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792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 암살 사건 전말: 가면무도회가 비극이 된 날 (kungamordet 1792)


 스웨덴의 운명: 가면 무도회의 비극


몰락하는 왕국과 혁명의 그림자 (1792년 겨울, 스톡홀름)

1. 얼어붙은 분노

1792년 3월, 스톡홀름(스웨덴의 수도이자 왕궁 소재지)의 겨울은 유난히 길고 차가웠다. 

눈 덮인 거리는 텅 비어 있었으나, 왕궁(스톡홀름 궁전)의 높은 벽 안팎으로는 뜨거운 분노와 음모의 기운이 감돌았다. 

스웨덴의 계몽 전제군주(啓蒙專制君主) 구스타브 3세(Gustav III, 1746~1792년, 스웨덴의 국왕, 예술 애호가이자 강력한 왕권 추구자)는 자신을 '극장 왕'이라 칭하며 오페라와 연극에 심취했지만, 현실 정치 무대에서는 이미 수많은 적을 만들었다.


구스타브 3세의 초상


파리에서는 루이 16세(프랑스 국왕)의 목이 단두대 아래에서 잘려나가기 직전이었다. 

이 프랑스 혁명(1789년, 프랑스에서 절대왕정이 무너진 사건)의 불길은 유럽 전역의 귀족과 왕족들에게 깊은 공포를 심어주었다. 

구스타브 3세 역시 혁명 세력을 격렬하게 증오했으며, 스웨덴이 혁명의 소용돌이에 휘말리지 않도록 강력한 중앙집권을 추구했다. 

이것이 그의 정책적 동기였으나, 동시에 몰락의 씨앗이 되었다.


"폐하의 개혁은 왕국을 살리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왕국을 파괴할 것입니다."


클라스 프레드릭 호른 백작 (Claes Fredrik Horn, 구스타브 3세의 전 충신이자 이후 암살 공모자)이 차가운 목소리로 말했다. 

그는 왕의 총애를 잃고 좌천된 상태였다.


호른 백작이 마주 앉은 이는 음모의 핵심 인물, 야코브 요한 앙카르스트룀 (Jacob Johan Anckarström, 1762~1792년, 전직 근위대 장교, 암살 계획의 실행범)이었다. 

앙카르스트룀은 왕의 정책에 의해 군복을 벗고 생계마저 위협받는 처지에 놓여, 왕에 대한 증오가 극에 달해 있었다.


"왕은 귀족들의 모든 특권을 빼앗았소. 1789년의 연합 및 안보법(Förenings- och säkerhetsakten, 왕의 권력을 절대적으로 강화하고 귀족의 권한을 거의 소멸시킨 법) 이후, 우리 귀족들에게 남은 것은 텅 빈 명예뿐이오. 그가 톤(Ton, 동전)을 찍어내듯 마음대로 법을 찍어내는 동안, 백성들은 전쟁(러시아-스웨덴 전쟁)의 비용 때문에 굶주리고 있소."


앙카르스트룀의 말에는 깊은 분노가 서려 있었다. 

구스타브 3세는 러시아와의 값비싼 전쟁(1788~1790년)을 치르면서 국가 재정을 파탄 직전까지 몰아넣었다. 

이 전쟁은 프랑스 혁명 세력과의 연대를 막기 위한 정치적 이해관계에서 비롯되었지만, 귀족들의 동의 없이 시작되었다는 과실을 안고 있었다. 

왕은 이 전쟁의 책임을 회피하기 위해 귀족들의 입을 막고 권력을 독점하는 길을 택했다. 

이것이 귀족들의 인간적 갈등과 정치적 이해관계가 충돌하여 암살이라는 극단적인 선택으로 이어진 직접적인 이유였다.


야코프 요한 앙카르스트룀, 스웨덴의 구스타프 3세를 암살한 사람.

2. 음모의 테이블

그들의 아지트는 스톡홀름 구 시가지(감라스탄) 깊숙한 곳에 위치한 허름한 선술집의 지하 창고였다.

어둠 속에서 음모의 주동자들이 모였다.


아돌프 리블링 대위 (Adolf Ludvig Ribbing, 젊은 장교, 왕의 개인적인 모욕에 앙심을 품음)

클라스 비에른스틸레 대위 (Claes Fredrik von Ehrensvärd, 리블링과 함께 실행 계획을 세운 인물)

칼 프레드릭 페클린 장군 (Carl Fredrik Pechlin, 은퇴한 귀족, 구스타브 3세를 증오한 원로 정치가)

공모자들의 서열과 실제 지시 관계는 사료에 따라 조금씩 다르며, 일부 인물은 사건 후에야 연루 사실이 드러났다.


