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숨은 영웅, 지채문 장군
1. 위기의 고려와 구국의 방패, 지채문
1010년 겨울, 고려는 건국 이래 최악의 위기에 직면했다.
거란의 황제 야율융서가 친히 이끄는 40만 대군은 파죽지세로 압록강을 넘어 남하하고 있었다.
고려의 주력군 30만 명을 이끌고 통주에 배수진을 쳤던 총사령관 강조는 거란의 기습에 허를 찔려 대패하고, 포로로 잡혀 죽음을 맞이했다.
국가의 방어선은 순식간에 붕괴되었고, 수도 개경을 향한 문이 활짝 열렸다.
조정은 항복론에 휩싸였으며 신하들은 흩어지기 시작했다.
그야말로 국가의 존망이 경각에 달린 절체절명의 순간이었다.
이러한 총체적 혼란 속에서 한 명의 장수가 역사의 전면에 등장한다.
바로 중랑장 지채문(智蔡文)이다.
그는 단순한 무장을 넘어, 패닉에 빠진 국왕 현종의 곁을 끝까지 지키며 그의 생명을 보존하고, 꺼져가던 고려의 항전 의지를 되살린 핵심 인물이었다.
그의 활약이 없었다면 현종의 몽진(蒙塵)은 불가능했을 것이며, 고려 왕조의 명맥 역시 위태로웠을 것이다.
본 글은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의 향방을 가른 결정적 인물임에도 불구하고 강감찬의 귀주대첩 그늘에 가려져 있던 지채문 장군의 진정한 가치를 재조명하고자 한다.
이를 위해 서경 방어전에서 보여준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결단력과 현종의 몽진을 완수한 충직한 호위무사로서의 헌신이라는 두 가지 측면을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의 공헌에 대한 당대의 평가를 통해 역사적 위상을 재정립할 것이다.
2. 서경 방어전: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지채문
지채문의 첫 번째 주요 활약 무대는 고려 제2의 수도이자 북진정책의 심장부였던 서경(西京, 現 평양)이었다.
태조 왕건 이래 개경 다음으로 중시되었던 서경은 북방 방어의 핵심 거점이었기에, 이곳의 사수는 전쟁의 초기 흐름을 결정짓는 매우 중요한 의미를 가졌다.
지채문은 바로 이 전략적 요충지에서 군사 지휘관으로서의 면모를 유감없이 발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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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채문 상상화 |
2.1. 항복론에 맞선 결단
강조의 30만 대군이 통주에서 궤멸되었다는 소식은 서경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거란군의 압도적인 기세 앞에 서경의 관리들은 전의를 상실했고, 성 전체는 항복 분위기에 휩싸였다.
서경 부유수 원종석을 필두로 한 관료들은 이미 거란에 항복하기로 뜻을 모으고, 항복 문서를 작성하여 거란 사절 노의와 유경에게 전달하려던 참이었다.
바로 그때, 현종의 명을 받고 서경으로 달려온 지채문과 최창이 성에 도착했다.
그러나 항복을 결심한 서경 관료들은 성문을 굳게 닫고 이들을 받아들이지 않았다.
끈질긴 설득 끝에 성 안으로 들어온 지채문은 말이 통하지 않는다는 사실을 깨닫고 극단적인 결단을 내린다.
그는 병사들을 성문 밖에 매복시켰다가, 항복 문서를 가지고 성을 나서는 거란 사절 노의와 유경을 급습하여 그 자리에서 살해하고 항복 문서를 불태웠다.
나아가 항복에 동의했던 부유수 원종석을 비롯한 서경의 주요 관료들을 모두 처형하는 피의 숙청을 단행했다.
이 행동은 단순히 사절을 제거한 것을 넘어, 서경의 퇴로를 스스로 차단하고 항복론자들을 제거함으로써 저항 의지를 강제한 극약 처방이었다.
항복의 길을 피로써 차단한 지채문은 비로소 서경의 군사력을 온전히 장악하고 거란군에 대한 반격에 나설 수 있었다.
