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51년 탈라스 전투, 고선지와 당나라의 패배가 바꾼 동서 문명 질서 (Battle of Talas)




탈라스 전투: 동서양 문명이 마주친 역사의 변곡점


1. 8세기 세계사의 판도를 바꾼 단 한 번의 격돌

751년 7월, 중앙아시아의 젖줄이라 불리는 탈라스 강가(오늘날 카자흐스탄과 키르기스스탄 접경 지역)에서 인류사의 흐름을 영구적으로 바꾼 거대한 충돌이 발생했습니다. 

이것이 바로 탈라스 전투(Battle of Talas)입니다. 

이 전투는 당시 동양의 절대 패권국이었던 당나라와 이슬람 혁명 이후 급성장하던 신흥 강자 압바스 왕조가 정면으로 맞붙은 인류사 최초이자 유일한 대결이었습니다.

단순한 국경 분쟁처럼 보였던 이 사건은 실상 유교 문명권과 이슬람 문명권의 물리적·문화적 경계선을 확정한 거대한 분수령이었습니다. 

이 전투를 기점으로 당나라의 서방 팽창은 영구히 저지되었으며, 중앙아시아는 불교와 조로아스터교의 땅에서 이슬람 문화권으로 그 색채를 완전히 바꾸게 됩니다. 

또한, 전쟁의 포화 속에서 서방으로 건너간 제지술은 인류의 지적 성장을 가속화한 문명적 축복이 되었습니다.


[탈라스 전투 개요 정리]

구분
주요 내용
시기
751년 7월 ~ 8월 (약 5일간의 전면전)
장소
탈라스 강 유역 (현 키르기스스탄 탈라스 및 나린 지역 추정)
교전국
당나라(唐) vs 압바스 칼리파국(Abbasid Caliphate)
주요 지휘관
고선지(高仙芝) (안서절도사) vs 지야드 이븐 살리흐 (아부 무슬림의 부관)
동맹 세력
당군: 카를룩(초기), 발한나 / 압바스군: 토번(티베트), 카를룩(전투 중 배신)
결과
압바스 왕조의 결정적 승리, 당나라의 중앙아시아 패권 상실
세계사적 의의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 제지술의 서방 전파, 동서양 문명 교류의 대전환

이 거대한 충돌의 서막은 한 고구려 유민 출신 장군의 야심만만한 서역 원정에서 시작되었습니다.


2. 고선지 장군과 당나라의 서진 정책

탈라스 전투를 이해하기 위해서는 그 주역인 고선지(高仙芝, Go Seon-ji) 장군의 존재를 빼놓을 수 없습니다. 

그는 668년 고구려 멸망 후 당나라로 압송된 유민 고사계(高舍鷄)의 아들이었습니다. 

비록 이방인이었으나 뛰어난 무용과 전략을 갖춘 그는 당나라 현종 시대, 실크로드의 요충지를 지키는 안서도호부에서 두각을 나타내며 '중앙아시아의 총독'이라 불리는 자리에 오르게 됩니다.


고구려계 당나라 장군 고선지


파미르 고원을 넘은 불가능의 승리: 747년 소발률국 원정

고선지의 명성을 세계적으로 알린 사건은 747년의 소발률국(현 카슈미르 길기트 지역) 원정이었습니다. 

당시 토번(티베트)은 소발률국과 정략결혼을 맺어 서역 20여 개국을 영향권에 두고 당나라로 향하는 조공로를 차단하고 있었습니다. 

이전의 당나라 장군들이 세 번이나 실패했던 이 험난한 원정에 고선지가 투입되었습니다.

그는 보병과 기병 1만 명을 이끌고 해발 4,600m가 넘는 파미르 고원의 탄구령(坦駒嶺, Tanju Pass)을 넘는 기적적인 행군을 감행했습니다. 

고선지는 소발률국의 관문인 연운보(連雲堡)를 단 반나절 만에 함락시켰습니다. 

연운보는 지세가 험준하고 1만 명의 토번 정예병이 지키고 있었으나, 고선지의 전격적인 공격 앞에 무너졌습니다. 

이후 그는 아노월성까지 진격하여 소발률 국왕과 토번 공주를 생포하는 완벽한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이 승리로 서역 72개국이 당나라에 복속하게 되었으며, 고선지는 안서사진절도사로 승진하며 대당 제국의 서방 패권을 상징하는 인물이 되었습니다.


안서도호부와 실크로드의 통제

당나라는 안서도호부와 북정도호부를 통해 중앙아시아의 타림분지, 이리강 유역, 이식쿨 호수 지구를 장악했습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확장을 넘어 실크로드 무역의 주도권을 쥐고 소그드 상인들의 무역 네트워크를 당나라의 통제 하에 두려는 고도의 경제 전략이었습니다. 

