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 목종 시대의 격랑: 강조의 정변과 역사의 재해석
1. 비극적 군주와 고려사의 분수령
고려 제7대 왕 목종(穆宗)의 시대는 단순한 왕위 교체기를 넘어, 고려 초기의 정치적 불안정과 사회의 복잡한 단면을 응축하여 보여주는 역사의 분수령입니다.
이 시기는 어머니 천추태후(千秋太后), 그녀의 연인 김치양(金致陽), 비운의 군주 목종, 그리고 충신과 역적의 경계에 선 장수 강조(康兆)라는 네 인물의 얽히고설킨 욕망과 갈등이 '강조의 정변'이라는 거대한 비극으로 폭발한 격동의 시간이었습니다.
공식적인 기록은 목종을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천추태후와 김치양을 국정을 농단한 악인으로, 강조를 구국의 결단을 내린 인물로 단순하게 묘사하는 경향이 있습니다.
하지만 역사는 결코 선과 악의 이분법으로 재단될 수 없습니다.
본 글은 《고려사》를 비롯한 공식 기록의 이면에 숨겨진 인물들의 입체적인 모습과 사건의 다층적인 의미를 탐색하고자 합니다.
천추태후의 그늘에 가려졌던 목종의 실제 업적을 재조명하고, 왕을 시해한 역적이 될 수밖에 없었던 강조의 인간적 고뇌를 추적하며, 이 비극적 사건이 어떻게 고려 중흥의 기틀을 마련한 성군 현종(顯宗)의 시대를 열었는지 그 아이러니한 역사의 흐름을 분석할 것입니다.
이를 통해 독자들은 고려 목종 시대가 품고 있는 역사적 중요성과 흥미를 깊이 있게 이해하게 될 것입니다.
2. 격동의 서막: 목종 즉위 이전의 배경
강조의 정변은 어느 날 갑자기 일어난 우발적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그 뿌리는 목종이 즉위하기 수십 년 전부터 시작된 왕실 내부의 깊은 갈등에 맞닿아 있습니다.
이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목종 시대의 정치적 불안정성이 어떻게 잉태되었는지를 파악하는 핵심 열쇠입니다.
2.1 천추태후와 김치양: 금지된 관계의 시작
모든 비극의 시작은 고려 5대 왕 경종(景宗)의 이른 죽음에서 비롯되었습니다.
27세의 젊은 나이에 남편을 잃고 과부가 된 헌애왕후 황보씨(獻哀王后 皇甫氏, 훗날 천추태후)는 독수공방하며 외로운 시간을 보내고 있었습니다.
바로 이때, 김치양이라는 남자가 승려 행세를 하며 그녀가 머물던 천추궁에 접근했습니다.
둘은 이내 사통(私通)하는 관계로 발전했고, 이 추문은 널리 퍼져나갔습니다.
당시 고려 왕실의 문화가 비교적 개방적이었음을 감안하더라도, 이들의 관계는 용납되기 어려운 스캔들이었습니다.
2.2 성종의 개입과 갈등의 잠복
소문을 들은 헌애왕후의 오빠이자 당시 고려의 6대 왕이었던 성종(成宗)은 사태를 수습하기 위해 김치양에게 곤장을 친 후 먼 곳으로 유배를 보냈습니다.
이로써 헌애왕후의 사통 사건은 일단락되는 듯했습니다.
하지만 이 조치는 근본적인 갈등을 해결하지 못했습니다.
오히려 권력에서 밀려난 헌애왕후와 김치양의 가슴속에 앙심을 품게 했고, 훗날 성종이 세상을 떠난 뒤 더 큰 비극으로 되돌아올 씨앗을 남긴 채 잠복기에 들어갔을 뿐이었습니다.
3. 위기의 시대: 목종의 재위와 두 개의 권력
997년 성종이 승하하고 헌애왕후의 아들인 목종이 18세의 나이로 즉위하자, 고려의 정치는 상이한 두 권력의 위태로운 공존 속으로 접어들었습니다.
한편에는 섭정을 시작한 어머니 천추태후와 그녀의 연인 김치양의 세력이, 다른 한편으로는 목종 자신의 친위 세력이 공존하며 서로를 견제했습니다.
이러한 불안정한 권력 구도는 국가의 기강을 심각하게 흔들며 고려를 위기의 시대로 몰아넣었습니다.
