혁명의 붉은 별, 마오쩌둥 (毛澤東)
1부: 혁명의 씨앗
격동의 시대 (1893년~1927년)
19세기 말, 청나라 (淸나라)의 쇠퇴가 완연하던 시대.
중국 대륙은 봉건적 질곡과 제국주의 (帝國主義) 열강의 침탈 속에서 고통받고 있었다.
마오쩌둥의 삶은 바로 이 혼란의 폭풍우 속에서 시작되었다.
1. 소년, 붉은 고추를 먹다
1893년 12월 26일, 마오쩌둥 (毛澤東)은 후난성 (湖南省, 중국 중남부의 성) 샹탄현 (湘潭縣) 소산충 (韶山沖)의 부유한 농가에서 태어났다.
그의 집안은 원래 명문 호족이었으나 몰락했고, 아버지 마오이창 (毛貽昌, 농부이자 곡물상)이 농업과 곡물상을 통해 다시 재산을 모아 부농 (富農)이 되면서 풍족한 환경에서 성장했다.
그는 유모와 하인을 두었을 정도였다.
어린 마오쩌둥은 7세 때 마을 서당에 들어가 유교 경전을 익혔으나, 보수적인 아버지와는 끊임없이 갈등했다.
아버지는 그가 문서를 기록하고 계산하는 정도의 교육만 받기를 원했으나, 마오는 상급 학교 진학을 꿈꿨다.
1905년, 12세가 되던 해, 마오는 아버지의 강요로 학업을 중단하고 농장에서 일하게 되었다.
농사일의 고단함 속에서도 그는 독학을 멈추지 않았고, 청나라를 이민족의 침략자라 여기는 민족주의적, 반청 (反淸) 사상을 은연중에 품었다.
“아버님, 저는 이 좁은 농토에 갇혀 있기 싫습니다! 더 넓은 세상의 지식을 배워야 합니다!”
“이창 (貽昌)아, 공부는 글 쓰고 계산할 줄만 알면 그만이다. 상투적인 말은 집어치우고 땀이나 흘려라!”
결국 마오는 부친의 강요에 의해 정해진 조혼 (早婚)을 거부하고 집을 떠나 둥산 고등소학교 (縣立東山高等小學校)에 입학했다.
그의 첫 번째 아내였던 뤄이슈 (羅一秀, 1889년생)와는 1907년에 결혼했으나, 마오는 뤄이슈를 아내로 여긴 적이 없다고 주장했으며, 둘 사이에 자녀는 없었다.
이는 마오의 생애 초반, 봉건적 인습에 대한 강한 거부감을 보여주는 일화다.
그는 창사 (長沙)의 상향 중학교 (湘鄉中學校) 등으로 전학하며 학업을 이어갔고, 학교에서 역사책과 소설을 탐독하며 반청 활동가들의 소식에 귀 기울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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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인민공화국 초대 주석 마오쩌둥 |
2. 베이징, 사상의 싹을 띄우다
1911년, 신해혁명 (辛亥革命)이 터지자 마오는 즉시 혁명군에 가담하여 후난성 혁명군 소속 사병으로 6개월간 복무했다.
혁명 이후 복학한 그는 1913년 후난 성립 제1사범학교 (湖南省立第一師範學校)에 입학했고, 여기서 그의 인생을 바꿀 스승을 만난다.
그의 스승은 영국 유학파 출신 교사 양창지 (楊昌濟)였다.
양창지는 중국의 봉건 사상을 비판하며 마오에게 큰 영향을 주었고, 마오는 동료 학생들과 개혁 성향의 ‘신민학회 (新民學會)’를 조직했다.
이 신민학회 출신들은 훗날 후난성 혁명 지식인의 모태가 된다.
1918년, 사범학교를 졸업한 마오는 스승 양창지를 따라 베이징 (北京)으로 향했다.
양창지는 베이징 대학 (北京大學)의 교수가 되었고, 그의 추천과 리다자오 (李大釗, 중국 공산당 창립자 중 한 명)와의 교분 덕분에 마오는 베이징 대학 도서관의 사서보 (司書補, 보조 사서)로 일하게 되었다.
베이징에서 마오는 천두슈 (陳獨秀, 공산주의 사상가이자 중국 공산당 초대 지도자), 리다자오 같은 당대 지식인들의 강의를 접하며 마르크스-레닌주의 (Marxism-Leninism) 사상을 본격적으로 접한다.
이 시기의 학습이 훗날 마오 사상의 기초를 다지게 된다.
마오쩌둥은 초기에는 아나키즘 (Anarchism) 사상가 표트르 크로포트킨의 영향을 많이 받았으며, 공산당 가담 전에는 "나는 무정부주의자"라고 할 정도였다.
이는 훗날 대약진 운동 시기 인민공사 (人民公社) 제도에 아나코 콜렉티비즘 (무정부 집산주의)적인 방식이 나타나는 사상적 뿌리가 된다.
1919년, 베르사유 조약에 항의하는 5·4 운동이 터지자, 마오는 창사에서 학생, 상인, 노동자들의 연대 단체를 조직하여 항일 시위를 주도했다.
또한, 그는 언론에 글을 발표하며 러시아 혁명을 찬양하고 전 세계에 '홍위병' (紅衛兵) 의 창설을 촉구하는 글을 쓰기도 했다. (전승)
이 ‘홍위병’이라는 단어는 훗날 문화대혁명 (文化大革命)의 광기를 이끌 대중 운동 조직의 상징이 된다.
1920년 고향으로 돌아와 양창지의 딸이자 동급생이었던 양카이후이 (楊開慧)와 결혼했다.
양카이후이는 마오의 혁명 운동을 헌신적으로 도왔다.
마오는 안정된 생활 속에서 마르크스주의에 심취했고, 1921년 7월 상하이 (上海)에서 열린 중국 공산당 제1차 전당대회에 참석하여 회의 서기를 맡았다.
이때 참석한 멤버 중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때까지 공산당에 남아있었던 사람은 마오와 둥비우 (董必武) 두 사람뿐이었다.
