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조선은 어디였나: 삼국유사, 제왕운기로 읽는 ‘평양성·아사달’의 단서 (The History of Gojoseon)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문헌 기록 : 《삼국유사》와 기타 사료를 중심으로


1. 고조선 위치 탐구의 역사적 중요성

한민족 최초의 국가로 알려진 고조선(古朝鮮)의 지리적 위치를 탐구하는 것은 한국사의 기원을 밝히고 민족의 역사적 정체성을 확립하는 데 있어 핵심적인 과제입니다. 

고조선의 강역이 어디였는지를 규명하는 문제는 단순히 고대 국가의 영토를 확인하는 작업을 넘어, 우리 역사의 시작점과 그 활동 무대를 이해하는 근본적인 질문과 맞닿아 있습니다.

이 글은 현존하는 주요 문헌 기록, 특히 《삼국유사》와 《제왕운기》를 중심으로 고조선의 건국 신화와 역사 속에 담긴 지리적 단서를 분석하고자 합니다. 

문헌에 등장하는 수도와 주요 지명을 통해 고조선의 중심지가 어디였는지에 대한 다양한 관점을 살펴보고, 이를 고조선이 성립되었던 청동기 시대의 고고학적 배경과 연결하여 종합적으로 탐구하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이를 위해 본문에서는 먼저 《삼국유사》, 《제왕운기》, 《삼국사기》 등 각 사료가 고조선의 도읍지로 지목하는 '평양성', '아사달', '왕험성' 등의 기록을 면밀히 검토할 것입니다. 

이어서 이러한 문헌 속 서사를 청동기 및 철기 시대라는 거시적인 시대적 배경 속에서 이해하고, 그 역사적 의미를 고찰해 보고자 합니다.


2. 주요 문헌에 나타난 고조선의 건국과 수도

고조선의 지리적 위치를 파악하기 위한 가장 근원적인 자료는 단군 신화를 비롯한 건국 서사를 담고 있는 초기 역사서들입니다. 

이들 문헌은 고조선의 건국 과정과 통치자의 행적을 기록하며, 그 중심이 되었던 수도와 주요 활동 무대를 구체적인 지명으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본 장에서는 《삼국유사》를 필두로 한 주요 사료들이 묘사하는 고조선의 공간적 배경을 분석하고자 합니다.


2.1. 《삼국유사》의 기록: 평양성, 아사달, 그리고 장당경

고려 시대 승려 일연(一然)이 저술한 《삼국유사》는 단군 신화를 가장 상세하게 전하는 문헌으로, 고조선의 위치에 대한 중요한 단서를 제공합니다. 

이 기록에 따르면 단군왕검의 통치 기간 동안 고조선의 수도는 여러 차례 이동한 것으로 나타납니다.

• 최초의 도읍, 평양성(平壤城): 《삼국유사》는 단군왕검이 처음으로 도읍을 정한 곳을 '평양성'이라고 명시하고 있으며, 이곳이 지금의 서경(西亰)이라고 부기(附記)하고 있습니다. 

이는 고조선의 첫 번째 정치적 중심지가 한반도 북부의 평양 지역이었음을 시사합니다. 

물론 이 '평양성'이 현재의 평양과 동일한 위치를 가리키는지에 대해서는 학계의 다양한 논의가 존재합니다.

• 두 번째 도읍, 백악산 아사달(白岳山阿斯逹): 이후 단군은 도읍을 '백악산 아사달'로 옮겼다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삼국유사》 원문에 따르면 이곳을 '궁홀산(弓忽山), 혹은 방홀산(方忽山) 또는 금미달(今彌達)'이라 불렀다고 전해져, 신성한 산악 지대로 수도를 이전했음을 보여줍니다.

• 기자(箕子) 동래와 단군의 이동: 상나라가 멸망하자 기자(箕子)가 유민들을 이끌고 동쪽으로 이동했다고 전해지며, 이를 기자동래설(箕子東來說)이라고 부릅니다. 그리하여 단군은 수도를 다시 '장당경(藏唐京)'으로 옮겼다고 합니다.(전승)

이는 외부 세력의 유입에 따른 중심지 이동, 즉 정치적 세력 판도의 변화를 반영한 기록으로 해석됩니다.

