황금빛 메스와 보이지 않는 십자가
1. 1960년대 부산: 열 명의 아이와 어머니의 희생
1960년대 중반, 대한민국 부산(Busan)의 한 골목.
이태석(John Lee Tae-seok)은 열 명의 자녀 중 아홉째이자 셋째아들로 태어났다.
당시 대한민국은 6.25 전쟁(Korean War, 1950~1953년)의 폐허를 딛고 산업화(Industrialization)의 기틀을 다지던 격동의 시기였다.
가난은 만연했지만, 교육열만큼은 뜨거웠다.
태석의 삶에서 가장 큰 비중을 차지한 것은 어머니였다.
아버지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고, 어머니 김영순(Kim Young-soon, 이태석 신부의 어머니, 강인하고 독실한 가톨릭 신자) 여사는 홀로 10남매를 키워야 했다.
어머니의 삶은 그야말로 희생과 헌신 그 자체였다.
그녀는 아이들에게 물려줄 수 있는 유일한 자산은 '교육'뿐임을 알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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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석 신부 |
2. 천재적인 재능: 음악과 의학의 길
태석은 어릴 때부터 비범했다.
공부도 잘했지만, 특히 음악에 대한 재능은 탁월했다.
그는 독학으로 기타와 첼로(Cello, 현악기 중 가장 낮은 음역을 맡는 악기) 연주를 익혔다.
그의 음악은 사람들의 마음을 움직이는 힘이 있었다.
그가 첼로를 켜면, 딱딱했던 형제들의 표정마저 부드러워졌다.
형제들의 증언에 따르면, 태석은 유머러스하고 쾌활했지만, 동시에 내성적이고 깊은 성찰을 하는 면이 있었다고 한다.
외적으로는 밝고 사교성이 뛰어난 '인기인'이었지만, 내면으로는 항상 자신의 역할에 대해 깊이 고민했다.
그는 어머니의 바람대로 1981년 인제대학교 의과대학(Inje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부산 소재 대학의 의과대학)에 입학했다.
당시 의사(Doctor)는 한국 사회에서 경제적 성공과 사회적 명예를 보장하는 최고의 직업이었다.
그의 앞날은 황금빛으로 약속된 듯했다.
태석의 형: "태석아, 너는 정말 운이 좋은 녀석이야. 졸업만 하면 바로 병원에서 일해. 너는 의학 천재잖아. 남 부러울 것 없는 삶이 우리 앞에 펼쳐져 있어.”
태석: (형의 말에 어색하게 웃으며) “...형. 나는 사람의 병만 고치는 의사가 될 생각은 없어. 뭔가, 영혼까지 치유하는 그런 일을 하고 싶다고.”
이 '영혼까지 치유하는 일'에 대한 막연한 갈망은, 그가 대학 시절 참여했던 가톨릭 학생회 활동(Catholic Student Association)을 통해 점차 구체화되었다.
그는 가난한 이웃들을 위한 봉사 활동에 열중했고, 그곳에서 의학 지식보다 인간적인 위로가 더 절실한 현실을 보았다.
3. 군의관과 삶의 전환점
대학 졸업 후, 태석은 육군 군의관(Army Medical Officer, 대한민국 육군에서 복무하는 의사)으로 복무했다.
1980년대 후반의 군 복무는 개인의 삶을 잠시 멈추게 하는 시간이었으나, 태석에게는 내면의 소명을 확인하는 시간이 되었다.
군대에서 그는 의사로서의 능력과 함께, 사람의 마음을 얻는 능력을 동시에 발휘했다.
계급과 상관없이 모든 병사들을 존중하며 치료했다.
제대 후, 그는 광주(Gwangju)에서 전문의(Specialist) 수련을 받으며 안정적인 미래를 준비했다.
그가 선택한 전공은 외과(Surgery).
가장 역동적이고 생명을 직접 다룰 수 있는 분야였다.
모든 준비가 끝났을 때, 그의 나이 서른두 살. 의사로서 최고의 전성기를 시작할 시점이었다.
바로 이때, 태석의 인생을 뒤흔드는 결정적인 사건이 발생했다.
그는 의사 가운을 벗기로 결심했다.
