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려의 설계자, 성종: 10세기 개혁에서 현대 국가경영의 길을 묻다
1. 왜 지금 다시 고려 성종인가?
역사의 흐름 속에서 한 국가의 기틀을 다지고, 그 정체성을 확립한 군주는 시대를 넘어 깊은 영감을 준다.
고려 제6대 왕 성종(成宗, 960~997)은 바로 그러한 인물이다.
그의 통치는 단순히 10세기 후반의 역사적 사건으로만 머물지 않는다.
그는 혼란스러웠던 고려 초기의 국가 시스템을 정비하고, 향후 500년 왕조의 근간이 될 청사진을 제시한 '고려의 설계자(Architect)'였다.
오늘날 우리는 복잡다단한 국내외적 도전에 직면하며 지속 가능한 국가 운영 시스템에 대해 끊임없이 고민하고 있다.
이러한 시점에서 고려 성종의 정책을 현대적 시각으로 재조명하는 작업은 과거를 통해 현재를 성찰하고 미래를 준비하는 중요한 지적 여정이다.
그의 개혁은 단순히 낡은 제도를 바꾸는 수준을 넘어, 유교라는 새로운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의 하드웨어(제도)와 소프트웨어(이념)를 동시에 구축한 국가 개조 그랜드 스트래티지(Grand Strategy)였다.
본 글은 성종의 통치를 행정, 외교, 국방 등 다각적 측면에서 심층적으로 분석하고, 그의 리더십과 정책 결정 과정이 오늘날 국가 경영에 어떤 심오한 통찰을 제공하는지 탐구하고자 한다.
과연 건국 초기, 아직 국가의 방향성이 명확하지 않았던 혼돈 속에서 청년 군주 성종은 어떤 시대적 과제를 안고 왕위에 올랐으며, 어떻게 국가 개조라는 거대한 과업을 시작할 수 있었을까?
2. 혼돈 속의 기회: 청년 군주 성종의 즉위와 시대적 과제
고려 초기는 역동적이었으나 한편으로는 불안정한 시대였다.
태조 왕건이 여러 호족 세력을 통합하여 국가를 세웠지만, 그의 사후 혜종과 정종 대를 거치며 왕위 계승을 둘러싼 혼란이 이어졌다.
4대 광종은 강력한 왕권 강화책으로 호족을 숙청하며 중앙집권의 기틀을 닦았으나, 이는 극심한 정치적 긴장을 유발했다.
뒤이은 경종 대에는 광종의 개혁에 대한 반동 정치가 일어나며 국가 시스템은 다시 흔들렸다.
이처럼 국가의 기본 틀과 운영 원리가 아직 확립되지 않은 시대적 상황은 새로운 리더십과 체계적인 개혁의 등장을 필연적으로 요구하고 있었다.
이러한 시대적 배경 속에 성종이 등장했다.
• 가계와 성장: 성종, 휘는 왕치(王治)이며 태조 왕건의 손자이자 대종(戴宗) 왕욱(王旭)의 아들로 태어났다.
그는 어린 나이에 부모를 모두 여의고 할머니인 신정왕후 황보씨의 보살핌 아래 성장했다.
기록에 따르면 그는 어려서부터 학문을 좋아하고 총명하여 군주로서의 자질을 갖추어 나갔다.
• 즉위 과정: 981년, 선왕인 경종은 병세가 위독해지자 아주 어린 아들 왕송(훗날 목종)을 두고 왕위를 자신의 사촌 동생이자 매제인 성종에게 물려주었다(선위, 禪位).
이는 어린 군주로 인해 발생할 수 있는 정치적 혼란을 막고, 이미 성숙한 인물이었던 성종을 통해 국가를 안정시키려는 경종의 전략적 결단이었다.
즉위 직후 성종의 첫 행보는 그의 정치적 감각이 얼마나 탁월했는지를 보여주는 일종의 마스터클래스였다.
그는 서경(西京)으로 가서 자신의 조카이자 선왕의 아들인 왕송을 공식적인 후계자로 공인하며 자신의 즉위 전 봉호였던 '개령군(開寧君)'을 물려주었다. (990년 12월)
이 조치는 단순한 안심시키기 차원을 넘어, 다층적 목적을 달성한 고도의 정치적 수였다.
