백범(白凡) 김구(金九)의 길: 문화강국(文化強國)의 꿈
잔반(殘班)의 아들, 비움의 결심
1876년(고종 13년), 황해도(黃海道) 해주(海州) 백운방 텃골(팔봉산 아래 위치한 마을)에서 김구(金九)는 초명 김창암(金昌巖)으로 태어났다.
그의 아버지 김순영(金純永)은 스물네 살의 노총각으로, 열네 살 현풍곽씨(玄風郭氏)의 딸을 통해 아들을 얻었다.
어머니가 그를 잉태할 때 푸른 밤송이 속에서 붉은 밤 한 개를 얻어 감춘 것이 태몽이었다.
그러나 출생은 난산이었고, 할머니 장씨(張氏)가 돌아가신 날 태어나는 비극적인 숙명을 안고 있었다.
그의 가문은 신라(新羅) 경순왕(敬順王)의 후예(後裔)인 안동 김씨(安東金氏)라고는 하나, 해주에 망명해 와서 대대로 살면서 잔반(殘班: 몰락한 양반 또는 상민에 가까운 계층)으로 천대받았다.
특히 인근의 덕수 이씨, 진주 강씨 일족, 그리고 대귀족 신 안동 김씨의 멸시가 심했다.
“우리 집안의 처녀가 강씨, 이씨 문중으로 출가하는 것은 영광이지만, 그들 문중의 처녀가 우리 집안으로 시집오는 것을 보지 못했으니”
이러한 굴욕감은 소년 김창수(金昌洙: 김구의 초기 이름 중 하나)에게 과거(科擧)에 응시하여 양반의 신분을 획득하려는 동기를 주었다.
17세가 되던 해, 김창수는 과거 시험에 낙방하고 큰 실망에 빠졌다.
그는 아무리 글공부를 해봤자 세도 있는 집안 자제들의 대서인(代書人: 대신 글을 써주는 사람) 노릇밖에 못할 세상임을 깨달았다.
낙심한 아버지가 풍수(風水)나 관상(觀相) 공부를 권유하자, 김창수는 관상학 서적인 ≪마의상서(麻衣相書)≫에 깊이 심취하여 석 달 동안 독방에서 거울을 보며 연구했다.
결과는 절망적이었다.
자신의 얼굴에서는 부와 귀는 없고, 천(賤)하고 빈(貧)하고 흉(凶)한 상(相)만이 보였다.
세상을 살고 싶은 마음조차 사라지던 그때, 그는 책에서 깨달음을 얻었다.
"얼굴이 잘생긴 것은 몸이 건강한 것만 못하고(顔好不若身好), 몸이 건강한 것은 마음이 바른 것만 못하다(身好不若心好)"
그는 자리에서 벌떡 일어났다.
“그래, 정녕 마음 좋은 사람만 되자! 마음을 좋게 먹고 이 짐승 같은 세상을 살아남아 보리라!”
이후 그는 병서(兵書)를 읽고 마을 아이들에게 글을 가르치며 1년여를 보냈다.
그의 사상의 뿌리는 유가(儒家), 도가(道家), 불교(佛敎) 등 동양 사상 위에 계몽주의와 그리스도교(基督敎)가 정착한 다원적이고 포괄적인 특성을 보였는데, 이러한 종교적 편력(遍歷)과 지성적 고민은 전환기를 살았던 젊은이의 고뇌의 단면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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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1946년) |
동학(東學)의 깃발: 민족 평등의 꿈
19세가 되던 1894년(갑오년)에 이르러 조선 전역은 동학 농민 혁명(東學農民革命)의 물결로 들끓었다.
김창수는 자신을 괴롭히던 신분 차별이 없는 평등주의(平等主義)를 표방하는 동학(東學)에 깊이 매료되었다.
그는 쌀 한 말, 백지 세 권, 황초 한 쌍을 예물로 준비하여 동학에 입도하였고, 곧 접주(接主: 교리를 전파하는 지도자, 오늘날의 전도사 개념)가 되어 700여 명의 무장 군사를 지휘하게 되었다. (전승)
그의 부대는 산포수(山砲手)가 많아 무력으로는 황해도(黃海道) 내에서 뛰어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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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동학 농민 혁명 |
최고회의(最高會議)에서 황해도 수부(首府)인 해주성(海州城)을 공략하기로 결정하고, 병서에 소양이 있던 김창수가 선봉장(先鋒將)이 되었다.
그는 푸른 갑사에 ‘팔봉도소(八峰都所)’라고 크게 쓴 기를 앞세우고, ‘척양척왜(斥洋斥倭)’ 네 글자를 표어(標語)로 높이 달았다.
그러나 해주성 공격은 참담한 실패로 끝났다.