이들은 모두 구스타브 3세가 1772년 쿠데타(왕권 회복을 위한 구스타브 3세의 친위 쿠데타)를 통해 왕권을 강화하고, 특히 1789년 연합 및 안보법을 통과시키면서 귀족 계층의 권력을 완전히 짓밟은 것에 대한 복수심을 공유했다. 

그들의 주장은 '자유 시대(Frihetstiden, 1718~1772년, 귀족 의회가 권력을 가졌던 시기)'의 회복이었다. 

왕의 독재는 프랑스의 공포정치만큼이나 위험하다는 비판이었다.


음모의 중심인물, 칼 프레드릭 페클린

리블링이 지도를 펼쳤다. 

"폐하는 다음 주 토요일, 왕립 오페라 극장 (Kungliga Operan, 구스타브 3세가 직접 설립하고 예술 활동의 중심지였던 극장)에서 열리는 가면 무도회 (Maskeradbal, 당시 유럽 귀족들의 유행하던 사교 파티)에 참석할 예정이오."


앙카르스트룀이 테이블을 내려쳤다. 

"가면 무도회? 완벽하군. 혼돈, 소음, 수백 명의 익명성! 경호원들의 눈을 피하기 가장 좋은 장소요. 게다가 그는 암살 시도가 있을 것이라는 예언에도 불구하고 절대 행사를 취소하지 않을 광적인 낙천주의자이지."


3. 왕의 오만과 경고

같은 시각, 왕궁. 

구스타브 3세는 새로 지은 오페라 대본을 검토하며 희미하게 웃고 있었다. 

그는 자신이 곧 암살당할 것이라는 익명의 경고장(앙카르스트룀이 보낸 편지)을 받았지만, 이를 무시했다.


"나를 죽이겠다고? 이 오만하고 나약한 귀족 놈들이! 그들은 내 오페라의 관객일 뿐, 무대 위의 배우가 될 수는 없다. 그들의 유일한 재능은 징징거리는 것뿐이지."


그의 오른팔인 구스타프 아돌프 레우테르홀름 남작 (Gustaf Adolf Reuterholm, 왕의 충신이자 이후 섭정 체제의 실세)이 걱정스러운 표정으로 말했다.


"폐하, 경고가 너무 구체적입니다. '무도회', '총', '자정'. 단 한 번만이라도 경호를 강화하시거나, 차라리 참석을 취소하시는 것이 어떻겠습니까? 프랑스에서 일어난 일을 잊으셨습니까?"


왕은 어깨를 으쓱했다. 

"루이 16세는 왕이 아니라 돼지처럼 행동했기 때문에 죽은 것이다. 나는 내 백성들에게 예술과 영광을 보여주는 배우다. 무도회는 예정대로 진행된다. 나는 두려움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구스타브 3세는 귀족들의 반발이 단지 정치적 이해관계 때문이라고 판단했다. 

귀족들이 자신들의 권력을 잃는 것에 분노하는 것은 당연하지만, 감히 왕을 해치려 하리라고는 생각하지 않았다. 

이것이 그가 가진 최대의 오만함이자 판단의 과실이었다.


오직 죽음만이 자유를 준다


4. 앙카르스트룀의 딜레마

암살 직전의 며칠 동안, 앙카르스트룀은 격렬한 내면의 갈등을 겪었다. 

그는 단순히 굶주린 백성을 위한다는 대의명분뿐만 아니라, 왕으로부터 받은 개인적인 치욕과 모욕에 대한 복수심으로 가득 차 있었다. 

그는 명분과 사적인 복수심 사이에서 흔들렸다.


그의 아내, 헬레나가 어둠 속에서 속삭였다. 

"여보, 대체 무엇을 계획하시는 겁니까? 당신의 눈빛이 너무 무섭습니다. 당신은 군복을 입었을 때도, 지금처럼 차가운 눈빛이 아니었어요."


앙카르스트룀은 아내에게 사실을 말할 수 없었다. 

"나는 곧 내 이름으로 스웨덴에 자유를 가져다줄 것이다. 왕의 독재는 곧 종말을 고해야 해. 오직 죽음만이 우리에게 자유를 줄 수 있다."


