운명에 버려진 아이
기원전 8세기, 이탈리아 중부의 라티움 평야.
로마 건국의 모체가 된 도시 알바 롱가(Alba Longa, 로마 남동쪽의 고대 도시)에는 비극의 그림자가 드리워 있었다.
왕위는 형 누미토르(Numitor, 알바 롱가의 정통 왕)에게 있었으나, 야심에 찬 동생 아물리우스(Amulius, 왕위를 찬탈한 숙부)가 반란을 일으켜 형을 폐위하고 스스로 왕위에 올랐다.
아물리우스는 자신의 왕좌를 영원히 공고히 하기 위해 누미토르의 딸 레아 실비아(Rhea Silvia, 로물루스와 레무스의 어머니)를 강제로 베스타 신전(Temple of Vesta, 화덕의 여신 베스타를 모시는 신전)의 무녀(Vestal Virgin, 순결을 지켜야 하는 사제)로 만들어버렸다.
자식을 낳지 못하게 하려는 잔인한 술수였다.
하지만 운명은 인간의 계획대로 흐르지 않았다. (전승)
어느 날 밤, 레아 실비아는 마르스(Mars, 전쟁의 신)와 사랑을 나누었고, 쌍둥이 아들 로물루스와 레무스(Remus, 로물루스의 쌍둥이 동생)를 낳았다.
이 소식을 들은 아물리우스는 분노와 공포에 휩싸였다.
신의 피를 물려받은 쌍둥이 형제는 곧 자신의 왕권을 위협할 ‘저주’임을 알았기 때문이다.
쌍둥이는 곧바로 바구니에 담겨 티베르 강(Tiber River, 로마를 관통하는 강)에 버려졌다.
급류에 휩쓸려가던 바구니는 팔라티노 언덕(Palatine Hill, 로마 일곱 언덕 중 하나이자 로마의 발상지) 근처의 무화과나무 아래에 걸렸다.
그 무화과나무는 ‘피쿠스 루미날리스(Ficus Ruminalis)’라 불렸다.
그때, 목마름에 지친 암컷 늑대(Lupa, 로마의 상징) 한 마리가 나타나 젖을 물렸다.
전승의 ‘루파(lupa)’는 실제 암늑대일 수도, 당시 매춘부를 뜻하던 속어의 은유일 수도 있다. 후대에는 파우스툴루스와 아카 라렌티아(Acca Larentia) 부부가 양육했다는 전승도 전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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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카피톨리나 늑대가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젖을 먹이는 장면 | Capitoline she-wolf suckling Romulus and Remus" Public Domain(데이터: Musei Capitolini,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피 묻은 유년과 출생의 비밀
늑대의 보살핌을 받던 형제는 곧 양치기 파우스툴루스(Faustulus, 쌍둥이의 양아버지)에게 발견되어 길러졌다.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다는 (신화) 이 독특한 성장 배경은 로물루스와 레무스에게 야생의 투지와 거친 생존력을 심어주었다.
그들은 또래 아이들보다 강했고, 부하들을 이끄는 리더십을 본능적으로 갖추고 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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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우스툴루스가 바구니 속 쌍둥이를 발견 | Shepherd finds the twins in a basket" Public Domain(Google Art Project/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로물루스는 형이었지만, 레무스는 활달하고 충동적이었다.
둘은 어린 시절부터 갈등했다.
양치기 무리의 대장이 누구인지, 사냥감을 누가 가질 것인지.
이 사소한 경쟁은 이미 그들의 피 속에 깊이 새겨진 형제 간의 대립(Fratricide)을 예고하는 그림자였다.
청년이 된 쌍둥이는 양치기 무리를 규합하여 도적 떼와 맞서 싸웠다.
그러던 중 레무스가 알바 롱가 왕궁 경비병들과의 충돌로 붙잡혀 폐위된 외할아버지 누미토르 앞에 서게 된다.
파우스툴루스는 마침내 쌍둥이에게 출생의 비밀을 고백하고, 티베르 강에서 건져 올린 아기 바구니를 증거로 제시했다.
자신들이 왕가의 피를 이은 마르스의 아들임을 알게 된 로물루스의 눈은 차갑게 빛났다.