고선지는 이 지역의 군사와 행정을 총괄하며 사실상 제국의 서방 끝을 책임지는 전권 대사 역할을 수행했습니다.


역사학적 인사이트: 고선지의 군사적 위업은 분명 독보적이었으나, 그의 성공 이면에는 현지인들의 반발이 싹트고 있었습니다. 

기록에 따르면 고선지의 원정은 지나치게 강압적이었으며, 이는 '관용 없는 패권주의'의 전형을 보여주었습니다. 

승리에 취한 고선지는 현지 소국들의 주권을 경시하기 시작했고, 이는 곧 파멸의 씨앗이 되었습니다.


3. 전쟁의 도화선: 석국(타슈켄트) 사건과 외교적 결함

750년, 고선지의 위세가 절정에 달했을 때 발생한 석국(石國, 오늘날의 타슈켄트) 사건은 탈라스 전투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되었습니다. 

고선지는 석국이 당나라에 대해 '사신으로서의 예우를 갖추지 않았다(무번신례, 無番臣禮)'는 명분을 내세워 공격을 결정했습니다.


배신과 약탈의 전말

석국의 국왕은 당나라의 압도적인 군사력 앞에 저항할 수 없음을 깨닫고 항복을 청했습니다. 

고선지는 이 항복을 받아들이겠다고 약속했으나, 정작 성문에 들어서자마자 돌변했습니다. 

그는 약속을 어기고 석국을 무력으로 점령한 뒤, 무자비한 도살과 약탈을 감행했습니다.

• 학살: 저항할 힘이 없는 노인과 부녀자, 어린아이들까지 대거 학살당했습니다.

• 약탈: 석국이 보유했던 수많은 보물과 재화를 빼앗았습니다.

• 처형: 포로로 잡힌 석국의 왕은 장안으로 압송되어 결국 현종에 의해 참수되었습니다.

이 사건은 중앙아시아 전역에 엄청난 충격을 주었습니다. 

요행히 탈출한 석국의 왕자는 주변 소국들을 돌며 당나라의 만행을 알렸고, 결국 서쪽의 강력한 신흥 세력인 압바스 왕조(흑의대식)에 구원을 요청하기에 이르렀습니다.


"당나라는 항복한 자의 목도 베는 나라다. 그들의 약속은 한낱 종잇장보다 가볍고, 그들의 칼날은 노인과 아이를 가리지 않는다. 이제 우리가 믿을 수 있는 것은 서방의 칼뿐이다." — 당시 서역 소국들 사이에 번진 공포와 분노의 인식


당나라 외교의 3가지 치명적 결함

1. 관용 없는 패권주의: 투항한 왕조차 처형하는 무자비함은 주변국들로 하여금 '당나라에 복속하느니 차라리 싸우다 죽겠다'는 결사항전의 의지를 심어주었습니다.

2. 외교적 신의의 상실: 고선지의 개인적 탐욕(약탈)은 제국 전체의 외교적 신뢰도를 바닥으로 떨어뜨렸습니다.

3. 적대 세력의 결집 유도: 분산되어 있던 서역 소국들이 생존을 위해 압바스 왕조라는 거대 이슬람 세력의 보호 아래로 스스로 들어가는 '명분'을 제공했습니다.

배신당한 자들의 분노는 이슬람 제국의 군대와 결합하여 탈라스 강가에서 거대한 폭풍으로 변했습니다.


4. 탈라스 전투의 전개: 5일간의 혈투와 배신의 순간

751년 7월, 고선지는 압바스 왕조의 선제공격을 막기 위해 선발제인(先發制人 먼저 움직여 남을 누른다)의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그는 안서도호부를 출발하여 700여 리를 진군, 탈라스 강 유역에 도착했습니다. 

이곳에서 인류 역사상 가장 치열했던 5일간의 혈투가 벌어졌습니다.


탈라스 전투


병력 규모에 대한 기록의 불일치와 진실

당시 동원된 병력에 대해서는 중국과 이슬람 측의 기록이 크게 엇갈립니다.

• 중국 기록: 《자치통감》은 3만 명, 《구당서》는 2만 명으로 기록하고 있습니다.

• 이슬람 기록: 당군이 최대 7만에서 10만 명에 달했으며, 이슬람 연합군은 10만에서 30만 명에 육박했다고 주장합니다. 

역사학적 의문점: 로마나 오스만의 원정 규모를 고려할 때 일개 총독이 30만을 동원했다는 이슬람 기록은 과장되었을 가능성이 큽니다. 

