귀주대첩: 고려의 운명을 건 최후의 결전
1. 한국사 3대 대첩, 귀주대첩의 의의
귀주대첩은 을지문덕의 살수대첩, 이순신의 한산도대첩과 함께 '한국사 3대 대첩'으로 꼽히는 위대한 승리입니다.
이 전투가 이토록 높이 평가받는 이유는 단순히 한 번의 전투에서 거둔 압도적인 승리를 넘어, 10세기 말부터 25년간 끈질기게 이어진 고려와 거란의 기나긴 전쟁에 종지부를 찍었기 때문입니다.
귀주대첩은 고려의 자주성을 지켜냈을 뿐만 아니라, 동아시아의 국제 질서를 재편한 결정적인 전환점이었습니다.
본문은 거란의 속도전에 맞서 고려가 어떻게 국경의 지연전, 수도의 결사항전, 그리고 최종 결전장의 섬멸전을 유기적으로 연계했는지 심도 있게 분석합니다.
이 과정에서 강감찬의 지략은 물론, 몽진 대신 항전을 택한 현종의 결단과 온 백성이 참여한 총력전의 양상을 입체적으로 조명할 것입니다.
나아가 이 역사적인 승리가 고려와 동아시아에 어떤 결과를 가져왔으며, 오늘날 우리에게 어떤 의미를 가지는지 종합적으로 평가하고자 합니다.
이제, 고려의 운명을 건 최후의 결전이 벌어지기까지 누적되어 온 갈등의 역사를 먼저 살펴보겠습니다.
2. 끝나지 않은 전쟁: 제3차 고려-거란 전쟁의 배경
거란의 제3차 침공은 갑작스러운 사건이 아니었습니다.
이는 993년(1차 침입)과 1010년(2차 침입)에 걸쳐 이어진 전쟁의 연장선상에 있었습니다.
1차 침입은 서희의 외교 담판으로 강동 6주를 획득하는 성과를 거두었으나, 2차 침입에서는 수도 개경이 함락되고 현종이 나주까지 몽진하는 국가적 위기를 겪었습니다.
고려는 힘겹게 거란군을 몰아냈지만, 전쟁의 불씨는 꺼지지 않은 채 남아있었습니다.
거란의 명분: 이행되지 않은 약속
제3차 침공의 직접적인 원인은 제2차 전쟁 이후 고려가 이행하지 않은 두 가지 약속에서 비롯되었습니다.
• 국왕의 친조(親朝) 약속 불이행
1011년, 제2차 침입 당시 현종은 거란군을 철수시키기 위한 협상 조건으로 거란 황제를 직접 찾아가 조공하겠다는 '친조'를 약속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전쟁을 끝내기 위한 임시방편이었고, 현종은 실제로 약속을 이행하지 않았습니다.
거란은 이를 명분으로 지속해서 고려를 압박했습니다.
• 강동 6주의 반환 요구
거란은 현종의 친조가 이행되지 않자, 그 대안으로 서희가 외교 담판을 통해 획득했던 강동 6주의 반환을 요구했습니다.
압록강 동쪽에 위치한 이 지역은 군사적, 경제적으로 매우 중요한 전략적 요충지였기에 고려로서는 결코 포기할 수 없는 땅이었습니다.
이러한 갈등 속에서 거란은 1013년부터 1017년까지 무려 7차례에 걸쳐 국지전을 벌이며 고려 국경을 침범했습니다.
이는 대규모 전쟁을 위한 사전 정찰이자 고려를 압박하기 위한 무력시위였습니다.
끊임없는 도발에도 고려가 굴복하지 않자, 거란은 마침내 고려를 완전히 제압하기 위한 총공세를 준비하기 시작했습니다.
3. 거란의 총공세와 고려의 유기적 방어 전략
거란의 제3차 침공은 수도 개경을 단숨에 점령하려는 속도전 양상으로 전개되었습니다.
이에 맞선 고려는 국경 지대에서부터 적의 예봉을 꺾는 지연전을 펼치고, 수도에서는 결사항전으로 적의 보급을 차단하며, 마지막에는 적을 유리한 지형으로 유인해 섬멸하는 다층적이고 유기적인 방어 전략을 구사했습니다.
