빛과 그림자: 고려 4대 국왕 광종, 개혁 군주인가 피의 군주인가?
혼돈의 시대, 두 얼굴의 군주를 만나다
고려 초기는 건국의 격랑이 채 가라앉지 않은 혼돈의 시대였다.
태조 왕건이 강력한 호족들을 연합하여 나라를 세웠지만, 역설적으로 그들의 막강한 세력은 왕권을 끊임없이 위협하는 족쇄가 되었다.
왕위 계승을 둘러싼 암투와 호족들의 발호 속에서 2대 혜종과 3대 정종은 불안한 치세를 보내다 요절했다.
바로 이런 시대적 배경 속에서 고려 4대 국왕 광종(光宗)이 역사의 무대에 등장한다.
그의 이름 앞에는 '위대한 개혁 군주'와 '냉혹한 피의 군주'라는 극단적인 수식어가 동시에 따라붙는다.
한편에서는 노비안검법과 과거제를 통해 낡은 호족 중심의 질서를 무너뜨리고 중앙집권 국가의 기틀을 닦은 창조적 파괴자로 칭송받지만, 다른 한편에서는 공신과 혈육까지 무자비하게 숙청하며 공포정치를 펼친 폭군으로 비판받는다.
이처럼 상반된 평가는 광종이라는 인물이 얼마나 복합적이고 중층적인 인물인지를 증명한다.
본 글은 광종의 재위 기간을 세 시기로 나누어, 그의 통치 행적이 어떻게 변모해갔는지 심층적으로 분석하고자 한다.
신중한 준비기, 과감한 개혁기, 그리고 잔혹한 숙청기를 거치며 그가 고려 사회에 남긴 빛과 그림자를 다각도로 조명하고, 이를 통해 파괴자인 동시에 창조자였던 그의 역사적 위상을 재평가하는 것을 목표로 한다.
혼돈의 시대를 끝내기 위해 스스로 혼돈의 중심이 되었던 군주, 광종의 두 얼굴을 지금 만나본다.
1부: 신중한 준비기 - 제왕의 그릇을 다듬다 (949-956)
광종의 통치는 처음부터 폭풍처럼 몰아치지 않았다.
즉위 후 약 8년간, 그는 마치 폭풍 전의 고요처럼 신중하게 정세를 관망하며 자신의 정치적 기반을 다지고 제왕으로서의 역량을 키워나갔다.
이 시기는 훗날 그가 휘두를 개혁의 칼날을 벼리는 시간이었으며, 급진적 개혁을 뒷받침할 단단한 초석을 놓는 과정이었다.
그의 초기 통치 스타일은 단순한 관망이 아닌, 호족과의 필연적 대결을 준비하는 치밀하게 계산된 전략적 행보였다.
왕위에 오르기 전, 그는 형들인 혜종과 정종의 불안정한 치세를 바로 곁에서 목격했다.
왕규의 난과 같은 사건들을 겪으며, 호족 세력이 왕권에 얼마나 치명적인 위협이 될 수 있는지 절감했다.
이러한 경험은 그에게 강력한 왕권 확립이라는 평생의 과업을 각인시켰다.
즉위 초, 광종은 우선 자신의 지지 세력을 확보하고 민심을 안정시키는 데 주력했다.
즉위 직후 대광 박수경 등에게 명하여 태조부터 자신의 즉위까지 공을 세운 공신들에게 공로에 따라 쌀을 차등 지급하고 이를 정례화했다.
이는 자신에게 충성하는 세력을 명확히 하고 그들의 지지를 확보하려는 정치적 포석이었다.
동시에 그는 제왕학을 연마했다.
당 태종의 정치 토론집인 『정관정요(貞觀政要)』를 항상 곁에 두고 읽었는데, 이는 단순한 교양 서적 탐독이 아니었다.
이 책은 제왕으로서의 자세와 치자의 기본 관념을 담고 있는, 말 그대로 제국의 경영학 교과서였다.
광종은 이 책을 통해 다가올 호족과의 전면전을 대비한 지적 무장을 하고 있었던 것이다.