2.2. 서경성 내외의 군사 활동과 그 한계
지채문은 서경의 지휘권을 장악한 뒤, 동북면도순검사 탁사정의 군대와 합류하여 본격적인 군사 활동에 나섰다.
고려군은 거란의 선발대를 상대로 연이어 승리를 거두며 사기를 끌어올렸다.
• 한기 부대 격파: 서경의 상황을 파악하러 온 거란 장수 한기가 이끄는 기병 200명을 급습하여, 한기를 포함한 100명을 사살하고 나머지는 사로잡았다.
• 아라름 부대 패퇴: 개경으로 파견되던 거란 부대의 지휘관 아라름을 기습 공격하여 패퇴시켰다.
• 거란군 3천 명 참살: 이러한 소규모 승리 이후 탁사정은 지채문의 보고를 받고 승려 법원과 함께 9천 명의 병력을 이끌고 출격, 거란군을 공격하여 3천여 명의 머리를 베는 대승을 거두었다.
이러한 연이은 승리는 항복론에 흔들리던 서경의 민심을 다잡는 결정적 계기가 되었고, 고려군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다.
그러나 이 기세에 취한 고려군은 패퇴하는 거란군을 너무 깊숙이 추격하다가 거란 본대의 강력한 역습을 받아 크게 패하고 말았다.
이 패배로 지채문은 서경을 떠나 개경으로 후퇴할 수밖에 없었다.
이는 그의 군사적 역량이 기습과 국지전에서는 빛을 발했지만, 대규모 부대를 운용하는 전술적 판단에서는 한계를 보였음을 시사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서경에서의 그의 군사 활동은 비록 완전한 성공은 아니었으나, 거란의 주력 부대가 개경으로 진격하는 시간을 며칠이나마 지연시키는 데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이 지연 덕분에 현종은 남쪽으로 몽진할 최소한의 시간을 확보할 수 있었다.
이는 고려의 군공 포상 제도에서 최고의 공적으로 인정되는 '국왕 신변 보호'의 기반을 마련한 전략적 성공이었으며, 지채문의 다음 행적인 '국왕 호위'의 발판이 되었다.
3. 국왕의 방패: 현종 몽진(蒙塵)의 충직한 호위무사
지채문의 행적 중 가장 빛나는 부분은 단연 현종의 몽진 호위이다.
국가의 구심점인 국왕이 적에게 사로잡히거나 시해당하는 것은 곧 국가의 멸망을 의미했다.
모든 신하가 국왕을 버리고 흩어지는 절망적인 상황에서, 홀로 현종의 곁을 지킨 지채문의 충성심은 붕괴 직전의 고려 왕조를 지탱한 마지막 버팀목이었다.
그는 단순한 호위 무사를 넘어, 국가의 상징을 지켜낸 방패 그 자체였다.
개경을 나설 때만 해도 왕을 에워쌌던 수백 명의 금군(禁軍, 국왕 친위대)은 하룻밤 사이에 신기루처럼 사라졌다.
남은 것은 지채문이 이끄는 단 50여 명의 기병뿐.
40만 거란 대군이라는 거대한 파도 앞에 선 50개의 작은 촛불, 그것이 고려 왕실의 전부였다.
3.1. 죽음의 위협 속 국왕 수호 연대기
개경을 떠나 머나먼 나주까지 이어진 몽진길은 죽음의 위협이 끊이지 않는 여정이었다.
지채문은 자신의 기지와 무용(武勇)으로 여러 차례 현종을 위기에서 구해냈다.
• 적성현 단조역에서 발생한 지방 군졸의 반란: 몽진 초입인 적성현 단조역에서 군졸 견영의 무리가 활을 쏘며 행궁을 위협했다.
모두가 공포에 떨었지만 지채문은 즉시 말을 몰고 나가 신기에 가까운 활솜씨로 두 차례나 이들을 격퇴하며 왕의 행렬을 지켜냈다.