첫째, 정통 계승자인 어린 조카를 인정함으로써 스스로 왕위 계승의 정당성을 확보하고 정통성의 원칙을 선점했다.
둘째, 어린 후계자를 구심점으로 삼으려는 잠재적 경쟁 세력의 명분을 무력화했다.
셋째, 자신을 찬탈자가 아닌 왕위를 안정적으로 관리하는 정당한 국정 책임자(Steward)로 포지셔닝하여 모든 정치 세력의 불안감을 해소했다.
이처럼 즉위 초반의 정치적 불안 요소를 성공적으로 관리한 성종은 이제 국가 시스템 전반을 근본적으로 개혁하기 위한 거대한 청사진을 구상하기 시작했다.
그의 눈은 단순한 권력 안정을 넘어,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한 새로운 설계도를 향하고 있었다.
3. 국가 개조의 청사진: 최승로의 시무 28조와 유교 이념의 채택
성종의 개혁은 단편적인 정책들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유교(儒敎)'라는 일관된 통치 이념을 바탕으로 국가의 모든 영역을 재설계하려는 체계적인 시도였다.
그리고 이 거대한 국가 개조 프로젝트의 핵심 설계도 역할을 한 것이 바로 최승로(崔承老)의 '시무 28조(時務二十八條)'였다.
최승로의 배경을 이해하는 것은 시무 28조의 본질을 파악하는 데 결정적이다.
그는 신라의 골품제 사회에서 학문적 능력은 뛰어났으나 최고위직 진출이 막혔던 6두품 계층 출신이었다.
그에게 유교적 관료제는 단순한 철학적 선호를 넘어, 혈통이 아닌 학문적 능력과 국가에 대한 공헌으로 평가받는 새로운 질서를 향한 사회 계층적 열망이 담긴 이념이었다.
따라서 그의 상소문은 단순한 정책 제안이 아닌, 새로운 시대정신을 담은 일종의 선언문이었다.
982년(성종 1년), 성종은 5품 이상의 모든 관리에게 당시 정치의 잘잘못을 논하는 의견서(封事)를 올리도록 명했다.
이는 현장의 목소리를 직접 듣고 국정 개혁의 방향을 설정하려는 그의 의지를 보여주는 파격적인 조치였다.
이때 최승로는 태조부터 경종까지 5대 왕의 치적을 평가한 '오조정적평(五朝政績評)'과 함께, 당면 과제에 대한 28가지 정책 제안을 담은 상소문을 올렸다.
성종은 이를 깊이 받아들였고, 시무 28조는 고려가 나아갈 새로운 길을 밝히는 등대가 되었다.
시무 28조의 핵심 사상은 크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다.
불교의 폐단 비판과 유교 정치의 제안
최승로는 불교 자체를 부정한 것이 아니라, 국가 운영에 과도하게 개입하며 발생하는 사회적 폐단을 날카롭게 지적했다.
그는 불교와 유교의 역할을 명확히 구분하며 현실적인 통치 규범으로서 유교의 중요성을 역설했다.
제20조: 불교를 행하는 것은 몸을 닦는 근본이요, 유교를 행하는 것은 나라를 다스리는 근원입니다. 몸을 닦는 것은 내세의 복을 구하는 일이며, 나라를 다스리는 것은 오늘의 급한 일입니다. 오늘은 지극히 가깝고 내세는 지극히 먼 것이니, 가까운 것을 버리고 먼 것을 구하는 것은 또한 그릇된 일이 아니겠습니까?
이 제안은 종교의 영역과 통치의 영역을 분리하고, 국가 운영은 합리적이고 체계적인 유교 이념에 기반해야 한다는 개혁의 핵심 방향을 제시했다.
민생 안정과 재정 건전성
최승로는 과도한 불교 행사가 국가 재정을 낭비하고 백성들의 노역 부담을 가중시킨다고 비판하며 민생 안정을 최우선 과제로 삼을 것을 촉구했다.