왜병의 시험 사격에 남문을 향하던 선발대가 도망치기 시작했고, 총지휘부에서 퇴각 명령이 내렸다.
선봉장인 그만이 서문으로 맹렬히 공격하려 했으나, 뒤따르던 군사들이 흩어져 버렸다.
“호랑이가 몰려 들어오면 가만히 앉아 죽을까, 참나무 몽둥이라도 들고 나서서 싸우자!” (해월 최시형)
김창수는 패배에 분개하며 훈련을 다짐했다.
그는 구월산(九月山) 패엽사(貝葉寺)에 군사를 모으고 훈련을 계속하는 한편, 청계동(靑溪洞)의 유학자 안태훈(安泰勳: 안중근(安重根) 의사의 아버지) 진사(進士)를 찾아 의탁하게 되었다.
안 진사는 이미 동학당을 토벌하여 성공을 거두었던 인물이었다.
김창수는 일찍이 적군(敵軍)이었던 안 진사의 집에 몸을 의탁하는 것을 내심 불쾌하게 여겼으나, 정덕현(鄭德鉉)의 역설(力說: 힘주어 말함)과 안 진사의 인재를 사랑하는 위인(偉人)됨을 믿고 찾아갔다.
청계동(靑溪洞: 신천(新川)에 위치)에서 김창수는 생애의 중요한 두 인물을 만났다.
성리학자 후조(後凋) 고능선(高能善) 산림(山林)과 안 진사의 셋째 아들 안중근(安重根: 당시 13세, 사격술이 뛰어났음)이었다.
고능선은 그에게 성현(聖賢)을 목표로 하고 의리에서 벗어나지 말 것을 역설하였다.
“뛰어난 재능이 있더라도 의리에서 벗어나면 그 재능이 도리어 화단(禍端)이 된다네.” (고능선)
고 선생은 또한 실행의 중요성을 가르치며 “득수반지 무족기 현애철수 장부아(得樹攀枝無足奇 懸崖撤手大丈夫兒)”를 설명했다.
이 말은 '나뭇가지를 잡아도 발에는 힘주지 않고, 벼랑에 매달려도 손을 놓을 수 있는 것이 대장부다'라는 뜻으로, 이 글귀는 훗날 김구가 자신의 행동을 결정하는 데 큰 영향을 미쳤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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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승 후조 고능선 |
김창수는 고능선의 가르침을 받으며 청국(淸國)으로 건너가 의병 활동을 벌이기로 결심했다.
하지만 고능선이 안태훈이 서양 오랑캐의 종교인 천주학(天主學: 가톨릭)에 관심을 보이자 “오늘부터 자네와 끊네” 하고 절교하는 것을 보며, 김창수 역시 안 진사에게 섭섭한 마음을 가졌다. (논쟁: 고능선은 당시 청을 통해 왜적을 몰아내야 한다는 사상을 가지고 있었다. 천주학을 믿는 안 진사는 대의(大義)에 어긋나는 일이라고 생각되었다.)
김창수는 청국으로 가는 길에 참빗장수 김형진(金亨鎭)을 길동무 삼아, 백두산(白頭山) 관람과 만주(滿洲) 유람을 계획했다.
함경도를 거쳐 만주 통화(通化)까지 갔으나, 김이언(金利彦)의 의병단에 가입하여 강계성(江界城) 습격에 참가했다가 또다시 실패를 맛보았다.
치하포(鴟河浦)의 의(義)와 감옥학교
국모보수(國母報讐)의 피
1896년(병신년) 2월 하순.
스물한 살의 김창수는 방랑을 마치고 고향으로 돌아가던 중이었다.
치하포(鴟河浦: 황해도 안악군에 있던 나루터) 나룻배 선객으로 얼음산(빙산)에 갇히는 고생을 겪고, 겨우 나루터 배 주인집에 묵게 되었다.
그는 방 안에서 단발을 한 수상한 행객 한 명을 발견했다.
그는 장연(長淵)에 산다고 했으나 말씨가 서울말이었고, 흰 두루마기 밑으로 군도집(軍刀集: 칼집)이 보였다.
김창수는 그가 명성황후 시해(閔妃弑害) 사건(을미사변, 1895)에 연루된 미우라 고로(三浦梧樓)의 일당이거나, 최소한 민족에게 독균이 될 왜놈이라고 확신했다.
“저놈 한 놈을 죽여서라도 하나의 수치를 씻어보리라!”
김창수는 혼자였고, 적은 칼을 지니고 있었다.
이때 고능선 선생의 가르침, “현애철수(懸崖撤手)”의 글귀가 떠올랐다.
그는 두려움을 이겨내고 의를 위해 행동하기로 결심했다.
그는 아침 식사 중이던 왜놈을 향해 “이놈!” 소리를 지르며 발길로 복장을 차 계하(階下: 섬돌 아래)에 나가떨어지게 했다.