• 창화현에서의 야간 습격: 지방 아전의 농간으로 혼란이 발생한 틈을 타, 정체불명의 무장 세력 혹은 지방 호족의 사병으로 추정되는 적들이 왕의 숙소를 습격했다.
호종하던 신하들마저 모두 도망친 절체절명의 순간, 지채문은 먼저 왕후들을 안전한 곳으로 대피시킨 후, 직접 현종이 탄 말의 고삐를 잡고 샛길로 빠져나와 위기를 벗어났다.
• 전주절도사 조용겸의 반란 기도: 전주에서는 절도사 조용겸이 현종을 위협하며 왕을 납치하려는 불온한 움직임을 보였다.
지채문은 즉시 현종이 머무는 전각의 문을 걸어 잠그고 앞을 막아서며 단호하게 대치하여 조용겸의 역모를 좌절시켰다.
• 나주의 거짓 경보: 나주에서 야경꾼이 거란 사신을 추격군으로 오인하여 거짓 보고를 올리자 현종은 크게 동요하며 피난을 서둘렀다.
이때 지채문은 침착하게 왕을 진정시킨 뒤, 직접 정찰에 나서 이들이 사신임을 확인하고 혼란을 수습했다.
3.2. 심리적 안정자이자 조언자로서의 역할
지채문은 물리적 위협뿐만 아니라, 극심한 공포와 불안에 시달리는 현종의 정신적 지주 역할까지 수행했다.
1. 기러기 사냥을 통한 위로: 사산현을 지날 때, 지친 현종을 위로하기 위해 일부러 기러기떼를 놀라게 한 뒤, 마상에서 몸을 젖히는 어려운 자세로 활을 쏘아 명중시켰다.
이는 단순한 무예 과시가 아니라 최고 지휘관(국왕)의 불안정한 심리를 안정시키고 신뢰를 회복하기 위한 고도의 '심리적 전장 관리' 행위였다.
그는 기러기를 왕에게 바치며 "이렇게 활을 잘 쏘는 신하를 두셨으니, 도적이 있은들 무슨 걱정이 있으리까?" 라고 말해 현종을 웃게 만들었고, 이는 왕에게 용기와 희망을 불어넣으려는 깊은 충심의 발로였다.
이 장면은 단순한 위로를 넘어선 지채문의 '정치적 메시지'였다.
당시 피난길의 현종은 지방 호족들에게 무시당하며 왕권의 바닥을 경험하고 있었다.
지채문은 보란 듯이 무력을 과시함으로써, '왕의 곁에 여전히 천하무적의 장수가 있음'을 주변의 잠재적 배신자들에게 경고한 것이다.
2. 병사들의 불만 해소: 오랜 몽진에 지친 호위 병사들이 불만을 품고 반란을 일으키려 하자, 지채문은 이를 간파하고 현종에게 나아가 태조 왕건의 사례를 들며 포상을 건의했다.
그는 "위기를 겪을 때일수록 사람의 마음을 얻는 것이 중요하다"고 조언했고, 현종은 이를 받아들여 남은 16명의 병사에게 '중윤'이라는 관직을 내렸다.
이 지혜로운 조치로 병사들의 사기는 진작되었고, 몽진을 무사히 마칠 수 있었다.
이처럼 지채문의 헌신적인 호위와 시의적절한 조언은 수많은 위기를 극복하고 마침내 거란군 철수 소식을 접하기까지 현종의 몽진을 완수하게 한 절대적인 원동력이었다.
4. 역사적 평가와 유산
지채문의 군사적 결단과 국왕에 대한 절대적 충성심은 고려사를 관통하는 중요한 유산으로 남았다.
그의 공헌은 당대 국왕의 높은 평가와 파격적인 보상으로 이어졌으며, 후대에도 충신의 귀감으로 기억되었다.
그의 역사적 가치는 당대의 평가와 그가 남긴 유산을 통해 다각적으로 분석할 수 있다.
