삼우당 문익점, 목숨을 건 혁명과 최후의 충절 (擴張版)
1. 시대의 고통, 선비의 맹세 (1329년 ~ 1363년)
고려 충숙왕 16년, 1329년.
문익점(文益漸)은 경상도 강성현(江城縣, 현 산청)의 향리(鄕吏) 가문에서 태어났다.
그의 가문은 중앙 귀족과는 거리가 멀었지만, 그 덕에 그는 중앙의 탐욕 대신 민초들의 삶을 가까이서 보며 자랐다.
그의 눈에 비친 고려는 병든 거목과 같았다.
권문세족(權門世族)은 토지를 겸병하고, 해마다 북쪽의 홍건적과 남쪽의 왜구는 살점을 뜯어냈다.
가장 견딜 수 없는 고통은 매해 겨울 찾아왔다.
얇고 거친 삼베나 마포(麻布) 옷은 겨울의 매서운 추위를 막지 못했다.
수많은 아이와 노인이 동사(凍死)하는 비극이 연례행사였다.
어린 문익점은 다짐했다.
‘이 고통을 끝내야 한다.’
그는 이색(李穡)의 문하에 들어가 학문을 익혔고, 정몽주(鄭夢周) 등 당대 최고의 지성과 교유하며 신진사대부(新進士大夫)의 길을 걸었다.
1360년(공민왕 9년) 과거에 급제한 후, 그는 전의주부(典儀注簿)를 시작으로 중앙 정계의 요직을 밟았다.
그는 스스로 삼우당(三憂堂)이라는 호를 지었다.
백성을 근심하고(憂民), 나라를 근심하며(憂國), 학문의 미진함을 근심한다(憂學).
그의 모든 행동은 이 세 가지 근심, 특히 백성의 고통을 덜겠다는 일념에서 비롯되었다.
정치적 격랑 속에서도 그의 눈은 언제나 백성의 얇은 옷깃에 머물러 있었다.
|
| 문익점 |
2. 북원(北元), 운명을 훔치다 (1363년)
1363년(공민왕 12년) 가을, 문익점은 정사(正使) 이공수(李公遂)를 따라 외교 사절단 서장관(書狀官)으로 원나라 수도로 파견되었다.
북원으로 향하는 긴 여정 내내, 그의 눈은 고려와는 완전히 다른 풍경에 고정되었다.
원나라 백성들은 혹한 속에서도 몸집이 부해 보이지 않는, 가볍고 따뜻한 옷을 입고 있었다.
바로 목화(木花) 솜으로 짠 무명(木綿)이었다.
이 목화가 고려 백성의 겨울을 바꿀 수 있는 유일한 열쇠임을 그는 직감했다.
그러나 목화의 씨앗 유출은 국가의 근간을 흔드는 대역죄로 다스려졌다. (전승)
원나라는 목화를 단순한 작물이 아닌, 제국을 유지하는 중요한 군사 및 경제 전략 물자로 취급하고 있었다.
문익점은 자신의 외교관 지위를 이용해 조용히 목화 씨앗을 수소문했다.
그가 어렵게 구해낸 것은 귀하게 여겨지는 씨앗 열 톨이었다.
고작 열 톨의 씨앗이었지만, 그것은 문익점의 목숨값보다 더 무거운 희망이었다.
귀국길, 압록강 국경 검문소.
원나라 관원의 눈초리가 매서웠다.
그들은 고려 사절단이 금지 물품을 밀반입하는지 샅샅이 뒤졌다.
문익점은 침묵 속에서 자신이 늘 지니고 다니던 붓대(筆筒)를 꽉 쥐었다.
그는 이미 붓대의 속을 파내고 씨앗 열 톨을 넣어 밀봉한 상태였다. (전승)
“이것은 무엇이냐?”
관원이 붓대를 가리켰다.
문익점은 최대한 평온한 목소리로 답했다.