다만, 본국에서 멀리 떨어진 당군에 비해 압바스군이 수적 우위를 점했던 것은 분명한 사실입니다.


5일간의 전투 양상

1. 제1~4일 (교착 상태): 고선지가 이끄는 당나라의 정예 보병과 기병은 수적 열세에도 불구하고 강력한 전투력을 과시했습니다. 

전투 초반, 당군은 압바스군의 진영 일부를 밀어낼 정도로 우세했습니다.

2. 제5일 (반전의 순간): 전투의 향방을 가른 것은 칼이 아니라 '배신'이었습니다. 

당나라의 동맹군으로 참전했던 튀르크계 유목민 카를룩(Karluk)족이 전장에서 돌연 압바스 측으로 돌아섰습니다.

3. 내외협공의 파국: 카를룩족은 당군의 측면과 후방을 기습했습니다. 

앞에서 압바스군의 정면 공격을 막아내던 당군은 등 뒤에서 가해지는 동맹군의 칼날 앞에 순식간에 진형이 붕괴되었습니다.

4. 고선지의 패퇴: 괴멸적인 피해를 입은 당군 중 겨우 수천 명(일부 기록엔 1,000여 명)만이 혈로를 뚫고 살아남았습니다. 

고선지는 밤을 틈타 단기로 도망쳐 안서도호부로 귀환했습니다.


[탈라스 전투 승패 요인 비교]

분석 항목
당나라 (패배 원인)
압바스 왕조 (승리 원인)
지정학적 조건
보급로가 너무 긴 장거리 원정의 한계
본국(호라산)과 가까워 신속한 증원 가능
외교 및 동맹
카를룩의 배신: 강압적 지배의 부메랑
서역 소국들의 자발적 가담과 정보 제공
지휘 및 전술
내외협공에 대비하지 못한 측면 방어 취약
중기병을 활용한 진형 붕괴 및 포위 전술
병력 운용
소수 정예였으나 피로 누적으로 궤멸
압도적 수치와 배신 세력의 적극 활용

전장에서는 당나라가 패배했지만, 이 전쟁의 진정한 유산은 칼이 아닌 포로들의 손 끝에서 시작되었습니다.


5. 문명의 전파: 제지술의 서방 유입과 그 실체

탈라스 전투의 가장 거대한 결과물은 중국의 독점 기술이었던 제지술(종이 제조 기술)이 서방으로 전파된 것입니다. 

이 사건은 인류 지식 문화사의 판도를 바꾼 '문명적 대이동'이었습니다.


제지술의 전파 경로


전통적 서사: 사마르칸트의 포로들

전통적인 세계사는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로 잡힌 당나라 기술자들이 제지술을 전파했다고 설명합니다.

이슬람 기록에 따르면, 751년 사마르칸트에 최초의 제지 공장이 세워졌고, 793년에는 바그다드에 대규모 공장이 들어섰습니다. 

특히 두환의 기록 등을 통해 당시 포로 중에는 경조(Jingzhao, 장안 인근) 출신의 화가 판슈(Fan Shu)와 류치(Liu Ci), 그리고 하동(Hedong) 출신의 직조공 러위(Le Wei)와 루리(Lu Li) 등 구체적인 장인들의 존재가 확인됩니다.


현대 고고학의 반론: 이미 존재했던 종이

그러나 최근의 연구는 탈라스 전투를 '최초 전파'가 아닌 '대량 생산 기술의 혁신적 확산'으로 봅니다.

• 발굴 증거: 3세기경 동튀르키스탄, 6세기경 길기트, 7세기 이전 판지켄트 유적에서 이미 종이가 발견되었습니다.

• 소그드 상인의 역할: 실크로드를 누비던 소그드 상인들이 이미 수백 년 전부터 종이를 보급하고 있었습니다.

• 혁신의 정체: 탈라스 전투 이후의 전파가 중요한 이유는, 포로들이 목화 섬유를 활용한 개선된 제조법과 대량 생산 체계를 전수했기 때문입니다. 

이는 기존의 채후지보다 보존성이 뛰어나고 부드러운 종이를 가능케 했습니다.


[제지술의 서방 확산 경로]

1. 사마르칸트 (751년): 중앙아시아 최초의 제지업 중심지.

2. 바그다드 (793년): '지혜의 집(House of Wisdom)' 설립과 번역 운동의 토대.

3. 다마스쿠스 & 카이로: 지중해 연안의 지식 확산.

4. 발렌시아 (1129년): 이슬람 지배 하의 스페인에 유럽 최초의 제지 공장 설립.