격투 끝에 왜놈의 칼을 빼앗아 머리부터 발끝까지 난도질했다.
“나는 그 피를 움켜 마시고, 또 왜의 피를 내 낯에 바르고…” (전승: 김구의 단독 행동이 의를 위한 것임을 강조하는 상징적인 장면.)
주인이 나중에 확인한 바에 따르면 그 왜놈은 육군 중위 토전양량(土田讓亮: 쓰치다 조스케)이었다.
김창수는 주인의 밥 일곱 그릇을 급히 비비고, “오늘은 먹고 싶은 왜놈의 피를 많이 먹었더니 밥이 아니 들어가는고.”라고 허세를 부렸다.
그는 “국모의 원수를 갚으려고 이 왜를 죽였노라”라는 포고문(布告文)을 써서 벽에 붙이고, 왜놈의 시신은 물고기들의 먹이가 되도록 강에 넣으라고 명했다. (논쟁: 쓰치다 조스케가 명성황후 시해와 직접적인 관련이 있다는 확실한 근거는 제시되지 않았으나, 김구는 포고문을 통해 자신이 '국모보수'의 의로써 행동했음을 천명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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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을미사변을 일으킨 낭인들 |
인천 감옥(仁川監獄): 삶과 죽음의 경계
집으로 돌아온 김창수는 부모님께 모든 일을 아뢰고 체포되기를 기다렸다.
석 달 후, 그는 체포되어 해주(海州) 옥에 갇혔고, 곧 인천(仁川) 감리영(監理營)으로 이송되었다.
그의 죄명은 살인강도(殺人強盜)였다.
김구의 어머니는 아들의 목숨을 살리려 인천까지 따라와 박영문(朴永文)의 집 식모(食母)로 들어가 삼시 세끼 밥을 아들에게 넣어주었다.
옥중에서 장질부사(腸窒扶斯: 장티푸스)에 걸려 죽을 고비를 넘기기도 했다.
김창수는 재판정에서 감리사 이재정(李載正), 경무관 김윤정(金允貞) 등 관원들을 향해 호통쳤다.
“나는 국모 께서 왜적의 손에 돌아가신 국가의 수치를 당하고서는 청천백일 하에 제 그림자가 부끄러워 왜구 한 놈이라도 죽였거니와, 당신네는 군부(君父)의 원수를 갚지 못하고 한갓 영귀와 총록을 도적질하려는 더러운 마음으로 임금을 섬긴단 말이오?”
김창수의 충의에 감리사와 관원들은 낯이 붉어지고 고개를 수그렸다.
결국 그는 사형 선고를 받았고, 형 집행일이 정해졌다.
그러나 사형 직전, 기적적으로 목숨을 건졌다.
법무대신이 사형수 명부를 올렸을 때, 입직 승지(承旨: 비서 기관 관리) 중 한 명이 김창수의 죄명이 ‘국모보수(國母報讐)’인 것을 보고 고종(高宗) 황제께 다시 보고했다.
고종은 즉시 어전회의를 열어 사형을 정지시켰다.
더욱 놀라운 것은 이 사형 정지 전화가 오기 사흘 전에 서울과 인천 사이에 전화가 개통(電話開通)되었다는 점이다. (전승: 김구가 살아난 것은 하늘이 도왔다는 전승적 해석의 근거가 된다.)
옥중에서 김창수는 외부에서 몰래 들여온 책자, 특히 서양문물을 소개한 ≪태서신사(泰西新史)≫, ≪세계지지(世界地志)≫ 등을 탐독하며 신학문(新學問)의 중요성을 깨달았다.
그는 더 이상 유학자의 척양척왜(斥洋斥倭) 사상만으로는 나라를 건질 수 없음을 깨닫고, 국민 개개인을 교육하여야 한다고 결심했다.
그는 감옥을 학교로 삼아 죄수들에게 글을 가르쳤고, 죄수들의 소장(訴狀)을 대신 써주어 억울함을 풀어주기도 했다.
죄수들은 그의 소장 대서(代書)가 '꼭 득송(得訟: 소송에서 이김)한다' 고 믿었다.
이때 갈보 서방(창녀의 남편)이었던 조덕근(趙德根)에게서 평시조, 엮음시조 등 소리(唱)를 배웠는데, 훗날 이 소리는 옥중 동지들과의 교류 수단이 되기도 했다.
김창수는 옥중에서 김주경(金周慶: 강화 아전 출신)의 도움을 받아 탈옥(脫獄)을 결심했다.
그는 옥사정(獄舍政)에게 아편값으로 돈을 주어 매수하고, 무술년(1898) 3월 9일 밤, 죄수들의 술잔치 틈을 타서 철창을 들고 감옥 담을 넘어 탈옥에 성공했다.
