바이킹 용병들
2. 최근 정착민: 평화 조약 이후 잉글랜드 접경 지역이나 주요 '버(Burh)'에 새로 자리를 잡은 데인족 무리
3. 잠재적 위협 요소: 특히 무장이 가능한 젊은 데인족 남성들 (옥스퍼드 유골 분석 결과 16~25세 남성이 주를 이룸)
[행정 및 감시 체계: Hundred와 Frankenpledge]
상비군이나 경찰 조직이 없던 중세 잉글랜드에서 어떻게 동시다발적인 학살이 가능했을까요?
• Hundred (백인구역): 카운티 아래의 행정 단위로, 지역 리브(Reeve)와 'Hundredman'이 조직을 관리했습니다.
• Frankenpledge (공동 보증 시스템): 지역 공동체 구성원들이 서로의 행동을 보증하고 감시하는 시스템입니다.
• Fyrd(민병대)와 Burh(요새화된 마을): 왕의 명령은 이 행정망을 타고 영주(Ealdorman)와 관리들에게 전달되었으며, 지역 주민들은 이 시스템을 통해 '내 이웃'인 데인족을 쉽게 식별하고 집단적으로 공격할 수 있었습니다.
흥미로운 점은 국왕이 학살의 날짜를 정하는 과정에서 지극히 종교적인 맥락을 이용했다는 사실입니다.
4. 성 브릭티우스(St. Brice)의 축일: 날짜에 숨겨진 종교적 알레고리
애설레드 2세와 그의 자문단(주로 고위 성직자들)이 11월 13일을 거사일로 정한 것은 단순한 우연이 아닙니다.
중세인들에게 시간은 단순한 숫자가 아니라 성인의 삶이 재현되는 '리터지컬 타임(Liturgical Time, 전례적 시간)'이었습니다.
성 브릭티우스의 생애와 애설레드의 정치적 평행이론
5세기 투르의 주교였던 성 브릭티우스의 삶은 애설레드 2세의 상황과 놀라운 유사성을 지닙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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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 브릭티우스의 생애 (Vita Brictii)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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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레드 2세의 정치적 맥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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방탕한 젊음과 오만: 스승 성 마르티누스(St. Martin)에게 대항하며 오만하게
청년기를 보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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청년기의 실책: 재임 초기 교회 재산을 몰수하고 실책을 저지른 '준비되지
않은'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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음모와 추방: 간통 등의 음모에 휘말려 시민들에게 쫓겨나 7년간 로마에서
참회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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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안한 왕권: 데인족의 음모설로 인해 왕권이 흔들리고 참회적 정치를 펼치던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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참회와 승리: 결국 결백을 증명하고 돌아와 도시를 평화롭게 다스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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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의로운 근절: 학살을 통해 내부의 '독초'를 제거하고 왕권을
정화(Purification)하려 함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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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섬에 솟아나 밀 사이의 가래(독초)처럼 번성한 모든 데인족은 가장 정의로운 근절로 파괴되어야 한다." (...ut cuncti Dani, qui in hac insula uelut lollium inter tricitum pululando emerserant, iustissima exterminacione necarentur...) — 애설레드 2세의 1004년 헌장(Charter) 중
국왕은 자신을 성 브릭티우스에 투영했습니다.
성인이 음모를 이겨내고 성 마르티누스의 무덤 앞에서 뜨거운 숯을 품어 결백을 증명했듯, 국왕 또한 데인족이라는 '가래(Lollium)'를 제거함으로써 자신의 통치를 정당화하려 한 것입니다.
이는 고도로 기획된 정치적 선전(Propaganda)이었습니다.
5. 피로 물든 현장: 옥스퍼드 성 프라이드스위드 수도원의 참극
학살의 가장 생생한 기록은 옥스퍼드에서 발견됩니다.
1004년 애설레드 2세가 발행한 헌장에 따르면, 옥스퍼드의 데인족들은 분노한 군중을 피해 성 프라이드스위드 수도원(St. Frideswide's Church)으로 도망쳐 문을 걸어 잠갔습니다.
하지만 추격하던 잉글랜드인들은 '성역(Sanctuary)'의 원칙을 깨고 수도원에 불을 질러 그들을 몰살했습니다.
옥스퍼드 세인트 존스 칼리지 유골의 법의학적 증거 (2008년 발견)
2008년 세인트 존스 칼리지 건축 과정에서 발견된 34~38구의 유골은 당시의 참상을 과학적으로 입증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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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34~38구의 유골들 |
• 성별 및 연령대: 16~25세 사이의 건장한 젊은 남성들이 대다수였습니다.
• 주요 외상 흔적:
◦ 두개골 골절과 척추의 자창(Stab wounds)이 다수 발견되었습니다.
◦ 특히 최소 5명 이상이 뒤에서 찔린 흔적이 있었는데, 이는 그들이 무장 저항을 한 것이 아니라 도망치던 중에 살해되었음을 시사합니다.
◦ 유골에서 발견된 탄 흔적(Charring)은 기록상의 수도원 방화 사실을 뒷받침합니다.
• 식습관 및 종족 분석: 질소 동위원소 분석 결과, 이들은 앵글로색슨인보다 해산물 섭취량이 월등히 높았습니다. 이는 이들이 덴마크 본토에서 온 바이킹 계열임을 증명합니다.
• 2021년 DNA 분석의 놀라운 발견:
◦ 유골 중 하나가 덴마크 오테루프(Otterup)에서 발견된 바이킹 유골과 '이복형제 또는 삼촌-조카'라는 혈연관계임이 밝혀졌습니다.
◦ 이는 학살당한 이들이 잉글랜드에 정착하려던 평범한 가족의 일원이었음을 보여주며, 사건의 비극성을 학술적으로 극대화합니다.