거란군의 침공과 초기 전투
• 침공 개시 1018년 12월, 거란의 명장 소배압(蕭排押)이 이끄는 10만 대군이 압록강을 건너 고려를 침공했습니다.
• 흥화진 전투 고려군 총사령관 강감찬(姜邯贊)의 지휘 아래, 흥화진의 첫 전투는 기발한 전술로 시작되었습니다.
쇠가죽으로 냇물을 막아 거대한 저수지를 만든 뒤, 거란군이 강을 건너는 순간 둑을 터뜨리는 수공(水攻)으로 적진을 혼란에 빠뜨렸습니다.
이와 동시에, 미리 매복시켜둔 기병 1만 2천 명을 투입하여 거란군에 막대한 첫 패배를 안겼습니다.
• 거란의 직도(直搗) 전략 흥화진에서의 패배에도 불구하고 소배압은 전술을 바꿔 고려의 주요 방어선을 우회하여 곧장 수도 개경(開京)으로 진격하는 과감한 직도 전략을 선택했습니다.
하지만 이는 고려의 계산 안에 있었습니다.
강민첨과 조원 장군이 이끄는 고려의 추격 부대는 남하하는 거란군의 뒤를 쫓으며 계속해서 타격을 입혔고, 특히 시랑 조원은 마탄에서 거란군 1만 명을 섬멸하는 엄청난 전과를 올리며 적의 예봉을 꺾었습니다.
고려의 결사 항전
거란군이 개경으로 다가오자, 고려 조정은 2차 침공 당시의 뼈아픈 실패를 되풀이하지 않기 위해 총력으로 대응했습니다.
• 현종의 결단 2차 침공 당시 나주까지 피난을 떠나야 했던 현종(顯宗)은 이번에는 몽진하지 않고 개경에 남아 결사항전을 선포했습니다.
국왕이 수도를 지키겠다는 결정을 내리자, 군사와 백성의 사기는 하늘을 찔렀습니다.
• 청야 전술(淸野戰術) 현종은 개경 주변의 모든 들판의 곡식을 거두고, 성 밖의 민가를 성안으로 옮겼으며, 우물을 메워 적이 식수조차 구하지 못하게 하는 철저한 청야 전술을 명했습니다.
이는 적의 현지 보급을 원천적으로 차단하여 스스로 무너지게 만드는 효과적인 전략이었습니다.
• 개경 방어전 강감찬의 본대에서 급파된 김종현의 정예 기병 1만과 동북면에서 지원 온 3,300명의 병력이 개경 수비에 합류했습니다.
소배압은 개경 인근 금교역에 특공대 300기를 잠입시켜 기습을 노렸으나, 고려군은 이를 간파하고 역습을 가해 전멸시켰습니다.
견고한 방어 태세와 보급의 한계에 부딪힌 소배압은 결국 개경 공략을 포기하고 퇴각을 결정할 수밖에 없었습니다.
하지만 지치고 굶주린 거란군의 퇴각은 전쟁의 끝이 아니었습니다.
강감찬은 그들을 섬멸하기 위한 최후의 결전장, 귀주에서 기다리고 있었습니다.
4. 최후의 결전: 귀주에서의 대회전(大會戰)
퇴각하는 거란군에게 귀주 평원은 압록강으로 향하는 마지막 관문이었습니다.
반면, 강감찬이 이끄는 고려군에게 이곳은 적의 퇴로를 차단하고 섬멸할 수 있는 최적의 결전장이었습니다.
양측 모두에게 더는 물러설 곳 없는 운명의 장소에서 고려-거란 전쟁의 대미를 장식할 대회전이 시작되었습니다.
전투 전개 과정
1단계: 팽팽한 대치
귀주 동쪽 평원에서 강감찬의 고려군 본대와 소배압의 거란군이 강을 등지고 배수진(背水陣)을 친 채 격돌했습니다.
전투 초기, 양군은 어느 한쪽도 우위를 점하지 못한 채 치열한 접전을 벌였습니다.
『고려사절요』는 당시 상황을 "양쪽 진영이 서로 대치하며 승패가 나지 않았다"고 기록할 만큼 팽팽한 힘의 균형이 이어졌습니다.
2단계: 결정적 전환점
장시간 이어진 대치 국면은 두 가지 결정적인 변수로 인해 순식간에 무너졌습니다.