3. 농민에게서 혁명의 동력을 찾다
1923년, 공산당 (共産黨)은 항일 (抗日) 연대를 위해 국민당 (國民黨, 장제스가 이끄는 세력)과 손잡는 제1차 국공 합작 (國共合作)을 추진했고, 마오는 국민당 중앙후보집행위원 및 선전부장 대리 등을 겸임하며 활동했다.
이 시기 마오의 사상이 결정적으로 분화되기 시작했다.
그는 후난성에서 농민운동의 동향을 관찰한 뒤 《후난 농민운동고찰보고 (湖南農民運動考察報告)》 를 발표하며 농민의 혁명성을 주목했다.
“가까운 장래에 수억 명의 중국 농민들이 폭풍우처럼 봉기할 것이오! 어떤 세력도 이들을 억누르지 못할 것이오!”
이는 도시 노동자 계급을 혁명의 주체로 보았던 코민테른 (공산주의 국제 조직)과 소련 (蘇聯)의 레닌주의 (Leninism)와는 다른, 중국 현실에 기반한 농민 중심 혁명론이었다.
마오의 사상은 당시 중국이 도시화나 노동자 계급 형성이 미비했기 때문에, 러시아식 혁명 이론을 그대로 적용하기 어렵다는 현실 인식에서 출발했다.
그러나 정치관계는 엇갈렸다.
국민당 지도자 장제스 (蔣介石)는 노동자와 농민을 자기편으로 만드는 데 노력하지 않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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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민국 총통 장제스 |
4. 피의 숙청과 가을 추수 봉기
1927년 4월, 장제스는 상하이에서 노동자들을 학살하며 제1차 국공 합작을 파기했다.
이 사건으로 공산당은 도시에서 거의 전멸했고, 지방에서도 막대한 타격을 입었다.
혁명을 국민당과의 제휴로 완수하려던 스탈린 (Stalin)의 전략은 수포로 돌아갔다.
공산당이 궤멸 직전의 위기에 놓이자, 마오쩌둥은 1927년 9월 후난에서 추수 봉기를 이끌었으나 토벌군에게 진압당하고 패배했다.
마오는 남은 수백 명의 농민 운동가들을 이끌고 후난성과 장시성 (江西省)의 접경 지역인 징강산 (井崗山, 정강산)으로 퇴각하여 은신했다.
이 징강산 투쟁에서 마오는 게릴라 전술을 정립하며 부대를 재정비했다.
이때 지역 토비 (土匪)와 주더 (朱德, 전문 군사 교육을 받은 홍군의 명장)의 군대가 합류하여 중국 공농 홍군 (中國工農紅軍, 약칭 홍군) 제4방면군을 구성했다.
마오는 주더의 도움을 받아 민폐를 끼치지 않는 엄정한 군율을 바탕으로 농민의 지지를 확보했고, 농촌을 근거지로 하는 게릴라 전략을 발전시켰다.
마오의 두 번째 아내 양카이후이는 1930년 10월, 마오가 창사에서 봉기를 일으킨 직후 국민당 허젠 (何鍵, 후난성 정부 주석)에게 체포되었다.
국민당은 양카이후이에게 마오와 의절할 것을 요구했으나, 그녀는 이를 거부하고 결국 11월에 처형당했다.
마오의 셋째 아들 마오안룽 (毛岸龍)도 국공 내전 중에 어린 나이에 사망했다.
마오의 혁명은 가족의 피를 대가로 치렀다.
이러한 비극 속에서, 마오는 이미 1928년 5월 징강산에서 혁명 동지였던 허쯔전 (賀子珍, 홍군의 명사수)과 재혼했다. (논쟁)
이는 아직 양카이후이가 생존해 있던 시점이었기 때문에, 마오의 문란하고 복잡한 사생활에 대한 논란의 시발점이 되었다.
5. 홍군의 위기와 대장정
1931년부터 1934년까지 홍군은 장시성 지역에 중화 소비에트 공화국이라는 과도 정부를 건설하고 마오쩌둥은 주석을 맡았다.
장제스는 홍군을 분쇄하기 위해 4차례의 토벌전 (剿共作戰, 초공작전)을 펼쳤으나 모두 실패했다.
그러나 장시 소비에트로 피난 온 소련 유학생 출신의 '28인의 볼셰비키' 그룹이 코민테른의 지지를 등에 업고 당권을 장악하면서 마오의 지도력은 위협받기 시작했다.
그들은 마오의 유격전 (遊擊戰) 전략을 버리고 정규전 (正規戰)을 결정했다.
마오쩌둥의 군사 이론은 보병의 기동력과 수적 우위를 중시하는 유격전술이었으나, 이들은 소련식의 정형화된 군사 전략, 즉 서책주의 (書冊主義)를 기계적으로 적용했다.
마오쩌둥은 이들을 비판하며, "조사 없이는 발언권이 없다"고 주장했지만, 권력을 잃은 상태였다.
1934년 가을, 장제스의 국민당군이 독일 군사고문단 (한스 폰 젝트)의 조언에 따라 진지와 토치카를 구축하는 새로운 전술로 제5차 토벌전을 시작하자, 28인의 볼셰비키와 독일인 군사고문 오토 브라운 (Otto Braun)의 정면 대응은 엄청난 인명 손실을 낳았다.
유격전에 필수적인 배후 촌락마저 국민당에게 넘어가면서 장시 소비에트는 붕괴 위기에 놓였다.
결국 공산당 지도부는 장시 소비에트를 포기하고 산시성 (陝西省, 서북부의 성)의 새로운 근거지로 이동하는 대장정 (大長征)을 결정했다.
1934년 10월, 마오쩌둥은 수많은 동료와 병사들과 함께 1만 킬로미터에 달하는 목숨을 건 대이동을 시작한다.