제13조: 우리나라에서는 봄에 연등회(燃燈會)를 개최하고 겨울에는 팔관회(八關會)를 열어 힘든 일을 많이 시키니, 원컨대 이를 줄여서 백성들이 힘을 펴게 하십시오.
이는 화려한 국가 행사보다 백성의 삶을 먼저 돌보는 것이 국가의 근본이라는 민본주의(民本主義) 사상을 반영한 것으로, 재정의 건전성을 확보하려는 현실적인 제안이기도 했다.
중앙집권 체제 강화
고려 초기의 가장 큰 과제는 지방 호족들의 독자적인 세력을 중앙 정부의 통제 아래 두는 것이었다.
최승로는 이를 위해 지방관 파견의 필요성을 강력하게 주장했습니다.
제7조: 임금이 백성을 다스리는 데 집집마다 가거나 날마다 볼 수는 없습니다. 때문에 지방에 수령을 파견해야 합니다.
이는 호족들이 장악하고 있던 지방 행정권을 중앙으로 귀속시켜, 명실상부한 중앙집권 국가를 완성하기 위한 핵심적인 제안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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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최승로의 시무 28조 |
성종이 최승로의 시무 28조를 전폭적으로 수용한 것은 고려가 호족 연합체적 성격에서 벗어나 체계적인 시스템을 갖춘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이 청사진을 바탕으로, 성종은 이제 국가의 뼈대를 세우는 구체적인 제도 개혁에 착수하기 시작했다.
4. 고려 시스템의 구축: 중앙과 지방을 잇는 통치 질서의 확립
성종은 시무 28조라는 청사진을 손에 쥐고, 이를 구체적인 국가 제도로 구현하는 지난한 작업에 돌입했다.
그의 손에서 탄생한 중앙과 지방의 통치 시스템은 이후 약간의 변화는 있었지만 고려 왕조 500년의 근간을 이루는 견고한 뼈대가 되었다.
1. 중앙 관제의 정비: 2성 6부제의 도입
성종은 태조 이래 신라와 태봉의 제도를 절충해 사용하던 비체계적인 중앙 관제를, 당시 선진 모델이었던 당나라 제도를 고려의 실정에 맞게 변용하여 재설계했다.
초기에 내사문하성(內史門下省)과 어사도성(御事都省)을 중심으로 하고 그 아래 6관(六官)을 두는 형태로 시작된 이 개혁은, 곧 고려의 독자적인 2성 6부제(二省六部制) 로 정착되었다.
• 2성(二省): 당나라의 중서성과 문하성을 합쳐 국정 최고 의결기구인 중서문하성(中書門下省) 을 만들고, 그 아래 정책 집행을 총괄하는 상서성(尙書省) 을 두었다.
이는 의사결정의 효율성을 높이려는 고려적 변용이었다.
• 6부(六部): 상서성 아래에 이(吏)·병(兵)·호(戶)·형(刑)·예(禮)·공(工)의 6부를 두어 행정 실무를 분담하게 함으로써 국정 운영의 전문성과 체계성을 획기적으로 높였다.
이 개혁은 우리나라 역사상 중국의 선진 관료 제도를 본격적으로 수용하여 우리 실정에 맞게 시행한 첫 사례로 평가된다.
이는 고려 건국 이후 성장한 다양한 정치 세력을 포용하고 국가 업무를 효율적으로 처리하기 위한 시스템 혁신의 결과였다.
2. 교육 및 경제 시스템의 확립
성종은 유교 이념을 뒷받침할 인재를 양성하고 민생을 안정시키기 위한 제도적 기반도 함께 구축햇다.
• 국자감(國子監) 설치: 유교적 소양을 갖춘 관료를 체계적으로 양성하기 위해 최고 국립 교육기관인 국자감을 설치했다.
이는 그의 국가 개조가 일시적 개혁이 아니라, 새로운 이념을 지속적으로 재생산할 인적 기반을 마련하려는 장기적 포석이었음을 보여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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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고려의 성균관 "국자감" 개성 성균관 대성전 |
• 상평창(常平倉) 설치: 993년, 전국의 12목에 물가 조절 기구인 상평창을 설치했다.
