번개 맞은 전쟁의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알바 롱가 정복과 로마 통합 (Tullus Hostilius)


번개 맞은 전쟁의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이야기


평화의 시대는 끝났다! 로마의 세 번째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43년간의 평화로운 통치로 로마에 안정과 번영을 가져왔던 2대 왕 '누마 폼필리우스'의 시대가 막을 내렸습니다. 

이제 로마는 전혀 다른 성격의 지도자를 맞이하게 됩니다. 

그의 이름은 툴루스 호스틸리우스, 누마와는 정반대로 피와 정복을 갈망하는 불같은 사내였죠.


그의 핏줄 속에는 이미 전쟁의 운명이 흐르고 있었는지도 모릅니다. 

그는 바로 로마의 건국자 로물루스와 함께 싸우다 사비니족의 침공 당시 장렬히 전사한 영웅, 호스투스 호스틸리우스의 손자였으니까요.


이제부터 우리는 평화를 지루해했던 이 전쟁광이 어떻게 로마의 운명을 뒤흔들고, 불꽃같은 삶을 살다 전설적인 최후를 맞이했는지 그 흥미진진한 여정을 함께 따라가 보겠습니다.


툴루스 호스틸리우스의 초상화


왕좌에 오른 전쟁광

1. 왕의 탄생

누마 왕이 세상을 떠나자, 로마의 원로원과 시민들은 라틴인이었던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를 새로운 왕으로 선출했습니다. 

당시 로마는 건국 세력인 라틴계와 연합 세력인 사비니계가 번갈아 왕위를 잇는 전통이 있었기에, 사비니계였던 누마의 뒤를 이어 라틴계인 툴루스가 왕이 된 것은 자연스러운 흐름이었습니다. (해석)


2. 성격과 목표

툴루스는 이전 왕과는 완전히 다른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통치 철학은 다음 세 가지로 요약할 수 있습니다.


• 정치보다 전쟁: 그는 복잡한 정치보다 명예로운 공을 세울 수 있는 전쟁터를 훨씬 더 좋아했습니다. 평화는 그에게 나태함과 동의어였죠.

• 팽창 야망: 그의 일생일대의 목표는 이웃 나라를 정복하여 로마의 영토를 넓히는 것이었습니다. 그는 이를 단순한 침략이 아닌, '선조의 땅을 되찾는 정의로운 전쟁'이라 굳게 믿었습니다.

• 내부 안정 우선: 왕위에 오르자마자 그가 가장 먼저 시행한 정책 중 하나는 왕가 소유의 땅을 가난한 평민들에게 나누어주는 것이었습니다. 이는 외부 정복 전쟁을 시작하기에 앞서, 먼저 내부 결속을 다지고 민심을 안정시키려는 치밀한 계산이 깔린 행동이었습니다. (논쟁)


그의 뜨거운 야망이 처음으로 향한 곳은 바로 로마의 모국(母國)이자 강력한 이웃이었던 '알바 롱가'였습니다.


세 쌍둥이의 운명적인 결투

툴루스 통치기에서 가장 극적이고 비극적인 사건은 바로 알바 롱가와의 전쟁에서 벌어졌습니다.

1. 전쟁의 명분

툴루스는 전쟁을 일으킬 명분을 찾고 있었습니다. 

그는 국경 지역에서 벌어진 로마와 알바 롱가 농민들 사이의 사소한 다툼을 꼬투리 잡아 전쟁을 선포했죠. 

하지만 두 라틴 국가가 전면전을 벌인다면, 북쪽의 강대국 에트루리아가 그 틈을 노려 두 나라 모두를 집어삼킬 것이라는 우려가 컸습니다. 

결국, 양측은 군대를 동원하는 대신 각 나라를 대표하는 세 명의 전사가 3대 3 결투를 벌여 그 결과로 승패를 결정하기로 합의합니다.

2. 세기의 대결

로마의 운명은 '호라티우스' 가문의 세 쌍둥이 형제에게, 알바 롱가의 운명은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세 쌍둥이 형제에게 맡겨졌습니다. 

세기의 대결은 그야말로 숨 막히게 전개되었습니다.


• 초반 로마의 위기: 격렬한 전투 초반, 호라티우스 형제 중 두 명이 순식간에 쓰러지며 로마는 패배 직전에 몰립니다.