“우리의 혁명은 반드시 이 강철의 길을 뚫고 지나가야 한다. 옌안 (延安, 산시성의 근거지)에 도착하는 그날까지 멈춤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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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공산당원들에게 연설하는 마오쩌둥 |
마오쩌둥의 일생에서 가장 고통스러웠으나 동시에 그를 지도자로 우뚝 세운 시련의 여정이 시작된 것이다.
마오쩌둥은 혁명가로서의 활동 초기부터 비정한 면모를 보였다.
첫 번째 아내 뤄이슈를 외면했고, 두 번째 아내 양카이후이가 국민당에 체포되어 처형당할 당시 (논쟁) 이미 동지 허쯔전과 결혼한 상태였다.
그의 복잡하고 난잡했던 사생활은 이후 집권기에도 계속되어, 10대의 소녀들을 좋아하거나 유부녀를 취하기도 했다.
그의 개인적 욕망과 혁명가로서의 삶이 분리되지 않았던 점은 후대에도 강한 비판의 대상이 된다.
또한 그의 사상적 근거 중 하나인 주관적인 의지 강조 (정신주의적 일화)는 훗날 대약진 운동 실패 시 "정책이 문제가 아니라 인민의 의지가 부족했기 때문에 실패했다"고 자신을 옹호하는 독선으로 이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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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홍군의 이동 경로 |
2부: 피와 권력의 장정 (1935년~1949년)
대장정은 홍군 (紅軍)에게는 생존을 위한 투쟁이었지만, 마오쩌둥에게는 잃었던 권력을 되찾고 중국 혁명의 절대적인 지도자로 올라서는 기회였다.
1. 쭌이 회의와 마오의 재등장
1935년 1월, 홍군은 대장정 도중 구이저우성 (貴州省)의 쭌이 (遵義)에서 지도부 회의를 열었다.
이 쭌이 회의는 마오쩌둥의 운명을 바꾸는 결정적인 분수령이었다.
수개월간의 처참한 후퇴와 인명 손실 끝에, 당원들은 소련 유학생 출신의 '28인의 볼셰비키' 그룹 (보구, 오토 브라운 등)이 주도한 정규전 전략의 치명적인 오류를 깨달았다.
그들의 교조주의적 (敎條主義的) 서책주의 (書冊主義)는 현실의 중국에 맞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이 회의에서 군사 전략 실패의 책임을 물어 반대파를 맹렬히 비판했고, 류사오치 (劉少奇, 훗날 국가주석) 등 동료들의 지지에 힘입어 중앙위원회의 절대적인 지도권을 되찾았다.
그는 이 때의 승리를 발판 삼아 군사적 사고를 가진 지도자로서의 입지를 다졌다.
“혁명은 책상 위에서 나오는 것이 아니오! 피와 땀, 그리고 현실적인 토대 위에서만 승리할 수 있소. 서책주의는 똥보다도 못하다!” (마오의 발언을 각색)
쭌이 회의를 통해 마오는 군사 지휘권을 장악했고, 대장정은 그의 전략 (중심보다는 주변부를 장악하며 고립시킨 후, 역량이 우월해졌을 때 섬멸하는 전략)에 따라 진행되었다.
홍군은 티베트 (西藏) 같은 소수민족 지역을 거쳐, 마침내 1935년 10월, 산시성의 근거지 옌안 (延安, 공산당의 주요 거점)에 도착했다.
2. 옌안 시절: 정치 투쟁의 장
옌안은 마오쩌둥이 권력을 완전히 다지고, 그의 사상적 기반인 마오주의 (毛澤東思想)를 정립한 곳이었다.
1936년, 장제스 (蔣介石, 국민당 지도자)는 여전히 공산군 토벌에 집착하고 있었다.
그러나 만주 (滿洲)를 일본군에게 잃고 옌안 근처에 주둔하던 장쉐량 (張學良, 군벌)은 항일 투쟁의 필요성을 주장하며 공산군에 동정적이었다.
마오쩌둥은 이 상황을 놓치지 않았다.
마오쩌둥은 장쉐량에게 접근해 “일본이 중국 전토를 유린하는데 우리끼리 싸울 때인가?”라며 동맹을 제안했다.
결국 1936년 12월, 장쉐량이 장제스를 체포하는 시안 사태 (西安事變)를 일으켰고, 장제스는 풀려나는 조건으로 공산당과의 휴전, 그리고 항일 (抗日)을 위한 제2차 국공 합작에 합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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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제스와 협상을 마치고 옌안으로 돌아온 저우언라이, 마오쩌둥 |
이로써 홍군은 국민혁명군 제8로군과 신사군으로 개편되어 형식상 국민당에 소속되었지만, 실제로는 독립적으로 세력을 확장하는 기회를 얻었다.
마오쩌둥은 이때의 상황을 철저히 공산당의 세력 확대를 위한 기회로 이용했다.
그는 "중일의 싸움은 본당 발전의 절호의 기회"라며, 전력의 70%를 자기 세력 확대에, 20%를 국민당 대응에, 나머지 10%만 항일에 사용하라는 기본 정책을 세웠다.
국민당이 일본 제국과 처절하게 항일투쟁을 벌일 때, 공산당은 직접적인 싸움을 피하고 일본군의 경비가 허술해진 지역을 해방하며 세력을 늘리는 데 집중했다.
마오는 훗날 일본에 감사를 표하기까지 했다.
“만약 일본의 대륙 침략이 없었다면 우리는 국공합작을 결성하고, 발전하고, 최후의 승리를 이룰 수 없었을 것입니다. 우리가 일본에 감사해야 할 일이지요”
이는 중국 국민의 고통을 외면하고 철저히 정치적 이득만 취한 비열한 행위로, 후대에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3. 사생활과 권력의 결합: 정풍 운동과 장칭
옌안 시절은 마오의 사생활이 급변한 시기이기도 했다.
마오는 1937년에 허쯔전 (賀子珍, 세 번째 부인)과 사이가 멀어져 이혼하고, 1939년 배우 출신 장칭 (江靑, 네 번째 부인)과 결혼했다.