4.1. 지채문의 공헌에 대한 국왕의 평가
전쟁이 끝난 후, 현종은 지채문의 공로를 공식적으로 치하하며 그의 충절을 국가적으로 공인했다.
환도 후 현종이 직접 내린 교서는 지채문에 대한 국왕의 신뢰와 감사가 얼마나 깊었는지를 명확히 보여준다.
"짐이 도적을 피하다가 먼 길 위에서 곤경에 빠졌을 적에 호종하던 신료들 모두 도망가 흩어지지 않은 자가 없었는데, 오직 지채문만이 바람과 서리를 무릅쓴 채 산을 넘고 강을 건너면서 말고삐를 잡는 수고로움을 마다하지 않고 끝까지 소나무나 대나무 같은 절개를 지켰다. 특출한 공로를 생각하면 어찌 남다른 은전(恩典)을 아끼겠는가"
이 교서는 지채문의 공이 단순한 군공(軍功)을 넘어, 왕조의 명맥을 지켜낸 구국적 행위였음을 국왕 스스로 천명한 것이다.
4.2. 군공 포상 제도를 통해 본 보상과 위상
고려 전기 군공 포상 제도에서 '국왕 신변 보호'는 전투에서의 공로와 동등하게 중요한 군공으로 인정되었다.
지채문이 받은 포상은 당시 제도의 틀 안에서 최고 수준의 예우였으며, 이는 그의 위상을 명백히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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포상 내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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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여 시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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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적 의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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토지 30결 하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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환도 직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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당시 토지는 영속적 자산 가치를 지닌 최고의 현물 포상이었다. 특히
30결은 문헌상 확인되는 고려 전기의 군공 포상 중 최대 지급 규모로, 현종이 그의 공을 얼마나 독보적으로 평가했는지 보여주는
지표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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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상시(右常侍) 임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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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1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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무관에게 정3품의 고위 문관직이자 감찰 기구인 어사대의 관직을
겸하게 한 것은 파격적인 인사였다. 이는 단순한 위상 격상을 넘어,
가장 신뢰하는 충신을 관료 사회를 감찰하는 중책에 앉힌 국왕의 깊은
신임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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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서우복야(尙書右僕射) 승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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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2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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고려 관료 서열 3위에 해당하는 최고위직으로, 그의 공로가
일회성으로 그치지 않고 지속적으로 인정받으며 당대 최고의 명예를
누렸음을 증명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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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등 공신 추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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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031년 (덕종)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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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후(1026년 사망)에도 선왕 현종의 아들인 덕종이 그의 충절과 공로를 기려 1등 공신으로 추증함으로써, 그의 공헌이
후대 왕에게까지 공식적으로 계승되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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4.3. 후대의 기억과 역사적 위상
오늘날 고려-거란 전쟁의 영웅은 대부분 강감찬 장군을 떠올린다.
귀주대첩이라는 상징적 대승리가 워낙 강렬한 인상을 남겼기 때문이다.
이로 인해 지채문의 대중적 인지도는 상대적으로 낮다.
그러나 전쟁의 과정을 면밀히 살펴보면, 제2차 전쟁의 국난 극복에 있어 가장 결정적인 역할을 한 인물은 단연 지채문이라 할 수 있다.
만약 그가 서경에서 거란의 진군을 지연시키지 못했다면, 그리고 몽진길에서 현종을 지켜내지 못했다면, 고려는 항전의 구심점을 잃고 그대로 무너졌을 가능성이 높다.
강감찬의 귀주대첩이라는 3차 전쟁의 위업 역시 불가능했을 것이다.
그의 흔들리지 않는 충절은 위기에 처한 국가를 어떻게 지켜야 하는지에 대한 영원한 귀감이 되었다.
4.4. 천 년을 이어온 충의의 혈통, 봉산 지씨
지채문 장군의 헌신은 단순히 역사서의 한 페이지로 끝나지 않았다.
