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철의 뱀, 혹은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비극적 서사
파괴의 연쇄반응
1954년, 워싱턴 D.C.의 한 비밀 청문회장.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Julius Robert Oppenheimer, 미국의 이론물리학자, 맨해튼 계획의 로스앨러모스 연구소장) 박사는 굳게 닫힌 문 앞에서 기다렸다.
외부의 빛은 차단되었고, 그가 내딛는 한 걸음마다 과거의 메아리가 들려오는 듯했다.
매카시즘 선풍(2차 대전 후 미국을 휩쓴 반공주의 광풍)이 미국 전역을 휩쓸던 시기, 그의 경력 전체를 심판하려는 마녀사냥이 시작된 것이다.
청문회 로저 롭 검사(Roger Robb, 오펜하이머를 몰아붙인 검사)는 마치 그가 소련의 간첩(논쟁)이라도 되는 양 집요하게 질문을 던졌다.
롭 검사: "오펜하이머 박사, 수소폭탄 개발에 반대했던 당신의 '도덕적 고민'이 커진 것은 언제부터였습니까?"
오펜하이머는 잠시 눈을 감았다.
그의 눈앞에는 1945년 7월 16일, 뉴멕시코(New Mexico, 미국 남서부의 주)의 알라모고르도(Alamogordo) 폭격연습장(트리니티 실험 장소)에서 목격했던 지옥의 불꽃이 선명하게 떠올랐다.
"우리는 세상이 다시는 예전 같지 않을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웃는 사람도, 우는 사람도 더러 있었지만, 대다수는 침묵에 잠겼습니다."
그는 힌두교 경전인 《바가바드 기타(Bhagavad-Gita, 오펜하이머가 산스크리트어로 읽었던 경전)》의 한 구절을 떠올렸다.
그 구절을 읊조리며 파멸의 연쇄반응이 시작되었다고 직감했던 그 순간을.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Now I am become Death, the destroyer of worlds)가 되었도다." (이 구절은 오펜하이머가 1965년 NBC와의 인터뷰에서 인용한 것으로, 그의 산스크리트어 스승 아서 라이더의 번역 스타일에 영향을 받았을 가능성이 있다. 일반적인 번역은 '죽음'이 아닌 '시간'으로 번역되기도 한다)
롭 검사: "박사님! 질문에 답하십시오. 우리는 당신이 수소폭탄(핵융합을 이용한 원자폭탄보다 더 강력한 무기) 개발을 반대하면서 국가 정책에 영향을 미치려 했다는 의혹을 조사하고 있습니다!"
오펜하이머: "...우리가 가진 무기가 무엇이 되었든, 결국 그걸 사용하려 할 것이라 확신했을 때부터입니다."
이것이 그의 숙명이었다.
세상을 구하기 위해 세상을 파괴할 수 있는 힘을 해방시킨 과학자.
윤리가 과학을 앞서야 한다는 고독한 믿음을 가졌으나, 이미 통제를 벗어난 과학의 흐름 앞에 무력했던 한 천재의 비극적인 그림자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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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 |
천재의 탄생과 위태로운 열정
1. 뉴욕의 고독한 천재
줄리어스 로버트 오펜하이머는 1904년 4월 22일, 뉴욕(New York)의 부유한 유대인 가정에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율리우스 오펜하이머(Julius Oppenheimer)는 17세에 독일에서 이민 와 양복지 안감 수입업으로 성공한 사업가였고, 어머니는 화가였다.
덕분에 오펜하이머 가문은 반 고흐, 피카소, 르누아르의 그림을 소장할 정도로 막대한 재력을 자랑했다.
그의 어린 시절은 지적으로는 풍요로웠으나 사회적으로는 고독했다.
초·중·고교 내내 항상 1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광물 표본 수집, 물리학, 화학, 문학 등 다양한 분야에 관심을 보였다.
특히 언어 능력은 경이로웠다.
그는 고등학교 시절에 이미 그리스어를 익혀 호메로스와 플라톤의 원전을 읽을 수 있었고, 대학 시절에는 단테의 《신곡》을 원문으로 읽기 위해 이탈리아어를, 인도의 철학서적을 읽기 위해 산스크리트어까지 배웠다.
하지만 그는 친구들과 잘 어울리지 못했고, 운동 신경도 거의 없다시피 했으며, 무슨 일에든 얼굴을 붉히는 내성적인 성격이었다.
친구들 사이에서는 '넋 빠진 놈'이라는 별명까지 있었으며, 14세 때는 여름 캠프에서 친구들의 오해로 발가벗겨진 채 냉동실에 갇혀 하룻밤을 지새우는 잔혹한 경험을 하기도 했다.
이러한 유년 시절의 고립과 정서적 불안정은 훗날 그의 복잡한 인간관계를 형성하는 근간이 되었다.
