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국 왕조의 첫 심장: 애설스탠(Æthelstan), 사생아 왕이 유럽을 움직이다
왕의 사생아, 운명의 서막
9세기 후반, 브리튼 섬(Britain, 지금의 영국)은 바이킹(Viking, 북유럽 해적)의 강철 발굽 아래 갈가리 찢겨 있었다.
이때 웨식스 왕국(Wessex, 잉글랜드 남부에 있던 색슨족 왕국)을 이끌던 영웅이 바로 알프레드 대왕(Alfred the Great)이었다.
애설스탠은 알프레드 대왕의 손자이자, 그의 아들 에드워드 장로왕(Edward the Elder, 웨식스를 확장시킨 왕)의 아들로 태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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알프레드 대왕 |
문제는 그의 출생이었다.
그의 어머니 에크윈(Ecgwynn)은 왕실 기록에서 종종 지워지는 존재였다.
그녀의 출신은 명확히 전하지 않으며 평민 출신이라는 설도 있으나, 당시 기록 양식과 후대의 정치적 선전이 뒤섞여 있어 애설스탠이 ‘사생아’였다고 단정하기는 어렵다.
그는 어린 시절부터 정통성 논란의 그림자를 안고 자랐지만, 실제로는 머시아의 유력 가문과 연결된 양육 환경 덕분에 정치적 기반을 키워 갔다.
알프레드 대왕은 손자 애설스탠의 비범함을 일찍이 알아봤다.
그는 어린 애설스탠을 궁정으로 불러 자신이 직접 돌보았고, 왕자의 상징인 자주색 망토와 보석이 박힌 검을 하사했다.
이 행동은 형식적 계승 선언이라기보다, 애설스탠에게서 왕의 자질을 본 상징적 행위였다.
알프레드 사후 애설스탠은 머시아의 여주 군주였던 숙모 에설플래드(Æthelflæd, ‘머시아의 부인’) 곁에서 성장하며 머시아식 군정과 외교를 체득했다.
그러나 에드워드 장로왕이 왕위를 이은 뒤 귀족 가문의 딸과 재혼하며 정통성을 갖춘 아들들이 태어났고, 애설스탠은 잠시 왕위 계승 경쟁에서 밀려났다.
그가 성년이 되자, 계모와 이복동생들의 견제가 시작되었다.
특히 에드워드의 두 번째 아내 엘플래드(Ælfflæd) 측과 그 인척들은 애설스탠을 경계했다.
애설스탠을 제거하려는 시도가 있었다는 이야기가 전하나, 확증된 기록은 아니다.
아버지 에드워드는 그를 궁정 정치의 충돌에서 멀리 떨어뜨려 머시아로 보냈고, 이 ‘유배’는 오히려 그에게 머시아 귀족들과의 결속, 국경 방어의 실제 경험, 그리고 머시아 군사력의 지지를 제공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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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스탠 초상 |
왕좌를 향한 피의 승계와 외교의 천재성
924년, 에드워드 장로왕이 갑자기 사망했다.
왕위는 이복동생 엘프워드(Ælfweard)에게 돌아갔으나, 그는 즉위 한 달도 못 되어 세상을 떠났다.
사인은 분분하나 확인되지 않았다.
머시아에서 이미 입지를 굳힌 애설스탠은 먼저 머시아의 지지를 받아 즉위했고, 925년 템스강의 킹스턴(Kingston upon Thames)에서 웨식스의 왕으로도 등극했다.
그의 왕관에는 머시아와 웨식스의 연합이라는 현실이 새겨졌고, 초기에는 반대파 달래기와 권위 확립을 위한 숙정·보상이 병행되었다.
애설스탠의 최대 과제는 북쪽 노섬브리아(Northumbria)였다.
아일랜드계 노르드 왕국 요르비크(Jórvík, 요크)가 자리 잡고 있었기 때문이다.
926년 그는 요르비크의 왕 시트릭 카우치(Sihtric Cáech)와 휴전을 맺고 자신의 여동생을 혼인 동맹으로 보냈다(여동생의 이름 표기는 사료마다 다르다).
이듬해 시트릭이 죽자, 애설스탠은 신속히 북진해 927년 요르비크를 접수하고 노섬브리아 전역을 장악했다.
그해 이아몬트(Eamont)에서 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틴 2세 등 북부 군주들로부터 복종·평화 약속을 받아내며 섬 전체 질서를 재편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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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티누스 2세 |
애설스탠은 자신을 ‘렉스 토티우스 브리타니애(Rex totius Britanniae, 브리튼 전체의 왕)’라 칭하며 외교 지평을 유럽으로 넓혔다.
그는 이복 여동생들을 통해 굵직한 혼인 동맹망을 엮었다.
에드지프(Eadgifu)는 서프랑크의 샤를 3세(Charles III)에게, 에드힐드(Eadhild)는 위그 르 그랑(Hugh the Great) 가문에, 에드디스/에드긱스(Eadgyth, Edith)는 훗날 신성 로마 황제 오토 1세(Otto I)에게 시집갔다.