이때, 앙카르스트룀이 사용하려는 권총은 쌍열 권총(Dueling Pistols)이었다. 

당시 귀족들 사이에서는 명예 결투(Dueling, 명예를 위해 목숨을 걸고 싸우는 결투)가 유행했는데, 암살자들은 이 결투용 권총을 개조하여 납탄 대신 고철 조각과 못을 채워 넣었다. (충전물의 종류는 사료마다 차이가 있다)

이는 왕에게 치명적인 상처를 입혀 결코 회복할 수 없게 하려는 악의적인 의도였다. 

왕을 단순히 죽이는 것 이상으로, 고통을 주려는 잔혹한 비판의 의도가 담겨 있었다.


5. 음모의 누설과 지연

암살 계획은 완벽하게 짜였지만, 치명적인 실수가 발생했다. 

공모자 중 한 명인 카를 폰 슐레겔이 암살 계획을 자신의 친구에게 술김에 누설한 것이다. 

이 소문은 즉시 왕의 측근인 레우테르홀름 남작에게 전달되었다.


레우테르홀름 남작은 왕에게 달려가 무릎을 꿇었다. 

"폐하! 제가 어젯밤에 입수한 정보에 따르면, 이번 무도회에서 폐하를 노리는 음모가 확실합니다. 앙카르스트룀과 리블링이 주동자라고 합니다. 제발, 취소하십시오!"


왕은 불쾌한 듯 남작을 밀쳐냈다. 

"다시 한번 말하지만, 나는 두려움을 보여주지 않을 것이다! 그리고 만약 그들의 말이 사실이라면, 그들에게 내가 얼마나 담대하게 죽음을 맞이하는지 보여주겠다. 그들의 음모는 내 예술적 연출의 마지막 막이 될 것이다."


구스타브 3세는 '로마의 황제'처럼 죽음을 맞이하고 싶어 했다. 

그는 자신의 삶 전체가 한 편의 오페라라고 믿었고, 비극적인 결말조차도 화려하게 연출되기를 원했다.

이 극적인 자기애와 오만함은 결국 그를 죽음으로 이끌었다. (이러한 비극적 운명은 후대에 오페라 '가면 무도회(Un ballo in maschera)'의 모티브가 된다.)


레우테르홀름은 절망했다. 

그는 왕에게 경고했지만, 왕의 고집을 꺾을 수 없었다. 

그는 최후의 수단으로 왕이 무도회에 도착하는 즉시 경호원들을 배치할 것을 명령했지만, 이미 시간은 늦었다. 

경호 체계의 느슨함과 왕의 오만함이 결합된 이 순간은 돌이킬 수 없었다.


총성과 가면, 그리고 피의 연회


6. 가면 무도회의 밤

스웨덴 달력 기준 1792년 3월 16일 밤, 왕립 오페라 극장. 

화려한 샹들리에와 왁자지껄한 음악 소리가 울려 퍼졌다. 

가면을 쓴 수백 명의 귀족들이 화려한 옷을 입고 춤을 추고 있었다. 

왕은 검은색 외투에 흰색 띠를 두르고, 얼굴의 반을 가리는 베네치아 스타일의 검은 가면을 쓰고 있었다. 

이 가면은 그가 즐겨 사용하던 것이었다.


구스타프 3세가 운명의 가면무도회에서 입었던 의상

밤 12시 15분경, 무도회가 절정에 달했을 때, 한 무리의 사람들이 왕을 에워쌌다. 

그들은 모두 검은색 가면을 쓰고 있었다.


앙카르스트룀이 왕의 어깨를 붙잡으며 불어로 속삭였다.


"Bonsoir, beau masque." (안녕하세요. 아름다운 마스크입니다.)


이것은 그들이 왕에게 보내는 마지막 암살 신호였다. 

왕은 이 말에 미소를 지었지만, 직감적으로 무언가 잘못되었음을 느꼈다. 

왕의 주위가 너무 빨리, 너무 가까이 비워진 것이다. 

이 순간, 구스타브 3세는 자신이 극장이 아닌 현실의 무대에 서 있음을 깨달았다.


안카르스트룀이 착용한 가면과 그가 오페라에 가져온 무기들.

7. 암살의 순간

왕이 돌아보는 순간, 앙카르스트룀이 품속에서 쌍열 권총을 꺼내 왕의 등 중앙에 거의 밀착시킨 채 방아쇠를 당겼다.


콰앙!


총성 소리가 오페라 극장의 음악과 웃음 소리를 갈가리 찢어놓았다. 

