간디의 빛과 그림자: 사티아그라하부터 암베드카르 갈등·남아공 인종 논란 (Mahatma Gandhi)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 간디: 비폭력의 시대, 인간의 그림자


변호사, 길을 떠나다 (1869-1893)

1. 포르반다르의 평범한 시작

1869년 10월 2일, 인도 서부의 작은 소공국인 포르반다르(Porbandar, 인도 서부의 도시)의 명문가에서 모한다스 카람찬드 간디(Mohandas Karamchand Gandhi, 후일 '마하트마'로 불리게 될 인도의 독립운동가)는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부유했고, 간디는 대학교까지 풍족한 삶을 누렸다. 

아버지 카람찬드 간디(Karamchand Gandhi, 포르반다르의 총리를 지냄)는 배움은 없었으나 아들의 말을 믿어주고 배려하는 분이었으며, 어머니 푸틀리바이(Putlibai)는 힌두교의 교리와 전통을 성실하게 지키는 신실한 힌두교 신자였다. 

이러한 가정환경은 간디에게 고지식할 정도로 정직한 성격과 성실한 믿음을 심어주었다. 

간디는 부모로부터 힌두교 신앙뿐만 아니라, 인도 전통 종교 중 하나인 자이나교(Jainism, 불살생을 강조하는 종교)의 교육을 받았다.


마하트마 간디


어린 시절, 간디는 청소년기에 잠시 방황하기도 했으나, 아버지의 따뜻한 보살핌 덕분에 상처를 치유했다고 한다. 

13세의 어린 나이에 그는 카스투르바 간디(Kasturba Gandhi, 간디의 아내)와 결혼했다.

"나는 진실로 가난한 탁발승이오. 내가 가진 것이라고는 물레와 교도소에서 쓰던 밥그릇과 염소젖 한 깡통, 허름한 담요 여섯 장, 수건, 그리고 대단치도 않은 평판뿐이오."

이 말은 그가 만년에 무소유의 상징이 되었을 때의 모습이었지만, 젊은 시절의 그는 서양 문명을 배우기 위해 대영제국의 심장으로 향했다. 

1890년, 간디는 영국 런던 대학교(University of London, 영국 수도 런던에 위치) 법학과를 중퇴했으나, 후일 1916년에 명예 학사 학위를 받았다. 

3년 남짓한 짧은 영국 유학 시절은 간디의 사상 형성에 기본이 되는 경험과 지식을 쌓는 중요한 시기였다.

"진리를 찾아가는 자는 티끌보다도 겸손해져야 한다."


1902년의 간디와 그의 아내 카스투르바 간디.


2. 인도에서의 실패와 남아프리카로의 이주

영국 유학을 마치고 귀국했지만, 고향 인도 라지코트(Rajkot, 인도 구자라트주의 도시)와 봄베이(Bombay, 현재 뭄바이)에서 변호사 생활을 시작한 간디는 순탄치 않았다. 

그는 성격이 내성적이어서 법정에서 말 한 마디 못하고 물러날 정도였고, 능력을 인정받지 못하였다.


결국, 간디는 1년간의 계약으로 남아프리카(South Africa, 아프리카 남단의 국가)의 인도계 상사에서 근무하게 되었다. 

그가 새로운 삶의 터전을 찾아 남아프리카로 떠난 것은 1893년이었다. 

그의 어머니는 그가 귀국하기 전에 이미 별세한 뒤였다.


남아프리카의 각성 그리고 비판 (1893-1914)

1. 인종차별의 경험과 사티아그라하의 탄생

남아프리카 공화국(South Africa, 당시 나탈 식민지와 트란스발 정부 등이 존재)에서의 생활은 간디의 삶에 결정적인 전환점이 되었다. 

당시 남아공에는 약 7만 명의 인도인이 이주해 있었는데, 이들은 비유럽인(Non-European)이라는 이유로 심한 차별을 받고 있었다. 