그는 오늘날 봉산 지씨(鳳山 智氏, 황해도 봉산을 본관으로 하는 성씨)의 시조로 추대되며 그 혈통을 이어가고 있다.
흥미로운 점은 그의 성씨인 지(智) 자가 '지혜 지' 자를 쓴다는 것이다.
이는 거란의 대군 앞에서도 냉철함을 유지하며 기지를 발휘했던 그의 행적과 묘하게 닮아 있다.
비록 고려 초기 지씨 문중에 대한 기록은 사료마다 조금씩 차이가 있으나, 봉산 지씨 문중에서는 지채문을 중시조(中始祖, 쇠퇴한 가문을 다시 일으킨 조상) 혹은 시조로 모시며 그의 충절을 가문의 정신적 뿌리로 삼고 있다.
그가 지켜낸 것은 현종이라는 한 명의 군주가 아니라, '고려'라는 나라 그 자체였기에 그의 후손들은 오늘날까지도 그 자부심을 이어오고 있는 것이다.
5. 고려의 꺼지지 않는 불씨를 지켜낸 명장
지채문은 제2차 고려-거란 전쟁이라는 미증유의 국난 속에서 고려의 운명을 한 어깨에 짊어진 인물이었다.
그는 서경에서 항복론에 맞서 결사항전의 기치를 들었던 결단력 있는 군사 지휘관이었으며, 모두가 군주를 버리고 흩어질 때 끝까지 곁을 지키며 왕조의 명맥을 이은 절대적인 충의의 화신이었다.
그의 활약은 단순히 한 명의 왕을 구한 것을 넘어, 거란의 침략으로 꺼져가던 고려의 불씨를 온몸으로 지켜낸 구국적 행위였다.
현종이 그의 호위 속에서 무사히 몽진을 마치고 항전 의지를 다질 수 있었기에, 고려는 이후 반격의 기회를 마련하고 마침내 거란을 물리칠 수 있었다.
따라서 지채문은 화려한 대첩의 주인공은 아닐지라도, 가장 어두운 시기에 국가의 희망을 지켜낸 진정한 영웅이자 충신의 표상으로 역사에 기록되어야 마땅하다.
이 글은 《고려사》·《고려사절요》 등 현재 공개된 사료에 근거해, 제2차 고려-거란 전쟁(1010) 국면에서 지채문(智蔡文)의 역할을 중심으로 사건의 흐름을 재구성한 글입니다.
당시 기록은 전투의 세부 상황, 병력 규모, 전과(베었다/사로잡았다 같은 수치)에서 과장이나 상징적 표현이 섞일 수 있고, 같은 사건도 편찬 시기·관점에 따라 강조점이 달라집니다.
따라서 본문에서 대군의 규모나 ‘몇 명’ 같은 수치가 등장하는 부분은 “사료에 그렇게 전한다”는 범위에서 이해해 주세요.
또한 몽진(蒙塵) 구간은 ‘왕권이 무너지는 순간’과 ‘왕을 지키는 손’이 교차하는 장면이 많아, 독자의 몰입을 위해 일부 문장 구성과 장면 전환을 서사적으로 다듬었습니다.
다만 사건의 핵심 골격(서경 항복 문서 소각, 사절 처단, 피난길에서의 위기와 호종, 전쟁 이후 공로 평가 등)은 사료의 큰 흐름을 벗어나지 않도록 유지했습니다.
During the Second Goryeo–Khitan War (1010), General Ji Chaemun emerges as a pivotal figure when the kingdom collapses into panic after Gangjo’s defeat.
At Seo-gyeong (Pyongyang), he blocks surrender by killing Khitan envoys and burning the capitulation document, forcing resistance and buying time.
As King Hyeonjong flees south (mongjin), most escorts scatter, but Ji remains as the king’s shield—repelling threats, managing rumors, securing safe passage, and stabilizing morale.
His actions preserve the royal center of gravity, allowing Goryeo to endure the invasion and later recover.
Though overshadowed by later victories, Ji’s loyalty and decisive violence shape the war’s survival narrati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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