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구려의 기틀을 다진 명재상, 을파소: 생애와 업적
고구려사에서 2세기 말은 국가의 명운을 가를 중요한 분기점이었다.
당시 고구려는 왕권과 부체제(部體制)에 기반한 전통 귀족 세력 간의 갈등으로 극심한 내홍을 겪고 있었다.
국가의 힘을 하나로 모아 중앙 집권 체제를 공고히 해야 하는 시대적 과제 앞에서, 기존의 낡은 권력 구조는 심각한 위기를 노출하고 있었다.
바로 이 격동의 시기에 한 인물이 혜성처럼 등장한다.
그는 재야에 묻혀 농사를 짓던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손으로, 국가 최고 관직인 국상(國相)에 올라 고구려의 대대적인 개혁을 이끈 을파소(乙巴素)였다.
을파소의 생애는 그 자체로 한 편의 드라마와 같다.
《삼국사기》에 따르면 그는 유리왕 시절 대신이었던 을소(乙素)의 손자였으나, 가문이 몰락하여 곤궁한 삶을 살던 중 왕의 부름을 받아 국정의 총책임자가 되어 무너져가던 나라의 기틀을 바로 세웠다.
그의 등장은 단순한 인재 발탁을 넘어, 혈연과 지연에 얽매였던 고구려의 낡은 정치 질서를 능력과 실력 위주로 재편하려는 고국천왕의 강력한 개혁 의지의 상징이었다.
본 평론은 고구려의 위대한 개혁가 을파소의 생애와 업적을 심층적으로 조명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그의 파격적인 등용 과정과 그의 대표 정책인 진대법(賑貸法)을 중심으로, 그의 개혁이 당시 고구려의 왕권 강화와 민생 안정에 미친 영향을 분석하고자 한다.
또한, 《삼국사기》를 비롯한 사료가 지닌 기록적 한계를 명확히 인지하고, 이를 바탕으로 그의 역사적 위상을 다각적으로 평가함으로써 그가 남긴 유산의 진정한 의미를 탐색할 것이다.
1. 혼란의 시대와 개혁의 요구
고구려 초기의 국가 체제는 왕권과 5부(五部)를 중심으로 한 귀족 연합 세력이라는 이중적 권력 구조 위에 서 있었다.
국정 운영은 제가회의(諸加會議)라는 귀족 회의체를 통해 이루어졌으며, 이는 왕권을 견제하는 강력한 기제로 작용했다. (추정)
따라서 국가가 한 단계 더 도약하기 위해서는 분산된 권력을 왕에게 집중시키는 중앙 집권화가 무엇보다 시급한 시대적 과제였다.
고국천왕(故國川王) 시기, 이러한 구조적 모순은 왕실 외척 세력의 발호로 극에 달했다.
왕후 우씨(于氏)의 친족이자 연나부(椽那部) 출신인 어비류(於畀留)와 좌가려(左可慮) 등은 왕의 인척임을 내세워 권력을 사유화하고 온갖 폐단을 일삼았다.
《삼국사기》는 당시 이들의 행태를 "권세를 믿고 무례하고 거만하며 남의 자녀를 노략질하고 밭을 빼앗았다"라고 기록하며, 나라 사람들이 이를 원망하고 분통해했다고 전한다.
이들의 전횡은 국가 기강을 무너뜨리고 백성의 삶을 피폐하게 만드는 심각한 정치적 위기 상황을 초래했다.
상황은 이들이 왕의 문책을 피하기 위해 반란을 도모하는 지경에 이르렀다.
이에 고국천왕은 직접 군대를 이끌고 출정하여 이들을 단숨에 진압하는 단호한 결단을 내렸다.
이 사건은 단순한 반란 진압을 넘어, 고구려 정치사에 중대한 전환점이 되었다.
고국천왕은 외척 세력의 숙청을 통해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는 구조의 위험성을 절감하고, 기존의 혈연 및 지연 중심의 인재 등용 방식에서 벗어나 오직 능력에 기반한 새로운 통치 질서를 모색하게 된 결정적 계기를 마련했다.
이처럼 강력한 왕권을 바탕으로 국가 개혁을 추진할 새로운 인재를 갈망하게 된 시대적 배경은, 낡은 질서를 타파하고 새로운 시대를 열어갈 개혁가, 을파소의 등장을 예비하고 있었다.