허쯔전이 모스크바 (모스크바, 소련의 수도)에 가 있는 동안 마오가 장칭과 바람을 피웠다는 것이 정설로 여겨진다.
당시 장칭은 이혼녀 출신이었으며, 마오쩌둥은 권력을 잡은 이후에도 호색한 기질을 숨기지 않아 성인 여자가 아닌 10대의 소녀들을 좋아했고, 유부녀를 취하기도 했다.
그의 주치의였던 리즈수이 (李志綏)의 회고록에 따르면 마오는 평생 샤워를 거의 하지 않았으며, 자신의 성기 (性器)를 스스로 씻은 적도 없었다고 한다. (논쟁)
한 번은 주치의가 위생 문제를 거론하자 마오는 “계속 여자의 몸 안에서 씻고 있으니 상관없다”는 식으로 말했다고 한다.
또한 그는 성병의 일종인 트리코모나스 질염을 앓고 있었고, 그와 성관계를 맺은 여성들도 감염되었으나, 그들은 오히려 마오 주석의 병에 걸린 것을 ‘훈장처럼 자랑스럽게’ 생각했다는 기록도 있다.
마오의 이러한 방탕하고 불결한 성생활은 그의 부인들, 특히 장칭을 불행하게 만들었고, 장칭의 히스테릭한 성격 형성에 영향을 미쳐 훗날 문화대혁명에서의 잔인한 탄압으로 이어진다.
1942년, 마오는 당의 본부가 있던 옌안에서 정풍 운동 (整風運動)을 개시했다.
이는 마오의 당에 대한 지도권을 재확인하고, 한때 마오에게 반기를 들었던 당내 주요 인사인 왕밍 (王明, 코민테른 지지파) 같은 반대파를 약화시키기 위한 것이었다.
반대파들은 대중 앞에서 자신의 과오를 인정하는 자아비판 (自我批判)을 해야 했고, 트로츠키주의자 (Trotskyist)로 낙인찍힌 일부는 체포되거나 처형되었다.
4. 국공 내전의 승리와 총구에서 나오는 권력
1945년 8월 15일 일본 제국이 패망하자, 국민당과 공산당은 미국 (美國)의 중재로 공동 정부 협상을 시도했지만 실패했고, 곧바로 제2차 국공 내전 (國共内戦)이 시작되었다.
초기에는 국민당군이 병력과 미국의 지원 덕분에 우세했다.
1947년에는 국민당군 후쭝난 (胡宗南)이 공산당의 본거지인 옌안을 점령하기도 했다.
그러나 국민당은 전략적 오류를 범했다.
무리한 점령지 확대로 병력이 분산되었고, 중화민국 정부의 총체적인 부패와 인플레이션 (화폐 가치 폭락)으로 인한 경제 붕괴로 인해 민심을 완전히 잃었다.
반면, 공산당은 군인들이 민중들에게 폐를 끼치지 못하게 하는 엄정한 군율을 지켰다.
마오쩌둥의 전략가로서의 재능은 이때 빛났다.
그는 클라우제비츠 (Clausewitz)의 《전쟁론》과 중국 고대 병법을 결합한 독특한 군사 이론을 바탕으로, 병력 우위가 있을 때 적을 섬멸하고, 열세일 때는 주력과의 대결을 피하는 전술 (인민 전쟁)을 구사했다.
1948년 가을, 린뱌오 (林彪, 홍군의 명장)가 지휘하는 동북 인민해방군이 만주 (滿洲)에서 국민당군을 격파하며 전세가 역전되었다.
이후 공산군은 파죽지세로 진격하여 베이징 (北京, 1949년 2월)과 난징 (南京, 중화민국의 수도, 1949년 4월), 상하이 (上海, 1949년 5월)를 함락시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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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민국의 수도인 난징을 점령하고 기를 계양하는 중국 인민해방군 |
이 승리의 순간, 마오쩌둥의 유명한 어록이 그의 철학을 대변했다.
“권력은 총구에서 나온다.” (枪杆子里面出政权)
이 문구는 무력의 중요성을 강조하지만, 마오의 다음 발언은 “당이 총을 지휘한다. 총이 당을 지휘할 수 없다”였다.
즉, 군사력은 정치적 목표를 달성하기 위한 수단이며, 결국 정치(당)가 군사(총)를 통제해야 함을 명확히 한 것이다.
5.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1949년)
1949년 10월 1일, 마오쩌둥은 베이징 (北京)의 톈안먼 (天安門, 천안문 광장)에서 중화인민공화국 (中華人民共和國)의 건국을 전 세계에 선포하고 국가주석에 취임했다.
“동포들이여, 중화인민공화국 중앙인민정부가 오늘 성립되었습니다!” (후난성 사투리로 연설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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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화인민공화국의 건국을 선포하는 마오쩌둥 |
이후 마오는 토지 개혁, 반혁명 진압 운동, 삼반 오반 운동 (반부패 운동) 등을 통해 자신의 지배를 공고히 했다.
토지 개혁은 지주 계급의 숙청을 전제 조건으로 했으며, 수많은 지주들이 처형되거나 강제 노역지에 수용되었다.
이는 새로운 정권에 위협이 될 만한 반혁명 세력을 뿌리 뽑는다는 명분도 있었다.
마오는 숙적 장제스가 대만 (臺灣)으로 달아난 후에도 그를 두려워했다.
과거 충칭 (重慶) 회담 때 장제스의 역량에 충격을 받아 며칠간 몸을 떨며 앓아누웠던 경험이 있었기 때문이다.
그러나 이제 마오는 중국 대륙의 황제와 같은 존재가 되었다.
마오쩌둥은 20세기에서 가장 중요하고 영향력 있는 인물 중 한 명으로 간주된다.
그는 제국주의를 몰아내고, 지난 수십 년간의 내전을 종식시키고 중국을 통일시킨 국부 (國父)로 찬사를 받았다.
중국 공산당은 마오쩌둥이 중국 정권 수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했음을 부정하지 않는다.