“나리의 공무를 기록하는 서장관의 붓통입니다. 선비에게는 생명과 같은 것이지요.”
붓대는 단순한 필기도구가 아닌, 선비의 정신을 상징하는 물건이었다.
관원은 붓대를 이리저리 살피더니, 결국 대수롭지 않게 넘겼다.
그 순간, 문익점은 붓대를 쥐고 있던 손에 힘이 풀리는 것을 느꼈다.
그는 죽음을 넘기고, 고려의 운명을 품에 안고 돌아왔다.
1364년 초의 일이었다.
3. 좌절의 3년과 노비의 지혜 (1364년 ~ 1367년)
문익점은 귀국 직후, 관직을 잠시 내려놓고 고향인 강성현의 장인 정천익(鄭天益)의 사저로 향했다.
그는 목숨을 걸고 가져온 씨앗 열 톨을 정성껏 밭에 심었다.
첫해, 씨앗은 싹을 틔우지 못하고 흙 속에서 썩어버렸다.
둘째 해, 그는 흙을 바꿔가며 방법을 달리했으나, 씨앗이 싹을 틔워도 며칠을 버티지 못하고 얼어 죽었다.
고려의 기후는 목화가 자라기에는 너무도 척박했던 것이다.
주변에서는 그의 '객기'와 '헛된 욕심'에 대한 비웃음이 쏟아졌다.
"원나라 씨앗이 고려 땅에서 자랄 리 만무하다."
문익점은 절망했다.
자신의 목숨을 건 도박이 이대로 허사가 되는가? 그의 우민(憂民) 정신이 무너지는 듯했다.
결국 그는 권위와 계급을 초월하는 결단을 내렸다.
그는 장인의 집에서 농사일을 도맡아 하던 노비 홍순(洪順)을 찾아갔다. (전승)
홍순은 이름 없는 노비였으나, 누구보다 땅과 씨앗의 이치를 꿰뚫고 있는 진정한 농사꾼이었다.
문익점은 자신의 실패와 좌절을 솔직하게 털어놓았다.
홍순은 씨앗을 조심스레 만져보더니 문익점의 문제점을 정확히 짚어냈다.
“나리, 이 씨앗은 껍질이 지나치게 단단합니다. 차가운 땅에서는 힘이 없어 싹을 틔우지 못하지요. 이를 따뜻한 물에 불려(최아, 催芽) 싹을 낸 뒤에 심어야 합니다. 그리고 냉기를 피할 수 있는 온상(溫床)에서 길러야 합니다.”
문익점은 홍순의 통찰력에 무릎을 쳤다.
그는 홍순을 자신의 스승처럼 대우하며, 그의 지시에 따라 셋째 해인 1367년, 마지막 남은 씨앗들을 다시 심었다.
마침내! 강성현의 밭에서 목화는 하얀 꽃을 피웠고, 그 뒤를 이어 탐스러운 솜뭉치, 다래(목화 열매)가 터져 나왔다.
4. 무명 시대의 개막: 기술의 시스템을 만들다 (1367년 ~ 1392년)
목화 재배의 성공은 절반의 완성일 뿐이었다.
씨앗을 손으로 일일이 분리하고 솜을 실로 잣는 노동은 너무 비효율적이었다.
대량 생산을 위해서는 도구 혁명이 필수였다.
문익점은 다시금 원나라의 기술을 연구하여 두 가지 핵심 도구의 제작법을 들여왔다.
씨아(綿輪, 솜틀): 솜에서 씨앗을 분리하는 도구.
물레: 분리된 솜을 실로 자아내는(방적) 도구.
그는 이 도구들의 제작법을 홍순과 함께 밤낮으로 연구하여 고려의 재료와 환경에 맞게 개량했다.
특히 문익점은 홍순에게 제면(製綿) 기술을 전수받았고, 홍순은 그 기술을 문익점과 함께 발전시켰다.
씨아와 물레의 제작법은 곧 고향을 넘어 전국으로 빠르게 퍼져나갔다.