어머니와 형제들에게는 청천벽력과 같은 소식이었다.
어머니 김영순: “이게 무슨 소리냐! 태석아, 네가 미쳤느냐? 의사의 길을 왜 버리겠다는 거냐! 너 하나 키우겠다고 이 어미가 어떻게 살았는지 아느냐!”
어머니의 목소리가 떨렸다.
태석: (무릎을 꿇고 어머니의 손을 잡으며) “어머니. 의사가 되는 것이 어머니의 소원이자 저의 숙제였습니다. 이제 그 숙제는 마쳤습니다. 하지만 저는... 의사로 살다가 죽으면, 제 삶의 목적을 다하지 못할 것 같습니다. 저는 병을 고치는 의사보다, 가난한 이들의 영혼을 구하는 사제가 되고 싶습니다.”
이태석의 이 급작스러운 결정은 가족들에게 '배신'이자 '인생 낭비'로 받아들여졌다.
형제들 사이에서는 "어린 동생의 철없는 일탈", "정신 나간 짓"이라는 비판이 일었다.
그들은 수십 년간 의사라는 명예와 부를 위해 희생해 온 어머니의 노고를 태석이 한순간에 무너뜨렸다고 생각했다.
이태석에게는 이것이 쉬운 결정이 아니었다.
그는 가장 편안하고 보장된 길(의사)과, 가장 험난하고 불확실한 길(사제) 사이에서 인간적 자유의지를 선택해야 했다.
이 선택은 당시 한국 사회의 물질만능주의에 대한 조용한 비판이기도 했다.
남들이 선망하는 지위를 버린다는 것은, 그에게 세상의 기준을 거부하고 오직 신의 부름에만 순종하겠다는 급진적인 선언이었다.
로마에서의 고뇌, 그리고 운명의 땅 톤즈
1. 살레시오회와 버려진 재능에 대한 논란
1991년, 이태석은 가톨릭 수도회인 살레시오회(Salesian Society of Don Bosco, 가난하고 버려진 청소년 교육을 중시하는 수도회)에 입회했다.
그는 의사로서의 경력을 완전히 포기하고 수도자의 길을 걷기 시작했다.
살레시오회는 '가난한 이들 속에서 가장 가난한 이들(The Poorest among the Poor)'을 위한 봉사를 강조했다.
이는 태석이 군의관 시절부터 느껴왔던 '영혼을 치유하는 일'과 가장 가까운 목표였다.
그의 목표는 단순히 병을 치료하는 것을 넘어, 삶의 희망을 주는 것이었다.
하지만 그의 '버려진 재능'에 대한 비판은 끊이지 않았다.
수도회 선배 신부: “태석아, 자네는 의사야. 그것도 외과 전문의가 될 수 있었지. 의사 한 명의 손이 얼마나 많은 생명을 살릴 수 있는지 자네가 더 잘 알지 않나? 성직자가 되어 설교하는 것보다, 의사 가운을 입고 병을 고치는 것이 하느님의 뜻에 더 부합하는 것은 아닐까?”
태석: “신부님. 제가 의사로서 만났던 많은 환자들은 육체의 병뿐만 아니라, 절망이라는 더 큰 병을 앓고 있었습니다. 제가 가진 의술은 세상 어디든 가져갈 수 있습니다. 하지만 사제로서의 제 마음은, 가장 절망적인 곳에 가서 그들에게 희망을 주고자 합니다. 메스를 버리는 것이 아니라, 메스를 십자가 아래에 두는 것입니다.”
태석은 늦은 나이(서른 후반)에 사제의 길을 시작했기에, 1997년 필리핀(Philippines)과 2001년 이탈리아 로마(Rome, 가톨릭 교회의 중심지)의 살레시오 대학교에서 철학과 신학을 공부했다.
2. 로마의 갈등: 고립과 소명
로마에서의 생활은 화려했지만, 그의 마음은 늘 가난한 곳을 향했다.
유럽의 풍요로움과 아프리카의 비참함이 극명하게 대비되는 시기였다.
신학 공부를 마친 후, 살레시오회는 그에게 유럽이나 비교적 안정된 아시아 국가의 선교지(Mission Field)를 제안했다.