이는 풍년에 곡식을 사들여 비축했다가 흉년에 방출하여 물가를 안정시키고 백성을 구휼하는 국가 주도 경제 정책으로, 중앙 정부의 경제 통제력과 민생 안정 능력을 동시에 강화한 조치였다.
이와 함께 996년에는 우리나라 최초의 화폐인 건원중보(乾元重寶) 를 주조하여 국가 경제의 시스템화를 시도했다.
화폐는 단순한 돈이 아니라, 세금과 유통과 국가 신뢰를 한 번에 묶는 도구다.
다만 고려 초기에 화폐 유통 기반이 약했던 탓에, 이 시도는 곧바로 사회 전반을 바꾸는 데까지는 나아가기 어려웠다.
그럼에도 “국가가 시장의 규칙을 만들 수 있다”는 발상 자체가 성종 개혁의 결을 보여준다.
3. 지방 제도의 확립: 12목 설치와 향리 제도의 개편
성종 개혁의 가장 큰 성과는 중앙의 통치력이 지방까지 미치도록 하는 지방 제도를 확립한 것이다.
성종은 화려한 설계도만으로 굴러가지 않았다.
먼저, 현장에서 이미 굳어버린 ‘낡은 톱니’를 빼내는 작업이 필요했다.
성종 2년(983), 그는 기존에 지방에 파견되던 금유·조장 같은 직책을 혁파한다.
이 조치는 “직함 하나 없앴다” 수준이 아니라, 중앙의 명령이 지방에서 왜곡되는 통로를 줄이는 ‘행정 동맥 수술’에 가까웠다.
그 다음 단계가 12목 설치와 지방관 파견이었다.
즉 성종의 방식은, 새로운 제도를 얹기 전에 먼저 오래된 관행과 권한의 찌꺼기부터 걷어내는 방식이었다.
• 최초의 지방관 파견, 12목(牧) 설치: 983년, 성종은 전국의 주요 거점에 12목(牧) 을 설치하고 중앙에서 직접 지방관을 파견했다.
이는 고려 건국 이래 최초의 일로, 지방을 실질적으로 통치하던 호족 세력을 중앙 정부의 공식적인 통제 아래 두려는 핵심 조치였다.
• 호족을 향리(鄕吏)로 편제: 성종은 지방 호족들이 사용하던 당대등(堂大等) 등의 관직명을 호장(戶長), 부호장(副戶長) 등으로 개칭하고, 이들을 지방 행정 실무를 담당하는 향리로 편제했다.
이는 과거 독자적인 세력가였던 호족을 중앙에서 파견된 지방관 아래의 행정 실무자로 전환시켜, 국가의 통치 질서에 통합시키는 전략이었다.
• 10도(道) 제도의 실시: 995년에는 전국을 10개의 도로 나누는 10도(道) 제도를 실시했다.
이는 오늘날 우리가 사용하는 '도(道)'의 시초가 되었다는 점에서 역사적 의의가 굉장히 크다.
성종에게 ‘지방을 다스린다’는 건, 단순히 관리를 내려보내는 문제가 아니었다.
그는 사람의 마음까지 묶어야 했다.
그래서 성종 6년(987), 옛 신라의 수도였던 경주를 ‘동경(東京)’으로 격상한다.
이 선택은 “정복한 땅”이 아니라 “같은 나라의 한 축”으로 편입시키는 선언에 가까웠다.
이때 동경에는 유수(留守) 같은 상설 책임자를 두어, 예전 왕경(王京) 지역을 중앙 통치 질서 안에 넣어 관리하려 했다.
호족을 향리로 편제하는 제도가 ‘힘의 재배치’였다면, 동경 설치는 ‘정통성의 재배치’였다.
고려가 신라를 흡수한 뒤에도 남아 있던 지역의 자존심과 기억을, 제도 안으로 끌어안는 방식이었다.
성종의 이러한 제도 개혁은 단순한 행정 구역의 재편을 넘어, 국가 권력의 작동 메커니즘을 재설계한 시스템 혁신이었다.