• 홀로 남은 전사의 기지: 이제 로마의 희망은 단 한 명. 그는 부상당한 쿠리아티우스 세 형제를 상대하기 위해 도망치는 척하며 그들을 흩어놓는 기지를 발휘합니다.

• 극적인 역전승: 그의 전략은 완벽하게 맞아떨어졌습니다. 각기 다른 속도로 쫓아오던 쿠리아티우스 형제들을 차례차례 격파하며 기적 같은 역전승을 거둡니다.


호라티우스 3형제


승리의 비극

살아남은 영웅, 푸블리우스 호라티우스가 로마로 개선하던 길, 그는 예상치 못한 비극과 마주합니다.

• 그의 여동생 이름미상(통칭'호라티아')는 다름 아닌 적장 쿠리아티우스 가문의 아들 중 한 명과 약혼한 사이였습니다.

• 오빠의 손에 들린 약혼자의 갑옷을 본 호라티아가 슬피 울자, 그는 격분하여 그 자리에서 여동생을 칼로 찔러 죽이고 맙니다.


"로마의 딸이 로마의 적을 위해 울다니, 죽어도 마땅하다!"


이 끔찍한 사건으로 그는 사형을 선고받았지만, 그의 아버지가 "유일하게 남은 아들마저 잃지않게 해달라"며 민중에게 호소했고, 사람들의 마음이 움직여 결국 사면을 받았습니다. (전승)

이 사건은 훗날 로마에서 사형수가 대중에게 직접 사면을 호소할 수 있는 법적 판례의 시작이 되었습니다.


결투의 승리로 알바 롱가를 종속시키는 데 성공했지만, 알바 롱가의 독재자 '메티우스 푸페티우스'는 이 결과를 순순히 받아들이지 않았습니다. 

그는 겉으로는 복종하는 척하며 로마를 배신할 기회만을 호시탐탐 노리고 있었습니다.


알바 롱가의 최후와 새로운 로마

결투의 결과에 불만을 품은 알바 롱가의 배신은 로마의 운명을 영원히 바꾸는 계기가 되었습니다.

1. 배신과 응징

로마가 에트루리아의 도시국가인 피데나이, 베이이와 전쟁을 벌이자, 메티우스 푸페티우스는 마침내 본색을 드러냈습니다. 

그는 로마를 돕기로 한 협약을 깨고 전투 중에 로마군을 배신하여 위험에 빠뜨렸죠. 

하지만 툴루스는 고군분투 끝에 전쟁에서 승리했고, 배신자 메티우스를 잔혹하게 처단했습니다. 

그의 몸을 두 마리 말이 끄는 전차에 각각 묶어 찢어 죽이는 형벌을 내렸는데, 이는 로마 역사상 전무후무한 잔혹한 형벌이었으며, 로마인들이 이 처형 방식을 사용한 것은 이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었습니다.


피데나이와 베이와의 전쟁


2. 위대한 통합 정책

툴루스는 여기서 멈추지 않고 알바 롱가를 완전히 파괴한 뒤, 모든 주민을 로마로 강제 이주시키는 대담한 결정을 내립니다. 

이 정책에는 그의 놀라운 통찰력이 담겨 있었습니다.

• 시민으로의 통합: 그는 알바인들을 노예로 삼지 않고 완전한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였습니다. 고대 세계에서 정복당한 도시의 주민들을 모조리 노예로 삼는 것이 일반적이었던 시대에, 툴루스의 결정은 그야말로 혁신적이었습니다. 이 결정으로 로마의 인구는 단숨에 두 배로 늘어났고, 이는 곧 군사력과 국력의 비약적인 성장으로 이어졌습니다.

• 미래를 위한 포석: 툴루스는 알바의 유력 가문들에게 로마 귀족 지위를 부여했습니다. 이때 귀족이 된 가문 중에는 바로 '율리우스' 씨족이 포함되어 있었습니다. 이 결정은 수백 년 후, '율리우스 카이사르'라는 위대한 인물의 등장으로 이어지게 됩니다. "툴루스가 없었다면 카이사르도 없었다"는 평가가 나오는 이유입니다.(전승)


알바 롱가를 완전히 흡수한 후에도 툴루스의 정복 활동은 멈추지 않았습니다. 

그는 로마의 영토를 계속해서 넓혀나가며 강력한 군사 국가의 기틀을 다졌습니다.


정복 군주의 유산

툴루스의 32년 통치는 로마에 뚜렷한 유산을 남겼습니다.