3.1 어머니의 그늘: 천추태후의 섭정과 김치양의 전횡
목종은 즉위 당시 이미 성년에 가까운 18세였음에도 불구하고, 어머니 헌애왕후는 천추전(千秋殿)에 머물며 섭정을 시작했고, 세상은 그녀를 '천추태후'라 불렀습니다.
권력을 잡은 천추태후는 가장 먼저 유배지에 있던 김치양을 불러들여 합문통사사인(閤門通事舍人)이라는 벼슬을 내렸습니다.
김치양은 태후의 비호를 등에 업고 불과 몇 년 만에 우복야(右僕射) 겸 삼사사(三司使)라는 최고위직까지 오르며 파격적인 승진을 거듭했습니다.
관리의 인사권을 장악한 김치양은 충신들을 배척하고 자신의 친족과 측근들을 요직에 앉혔습니다.
권력을 이용해 공공연히 뇌물을 받았고, 300여 칸에 달하는 거대한 저택에 화려한 정원과 연못을 꾸미며 사치를 일삼았습니다.
이러한 김치양의 전횡에도 불구하고, 목종의 치세는 국방 강화와 인재 등용 등 괄목할 만한 성과를 보였으며, 이는 군주가 단순히 태후의 그늘에 가려진 무력한 존재가 아니었음을 시사합니다.
하지만 1003년, 천추태후가 김치양과의 사이에서 아들을 낳기에 이르자 상황은 극단으로 치닫습니다.
이 사건은 두 사람이 단순히 권력을 탐하는 것을 넘어, 자신들의 아들을 목종의 후계자로 삼아 왕위 자체를 찬탈하려는 야심을 노골적으로 드러낸 결정적인 계기가 되었습니다.
3.2 왕의 남자: 유행간의 등장과 또 다른 권력
어머니와 김치양의 전횡 속에서 목종 역시 자신만의 권력 기반을 구축했습니다.
그는 유행간(庾行簡)이라는 미남을 총애하며 동성애 관계를 맺었고, 그에게 합문사인(閤門舍人)이라는 벼슬을 내리며 막강한 권력을 부여했습니다.
목종은 교지를 내릴 때마다 반드시 유행간에게 먼저 물어볼 정도로 그를 신임했고, 유행간의 위세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신하들은 그를 왕처럼 대했고, 그는 교만해져 다른 관료들을 업신여겼습니다.
이로 인해 목종을 중심으로 한 또 다른 비선 실세 그룹이 형성되었고, 이는 천추태후-김치양 세력과의 대립을 심화시키며 국정 혼란을 가중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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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고려 거란전쟁에서의 유행간 |
3.3 기록 이면의 군주: 목종의 업적과 재평가
역사 기록은 목종을 '어머니에게 휘둘리고 동성애에 빠져 정사를 게을리한 유약하고 무능한 군주'로 묘사합니다.
그러나 이러한 평가는 다분히 일면적입니다.
기록의 이면을 살펴보면, 목종은 여러 분야에서 상당한 업적을 남긴 유능한 군주였습니다.
그의 치세에서 가장 눈에 띄는 것은, 나라를 굴리는 규칙을 손보려 했던 흔적입니다.
우선 즉위 직후인 998년(목종 1), 목종은 관료들에게 토지와 임지를 지급하던 제도인 전시과(田柴科)를 ‘개정전시과’로 고쳤습니다.
전시과는 단순한 ‘급여’가 아니라, 관료 체계를 유지하는 피와 같은 장치였습니다.
이 제도를 손봤다는 건, 목종이 최소한 “국가 운영의 골격”을 방치하지 않았다는 뜻이기도 합니다.
또 하나. 목종은 인재의 길목을 정비하는 데도 집요했습니다.
1003년(목종 6), 그는 개경·서경·동경과 10도 관리들에게 교서를 내려 지방 교육을 일으키고, 교육 성과가 좋은 박사·사장을 보고하게 했으며, 관내에서 재주와 학식이 있는 인물을 천거하도록 지시합니다.
정치적 혼란 속에서도 “사람을 길러 올리는 통로”를 다시 세우려 했던 시도였습니다.
그 흐름은 1004년(목종 7)에 더 구체화됩니다.
목종은 과거 시행 규칙을 개정해 제술업·명경업·잡업의 시험과 발표 시점을 정리하고, 시험 운영 방식까지 손질했습니다.