백인 관리들은 인도인들의 투표권을 제한하고, 거주 및 사업 장소를 제한했다.


간디는 자신이 백인이 아니라는 이유로 교통시설 이용 등에서 차별당하는 동족들을 목격하고 독립운동을 다짐하게 되었다. 

1894년 6월, 1년 계약이 끝났음에도 불구하고, 나탈 의회(Natal Parliament, 남아프리카 나탈 지역의 식민지 의회)가 인도인의 선거권 박탈을 입법화하려 한다는 신문기사를 우연히 읽고 정치 운동가로 변신한다. 

그는 탄원서를 작성하고 수백 명의 서명을 받아 나탈과 영국 정부에 호소했으나, 입법을 막는 데는 실패했다. 

대신 나탈 인도인 문제에 대한 관심을 국제적으로 홍보하는 데 성공했다. 

이후 그는 더반(Durban, 남아공의 주요 항구도시)에 머물며 '나탈 인도국민회의'(Natal Indian Congress, 인도인 차별 반대 투쟁 단체)를 창설하고 인도인의 단결을 고취시켰다.


이러한 투쟁 과정에서 비폭력 불복종(Non-violent Non-cooperation)으로 통칭되는 그의 투쟁 방식이 구체화되었다. 

이 투쟁 방식은 인도 전통과 힌두교 신앙에 뿌리를 두고 있었으며, 러시아의 작가 톨스토이(Tolstoy, 톨스토이주의)에게서 영감을 얻은 '비폭력 투쟁'의 단서를 열었다.


1906년, 간디는 요하네스버그(Johannesburg, 남아공의 주요 도시)에서 모든 "아시아인"에게 등록증 소지를 의무화하는 새로운 법(등록법)에 항의했다. 

인도인들은 이 새 규정에 협조하지 않겠다고 선서하고, 등록 사무소에서 시위를 벌이며 등록증을 불태웠다.


그는 이 행동 방식을 사티아그라하(Satyagraha)라고 명명했다. 

'사티아(Satya)'는 진리(眞理)를, '아그라하(Agraha)'는 노력, 열정(努力, 熱情)을 뜻하는 산스크리트어로, '사티아그라하'는 "진리를 단단히 붙들고 있다는 뜻" 또는 "진리를 찾으려는 노력"으로 해석되었다. 

사티아그라하의 핵심은 부당한 법을 거부하고 그 결과(벌금, 징역, 구타 등)를 감수함으로써 압제자들의 양심에 닿아 마음을 바꾸게 하는 것이었다.


그 후 몇 년 동안 수천 명의 비폭력 시위자들이 감옥에 갔으며, 간디 자신도 세 번 투옥되었다. 

1914년까지 이어진 이들의 항의와 당국과의 협력 거부 끝에 결국 남아공 정부는 등록법을 철회했다.

이는 간디에게 정치적 행동의 전략으로서 비폭력의 승리 가능성을 입증했다.


(1906년 요하네스버그의 극장 앞에서) 간디: "우리가 이 부당한 법을 따르기를 거부함으로써 얻을 벌칙과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여야 합니다! 폭력은 우리를 약하게 할 뿐입니다. 진리의 힘(사티아그라하)만이 우리의 정당성을 증명하고 압제자의 마음을 바꿀 것입니다!"


2. 인간적인 그림자

간디는 비폭력과 인권의 선구자였지만, 그의 삶에는 강력한 비판의 지점들, 특히 그의 인종차별적 면모와 사생활이 존재했다.

간디는 남아프리카에서 인도인들의 차별에 맞서 싸웠으나, 정작 흑인(아프리카 원주민)에 대해서는 차별적인 시각을 드러냈다. 

그는 다른 아리아계 힌두교인들과 마찬가지로 아리아인 우월주의(Aryan superiority)를 가지고 있었다는 논쟁이 있다.


1893년 남아프리카 의회에서 간디는 다음과 같이 발언했다.