태석은 지도 신부에게 말했다.
"저는 가장 가난한 곳, 가장 많은 고통이 있는 곳으로 가고 싶습니다."
그가 스스로 선택한 곳이 바로 수단(Sudan, 당시 세계에서 가장 길게 내전을 겪고 있던 나라)이었다.
정치적 이해관계와 기후 관계의 교차점
수단은 당시 2차 수단 내전(Second Sudanese Civil War, 1983년~2005년)의 한복판이었다.
내전은 크게 북부의 아랍-이슬람 정부와 남부의 흑인-기독교/토착신앙 세력 간의 충돌이었다.
이 충돌의 핵심에는 석유(Oil)와 종교, 그리고 인종차별이 얽혀 있었다.
수단 정부는 남부의 자원을 통제하고 강제로 이슬람 율법을 적용하려 했고, 이는 수많은 난민과 수천만 명의 희생자를 낳았다.
남수단 지역은 극심한 건기와 우기(Rainy Season)가 반복되었다.
우기에는 홍수(Flooding)가 발생해 콜레라(Cholera)와 말라리아(Malaria)가 창궐했다.
이런 환경은 의료 체계가 완전히 붕괴된 톤즈(Tonj, 남수단 서부 바르 엘 가잘 주에 위치한 오지 마을) 같은 지역의 고통을 증폭시켰다.
이태석 신부는 이 모든 위험을 알고 있었다.
그가 톤즈를 선택한 것은 합리적인 판단이 아니라, 철저한 소명(Calling)의 결과였다.
3. 수단 톤즈: 지옥의 문 앞에 서다
2001년 12월, 이태석 신부는 드디어 톤즈에 도착했다.
톤즈는 '세상의 끝'이라고 불릴 만한 곳이었다.
제대로 된 병원은커녕, 전기나 수도 시설도 전무했다.
사람들이 마시는 물은 흙탕물이었고, 수많은 아이들이 굶주림과 질병으로 죽어가고 있었다.
특히 한센병(Leprosy, 나병) 환자들이 집단적으로 버려져 있었다.
현지 주민 (딩카족 노인): (신부를 경계하며) "당신은 누구십니까? 또 다른 전쟁 지원군입니까, 아니면 종교를 강요하러 온 사람입니까?"
이태석: (땀에 젖은 채 미소 지으며) "저는 의사이고, 신부입니다. 제 이름은 존(John)입니다. 저는 당신들의 병을 고치고, 당신들의 아이들을 가르치러 왔습니다. 제가 가진 것은 이 낡은 청진기(Stethoscope)와 기타뿐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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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톤즈의 아이들과. 이태석 신부 |
그의 초기 헌신은 고난의 연속이었다.
제대로 된 약품도 없이, 그는 맨손으로 상처를 소독하고, 흙벽돌을 쌓아 병원 건물을 짓기 시작했다.
그는 이 모든 과정을 한국의 가족과 지인들에게는 상세히 알리지 않았다.
그들의 걱정을 덜어주기 위함이었지만, 이는 동시에 그의 사생활(Private Life)의 고립을 의미했다.
그는 톤즈를 위해 자신의 모든 것을 바치기로 결심했기에, 스스로를 세상으로부터 고립시켰다.
일부에서는 이태석 신부의 초기 활동 방식에 대해 '과도한 개인 영웅주의'라는 비판을 제기하기도 했다.
그는 수도회나 본국의 대규모 지원을 기다리기보다, 맨몸으로 뛰어들어 자신의 능력과 인맥만으로 모든 것을 해결하려 했다.
이는 빠른 성과를 냈지만, 장기적인 시스템 구축이나 후계자 양성에는 부족했다는 비판의 여지가 있다.
하지만 당시 톤즈의 상황은 '당장 환자를 살리는 것' 외에는 다른 선택의 여지가 없는 극한 상황이었다.
흙벽돌 병원, 브라스 밴드의 기적
1. 톤즈의 슈퍼맨: 48시간의 사투
톤즈에서의 그의 일상은 기적과 사투의 반복이었다.
그는 매일 아침 병원으로 향했고, 수많은 환자들이 그를 기다렸다.