왕은 짧은 비명을 지르며 쓰러졌다. 

그의 흰색 띠는 피로 붉게 물들었다.


모두가 멈췄다. 

가면을 쓴 얼굴들이 일순간 혼란과 공포로 뒤덮였다. 

몇 초의 정적 후, 지옥 같은 아수라장이 펼쳐졌다.


암살 장면 삽화

8. 혼돈의 시작과 범인의 포착

혼란 속에서 앙카르스트룀은 재빨리 가면을 벗고 군중 속에 숨어 도주하려 했다. 

하지만 왕의 충성스러운 시종이었던 바르텐펠트(Bartenfeldt)가 즉시 비상 종을 울리고 극장의 모든 출구를 봉쇄했다.


바르텐펠트가 피를 흘리는 왕에게 달려갔다. 

"폐하! 괜찮으십니까? 누가 감히...!"


구스타브 3세는 고통 속에서도 배우처럼 말했다. 

"나를 죽이려 했군... 오페라 극장에서... 얼마나 극적인가... 범인을 놓치지 마라. 내 통치가... 무분별한 전제주의가 아니라 필요한 개혁이었음을 그들에게 증명해야 한다..."


총격의 잔해(탄환, 화약통, 고철 조각 등)가 현장에 남아 있었다. 

곧바로 수사가 시작되었고, 범인을 현장에서 체포하지는 못했지만, 앙카르스트룀이 버리고 간 권총이 단서가 되었다. 

이 권총은 특정 상인에게 팔렸으며, 상인은 곧 앙카르스트룀에게 팔았음을 실토했다. 

이는 치밀하지 못한 준비와 실행자의 과실이었다.


9. 왕의 고통과 사회적 논란

구스타브 3세는 곧 왕궁으로 옮겨져 의사의 치료를 받았지만, 앙카르스트룀이 고의적으로 채워 넣은 녹슨 고철 조각들 때문에 상처는 쉽사리 아물지 않았다. 

당시의 열악한 의학 기술과 위생 상태는 그의 죽음을 가속화시켰다.


왕은 총상을 입은 채로 무려 13일 동안 고통 속에 버텨야 했다. 

그는 이 기간 동안 아들에게 섭정을 맡기고 국정에 대한 마지막 지시를 내리면서, 자신의 통치가 정당했음을 끊임없이 주장했다.


당시 사람들은 왕이 상처를 입은 후에도 일부러 '가면 무도회' 가면을 쓰고 고통을 숨기려 했다는 썰을 퍼뜨렸다. 

왕이 끝까지 ‘극장 왕’ 이미지를 잃지 않으려 했다는 후대의 일화가 있으나, 이는 문학적 재현의 요소가 강하다. 

또 다른 썰은 왕이 자신의 독재에 대한 귀족들의 불만을 미리 알고도 일부러 그들의 분노를 유발해 자신을 순교자로 만들려 했다는 음모론이었다.


비극의 유산과 후대의 평가


10. 앙카르스트룀의 최후와 유산

결국 체포된 앙카르스트룀은 고문을 받았고, 모든 공모자들의 이름을 털어놓았다. 

그는 법정에서 자신의 행위가 "조국의 자유를 위한 정당방위"였다고 주장했으나, 법원은 그를 '국왕 살해죄'로 단죄했다.


"우리는 왕에게 충분히 경고했다. 우리가 제시한 탈출구(무도회 불참)를 왕이 스스로 무시하고 오만하게 죽음의 장소로 들어섰다. 따라서 왕의 죽음은 우리의 행위 때문이 아니라, 왕 스스로의 오만함과 운명에 대한 도전 때문에 일어난 것이다."


앙카르스트룀은 1792년 4월, 끔찍한 방식으로 처형되었다. 

그는 공개적으로 매질을 당한 뒤 오른손이 잘리고, 이어 참수되었다. 

사후 시신은 본보기로 전시되었다.

그의 집은 파괴되었고, 그의 이름은 공식적으로 '앙카르스트룀'에서 'kungamördaren' 왕 시해자로 바뀌었다. 

이처럼 극단적인 처벌은 왕권에 도전하는 모든 이들에게 강력한 경고를 보내려는 의도였다.


처형 전 채찍질을 당하는 안카르스트룀

앙카르스트룀은 민중 사이에서 '자유를 위한 투사'로 평가받기도 했지만, 대부분의 후대 역사가들은 그의 행위를 '귀족 계층의 이기적인 특권 수호'를 위한 극단적인 테러 행위로 강하게 비판한다. 