옥문을 나선 것은 2년 만이었다.
탈옥 후 그는 공주 마곡사(麻谷寺)에 들어가 법명(法名) 원종(圓宗)을 받고 불교(佛敎)에 귀의하여 1년여간 중노릇을 했다.
그러나 청정적멸(淸淨寂滅)의 도(道)보다는 세속에서의 독립운동에 대한 마음이 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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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일제강점기때 마곡사 |
인연(因緣)의 갈림길과 새로운 이름
1903년경, 아버님의 3년 상을 마치고 약혼녀가 급사하자, 김창수는 개신교 감리회(監理會)로 개종했다.
그는 장연(長淵)에서 봉양학교(鳳陽學校) 교원으로 활동하며 교육 계몽운동을 펼쳤다.
이때 신여성이던 도산(島山) 안창호(安昌浩)의 여동생 안신호(安信浩)와 결혼할 뻔하다 무산되고, 11세 연하의 최준례(崔俊禮)와 결혼했다.
최준례는 이미 어머니가 강성모(姜聖模)에게 허혼(許婚)했으나, 혼인의 자유를 주장하며 김창수에게 시집왔다.
이들의 혼인 예식은 미국인 목사 군예빈(Gurnabin)의 주례로 개신교식으로 치러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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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부인 최준례(오른쪽)와 장남 김인(가운데) |
이후 김창수는 안악(安岳) 양산학교(楊山學校) 교원이 되었고, 비밀 결사 조직인 신민회(新民會)에 가입하여 활동했다.
1911년(신해년), 소위 ‘데라우치(寺內) 총독 암살 미수 사건’(105인 사건 또는 신민회 사건)에 연루되어 체포되었다.
그는 안명근(安明根)의 강도 사건에 억지로 엮여들어, 징역 17년(강도 15년, 보안법 2년)을 선고받았다.
다시 서대문 감옥(西大門監獄)에 갇힌 김창수는 이곳에서 자신의 호(號)와 이름을 바꾸는 중대한 결심을 했다.
“나의 목숨은 너희가 빼앗아도 나의 정신은 너희가 빼앗지 못하리라!”
그는 옥중에 있는 동지들에게 “구몰니중홍비해외(龜沒泥中鴻飛海外: 거북은 진흙 속에 있으며 기러기는 바다 위를 난다)”라고 중얼거리며 자신의 결심을 굳혔다.
그는 자신의 이름 ‘김구(金龜: 거북 구)’ 를 ‘김구(金九: 아홉 구)’로 고쳤다. (이는 왜놈의 국적에서 이탈하는 뜻이었다)
그리고 자신의 당호(堂號) 연하(蓮下) 를 버리고 ‘백범(白凡)’으로 정했다.
“백범(百凡)이라 함은 우리나라에서 가장 천하다는 백정(白丁)과 무식한 범부(凡夫)까지 전부가 적어도 나만한 애국심을 가진 사람이 되게 하자 하는 내 원을 표하는 것이다.”
그는 옥중에서 매일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으면서 기도했다.
“우리나라가 독립하여 정부가 생기거든 그 집의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는 일을 하여보고 죽게 하소서!”
상해(上海)의 백범(白凡), 임시정부(臨時政府)를 사수하다
문지기를 자처한 국장(局長)
1919년(민국 원년), 3·1 운동이 전국을 휩쓴 후, 독립운동가들은 중국 상해에 모여 대한민국 임시정부(大韓民國臨時政府)를 수립하였다.
임시헌장(臨時憲章) 제1조는 ‘대한민국은 민주공화제(民主共和制)로 함’을 밝혀, 4천 년 역사상 처음으로 국민이 주인인 나라가 세워졌음을 알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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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상해 임시정부 수립 |
김구는 임시정부 수립에 참여하여, 처음에는 내무총장(內務總長) 안창호(安昌浩)에게 문 파수(門把守: 문지기)를 시켜달라고 청원했다.
이는 자신이 감옥에서 “우리 정부의 청사 뜰을 쓸고 유리창을 닦게 해달라”고 하나님께 빌었던 소원을 이루려는 것이었다.
하지만 안창호는 그의 청원을 기각하고 그에게 현재의 경찰청(警察廳)과 같은 경무국장(警務局長)의 일을 맡겼다.
김구는 경무국장으로서 임시정부의 정보 감찰 및 일제 밀정(密偵) 검거 활동을 담당했다.
1923년, 임시정부는 이승만(李承晩) 대통령 탄핵(彈劾)과 함께 창조파(創造派)와 개조파(改造派)의 논쟁으로 공중분해 될 위기에 처했다.
대부분의 독립운동가들이 임시정부를 포기하는 상황에서, 김구는 이동녕(李東寧), 이시영(李始榮) 등과 함께 끝까지 임시정부의 적통을 수호했다.