1925년, 오펜하이머는 하버드 대학교(Harvard University, 미국 매사추세츠 주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명문 사학) 화학과를 3년 만에 최우등으로 조기 졸업했다.
2. 케임브리지에서의 방황과 괴팅겐의 빛
졸업 후, 그는 영국의 케임브리지 대학교(University of Cambridge, 영국 잉글랜드 케임브리지에 위치한 대학) 캐번디시 연구소(Cavendish Laboratory, 물리학 연구소)로 유학을 떠났다.
하지만 화학을 전공한 그가 갑자기 실험물리학(J. J. 톰슨, 러더퍼드 등으로 대표되는 실험 중심의 학풍)에 적응하기란 어려웠다.
그의 천재성이 실험의 반복적인 과정에 갇히자, 그는 신경쇠약과 우울증에 시달렸고, 심지어 지도교수 패트릭 블래킷(Patrick Blackett, 노벨상을 받은 물리학자이자 오펜하이머의 지도교수)의 책상에 독이 든 사과(전승)를 놓아 독살하려 하는 소동을 벌이기도 했다.
이는 그의 내면에 잠재된 심리적 불안정성과 폭력성을 드러내는 충격적인 사건이었다.
다행히 닐스 보어(Niels Bohr, 덴마크의 물리학자, 양자역학의 대가)의 결정적인 조언으로, 오펜하이머는 1926년 독일의 괴팅겐 대학교(Göttingen University, 당시 양자역학 연구의 중심지)로 옮겨 막스 보른(Max Born, 독일의 이론물리학자, 양자역학의 대가) 밑에서 이론 물리학, 특히 양자역학을 공부하게 된다.
그의 재능은 비로소 만개했다.
괴팅겐에는 베르너 하이젠베르크, 볼프강 파울리, 유진 위그너, 엔리코 페르미 등 20세기 물리학을 이끌 젊은 천재들이 모여 있었다.
1926년부터 1929년까지, 오펜하이머는 학위 논문 외에도 16편의 논문을 발표하며 자신감을 되찾았다.
하지만 그의 거만함은 여전했다.
"강의가 자기 마음에 안 들면 교수를 교단에서 끌어내리고 자기가 수업을 하는 기행(전승)을 저지르기도 했다".
이는 그의 뛰어난 능력과 동시에 타인에게 불쾌감을 주는 오만함이라는 양날의 검이었다.
3. 버클리의 교수직과 사생활 논란
1929년, 25세의 나이로 미국에 돌아온 오펜하이머는 캘리포니아 대학교 버클리(UC Berkeley)와 캘리포니아 공과대학교(Caltech) 두 곳에서 교수로 재직하며, 양자역학 및 천체물리학 연구에 매진했다.
처음에는 강의 평판이 좋지 않았지만, 몇 년 지나지 않아 그의 교육적 자질은 급속도로 향상되었다.
그의 카리스마와 열정은 학생들에게 큰 영감을 주었으며, 많은 학생들은 그의 행동과 몸짓을 흉내 내기도 했다.
"옷피(Oppie, 오펜하이머의 애칭)라면 이렇게 생각할 것이다"라는 말이 학생들 사이의 유행어였다.
이 시기, 그는 두 명의 여인과의 관계와 정치적 경향 때문에 훗날 큰 논란에 휩싸이게 된다.
1930년대 중반, 유럽에서 나치즘과 파시즘이 득세하고 은사 막스 보른(Max Born)이 유태인이라는 이유로 추방당하자, 이전에 정치에 무지했던 오펜하이머의 관심은 급격히 좌익계로 기울었다.
그는 추방된 유태인 물리학자들을 돕고 스페인 내전(1936~1939년, 스페인 공화파와 프랑코의 내셔널리스트 간의 내전) 참전 군인들을 적극적으로 지원했으며, 교직원 노동조합 활동에도 적극 참여했다.
그의 첫사랑이자 연인이었던 진 태틀록(Jean Tatlock, 정신과 의사, 미국 공산당원)은 그의 좌익 성향을 강화시키는 데 결정적인 영향을 미쳤다.
진은 급진적인 정치 활동을 서슴지 않았던 공산당원이었으며, 이들과의 관계는 훗날 매카시 선풍(McCarthyism, 1950년대 미국의 반공주의 운동) 시대에 오펜하이머의 발목을 잡는 핵심적인 '스캔들'이 되었다.
1940년, 오펜하이머는 캐서린 '키티' 해리슨(Katharine 'Kitty' Harrison, 공산당원의 아내였던 여성, 생물학자)과 결혼했다.
키티 역시 이전에 공산당원이었던 전 남편 조 달렛(Joe A. Dallet, 스페인 내전 중 사망한 공산주의측 정치위원)을 둔 과거가 있었다.