과거가 ‘신분 질서’가 아니라 ‘국가 운영 인력’을 뽑는 제도였다는 점을 생각하면, 이 조치는 단지 교육 정책이 아니라 왕권과 관료제의 엔진을 다듬는 작업이었습니다.
그리고 목종의 선택은 수도 안에만 머물지 않습니다.
그는 서경(西京)을 중시했고, 이는 단순한 취향이 아니라 “국가의 무게중심을 어디에 둘 것인가”라는 정치적 결단과 맞닿아 있습니다.
천추태후의 그늘 아래서도, 목종이 완전히 ‘정치를 포기한 군주’로만 박제되기 어려운 이유가 여기에 있습니다.
그는 흉년에 세금을 감면하며 민생을 안정시켰고, 비리 신하를 엄단하여 기강을 바로잡았습니다.
특히 그의 가장 큰 업적은 국방과 인재 등용에서 드러납니다.
목종 대에는 북방 방어 체제가 이어졌고, 훗날 거란과의 전쟁에서 요충지가 된 흥화진 같은 전방 거점이 중요하게 작동했습니다.
또한, 위의 국가 운영 인력을 뽑는 제도로 관리들에게 인재를 천거하게 하고 그 결과에 따라 상벌을 내리는 체계를 구축하여 약 250여 명에 달하는 인재를 등용했습니다.
이는 목종이 체계적인 행정 시스템을 통해 국가를 운영했음을 명백히 보여주는 증거입니다.
이러한 업적들은 목종이 단순히 천추태후에게 휘둘리기만 한 무력한 군주가 아니었음을 증명합니다.
만약 이 모든 성과가 목종 자신의 의지였다면 '천추태후에게 휘둘렸다'는 기록의 신빙성은 떨어지며, 반대로 천추태후가 주도한 것이라면 '전횡을 일삼는 악녀'라는 기록의 신빙성이 흔들리게 됩니다.
이는 목종이라는 인물과 그의 시대를 다각적으로 재평가해야 할 필요성을 강력하게 시사합니다.
4. 정변의 불씨: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
정변의 직접적인 도화선이 된 것은 바로 왕위 계승 문제였습니다.
목종에게 후사가 없는 상황에서 태조 왕건의 유일한 직계 후손인 대량원군 왕순(大諒院君 王詢, 훗날 현종)의 존재는 모든 갈등의 핵심으로 떠올랐습니다.
그의 생존은 김치양과 천추태후의 야심에 가장 큰 걸림돌이었고, 목종에게는 고려 왕실의 정통성을 지킬 마지막 희망이었습니다.
4.1 위협받는 유일한 후계자, 대량원군
천추태후와 김치양은 자신들의 아들을 왕으로 만들기 위해 정통 계승 서열 1위인 대량원군을 제거하려 했습니다.
그들은 12세의 어린 소년이었던 대량원군을 강제로 승려로 만들어 절로 보냈고, 끊임없이 사람을 보내 암살을 시도했습니다.
대량원군은 살해 위협 속에서 하루하루를 불안하게 보내야만 했습니다.
4.2 목종의 결단과 비밀 계획
자신의 사후를 직감한 목종은 더 이상 상황을 방관하지 않았습니다.
그는 고려의 사직을 지키기 위해 치밀하고 대담한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는 그가 결코 무기력한 군주가 아니었음을 증명하는 결정적인 행보였습니다.
먼저 그는 채충순(蔡忠順), 최항(崔沆)과 같은 충신들을 비밀리에 불러 대량원군을 후계자로 삼아 사직을 지켜달라는 유지를 내렸습니다.
동시에 서북면 도순검사로 있던 장수 강조에게 군사를 이끌고 개경으로 와 자신을 호위하라는 비밀 명령을 내렸습니다.
이 계획의 백미는 목종의 뛰어난 정치 감각을 보여줍니다.
그는 자신의 계획에 방해가 될 가능성이 있는 인물 이주정(李周禎)을 서북면 도순검'부'사로 임명하여 서경으로 보냈습니다.
이는 잠재적 위협 요소를 자신이 신임하는 장수 강조의 직속 부하로 배치하여 완벽하게 통제하려는 고도의 정치적 책략이었습니다.