그들의 첫 번째 목표는 명확했다.
복수.
로물루스와 레무스는 자신들을 버린 아물리우스에게 반기를 들었고, 결국 숙부를 죽여 외할아버지 누미토르에게 왕좌를 되돌려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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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무화과나무(피쿠스 루미날리스) 아래서 발견되는 쌍둥이 | Twins found beneath the Ficus Ruminalis" Public Domain(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새로운 도시, 새로운 대립
복수는 끝났으나, 쌍둥이는 알바 롱가에 남지 않았다.
그들의 야망은 더 컸다.
누미토르의 왕국 대신, 자신들만의 새로운 도시를 세우고자 했다.
이들이 선택한 곳은 자신들이 늑대의 젖을 먹고 자랐던 티베르 강 하류의 일곱 언덕이었다.
이곳은 당시에는 습지가 많고 비옥하지 않았지만, 강을 끼고 있어 상업적 잠재력이 있었고, 방어에 용이했다. (논쟁)
역사학자들은 로마가 실제로 버려진 땅에 도망자, 노예, 가난한 사람들이 모여 세워진 ‘해방구’였을 가능성을 제기하기도 한다.
로물루스는 도시의 중심지로 팔라티노 언덕을, 레무스는 아벤티노 언덕(Aventine Hill, 로마의 일곱 언덕 중 하나)을 주장하며 다시 대립했다.
누가 왕이 될 것인가? 누가 도시의 이름을 명명할 것인가? 두 형제는 신의 뜻을 묻는 조점(Augury, 새의 비행을 보고 미래를 점치는 행위)으로 승자를 가리기로 합의했다.
새를 관찰하는 시간, 레무스가 먼저 맹금류(조점의 길조) 여섯 마리를 보았다.
승리를 확신하는 레무스.
하지만 곧이어 로물루스는 열두 마리를 보았다고 주장했다. (논쟁)
레무스 지지자들은 ‘먼저 본 레무스가 승자’라고, 로물루스 지지자들은 ‘더 많은 수를 본 로물루스가 신의 더 큰 축복을 받았다’고 맞섰다.
해석의 충돌이 곧 폭발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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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조점: 로물루스가 맹금류의 징조를 받는 장면 | Augury: Romulus observing omens" CC0/Public Domain(The Metropolitan Museum of Art →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로물루스는 팔라티노 언덕 주위에 신성한 경계선인 포메리움(Pomerium, 로마 성벽 내외의 신성한 경계)을 쟁기로 파기 시작했다.
로물루스는 흰 수소와 암소가 끄는 쟁기로 포메리움을 그었고, 그 도랑을 뛰어넘는 행위는 도시 질서에 대한 중대한 도전으로 여겨졌다.
이는 ‘도시가 탄생했다’는 선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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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포메리움 개념 도해: 로마의 신성 경계 | Diagram of the Roman pomerium (sacred boundary)" Public Domain(Wikimedia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형제의 피와 도시의 저주
레무스는 로물루스의 경계 긋기를 비웃었다.
그는 “네놈이 세운 성벽이 고작 이거냐!”라고 조롱하며, 로물루스가 판 도랑 위를 일부러 뛰어넘었다(Jump Over the Ditch).
그 순간, 피가 튀었다.
전승에 따르면 로물루스(혹은 그의 측근 첼레르)가 레무스를 내려쳤다.
동생은 그 자리에서 피를 흘리며 쓰러졌다.
“내 도시에 감히 들어올 자는 그 누구라도, 심지어 내 동생이라도, 이와 같은 운명을 맞이할 것이다!”
로물루스의 이 차가운 외침은 새로운 도시 로마(Roma, 로물루스의 이름을 딴 도시)의 첫 번째 법이자, 형제 살해(Fratricide)라는 끔찍한 원죄였다.
로마는 피(Blood) 위에서 태어났고, 그 피는 건국자의 동생의 것이었다.
로물루스는 고독했다.
왕좌를 얻었으나, 그는 유일한 혈육을 잃었다.
그의 왕국은 영광과 동시에 저주(Curse)를 안고 시작된 셈이었다.