“임시정부는 이름만 남고 실상은 없는” 지경이었다.
정부 청사 월세도 내지 못하여 집주인에게 송사를 겪었고, 김구 자신도 돈벌이 직업을 가진 동포들(전차회사 차표 검사원 등)의 집을 돌아다니며 밥을 빌어먹는 거지 중의 상거지 생활을 했다.
그는 이재(理財: 돈 다루는 재주)에 밝지 못했다.
| 이승만에게 임시정부의 어려운 자금 사정을 호소하는 김구의 편지 |
동족(同族) 테러 논란과 스캔들
경무국장으로서 김구는 독립운동을 방해하거나 정보를 빼내는 밀정들을 엄히 처단했다.
이 과정에서 공산주의자 김립(金立) 암살 사건(1922년)이 발생했다.
김립은 소련 레닌 정부로부터 받은 독립운동 자금 200만 루블 중 일부를 임시정부에 내놓지 않고, 광동(廣東) 여자를 첩(妾)으로 들이고 호화로운 생활을 했다고 알려졌다.
김구는 이를 ‘횡령 행위’ 로 규정하고 그를 처형했다.
(논쟁: 일부 학자들은 김립의 횡령이 정적(政敵)이 유포한 뜬소문일 가능성을 제기하며, 김구의 이러한 행동을 ‘동족 테러’라고 비판하기도 한다.)
한편, 임시정부에서 탈퇴한 안창호(安昌浩)계 온건 우파 국민당원 옥관빈(玉觀彬)은 상해에서 큰돈을 벌어 부자가 된 뒤, 독립운동가들을 멸시하고 모욕하는 발언을 했다.
김구는 이를 용서할 수 없다며 정화암(鄭華巖)을 찾아가 옥관빈(玉觀彬) 암살을 제의했다.
옥관빈은 1928년 8월, 불조계(佛租界: 프랑스 조계 인근)에서 남화한인동맹원(南華韓人同盟員) 엄형순(嚴亨淳) 등의 총격을 받고 절명했다. (논쟁: 이는 김구의 우파 진영 내의 백색테러 의혹 중 하나로, 해방 이후에도 좌우익을 대상으로 테러를 지시했다는 의심을 받았다. 학계에서는 김구의 요인 암살 행위 자체는 사전적 의미의 테러 행위가 맞다고 보지만, 광복 이전 일본을 상대로 한 테러는 구국의 애국 행위로 높이 평가된다.)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의 불꽃
1930년대 초, 침체된 독립운동에 투지를 불어넣기 위해 김구는 임시정부 외곽에 한인애국단(韓人愛國團)을 조직하고 적극적으로 지휘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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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한인애국단 단원 |
그는 먼저 이봉창(李奉昌)을 만났다.
이봉창은 일본에서 노동을 하다 독립운동에 투신하고자 상해에 왔으며, 일본 천황(日皇)을 죽이고 싶다는 열망을 드러냈다.
“제 나이가 이제 서른한 살입니다. 앞으로 서른한 해를 더 산다 하더라도 지금까지보다 더 나은 재미는 없을 것입니다... 이제부터는 영원한 쾌락을 위해서 독립사업에 몸을 바칠 목적으로 상해에 왔습니다.” (이봉창)
김구는 이봉창의 결심에 눈물을 흘렸다.
그는 이봉창에게 일본인 행세를 하며 홍구(虹口)에 거주하게 하고, 폭탄 두 개(하나: 천황 저격용, 하나: 자살용)를 준비했다.
1932년(민국 21년) 1월 8일, 이봉창은 도쿄(東京) 사쿠라다몬(櫻田門)에서 일황(日皇)에게 폭탄을 던졌으나, 불행히 명중하지 못했다.
이봉창 의거가 실패했음에도, 이는 세계 만방에 한국 민족이 일본에 동화되지 않았음을 증명하는 사건이었다.
이때 중국 신문에서 ‘불행부중(不幸不中: 불행히 맞지 않았다)’이라는 표현을 썼다가 일본의 항의로 폐쇄되는 등 중국인들의 호응이 대단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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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봉창 의거에 실패한 장소 |
곧이어 김구는 홍구(虹口) 소채장수(蔬菜商) 윤봉길(尹奉吉)을 만났다.
윤봉길은 대일항쟁(對日抗爭)에 몸을 바치고자 찾아왔다.
김구는 1932년 4월 29일(일황 생일인 천장절), 홍커우 공원(虹口公園)에서 열릴 일본의 전승 축하식 때 거사(擧事)할 것을 제안했다.
윤봉길은 쾌히 응했다.
거사 당일, 김구는 윤봉길과 마지막 식사를 함께 했다.