간디 (전승): "식민지에서의 일반적인 믿음은 인도인이 아프리카 원주민 같은 야만족보다 더 낫다는 것입니다."


간디는 백인에게 차별받은 일에는 불쾌함을 느꼈지만, 정작 흑인을 남아공 사회 주류에서 배척하는 것은 긍정적으로 생각했다는 논쟁이 있다. 

1896년에는 "검둥이들은 문명화가 되지 않아 골칫거리이고, 더러우며, 거의 동물과도 같이 생활한다"는 의견을 밝히기도 했다. 

그는 심지어 '검둥이'를 뜻하는 '카피르(Kaffir)'라는 멸칭을 자주 사용했다. 

그는 줄루족을 학살한 보어 전쟁(Boer War, 1899-1902)에 적극적으로 참여했는데, 이러한 군 복무 기록과 증언들을 근거로 흑인 사회에서는 간디를 적대적인 차별주의자로 생각한다는 기록도 있다.


결국 2018년, 그의 흑인에 대한 인종차별적 면모에 반발하여 아프리카 가나(Ghana, 서아프리카 국가) 수도에 있는 가나 대학교(University of Ghana)에서 간디의 동상이 철거되는 일도 벌어졌다.


간디는 성욕을 극도로 제한하는 청빈의 삶을 살고자 했으나, 이 과정에서 가족과의 갈등이 심했다.

그의 아들 할리랄 간디(Harilal Gandhi)는 아버지의 뜻을 따라 독립운동에 투신했으나, 자식을 소유물로 여겨 모든 것을 지배하려던 아버지에게서 벗어나기 위해 이슬람교로 개종했다. 

한 평론가는 할리랄을 '아버지가 위대한 삶을 위한 제단에 바쳐진 희생양'에 불과했다고 비판하기도 했다. 

또한 간디는 할리랄이 하위 카스트가 아닌 무슬림 여성과 결혼하려 했을 때 극구 반대했는데, 이는 힌두교와 이슬람의 화합을 바랐던 그의 대외적 태도와 상반되는 이중적 태도로 비판받았다.


1908년, 간디는 동성 연인 칼렌바흐(Kalenbach)와 지내기 위해 부인 카스투르바 곁을 떠나 지냈다는 논쟁이 있다.


하릴랄 간디


비폭력 대항과 인도 독립의 격랑 (1915-1947)

1. 귀국과 비폭력 대중 운동의 시작

1915년, 간디는 남아프리카를 경유하여 인도로 돌아왔다. 

그는 영국 통치에 반대하는 운동을 이끌기 위해 남아프리카에서 연마한 사티아그라하를 인도에 적용하기 시작했다.


제1차 세계대전(1914-1918) 당시, 간디는 영국에 협력하면 독립을 시켜주겠다는 영국의 회유에 현혹되어 인도의 전쟁 가담을 지지하는 입장에 서기도 했는데, 이는 그의 비폭력주의에 어긋나는 점으로 비판받았다. (영국은 전쟁 협력을 대가로 독립을 약속하며 인도 민족주의자들의 협력을 구했다. 간디는 당시 영국의 약속이 진실할 것이라 믿었으나, 이는 후에 지켜지지 않았다.)


하지만 전쟁이 끝난 후, 영국이 약속을 지키지 않고 1919년 반영 운동을 탄압하기 위한 롤래트 법(Rowlatt Act, 적법한 절차 없이 체포 영장 발부 가능)을 제정하자, 간디는 영국 지배에 다시 반기를 들었다.

간디: "우리는 빵을 원했지만 돌을 받았습니다!"

그는 전 인도인에게 영국 상품 불매, 납세 거부, 공직 사퇴 등 폭력 없는 저항을 호소하며 사티아그라하 투쟁을 선언했다. 

그러나 1919년 대규모 민중운동이 발생했을 때, 영국군의 무자비한 발포로 400명의 인도인이 학살당하는 비극(전승)을 겪으며 운동은 주춤했다.