그는 의사, 약사, 간호사, 심지어 건축가와 음악 교사의 역할까지 혼자 해냈다.
흙벽돌 병원과 교육 이태석 신부는 직접 흙벽돌을 구워 병원을 지었다.
12개의 병상(Hospital Beds)을 갖춘 작은 병원이었다.
그가 병원을 지은 이유는 명확했다.
'가장 가난한 이들에게 인간적인 존엄성을 되찾아 주는 것'이었다.
그는 또한 학교를 짓고 아이들을 가르쳤다.
내전으로 교육을 받지 못했던 아이들에게 희망을 주기 위함이었다.
한센병 환자: "신부님, 제 손은 이미 썩어 문드러졌습니다. 모두가 저를 저주합니다. 저는 살 가치가 없어요."
이태석: (환자의 상처 난 손을 잡고) "주님은 당신을 사랑하십니다. 당신은 살 가치가 충분히 있습니다. 저는 당신의 병을 고쳐줄 것입니다. 그리고 당신의 상처를 감싸 안아줄 것입니다. 사랑이 있는 곳에, 저주도 물러갑니다."
그는 수시로 말라리아와 장티푸스(Typhoid Fever)에 시달렸다.
한 번은 48시간 동안 쉬지 않고 열악한 환경에서 외과 수술을 감행하여 아이의 목숨을 구한 일화가 있다. (전승)
그의 몸은 점점 말라갔지만, 그의 눈빛은 더욱 강렬해졌다.
2. 브라스 밴드: 전쟁 속의 교향곡
이태석 신부의 가장 위대한 업적은 바로 '이태석 신부 브라스 밴드(Fr. John Lee’s Brass Band, 톤즈의 소년들로 구성된 금관악기 악단)'를 만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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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태석 신부와 브라스밴드 |
내전의 폐허 속에서 아이들은 폭력 외에 다른 것을 배울 기회가 없었다.
태석은 음악이 아이들의 영혼을 치유할 수 있는 가장 강력한 수단이라고 믿었다.
톤즈 아이들은 딩카족(Dinka People, 남수단의 주요 민족)으로, 원래도 춤과 노래를 좋아하는 민족이었다.
이 밴드는 단순한 악단이 아니었다.
규율(Discipline)과 협동(Cooperation), 그리고 자존감(Self-Esteem)을 가르치는 교육 도구였다.
악기 연주는 고도의 집중력과 끈기를 요구했고, 이는 내전의 트라우마(Trauma)에 시달리던 아이들에게 심리적 치유 효과를 주었다.
이태석: "아킬레(Achille, 밴드의 리더가 되는 소년), 네 트럼펫 소리가 흔들린다. 전쟁 소리처럼 웅장할 필요는 없어. 하지만, 네 마음의 평화를 담아서 연주해라. 네 연주가 이 톤즈 땅에 평화의 씨앗을 뿌릴 수 있도록!"
아킬레: "신부님. 트럼펫을 불 때면, 총 소리가 들리지 않습니다. 저는 이 밴드를 통해 톤즈의 희망을 연주하고 싶습니다.”
밴드는 톤즈 마을 축제와 심지어 수도인 주바(Juba)까지 가서 연주했다.
이는 전쟁으로 고통받던 수단 사람들에게 인류애와 희망의 메시지를 전달하는 가장 효과적인 수단이었다.
이태석 신부의 재능(음악, 의술)은 톤즈에서 비로소 완벽한 조화를 이루었다.
이태석 신부는 사실 스캔들이나 금전적 논란이 전혀 없었던 극히 청렴한 인물이었다.
그러나 그의 삶은 '과도한 헌신' 때문에 다른 종류의 인간적 한계와 비판을 낳았다.
그는 거의 한국을 방문하지 않았다.
오직 서신으로만 어머니와 연락했다.
형제들은 그가 톤즈에 갇혀 자신의 몸과 가족을 돌보지 않는 것에 대해 깊은 우려와 불만을 가졌다.
"저렇게까지 해야 하는가?"라는 질문은 그의 헌신에 대한 최대의 논란이자, 인류애와 개인의 책임 사이의 영원한 딜레마를 보여준다.