5. 유럽 전역: 르네상스, 종교개혁, 과학 혁명의 근간이 되는 정보 혁명 촉발.


6. 거시적 영향: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와 영토적 경계 확정

탈라스 전투는 중앙아시아에서 중국의 영향력이 쇠퇴하고 이슬람 문명이 뿌리를 내리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 전투가 아니었다면 오늘날의 중앙아시아는 전혀 다른 종교 지도를 가졌을 것입니다.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와 정체성

이전까지 중앙아시아는 불교, 조로아스터교, 네스토리우스 기독교가 공존하던 지역이었습니다. 

그러나 탈라스 전투의 패배로 당나라의 보호막이 사라지자, 이슬람화가 급속도로 진행되었습니다. 

이는 훗날 카라한 왕조와 같은 튀르크계 이슬람 왕조의 탄생으로 이어졌으며, 오늘날 중앙아시아 국가들이 '투르키스탄 문화권'을 형성하는 뿌리가 되었습니다.


당나라의 서역 상실: 쐐기와 자물쇠

당나라는 탈라스 전투에서 대패했음에도 불구하고, 직후 고선지의 후임 봉상청이 대발률국을 탈환하는 등 어느 정도 영향력을 유지했습니다. 

하지만 755년 발생한 안사의 난은 모든 것을 바꾸어 놓았습니다.

• 탈라스 전투 (쐐기): 당나라의 무한한 서진 정책에 제동을 건 결정적 타격.

• 안사의 난 (자물쇠): 본국의 혼란으로 중앙아시아 주둔군을 소환하게 만들며, 당나라가 서역으로 돌아갈 길을 완전히 차단.

이후 위구르 제국과 토번이 이 지역을 차지하며 당나라는 청나라 이전까지 약 800년 동안 중앙아시아에 대한 지배권을 상실했습니다. 

이 격동의 역사는 포로가 되어 세상을 유랑했던 한 인물의 기록을 통해 우리에게 생생하게 전해집니다.


안사의 난. 현종이 쓰촨으로 피난하는 모습


7. 기록의 가치: 두환(Du Huan)과 《경행기(Jingxingji)》

탈라스 전투에서 포로가 된 수만 명 중에는 고선지의 부하였던 두환(杜環)이 있었습니다. 

그는 751년부터 762년까지 1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이슬람 세계를 방랑한 끝에 상선을 타고 광저우(Guangzhou)를 통해 귀환했습니다. 

그가 남긴 견문록 《경행기(經行記)》는 원본은 소실되었으나, 그의 친척 두우(Du You)가 편찬한 백과사전적 사서 《통전(通典)》에 일부 인용되어 오늘날까지 전해집니다.


두환이 묘사한 13개국과 문명적 기록

두환은 중앙아시아를 넘어 중동, 그리고 아프리카의 모로코까지 도달한 최초의 중국인입니다. 

그는 당시 중국인이 전혀 몰랐던 서방의 내밀한 풍습과 정보를 상세히 기록했습니다.


1. 발한나(拔汗那, Ferghana): 산맥에 둘러싸인 산물 풍부한 땅으로 묘사.

2. 강국(康國, Samarkand): 조로아스터교 신앙과 비옥한 토지를 기록.

3. 사자국(獅子國, Ceylon): 스리랑카. 가을과 여름에 덥고 남부 사람들의 흉측한 외모와 불교 신앙 언급.

4. 불름국(拂菻, Byzantium/East Rome): 신의가 뛰어나 뇌 수술(머리를 열어 벌레를 꺼냄)을 하고 안질과 이질을 고친다는 놀라운 의술 기록.

5. 마린국(摩鄰, Maghreb/Morocco): 검은 피부의 사람들, 풀이 없고 대추야자(Persian dates)를 먹는 풍습 기록.

6. 보시국(波斯, Persia): 아라비아에 의해 정복된 지 100년이 넘었다는 역사적 사실 기술.

7. 석국(石國, Tashkent): 자신의 참전지와 고선지의 포로 압송 사실 기록.

8. 쇄엽국(碎葉, Tokmak): 눈의 바다(Snow Sea)와 겨울에도 얼지 않는 따뜻한 바다(Warm Sea, 이식쿨 호수) 묘사.

9. 대식국(大食, Arabia): 이슬람법(Dashi Law)의 관용성(친족 연좌제 없음), 5번의 예배, 얼굴을 가린 여인들, 낙타 발을 닮은 타조(Ostrich) 기록.

10. 말록국(末祿, Merv): 성벽의 길이, 풍부한 수자원, 10명이 먹을 수 있는 거대한 멜론 기록.