2. 스와데시와 물레의 상징

간디의 투쟁 방식은 폭력을 일절 사용하지 않고 평화적인 모습을 끝까지 유지하는 것이었다. 

그는 폭력 투쟁에 대한 욕구가 분출할 때마다 영국인들을 다치게 하지 말고 차라리 맞아 죽으라고 역설했다. 

이는 비폭력 투쟁만이 정당성을 가지며 궁극적인 승리를 이끈다고 믿었기 때문이다.


간디의 비폭력은 비겁한 자들의 비폭력에는 동의하지 않았다. 

그에게 비폭력이란 폭력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불구하고 비폭력을 사용하는 강자의 무기였다.


그의 핵심 사상인 자치(Swaraj, 스와라지)는 단순히 정치적 독립을 넘어, 국가에 의존하지 않고 자유로운 개인이 자신의 사회를 창조하는 것을 의미했다. 

그는 인도 독립과 재건이 70만 개 마을공화국의 연방이라는 그의 주장에 집약되는 마을의 재건에 달려 있다고 보았다. 


그는 국가 없는 민주주의, 계몽된 무정부 상태(아나키즘적 민중운동)를 꿈꾸었다.

간디는 영국의 경제적 침략에 맞서 스와데시(Swadeshi, 국산품 애용) 운동을 주도했다. 

그는 영국의 기계로 짠 옥양목(Cotton)에 대항하여 물레(Charkha, 실을 잣는 기계)를 돌려 실을 짓는 일을 반복했다. 

물레는 인도의 전통적 면직 산업과 독립의 메시지를 상징했다. 

이는 영국의 산업화와 식민지 경제 시스템에 대한 파업을 주장한 것이었다.


간디: "영국이 인도를 점령한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에게 준 것입니다. 그들은 그들의 힘 때문에 인도에 있는 것이 아니라 우리가 그들을 계속 있게 했기 때문입니다."


3. 소금 행진과 시대의 긴장

1930년 초, 간디는 영국 식민 통치(raj)에 반대하는 시민 불복종 운동을 전개했다. 

민족주의자들은 느린 진전에 좌절했고, 간디는 인도인들에게 raj와의 협력을 중단하고 완전한 독립을 위한 비폭력 캠페인에 동참하도록 설득하고자 했다.

소금 행진(Salt March, 다디 행진)은 이 캠페인의 상징적인 시작이었다. (소금 독점은 영국 정부가 모든 인도인이 이해하고 반대할 수 있는 가장 기본적인 통제 수단이었기 때문에 전략적 중요성이 컸다)


1930년 3월, 간디는 자신의 아슈람(Ashram, 정신적 수행 공동체)에서 240마일(약 400km) 떨어진 바다까지 행진하며 소금 제조와 판매에 대한 정부의 독점을 깨뜨리기로 결정했다. 

행진 후 다른 저항들도 크게 증가했다.

인도인들은 영국산 천을 거부하고, 세금을 내지 않으며, 공무원을 그만두고, 주 산림을 벌채했다. 

이 모든 행위가 정부의 예산과 행정에 타격을 주었다.


소금행진에 나선 간디


이 운동에서 여성들의 역할이 두드러졌다. 

여성들은 소금을 만들어 팔고, 행렬을 지어 행진하며 수천 명이 감옥에 갔고, 심지어 캠페인의 지도자가 되기도 했다. 


여성 지도자: "영국 정부는 인도 여성들로부터 충격을 받았습니다. 우리는 온순하고 온화하며 문맹한 인도 여성들이 아니었습니다. 우리를 온순하고 온화하며 문맹으로 만든 우리 집 벽 안에 남아 있는 것에 만족하지 않았습니다!"


간디는 지속적인 비폭력 불복종 투쟁에 힘입어 1930년 미국 시사주간지 타임(Time)이 선정하는 '올해의 인물'에 선정되기도 했다.