도망자들의 왕국
왕이 된 로물루스는 현실적인 문제에 직면했다.
도시의 기반이 될 인구가 절대적으로 부족했던 것이다.
그를 따르는 무리는 대부분 알바 롱가에서 도망쳐 온 하층민, 타 부족의 노예, 그리고 빚을 지고 쫓기는 자들인 도망자(Outlaws)들이었다.
로마는 강했지만, 여자가 없었다.
로물루스는 강한 로마를 만들기 위해 인근 부족들의 정통성을 가진 여자들이 필요했다.
그는 주변 부족들에게 사절을 보내 결혼 동맹을 제안했다.
“우리와 피를 섞어, 새로운 로마의 미래를 함께 만들자!”
하지만 주변 부족들은 로마를 ‘도망자들의 소굴(Asylum)’이라며 경멸했고, 로물루스의 제안을 모욕적으로 거절했다.
가장 강력했던 이웃 부족은 사비니족(Sabines, 로마 북동쪽에 거주했던 강력한 이탈리아 토착 부족)이었다.
사비니족의 족장 티투스 타티우스(Titus Tatius, 사비니족의 왕)는 로마 사절을 빈손으로 돌려보냈다.
로물루스는 평화적인 방법이 통하지 않자, 극단적이고 잔인한 방법을 택하기로 결심한다.
로물루스가 연 ‘아시룸(asylum)’은 카피톨리눔 기슭의 숲 사이에 있었다는 전승이 남아 있다.
도시는 이미 난민의 숨구멍이었고, 이제 그는 혈통을 늘릴 충격 처방을 준비했다.
사비니 여인 강탈 사건의 긴장감
로물루스는 사비니족을 비롯한 이웃 부족들에게 콘수스(Consus)에게 바치는 축제 ‘콘수알리아(Consualia)’를 개최한다며 초청장을 보냈다.
기원전 750년경, 로마는 외지인들로 북적였다.
사비니족 남자들은 로마인들을 경멸하며 경계를 늦추지 않았지만, 화려한 축제와 술에 취해 긴장이 풀어지기 시작했다.
바로 그때, 로물루스가 미리 약속된 신호를 보냈다.
로마의 젊은이들이 일제히 무장하고 달려들어 축제에 참가한 사비니족의 처녀들을 강제로 납치하기 시작했다.
사비니 여인의 강탈(Rape of the Sabine Women)이라 불리는 이 사건은 로마의 건국사에서 가장 잔혹하고 드라마틱한 장면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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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콘수알리아 축제 중 사비니 여인 강탈 | Poussin: The Rape of the Sabine Women" Public Domain(Louvre/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연회장은 순식간에 아수라장으로 변했다.
사비니족 남자들은 무방비 상태였고, 로마인들은 조직적으로 움직였다.
로물루스는 납치된 처녀들에게 이렇게 선언했다.
“두려워 말라! 우리는 너희를 노예로 삼으려는 것이 아니다. 너희는 이제 로마의 정식 아내(Wives)가 될 것이며, 너희가 낳을 아이들은 로마의 시민권을 가질 것이다!”
그는 이 잔혹한 행위가 ‘국가 건설을 위한 피할 수 없는 선택’이었음을 강조하며, 납치된 여인들의 분노를 가라앉히고자 했다.
로물루스 자신도 사비니 출신의 헤르실리아(Hersilia, 로물루스의 아내)를 아내로 맞이했다.
이는 정략적인 선택이었으나, 로물루스가 이 사건에 대해 최소한의 책임을 지려는 의도를 보여준다.
타티우스의 복수와 전쟁의 종결
딸과 자매를 잃은 사비니족의 분노는 하늘을 찔렀다.
족장 티투스 타티우스는 곧바로 로마에 선전 포고를 했고, 대규모 병력을 이끌고 로마로 진격했다.
전쟁은 로마의 카피톨리노 언덕(Capitoline Hill, 로마의 주요 요새이자 신전이 있던 언덕)을 중심으로 치열하게 전개되었다.
초기 접전에서 사비니족은 용맹하게 싸웠고, 로마인들은 수세에 몰렸다.