이 시기 광종의 정치는 매우 안정적이고 모범적이었다.
훗날 그를 신랄하게 비판했던 최승로조차 이 시기에 대해 다음과 같이 긍정적으로 평가했다.
왕위에 오른 후부터 8년 만에 정치와 교화가 맑고 공평하며 형벌과 은상이 지나침이 없었다.
— 《고려사》 권93, 열전6, 최승로
이는 그의 초기 통치가 명군의 자질을 충분히 보여주었음을 시사한다.
그러나 이 안정은 폭풍을 예고하는 고요함이었다.
그는 수면 아래에서 조용히 힘을 기르며, 고려의 낡은 체제를 뒤엎을 개혁의 때를 기다리고 있었다.
이 8년간의 준비기는 그의 내면에 잠재된 개혁 의지를 단단하게 벼리는 시간이었고, 마침내 그는 새로운 고려를 설계하기 위해 칼을 뽑아 들 준비를 마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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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드라마 제국의 아침에서의 광종 |
2부: 새로운 고려를 위한 설계 - 개혁의 칼을 뽑다 (956-960)
8년간의 침묵과 준비를 마친 광종은 마침내 고려의 국가 체제를 근본적으로 뒤흔들 대대적인 개혁에 착수했다.
그의 개혁은 단편적인 정책의 나열이 아니었다.
그것은 호족 중심의 연합 정권이라는 고려의 태생적 한계를 극복하고, 강력한 왕권을 중심으로 하는 중앙집권 국가로 나아가기 위한 거대한 청사진이었다.
노비 해방으로 구세력의 경제적 기반을 허물고, 과거제로 새로운 인재를 등용하며, 공복 제정과 칭제건원으로 왕의 질서를 선포하는 그의 정책들은, 하나의 목표, 즉 '절대 왕권의 확립'을 향해 정교하게 맞물려 돌아가는 거대한 기계장치와 같았다.
2.1. 구세력의 기반을 흔들다: 노비안검법
광종 개혁의 신호탄은 노비안검법(奴婢按檢法) 이었다.
이 법은 전쟁 포로나 빚 때문에 억울하게 노비가 된 양인을 조사하여 본래의 신분으로 되돌려주는 정책이었다.
표면적으로는 인도적인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 이면에는 호족들의 심장부를 겨눈 날카로운 정치적 목적이 숨어 있었다.
당시 노비는 호족들의 사유 재산이자 농토를 경작하는 경제적 기반이었으며, 유사시에는 사병(私兵)으로 동원되는 군사력의 원천이었다.
노비의 해방은 곧 호족의 힘을 직접적으로 약화시키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예상대로 호족들의 반발은 상상을 초월했다.
이 법이 자신들의 경제력과 군사력의 근간을 뿌리째 흔드는 것임을 간파했기 때문이다.
반발은 심지어 왕의 가장 가까운 곳에서 터져 나왔다.
광종의 아내이자 강력한 황주 호족 가문 출신인 대목왕후까지 나서서 법의 철회를 간청했다.
이는 단순한 부부간의 의견 다툼이 아니라, 호족 세력의 대표자가 왕의 개혁에 정면으로 맞선 정치적 대결이었다.
대목왕후: 전하! 어찌 이런 법을 시행하시려 하십니까! 이는 공신들의 근간을 흔드는 일이옵니다. 부디 거두어 주시옵소서!
광종: 왕후는 물러나시오! 나의 뜻은 확고부동하오. 억울하게 고통받는 백성을 구하는 것이 왕의 도리이며, 나라의 기강을 바로 세우는 길이오!
광종은 아내의 간절한 청마저 단호히 물리쳤다.
8년간 다져온 정치적 기반과 백성들의 지지를 바탕으로, 그는 모든 반대를 무릅쓰고 정책을 강행했다.
이는 그의 확고한 개혁 의지와 왕권 강화에 대한 집념이 얼마나 강했는지를 보여주는 상징적인 장면이었다.
노비안검법으로 수많은 노비가 양인이 되면서 호족의 경제력과 군사력은 치명타를 입었고, 국가는 세금과 군역의 대상이 되는 양인을 확보하여 재정 기반을 확충할 수 있었다.