1930년 타임지 올해의 인물


4. 카스트 제도와 암베드카르와의 갈등

간디의 인도 내 활동에서 가장 큰 비판 지점은 카스트 제도(Caste System)에 대한 그의 모호한 태도였다.

간디는 불가촉천민(Untouchables, 사회 계급 최하층)에 대한 사회적 차별에는 분노하고, 그들을 하리잔(Harijan, 신의 아들)이라고 부르는 운동을 펼쳤다. 

그는 불가촉천민과의 교류를 받아들이고, 심지어 불가촉천민이 이주해 오는 문제로 싸움이 나자 스스로 그들의 마을로 들어가 살겠다고 말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는 결코 카스트 제도 자체를 부정하지 않았으며, 오히려 카스트 제도를 떠받치고 있는 힌두교를 옹호하는 데 일생을 보냈다. 

그는 직업 세습 제도가 유지되는 전통 사회를 이상향으로 인식하여, 카스트의 차별은 완화하되, 바르나(Varna, 힌두교의 직업 세습)의 직업 세습은 유지하려 했다.


이에 대해 빔라오 람지 암베드카르(Bhimrao Ramji Ambedkar, 불가촉천민 출신으로 인도 헌법의 아버지로 불리는 인권 운동가)는 강력하게 비판했다. 

암베드카르는 카스트 제도의 가장 큰 족쇄인 이 제도를 없애려 하지 않는 간디의 태도를 비판하며, 불가촉천민들을 달리트(Dalit, 억압받는 자)로 부르고 카스트 제도 폐지 운동을 전개했다.


암베드카르는 런던정경대학교와 컬럼비아 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받은 엘리트였으며, 불가촉천민의 분리선거와 권익증진을 요구했으나, 간디의 반대 단식 투쟁으로 인해 좌절되었다.


암베드카르: "마하트마 간디는 불가촉천민을 온정주의적인 대상으로 여길 뿐입니다! 그는 힌두교 보수 세력의 눈치를 보아 카스트 철폐 운동의 수위를 조절하고 있습니다. 카스트 제도를 옹호하려는 그의 모호한 태도는 결코 진정한 해방이 될 수 없습니다!"


간디는 암베드카르의 운동과 불가촉천민들의 불교 개종(1956년 암베드카르 주도)을 힌두교 사회의 분열을 야기하는 부정적인 활동으로 인식했다. (간디는 통일 인도라는 정치적 목적 달성을 위해 인도에서 가장 큰 통합 구심점인 힌두교를 내세울 수밖에 없었고, 카스트 문제를 섣불리 건드렸다가는 독립운동 자체가 분열될 위험을 느꼈다)


암베드카르


5. 성윤리의 모순

간디의 만년에는 그의 성인(聖人) 이미지와 상반되는 도덕적 추문과 부적절한 사생활이 알려지면서 강력한 비판의 대상이 되었다.

간디는 평생 금욕을 맹세했지만, 환갑이 넘어서도 끊이지 않는 몽정으로 고통받았다고 한다. 

그는 이를 속죄하기 위해 "성욕 실험"이라는 기이한 행보를 보였다는 논쟁이 있다.


이 실험은 여러 아가씨와 함께 나체로 잠을 자는 의식이었다. 

그는 개인 비서의 여동생, 어린 소녀, 심지어 자신의 증손녀뻘 되는 친족인 마누 간디(Manu Gandhi)에게까지 알몸으로 동침하여 체온으로 몸을 덥혀줄 것을 부탁했다. 

간디는 이것이 성욕을 제어하는 훈련이나 욕구에 대한 승화 의식이었다고 주장했다. 

서양의 회춘법인 슈나미티즘(Sunamitism)을 신봉했기 때문이라는 주장도 있다.


작가 월리엄 샤일러(William Shirer)는 이를 두고 '여성의 질투 심리를 교묘하게 이용한 바람둥이'라고 강하게 비판했다. 