• 최종 귀착지, 아사달: 장당경으로 옮겨갔던 단군은 이후 다시 아사달로 돌아와 1908세의 나이로 산신(山神)이 되었다는 신화적 결말로 이야기는 마무리됩니다. 

이는 아사달이 단순한 정치적 수도를 넘어 신성한 공간으로서의 의미를 지니고 있음을 암시합니다.


2.2. 《제왕운기》와 《삼국사기》의 기록

《삼국유사》와 동시대에 편찬된 《제왕운기》와 그보다 앞서 편찬된 《삼국사기》 역시 고조선의 지리적 위치에 대한 단편적인 정보를 제공합니다.


《제왕운기(帝王韻紀)》

이승휴(李承休)가 저술한 《제왕운기》는 단군이 나라를 다스리다가 마지막에는 '아사달'로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기록하여, 《삼국유사》와 마찬가지로 아사달을 단군의 최종 귀착지로 언급하고 있습니다. 

다만, 건국 신화의 세부 내용에서는 《삼국유사》와 중요한 차이를 보이는데, 《제왕운기》는 《본기(本記)》를 인용하여 하늘에서 내려온 환웅의 손녀와 신단수(神檀樹)의 신이 결혼하여 단군을 낳았다고 기록하고 있습니다. 

이러한 서사의 차이는 구전되어 온 신화가 각 문헌에 수록되는 과정에서 변용되었음을 보여주는 중요한 사례입니다.

《삼국사기(三國史記)》

김부식(金富軾)이 편찬한 《삼국사기》는 단군이라는 명칭을 직접적으로 사용하지는 않지만, 고구려 동천왕 대의 기록에서 "평양은 본래 선인(仙人) 왕검이 살던 곳(平壤者本仙人王儉之宅也)"이라고 언급합니다. 

이는 '평양'이 신화적 인물인 왕검의 거주지였음을 암시하는 중요한 기록입니다. 

또한, 이와는 별개로 위만조선의 수도를 '왕험(王險)' 또는 '왕검(王儉)'으로 기록하여, 고조선 후기의 중심지를 지목하고 있습니다.(논쟁)


2.3. 문헌 기록 비교 분석

《삼국유사》, 《제왕운기》, 《삼국사기》에 나타난 고조선의 주요 지명과 관련 내용을 비교하면 다음과 같습니다.


문헌명
언급된 주요 지명
지명 관련 핵심 내용
《삼국유사》
평양성, 백악산 아사달, 장당경
최초 도읍은 평양성, 이후 아사달과 장당경으로 천도. 최종적으로 아사달에서 산신이 됨.
《제왕운기》
아사달
단군이 통치 후 아사달에 들어가 산신이 되었다고 기록.
《삼국사기》
평양, 왕험(왕검)
'선인 왕검'의 거주지로 '평양'을 언급. 위만조선의 수도로 '왕험'을 기록.


이상의 문헌 기록들을 종합해 보면, 비록 세부적인 내용에는 차이가 있으나 공통적으로 한반도 북부의 '평양' 지역과 신성한 장소로 묘사되는 '아사달'을 고조선의 핵심적인 공간으로 지목하고 있음을 알 수 있습니다. 

이러한 신화적·전설적 기록들은 고조선이 탄생하고 발전했던 시대의 고고학적 맥락 속에서 그 의미를 더욱 깊이 이해할 필요가 있습니다.


고조선의 추정 범위


2.4. 중국 사료에 나타난 ‘조선’의 공간: 문헌이 남긴 외부 좌표

고조선의 위치를 논할 때, 한국 측 문헌이 제공하는 “기억의 지명(평양·아사달)”만으로는 설명이 부족해질 때가 있습니다.

특히 ‘위만조선’과 ‘한사군’이 등장하는 구간부터는, 외부 세계가 고조선을 어떤 공간으로 인식했는지 살펴보는 작업이 필요해집니다.

이때 중요한 단서는 중국의 정사(正史)와 지리 인식 속에 남아 있는 ‘조선’의 상대적 위치입니다.

중국 사료에서 ‘조선’은 대체로 연(燕)·요동(遼東) 방면과 맞닿아 있는 동북 변경의 정치체로 묘사되며, 특정 강·군현·교통로와 연관되어 나타납니다.

이는 고조선이 단순히 “한반도 내부의 전설적 왕국”이라기보다, 중국의 변경 질서 속에서 실제 외교·군사적 대상으로 인식된 존재였음을 시사합니다.