“이 시계는 어제 선서식 후에 선생님 말씀대로 6원을 주고 산 시계인데 선생님 시계는 2원짜리니 제 것하고 바꿉시다. 제 시계는 앞으로 한 시간밖에는 쓸 데가 없으니까요.” (윤봉길)
"후일 지하에서 만납시다." (김구)
이 ‘시계 교환 일화’는 백범일지(白凡逸志)에 기록되어 오늘날까지 회자(膾炙)되는 비장한 명장면이다.
윤봉길이 던진 물통 폭탄과 도시락 폭탄으로 시라카와 요시노리(白川義則) 대장(大將: 육군대장) 등 일본 문무대관 다수가 중상을 입거나 즉사하며 큰 성공을 거두었다.
이로써 침체에 빠졌던 독립운동은 다시 점화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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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김구와 윤봉길 |
백만장자의 현상금
윤봉길 의거 직후, 일본은 김구를 체포하기 위해 현상금 60만 원(당시 가치로 현재 250억 원 상당의 거액)을 걸었다. (추정)
이 어마어마한 현상금은 김구가 당시 독립운동의 중심인물이었음을 증명한다.
김구는 피신해야 했다.
그는 중국 국민당 정부의 도움을 받아, 피치(Fitch) 부부 등 외국인 은인들의 도움으로 상해를 탈출하여 항주(杭州), 가흥(嘉興)으로 피신했다.
중국인 추푸청(褚輔成)은 김구가 가흥에 피신해 있을 때 큰 도움을 주었으며, 김구는 추푸청의 양아들 진동손(陳桐孫)의 집(수륜사창 근처의 호숫가 정자)에 머물렀다.
이 시기(1938년), 김구는 장사(長沙) 남목청(南木廳)에서 민족주의 진영 3당 통합 논의 중 조선혁명당원 이운한(李運漢)의 총격을 받았다.
그는 심장 옆에 총탄을 맞고 쓰러져 가망이 없다는 진단을 받았으나 타고난 체력으로 기적적으로 살아났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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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총을 맞고 수술 후 회복한 김구 |
“총알체(銃彈體)”: 떨림 속의 의지
이 저격 사건 후유증으로 김구에게는 심한 수전증(手顫症)이 생겼다.
그의 글씨체는 심하게 떨려서 구부러졌는데, 사람들은 이를 ‘떨림체’라고 불렀으나, 김구 본인은 농담으로 ‘총알체’라고 칭하기도 했다.
그가 임시정부 청사에 걸어두었던 휘호(揮毫) “권력이나 정치이념, 자신의 이익만을 좇기 위해 암투를 벌이기보다 나라와 후세를 위해 진정으로 민족을 아끼고 생각하는 마음으로 나라를 세우자”는 글귀에서도 그 특유의 떨리는 필체가 잘 드러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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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양심건국 |
1940년, 김구는 임시정부 주석으로 선출되어, 대일 선전포고를 하고 한국광복군을 이끌었다.
그는 외교적으로 장제스로부터 한민족의 독립을 약속받았다.
김구는 미국 OSS(전략사무국)와 합작하여 국내 진공 작전을 준비했다.
그는 미군 장군에게 “선생이 백만 금을 허하시면 이태 내에 일본, 조선, 만주 세 방면에 폭풍을 일으켜 일본의 대륙침략의 다리를 끊을 터이니 어떻게 생각하오?”라고 제안하기도 했다.
1945년 8월 15일, 일본제국이 갑작스럽게 항복을 했다.
김구는 이 소식을 중국 서안(西安)에서 축소주(祝紹周: 성 주석)로부터 전해 들었다.
“아! 왜적이 항복! 이것은 내게는 기쁜 소식이라기보다는 하늘이 무너지는 듯한 일이었다.”
김구는 천신만고(千辛萬苦) 끝에 준비한 광복군(光復軍) 참전이 허사(虛事)가 되었고, 우리 민족이 자체적으로 전쟁에 기여한 바가 없으므로 국제사회에서 발언권(發言權)이 박약(薄弱)해질 것을 크게 걱정했다.
임시정부 요인들은 개인 자격으로 귀국해야 했으며, 김구는 1945년 해방된 조국으로 돌아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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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임시정부요인 귀국기념 사진 |
통일(統一)을 향한 마지막 행보와 비극
해방 정국(解放政局)의 우익(右翼) 거두
김구는 우익(右翼) 3영수(三領袖) 중 1인으로서 민족주의 반공(反共) 우파의 대부였다.
그는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해야 한다고 주장했으나, 허헌(許憲)이나 여운형(呂運亨) 등 다른 독립운동 세력은 임시정부가 국제사회에서 승인받지 못했으며, 요인들이 개인 자격으로 귀국했음을 들어 법통론에 반대하기도 했다.