이는 왕의 명령이 중앙에서 지방 말단까지 일관되게 작동하도록 만드는 통치 질서의 확립을 의미했으며, 고려가 비로소 안정된 통일 왕조로서의 면모를 갖추게 되었음을 보여주는 상징적인 사건이었다.
5. 실리 외교의 정수: 서희의 담판과 강동 6주의 확보
잘 정비된 내부 시스템은 외부의 위기에 대처하는 강력한 힘이 된다.
성종 시대의 안정된 국내 정치와 체계적인 국가 운영 능력은 대외 관계에서도 빛을 발했다.
그 정점에 있는 사건이 바로 서희(徐熙)의 담판을 통한 위기 극복과 영토 확장이다.
993년, 북방의 거란이 소손녕을 앞세워 침공했을 때 고려 조정은 극심한 혼란에 빠졌다.
하지만 그 혼란 속에서도 성종은 ‘전쟁의 프레임’을 다시 세우려 했다.
그는 서경으로 향해 상황을 수습하고 지휘 체계를 정비하려 했고, 전선의 요지인 안북부로 나아가려다 여건이 따라주지 않아 되돌아왔다는 기록도 전한다.
대신 그는 현장 지휘관을 세우고, 협상 카드로서 서희를 전면에 내세우는 선택을 한다.
즉 “말로 이겨낸 외교” 앞에는, 왕이 직접 판을 정리하고 역할을 배치한 “위기 운영”이 먼저 있었다.
여기에는 성종의 중앙집권적 유교 개혁에 반발하는 전통주의 세력(토풍파)과 개혁파(화풍파) 간의 내부 갈등도 한몫했다.
이런 분열된 상황 속에서 서경 이북의 땅을 떼어주고 화의하자는 할지론(割地論)이 대세로 떠올랐다.
이때 서희는 거란의 핵심 전략 목표가 고려 정복이 아닌, 그들의 주적(主敵)인 송나라 공략에 앞서 배후의 안정을 확보하는 것임을 정확히 간파했다.
성종은 항복론이 들끓는 조정의 여론에도 불구하고 서희의 통찰력을 신뢰하여 그에게 전권을 맡기는 과감한 결단을 내렸다.
적진으로 간 서희는 거란의 장수 소손녕과 담판을 벌였다.
이는 단순한 말재주가 아니라, 지정학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치밀한 전략 협상이었다.
서희는 "고려는 고구려의 후계"라며 역사적 정통성을 내세워 협상의 주도권을 잡은 뒤, 거란의 핵심 이익에 부합하는 전략적 해법을 제시했다.
그는 거란이 진정으로 원하는 것, 즉 고려가 송과의 관계를 끊고 거란에 복속하여 후방을 안정시키는 것을 약속했다.
이는 거란이 막대한 비용을 치르는 전쟁 대신 외교를 통해 자신들의 핵심 전략 목표를 달성할 수 있는 길을 열어준 것이다.
그 대가로 서희는 "압록강 유역의 여진족 때문에 거란과의 교류가 막혀 있다"는 명분을 내세워, 그 지역에 대한 고려의 지배권을 인정해 줄 것을 요구했다.
거란의 입장에서 이는 고려의 복속이라는 큰 이익을 위해 수용할 만한 합리적인 조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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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서희의 외교담판 |
결과는 놀라웠다.
고려는 전쟁의 위기를 극복했을 뿐만 아니라, 오히려 압록강 동쪽의 강동 6주(江東六州) 지역에 대한 지배권을 확보하는 외교적 대승리를 거두었다.
이는 단순한 영토 획득을 넘어, 압록강을 국경으로 하는 실질적인 북방 방어선을 구축한 국방 전략의 위대한 승리였다.
서희의 담판이 ‘전쟁을 멈춘 결말’이었다면, 성종의 다음 선택은 ‘성과를 고정하는 후속 조치’였다.
협상으로 확보한 강동 6주가 진짜 내 땅이 되려면, 그 땅에 사람이 살고, 길이 열리고, 성이 서야 했다.
기록에는 서희가 국경선 일대에 성과 진을 설치해 방어선을 만들 것을 건의했고, 성종이 이를 받아들여 여러 거점 구축을 진행한 정황이 보인다.