2. 재야의 현자, 국상에 오르다
고대 국가에서 군주가 기존 지배층의 반발을 무릅쓰고 파격적인 인재를 등용하는 것은, 단순히 유능한 신하 한 명을 얻는 것을 넘어 기존의 권력 독점 구조를 깨고 군주의 통치 기반을 새롭게 다지는 고도의 정치 행위였다.
을파소의 등용 과정은 이러한 정치적 역학 관계를 극적으로 보여주는 대표적인 사례라 할 수 있다.
1. 발탁과 천거: 외척 세력을 숙청한 고국천왕은 4부(四部)에 명하여 신분과 관계없이 어질고 능력 있는 인재를 천거하라고 명했다.
이에 4부는 만장일치로 동부(東部)의 안류(晏留)를 추천했다.
그러나 안류는 왕의 부름 앞에서 자신은 큰 정사를 감당하기에 부족하다며, 자신보다 더 뛰어난 인물을 천거했다.
그가 바로 서압록곡 좌물촌에 묻혀 농사를 짓고 있던 을파소였다.
안류는 《삼국사기》의 기록을 통해 을파소를 다음과 같이 평했다.
"성품이 강직하고 지혜와 사려가 깊으나 세상에 쓰이지 못하고 힘들게 살아가고 있습니다."
2. 전략적 대응: 왕은 안류의 말을 믿고 사신을 보내 을파소를 초빙하여 중외대부(中畏大夫)와 우태(于台)라는 고위 관직을 제수했다.
그러나 을파소는 이를 정중히 사양하며, "훌륭한 인물을 뽑아 높은 관직을 주는 것으로 큰 업적을 이루십시오"라고 답했다.
이는 단순한 겸양의 표현이 아니었다.
귀족 세력의 뿌리 깊은 저항을 뚫고 실질적인 개혁을 단행하기 위해서는 국정 전반을 총괄할 절대적 권한이 필수적임을 간파한 을파소가 왕의 개혁 의지를 시험하고, 시작에 앞서 개혁에 대한 흔들림 없는 전권을 확보하고자 한 계산된 정치적 행보였다.
3. 파격적 임명과 왕의 신임: 을파소의 진의를 간파한 고국천왕은 그의 배포와 식견에 감탄하여 그를 신하들 중 으뜸인 '국상'에 임명하는 파격적인 결단을 내렸다.
재야에서 농사를 짓던 몰락한 귀족 가문의 후손을 일약 최고 재상으로 삼은 이 조치는 조정에 엄청난 충격을 안겼다.
기존 귀족들과 왕실 인척들은 "새로운 사람이 옛 사람을 이간한다"며 격렬하게 반발하고 그를 험담했다.
하지만 고국천왕은 흔들리지 않았다.
그는 오히려 "국상을 따르지 않는 자는 귀천 없이 족멸할 것"이라 선포하며 을파소에게 절대적인 신임을 실어주었다.
이는 개혁에 대한 왕의 확고한 의지를 천명함과 동시에, 을파소의 개혁을 방해하는 어떠한 시도도 용납하지 않겠다는 강력한 경고였다.
이처럼 왕의 절대적인 지지를 등에 업은 을파소는 비로소 자신이 구상했던 개혁 정책을 거침없이 펼칠 수 있는 확고한 정치적 기반을 확보하게 되었다.
3. 을파소의 개혁 정치와 진대법
성공적인 국가 개혁은 정치 질서의 재편만으로는 완성될 수 없다.
국가의 근간인 백성의 삶을 안정시키는 실질적인 경제 정책이 뒷받침될 때 비로소 그 개혁은 뿌리를 내리고 지속될 수 있다.
국상에 오른 을파소는 이러한 원칙을 깊이 이해하고 있었으며, 그의 개혁은 정치와 경제를 아우르는 포괄적인 성격을 띠었다.
을파소는 국정 전반에 걸쳐 대대적인 개혁을 추진했다.
그의 정책은 다음과 같은 핵심 목표를 지향했다.
• 귀족 권력 독점 방지: 특정 가문이 권력을 독점하고 국정을 농단하는 구조를 타파하여 왕권을 중심으로 한 통치 체제를 확립하고자 했다.
• 관직 매매 금지: 부패의 고리를 끊고 투명하고 공정한 행정 시스템을 구축하여 능력 있는 인재가 실력으로 등용될 수 있는 길을 열었다.