이러한 치밀함은 목종이 단순히 위기에 몰려 마지막 수를 둔 것이 아니라, 복잡한 정세를 읽고 주도적으로 상황을 타개하려 했던 유능한 정치인이었음을 입증합니다.
하지만 역설적이게도 이 명령은 역사의 흐름을 완전히 뒤바꾸는 정변의 시발점이 되었습니다.
5. 운명의 날: 1009년, 강조의 정변
1009년, 목종의 부름을 받은 강조가 군대를 이끌고 개경으로 향하면서 고려 역사의 흐름을 바꾼 운명의 날이 밝았습니다.
하지만 이 과정은 여러 오해와 왜곡된 정보, 그리고 인간적인 고뇌가 뒤섞이면서 누구도 예상치 못한 돌이킬 수 없는 비극으로 치달았습니다.
5.1 엇갈린 정보와 강조의 고뇌
강조가 군사를 이끌고 평주(平州, 현재의 황해북도 평산군)에 이르렀을 때, 그는 아버지로부터 충격적인 편지를 받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종의 머리를 깎아 승려로 위장시킨 뒤 지팡이 속에 편지를 숨겨 보냈는데, 그 내용은 "왕이 이미 죽었으며, 간흉들이 권세를 휘두르니 군사를 끌고 와 국난을 바로잡으라"는 것이었습니다.
목종의 죽음을 확신한 강조는 진군을 계속했지만, 곧이어 목종이 아직 살아있다는 사실을 알게 됩니다.
이 순간 강조는 진퇴양난의 고뇌에 빠졌습니다.
이미 왕이 죽었다고 믿고 군사를 일으켰는데, 이제 와서 군대를 되돌린다면 반역으로 몰릴 것이 뻔했습니다.
그의 휘하 장수들 역시 "여기까지 왔으니 그칠 수 없습니다"라고 주장했습니다.
결국 강조는 이왕 칼을 뽑은 이상, 김치양 일파뿐만 아니라 목종까지 폐위시키기로 비극적인 결심을 내립니다.
5.2 피할 수 없었던 격돌: 목종 폐위와 현종 즉위
강조는 5,000명의 군사를 이끌고 수도 개경에 무혈입성했습니다.
그는 즉시 김치양과 그의 아들, 그리고 목종의 측근이었던 유행간 일파를 모두 체포했습니다.
이후 궁으로 들어간 강조는 목종을 폐위하여 법왕사(法王寺)로 보냈고, 신혈사에서 대량원군을 모셔와 고려 제8대 왕 현종으로 즉위시켰습니다.
이 과정에서 숙청된 인원은 김치양 부자와 유행간을 포함해 처형된 7명, 유배된 30여 명에 불과했습니다.
당시 조정을 양분했다고 알려진 두 거대 세력을 제거하는 정변의 결과로는 이례적으로 적은 숫자였습니다.
이는 천추태후와 김치양의 세력이 기록된 것만큼 막강하지 않았을 가능성을 시사하며, 목종이 완전히 무력한 군주가 아니었다는 재평가를 뒷받침합니다.
5.3 군주의 비극적 최후
폐위된 목종은 충주(忠州)로 향하던 중 비극적인 최후를 맞았습니다.
강조의 부하들이 그를 시해한 것입니다.
폐위되어 유배를 떠나는 절망적인 상황 속에서도, 목종은 어머니 천추태후가 말을 타면 직접 말고삐를 잡고, 식사 시간이 되면 직접 밥시중을 들었다고 전해집니다.
정변의 원인을 제공한 어머니에게 끝까지 자식으로서의 효를 다했던 그의 인간적인 면모는 비극성을 더욱 깊게 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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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의릉으로 추정되는 동구릉 전경 |
6. 정변 이후: 새로운 시대의 개막과 남겨진 유산
강조의 정변은 목종 개인의 비극으로 끝나지 않았습니다.
이 사건은 고려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상처를 남기는 동시에, 새로운 시대를 여는 역설적인 결과를 낳았습니다.
정변은 고려 중흥기를 이끈 현종이라는 성군을 탄생시켰지만, 동시에 목종 시해를 명분으로 한 거란의 대규모 침공을 불러오는 직접적인 원인이 되었습니다.
6.1 현종의 시대: 성군의 길과 마음의 짐
정변으로 얼떨결에 왕위에 오른 현종은 즉위 1년도 채 되지 않아 거란의 2차 침공을 겪으며 나주까지 피난을 가는 등 험난한 시기를 보냈습니다.