또 여진(당시 기록에서는 여진/말갈 계통으로 나타나는 경우가 많다) 세력 때문에 교통이 막힌다는 명분 자체가 협상의 논리였던 만큼, 이후 국경 안정화는 “말로 얻은 땅을 몸으로 지키는 과정”이었을 것이다.
담판은 끝이 아니라, 통치가 시작되는 지점이었다.
성종 시대의 이 외교적 성공은 지도자의 결단, 전문가에 대한 신뢰, 그리고 상대의 핵심 이익을 꿰뚫어 보는 지정학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원칙 있는 실리 외교가 어떤 성과를 낼 수 있는지를 보여주는 중요한 역사적 교훈이다.
6. 성종 개혁의 명암(明暗)과 역사적 평가
고려의 기틀을 다진 성종의 통치는 의심할 여지 없이 위대한 업적이다.
그러나 모든 대대적인 개혁이 그러하듯, 그의 정책 역시 밝은 빛과 함께 짙은 그림자를 동시에 드리웠다.
성종의 개혁이 고려 사회에 미친 영향을 균형 잡힌 시각으로 종합 평가하는 것은 그의 통치를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필수적이다.
성종 개혁의 긍정적 측면과 부정적 측면을 요약하면 다음과 같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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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가 항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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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과 (빛)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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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계 (그림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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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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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교 이념 기반의 중앙집권적 관료 국가 체제 확립, 왕권과 신권의
조화 추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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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벌귀족 사회의 토대 형성, 음서제 강화로 과거제의 효과 반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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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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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방 호족 세력을 향리로 편제하여 국가 행정체계에 통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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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종의 노비안검법을 무효화하는 노비환천법 시행으로 신분제
고착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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외교/국방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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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희의 외교 담판을 통한 강동 6주 획득, 실리적 외교로 국익
극대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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중앙집권화 과정에서 지방의 군사적 자율성 약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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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제/문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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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초의 화폐 '건원중보' 주조 시도, 상평창 설치 등 국가 주도 경제
정책 시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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화폐 유통의 실패, 과도한 유교주의로 인한 불교(연등회, 팔관회)와의
갈등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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성종의 개혁은 혼란스럽던 고려 초기를 마감하고 안정된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가는 결정적인 기틀을 마련했다.
유교 이념을 바탕으로 한 합리적인 관료제 도입과 지방제도 정비는 국가 운영의 효율성을 극대화했고, 서희의 담판 성공은 안정된 내부 시스템이 얼마나 큰 외교적 성과로 이어질 수 있는지를 증명했다.
그러나 여기서 우리는 제도 설계의 심오한 역설과 마주하게 된다.
안정이라는 '빛'을 만든 정책들이 동시에 미래의 불안정이라는 '그림자'의 씨앗을 뿌린 것이다.
공신과 그 후손을 우대하기 위해 강화된 음서제와 토지 분급 제도는 국가에 충성하는 안정적인 관리 계층을 만들려는 의도였지만, 여러 세대를 거치며 이 제도는 특정 가문이 권력을 세습하는 통로가 되었다.
바로 이 시스템이 훗날 왕권을 위협하는 강력한 문벌귀족 사회를 탄생시키는 구조적 원인이 된 것이다.
이는 국가 시스템 설계가 단기적 안정뿐만 아니라 장기적인 부작용까지 고려해야 한다는, 시대를 초월하는 교훈을 남긴다.
7. 21세기 대한민국, 성종에게 무엇을 배울 것인가?
고려 성종의 시대로부터 천 년이 흐른 지금, 그의 정책과 리더십은 여전히 현대 국가경영에 깊은 울림을 준다.
'고려의 설계자' 성종이 남긴 유산은 21세기 대한민국이 나아갈 길을 모색하는 데 다음과 같은 세 가지 핵심적인 시사점을 제공한다.
1. 국가경영 철학의 확립: 비전과 시스템의 결합
성종의 개혁은 단기적인 처방이 아니었다.