위기 상황.
그때, 로마의 운명을 바꾼 기적이 일어났다.
납치되었던 사비니 여인들이 아기를 안고 전쟁터 한가운데로 뛰어든 것이다.
“싸움을 멈추시오! 이쪽은 우리 아버지와 오빠, 저쪽은 우리 남편이자 아이들의 아버지! 당신들이 승리하든 패배하든, 결국 우리가 잃을 가족뿐이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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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비니 여인들의 중재: 전쟁터로 뛰어든 아내와 딸들 | David: The Intervention of the Sabine Women" Public Domain(Louvre/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여인들은 울부짖으며 남편과 아버지의 무릎을 꿇었다.
이 장면은 로마 역사에서 가장 극적인 휴머니즘의 순간으로 기록된다.
이성적인 협상이 아닌, 가족의 끈끈함이 전쟁을 멈춘 것이다.
공동 통치와 고독한 왕
여인들의 간청과 티투스 타티우스의 현명한 판단으로 전쟁은 종결되었다.
로물루스는 타티우스에게 공동 통치(Co-Rule)를 제안했다.
로마와 사비니족은 하나의 국가가 되었고, 퀴리테스(Quirites, 사비니족이 로마에 통합된 후 붙여진 로마 시민의 이름)라는 이름으로 불리게 되었다.
로마의 인구는 순식간에 두 배로 늘어났다.
로물루스는 왕좌의 절반을 타티우스에게 내주었지만, 이는 로마의 성장에 있어 가장 필수적인 전략적 선택이었다.
로물루스의 위대한 업적은 바로 이 ‘통합의 리더십’이었다.
그는 출신 성분이나 과거를 묻지 않고 모든 도망자와 이방인을 로마 시민으로 받아들였다.
또한, 원로원(Senate, 로마의 자문기관이자 정치 기구)을 창설하여 유력 가문의 수장 100명을 파테르(Pater, 아버지), 즉 원로(Senator)로 임명하여 통치에 참여시켰다.
전승에 따르면 초대 원로원은 100명의 파테레스로 구성되고, 시민은 30개의 쿠리아(Curiae)로 나뉘었다(후대에 증원·개편).
로마 시민을 뜻하는 ‘퀴리테스(Quirites)’는 사비니의 도시 큐레스(Cures) 또는 신 퀴리누스(Quirinus)에서 유래했다는 설이 병존한다.
그러나 5년간의 공동 통치 후, 타티우스는 라비니움(Lavinium)에서 외교 분쟁을 제대로 수습하지 못해 피살되었다는 전승이 전한다. (전승)
로물루스는 다시 로마의 유일한 왕이 되었다.
로물루스는 공동 통치 기간 동안 타티우스를 존중했지만, 내심으로는 ‘왕좌는 두 개일 수 없다’는 신념을 버리지 않았을 것이다.
타티우스의 죽음은 로물루스의 고독한 왕국을 완성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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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사비니 사건의 다른 구도—혼란과 납치의 순간 | Alternate Poussin composition of the Sabine episode" Public Domain(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왕의 독단과 내부의 그림자
유일한 왕이 된 로물루스는 로마의 법과 군사 제도를 완벽하게 정비했다.
그는 강력한 군대를 만들었고, 주변 부족들을 정복하며 로마의 영토를 확장했다.
그는 로마를 단순한 촌락이 아닌, 중앙집권적 왕국(Kingdom)의 형태로 정착시켰다.
하지만 시간이 흐를수록 로물루스의 통치는 독선적으로 변해갔다.
그는 원로원의 자문을 무시하고, 혼자서 모든 결정을 내리는 경우가 잦아졌다.
왕의 절대적인 권력에 대한 불만(Dissatisfaction)이 로마 내부에서 움트기 시작했다.
특히 왕좌의 파트너였던 타티우스의 죽음 이후, 로물루스의 행보는 더욱 고독하고 예측 불가능했다.
로물루스의 실종: 논쟁의 절정
로물루스는 약 37년 동안 로마를 통치했다.
그의 생애의 마지막은 시작만큼이나 극적이었고, 미스터리(Mystery)로 남아있다.
기원전 716년경.