이러한 사생활의 복잡함과 좌익과의 연관성은 전시 기밀 프로젝트 책임자로서 그의 충성심에 대한 의문을 제기하기 충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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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미국의 생물학자 캐서린 키티 해리슨 |
4. 시대의 부름: 윤리 vs. 가능성
1939년 8월, 알베르트 아인슈타인(Albert Einstein, 상대성 이론으로 유명한 유태계 독일 물리학자)의 서명을 받은 실라르드 레오(Szilard Leo, 헝가리계 미국 물리학자)와 유진 위그너(Eugene Wigner, 헝가리계 미국 물리학자)의 편지가 프랭클린 D. 루스벨트(Franklin D. Roosevelt, 당시 미국 대통령) 대통령에게 전달되었다.
편지는 "엄청난 파괴력을 지닌 새로운 유형의 폭탄"의 개발 가능성을 경고하며 우라늄광 비축을 촉구했다.
당시의 사회적 배경은 독일이 먼저 핵무기 개발(독일 핵에너지 프로젝트)에 성공할지도 모른다는 극심한 공포였다.
이러한 정치관계가 과학적 도전을 촉발시켰다.
맨해튼 계획(Manhattan Project, 제2차 세계 대전 중 미국이 주도한 핵폭탄 개발 프로그램)이 막 시작될 무렵, 오펜하이머를 비롯한 과학자들의 관심은 "이 폭탄을 사용해도 되는가?" 가 아니라, "얼마나 빨리 만들 수 있는가?" 였다.
이는 천재적인 인간의 본성이기도 했다.
오펜하이머는 이 도전을 선택했다.
그에게는 '내가 할 수 있을까?'라는 순수한 호기심을 해소하기 위한 도전이자, 나치(Nazi, 독일의 국가사회주의 정당)가 인류를 파멸시키기 전에 그들을 저지해야 한다는 깊은 애국심(유대인으로서의 배경도 작용)과 사명감이 있었다.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의 탄생
1. 그로브스 장군과의 만남
1942년 9월, 맨해튼 계획의 총괄 책임자로 임명된 레슬리 그로브스(Leslie Groves, 미 육군 소장, 맨해튼 계획의 군사 부문 총지휘관)는 원자폭탄 설계 및 제작을 담당할 핵심 연구소의 소장으로 오펜하이머를 찾았다.
그로브스 장군은 오펜하이머의 좌익 경력과 공산주의자 친구들 때문에 그의 충성심을 의심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비범한 천재성은 이러한 정치적 우려를 압도했다.
그로브스는 이미 프로젝트를 시작하기 전부터 오펜하이머를 내정하고 있었다(전승).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의 이력에 감탄하며 물었다.
그로브스: "왜 노벨상이 없으시죠? (Why don't you have a Nobel Prize?)" (오펜하이머는 노벨상급 업적을 여럿 남겼으나, 마지막까지 매진하지 않는 기질과 핵무기 개발의 윤리적 문제 때문에 수상하지 못했다.)
오펜하이머: "왜 별이 없으십니까? (Why aren't you a general?)"
그로브스: "이걸로 하나 달 겁니다. (They're making me one for this.)" (실제 그로브스는 펜타곤 건설 공로로 이미 준장 진급 최우선 후보였다.)
오펜하이머: "저에게도 같은 행운이 있겠군요. (Perhaps I'll have the same luck.)"
그로브스: "폭탄 개발로 노벨상을? (The Nobel Prize for making a bomb?)"
오펜하이머는 기지를 발휘해 받아쳤다.
"알프레드 노벨은 다이너마이트(Alfred Nobel invented dynamite)를 발명했습니다." (노벨상) 이 대화는 그로브스에게 오펜하이머의 비범함과 통찰력을 각인시켰다.
그로브스는 오펜하이머에게 "그는 프로젝트에 절대적으로 필수적입니다"라는 편지를 써서, 그의 과거 논란에도 불구하고 보안 인가를 신속하게 처리하도록 지시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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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레슬리 그로브스 |
2. 로스앨러모스의 탄생: '더 힐'의 비밀
오펜하이머는 연구소 부지로 뉴멕시코(New Mexico)의 인구 밀집 지역에서 멀리 떨어진 알부퀘크 근처, 자신이 목장(별장)을 가지고 있던 로스앨러모스(Los Alamos, 뉴멕시코 산악 지대에 위치한 비밀 연구 도시)를 추천했다.
이 목장은 그가 친구들과 장거리 승마를 즐기던 장소였다.
1943년, 로스앨러모스는 보안 유지를 위해 Y 구역 또는 더 힐(The Hill) 이라 불리는 비밀 연구 도시로 건설되었다.