그는 '유교적 민본주의'와 '중앙집권'이라는 명확한 국가 비전을 설정하고, 이를 2성 6부제와 12목 설치라는 구체적이고 일관된 시스템으로 구현했다.
이념 없는 정책은 표류하고, 시스템 없는 비전은 공허하다.
국가의 백년대계를 위해서는 시대정신을 반영한 명확한 경영 철학을 수립하고, 이를 흔들림 없이 뒷받침할 제도적 시스템을 구축하는 것이 무엇보다 중요하다.
2. 원칙 있는 실리 외교: 명분과 국익의 균형
서희의 담판은 강대국 사이에서 생존하고 번영해야 하는 대한민국의 외교에 중요한 교훈을 준다.
성종과 서희는 거란의 압박에 굴복하는 대신, '고구려 계승'이라는 명분을 지키면서도 '강동 6주' 확보라는 실리를 극대화했다.
이는 국제 정세의 본질을 꿰뚫어 보고, 우리의 원칙을 지키면서도 국익을 최우선으로 하는 주체적이고 전략적인 외교가 얼마나 중요한지를 보여준다.
감정이나 이념에 치우치지 않는 지정학적 현실주의에 기반한 냉철한 전략적 사고는 오늘날 더욱 절실하다.
3. 회복탄력성 있는 국가 제도의 구축
성종은 리더 개인의 역량에만 의존하는 통치에서 벗어나, 예측 가능하고 안정적인 국가 시스템을 설계했다.
잘 만들어진 시스템은 리더가 바뀌더라도 안정적으로 작동하며, 위기 상황에서 국가가 쉽게 흔들리지 않도록 하는 안전장치가 된다.
이는 국가 운영의 핵심이 영웅적 리더십이 아니라, 외부 충격에도 복원력을 갖춘 투명하고 합리적인 시스템의 설계와 운영에 있음을 시사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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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북한 개성시 판문구역 진봉리에 남은 성종 강릉(康陵) |
마지막으로, 우리는 성종의 리더십 자체를 주목해야 한다.
그는 최승로와 같은 전문가의 쓴소리를 경청하여 국가 개혁의 청사진으로 삼았고, 서희와 같은 실무자에게는 과감히 권한을 위임하여 위기를 기회로 바꾸었다.
전문가를 존중하고, 실무자를 신뢰하며, 시스템으로 말하는 리더십.
이것이야말로 시대를 초월하여 모든 조직과 국가의 지도자가 갖추어야 할 최고의 덕목일 것이다.
고려의 설계자 성종이 남긴 지혜는 천 년의 시간을 건너, 오늘 우리에게 국가란 무엇이며 어떻게 운영되어야 하는가에 대한 근본적인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글은 『고려사』·『고려사절요』 등 공개 사료와 국내외 연구 성과를 바탕으로, 고려 성종(成宗)의 제도 개혁과 외교를 현대적 관점에서 재구성·해설한 글입니다.
사료가 전하는 사실을 뼈대로 삼되, 이해를 돕기 위한 문장 구성과 문제의식의 연결, 오늘의 국가 운영과의 비교는 필자의 해석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전승이나 기록 공백처럼 확실하지 않은 부분은 (전승), 해석이 갈리는 부분은 (논쟁)으로 구분하는 방식으로 독해해 주세요.
중요한 대목은 원문 사료와 함께 교차 확인을 권합니다.
Seongjong of Goryeo (r. 981–997) stabilized the young kingdom and recast it around Confucian governance.
Using Choe Seung-ro’s “Twenty-Eight Points” as a blueprint, he reduced costly court rites, prioritized livelihoods, and strengthened royal authority.
He reorganized the court into a two-chancellery, six-ministry system, founded the Gukjagam to train officials, and used grain reserves for relief and price stability.
To project power locally, he dispatched officials to twelve key districts, integrated local magnates as hyangni administrators, and introduced a ten-province order.
In 993, during the Khitan invasion, he trusted Seo Hui’s negotiation and secured the Six Garrisons of Gangdong, reinforcing the northern frontier.
His reforms built durable institutions, while also helping foster hereditary aristocratic influence and sharper status hierarchie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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