2.2. 새로운 엘리트를 세우다: 과거제의 도입
호족의 물리적 기반을 약화시킨 광종은 다음으로 그들의 정치적 독점 구조를 깨뜨릴 칼을 빼 들었다.
바로 한국사 최초의 과거제(科-制) 도입이었다.
이 혁명적 제도의 설계에는 후주 출신의 귀화인 쌍기(雙冀)가 결정적인 역할을 했다.
광종은 후주 사신단으로 왔다가 병으로 고려에 머물게 된 쌍기의 식견과 개혁적 성향에 깊은 인상을 받고, 그를 파격적으로 등용하여 개혁의 파트너로 삼았다.
"진정으로 실력 있고 학문이 높은 자들이 벼슬에 오름이 마땅할 것이옵니다. 전하, 과거를 시행하시옵소서."
쌍기의 건의는 당시 고려의 현실을 정확히 꿰뚫고 있었다.
건국 공신들은 대부분 무인(武人) 출신으로, 통일 전쟁에는 공을 세웠으나 안정적인 국가 체제를 설계하고 운영할 능력은 부족했다.
광종은 이들을 대체할, 오직 자신에게만 충성하는 새로운 관료 집단이 절실했다.
과거제는 바로 그 해답이었다.
958년, 쌍기의 주관하에 시(詩), 부(賦), 송(頌), 시무책(時務策)을 시험하는 과거가 처음으로 시행되었다.
이는 고려 사회에 엄청난 충격을 던졌다.
이전까지 관직은 소수의 공신 가문이나 호족들이 음서(蔭敍)나 추천을 통해 독점하는 구조였다.
그러나 이제 가문이나 재력이 아닌 오직 '실력'만으로 관리가 될 수 있는 길이 열린 것이다.
광종은 과거를 통해 선발된 신진 관료들로 자신에게 절대적으로 충성하는 새로운 엘리트 그룹을 육성하고자 했다.
이들은 배경이 없었기에 오직 왕에게 의존할 수밖에 없었고, 호족 중심의 구세력을 대체하며 왕권 강화의 든든한 지지 기반이 되어주었다.
2.3. 왕의 질서를 선포하다: 공복 제정과 칭제건원
광종은 물리적, 인적 기반 개편에 이어, 왕의 권위를 시각적이고 상징적으로 드러내는 조치들을 단행했다.
첫째는 백관의 공복(公服) 제정이었다.
이전까지 관료들의 복장은 통일된 기준 없이 혼란 그 자체였다.
최승로의 지적처럼 "비록 관직이 높아도 집이 가난하면 공복을 갖출 수 없고, 관직이 없어도 집이 부유하면 비단옷을 입는" 상황이었다.
이는 부(富)가 지위(地位)를 압도하는, 왕의 권위가 서지 않는 무질서의 상징이었다.
960년, 광종은 관직 등급에 따라 자삼(紫衫), 단삼(丹衫), 비삼(緋衫), 녹삼(綠衫)의 네 가지 색으로 공복을 제정했다.
이제 옷 색깔만으로 신하의 서열을 한눈에 파악할 수 있게 된 것이다.
이는 왕을 정점으로 하는 체계적인 관료 서열을 시각적으로 확립하고, 정치적 위계가 재력보다 우위에 있음을 선포하는 상징적인 조치였다.
둘째는 칭제건원(稱帝建元) 이었다.
그는 '광덕(光德)', '준풍(峻豊)'과 같은 독자적인 연호를 사용하고, 수도인 개경을 '황제의 도시'라는 의미의 황도(皇都)로 칭했다.
이는 이중적 의미를 지닌 선포였다.
안으로는 호족들을 신하로 거느리는 절대 군주, 즉 황제로서의 지위를 확고히 하고, 밖으로는 고려가 더 이상 중국의 제후국이 아닌 대등한 천자국(天子國)임을 선언하는 행위였다.
이른바 '외왕내제(外王內帝)' 체제를 통해 국왕의 권위를 그 어떤 세력도 넘볼 수 없는 절대적인 것으로 만들려는 의도가 담겨 있었다.