건설비용만 30만 달러가 소요된 이 도시는 극도의 기밀(엄정한 기밀 유지) 속에 원자폭탄의 설계 및 제작을 담당하게 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이 거대한 프로젝트의 책임자가 되었다.
그는 군대식 규율이 과학자들의 창의성에 방해가 된다고 판단하여, 상부와의 협의 끝에 연구소를 군의 위탁을 받아 UC 버클리가 운영하는 민간 연구 기관으로 바꾸었다.
동료이자 친구인 이지도어 라비(Isidor Isaac Rabi, 오펜하이머의 절친한 동료 물리학자)는 그에게 군복 대신 양복을 입으라고 조언하며, "그들은 우리가 과학자이기 때문에 필요한 거야. 그러니 자네 본분에 맞게 차려입어." 라고 충고했다.
오펜하이머는 이 조언을 받아들였고, 그의 양복과 중절모 차림은 로스앨러모스 시절 그의 상징적인 이미지가 되었다.
맨해튼 계획의 거대한 규모: 맨해튼 계획은 총 20억 달러(2020년 화폐가치로 약 230억 달러)가 투입되었고, 최대 13만 명의 인력이 동원된 인류 역사상 가장 거대한 과학적 도박이었다.
이 비용의 90%는 공장 건설(테네시주 오크리지의 Y-12, K-25, S-50 설비와 워싱턴주 핸포드의 반응로 등)과 핵분열 원료 확보에 사용되었고, 오펜하이머가 이끈 로스앨러모스(무기 개발)에는 약 10%의 예산만 사용되었다.
3. 기술적 도전과 인간적 갈등
원자폭탄은 두 종류가 개발되었다.
우라늄-235를 사용하는 포신형 (리틀 보이)과 플루토늄을 사용하는 내폭형 (팻 맨).
• 우라늄 농축의 난관 : 자연 우라늄 중 0.7%만 차지하는 우라늄-235를 농축하는 것은 매우 어려운 작업이었다.
이 동위원소 분리 과정은 오크리지(Oak Ridge, 테네시주의 기밀 지역)의 거대한 공장들(Y-12의 전자기적 분리, K-25의 기체 확산, S-50의 열영동)에서 이루어졌다.
특히 Y-12 시설에서는 고등학교를 졸업한 여성들(Calutron Girls)이 훈련을 받아 칼루트론(Calutron, 로렌스의 입자가속기에서 유래된 전자기적 분리 설비 이름)을 운전하는 단순 업무에 투입되었는데, 이들은 자신이 무엇을 만들고 있는지 알지 못했다.
이는 과학 기술이 거대 국가 프로젝트 아래 비밀리에 진행되면서 발생하는 정보 독점과 노동 소외의 단면을 보여준다.
• 플루토늄 문제와 내폭형의 혁신: 핸포드(Hanford, 워싱턴주)의 반응로에서 생성된 플루토늄-239에는 예상치 못한 플루토늄-240이 섞여 있었다.
플루토늄-240은 너무 빠른 핵 연쇄 반응 속도를 보여 포신형 설계(리틀 보이 방식)로는 조기 폭발하여 최대 위력을 낼 수 없었다.
이는 초기 핵물리학자들이 플루토늄의 특성을 충분히 예측하지 못한 계산 착오였다.
이 문제 때문에 오펜하이머는 1944년 7월, 모든 연구진의 노력을 세스 네더메이어(Seth Neddermeyer)가 제안했던 내폭형(Implosion, 고폭탄의 압력으로 핵물질을 압축시켜 임계 질량에 도달시키는 방식) 설계에 집중시키기로 결정했다.
내폭형 폭탄인 '팻 맨(Fat Man)'은 훨씬 복잡하여 폰 노이만(John von Neumann, 20세기 최고의 수학자이자 물리학자)이 개발한 폭축 렌즈(Explosive Lens, 충격파를 균일하게 집중시키는 장치) 메커니즘을 사용해야 했다.
오펜하이머는 에드워드 텔러(Edward Teller, 헝가리계 미국 물리학자, 수소폭탄의 아버지)와도 갈등을 겪었다.
텔러는 원자폭탄의 폭발을 기폭제로 사용하여 수소 핵융합을 일으키는 소위 '슈퍼 원자 폭탄' (훗날 수소 폭탄으로 실현됨) 계획에 집착했다.
텔러: "박사님, 이 폭탄이 충분히 강력할까요? 더 큰 폭탄을 만들 수 있지 않습니까?"
오펜하이머는 단호하게 말했다.
"이론은 어디까지나 이론일 뿐이야. (Theory takes you only so far.)" (오펜하이머는 이 말을 통해 이론에 갇혀 현실을 외면하는 과학적 태도를 비판했다.)