• 인재 등용 활성화 및 교육 제도 개편: 장기적인 관점에서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높이고 국력을 신장시키기 위해 교육 제도를 정비하고 새로운 인재를 적극적으로 발굴했다.
• 상벌의 신중한 집행: 《삼국사기》가 "상과 벌을 신중히 하니(愼賞罰)"라고 평가했듯, 그는 공정하고 예측 가능한 법질서를 확립하여 사회 안정을 도모했다.
이러한 포괄적인 개혁 가운데서도 을파소의 업적을 상징하는 가장 핵심적인 정책은 단연 '진대법'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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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림=이창우 |
3.1. 한국사 최초의 사회복지제도, 진대법
진대법은 194년, 서리가 내리는 등 극심한 자연재해로 백성들이 굶주림에 시달리게 되자 이를 구휼하기 위해 시행되었다.
이 제도의 운영 방식은 '춘대추납(春貸秋納)'의 원리에 기반한다.
즉, 춘궁기인 매년 3월부터 7월까지 관청의 창고를 열어 굶주린 백성들에게 곡식을 빌려주고, 가을걷이가 끝나는 10월에 갚게 하는 제도였다.
진대법은 한국사 최초의 사회복지제도로 평가받지만, 그 본질은 민생 안정과 왕권 강화를 동시에 겨냥한 고도의 정치경제학적 전략이었다.
흉년이 들면 가난한 농민들은 생계를 위해 고리대로 곡식을 빌리거나, 자신의 땅을 팔고 유력 귀족의 노비나 소작농으로 전락하는 경우가 많았다.
이는 귀족 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비대하게 만들고, 국가의 세수 기반인 자영농을 잠식하여 왕권을 약화시키는 악순환을 낳았다.
진대법은 바로 이 고리를 국가가 직접 끊어낸 것이다.
빈민 구휼을 통해 백성들의 삶의 기반을 지키는 것은, 동시에 귀족 세력으로 유입될 노동력과 토지를 차단하는 효과를 낳았다.
이는 귀족의 경제력을 약화시키는 동시에, 세금을 납부하는 자영농을 국가의 통제 아래에 둠으로써 국가 재정을 확보하고 왕권을 공고히 하는 일석이조의 효과를 거두었다.
이처럼 진대법은 단순한 구휼책을 넘어, 백성의 지지를 왕실로 결집시키고 국가 중앙 집권의 토대를 다진 핵심적인 개혁 정책이었다.
3.2. 사료의 한계와 역사적 해석
을파소와 진대법의 관계를 논할 때, 《삼국사기》의 기록적 한계를 명확히 짚고 넘어갈 필요가 있다.
정작 을파소 개인의 행적을 기록한 '을파소 열전(列傳)'에는 진대법 시행에 대한 직접적인 언급이 없다.
진대법에 대한 기록은 '고구려본기(本紀)' 고국천왕 16년(194) 조에 "진대법을 실시했다"는 사실만이 간략하게 서술되어 있을 뿐, 그 주도자가 누구인지는 명시되어 있지 않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역사학계는 을파소가 진대법의 핵심 설계자이자 실행자였다고 보는 데 이견이 거의 없다.
그 근거는 명확하다.
첫째, 진대법이 시행된 194년은 을파소가 국상으로 재임하며 국정 전반을 이끌던 시기(191년~203년)와 정확히 일치한다.
국가적 차원의 중대한 제도가 국상의 관여 없이 시행되기는 어렵다.
둘째, 그는 관직에 오르기 전 직접 농사를 지었기에, 춘궁기 농민들의 고통을 누구보다 깊이 이해하고 있었을 것이다.
이러한 그의 배경은 진대법과 같은 민생 안정책을 입안하고 추진할 가장 적임자였음을 강력하게 시사한다.
따라서 사료의 직접적인 언급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진대법을 을파소의 핵심 정책으로 간주하지 않는 것은 오히려 비역사적일 것이다.
그의 영향력은 고국천왕 사후에도 계속되었다.
그는 왕위 계승의 혼란기에도 국상으로서 중심을 잡고 산상왕(山上王) 대까지 국정을 이끌며 국가의 안정에 기여했다.
한 군주의 치세를 넘어 국가의 연속성을 지탱하는 기둥 역할을 한 것이다.
4. 역사적 의의와 평가
한 인물의 역사적 평가는 그가 이룬 개별적 업적을 넘어, 그가 속한 시대와 후대에 미친 장기적인 영향력을 종합적으로 고찰할 때 비로소 완성된다.