전투 초기, 고려군은 거란의 강력한 기병 돌격을 막기 위해 '검차(날카로운 칼날을 박은 수레)'를 전면에 배치했습니다.
거란 기병이 달려들면 수천 개의 칼날이 벽을 이루어 그들을 저지했고, 그 틈을 타 고려의 보병들이 창을 휘둘렀습니다.
이 처절한 버티기가 있었기에 김종현의 기병대가 도착할 시간을 벌 수 있었습니다.
1. 김종현 기병대의 등장
개경 방어를 마치고 북상한 김종현(金宗鉉)의 정예 기병 1만여 명이 마침내 전장에 도착했습니다.
이들은 지쳐있던 거란군의 후방을 강타하며, 고려군 본대와 함께 적을 양쪽에서 압박하는 '망치와 모루' 전술을 완성했습니다.
2. 하늘의 도움, 남풍(南風)
김종현 부대의 등장과 동시에, 갑자기 거센 비바람이 남쪽에서 불어오기 시작했습니다.
북쪽에 진을 친 거란군에게는 시야를 가리고 활시위를 무력하게 만드는 역풍이었지만, 남쪽에 위치한 고려군에게는 화살의 사거리를 늘려주는 순풍이었습니다.
이 극적인 기상 변화는 고려군의 사기를 최고조로 끌어올렸고, 거란군의 전열을 완전히 붕괴시켰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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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주대첩 전개 추정 |
3단계: 거란군의 궤멸과 추격
예상치 못한 후방 공격과 역풍에 전세가 완전히 기울자 거란군은 전의를 상실하고 패주하기 시작했습니다.
고려군은 이 기회를 놓치지 않았습니다.
거란군이 석천(石川)을 건널 때 맹렬한 공격을 퍼부어, 거란 황제의 최정예 부대인 천운군(天雲軍)과 우피실군(右皮室軍) 다수가 물에 빠져 죽는 등 치명적인 타격을 입혔습니다.
이어서 원수 강민첨이 맹렬히 북을 치며 돌격을 독려하여 반령(盤嶺)에 이르기까지 끈질기게 추격하여 달아나는 적을 섬멸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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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귀주대첩 전개 추정 (반령까지 추격 섬멸) |
전투의 결과는 참혹할 정도로 압도적이었습니다.
『고려사절요』는 당시의 처참한 광경을 다음과 같이 생생하게 묘사하고 있습니다.
쓰러진 시체가 들을 가득 채우고, 노획한 포로·말·낙타·갑옷·투구·병장기는 이루 다 셀 수가 없었으며, 살아서 돌아간 적군은 겨우 수천 인에 불과하였다. 거란의 병사들이 패배한 것이 이때처럼 심한 적이 없었다.
이로써 10만 대군으로 시작했던 거란의 제3차 침공은 전멸에 가까운 파멸로 막을 내렸습니다.
5. 승리의 결과와 역사적 의의
귀주대첩의 압도적인 승리는 고려의 운명을 바꾸고 동아시아 국제 관계에 거대한 파장을 일으켰습니다.
단기적으로는 전쟁의 상처를 씻어냈고, 장기적으로는 고려의 황금기를 여는 발판이 되었습니다.
단기적 결과
• 고려의 대응: 현종은 개선하는 강감찬을 직접 영파역(迎波驛 개경 근교 역참)까지 마중 나가 그의 손을 잡고 머리에 황금꽃 8가지를 꽂아주며 최고의 예우로 승리를 축하했습니다.
또한, 전쟁에서 공을 세운 9,000여 명의 공신에게 포상을 내렸습니다.
• 거란의 대응: 패전 소식을 들은 거란의 요 성종은 "네놈의 얼굴 가죽을 벗겨 죽이겠다!"고 격노했으나, 명장이었던 소배압을 차마 죽이지는 못하고 파직시키는 데 그쳤습니다.
• 양국 관계의 재정립: 귀주대첩 이후 거란은 더 이상 '고려 국왕의 친조'나 '강동 6주 반환'과 같은 무리한 요구를 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고려는 거란과 조공-책봉 관계를 형식적으로 복구했지만, 거란은 더 이상 '고려 국왕의 친조'나 '강동 6주 반환'과 같은 무리한 요구를 강요할 수 없게 되었습니다.