오펜하이머와 그로브스는 핵분열(원자폭탄)에 집중하기로 했으나, 텔러는 폭발 실험 중에 원자폭탄이 대기의 질소핵 핵융합 반응을 유도하여 지구 전체를 파멸시킬 가능성(논쟁)이 있다는 위험한 계산을 제기했다.
한스 베테(Hans Bethe, 이론 물리학자, 이론 부서장)가 이 확률이 '0에 가깝다'고 계산했지만, 그로브스 장군은 불안감을 감추지 못했다.
그로브스: "확률이 얼마나 됩니까?"
오펜하이머: "0에 가깝습니다. ('Near Zero'?)"
그로브스: "'0'이라면 안심이 되겠지. ("Zero" will be nice.)"
이 대화는 인류 파멸의 가능성 앞에서조차 명확한 '0'을 요구하는 군 지도부와, '이론적 가능성'을 배제할 수 없는 과학자의 딜레마를 보여준다.
불타는 세상의 파괴자
1. 트리니티 실험: 신의 불을 훔치다
내폭형 핵폭탄은 구조가 복잡하여 실제로 작동할지 검증이 필수적이었다.
1945년 7월 16일, 작전명 트리니티(Trinity, 삼위일체)라는 인류 최초의 핵폭발 실험이 알라모고르도에서 진행되었다.
오펜하이머는 이 작전명을 자신이 즐겨 읽던 영국 시인 존 던(John Donne)의 '성스러운 소네트 14' 첫 구절에서 따왔지만, 힌두교의 삼위일체(브라흐마-시바-비슈누)의 이미지도 가미되었다.
실험 전날 밤, 30m 철탑 위에 실험용 폭탄인 '가제트(Gadget, 장치)'가 조립되었다.
폭발 직후, 폭심지 주변의 고체 케이블을 따라 에너지가 빠르게 전도되어 화구(Fireball)에서 불꽃이 솟아오르는 '로프 트릭(rope trick)' 효과 등 경이로운 현상들이 관측되었다.
폭발력은 20킬로톤(kt)의 TNT에 맞먹었으며, 직경 76m의 크레이터(분화구)를 만들었고, 지표는 고열로 트리니타이트(Trinitite, 유리질)라 불리는 녹색 유리로 변했다.
연구원들은 기쁨과 환호에 휩싸여 춤추고, 에드워드 텔러는 미소를 지었으며, 리처드 파인만(Richard Feynman, 물리학자, 훗날 노벨상 수상자)은 봉고를 연주하며 기뻐했다.
하지만 오펜하이머의 표정은 굳어 있었다.
그는 자신이 통제할 수 없는 무언가가 해방되었음을 직감했고, 그때 그의 입에서 나온 구절이 바로 "나는 이제 죽음이요, 세상의 파괴자가 되었도다." 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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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트리니티 실험 |
2.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실전 투하의 비극
트리니티 실험이 성공하자, 핵폭탄의 사용은 정치인들의 손에 넘어갔다.
해리 S. 트루먼(Harry S. Truman, 루스벨트 사망 후 취임한 미국 대통령) 대통령은 일본에 핵폭탄 투하를 결정했다.
트루먼의 관점에서 이 문제는 윤리적 혹은 정의의 문제가 아니었다.
그가 핵폭탄을 투하하지 않으면 10만 명의 미국 병사가 희생되고, 투하하면 22만 명의 일본인이 죽는 상황에서, 그는 고민할 것도 없이 '투하'를 선택했다.
당장은 자기 국민을 살린다는 명분이었다.
이 결정 뒤에는 전쟁을 신속히 종결시키고, 전후 소련과의 냉전(Cold War) 구도에서 미국의 우위를 점하려는 정치적 계산도 깔려 있었다.
맨해튼 계획의 일부 과학자들은 "정말 사용해도 되나?"라는 고민을 했고, 실라르드 레오는 핵폭탄 사용을 막기 위해 청원서를 제출했지만, 오펜하이머는 그 청원서에 서명하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폭탄 투하만이 전쟁을 확실히 끝내 인명 피해를 줄일 수 있는 방향이라고 믿었으며, 미 의회에 자신의 의견을 피력했다.
"우리가 안 해도 다른 누군가가 어차피 할 거면 내가 먼저 하자는 게 낫다는 논리는 물리치기 버겁습니다."
1945년 8월 6일, 우라늄-235 폭탄인 리틀 보이(Little Boy, 포신형 핵폭탄)가 히로시마(Hiroshima, 일본의 주요 군사 집결지)에 투하되었다.
8월 9일에는 플루토늄 폭탄인 팻 맨(Fat Man, 내폭형 핵폭탄)이 나가사키(Nagasaki, 일본의 대체 폭격지)에 투하되었다.