그의 동기는 공화주의적 대의명분이 아니라, 잃어버린 봉건적 권력에 대한 복수심에 가까웠기 때문이다.


11. 비극의 문화적 영향과 현대의 평가

구스타브 3세의 암살 사건은 유럽 예술계에 엄청난 영감을 주었다.

이 사건은 주세페 베르디(Giuseppe Verdi)의 유명 오페라의 모티브가 되었다. 

원래는 스웨덴을 배경으로 했으나, 검열 당국의 압력 때문에 배경을 보스턴으로 바꾸어야 했다. (왕실 암살이라는 주제가 당시 유럽 군주들에게 불편했기 때문에 정치적 관계로 인해 검열됨)


구스타브 3세에 대한 평가는 극명하게 엇갈린다.

그는 스웨덴 문화와 예술의 황금기를 이끌었으며(왕립 오페라 극장, 스웨덴 아카데미 설립), 농민들의 권리를 향상시키고 고문을 폐지하는 등 진보적인 개혁을 단행했다.

그러나 그의 통치는 독단적이고 권위적이었으며, 러시아 전쟁으로 국고를 탕진했다. 

특히 연합 및 안보법을 통해 귀족들의 모든 정치적 권한을 박탈하고 독재를 완성하려 했다는 점에서 강한 비판을 받는다. 

그의 죽음은 권력 독점에 대한 역사의 준엄한 심판으로 여겨진다.


오페라 가면무도회 홍보포스터

12. 어원과 교훈: 왕을 쏘다

이 비극적인 역사적 사실은 후대에 여러 언어에서 '극적인 암살' 또는 '가면 뒤의 배신'이라는 문학적 상징으로 사용되었다. 

특히, 왕을 쏜 앙카르스트룀의 개명된 성씨 'kungamördaren'는 스웨덴 역사에 반역과 복수의 어두운 기원으로 남아 있다.


절대 권력은 절대적으로 부패하며, 아무리 선의의 목적을 가졌다 하더라도 소통과 견제를 무시한 독단적인 권력 강화는 결국 비극적인 파국을 낳는다. 

구스타브 3세는 '개혁'이라는 명분을 내세웠지만, 그의 방식은 '독재'였고, 이는 곧 귀족들의 '자유'를 명분으로 한 '복수'라는 극단적인 형태의 반발을 불러왔다. 

한쪽의 오만과 다른 쪽의 이기심이 결합될 때, 그 희생양은 언제나 국가와 백성이 될 수밖에 없다.


왕이 자신의 오페라에서 내려와 국민의 목소리를 들었다면, 앙카르스트룀이 개인적인 복수심을 대의명분으로 포장하지 않았다면, 스웨덴의 역사는 다른 방향으로 흘러갔을 것이다. 

권력을 가진 자의 가장 큰 과실은 '소통 단절'이며, 이를 비판하는 자의 가장 큰 과실은 '폭력'을 선택하는 것이다.


이 글은 1792년 스웨덴 국왕 구스타브 3세 암살 사건을 중심으로, 동시대 스웨덴의 권력 구조와 귀족층의 정치적 반발을 소설적으로 재구성한 것입니다. 

주요 인물·날짜·법령(1772년 쿠데타, 1789년 연합 및 안보법, 1792년 3월 16일 피격, 3월 29일 사망)은 알려진 역사 기록에 따르되, 대사와 심리 묘사, 일부 장면(암살 직전의 인사말, 무도회 현장의 동선, 왕의 ‘극장 왕’ 연출 의도 등)은 독자의 이해를 돕기 위한 각색입니다. 

실제 사료에서는 암살자의 발화, 공모자들 사이의 서열, 레우테르홀름의 당시 역할, 탄약의 구성 등에 차이가 있으므로, 학술·교육·법적 용도로는 1차 사료와 최신 연구를 함께 참조하시기 바랍니다.


In March 1792, Sweden’s King Gustav III, an enlightened but autocratic ruler who had stripped nobles of power and waged costly wars, was shot at a masked ball in Stockholm by disgruntled aristocrat Jacob Johan Anckarström, acting with other nobles. 

The king survived thirteen days but died of infection. 

The plot exposed deep tensions between royal absolutism and noble privilege, later inspiring artworks such as Verdi’s opera. 

It marked a dramatic turning point in Swedish court politics in 179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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