그는 자신의 건강을 돌보는 것에 완전히 실패했다.
수단에서 말라리아에 걸려 사경을 헤매면서도, 한국에 돌아와 치료를 받으라는 권유를 묵살했다.
그는 자신이 떠나면 톤즈의 아이들과 환자들이 버려질까 두려워했고, 이는 결국 치명적인 결과로 이어졌다.
사제의 마지막 길, 톤즈의 울림
1. 2008년: 절망적인 진단과 조용한 귀환
2008년 말, 이태석 신부는 심각한 복통을 느꼈다.
톤즈 병원의 열악한 시설로는 제대로 된 진단이 불가능했다.
수도회의 강한 권유로 한국에 잠시 귀국한 그는 서울의 한 병원에서 대장암 4기(Stage 4 Colorectal Cancer) 진단을 받았다.
이미 암세포는 온몸에 퍼진 상태였다.
극한의 환경(아프리카 오지의 기후 관계)과 영양실조, 그리고 자기희생이라는 갈등이 낳은 비극적인 결과였다.
그는 톤즈를 위해 자신의 삶을 불태웠고, 그 대가로 자신의 생명을 잃게 된 것이다.
주치의: "신부님, 너무 늦었습니다. 왜 이렇게 될 때까지 오지 않으셨습니까? 톤즈가 아무리 중요해도, 당신의 생명이 먼저 아닙니까."
이태석: (창밖을 바라보며 희미하게 웃으며) "의사 선생님. 저는 톤즈에서 제 삶의 가장 중요한 것을 발견했습니다. 저는 이미 제 운명을 알고 있었습니다. 제 마음은 아직 톤즈에 남아있는 아이들의 곁을 떠나지 못했습니다. 제가 없으면, 누가 그들을 돌보겠습니까."
병마와 싸우는 와중에도 그의 유일한 관심사는 톤즈의 지속 가능한 발전이었다.
그는 한국의 지인들에게 톤즈 병원과 학교를 계속 지원해달라고 호소했고, 자신이 가르쳤던 밴드 아이들의 이름을 하나하나 불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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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투병중인 이태석 신부 |
2. 울지 마 톤즈: 문화적 영향력의 폭발
이태석 신부의 이야기는 2010년 다큐멘터리 영화 '울지 마 톤즈(Don't Cry, Tonj)'로 제작되어 대한민국 전역에 개봉했다.
이 영화는 한국 사회에 엄청난 문화적 충격과 영향력을 주었다.
당시 한국 사회는 경제적인 성취에만 몰두하여 공동체 의식과 봉사 정신이 희미해져 가던 시기였다.
'울지 마 톤즈'는 물질적인 성공을 버리고 가장 낮은 곳에서 사랑을 실천한 한 한국인의 이야기를 통해, 진정한 삶의 가치와 인류애에 대한 질문을 던졌다.
이로 인해 수많은 청년들이 의료 봉사와 국제 구호에 관심을 갖게 되는 선한 나비 효과가 발생했다.
이태석 신부는 '한국의 슈바이처'를 넘어, '희망의 씨앗을 뿌린 사제'로 평가된다.
그는 단순히 병을 고친 것이 아니라, '사랑은 조건 없이 주는 것'이라는 가장 근본적인 기독교적 가치를 실천함으로써, 한국 가톨릭 및 사회 전체에 깊은 영적 울림을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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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울지마 톤즈 다큐멘터리 영화 |
3. 영원한 이별과 교훈
2010년 1월 14일, 이태석 신부는 48세의 나이로 짧지만 강렬했던 삶을 마감했다.
그의 장례식은 수많은 사람의 눈물 속에서 진행되었다.
한국에서 뿐만 아니라, 수단 톤즈에서도 그가 세운 병원과 학교 앞에서 수많은 딩카족 사람들이 슬픔에 잠겼다.
밴드 아이들은 눈물을 흘리며 그가 가르쳐 준 '나팔 소리'를 하늘로 올렸다.