다만 여기서도 주의할 점이 있습니다.

정사 기록은 사건(전쟁·조공·난민·군현 설치) 중심으로 작성되었기 때문에, 오늘날 우리가 원하는 ‘수도 정확 좌표’처럼 친절한 지도를 제공하지 않습니다.

게다가 동일한 지명도 시대가 바뀌면서 다른 행정 단위로 재편되거나, 후대 편찬자가 당대의 지리 감각을 과거에 투영하는 일이 반복됩니다.

따라서 중국 사료는 고조선 위치 논쟁을 “종결”해 주는 열쇠라기보다, 한국 측 문헌의 지명 전승을 교차 검증할 수 있는 외부 기준선으로 활용하는 편이 더 타당합니다. [논쟁]

이 지점에서 ‘왕험(王險)’ 혹은 ‘왕험성(王險城)’ 문제도 함께 떠오릅니다.

후기 고조선을 설명할 때 자주 등장하는 이 지명은, 전통적으로 평양 일대에 비정하려는 견해가 오래 이어져 왔지만, 요동 방면으로 돌리는 견해 역시 꾸준히 제기되어 왔습니다. [논쟁]

결국 ‘왕험’을 어디에 두느냐에 따라 “고조선의 중심 축이 한반도 북부였는가, 만주·요동과 긴밀히 연결된 광역권이었는가”라는 해석이 달라집니다.

이 때문에 문헌 속 ‘평양’과 ‘왕험’은 각각 별개의 결론이 아니라, 서로를 시험하는 질문지처럼 작동합니다.


3. 고고학적 맥락에서 본 고조선의 시대적 배경

문헌 기록만으로는 고조선의 실체를 온전히 파악하기 어렵습니다. 

따라서 고조선이 성립된 청동기 시대의 고고학적 환경을 이해하는 것은 문헌 속 서사를 역사적 현실과 연결하는 데 필수적입니다. 

고고학적 발굴 성과는 고조선이라는 국가가 어떠한 사회·문화적 기반 위에서 탄생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자료입니다.

문헌 속 지명은 말로 남고, 고고학 자료는 땅에 남습니다.

둘은 같은 언어로 말하지 않기 때문에, 연구의 핵심은 “딱 맞는 정답 찾기”가 아니라 서로 맞물리는 범위를 넓히는 과정에 있습니다.

예컨대 특정 지역에서 나타나는 방어 거점의 밀도, 청동기 권력층의 상징물, 교역망의 흔적이 문헌의 중심지 서술과 어느 정도 합을 이루는지 살피는 식입니다. [추정]

이때 문헌의 ‘평양·아사달·왕험’은 지도 좌표라기보다, 고고학적 패턴을 해석하기 위한 가설의 기준점으로 기능합니다.


3.1. 청동기 문화의 발전과 국가의 형성

한반도와 만주 지역에서는 기원전 2000년에서 1500년경에 청동기 문화가 본격적으로 보급되기 시작했습니다. 

이 시기는 사회 구조에 급격한 변화를 가져오며 고대 국가 형성의 토대를 마련했습니다.


• 주요 유물: 이 시대의 청동기는 재료를 구하고 제작하는 과정이 어려워 주로 지배 계급의 권위를 상징하는 무기나 제사용 도구로 사용되었습니다. 

한편 곡식을 수확하는 데에는 반달 돌칼과 같은 석기가 여전히 널리 사용되었고, 수확한 곡식을 저장하거나 조리하는 데에는 민무늬 토기가 사용되어, 청동기와 석기, 토기가 공존하는 모습을 보였습니다.

• 사회 변화: 농경 기술이 발달하고 생산물이 풍부해지면서 인구가 점차 증가했습니다. 

이 과정에서 잉여 생산물을 축적한 사유 재산이 발생하고, 이는 빈부 격차를 심화시켜 계급 사회를 성립시키는 배경이 되었습니다.

• 군장(君長)의 등장: 경제력과 통솔력을 갖춘 군장(또는 족장)이 출현하여 여러 부족을 통합하고 이끌게 되었습니다. 

이들은 하늘에 제사를 지내는 등 종교적 권위까지 장악하며 강력한 권력을 구축했습니다. 