그의 조카가 자신의 아내 대신 자신이 잠자리를 덥혀주겠다고 제안했을 때, 간디는 "그러면 내가 금욕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없다"며 화를 냈다는 일화는, 이 행위가 단순히 체온 유지를 넘어선 '순결 시험'의 성격이 강했음을 보여준다.


또한, 간디는 아내 카스투르바가 폐에 염증이 생겨 고통받을 때 영국인 의사의 항생제 주사를 거부하여 아내가 사망에 이르게 했으나, 며칠 뒤 자신이 학질이나 장염에 걸렸을 때에는 영국인 의사의 진료와 시술을 부탁하여 일구이언(一丘二言) 또는 이중적 태도로 비판을 받았다.


분열과 순교 (1947-1948)

1. 독립과 피의 분열

지속적인 비폭력 불복종 투쟁 끝에, 인도는 1947년 8월 15일 드디어 영국으로부터 독립을 쟁취하였다. 

간디는 이 승리를 이끈 국부(國父) 또는 마하트마(Mahatma, 위대한 영혼)로 불리게 되었다.


하지만 독립은 더 큰 시련을 가져왔다. 

종교 갈등(힌두교와 이슬람교)으로 인해 인도는 둘로 쪼개져 파키스탄(Pakistan, 이슬람교 기반의 국가)과 인도(India, 힌두교 중심의 국가)로 분리되는 비극을 겪었다.

(인도는 역사적으로 하나의 통일된 국가를 가진 역사가 전무했으며, 종교, 계급, 지역 간 갈등이 내전 직전 수준이었다. 무함마드 알리 진나(Muhammad Ali Jinnah, 파키스탄의 국부)를 위시한 이슬람 지도자들은 힌두교 중심의 통일 인도를 거부했다. 간디는 분열을 반대했지만, 종교 평등이나 소수 종교 보호 제도에는 소극적이었다는 과실이 지적되며, 이 분열을 가속화했다는 비판도 있다)


종교 갈등으로 수만 명이 학살당하는 격변 속에서, 간디는 크게 좌절했지만 끝까지 민족의 화합과 일치를 위해 헌신했다. 

그는 이슬람교도와 힌두교도의 화해를 위해 노력했는데, 이는 극단적 보수파 힌두교 신도들에게는 "이슬람교도를 편드는 것"처럼 비쳤다.


2. 최후의 비극: 아, 라마여 (암살)

1948년 1월 30일, 간디는 뉴델리(New Delhi, 인도 수도)에서 열린 저녁 기도회에 참석했다. 

그를 기다리고 있던 것은 같은 민족의 손이었다.

카키색 군복을 입은 한 남자, 나투람 고드세(Nathuram Godse, 힌두교 극단주의 단체 '국민 의용단' 소속 청년)가 군중 사이를 천천히 지나가는 간디 앞에 불쑥 나타났다. (논쟁)

고드세는 정중히 인사를 한 후 간디의 발을 만지려 몸을 숙였다. 

간디 역시 두 손을 모으고 인사를 받았다.


고드세: "(정중히 고개를 숙이며) 마하트마여, 이 나라의 화합을 위해 당신이 가야 할 길이 아닌 곳으로 가고 있습니다." 

간디: "(두 손을 모아 응답하며) 나를 막지 마십시오. 나는 진리를 따를 뿐입니다."


그러나 고드세는 다시 몸을 일으켜 세움과 동시에 품속에서 권총을 빼들었다. 

그는 힌두교 극단주의에 소속되어 있었으며, 간디가 민족화합, 특히 이슬람과의 화해를 위해 노력하는 것에 불만을 품고 있었다.


총성이 울리고, 간디는 고드세가 쏜 흉탄에 쓰러졌다. 

그의 마지막 말은 "아, 라마여(He Ram)"였다는 전승이 있다. 

비폭력 불복종 민족주의자는 결국 극단의 비판자 내지는 혐오자가 쏜 흉탄에 스러졌다. 