리틀 보이는 13kt, 팻 맨은 21kt의 위력을 보였으며, 두 도시에서 수십만 명의 사상자가 발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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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히로시마-왼쪽 / 나가사키-오른쪽 원폭 투하 |
도시 선정 논란 (전승/논쟁): 교토(Kyoto, 일본의 역사적 도시)는 폭격지에서 제외되었는데, 헨리 L. 스팀슨(Henry L. Stimson, 당시 전쟁부 장관)의 의견이 컸다.
"교토는 역사적으로 유서가 깊은 곳이라 제외했습니다. 아내와 신혼여행을 다녀온 곳이기도 하고요." (전승/야사)
히로시마와 나가사키 투하의 필요성에 대해서는 역사학자들 사이에 강력한 논쟁이 남아있다.
하워드 진은 미국의 원폭 투하가 도덕적 정당성이 없으며, 전후 소련과의 경쟁 우위를 점하기 위함이었다고 비판했다.
핵무기가 궁극적으로 인류에게 가져온 것은 평화가 아닌, 핵 군비 경쟁과 상호확증파괴(MAD, Mutually Assured Destruction)의 공포였다.
3. 트루먼과의 비극적인 만남
원폭 투하 후, 오펜하이머는 로스앨러모스 연구원들 앞에서 연설했다.
그는 자랑스러움을 표현하면서도, "우리가 이 폭탄을 독일에게도 쓰지 못했다는 게 아쉬울 뿐입니다." 라고 말했다.
하지만 영화에서는 이 연설 중에 오펜하이머가 환상(벽이 떨리고, 연구원의 피부가 벗겨져 잿더미가 되고, 불에 탄 시체를 밟는 환영)을 경험하는 장면이 삽입되어, 그의 심리적 고통을 극적으로 표현한다.
얼마 후, 오펜하이머는 백악관에서 트루먼 대통령과 독대했다.
죄책감에 시달리던 오펜하이머는 트루먼에게 고백했다.
오펜하이머: "대통령님, 제 손에는 피가 묻어있는 것 같습니다. (Mr. President, I feel I have blood on my hands.)"
트루먼은 즉시 정색하며 불쾌감을 드러냈다.
그는 오펜하이머를 격렬하게 비난했다.
트루먼: "히로시마와 나가사키의 사람들이 누가 폭탄을 만들었는지 신경이나 쓸 것 같소? 그들에게 중요한 건 누가 떨어트렸느냐요. 내가 했지. 히로시마는 당신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소."
트루먼의 관점에서, 국가의 최고 통수권자로서 수십만 명의 죽음을 명령한 자신보다, 일개 제조자에 불과한 오펜하이머가 죄책감을 운운하는 것은 위선적이거나 무책임해 보였을 수 있다.
오펜하이머가 집무실을 나가자 트루먼은 뒤에서 이렇게 말했다.
트루먼: "징징대는 애는 여기 들이지 마! (Don't let that crybaby back in here!)" (전승) (트루먼은 오펜하이머에게 "그녀석은 내 손에 묻은 피의 절반도 손에 묻히지 않았어!"라고 화를 냈다고도 전해진다.)
오펜하이머는 트루먼이 여전히 핵의 현실을 파악하지 못하고, 소련은 절대 핵폭탄을 만들지 못할 것이라고 단언하는 모습에 절망했다.
이 갈등은 과학적 통찰을 가진 지식인과 현실 정치를 수행하는 권력자 사이의 근본적인 간극을 보여주었다.
순교자와 파멸의 연쇄반응
1. 수소폭탄 반대와 매카시즘의 희생양
전후, 오펜하이머는 핵무기의 파괴력에 대한 도덕적 고민(ethical dilemma)을 심각하게 인식하고, 핵무기 관리와 국제 안보 논의에 기여하며 국제적 핵 무기 제한 협정의 기반을 마련하려 노력했다.
그는 무차별 살상력이 있는 대형 핵무기(수소폭탄)의 개발에 극렬히 반대했다.
수소폭탄 개발 계획은 오펜하이머의 일반 자문 위원회(General Advisory Committee, AEC의 자문 기구) 의장 지위를 이용한 방해로 지연되었다.
하지만 1951년 텔러와 스타니스와프 울람(Stanisław Ulam, 폴란드계 미국 수학자, 수소폭탄 설계에 기여)이 성공적인 새로운 설계를 제시하면서, 오펜하이머는 더 이상 막을 수 없게 되었다.
텔러는 "누군가가 더 큰 폭탄을 만들 때까지는 (Until somebody builds a bigger bomb)" 평화가 오지 않을 것이라고 경고했었는데, 이는 자기실현적 예언이 되었다.
오펜하이머의 H-bomb 반대와 과거 좌익 인사와의 연관성은 그를 미국 정부의 미운털이 박히게 했다.