로물루스는 마르스 평야(Campus Martius, 티베르 강변의 광장)에서 군대를 사열하던 중, 갑자기 몰아친 폭풍과 천둥번개 속에서 사라져 버렸다.
(논쟁) 그의 실종에 대한 해석은 극명하게 갈린다.
신화적 해석 (공식 전승): 로물루스는 아버지인 마르스 신에게 불려가 쿼리누스(Quirinus)라는 이름의 신이 되어 하늘로 승천(Ascension)했다는 것이다.
이 해석은 로마 시민들에게 로물루스가 인간을 넘어선 신성한 존재이며, 그가 세운 로마 역시 신의 보호 아래 있음을 확신시켜주었다.
역사적 해석 (비판적 견해): 로물루스가 독단적인 통치로 인해 불만을 품은 원로원 의원들에게 암살당했다는 것이다.
폭풍은 암살의 순간을 가리기 위한 은유였으며, 원로원 의원들은 왕의 시신을 조각내어 외투 속에 숨기고 도망쳤다고 한다.
승천 전승은 로물루스의 신격화로 이어지고, 암살설은 폭풍을 은유로 보며 시신 은닉 모티프를 전한다.
로물루스는 사라졌으나, 그의 유산은 남아 로마를 지배했다.
원로원은 혼란을 수습하고, 다음 왕인 누마 폼필리우스(Numa Pompilius, 로마의 2대 왕)를 선출하여 로마를 종교적, 사회적으로 안정시키는 데 집중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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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쿼리누스상: 로물루스의 신격화 전승 | Quirinus as deified Romulus" CC BY-SA(촬영자 표기: Potupin, Commons) 위키미디어 공용 |
로마의 DNA: 후대의 평가와 영향
로물루스는 진정한 의미의 역사적 인물(Historical Figure)인지에 대한 논쟁은 오늘날까지도 계속되고 있다.
로물루스라는 이름 자체가 ‘로마의 사람’이라는 뜻을 가지므로, 그가 로마의 건국 신화를 합리화하기 위해 후대에 만들어진 어원(Etymology)적 인물일 가능성도 있다.
하지만 중요한 것은 문화적 영향력이다.
로마인들은 로물루스를 ‘최초의 왕’이자 ‘로마 제국의 근본을 닦은 자’로 숭배했다.
칭송의 이유:
개방 정신: 노예와 도망자까지 받아들여 로마를 개방적인 용광로 도시로 만든 선구자적 정신.
제도 창시: 원로원, 쿠리아 등 로마의 정치 및 군사 시스템의 기초를 확립.
투지의 상징: 형제의 피를 흘리면서도 도시를 세운 강렬한 카리스마와 집념.
비판의 지점:
폭력적 건국: 동생 레무스를 살해하고 사비니 여인들을 강탈하는 등 잔혹한 폭력을 기반으로 도시를 세운 원죄(Original Sin).
독재 성향: 통치 말기 원로원과의 갈등과 권력의 독점은 후대 로마인들에게 ‘왕정 타도’의 명분과 교훈을 남겼다.
로물루스는 피와 폭력으로 시작했지만, 법과 제도로 끝맺은 모순적인 인물이었다.
로마의 DNA는 로물루스에게서 물려받은 이 ‘잔혹한 현실주의’와 ‘타협 없는 투쟁 정신’을 바탕으로 1000년 제국을 건설할 수 있었다.
로물루스는 사라졌지만, 그의 피가 묻은 땅, 로마는 영원했다.
이 글은 리비우스 『로마사(Ab Urbe Condita)』, 디오니시오스 『로마 고대사』, 플루타르코스 『영웅전—로물루스』 및 고전 주석서들을 대조해 작성했습니다.
전승과 해석이 갈리는 대목(조점 해석, 레무스 피살 주체, 타티우스의 최후, 로물루스의 승천/암살설)은 병기했고, 지명·의례·제도(포메리움, 아시룸, 원로원·쿠리아, 콘수알리아의 주신 등)는 통설에 맞춰 정리했습니다.
사실 오류나 더 나은 사료 제보를 환영합니다.
확인 즉시 반영하겠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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