독립운동에서는 결실을 보았으나, 민족화합 노력에서는 끝내 결실을 보지 못했고, 같은 민족의 손에 암살당했다는 점에서 한국의 김구(Kim Gu, 한국의 독립운동가) 사례와 비견되기도 한다.


간디 암살


3. 후대의 평가와 문화적 유산

간디는 인도에서 국부 또는 '위대한 영혼(Mahatma)'으로 불리며 존경받고 있다. 

그의 생일인 10월 2일은 인도의 국경일인 '간디 자얀티'이자 전 세계적으로 '국제 비폭력의 날'로 기념된다. 

현재 인도 루피(Rupee, 인도 화폐 단위) 지폐 대부분에는 그의 초상이 그려져 있다.


1999년 4월 18일, 미국의 《뉴욕 타임스(New York Times)》는 지난 1천 년간 최고의 혁명으로 영국의 식민 통치에 저항한 간디의 비폭력 무저항 운동을 선정했다. 

그의 비폭력 불복종(Non-violent Non-cooperation) 투쟁 방식은 이전에는 볼 수 없었던 새로운 개념이었으며, 전 세계 피억압 민족과 인권 운동에 지대한 영향을 끼쳤다. 

마틴 루터 킹(Martin Luther King Jr., 미국의 흑인 인권 운동가), 제임스 로슨(James Lawson), 넬슨 만델라(Nelson Mandela, 남아공의 반(反)인종차별 운동가) 등 역사적 인물들은 간디를 롤모델로 삼아 불의에 맞섰고 역사의 진보를 이뤄냈다. 


킹 목사는 간디의 비폭력 저항주의를 통해 사회개혁을 위한 방법론을 발견했으며, 그의 사티아그라하를 예수의 사랑(아가페)을 사회적 역량으로 승화시킨 것으로 평가했다.

간디의 자치 사상은 전근대적이라는 비판을 받았으나, 70만 마을공화국 연방이라는 그의 비전은 풀뿌리 민주주의(Grassroots Democracy)와 경제적 자급자족을 실현하는 이상 사회를 꿈꾼 것으로, 1993년 인도 헌법 개정 시에 채택되었고 현대 민주주의의 훌륭한 모델로 평가받는다.


21세기에 들어서 간디의 도덕적인 치부들이 드러나면서 '성자'라는 평가에서 다소 하락했지만, 여전히 위대한 인권 운동가로 평가받는다. 

그러나 오늘날 일각에서는 그의 부정적인 사생활과 인종차별적 측면을 근거로 총체적인 재평가가 이뤄져야 한다는 목소리도 제기된다.


간디는 노동자들에게 자본가를 위해 봉사하는 지식인이라는 비판을 받기도 했다. (1917년 파업권 없는 노동조합 결성 지원, 1935년 가족임금제도 수용으로 여성/노인 노동자 해고 유발) 

또한, 그의 성윤리적 논란(어린 소녀들과의 나체 동침)은 그의 금욕주의적 이상과 모순되는 행위로 강력히 비판받는다.


후대의 평가는 간디를 무조건적인 숭배의 대상에서 벗어나, 그가 실수가 잦고 약점과 모순이 많았으나, 언제나 그것을 솔직하게 드러내고 고치려고 노력했으며, 철저히 자기성찰하는 인간이었다는 점에 주목해야 한다고 강조한다.


간디의 삶은 현대 문화에도 깊은 영향을 미쳤다. 

미국의 제44대 대통령 버락 오바마(Barack Obama)는 간디를 존경한다고 밝혔으며, 영국의 음악가 존 레논(John Lennon)도 비폭력에 대한 견해를 피력할 때 간디를 언급했다.


간디는 다음과 같은 경구를 남기며 현대 사회에 경종을 울렸다. 