특히 소련이 1949년 원자폭탄 개발에 성공하자, 반핵주의자였던 오펜하이머는 공산주의자라는 의심을 받으며 사회적으로 궁지에 몰렸다.
2. 청문회의 부당함과 몰락
1953년 12월, 오펜하이머는 비밀 정보 접근 권한을 빼앗겼고, 1954년 악명 높은 오펜하이머 청문회(Oppenheimer security clearance hearing)가 열렸다.
이 청문회는 루이스 스트로스(Lewis Strauss, 미국 원자력 위원회 위원장)를 비롯한 정적들이 오펜하이머를 핵 정책 논의에서 배제시키기 위한 정치적 수단이었다.
청문회는 겉으로는 오펜하이머의 '성격에 근본적인 결함'이 있다고 주장했지만, 이는 오펜하이머가 핵 정책에 관한 공공 논의에서 발휘하는 신빙성을 떨어뜨리려는 정치적 욕심과 더 관련이 깊었다.
청문회 과정에서 수많은 부조리가 발생했다.
• 첫째, 인사 보안 위원회는 오펜하이머의 보안 인가 취소를 주장하는 변호인단(롭과 롤랜더)의 도움을 받아 사건을 검토했는데, 이는 AEC(미국 원자력 위원회)의 보안 인가 절차를 명백히 위반한, 일방적 의사교환이었다. 오펜하이머의 변호인은 이 논의에 참석할 수 없었다.
• 둘째, AEC 총책임자는 오펜하이머의 변호인에게 최종 결정의 근거가 된 서신 내용을 공개하지 않았고, 변호인이 이에 대해 반론할 기회를 주지 않았다.
오펜하이머는 결국 보안 인가를 취소당하며 모든 공직에서 쫓겨났다.
이는 충성스러운 한 미국인에게 "상당한 불의가 자행된" 사건이었다.
아내 키티(Kitty Oppenheimer)는 청문회 이후 남편에게 격분했다.
키티: "그렇게 혹독한 벌을 묵묵히 견디면 세상이 용서할 거 같았어? 용서 안 할 거야."
키티는 남편이 부당한 공격에 맞서지 않고 순응하는 모습에 분노했다.
오펜하이머의 몰락은 가족에게도 비극적인 그림자를 드리웠다.
그의 딸 캐서린 "토니" 오펜하이머 실버(Katherine "Toni" Oppenheimer Silver)는 아버지에 대한 오래된 혐의 때문에 유엔 통역사 보안 승인이 거부되었고, 결국 1977년 가족 해변 집에서 스스로 목숨을 끊었다.
오펜하이머의 친구 아인슈타인(Einstein)은 이 몰락을 보며 충고했다.
아인슈타인: "자네는 마치 변심한 여자를 쫓아다니는 남자처럼 미국 정부를 짝사랑하고 있어. ... 자네는 조국을 위해 큰 일을 했는데 이게 그 대가라면 아마 자네는 이 나라를 떠나야 하겠어."
오펜하이머: "젠장, 전 이 나라를 사랑한다고요."
아인슈타인은 오펜하이머를 향해 냉소적이면서도 연민이 담긴 충고를 남겼다.
"그리고 언젠가, 그들이 자네를 충분히 벌하고 나면, 자네를 불러 연어와 감자 샐러드를 제공하고, 연설을 하고, 상도 수여하겠지. 자네 등을 토닥이며 자네는 모든 것을 용서받았다고 할 걸세. 다만 기억하게. 그것은 자네를 위한 게 아니야. 자신들을 위한 것이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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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아인슈타인과 오펜하이머 |
3. 말년과 후대의 평가
오펜하이머는 공직에서 물러난 후에도 프린스턴 고등연구소(Institute for Advanced Study, IAS) 소장으로 재직하며 연구에 매진했다.
그는 연구 분야와 관계없이 자유로운 토론과 연구를 지향하는 풍토를 조성하는 데 힘썼다.
그는 1963년 엔리코 페르미 상(Enrico Fermi Award)을 수상하며, 어느 정도 명예를 회복했지만, 이미 담배를 연발했던 골초였던 그는 1965년 두경부암(담배 때문에 발병) 진단을 받고, 1967년 6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의 재는 아내 키티에 의해 버진아일랜드(Virgin Islands)의 세인트 존 비치 하우스가 보이는 바다에 뿌려졌다.
최후의 대화
오펜하이머: "알버트, 제가 그 계산 문제를 들고 찾아갔을 때 우린 말했죠. 어쩌면 파괴의 연쇄반응이 시작될 수도 있다고."
아인슈타인: "똑똑히 기억하고 있지. 그게 왜?"