3부: 황제의 오판과 대기근의 비극 (1950년~1962년)
1. 한반도 개입 결정 (6.25 전쟁)
중화인민공화국 건국 직후인 1950년, 마오쩌둥의 평화로운 국가 건설 계획은 한반도 (韓半島)의 전쟁으로 인해 중단될 위기에 처했다.
1950년 5월, 북한의 김일성 (金日成, 북한 주석)과 박헌영 (朴憲永, 남로당 지도자)은 베이징 (北京)의 중난하이 (中南海, 중국 지도부 거처)를 방문하여 마오쩌둥과 면담했다.
김일성은 소련의 스탈린이 무력 통일 계획에 동의했으며, 최종 결정만 마오쩌둥과의 협의를 통해 이루어져야 한다고 설명했다.
마오쩌둥은 처음에는 만주해방을 우선시하고 조선 문제는 그 다음이라고 여겼으며, 전쟁 개시에 분노하고 이해하지 못했다.
그는 미군과 일본군이 개입할 가능성을 지적하며 우려했다.
하지만 스탈린이 동의한다는 친서를 받고, 김일성이 미국 개입 가능성을 낮게 보며 3단계 계획 (군사력 증강-평화 통일 제의-전투 개시)을 설명하자, 마오는 결국 찬성했다.
마오는 만약 미국이 참전한다면 병력을 파견하여 조선민주주의인민공화국 (북한)을 돕겠다고 약속했다.
“제국주의가 38선을 넘는다면, 우리는 반드시 칠 것이다.”
중국은 한반도에 국제 의무가 없었지만, 미국과의 3차 세계 대전을 피하려던 소련을 대신하여, 북한과의 약속 및 동북 지역 (만주)의 안정을 위한 완충 지대 확보라는 국익 때문에 참전을 결정했다.
1950년 10월, 유엔군이 38선을 넘어 북진하자, 마오쩌둥은 인민지원군 (人民志願軍)을 조직해 6.25 전쟁에 참전했다.
이로써 한국 전쟁은 미-중 전쟁으로 확대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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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의 6.25 전쟁 참전 포스터 |
마오쩌둥은 자신의 장남 마오안잉 (毛岸英)을 중공군으로 참전시켰다.
사령관 펑더화이 (彭德懷, 국방부장)는 그의 안전을 우려하여 통역 장교로 배치했으나, 마오안잉은 1950년 11월 25일 미군기의 폭격으로 전사했다. (논쟁)
2003년 중국인민해방군 비망록에 따르면 방공 수칙을 어기고 막사에서 계란볶음밥을 만들다가 위치가 노출되었기 때문이라는 설이 있으나, 중국 역사 연구원 등은 이를 '희화화하는 헛소문'이라고 일축했다.
펑더화이는 전사 소식을 보고한 뒤 시체를 중국으로 후송하려 했으나, 마오쩌둥은 거절했다.
“다른 인민의 죽은 자식들을 후송해올 수 없는데, 내 자식만 후송할 수는 없다. 그 자리에 묘를 만들라고 하시오.”
마오쩌둥은 아들의 죽음을 혁명의 상징으로 삼으려 했지만, 이 참전의 대가는 혹독했다.
중국은 역사 이래 최대 규모의 탄약을 소모했고, 국제 사회에서 침략자로 낙인찍혀 1971년까지 고립을 감수해야 했다.
마오쩌둥은 훗날 이 전쟁을 "100% 과오"이며 "민족적 재앙"이라고 격렬하게 비판했으며, 1956년에는 김일성에게 “자신이 그와 같은 실수를 저질렀다면 자리에서 물러났을 것”이라며 김일성의 잘못된 결정을 비난하기도 했다. (논쟁)
결과적으로 한국 전쟁 참전은 북진 통일을 막아 한반도 분단의 원흉이 되었으며, 한국 국민들에게는 전범 취급을 받을 정도의 악평을 듣고 있다.
2. 대약진 운동: 인간 의지의 파국
전쟁 이후, 마오는 소련의 차관과 기술 원조를 받아 제1차 5개년 계획 (1953~1958년)을 실시하며 경제 건설의 기반을 닦았다.
이 과정에서 농업 생산량이 크게 늘어나는 등 성과에 고무되었다.
1956년, 마오는 공산주의 사상과 언론의 자유를 보장하는 “백화제방·백가쟁명 (百花齊放百家爭鳴)” 방침을 내놓았다.
이는 “온갖 꽃이 함께 피고 온갖 새가 울어재낀다”는 뜻으로, 많은 사람들이 각기 주장을 펼치도록 장려한 것이다.
그러나 마오는 지식인층이 생각보다 강하게 당을 비판하며 자신의 권위를 위협하자, 1957년 돌연 방침을 철회하고 반우파 운동을 전개하여 지식인과 반체제 인사를 대규모로 숙청했다.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그의 편집광적 성격이 드러난 사건이었다.
1958년, 마오는 중국을 농업 국가에서 공업 국가로 빠르게 변모시키기 위해 대약진 운동 (大躍進運動)을 시작했다.
목표는 수년 안에 영국을 따라잡고 철강 생산량을 늘리는 것이었다.
마오의 경제 이념은 평균·평등의 경제 이념과 더불어, 객관적 현실보다는 주관적인 의지 (정신주의적 사고)를 강조하는 마오주의적 특성에 기반했다.
그는 인민의 무제한적 동원이 기술과 자본을 능가할 것이라 믿었고, 소규모를 대규모로 전환하면 생산력이 증가한다고 보았다.
대약진 운동의 핵심 정책은 다음과 같았다.
1. 인민공사 (人民公社): 농촌의 소규모 협업 조직을 해체하고 대규모 집단 농장으로 수용. (이는 아나코 콜렉티비즘적 성격도 띤다.)
2. 토법고로 (土法高爐): 철강 생산량을 늘리기 위해 전국 마을마다 재래식 고로 (용광로)를 세워 철을 생산하도록 명령.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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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법고로 |
이 정책은 곧 인류 역사상 최악의 인재 (人災) 중 하나로 기록된다.