이러한 관점에서 을파소는 고구려, 나아가 한국사 전체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긴 위대한 경세가(經世家)로 평가받아 마땅하다.
그의 역사적 공헌은 다음 세 가지 측면에서 체계적으로 정리할 수 있다.
1. 중앙 집권 국가의 기틀 마련
을파소는 고국천왕과의 강력한 정치적 파트너십을 통해 왕권을 위협하던 외척과 부체제 기반의 귀족 세력을 효과적으로 견제했다.
그는 능력 중심의 인재 등용, 관직 매매 금지 등 일련의 정치 개혁을 통해 왕권을 중심으로 한 효율적인 행정 체계를 수립하는 데 결정적으로 기여했다.
이는 고국천왕 대에서 산상왕 대로 이어지는 왕위 계승기에도 국가의 안정성을 유지하는 버팀목이 되었으며, 고구려가 부족 연맹체의 잔재를 털어내고 강력한 고대 국가로 발돋움하는 데 필수적인 토대가 되었다.
2. 민생 안정과 국력 신장
그의 대표 업적인 진대법은 단순한 빈민 구휼 정책을 넘어선다.
백성들의 삶의 기반을 보호하고 사회적 안정을 이룩함으로써 국가의 근간을 튼튼히 했다.
안정된 민생은 곧 국가의 조세 기반 확충과 국력 강화로 직결되었으며, 이웃 나라 농민들이 살기 좋은 고구려로 넘어올 만큼 국가적 위상을 높이는 결과를 낳았다.
그는 '백성의 평안한 삶이 곧 국력'이라는 통치의 근본을 꿰뚫어 본 선각자였다.
3. 후대에 남긴 개혁의 유산
을파소의 정책, 특히 진대법이 지닌 가장 큰 의의는 그 지속적인 영향력에 있다.
이 제도는 한국사에서 국가 주도 구휼 제도의 원형을 제시했으며, 이후 고려 시대의 흑창(黑倉)과 의창(義倉), 그리고 조선 시대의 환곡(還穀) 제도로 그 정신이 계승되고 발전했다.
천 년이 넘는 시간 동안 국가가 백성의 삶을 책임져야 한다는 그의 철학은 한반도 국가들의 통치 이념에 깊숙이 자리 잡게 되었다.
을파소가 203년(산상왕 7년)에 세상을 떠났을 때, 《삼국사기》는 "나라 사람들이 모두 슬피 울었다(國人哭之慟)"고 기록하고 있다.
이 짧은 구절은 그가 당대의 권력자뿐만 아니라 평범한 백성들에게 얼마나 깊은 존경과 신뢰를 받았던 인물인지를 웅변적으로 보여준다.
최종적으로 을파소는 국가적 위기 상황에서 시대의 요구에 정확히 부응하여 등장한 위대한 개혁가이자 경세가였다.
그는 낡은 관습을 타파하는 용기와 백성을 향한 따뜻한 애민 정신, 그리고 국가의 미래를 내다보는 혜안을 모두 갖춘 인물로서, 고구려의 기틀을 다지고 한국사에 길이 남을 개혁의 이정표를 세웠다.
이 글은 《삼국사기》 등 현재 공개된 사료를 바탕으로, 을파소(乙巴素)의 등용과 진대법(賑貸法)을 중심으로 고구려 말 2세기 정치·사회 상황을 정리한 글입니다.
다만 사료는 사건의 전말과 정책 주도자를 항상 자세히 적지 않기 때문에, 일부 연결과 평가는 “당대의 정황·시기·정치 구조”를 근거로 한 역사적 해석(추정)을 포함합니다.
따라서 본문은 사실의 뼈대를 지키되,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해 맥락 설명을 덧붙인 서술임을 미리 알려드립니다.
This essay profiles Eul Paso (Eulpaso), a reform figure of late-2nd-century Goguryeo under King Gogukcheon.
After the court was shaken by abusive royal in-laws, the king sought talent beyond lineage and raised Eul Paso—then farming in obscurity—to chief minister, shielding him from aristocratic backlash.
It centers on Jindaebeop, a spring grain-loan with autumn repayment, as both famine relief and a way to keep small farmers independent, protect tax revenues, and tighten central authority.
It also notes the Samguk sagi gives limited detail, so attributing the reform to Eul Paso relies on timing and political context, while his legacy echoes in later relief syste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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