이러한 군장의 등장은 고조선과 같은 초기 국가 형태의 정치체가 형성되는 기반이 되었습니다.


3.2. 철기 문화의 도입과 주변 국가의 성장

청동기 시대 후기에 도입된 철기 문화는 사회 발전을 더욱 가속화했습니다. 

철은 청동보다 구하기 쉽고 단단하여 무기뿐만 아니라 농기구 제작에도 널리 사용되었습니다. 

철제 농기구의 보급은 농업 생산량을 급격히 증대시켰고, 강력한 철제 무기는 정복 전쟁을 활발하게 만들어 부족 간의 통합을 촉진했습니다.

이러한 철기 문화를 바탕으로 만주와 한반도 지역에서는 고조선에 이어 부여, 고구려, 옥저, 동예, 삼한 등 여러 나라가 성립되었습니다. 

고조선은 이러한 철기 시대 국가들의 등장을 이끈 선구적인 정치체로서, 청동기에서 철기로 전환되는 복합적인 사회 변화 속에서 탄생하고 성장한 강력한 국가였음을 짐작할 수 있습니다.


4. 문헌 기록의 의의와 해석의 한계

지금까지 《삼국유사》를 비롯한 주요 문헌 기록과 고고학적 시대 배경을 통해 고조선의 위치와 실체에 접근해 보았습니다. 

이를 종합하면 다음과 같은 결론을 내릴 수 있습니다.


첫째, 《삼국유사》, 《제왕운기》 등의 문헌은 고조선의 중심지를 '평양' 과 '아사달' 이라는 구체적인 지명으로 기록함으로써, 한민족의 역사적 출발점에 대한 뚜렷한 지리적 구심점을 제시했다는 점에서 큰 의의를 가집니다.

이는 후대인들에게 고조선이라는 국가의 존재와 그 중심지에 대한 역사적 기억을 각인시키는 중요한 역할을 했습니다.

둘째, 이러한 기록들은 역사적 사실을 객관적으로 보고한 것이라기보다는, 후대의 관점에서 재구성된 신화적·전설적 서사라는 점을 인지해야 합니다. 

따라서 문헌에 등장하는 지명을 현대의 특정 지역과 일대일로 비정하는 데에는 명백한 한계가 따릅니다. 

'평양'은 역사적 실체에 기반한 지명일 가능성이 높지만, '아사달'은 신성함을 상징하는 전설적인 공간으로 해석될 여지가 큽니다.


최종적으로, 비록 문헌 기록 속 지명을 고고학적으로 명확히 증명하기는 어렵지만, 이 기록들은 고조선이라는 국가 공동체의 존재와 그 중심지에 대한 집단적 기억을 담고 있는 귀중한 문화유산입니다. 

따라서 문헌 기록에 담긴 역사적 기억과 고고학적 증거를 상호 보완적으로 교차 검증하는 통합적 연구는, 우리 역사의 기원에 대한 다층적 이해에 도달하기 위한 필수적인 방법론으로 남을 것입니다.


이 글은 《삼국유사》·《제왕운기》·《삼국사기》 등 문헌 기록을 바탕으로 “고조선의 위치”를 따라가 보려는 시도입니다.

다만 고조선 관련 서사는 전설처럼 내려온 이야기(신화·전승)가 많고, 같은 지명도 시대에 따라 다르게 전해지거나 후대에 덧씌워진 해석이 섞여 있습니다.

그래서 본문에는 사실로 단정하기 어려운 부분을 이해하기 쉽도록 장면과 연결고리를 상상력을 동원해 서술한 대목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특정 지명을 오늘날의 지도 위에 “딱 한 곳”으로 찍어 말하기보다는, 문헌의 기억과 고고학적 단서를 교차 검증하며 읽어주시길 권합니다.


This essay explores where Gojoseon may have been located through key texts such as Samguk Yusa, Jewang Ungi, and Samguk Sagi. 

It compares place-names—Pyeongyangseong, Baegaksan Asadal, Jangdang-gyeong, and Wangheom—showing overlap and contradiction, and suggests some names may be sacred or symbolic “memory places” rather than fixed map coordinates. 

It then connects these traditions to Bronze Age and early Iron Age change, explaining how surplus, chiefs, and new weapons could support early state formation. 

The conclusion stresses cross-checking texts with archaeology, since the sources blend later reconstructions with older memor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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