이태석 (과거 회상): "사랑하는 나의 아들딸들아. 너희가 톤즈를 떠나지 않고, 너희가 배운 지식과 음악을 너희 이웃에게 나눠준다면, 그것이 바로 내가 너희에게 주는 가장 큰 축복이자, 내가 너희에게 남기는 유산(Legacy)이 될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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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태석 신부의 삶은 '우리 시대의 영웅은 어떤 모습이어야 하는가?'라는 질문에 대한 가장 완벽한 대답입니다.
그의 삶의 궤적은 '성공'이 아닌 '봉헌(Dedication)'에 초점을 맞추었습니다.
그는 모두가 선망하는 부와 명예를 버리고, 가장 잊힌 곳에서 자신의 모든 재능을 아낌없이 사용했습니다.
이태석 신부는 우리에게 진정한 인류애는 멀리 있는 거대한 구호(Relief)가 아니라, '함께 울고, 함께 웃는' 지극히 인간적인 공감(Empathy)에서 시작된다는 것을 보여줍니다.
우리는 이 이야기를 통해 배웁니다.
인간의 가장 위대한 힘은 무기를 만드는 능력도, 부를 축적하는 능력도 아닌, 고통받는 타인의 손을 잡고 그와 눈높이를 맞추는 지극한 겸손함과 연결(Connection)에 있다는 것을.
이태석 신부의 톤즈는, 우리가 잃어버렸던 인간 본연의 가치, 즉 '주는 것이 받는 것보다 행복하다'는 진리를 증언하는 영원한 성지(Holy Site)로 남았습니다.
이 글은 이태석(李泰錫, Fr. John Lee, 1962–2010) 신부의 공개 약력, 가톨릭 언론 기사, 이태석재단 자료를 기본으로 삼아 서사적으로 재구성한 글입니다.
역사적으로 확정된 연도·지명·직함은 그대로 두었으나, 가족 대화·수도회 내 대화·수단 현장의 일부 장면은 당시 정황을 바탕으로 한 문학적 각색입니다.
톤즈 초기의 구체적 숫자, 48시간 연속 수술과 같은 극적 장면은 1차 기록이 제한적이므로 (전승) 또는 (논쟁) 표기를 유의해 주십시오.
이 글의 목적은 인물의 성덕(聖德)만을 미화하려는 것이 아니라, ‘의사-수도자-선교사’라는 복합적 소명을 한 몸 안에서 통합하려 했던 한 한국인의 선택을 오늘의 독자가 이해하도록 돕는 데 있습니다.
John Lee Tae-seok (1962–2010) was born in Busan as the ninth child in a family of ten, growing up in postwar Korea where poverty was common but education was prized.
After graduating from Inje University College of Medicine in 1987, he completed his military service as an army doctor.
Although he had a very secure future as a surgeon in Korea, he felt a persistent inner call not only to heal bodies but to console the poor spiritually.
In 1991 he entered the Salesians of Don Bosco, studied theology in Gwangju, and later continued formation in Rome.
In 2000 he was ordained a priest and the following year volunteered to serve in Tonj, in what is now South Sudan, then devastated by civil war, poverty, epidemics, and total lack of medical infrastructure.
In Tonj he exercised all his previous talents at once: he built a 12-bed mud-brick clinic, treated two to three hundred patients a day, performed surgery in extremely rudimentary conditions, and founded a school so that war-disrupted children could study.
Believing that music could heal trauma, he organized a brass band from local Dinka youth and used it as a tool to teach discipline, cooperation, and dignity.
His approach was highly personal and sometimes criticized as over-reliant on his own charisma, yet it produced immediate, visible change for people who otherwise had no access to doctors or teachers.
In late 2008 he was diagnosed in Korea with terminal colorectal cancer, likely aggravated by years of overwork and harsh climate.
Even then his priority was to secure ongoing support for the Tonj clinic and his students rather than to extend his own life. He died on 14 January 2010 at age 48.
The documentary Don’t Cry for Me, Tonj released soon after his death moved Korean society, which was then focused on economic success, by showing a doctor-priest who had deliberately abandoned status and wealth to live among the poorest.
Today Lee is remembered not simply as “the Korean Schweitzer” but as a figure who integrated professional excellence, Christian spirituality, and radical solidarity with the marginalized.
His life poses a question to contemporary readers: will you remain in comfort, or will you go where suffering is greatest and offer what you have?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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