하지만 그는 이 모든 시련을 극복하고 고려의 중흥을 이끈 한국사 최고의 성군 중 한 명으로 성장했습니다.
여기에는 한 가지 흥미로운 해석이 가능합니다.
비록 정변을 직접 주도하지는 않았지만, 자신을 보호하려 했던 목종이 시해당하고 자신이 왕위에 오른 과정에 대해 현종 역시 죄책감과 무거운 책임감을 가졌을 수 있다는 것입니다.
순탄치 않은 과정으로 즉위한 군주가 폭군이 되는 경우가 많음에도 불구하고, 그가 위대한 군주가 될 수 있었던 것은 어쩌면 목종에 대한 마음의 짐을 덜기 위한 필사적인 노력의 결과였을지도 모릅니다.
6.2 충신인가, 역적인가: 강조의 최후와 역사적 평가
정변의 주역 강조는 충신과 역적이라는 양면적인 평가를 동시에 받는 인물입니다.
그는 목종 시해에 대해 깊은 죄책감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훗날 거란과의 통주 전투에서 대패하여 정신적으로 무너졌을 때, 그는 목종의 혼령을 보고 "죽을 죄를 지었습니다! 용서해 주시옵소서!"라며 잘못을 빌었다는 기록이 이를 뒷받침합니다.
결국 강조는 나라를 구하려던 충신이었지만, 결과적으로 군주를 시해한 역적이 되어버린 비극적 인물입니다.
거란의 침공이 자신의 정변을 명분으로 삼았기에, 그는 국난을 자신의 손으로 극복해야 한다는 무거운 책임감으로 직접 전장에 나섰을 가능성이 높습니다.
그는 포로로 잡힌 후 거란의 회유와 고문에도 굴하지 않고 당당하게 죽음을 맞이했습니다.
그의 복잡한 위상과 비극적 최후는 역사 속 인물을 평가하는 것이 얼마나 어려운 일인지를 보여줍니다.
7. 역사의 교훈과 재해석의 중요성
고려 목종 시대와 강조의 정변은 선과 악, 충신과 역적이라는 단순한 이분법으로 재단할 수 없는 복잡한 인간의 욕망과 정치적 현실이 얽힌 한 편의 비극이었습니다.
기록 속에서 유약한 군주로 박제되었던 목종은 실제로는 국방을 튼튼히 하고 인재를 등용했으며, 마지막 순간까지 사직을 지키려 했던 책임감 있는 군주였습니다.
나라를 구하려던 충신 강조는 엇갈린 정보와 돌이킬 수 없는 선택 속에서 군주를 시해한 역적이 되었습니다.
이처럼 역사는 승자의 관점에서 기록되고 편집되는 경향이 있습니다.
따라서 우리는 역사 기록을 비판적으로 검토하고, 행간에 숨겨진 의미를 파악하며, 인물과 사건을 다각적으로 재해석하려는 노력을 멈추지 말아야 합니다.
목종 시대의 격랑을 통해 우리는 역사적 진실에 다가가는 길이 얼마나 신중하고 입체적인 사고를 요구하는지 다시 한번 깨닫게 됩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가 과거의 역사를 통해 현재와 미래를 배우는 진정한 이유일 것입니다.
이 글은 고려 목종(穆宗) 시대의 권력 갈등과 1009년 ‘강조의 정변’을 중심으로, 《고려사》 등 기록에 남은 큰 흐름을 바탕으로 정리했습니다.
다만 기록에 직접 남지 않는 인물의 심리·현장 분위기·대화·장면 전환 문장은 독자의 몰입을 위해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In King Mokjong’s Korea (r. 997–1009), power split between Queen Dowager Cheonchu and her ally Kim Chiyang, and the king’s own circle.
With no heir, the rightful successor Prince Daeryang (later King Hyeonjong) became a target.
Mokjong secretly sought to protect him and summoned General Gangjo, but rumors that the king was dead pushed Gangjo into action.
In 1009 he entered Gaegyeong, purged rivals, deposed Mokjong, enthroned Hyeonjong, and Mokjong was killed in exile.
The coup opened a new reign yet invited Khitan invasion and left Gangjo a tragic figure, hailed as savior or condemned as regicid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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