개혁의 청사진은 완성되었지만, 그 설계도를 현실로 만드는 데 필요한 대가는 피였다.
개혁 군주의 시대는 저물고, 이제 광종은 고려의 미래를 위해 과거를 절멸시키는 파괴자의 길로 들어서고 있었다.
3부: 피의 군주로의 변모 - 공포가 나라를 뒤덮다 (960-975)
개혁의 칼날이 깊어질수록 호족들의 저항은 거세졌고, 광종의 인내심은 바닥을 드러냈다.
개혁의 청사진을 그리던 군주는 점차 의심과 불안에 사로잡힌 냉혹한 군주로 변모해갔다.
그의 통치 후반기 16년은 '참소와 숙청'이라는 단어로 요약된다.
한때 맑고 공평하다 칭송받던 정치는 의심과 피로 물들었고, 고려는 공포가 지배하는 시대로 접어들었다.
숙청의 서막은 960년, 평농서사 권신이라는 하급 관리가 대상 준홍과 좌승 왕동 등 고위 관료들이 반역을 꾀한다고 참소한 사건에서 비롯되었다.
기록은 이것이 '거짓 고발(참소)'이었음을 암시한다.
그러나 광종은 이 고발을 기다렸다는 듯이 호족 세력을 제거할 절호의 기회로 삼았다.
그는 준홍과 왕동을 즉시 축출했고, 이 사건을 신호탄으로 숙청의 칼날을 무자비하게 휘두르기 시작했다.
숙청은 걷잡을 수 없이 전방위적으로 확대되었다.
• 참소의 만연과 공포 정치: 광종이 참소를 묵인하자, 너도나도 충성스럽고 선한 사람들을 무고하는 고발 열풍이 불었다.
사회는 불신과 음모로 가득 찼고, 당시의 공포스러운 분위기는 아래의 기록에 생생히 담겨 있다.
• 공신 세력의 몰락: 숙청의 칼날은 예외를 두지 않았다.
광종의 즉위를 도왔던 개국공신 박수경과 그의 아들들마저 역모로 몰려 숙청되었다.
박수경은 억울함을 이기지 못해 화병으로 죽었다.
태조 왕건을 도왔던 공신 3,200여 명 중 광종 사후까지 살아남은 이는 겨우 40여 명에 불과했다는 기록은 숙청의 규모가 얼마나 엄청났는지를 짐작하게 한다.
• 혈육을 향한 칼날: 그의 의심과 광기는 마침내 자신의 혈육에게까지 향했다.
그는 형들인 혜종과 정종의 아들들(흥화궁군, 경춘원군)을 가차 없이 죽였다.
급기야 자신의 유일한 아들이자 태자인 주(훗날 경종)마저 의심하여 가까이 오지 못하게 했다.
이는 단순한 광증이 아니었다.
태자 주는 외가인 황주 호족 세력의 손에서 자랐고, 광종은 이들이 자신의 아들을 구심점으로 삼아 반란을 일으킬 것을 극도로 경계했던 것이다.
아들을 잠재적 정적으로 보는 냉혹한 정치 계산과, 아들을 지키려는 대목왕후의 필사적인 모정이 충돌하는 비극은 그의 광기 어린 집착이 절정에 달했음을 보여준다.
말년에 이르러 광종은 불교에 깊이 빠져들었다.
이는 수많은 살생을 저지른 데 대한 죄책감을 덜고 심리적 안정을 찾기 위한 도피처였을 가능성이 크다. (논쟁)
그는 수많은 사찰을 짓고 화려한 불교 행사를 열었다.
최승로는 "스스로 지존을 가볍게 하고 작은 선을 짓기를 좋아하였다"고 비판하며, 그가 벌인 불사가 백성의 고혈을 짜내 재정을 탕진했다고 지적했다.
975년, 광종이 51세의 나이로 세상을 떠나면서 26년간의 철권통치도 마침내 막을 내렸다.
그의 시대는 강력한 왕권이라는 유산을 남겼지만, 그 과정에서 수많은 피와 눈물이 흘렀다.