당시 군중은 데인족을 인간이 아닌 '독초'로 규정함으로써, 성스러운 교회 내에서의 살생조차 '정의로운 근절'로 정당화하는 군중 심리의 극치를 보여주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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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성 브릭시오 축일의 학살 |
6. 결과와 보복: 스벤 1세의 침공과 크누트 대왕의 정복
학살의 소식은 바다 건너 덴마크 왕 스벤 1세(Sweyn Forkbeard)에게 전달되었습니다.
이 학살의 희생자 중에는 스벤의 누이인 군힐데(Gunhilde)와 그녀의 남편 팔리그(Pallig)가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학술적 논쟁점: 팔리그는 데번셔의 이알도르먼으로서 잉글랜드에 충성했으나 학살 직전 배신하여 바이킹 습격에 가담했다는 설과, 단순히 잉글랜드 내 데인족 지도자로서 억울하게 희생되었다는 설이 공존합니다. 어찌 되었든 이들의 죽음은 스벤 1세에게 완벽한 침공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보복의 전개와 역사적 흐름도
스벤 1세는 1003년부터 잉글랜드 전역을 짓밟기 시작했습니다.
그의 군대는 엑서터(Exeter)를 함락시키고 윌튼(Wilton), 솔즈베리(Salisbury), 노리치(Norwich)를 차례로 파괴하며 잉글랜드의 숨통을 조였습니다.
1. 1002년: 성 브릭티우스 축일 학살 발생
2. 1003-1012년: 스벤 1세의 끊임없는 보복 침공과 잉글랜드 방어선의 붕괴
3. 1013년: 잉글랜드 전역이 스벤에게 굴복, 애설레드 2세는 노르망디로 망명
4. 1016년: 스벤의 아들 크누트 대왕(Cnut the Great)이 잉글랜드를 완전 정복
5. 1018년: 옥스퍼드 회의를 통해 잉글랜드인과 데인인이 동일한 법을 따르기로 합의
크누트 대왕은 잉글랜드, 덴마크, 노르웨이를 아우르는 '북해 제국(North Sea Empire)'을 건설했습니다.
그는 더 이상 피의 보복을 이어가지 않고, 1018년 옥스퍼드 회의에서 잉글랜드인과 데인인이 공존할 수 있는 법적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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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누트 북해 제국 |
7. 성 브릭티우스 축일 학살이 남긴 교훈
1002년의 학살은 잉글랜드 역사에 깊은 상흔과 함께 역설적인 유산을 남겼습니다.
이 사건은 한 통치자의 근시안적 결단이 국가의 운명을 어떻게 바꾸어 놓는지 보여주는 서글픈 교훈입니다.
1. 준비되지 않은 리더십의 재앙: 'Unræd'라는 별명처럼, 현명한 조언을 배제하고 극단적인 배타주의를 선택한 애설레드 2세의 리더십은 외교적 고립과 보복 침공이라는 파멸적인 결과를 초래했습니다.
2. 행정 체계의 양면성: 당시 잉글랜드가 보유했던 선진적인 'Hundred' 및 'Frankenpledge' 시스템은 효율적인 지방 통치를 위해 만들어졌으나, 국왕의 잘못된 명령이 하달되었을 때는 가장 잔혹한 '풀뿌리 학살'의 도구로 변모했습니다.
3. 잉글랜드의 체질 변화: 바이킹의 정복은 잉글랜드에 거대한 변화를 가져왔습니다.
◦ 언어적 변화: 복잡한 어미 변화를 가진 고대 영어가 스칸디나비아어와의 접촉을 통해 어순 중심의 단순한 중세 영어로 변화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 정치적 유산: 끊임없는 전쟁과 그 과정에서 맺어진 왕과 신하 사이의 협약들은 훗날 1215년 대헌장(Magna Carta)과 의회 민주주의가 태동하는 역사적 토양이 되었습니다.
1002년 11월 13일의 비극은 앵글로색슨 잉글랜드의 황혼을 알리는 종소리였습니다.
역사는 이 피의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묻습니다.
"증오로 세운 정의가 진정한 평화를 가져올 수 있는가?"
성 브릭티우스 축일 학살은 그 질문에 대한 가장 뼈아픈 대답으로 남아 있습니다.
이 글은 중세 잉글랜드 사료(왕실 헌장, 연대기)와 고고학·법의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1002년 성 브릭티우스 축일 학살의 배경과 결과를 비판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바이킹 침공, 데인겔드 정책, 왕권 불안, 종교적 상징 해석 등은 학계 연구를 토대로 한 해석이며, 일부 사안은 다양한 견해가 공존합니다.
본문에 사실 관계의 오류, 과도한 해석, 보완할 사료나 최신 연구가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애설레드 2세의 책임, 학살의 범위와 동기, 종교적 알레고리에 대한 비판적 의견과 자유로운 토론 역시 환영합니다.
이 글이 단정적인 결론이 아니라, 함께 읽고 생각을 확장하는 열린 기록이 되기를 바랍니다.
On 13 November 1002, King Æthelred II ordered the killing of Danes living in England, an event later known as the St. Brice’s Day massacre.
This act emerged from years of Viking raids, the failure of Danegeld payments to secure peace, and growing royal anxiety over alleged internal betrayal.
Although presented as a “just purification,” the violence was unevenly enforced and focused on towns and fortified centers.
Archaeological evidence from Oxford confirms the massacre’s brutality.
Rather than restoring stability, the killings provoked Danish retaliation, providing King Sweyn Forkbeard with a powerful justification for invasion.
The massacre accelerated the collapse of Anglo-Saxon rule and paved the way for Cnut the Great’s conquest, reshaping England’s political, legal, and linguistic landscap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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