1. 비효율적인 철강 생산: 농민들이 농사 대신 질 낮은 철을 생산하는 데 몰두했으며, 이 철은 산업에 쓸모가 없었다. 농기구마저 녹여 철을 만들면서 농업 생산성은 더욱 감소했다.
2. 제사해 운동 (除四害運動): 마오쩌둥은 "참새는 해로운 새다"라고 주장하며 참새를 유해조로 지정하여 대규모 퇴치 운동을 벌였다. 그러나 참새가 사라지자 해충 (害蟲)이 창궐하여 생태계가 파괴되었고, 농작물 피해가 극심해졌다.
3. 기후 악화: 철 생산 연료를 위해 목재를 남벌한 결과, 1958년부터 홍수가 잦아져 농경지가 침수되었다.
4. 허위 보고: 지역 관리들은 처벌을 피하기 위해 허위 생산량을 보고했고, 중앙 정부는 상황을 오판했다.
이러한 복합적인 요인 (인재 70%, 천재 30%)으로 인해 1959년부터 1961년까지 3년 대기근 (三年大饥荒)이 발생했다.
기아로 인한 사망자 수는 추정치에 따라 1,500만 명에서 5,500만 명에 달했으며, 이는 인류 역사상 가장 치명적인 기근 중 하나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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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대약진 운동 포스터 |
3. 루산 회의와 정적 숙청
대참사가 드러나자 1959년 루산 (廬山)에서 열린 중앙위원회 회의에서 국방부장이었던 펑더화이 (彭德懷, 한국 전쟁 총사령관)가 마오에게 개인 서한을 보내 대약진 운동을 "소부르주아 환상주의"라고 규정하며 강하게 비판했다.
“주석 동지, 우리의 정책은 실패했습니다. 이는 인민의 의지가 부족해서가 아니라, 정책 자체가 현실과 동떨어져 있었기 때문입니다.”
분노한 마오쩌둥은 펑더화이의 비판을 받아들이지 않고, 그를 "우익 기회주의자"로 규탄하며 해임시켰다.
마오쩌둥은 반대파를 용서하지 않았으며, 펑더화이의 숙청은 다른 당 간부들 (류사오치, 저우언라이)이 마오의 뜻을 따를 수밖에 없게 만든 공포 분위기를 조성했다.
대약진 운동의 실패와 커지는 비난 여론에 직면하자, 마오는 1959년 국가주석직을 사임하고 류사오치에게 자리를 넘겨주었다.
4. 두 개의 태양: 마오와 류의 대립
마오의 뒤를 이은 류사오치 (劉少奇, 제2대 국가주석)는 덩샤오핑 (鄧小平, 당 총서기)과 함께 실용주의 (實用主義) 경제 정책을 시행했다.
류는 마오의 '성공이 9할, 실패가 1할'이라는 주장을 정면으로 반박하며 “30%는 천재, 70%는 인재 (三分天灾, 七分人祸)”라고 시인했다.
류사오치는 인민공사를 해체하고 대약진 이전으로 돌아가려 했으며, '류 주석'으로 불리며 위세가 올라가자 중국은 마치 마오쩌둥과 류사오치라는 두 개의 태양이 떠 있는 듯한 형상이 되었다.
1962년 칠천인 대회 (七千人大会)에서 류사오치는 마오쩌둥을 정면 비판했고, 펑전 (彭眞)은 마오의 자아비판을 요구하는 초유의 사태까지 발생했다.
“주석 동지, 역사가 이 행위 (대약진 운동)를 심판할 것입니다!” (류사오치가 마오를 개인적으로 찾아가 소리친 발언)
마오쩌둥은 굴욕감을 느끼고, 류사오치에게 복수할 준비를 본격적으로 시작했다.
여기에 1964년 소련에서 흐루쇼프 (흐루쇼프, 소련 서기장)가 축출되는 사건이 발생하자, 마오는 류사오치가 자신에게 같은 짓을 할 것이라고 의심하게 되었고, 이 갈등은 훗날 중국을 파국으로 몰아넣는 문화대혁명의 직접적인 원인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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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덩샤오핑과 류사오치 |
4부: 광기와 몰락, 그리고 역사적 심판 (1966년~1981년)
1. 문화대혁명의 발발 (1966년)
마오쩌둥 (毛澤東)은 류사오치 (劉少奇)와 덩샤오핑 (鄧小平)에게 권력이 넘어가는 상황을 좌시할 수 없었다.
그는 자신의 권위를 회복하고 당내 실권파를 제거하기 위해 전대미문의 대중 운동을 기획했다.
이것이 바로 프롤레타리아 문화 대혁명 (文化大革命)이다.
왜? 무엇때문에?
1. 권력 투쟁: 대약진 운동 실패로 실추된 마오의 권위를 회복하고, 류사오치, 덩샤오핑 등 시장 경제 회생파를 공격하기 위함이었다.
2. 사상적 순수성: 노선을 바꾼 소련의 수정주의 (修正主義)가 중국에서 재연되는 것을 방지하고, 관료주의에 대항하여 끊임없는 혁명 (계속혁명론)이 필요하다는 마오의 신념 때문이었다.
3. 사회적 배경: 대약진 운동 실패로 인한 경제적 좌절과, 일부 공산당 고위층의 세습 및 부패에 대한 도시 노동자들과 젊은 지식인들의 불만이 팽배해 있었다.
1966년 5월, 마오의 제창으로 문화대혁명이 시작되었다.
마오는 청년 학생들과 민중이 사상과 행동을 규합하여 "혁명 후의 영구적 계급 투쟁"을 통해 부르주아와 관료주의 요소를 제거해야 한다고 주장했다.
1966년 7월, 마오는 수영을 즐겨 했던 양쯔강 (揚子江, 장강)을 횡단하는 퍼포먼스를 선보이며 건재함을 과시했고, 혁명의 불을 지폈다.