1. 끝없는 전쟁: 알바 롱가 정복 이후에도 그는 사비니, 피데나이, 베이이 등과의 전쟁에서 연전연승을 거두며 로마를 라틴 민족의 패자로 만들었습니다. 

그의 시대에 로마는 강력한 군사 국가로 거듭났습니다.


2. 쿠리아 호스틸리아: 알바 롱가 귀족들을 원로원에 편입하면서 의원 수가 크게 늘어나자, 그는 로마 광장에 새로운 원로원 의사당을 건설했습니다. 

이 건물은 그의 이름을 따 '쿠리아 호스틸리아(Curia Hostilia)' 라고 불렸으며, 그가 죽은 뒤로도 600년안팎으로 로마 정치의 중심지 역할을 했습니다.


이처럼 전쟁과 건설로 로마를 강대국으로 만든 툴루스였지만, 그가 평생 등한시했던 것이 있었으니, 바로 '신에 대한 경배'였습니다. 

그리고 이 오만함은 그의 비극적인 최후를 불러오게 됩니다.


신의 분노를 산 왕의 최후

전쟁터에서는 무서울 것이 없었던 왕도 신의 분노 앞에서는 무력했습니다.

1. 불길한 징조

툴루스는 평소 종교 의식을 "왕이 신경 쓸 가치 없는 일"이라며 무시하는 태도로 일관했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 말년, 로마에는 불길한 징조들이 나타나기 시작했습니다. 

알바 산에 갑자기 돌이 비처럼 쏟아지고, 원인을 알 수 없는 역병이 로마 전역에 퍼져나갔습니다.


2. 벼락 맞은 왕궁

역병에 걸려 심신이 쇠약해진 툴루스는 미신에 빠져들기 시작했습니다. 

그는 평화의 왕 '누마'의 기록을 뒤져 유피테르 신에게 제사를 지내는 방법을 찾아냈고, 직접 의식을 거행하려 했습니다. 

하지만 평생 신을 무시해온 그가 의식을 올바르게 집전할 리 없었습니다. 

로마의 역사가 리비우스의 기록에 따르면, 잘못된 의식은 신의 분노를 샀고, 결국 하늘에서 떨어진 번개가 왕과 그의 궁궐을 동시에 내리쳐 모든 것을 재로 만들어버렸다고 합니다. (전승)


3. 또 다른 이야기

물론 그의 극적인 죽음에 대해서는 다른 가설들도 존재합니다.

역병사: 로마를 덮친 역병을 피하지 못하고 평범하게 병사했다는 설.

암살설: 다음 왕이 된 '앙쿠스 마르키우스'와 그의 추종자들이 왕위를 차지하기 위해 그를 암살했다는 설.


로마 도약의 발판을 놓은 왕

툴루스 호스틸리우스는 분명 호전적인 전쟁광이었습니다. 

하지만 그의 통치는 로마 역사에 지울 수 없는 족적을 남겼습니다. 

그의 무자비한 정복 전쟁과 알바 롱가 시민들을 완전한 로마인으로 받아들인 위대한 통합 정책은 로마의 인구와 군사력을 비약적으로 발전시켰습니다.

그는 로마를 라틴 평원의 수많은 도시 중 하나에서, 누구도 무시할 수 없는 강력한 국가로 성장시키는 결정적인 발판을 마련한 인물이었습니다. 

툴루스의 시대에 다져진 강력한 힘이 있었기에, 로마는 훗날 세계를 제패하는 대제국으로 나아갈 수 있었던 것입니다.


이 글은 로마 전기 사료(리비우스, 디오니시우스 등)와 표준 연구를 바탕으로, 서사적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를 부분 각색했습니다. 
전승 중심의 이야기는 [전승], 학계 이견이 있는 대목은 [논쟁]으로 표시합니다. 
인물·지명·제도는 최초 1회 한영 병기합니다.


Rome’s third king, Tullus Hostilius, replaced Numa’s peace with relentless war. 
He won the Horatii–Curiatii duel episode (trad.) and crushed Alba Longa after Mettius Fufetius’s betrayal, then folded Alba’s people and elites into Rome and raised the Curia Hostilia. 
Scorning ritual, he allegedly botched a Jupiter Elicius rite and was struck by lightning (Livy), though plague or assassination are also told. 
His reign forged military edge and bold civic integrati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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