이는 형식적 사대 관계 속에서 실질적 자주와 평화를 확보한 고려의 외교적 승리를 의미합니다.
장기적 의의와 평가
귀주대첩이 한국사와 동아시아사에 남긴 깊은 의미는 다음과 같이 평가할 수 있습니다.
• 동아시아 세력 균형: 동아시아 최강대국이었던 거란의 남진 정책이 완전히 좌절되면서, 고려, 송(宋), 요(遼) 삼국 간의 세력 균형이 안정적으로 유지되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이는 어느 한쪽의 일방적인 팽창을 막고, 동아시아에 약 100년간의 평화 시대를 가져왔습니다.
• 고려의 전성기 개막: 25년간 지속된 전쟁의 위협이 사라지면서 고려는 비로소 안정과 번영의 시대를 맞이했습니다.
귀주대첩 이후 약 1세기에 걸쳐 고려는 정치적 안정을 바탕으로 화려한 귀족 문화를 꽃피우고 경제적 발전을 이루는 전성기를 구가할 수 있었습니다.
• 역사적 위상: 귀주대첩은 외세의 침략에 맞서 국가의 자주와 민족의 생존을 지켜낸 위대한 승리의 역사입니다.
불가능해 보였던 위기를 극복하고 평화를 쟁취한 이 전투는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민족적 자긍심의 원천으로 기억되고 있습니다.
6. 귀주대첩이 우리에게 남긴 교훈
귀주대첩은 25년간 이어진 고려-거란 전쟁의 대미를 장식한 결정적인 승리였습니다.
거란의 무리한 요구로 시작된 제3차 침공은 강감찬의 지략과 현종의 결단, 그리고 고려군 전체의 유기적인 방어 전략 앞에 처참한 실패로 끝났습니다.
고려는 이 승리를 통해 국가의 자주를 지켜냈고, 이후 100년간의 평화와 번영을 누리는 전성기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귀주에서의 위대한 승리는 단순히 강감찬이라는 한 명의 뛰어난 영웅이 만들어낸 기적이 아니었습니다.
2차 침공 때와 달리 몽진 대신 수도에 남아 결사항전을 택한 군주 현종의 리더십, 흥화진, 개경, 귀주 등 각 전선에서 자신의 임무를 완벽히 수행한 여러 장수들과 병사들의 헌신, 그리고 국가적 위기 앞에서 하나로 뭉친 온 백성의 단결된 의지가 어우러져 만들어낸 '총력전의 결과물'이었습니다.
귀주대첩은 위기 앞에서 국가의 모든 역량을 결집했을 때 얼마나 위대한 결과를 만들어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역사적 교훈으로 영원히 기억될 것입니다.
이 글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공개된 사료와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귀주대첩(龜州大捷)의 흐름을 “이해하기 쉬운 이야기”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전투의 큰 줄기(침공 배경, 고려의 방어 방식, 귀주에서의 결전, 전후 외교)는 사료에 기대되지만, 장면 전환을 매끄럽게 하기 위해 문장 구성과 설명 순서는 서사적으로 편집했습니다.
특히 전투 현장의 분위기, 군대의 심리, ‘어떤 장면에서 무엇을 느꼈을지’ 같은 부분은 독자의 몰입을 돕기 위한 묘사이며, 사료에 없는 대사·세부 장면은 가능한 한 단정하지 않고 서술했습니다.
Guiju (1019) ended the third Goryeo–Khitan invasion, closing a war cycle that began in 993.
After the 1010 crisis and an unkept pledge of a royal visit, Khitan pressed Goryeo to submit or return the Gangdong Six Garrisons, then escalated border raids.
In late 1018, General Xiao Baiya marched 100,000 cavalry south. Goryeo replied with a layered plan: delay at Heunghwajin with a water attack, harass the rear in pursuit, and defend Kaegyeong while stripping nearby supplies to starve the invader.
Forced to retreat, the exhausted Khitan column was trapped at Guiju, where Gang Gam-chan’s main force and reinforcements shattered it, leaving only a few thousand survivors.
The victory secured autonomy, stabilized the Liao–Song–Goryeo balance, and opened a long period of recovery. It raised prestig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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