“모든 저항에는 이유가 있고 혁명에는 죄가 없다!” (造反有理,革命無罪)
이 슬로건은 조반유리 (造反有理)라는 구호와 함께, 혁명적 청년 학생들로 이루어진 홍위병 (紅衛兵) 조직의 행동을 정당화하는 논리적 근거가 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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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천안문 광장에 집결한 홍위병 |
2. 광란의 10년과 전통 문화의 파괴
1966년 8월, 마오쩌둥은 톈안먼 광장 (天安門廣場)에서 수백만 명의 홍위병들에게 모습을 드러냈고, 이들의 행동을 칭찬했다.
마오의 후계자로 떠오른 린뱌오 (林彪, 국방부장)는 “마오 주석은 천재이고, 마오 주석이 말하는 것은 무엇이든 맞다”고 외치며 마오 개인 우상화를 적극 추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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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중국 공산당 부주석 린뱌오 |
홍위병은 "4개의 낡은 것 (四舊, 쓰지우)" - 낡은 사상, 낡은 문화, 낡은 풍속, 낡은 관습 - 을 척결한다는 명분으로, 중국 전역에서 대규모의 반달리즘 (Vandalism)과 폭력을 저질렀다.
1. 문화재 파괴: 절, 서원, 교회 등 종교 시설이 파괴되고 약탈당했으며, 역사적 건물, 공예품, 미술품, 서적 등이 구시대적 산물로 간주되어 파괴되거나 불태워졌다. 이는 인류 역사상 전대미문의 파괴 행위로 평가되며, 진시황 (秦始皇)의 분서갱유 (焚書坑儒)에 비유된다.
2. 인명 피해와 학살: 문화대혁명 기간 동안 추정 사망자 수는 수십만에서 2천만 명에 이르며, 학살, 박해, 감옥 노동을 통해 수많은 사람이 희생되었다. 홍위병의 구타와 고문을 견디지 못해 자살하는 이들이 속출했다.
3. 권위 해체: 홍위병은 부모나 스승을 반혁명 세력이라고 고발하거나 구타하는 일도 흔했다. 전통적인 유교 사상 (儒敎思想)이 파괴되고, 가족 간의 신뢰도가 추락했으며, 마오쩌둥 사상이 그 자리를 대체했다.
류사오치는 카이펑 (開封)으로 유배되어 1969년 사망했고, 덩샤오핑은 '재교육'을 받고 엔진 공장으로 하방 (下放, 지방으로 내려보냄)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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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파괴된 티베트 불상. |
3. 린뱌오의 몰락과 사인방의 득세
1968년, 마오의 후계자로 공식 지명된 린뱌오 (林彪)는 당내 권력 서열 2위로 올라섰다.
그러나 린뱌오가 류사오치 실각으로 폐지된 국가주석직 부활을 시도하는 등 권력 기반 확장을 꾀하자, 마오는 린뱌오가 자신을 축출하려 한다고 의심하기 시작했다.
마오의 의심과 거부에 심리적으로 좌절한 린뱌오는 비밀리에 쿠데타를 기획했다.
린의 아들 린리궈 (林立果) 등이 주도한 이 음모는 '571 공정 (五七一 工程)'이라고 불렸는데, 이는 '무장 봉기'와 발음이 비슷했다.
1971년 9월, 린뱌오가 탄 비행기가 몽골 (蒙古) 상공에서 추락하면서 사망했다. (논쟁)
린뱌오가 얼마나 쿠데타에 관여했는지, 그의 죽음이 사고인지 암살인지에 대해서는 여전히 논란의 여지가 있다.
마오는 가장 친밀한 수하였던 린뱌오의 배신에 깊이 근심했다.
린뱌오의 도망 소식을 듣고 마오는 다음과 같이 말했다고 한다.
“하늘은 곧 비가 오려 하고, 어머니는 시집을 가려고 한다. 그렇게 하게 해라!” (天要下雨,娘要嫁人,由它去吧!)
이 발언은 비나 과부가 된 어머니의 재가 (再嫁)는 막을 수 없듯이, 운명적인 일은 막을 수 없다는 의미를 담고 있다.
린뱌오 몰락 후, 마오쩌둥의 아내 장칭 (江靑)을 중심으로 장춘차오 (張春橋), 야오원위안 (姚文元), 왕훙원 (王洪文)이 권력을 장악했다.
이 네 사람은 사인방 (四人幫)으로 불리며, 미디어와 선전망을 장악하고 실무 책임자였던 저우언라이 (周恩來, 총리)와 덩샤오핑을 공격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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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장칭 (마오 쩌둥의 아내) |
4. 마오의 죽음과 역사적 심판
노쇠하고 파킨슨병 (운동 뉴런 장애) 등을 앓던 마오쩌둥은 1976년 1월 저우언라이가 사망하자, 덩샤오핑을 다시 숙청하는 등 권력의 저울을 죽기 직전까지 팽팽하게 유지하려 했다.
1976년 4월 5일, 청명절 (淸明節)을 맞아 대규모 민중 봉기인 제1차 천안문 사태 (天安門事件)가 발생했다.
군중들은 죽은 저우언라이를 추모하며 전횡을 일삼는 사인방을 비판했고, 마오의 퇴진까지 요구했다.
마오쩌둥은 이를 덩샤오핑의 책동으로 규정하고 다시 실각시켰다.
1976년 9월 9일, 마오쩌둥은 베이징에서 82세의 나이로 사망했다.
그는 화장해달라는 유언을 남겼으나, 그의 시신은 레닌 (Lenin)처럼 보존되어 베이징의 마오 주석 기념관 (毛主席紀念館)에 안치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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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마오 주석 기념관 |
5. 후대의 평가와 교훈
마오쩌둥 사후, 화궈펑 (華國鋒)을 거쳐 덩샤오핑이 실질적인 권력을 잡게 되었다.
1981년, 중국 공산당은 공식적으로 마오쩌둥의 문화대혁명을 "내란"이었다고 밝히며, 마오의 과오를 인정했다.