그의 극단적인 통치가 남긴 깊은 상처와 유산에 대한 평가는 이제 다음 시대의 몫으로 남겨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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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헌릉 전경 |
파괴자인가, 창조자인가 - 광종의 역사적 유산
고려 4대 국왕 광종, 그는 과연 위대한 개혁 군주인가, 아니면 냉혹한 피의 군주인가?
그의 26년 치세는 이 두 가지 모습을 모두 담고 있기에 단 하나의 평가로 규정하기 어렵다.
그의 통치는 고려에 뚜렷한 빛과 짙은 그림자를 동시에 남겼다.
광종이 남긴 빛, 즉 긍정적 유산은 명확하다.
그의 강력한 개혁과 무자비한 숙청은 비록 그 과정이 잔혹했지만, 고려 건국 이후 왕권을 끊임없이 위협하던 호족 세력을 결정적으로 제압했다.
이를 통해 강력한 왕권을 확립하고 중앙집권적 국가 체제의 기틀을 마련했다.
노비안검법은 국가의 재정 및 군사 기반을 확충했고, 과거제는 능력 중심의 새로운 관료층을 형성하여 왕권을 뒷받침했다.
그의 이러한 '파괴'가 있었기에, 이후 성종과 현종 대에 이르러 고려는 안정적인 통치 체제를 완성하고 문화 국가로서의 면모를 갖출 수 있었다.
그러나 그가 남긴 그림자 또한 짙다.
무자비한 숙청은 수많은 공신 가문과 인재들을 파괴했으며, 사회 전반에 불신과 공포를 조장했다.
종이 주인을, 자식이 아비를 고발하는 시대적 분위기는 공동체의 신뢰를 무너뜨렸다.
특히 자신의 아들 경종에게까지 칼날을 겨눈 그의 광기 어린 집착은 아들에게 깊은 정신적 상처를 남겼고, 이는 경종 대 정치적 혼란의 한 원인이 되었다. (논쟁)
또한 그의 사후, 호족 세력의 반발로 노비환천법이 시행되는 등 일부 개혁은 한계를 드러내기도 했다.
광종의 리더십은 파괴를 통해 창조를 이뤄야 했던 고려 초기의 딜레마 그 자체였다.
그는 국가의 초석을 다지기 위해 기꺼이 폭군의 오명을 감수한 냉혹한 설계자였으며, 그가 남긴 피와 질서의 유산은 오늘날까지도 위대한 국가 건설의 본질이 무엇인지에 대한 묵직한 질문을 던지고 있다.
이 글은 『고려사』, 『고려사절요』 등 신뢰 가능한 사료와 일반적인 학계 해석을 바탕으로, 서사적 흐름과 이해를 돕기 위해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부분적으로 각색한 역사 해설 글입니다.
연대기를 빠짐없이 나열하는 ‘강의’가 아니라, 광종의 통치를 준비기–개혁기–숙청기로 나누어 구조적으로 재구성한 서사에 가깝습니다.
일부 논쟁이 있는 해석은 다수설을 중심으로 소개했으며, 세부 견해 차이는 정리 과정에서 단순화했습니다.
인물·제도·정책 명칭은 한국사 교육에서 통용되는 표기를 우선 사용했으며, 독자의 이해를 위해 필요한 경우 맥락과 기능을 풀어 설명했습니다.
혹시 사료 해석이나 사실 관계에서 보완이 필요하다면 언제든지 제보해 주세요.
Gwangjong, the fourth king of Goryeo (r. 949–975), ruled when powerful regional clans threatened the throne.
His reign is often seen in three phases.
At first he governed cautiously, rewarding merit subjects and studying Chinese statecraft. From 956 he launched bold reforms: the Slave Review Law freed many unjustly enslaved people and weakened local lords, while the new civil service examinations created an educated elite loyal to the crown.
Later, fear of plots turned him into a ruthless ruler who purged ministers, nobles, and even royal kin.
He crushed the old order and built strong kingship, but at the cost of bloodshed and a lasting image as both reformer and tyran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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