김구는 한때 이승만과 절친한 연대 관계를 유지했으며, 이승만을 “형님”이라고 부를 정도였다.
그러나 해방 후 단독정부 수립 문제를 두고 대립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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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승만 |
김구는 모스크바 삼상회의 결정을 신탁통치로 이해하고 격렬한 반탁 투쟁을 선도했다. (논쟁: 이는 해방 공간의 좌우 대립 구도 성립에 결정적인 역할을 하여 결국 남북 분단으로 연결되었다는 비판이 있다.)
그는 자신의 이념보다 민족을 중시하여, 남한 단독정부 수립에 반대했다.
“독재 중에서 가장 무서운 독재는 어떤 주의, 즉 철학을 기초로 하는 계급 독재다. 군주나 기타 개인 독재자의 독재는 그 개인만 제거되면 그만이어니와 다수의 개인으로 조직된 한 계급이 독재의 주체일 때에는 이것을 제거하기가 심히 어려운 것이다.”
"나는 38선을 베고 죽더라도 가야겠다."
김구는 미(美)·소(蘇) 양국이 설정한 38선(三八線)을 철폐하고, 동족상잔의 내전을 방지하기 위해 통일론을 포기하지 않았다.
1948년, 김구는 노구를 이끌고 평양에서 개최된 ‘남북협상’(민족통일연석회의)에 참석했다.
그는 그 자리에서 남한의 단독정부 수립뿐 아니라 북한의 단독정부 수립까지도 강력히 비판하며 통일 정부 수립을 요구했다. (논쟁: 이 때 김일성(金日成)에게 냉대만 받고 돌아왔다는 기록이 있다.)
그의 통일 운동은 “현실적이냐 비현실적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그것이 정토(正道)냐 사도(邪道)냐가 생명이다”라는 신념에서 비롯되었다.
어머니의 죽음과 마지막 길
1949년, 김구는 서울(Seoul) 경교장에서 육군 소위 안두희(安斗熙)의 총탄에 의해 암살되었다.
안두희의 배후는 알 수 없는 미궁으로 남아 있다. (논쟁: 안두희는 미군 방첩대(CIC) 정보원이자 백의사(白衣社) 특공대원으로 활동했다는 사실이 밝혀졌으나, 직접적인 지휘와 지시 여부는 명확한 근거가 없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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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경교장에 안치된 김구 |
김구는 암살 당일, 의식불명 상태였을 가능성이 높지만, 천주교식 세례성사와 종부성사(終傅聖事)를 받았다.
세례명은 베드로(Petrus)였으나, 그의 최종 종교는 감리회로 기술된다. (논쟁: 천주교에서는 죽음에 임박한 자에게 세례를 주는 전통이 있으며, 그의 생전 입교 의사표현에 대한 증언이 있으나, 이를 교차 검증할 자료는 없어 개종 여부는 확인되지 않는다.)
김구의 어머니 곽낙원 여사는 아들이 옥에 갇혀 있을 때도 “네가 경기 감사나 한 것보담 더 기쁘게 생각한다”고 할 만큼 씩씩했으나, 독립을 보지 못하고 중경(重慶)에서 “내 원통한 생각을 어찌하면 좋으냐”는 마지막 말을 남기고 운명했다.
아들 김인(金仁) 역시 중경 기후에 희생되어 그곳에 묻혔다.
후대의 평가와 문화적 유산
김구는 대한민국(大韓民國) 헌법 전문(憲法前文)에서 오늘날의 대한민국이 대한민국 임시정부의 법통을 계승함을 천명하는 만큼, 한국 독립운동사에서 매우 높은 상징성을 가진다.
그는 보수와 진보의 정치성향을 막론하고 존경받는 민족주의 지도자이다.
특히 그가 《백범일지》에 남긴 문화강국론(文化強國論)은 후대에 큰 영향을 미쳤다.
“오직 한없이 가지고 싶은 것은 높은 문화의 힘이다. 문화의 힘은 우리 자신을 행복하게 하고 나아가서 남에게 행복을 주기 때문이다.”
2000년대 이후 한류가 세계적으로 각광받으면서, 김구의 이 비전은 소프트 파워(Soft Power)의 대표적 사례로 손꼽힌다.
현대 한국 사회에서는 한류 콘텐츠가 유행할 때마다 우스갯소리로 “김구 선생님 보고 계십니까?”라는 밈(Meme)이 등장하는 등, 그의 문화적 유산은 대중적으로 살아 숨 쉬고 있다.
2026년은 김구 탄생 150주년으로 유네스코 기념해로 지정되었는데, 이는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문화의 힘’을 통해 세계 평화를 추구한 그의 비전 때문이었다.
에필로그: 이정표(里程標)의 무게
김구(金九)가 생전에 가장 간절히 원했던 것은 완전하고 자주적인 대한(大韓)의 독립(獨立)이었다.