덩샤오핑의 공식 평가
마오쩌둥은 "공칠과삼 (功七過三)"의 인물로 평가되었다.
이는 마오쩌둥이 이오시프 스탈린 (Iosif Stalin)을 평가했던 기준을 재인용한 것이다.
즉, "7할의 공(功)과 3할의 과(過)를 남겼다"는 뜻으로, 혁명가로서 중국을 통일시킨 공은 인정하되, 집권 후기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 같은 실책은 명백히 짚고 넘어가는 절충적인 평가다.
마오쩌둥은 혁명가로서는 성공했으나, 정치가로서는 실패했다는 평가가 지배적이다.
대약진 운동과 문화대혁명으로 인한 수천만 명의 아사자와 학살은 그의 통치 시기 가장 큰 과실로 지적된다.
그의 독선적인 군대식 사고방식, 비판을 용납하지 않는 편집광적인 성격, 그리고 권력 유지를 위해 끊임없이 정적을 숙청하고 대중 운동을 이용했던 정치적 잔혹함은 중국의 발전을 20년 가까이 침체시켰다는 강한 비판을 받고 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마오 시대에 중국은 반식민지 상태에서 강국으로 탈바꿈했으며, 문맹 퇴치 (간체자 보급), 여성 권리, 기본 의료, 초등 교육 분야에서 개선 및 기대 수명의 큰 향상이 있었다는 긍정적인 평가도 존재한다.
그의 사상 (마오주의)은 베트남 (호찌민), 캄보디아 (폴 포트), 페루 (빛나는 길), 네팔 (프라찬다) 등 제3세계 혁명가들에게 큰 영향을 미쳤다.
오늘날 중국 인민들 사이에서 마오쩌둥은 국부나 정치인이라기보다는 관우 (關羽)와 마찬가지로 복이나 재물을 기원하는 인물신 (人物神)이나 부적 (符籍)처럼 여겨지기도 한다.
이는 그의 강력한 개인 우상화의 유산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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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를 통해 배우는 교훈과 배울점
마오쩌둥의 일대기는 한 인간의 혁명적 성공과 통치자로서의 파멸적인 실패가 극적으로 교차하는 대서사시입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에서 다음과 같은 교훈을 얻을 수 있습니다.
1. 혁명가의 자질과 통치자의 자질은 다르다
마오쩌둥은 절망적인 상황에서도 대장정을 이끌고 국민당을 격파한 뛰어난 군사 전략가이자 혁명가였으나, 복잡한 현대 국가를 운영하는 정치가로서는 독선과 비합리성, 개인적인 권력욕에 사로잡혀 수천만 인민을 고통 속에 몰아넣었습니다.
개인의 역량이 아무리 뛰어나도, 현실을 객관적으로 인정하고 비판을 수용하는 겸손함과 실용주의가 결여될 때, 그 힘은 대재앙을 초래할 수 있다는 점을 배울 수 있습니다.
2. 권력의 독점과 비판 부재의 위험성
마오쩌둥은 자신의 정책을 비판하는 충신 (펑더화이)을 숙청하고, 자신의 뜻에 반하는 의견을 묵살했습니다.
지도자의 절대적 권위 (개인 우상화) 아래에서 자유로운 비판과 토론이 사라질 때, 그 공동체는 맹목적인 오류에 빠져 파국을 맞이하게 됩니다.
진정한 지도력은 명령이 아닌 경청에서 나온다는 것을 깨달아야 합니다.
마오쩌둥의 삶은 '성공'과 '파멸'의 양극단을 오갔으며, 그의 이야기는 한 개인의 오만과 독선이 어떻게 한 국가 전체의 운명을 뒤흔들 수 있는지 보여주는 살아있는 역사 교과서입니다.
이 글은 마오쩌둥(毛澤東)의 생애와 중국 현대사를 다룬 여러 사료·연구서를 바탕으로, 블로그 독자가 읽기 쉽게 재구성한 서사형 글입니다.
사건의 순서와 숫자, 인명·지명은 가능한 한 역사적 사실을 따르되, 인물의 심리·대사·장면 묘사는 이해를 돕기 위한 소설적 각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마오쩌둥의 사생활, 대약진 운동·문화대혁명·대기근의 피해 규모 등은 학계에서도 해석과 수치가 엇갈리는 부분이 많아, 글 속에서는 대표적인 견해를 중심으로 정리했습니다.
논쟁 여지가 큰 부분은 (논쟁)·(전승) 표기를 사용해 가능하면 구분했으며, 보다 정확한 이해를 위해서는 중국 현대사 연구서와 1차 사료를 함께 참고하시기를 권합니다.
이 글은 특정 이념이나 인물을 미화하거나 비난하기 위한 것이 아니라, “혁명가로서의 성공과 통치자로서의 실패”라는 양면을 함께 보여주려는 시도입니다.
현대 정치·이념과 직접 연결해 단정적인 판단을 내리기보다는, 권력 집중과 비판의 부재가 어떤 비극을 낳는지에 초점을 두고 읽어 주시면 좋겠습니다.
The article follows Mao Zedong from his youth in late Qing China through his rise as a peasant-based revolutionary, defeat of the Nationalists and proclamation of the People’s Republic in 1949, to his catastrophic later rule.
It explains how Mao’s guerrilla strategy, use of the Long March, the Yan’an base and wartime United Front allowed the Chinese Communist Party to survive and expand.
Once in power, he consolidated rule through land reform and political campaigns, then launched the Great Leap Forward, whose utopian targets, forced collectivization and falsified grain reports helped trigger a man-made famine that killed tens of millions.
To crush criticism and rivals like Liu Shaoqi, Mao unleashed the Cultural Revolution, mobilizing Red Guards to attack “old ideas” and “capitalist roaders,” destroying cultural heritage and persecuting countless people.
The narrative concludes that Mao was a highly effective revolutionary strategist but a disastrous ruler, showing how absolute power, ideological rigidity and the silencing of dissent can turn a liberation movement into a national tragedy.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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