"눈에는 눈을 고집한다면 모든 세상의 눈이 멀게 될 것이다." (폭력의 연쇄를 경계하는 이 말은 고대 법전 '함무라비 법전'에서 유래된 '눈에는 눈, 이에는 이'라는 속담의 한계를 지적하며, 현대사회에서 폭력의 악순환을 끊어야 할 당위성을 강조하는 강력한 비폭력의 어원적 근거가 되었다). 

그는 잡지 《젊은 인도》에서 인도가 피해야 할 7대 사회악으로 원칙 없는 정치, 인간성 없는 과학, 양심 없는 쾌락, 노동 없는 부, 도덕성 없는 상거래, 개성을 존중하지 않는 교육, 희생 없는 신앙을 꼽았는데, 이는 현재 사회에도 통용되는 동서고금의 진리로 평가된다.


역사를 통해 얻을 수 있는 교훈과 배울 점

마하트마 간디의 일대기는 한 인간이 지닌 숭고한 이상과 피할 수 없는 시대적/인간적 한계가 어떻게 공존하는지를 보여주는 드라마입니다. 

그의 삶에서 우리는 다음의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진정한 비폭력은 강자의 선택이다: 간디의 비폭력(사티아그라하)은 약자가 폭력을 사용할 수 없어서 체념하는 '수동적 저항'이 아니라, 충분히 폭력을 사용할 수 있음에도 진리를 위해 고난을 기꺼이 받아들이는 강한 의지의 저항이었습니다. 우리는 일상생활 속 불의에 맞설 때, 비겁함으로 침묵하는 것이 아니라, 진리를 붙들고 용기 있게 비폭력적으로 저항할 줄 아는 내면의 강인함을 길러야 합니다.

2. 이상을 실현하는 과정의 모순과 자기성찰: 간디는 인종차별 문제(흑인에 대한 편견)나 가족과의 관계 (아들에 대한 엄격함, 이중적인 성윤리 논란)에서 많은 과실과 모순을 보였습니다. 그러나 그의 생애는 이러한 실수를 솔직하게 드러내고 끊임없이 자기성찰을 통해 대의에 헌신하고자 했다는 점에서 존경받아야 합니다. 인간은 그 누구도 완벽할 수 없으며, 우리 역시 자신의 그림자를 정직하게 인정하고 고치려는 치열한 노력을 멈춰서는 안 됩니다.

3. 대의와 인간적 요소의 복잡한 충돌: 간디의 비폭력 원칙과 사회 개혁 의지에도 불구하고, 그는 노동자 권익 약화나 카스트 제도 철폐 문제에서 현실 정치의 이해관계(힌두교 보수 세력의 눈치)와 타협하는 모습을 보이기도 했습니다. 그의 비극적인 암살은 독립 이후에도 종교적 통합이라는 숭고한 목표를 추구했으나, 결국 극단적인 이념 갈등(힌두교 극단주의)에 희생되었다는 사실을 보여줍니다. 대의를 추구할 때조차도 인간적 갈등과 정치적 복잡성이 상호작용한 결과를 깊이 이해하고, 평화는 그저 얻어지는 것이 아님을 깨달아야 합니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논문·공개 아카이브를 바탕으로 한 서사적 재구성입니다. 

사실은 그대로 따르되, 장면·대사·내면 묘사는 몰입을 위한 각색이 포함됩니다. 

논쟁적 쟁점과 불확실한 전승은 본문에 (논쟁)/(전승)으로 표기합니다. 

인물에 대한 비판·옹호는 균형 있게 다루되, 현대적 차별 용어는 맥락 설명과 함께 최소화했습니다.


Born in 1869, M.K. Gandhi forged nonviolent resistance in South Africa, then led India’s mass Satyagraha—boycotts, the 1930 Salt March, and village-centered “Swaraj.” 

He inspired millions yet drew criticism for early racial views, caste ambivalence, and personal austerity experiments; with Ambedkar he struck the 1932 Poona Pact.

Assassinated in 1948, Gandhi’s methods shaped civil-rights leaders worldwide, leaving a complex legacy of moral courage and human contradiction.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