그의 평생의 발자취는 자신이 남긴 명언 그대로였다.
“눈길을 걸어갈 때 어지럽게 걷지 말기를, 오늘 내가 걸어간 길이 훗날 다른 사람의 이정표(里程標)가 되리니….”
그는 황해도의 잔반(殘班) 아들로 태어나, 과거에 낙방하고, 동학에 몸담았다가, 살인강도의 누명을 쓰고 사형 직전에 극적으로 살아남았으며, 임시정부의 파수꾼을 자처했으나 종국에는 최고 지도자가 되었다.
그의 삶은 혼란스러웠던 구한말부터 해방 정국까지, 격변하는 시대의 모든 고난과 역경을 압축해 보여주는 거대한 드라마였다.
그는 평생 자신의 이익이나 권력을 좇지 않고, 오직 조국과 민족을 위해 헌신했으며, 마침내 분단을 막기 위해 자신의 목숨을 걸고 38선을 넘었다.
그의 비극적인 암살은 민족의 통일이라는 숙제와 함께 오늘날까지 우리에게 남아 있다.
백범 김구의 일대기를 통해 우리는 몇 가지 중요한 교훈을 얻을 수 있다.
1. 흔들리지 않는 신념의 힘
김구는 수많은 종교적, 이념적 편력과 정치적 논란(테러리즘 논란 등)에도 불구하고, '대한의 완전한 자주 독립'이라는 단 하나의 소원만을 추구했다.
큰 뜻을 품고 나아가되, 현실의 불가능함을 따지기보다 그것이 '바른 길이냐 아니냐'를 기준으로 삼는 결단력은 혼돈의 시대에 필요한 지도자의 덕목이었다.
2. 문화의 힘과 미래 비전
그는 부강한 나라보다 가장 아름다운 나라, 높은 문화의 힘을 가진 나라를 열망했다.
이 비전은 후대 한국이 군사력이나 경제력이 아닌 문화적 영향력(한류)을 통해 세계적 위상을 높이는 현대적 현실에서 더욱 빛을 발한다.
진정한 강국은 무력이 아닌 정신과 문화에서 나온다는 통찰을 배울 수 있다.
3. 인간적인 관계의 중요성
김구는 임시정부의 극심한 빈곤 속에서도 동포들의 동정과 후원으로 활동을 이어갈 수 있었다.
어머니의 헌신적인 뒷바라지와 아내 최준례의 희생, 그리고 윤봉길 의사와의 깊은 신뢰 관계는 그의 인간적인 면모를 보여준다.
"지옥을 만드는 방법은 간단한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미워하면 된다. 천국을 만드는 방법도 간단하다. 가까이 있는 사람을 사랑하면 된다."는 그의 말처럼, 그의 성공은 결국 인간적인 유대에 기반하고 있었다.
김구의 삶은 때로는 논쟁적이었고, 때로는 비현실적인 이상에 머물렀다는 비판도 받았지만, 그는 한민족의 자존심과 독립의 법통을 지킨 상징적인 존재로 영원히 기억될 것이다.
이 글은 《백범일지》, 회고록, 주요 연구서 등 신뢰할 만한 자료를 바탕으로 백범 김구의 생애를 사실에 최대한 맞추어 재구성한 서사형 글입니다.
연도·지명·직책·사건의 큰 흐름은 알려진 역사 기록을 따랐으나, 일부 장면 배치와 대사, 심리 묘사, 상징적 표현은 당시 상황을 이해하기 쉽게 만들기 위한 서사적 각색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치하포 의거, 김립·옥관빈 사건, 안두희 배후, 현상금 액수 환산 등 논쟁이 있거나 자료가 엇갈리는 대목은 본문에서 (전승)/(논쟁)/(추정)으로 구분하여 표기했으나, 세부 해석은 연구자에 따라 달라질 수 있습니다.
따라서 이 글은 학술 연구를 대체하기보다, 백범 김구의 삶과 사상을 입체적으로 이해하기 위한 입문용·교양용 서사로 읽어주시길 부탁드립니다.
보다 엄밀한 사실 확인과 해석은 반드시 관련 1차 사료와 최신 연구 성과를 함께 참고해 주셔야 합니다.
This essay traces Baekbeom Kim Gu’s life from his birth as a despised “remnant yangban” in Hwanghae, through failed exams, Donghak and the Chihapo killing, death sentence and prison “school,” escape and monkhood, to Protestant educator and activist.
It follows his Shanghai exile, role in the Provisional Government, Hanin Aegukdan and the Yoon Bong-gil and Lee Bong-chang attacks, huge Japanese bounty, wartime diplomacy, post-1945 fight for unification, his 1949 assassination, and his enduring dream of a free, culturally great Korea.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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