무명옷이 백성들의 의복을 완전히 바꿔 놓았다.
마침내 고려 백성들은 따뜻한 겨울을 맞이하게 된 것이다.
문익점은 이 공로로 백성들에게 '목화 할아버지', '따뜻한 옷을 선물한 은인'이라 불리며 살아있는 신화가 되었다.
그는 목화 혁명 이후에도 조정으로 복귀하여 활발히 활동했다.
1374년에는 대사성(大司成, 종3품)을 거쳐 최고 정2품 관직인 판사공정사(判司空正事)에까지 올랐다.
그러나 그의 강직한 선비 정신은 변하지 않아, 권문세족의 전횡을 비판하는 상소를 올리며 정치적 싸움을 멈추지 않았다.
5. 고려의 충신, 최후의 맹세 (1392년 이후)
문익점의 삶의 절정은 곧 고려의 최후와 맞물렸다.
그는 우왕(禑王), 창왕(昌王), 공양왕(恭讓王)의 혼란기에도 꿋꿋이 자리를 지켰다.
그러나 1392년, 그의 동지였던 이성계가 역성 혁명(易姓革命)을 일으켜 조선을 건국하자, 문익점은 단호한 결정을 내렸다.
불사이군(不事二君).
두 임금을 섬기지 않는다는 선비의 굳은 의리였다.
이성계는 백성을 구원한 문익점의 명망을 알았기에, 거듭 사람을 보내 회유하고 높은 관직을 제안했다.
"나리는 백성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 새 왕조에 힘을 보태주십시오. 새로운 나라에서 그 뜻을 펼치셔야 합니다."
문익점은 낡은 관복을 벗어 던지며 답했다.
"나의 근심은 백성이나, 나의 충절은 고려에 닿아 있소. 내가 평생 품었던 것은 백성을 살리는 씨앗이었지, 벼슬을 위한 야망이 아니었소."
그는 모든 관직을 버리고 개성 근처 두문동(杜門洞)으로 들어가 은거했다.
그는 정몽주의 아들 정종성 등 고려의 충신 72명과 함께 두문동에 문을 닫고 세상과의 인연을 끊었다.
이들이 바로 두문동 72현(七十二賢)이다.
문익점은 고향 강성현으로 돌아와 조용히 학문에만 매진하다가, 조선 태조 7년인 1398년, 70세의 나이로 눈을 감았다.
그는 정치적으로는 역사의 패자로 남았을지언정, 백성의 마음속에서는 따뜻한 옷을 선물한 구원자이자, 시대의 고통에 맞선 위대한 혁명가로 영원히 기억되었다.
조선 조정은 그의 공을 기려 훗날 문성공(文成公)이라는 시호를 내렸다.
|
| 대구 달성군에 위치한 문익점 동상 |
이 글은 사료와 연구를 바탕으로 문익점의 생애를 재구성하되, 장면·대사·심리 묘사를 소설적으로 각색한 서사형 글입니다.
연도·지명·관직·인물 관계 등은 알려진 사실에 최대한 맞추었으며, 불확실한 부분이나 전해 내려오는 이야기들은 (전승) 표기로, 학계의 견해가 갈리는 대목은 (논쟁) 표기로 구분했습니다.
역사 속 한 인물을 흑백으로 단정하기보다는, 혁신가이자 충신이었던 문익점의 여러 얼굴을 입체적으로 이해하는 데 도움을 주는 것을 목표로 합니다.
Mun Ik-jeom, a late Goryeo scholar-official, risked his life to smuggle cotton seeds from Yuan China, hiding them in a bamboo writing brush.
After years of crop failure he listened to the insight of a slave farmer, succeeded in cultivating cotton and spreading ginning and spinning tools, giving Koreans warm cotton cloth.
Loyal to Goryeo, he refused to serve the new Joseon dynasty and died in seclusion.
.jpg)



댓글 쓰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