오펜하이머: "시작된 것 같아서요. (I believe we did.)" (이는 핵분열 연쇄반응의 이론적 가능성에서, 현실적인 핵전쟁으로 인한 인류 파멸의 연쇄반응에 대한 깨달음으로 확장된다.)
4. 문화적 영향과 명예 회복
오펜하이머의 삶과 업적은 문화와 역사에 지대한 영향을 미쳤다.
그는 과학에 윤리가 앞서야 한다는 믿음을 상징하는 인물로 평가되며, 핵무기 관리와 국제 안보 논의에 큰 영향을 미쳤다.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2023년 영화 《오펜하이머》는 그의 비극적 생애를 조명하며 흥행과 비평 모두에서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 영화는 그의 평전 《아메리칸 프로메테우스》를 원작으로 하는데, 이는 그가 인류에게 불(핵에너지)을 가져다준 그리스 신화 속 프로메테우스(Prometheus)처럼 추앙받으면서도, 그 대가로 고통받은 비극적 영웅임을 암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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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리스토퍼 놀란 감독의 영화 오펜하이머 |
명예 회복
68년이 지난 2022년 12월 16일, 미국 에너지부(Department of Energy, AEC의 후신) 장관 제니퍼 그랜홈(Jennifer M. Granholm)은 1954년 AEC의 보안 인가 취소 결정이 AEC 자체 규정을 위반한 '결함 프로세스'였음을 인정하고, 해당 결정을 철회했다.
비로소 오펜하이머는 사후에 완전히 명예를 회복했다.
역사의 교훈
J. 로버트 오펜하이머의 일생은 지성과 권력, 윤리적 책임 사이의 영원한 투쟁을 보여준다.
오펜하이머는 나치를 막기 위해 원자폭탄을 개발하는 데 주력했으나, 일단 개발된 과학 기술은 그의 윤리적 통제를 벗어나 무기 확산이라는 인류 파멸의 연쇄반응을 초래했다.
과학자는 '할 수 있느냐'를 넘어 '해도 되는가'를 고민해야 하며, 윤리가 과학에 앞서야 한다는 믿음이 현실에서 얼마나 중요한 제동 장치인지 보여준다.
그의 몰락은 핵무기라는 신세계의 도래를 이해하고 국제적 통제 체제를 주장했던 과학자의 선견지명이 정적들의 정치적 이익과 결합된 매카시즘 광풍 앞에서 어떻게 쉽게 파괴될 수 있는지를 보여준다.
진실과 애국심(충성심은 결코 심각하게 의심받지 않았음)은 부당한 절차와 정치적 욕심 앞에서 무력했다.
오펜하이머의 시대에는 제1차 세계 대전이 '모든 전쟁을 끝낼 전쟁(The war to end all wars)'으로 불렸던 냉소적 표현이 있었다.
핵무기 역시 모든 전쟁을 끝낼 평화를 가져올 것이라는 (논쟁) 희망이 있었으나, 결국 더 큰 폭탄(수소폭탄)의 경쟁을 낳았다.
오펜하이머의 비극은 인류가 할 수 있는 것을 안 하고 놔두지 않는다는 인간의 본성과 기술 발전의 비가역성에 대한 쓰라린 증언이며, 오늘날 인공지능(AI) 등 새로운 파괴적 기술을 다루는 우리에게도 동일한 윤리적 질문을 던진다.
과학적 진보는 불가피할지라도, 그 힘을 어떻게 사용할지에 대한 윤리적 합의 없이는 인류는 스스로 만든 파멸의 연쇄반응으로부터 벗어날 수 없다.
오펜하이머가 남긴 교훈은, 우리가 아무리 똑똑해도 '드러나는 뱀에 대한 준비 없이도 돌을 들 수 있다'는 오만함을 버려야 한다는 것이다.
이 글은 신뢰 가능한 사료·학술서·공개 아카이브(평전 《American Prometheus》, AEC/AEC 후신 DOE 공개 기록, 2차 문헌 등)를 토대로 하되, 독자의 몰입을 위해 장면·대사·심리를 소설적으로 재구성했습니다.
사실과 해석이 갈리는 대목은 (전승)/(논쟁)으로 표기했으며, 최초 등장 인물·지명·용어는 한영 병기 원칙을 따랐습니다.
회고·증언 의존 인용은 정확성을 위해 [전승] 처리했습니다.
J. Robert Oppenheimer, a brilliant yet conflicted physicist, led Los Alamos and the Trinity test, enabling Hiroshima and Nagasaki.
His postwar conscience clashed with power—he opposed the H-bomb, then lost his clearance during the McCarthy era after a flawed 1954 hearing.
Later honored with the Fermi Award, he died in 1967.
In 2022, the DOE vacated the 1954 decision.
His story warns that scientific power without ethical control breeds peri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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