11. 점국(苫, Syria): 유학자의 복식(Confucius attire)과 유사한 넓은 옷을 입은 사람들, 그리고 '소의 발을 가진 식인 투르크인'이라는 괴설까지 기록.

12. 발살라국(勃薩羅, Basra): 아라비아의 중요 도시로 묘사.

13. 대진국(大秦, Rome): 불름국과 혼용되기도 하며, 고대 로마의 유산을 언급.


사료적 의의: 두환의 기록 중 특히 흥미로운 점은 서방의 '귀신 시장(Ghost Market)'입니다. 

이는 구매자와 판매자가 직접 얼굴을 마주하지 않고 물건과 돈을 두고 가는 야간 시장의 풍습을 묘사한 것으로, 당시의 독특한 무역 관습을 보여줍니다.

결국 역사는 승자와 패자의 기록을 넘어, 문명과 문명이 만난 흔적을 통해 완성됩니다.


8. 탈라스 전투가 현대인에게 주는 교훈

탈라스 전투는 8세기의 낡은 사건이 아닙니다. 

이 전투는 두 제국의 패권 충돌이라는 비극 속에서 인류 문명을 한 단계 도약시킨 '창조적 파괴'의 현장이었습니다.

1. 관용 없는 패권의 필연적 몰락: 고선지의 석국 학살은 무력만으로 타자를 지배하려 할 때 발생하는 부메랑을 보여줍니다. 

신의를 저버린 지배는 동맹의 배신(카를룩)을 부르고, 결국 제국을 파멸로 이끕니다.

2. 강요되지 않은 문명 교류의 시작: 비록 전쟁으로 시작되었으나, 포로들을 통해 전해진 제지술은 이슬람의 '지혜의 집'을 꽃피웠고 유럽의 르네상스를 이끄는 연료가 되었습니다. 

문명은 칼에 의해 강요될 때보다 기술과 지식에 의해 스며들 때 더 위대하게 성장합니다.

3. 영웅들의 평행이론: 전투의 주역이었던 고선지 장군과 압바스의 명장 아부 무슬림은 공통적으로 전투 4년 뒤인 755년에 비극적인 최후를 맞이했습니다. 

고선지는 모함에 의해 처형되었고, 아부 무슬림은 칼리프의 견제를 받아 암살당했습니다. 

이는 한 시대의 확장이 끝났음을 알리는 상징적인 종언이었습니다.

탈라스 전투는 우리에게 묻습니다. 

진정한 힘은 영토의 확장에 있는가, 아니면 문명 간의 깊은 이해와 관용에 있는가? 

그 답은 탈라스 강가에서 서방으로 흘러간 종이 한 장에 이미 적혀 있었을지도 모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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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글은 중국·이슬람 사료와 현대 역사학·고고학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751년 탈라스 전투의 배경, 전개, 그리고 문명사적 영향을 종합적으로 분석한 글입니다.

고선지의 서역 원정, 석국 사건, 카를룩의 이탈, 제지술 전파와 중앙아시아의 이슬람화 등은 기존 사료와 연구를 토대로 한 비판적 재구성이며, 일부 주제는 학계 내에서 다양한 해석이 공존합니다.

본문에 사실 관계의 오류, 과도한 단정, 보완이 필요한 사료나 최신 연구가 있다면 댓글로 자유롭게 제보해 주시기 바랍니다.

또한 탈라스 전투의 성격, 문명 교류의 경로, 당나라와 이슬람 세계의 상호 인식에 대한 비판적 의견과 자유로운 토론 역시 환영합니다.

이 글이 단일한 결론이 아니라, 문명 충돌과 교류를 함께 사유하는 열린 기록이 되기를 바랍니다.


The Battle of Talas, fought in 751 along the Talas River in Central Asia, marked a decisive turning point in world history. 

Tang China, led by General Gao Xianzhi, confronted the expanding Abbasid Caliphate amid growing tensions caused by Tang intervention in Central Asian politics, particularly the violent suppression of the state of Tashkent. 

Although the Tang army initially held its ground, the defection of the Karluk Turks during the battle led to a catastrophic defeat.

While the military outcome ended Tang ambitions in Central Asia, the broader consequences were far greater. 

The collapse of Chinese influence, compounded by the An Lushan Rebellion soon after, allowed Islamic political and cultural power to expand across the region. 

The battle also became a catalyst for intensified cultural exchange, most notably the spread of advanced papermaking techniques westward, which later fueled intellectual growth in the Islamic world and Europe. 

Talas thus represents not merely a clash of armies, but a moment when the balance of civilizations fundamentally shifted.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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