애설스탠의 궁정은 유럽 왕실 자제들의 피난과 교육의 장이 되었고, 그의 외교는 잉글랜드 왕권을 유럽의 족보 속에 단단히 연결했다.
브루난버 전투, 잉글랜드의 탄생 (937년)
애설스탠의 팽창은 북방의 반발을 불러왔다.
937년 스코틀랜드의 콘스탄틴 2세, 더블린의 올라프 구스프리스손(Olaf Guthfrithson), 스트래스클라이드의 왕이 연합해 남하했다.
그 목표는 잉글랜드의 북부 회복이 아니라, 애설스탠 체제 자체의 붕괴였다.
그들이 상륙한 곳은 브루난버(Brunanburh 브롬버러(Bromborough) 인근추정) 인근으로 비정되나, 정확한 전장은 아직 논쟁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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올라프 구스프리트슨(930-940) 시대의 영국 제도 지도. |
애설스탠은 동생 에드먼드(훗날 왕)와 함께 웨식스·머시아의 정예를 이끌고 북상했다.
브루난버 전투는 ‘통일 잉글랜드’의 존망을 건 결전이었다.
방패벽이 부딪치고, 도끼와 창이 얽히는 난전 속에서 애설스탠은 중앙을 지키며 전열을 유지했고, 에드먼드가 균열을 확대해 연합군의 축을 무너뜨렸다.
연합군은 대패했고, 살아남은 자들은 바다와 산을 넘어 흩어졌다.
이 승리는 웨식스 연대기(Anglo-Saxon Chronicle)의 장엄한 시로 기록될 만큼 중대했다.
스코틀랜드는 일시적으로 머리를 숙였고, 노르드계 세력은 다시는 브리튼 전역을 위협할 규모로 결집하지 못했다.
다만 스코틀랜드·노르드의 존재가 사라진 것은 아니며, 북방의 긴장은 형태를 바꾸어 지속되었다.
그럼에도 브루난버는 ‘잉글랜드’라는 정치적 실체가 전장 위에서 공인된 순간으로 받아들여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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937년 브루난버의 대전투 |
법과 화폐, 잉글랜드의 기틀
군사 영웅을 넘어 애설스탠은 법과 행정의 왕이었다.
그는 윗탄(Witenagemot, 귀족·성직자 회의)을 자주 열어 ‘그레틀리(Grately)·엑서터’ 등 법률 조항을 반포했고, 절도·평화교란에 대한 처벌을 정비하는 한편, 빈민 구휼과 노예 해방 사례를 장려했다.
교회와 협력해 성인 유해 이운, 주교좌 강화, 왕권의 신성화 의례를 정제하여 통합 왕국의 문화적 접착제를 만들었다.
강력한 중앙집권은 반대 세력에 엄격하게 작동했고, 이 점은 비판의 여지도 남겼다.
애설스탠 법률 사본(텍스투스 로펜시스 등 영문법 사본 면) |
그는 주조소와 주화를 왕권 하에 통제하고 은화의 규격·인장을 정비했다.
지역마다 들쑥날쑥하던 화폐를 국가 표준으로 맞추어 상업과 조세를 통일 프레임으로 끌어들였고, 문서 행정과 도량형의 정제는 ‘하나의 잉글랜드’를 일상 경제 속에 각인시켰다.
이후 후계자들의 주화 개혁이 이어졌지만, 전제는 이미 그의 시대에 마련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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애설스탠의 페니(은화) — 정면상/십자가형 주화 |
939년 애설스탠은 글로스터에서 서거했고, 유언에 따라 말름즈버리(Malmesbury 잉글랜드 남서부 윌트셔 주 북부) 사원에 묻혔다.
그는 직계 후계 없이 세상을 떠났으나, 이복동생 에드먼드와 에드레드가 뒤를 이었다.
잠깐의 권역 재편과 북부의 반등 시도는 있었지만, 브루난버에서 확립된 군사적 위상과 법·화폐·의례의 통합은 이미 국가의 심장 박동이 되어 있었다.
애설스탠은 불안한 출생 논란을 안고 출발했으나, 머시아식 실전 감각과 웨식스의 제도력을 결합해 칼·외교·법으로 새로운 질서를 창조했다.
후대가 그를 ‘최초의 잉글랜드 왕(First King of England)’이라 부르는 까닭은, 그의 생애가 단순한 영토 합병이 아니라 ‘잉글랜드’라는 국가의 제작 과정이었기 때문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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Grandson of Alfred, Æthelstan rose despite disputed birth, raised in Mercia and crowned king of Wessex and Mercia in 925.
He seized York in 927 and styled himself Rex totius Britanniae, binding Europe through sister-marriages to West Francia and Otto I.
In 937 he crushed a grand coalition at Brunanburh, forging an English polity.
He legislated widely, standardized coinage and rule, died in 939, later hailed as England’s first king.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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